매일말씀나눔
2018. 2. 12 -14
말세가 되어 사랑이 식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때 사랑에 대해서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곳은 가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가정은 사랑이라는 토양에댜가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정은 가족들의 사랑으로 구성된 유기체입니다. 진부한 표현 같지만 가정은 사랑의 샘이 솟는 우물이요, 그 사랑을 마시며 해갈할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오아시스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가 되면 가정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 가정의 붕괴라는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가족 관계가 변질되는 사회 현상을 앞에 두고 우리가 어떤 낙관적인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이 사회에서 사랑의 수준을 측정해 볼 수 있는 온도계와 같습니다. 온도계는 기온에 매우 민감하고 가정은 사랑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느 정도 식어가고 있는가’ 혹은 “사랑이 있어 훈훈한가?” 하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얻으려면,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차례로 짚어 보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서로 비난하고 다투고,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여 자녀의 얼굴이 항상 어두우며,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대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부 사이에 서로 위해주고, 부모는 자녀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고 인도하며,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를 존경하고 감사해 하고 있는지 등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삶의 태도들을 생각해 보고 가정의 사랑의 온도를 한 번 체크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첫째 아들과 그리스도
매일말씀나눔
가장 비참한 가정은 아버지가 폭군으로 절대 권위를 휘두르고 사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가정은 그 분위기가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정의 가장은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정의 주인이심을 고백한 뒤 스스로 무릎을 꿇고 그분의 종이요 청지기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정은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고귀한 선물로 취급되고 그 가정의 구성원 하나 하나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역할을 할 것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하는 좋은 가장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서 존경하며 받들고 살아가고, 자녀들은 부모님을 공경하게 되는 것 역시 자신들의 주님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시십시오. 가정에 이런 주님의 가르침이 제일 우선시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주님으로 존중받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오늘부터라도 전 가족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의 가장 근본되는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면 그 가정은 질서가 잡히고 평안한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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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의 능력
양선의 능력 (히브리서 12:5-13)
사랑은 반드시 양선(선을 길러줌)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책망과 징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보고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양선을 생각하면 늘상 이병헌씨가 주연한 “올 인”의 실제 주인공인 차민수 바둑프로 4단이 생각납니다. 이분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76년 25살 때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열심히 일하였지만 마약도 복용하는 등 무절제하게 살았고 결국 1983년 첫째 부인으로부터 이혼통고를 받고 자녀 둘의 양육권과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넘겨주고 빈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볼까 하여 1984년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미 30년 간 과부로 지내셨지만 어머니는 재산과 가족을 잃어버리고 패배자로서 돌아온 이 천재 아들을 보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당에 무릎을 꿇고 5천불만 주시면 장사를 해서 일어나겠다고 애원하는 아들 차민수에게 냉정하게 호통쳤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약한 아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나가라” 결국 차민수씨는 한푼도 지원받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큰 누님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 누님이 친구와 통화를 하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이혼한 남동생이 함께 사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 좋지 않다” 그 말을 듣고 누님의 집에서 나가서 차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좌절과 슬픔이 오던지 며칠 동안을 하루 종일 울었는데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거기서 근성을 키워 결국 일어났고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부인을 만나 나는 고아라고 말한 뒤 재혼도 하였습니다. 어느날 아내로부터 어떤 여성이 찾아와 “어떤 중년의 여성이 오셔서 여기가 차민수씨 댁 맞습니까?” 라고 묻길래 “네 맞습니다” 하니 “참 다행이야. 참 다행이야” 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큰 누님이었습니다. 연락이 두절된 아들을 염려한 어머니의 지시로 전 미국을 숫소문한 뒤 남동생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때 차민수 씨의 마음에 “아 어머니께서 나를 사랑하셨구나!” 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랑을 깨달은 차민수씨는 어머니를 찾았고 90년대 말에 귀국하여 바둑계를 위해 여러가지 큰 일을 하면서 어머니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24에는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탕자에게 내린 인생채찍은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아버지는 멀리서 거지행색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얼른 달려가서 앉고 입을 맞추고는 자신이 더 이상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말씀드리나 그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고 종들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그 집에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평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자녀에게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아버지의 신앙에 이른 분들이 가지는 양선의 능력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복음
사도행전 10:36-43
윌리암 베커라는 분의 책, “언제나 구세주”에는 1800년대 말엽에 미국 동부의 중소규모의 기독교 대학을 방문한 라이트라는 성을 가진 미국 연합 형제단 감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여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이 저녁식사후에 자기가 가진 확신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여 세우실 천년왕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제 인간이 발명할 수있는 모든 것을 다 발명하였는데 주님께서 더 기다리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 공손하지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젊은 총장이 말을 하였습니다. “아직 인간이 발명할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감독은 더 무엇이 있는가 예를 들어보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 총장은 “앞으로 50년내에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때 비숍은 “말도 안되, 하늘을 나는 것은 오직 천사들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 감독은 아들 둘이 있었는 데 이때 이분의 아들들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고 드디어 1903년 세계최초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습니다. 이 분들이 그 유명한Orville and Wilbur Wright형제라고 합니다. 이들의 아버지인 밀튼 라이트 감독(1828-1917)은 자기 아들 둘이 대학총장의 예언을 실행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당신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소명을 다시 받고 오순절날 성령님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받은 그날 남자만 삼천명 얼마후에는 남자만 오천명을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권능을 가지고 역사를 하였는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베드로에게 접근하려고 하다가 못하면 다만 그 그림자라도 위에 지나갈 수 있어으면 하는 소원으로 병든 자를 데리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을 때만 해도 전혀 이런 일들을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그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돨 것이라는 말에 아마도 그는 소리쳤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런 축복을 받았고 어떻게 이런 확신에 이르게 되었는가? 오늘 본문에서 나온 고넬료의 집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는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그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비의 신앙과 그리스도(1)
매일말씀나눔
2018. 1. 29 -2.2
골로새서 4장 15 16절 말씀은 지나치기 쉽습니다. 특히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값진 보화가 숨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로서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라오디게아 지방에도 교회가 생겨나게 했으나, 라오디게아 지역의 성도는 불과 몇십 가정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볼 때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는 자연히 개인 집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눔바와 같이 “우리 가정에도 교회가 있어요”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 하시기 바랍니다. 그 귀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분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을 계기로 자신들의 가정에, 또 신앙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시면서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내에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할 만큼의 영적인 변화는 기도부터 시작된 순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마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7-18)
우리는 모두 가정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가정이 없었다면 우리가 태어날수도 없었을 것이고 직장일을 끝마치면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며 죽을 때에도 가정에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든지 그 존재 자체가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정과 신앙생활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용어들을 살펴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정의 분위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분위기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고 또 가정의 용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바로 가정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이 각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가정에서 경험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를 않아서 대학을 다닐 때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친이 연세가 드시자 자신이 봉양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고백하기를 ‘아버지’라는 호칭이 자신에게는 좋은 의미로 다가오지를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정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 가족 구성원 사이에 서로 위로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있으면 서로 짊어지고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교훈은 성경은 물론 동서고금에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가정의 도리를 교회에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인식해야 합니다. 가정을 모르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 가정을 바탕으로 할 때 신앙생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너희 집에 교회가 있느냐?”라고 묻는 말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가정에 교회가 없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런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 자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문제점으로 남아 있는 면입니다. 즉, 빌딩 교회가 가정 교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주일을 맞으면 우리 성도들은 교회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깊이 체험합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말씀 들으며 또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서로가 한 몸인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빌딩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이 지나면 이 빌딩 교회는 흩어집니다. 이 무리가 흩어져서 각자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전부 가정 교회로 분산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마디로 가정 교회의 부재 현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고통하고 있는 큰 원인은 가정 교회가 든든하게 서 있지 못한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눔바 그 여인의 집에 있는 교회’ 라는 말처럼 ‘— 성도, 그분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두가지 면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절대 권위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그 가정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가정에 가장 존귀한 분이요 제일먼저 경배를 받으실 분이요 권위 중의 권위가 되시는 것입니다. 실로 가족 모두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그 가족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가정안에 절대 권위가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권위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현대 가정은 붕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빌딩 교회를 공격하는것보다 가정 교회를 더욱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빌딩 교회에 아무리 많은 성도들이 모여도 마귀는 겁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주일이면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가 돌아가는 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확장해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으나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아무런 힘이 없는 군중으로 평가 절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겁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무엇을 겁내고 있을까요?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 특히 가정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요즈음 서구 사회에는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통계에 의하면 크리스천 부부의 경우에는 40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을 한다 합니다. 신자 부부와 불신자 부부를 비교하면 이혼하는 빈도 차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 가정 중에서도 가정에 교회가 있는 부부 즉, 집안에서 자주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리고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는 이혼율이 400쌍 가운데서 불과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연구 보고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붕괴하는 현대 가정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열 가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각 가정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수립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르고 건전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가정의 머리가 되셔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서로 간에도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님이시기에 주님을 경외함으로 서로 간에 복종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잃은 아들과 그리스도
매일말씀나눔
2018.1.22-26
진정한 부부애 진정한 가족애는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아내의 소원을 다 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인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 영적인 갈등이 계속되는 이상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꽃 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는 부인을 통해서 남편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인이 남편에게 삶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서 평화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야말로 남편이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인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남편이 부인을 따라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를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막내 며느리 되시는 어느 권사님은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면서 밤낮 생각하는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시어머니를 내 집에 모시자”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두려워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신주단지를 없애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화를 당해도 제가 당할 터이니 주십시오” 하고는 담대하게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 뒤 시어머니는 예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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