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라비 재커라이어스는 그의 저서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우리를 붙잡아 구원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라비는 여기서 히엔 팜 이라는 그리스도인이야기를 하고 있다. 라비는 1971년 남부 베트남에서 사역하던 중 만난 헌신된 청년 그리스도인 히엔 팜과 함께 여행을 하였다. 그들은 친한 친구가 되었으나 그해 라비는 베트남을 떠나 연락이 끊어졌고 그 후 17년이 지난 1988년에야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이 베트남은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베트남을 탈출했느냐고 히엔에게 물었다. 히엔은 “베트남이 공산화하자마자 체포당했고 미국을 도왔다는 죄로 교도소에 갇혔으며, 그동안 민주주의 사상과 기독교에 반대하도록 세뇌당하였다”라고 말했다. 영어로 쓰인 무엇도 읽을 수 없고 불어와 베트남어로 쓰인 공산주의 선전물만 주어졌다. 이 공격에 차츰 약해진 히엔은 믿음에 의심이 들었고 자신이 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일을 소망하는 일과 기도하기를 멈추기로 결심하였다. 바로 다음 날 화장실을 청소하던 그는 화장실 휴지로 가득 찬 쓰레기 통을 치우다가 영어로 쓰인 종이 한 장을 보았다. 재빨리 청소하고 그 종이를 주머니에 넣은 그는 방 안 사람들 모두가 잠들자 플래시를 사용해 그 종이를 읽었다. 종이 상단에는 로마서 8장이라고 쓰여 있었고 히엔은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 나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39). 알고 보니 교도관이 화장실 휴지로 성경을 사용했고, 하나님께서 이 방법으로 히엔에게 성경을 공급하셔서 가장 필요할 때 당신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셨다. 더욱이 악의 위협 가운데 있는 이에게 확신과 힘을 주는 가장 알맞은 말씀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자기 삶에서 기도하지 않기로 처음 결심한 그날에 용서를 구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다른 계획이 있으셨다라고 라비는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결국 여러 섭리가 일어난 뒤에 히엔은 출소했고 베트남을 떠나기로 계획했다. 그 후 어려운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자 4명, 자신을 포함한 54명 도합 58명은 배를 타고 바다를 빠져 나가는 동안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히엔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바다에서 죽이실 수 있다고 또 다시 의심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어졌다. 그리고, 함께 탈출한 공산주의자의 뛰어난 조종 능력으로 폭풍우에도 배는 무사히 태국에 도착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 속에서 우연이라고 불릴 수 있는 많은 사례를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인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고난받는 주의 종에 대한 채찍질

빌라도는 이미 주님이 죄가 없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요18:38),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는 요한복음 19:1절을 볼 때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맥은 이것이 단지 예수님을 놓으려는 책략이었음을 보여준다. 빌라도는 매질을 하여 유대인의 동정심을 사게 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십자가 형의 요구를 없애려고 하였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23:13-16(나나 헤롯이나 죄를 찾지 못했으므로 때려서 놓겠노라)과 병행구절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매질이 마가복음15:15(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다 – 마가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에 채찍질한 것이라고 진술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로마가 시행한 매질은 3가지 형태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다. “fustigatio – 도둑질과 같은 다소 가벼운 범죄에 행해지는 덜 심한 매질, “flagellation” – 더 심각한 범죄에 대한 잔인한 매질, “verberatio” – 가장 무서운 채찍질로서 십자가형을 포함한 항상 다른 처벌과 병행하여 주어진다. 이 세번째 채찍질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기둥에 묶은 뒤, 때리는 자가 탈진하거나 장교가 그만하라고 명령할 때까지 군인들이 여러가지 고문기구들로 때리는 것이다. 로마시민이나 군인들이 아닌 예수님 같은 죄수들에게 가장 잘 사용한 도구는 금속이나 뼈 혹은 납 조각들이 달린 가죽끈으로 된 채찍이었다. 이를 본 증언자들은 그런 잔인한 채찍질로 희생자들은 뼈와 내장이 노출될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어떤 형벌을 주었을까?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가장 무서운 “베르베라티오”였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19:1)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의 형벌인 “푸스티가티오”였다. 이는 유대인들을 유화시키고 예수님께 교훈을 주려는 의도였다. – 타당함.

누가와 요한의 시간 순서는 올바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의 선고가 내려진 후에 예수님이 두 번째 채찍질인 비참한 “verberatio”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막15:15). 이것은 죽음을 가속화시키고 도래한 특별한 안식일을 위해 담당 군인들이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오래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요19:31-33). 이것은 역시 왜 주님이 너무 약해져서 자신의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 가지 못하였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채찍질은 이미 7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것으로 누가 그리스도인지를 알려주는 표적이다.

새 계명

이번 주 화요일에 북카페에서 있는 동안 건설업에서 일하시는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외모는 60대로 보였습니다. 커피를 파냐고 묻길래 여기는 커피숍이 아니라 교회가 친교장소로 사용하는 곳이므로 커피는 팔 수 없고 그냥 드린다고 한 후 한 잔 내려 드렸습니다. 함께 앉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한 뒤 주보를 드리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십니까?” 하는 말을 하셔서, “네 그렇습니다” 하니 자신도 청년 때 교회를 다니면서 성전을 지은 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자신은 여자 복이 없다고 운을 떼시더니, 70년대에 삼부토건을 다니면서 해외에 7년 근무하는 동안 첫번째 부인이 재산을 전부 들러먹었다는 것입니다. 올해 연세가 70세라고 하시면서 두번 이혼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슬하에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는 말에 자녀도 쓸데 없고 이제는 인생이 황혼이라 죽은 뒤에 어디로 가실는지 그것이 문제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결국 주님 앞에 돌아오라는 말인데, 지금 아들이 밑에서 기다리니 나중에 좋은 인연을 맺자고 한 뒤 떠났습니다.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허무에 귀착합니다. 돈을 벌어도 결국 남는 것이 없고, 권력을 가져도 무상합니다. 명예 역시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 한 같습니다. 우리가 건강해야 무엇이든지 할 터인데 건강은 반드시 없어질 것이니 이것 참 허무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떨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세상은 사랑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뒤 이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은 바로 이 사랑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이 오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가 처리되고 나면, 하나가 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타락하여 우리만 아는 죄인들에게는 성령님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힘을 주시지 않는한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은 성령님의 약속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삶을 의탁하고 선을 행하면서 살자

(전도서 11: 5-6)

삼일 운동의 중심지였던 태화관은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곳이나 1908년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한일 합방 후인 1913년 자객이 두려워 집을 옮긴 후 요릿집으로 이름난 명월관이 이전해 왔다. 명월관 주인 안순환 씨는 태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8년부터 장사를 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점심 손님 30여명이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명월관 기생 이난향이 본 목격담이다. 하오 1시가 되었을 무렵 불교 승려와 교회 목사들이 대낮에 술파는 요릿집으로 몰려오는 이상한 장면이 시작되었다. 민족대표들이 본래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하기로 했으나 청년들과 학생들의 폭력 시위를 우려하여 거사 하루 전에 갑자기 선언식 장소를 손병희 자신의 단골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꾼 것이었다. 안순환은 태화관 후원 깊숙한 언덕에 위치한 태화정인 ‘별유천지 6호실’을 준비하였다. 여기서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3.1운동이 지나자 친일파로 욕을 먹고 있던 이완용은 매우 입장이 난감하여 태화관을 매물로 내놓았다. 그러나 3,000여평에 달하는 대지에 기와집만 16채가 있는 대궐 같은 저택을 사겠다는 사람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집을 사겠다는 작자가 나왔다. 그것도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남감리회 여선교부였다. 3.1운동 이후 남감리회 여선교부는 ‘여자관’을 설립해서 지역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회 봉사 및 복지 사업을 통해 복음을 전하려는 ‘개방 선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개성의 ‘고려여자관’, 원산의 ‘보혜여자관’, 춘천의 ‘춘천여자관’ 등이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에서도 이 같은 사업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찾고 있었다. 이런 때에 종로 한복판, ‘가우처 기념 예배당’ 바로 옆에 위치한 태화관이 매물로 나왔던 것이다. 이 지역 담당자 마이어즈는 집주인 이완용과 1년의 담판 끝에 1920년 12월 11일 20만원을 지급하고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매입 자금은 미국 남감리회 선교본부에서 보내준 ‘선교백주년기금’으로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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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참된 의미

전도서 2:4-11

“현대인의 생활 영성”의 저자 폴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프리카 동부의 신학교에서 3년 동안 가르쳤던 학생인 에스더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새 일자리는 마음에 드니?” 그녀는 원래 졸업과 동시에 목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여학생 삼백 명이 있는 기숙 학교의 기숙사감이라는 엄청나게 힘든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보수도 보잘 것 없으면서 하루 스물네 시간, 일주일 전체를 바쳐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폴 스티븐스는 일자리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에스더의 대답은 그녀의 깊은 영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녀는 “예수님 안에서 만족해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예수님을 위해서 견디고 있어요”라거나, “제가 선택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지만 ‘제가 져야 할 십자가’로 알고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의 참된 의미이자 믿음의 삶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칭찬하면서 한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 안에서 일한다는 말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노동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라도 사단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는 반면, 털실로 웃옷을 짜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은 그저 봉급을 받으며 일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서 노동의 참된 의미는 주님과 관련해서 이해를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떠나서는 노동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이사야 38:1-8 

 크리스천 심장학자 랜돌프 버드는 기도가 병의 치료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다그는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한 후에야 연구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깨닫게 되었다그는 컴퓨터를 통해 393명의 심장질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모아 첫 번째 그룹의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그러나 두 번째 그룹을 위해서는 그 누구도 기도하지 않도록 했다첫 번째 그룹을 위해 집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교파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랜돌프 버드 박사는 그들에게 환자들의 이름과 간단한 병 증세현재의 상태에 대해 말해 주고는 매일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했다.

  10개월이 지난 후 두 그룹은 큰 차이를 보였다중보 기도를 받은 첫 번째 그룹은 두 번째 그룹에 비해 5분의 1 정도 수준에 불과한 적은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폐에 물이 고인 경우도 두 번째 그룹에 비해 3분의 1 가량에 불과했으며인공 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경우도 없었다.

물론 두 번째 그룹에 비해 사망자의 수도 적었다믿음과 기도로 병을 치료받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윌리엄 놀란 박사는 그 결과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연구는 충분히 검증받을 것 같군그렇다면 우리 의사들은 처방 지시서에 ‘하루에 세 번 기도하시오’ 라고 적어야 되겠군” (기도 / W. B. 프리맨)

이 예화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수요일터예배

히브리서 9:27-28

클리블랜드의 어느 공연장에서 사업가들의 정오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때 어느 기독교 실업인 옆에 잘 알려진 사회주의자가 앉았습니다. 그는 토레이 박사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설교를 마치자 그 기독교 실업인은 사회주의자인 실업인에게 물었습니다. “사장님, 어떻게 당신이 이런 설교를 좋아하십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그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내게 이야기할 기회를 준다면 단 몇 분내에 그 논리를 뒤엎을 것입니다. ” 그러자 그 기독교 신자는 “사장님, 당신은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정치를 이야기 할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종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어떤 연사와도 정치를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나를 패배시킬 수는 없습니다.”라고 호언 장담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정오 직전 즉, 그 가 장담한 어제 그 시간에서 24시간이 흐르지 않아, 빅포 철도회사는 그를 도랑에 던져 넣어 죽였습니다. 아! 만약 우리가 우리와 사망과 영원 사이에 단 한 걸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경우 우리는 재빨리 우리의 허망한 자랑을 그쳤을 것입니다.(토레이 일러스트레이션- ”There is But a Step Between Me and Death”)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 삶과 죽음이 한걸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생을 가지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 뒤 반드시 죽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망에 삼켜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의 문제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날 우리는 전부 부활하여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양선의 능력

양선의 능력 (히브리서 12:5-13)

사랑은 반드시 양선(선을 길러줌)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책망과 징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보고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양선을 생각하면 늘상 이병헌씨가 주연한 “올 인”의 실제 주인공인 차민수 바둑프로 4단이 생각납니다. 이분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76년 25살 때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열심히 일하였지만 마약도 복용하는 등 무절제하게 살았고 결국 1983년 첫째 부인으로부터 이혼통고를 받고 자녀 둘의 양육권과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넘겨주고 빈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볼까 하여 1984년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미 30년 간 과부로 지내셨지만 어머니는 재산과 가족을 잃어버리고 패배자로서 돌아온 이 천재 아들을 보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당에 무릎을 꿇고 5천불만 주시면 장사를 해서 일어나겠다고 애원하는 아들 차민수에게 냉정하게 호통쳤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약한 아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장 나가라” 결국 차민수씨는 한푼도 지원받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큰 누님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 누님이 친구와 통화를 하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이혼한 남동생이 함께 사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 좋지 않다” 그 말을 듣고 누님의 집에서 나가서 차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좌절과 슬픔이 오던지 며칠 동안을 하루 종일 울었는데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거기서 근성을 키워 결국 일어났고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부인을 만나 나는 고아라고 말한 뒤 재혼도 하였습니다. 어느날 아내로부터 어떤 여성이 찾아와 “어떤 중년의 여성이 오셔서 여기가 차민수씨 댁 맞습니까?” 라고 묻길래 “네 맞습니다” 하니 “참 다행이야. 참 다행이야” 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큰 누님이었습니다. 연락이 두절된 아들을 염려한 어머니의 지시로 전 미국을 숫소문한 뒤 남동생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때 차민수 씨의 마음에 “아 어머니께서 나를 사랑하셨구나!” 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랑을 깨달은 차민수씨는 어머니를 찾았고 90년대 말에 귀국하여 바둑계를 위해 여러가지 큰 일을 하면서 어머니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24에는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탕자에게 내린 인생채찍은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아버지는 멀리서 거지행색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얼른 달려가서 앉고 입을 맞추고는 자신이 더 이상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말씀드리나 그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고 종들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그 집에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평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자녀에게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아버지의 신앙에 이른 분들이 가지는 양선의 능력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복음

사도행전 10:36-43

윌리암 베커라는 분의 책, “언제나 구세주”에는 1800년대 말엽에 미국 동부의 중소규모의 기독교 대학을 방문한 라이트라는 성을 가진 미국 연합 형제단 감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여러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이 저녁식사후에 자기가 가진 확신을 털어놓았습니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여 세우실 천년왕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제 인간이 발명할 수있는 모든 것을 다 발명하였는데 주님께서 더 기다리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 공손하지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젊은 총장이 말을 하였습니다. “아직 인간이 발명할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감독은 더 무엇이 있는가 예를 들어보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 총장은 “앞으로 50년내에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때 비숍은 “말도 안되, 하늘을 나는 것은 오직 천사들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 감독은 아들 둘이 있었는 데 이때 이분의 아들들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고 드디어 1903년 세계최초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습니다. 이 분들이 그 유명한Orville and Wilbur Wright형제라고 합니다. 이들의 아버지인 밀튼 라이트 감독(1828-1917)은 자기 아들 둘이 대학총장의 예언을 실행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당신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소명을 다시 받고 오순절날 성령님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받은 그날 남자만 삼천명 얼마후에는 남자만 오천명을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권능을 가지고 역사를 하였는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베드로에게 접근하려고 하다가 못하면 다만 그 그림자라도 위에 지나갈 수 있어으면 하는 소원으로 병든 자를 데리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을 때만 해도 전혀 이런 일들을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그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돨 것이라는 말에 아마도 그는 소리쳤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런 축복을 받았고 어떻게 이런 확신에 이르게 되었는가? 오늘 본문에서 나온 고넬료의 집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는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그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수요일터예배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닥터 홀이1928년 10월 해주 요양병원을 세우고 진료를 하던 어느날 진찰실에서 환자를 치료하는데 뜻박의 방문객이 찾아 왔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처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요양원 설립을 반대했고 닥터 홀의 선교 사업을 해주의 적이라 생각했던 그가 지금 닥터 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홀 선생님, 우리 아들 때문에 왔습니다.” 시장은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아들 때문에요?” 입술이 타는 듯한 그에게 홀 박사는 결려하듯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결핵에 걸리지 않았나 해서요. 진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제 생각대로 병에 걸렸다면 여기에 입원시켜 치료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척 어색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시장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엿보였습니다. “데리고 오십시오. 여기에는 이미 자리가 꽉 찼지만 아드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 소년은 과연 아버지가 염려한 대로 정말 결핵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초기 상태여서 치료의 효과는 상당히 빨랐고, 병세는 호전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통원할 수 있도록 퇴원시켰습니다. 소년이 집으로 가서 정양하고 있는 동안 닥터 홀은 계속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완치될 때까지 치료해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옛 감정을 잊고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닥터 홀이 마지막 진료를 위해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고마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후 시장과 시의원들은 요양원 의사들과 함께 인근 절에서 야유회를 열자고 초청장을 보냈으나 조선인 친구들은 우리를 그처럼 적대시하던 사람들이니 초청을 거절하라고 닥터 홀에게 충고하였습니다. 닥터 홀은 이 초청장을 보낸 의도가 그들의 마음이 달라진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고 초청에 응하니 그들은 동포들에게 지대한 은혜를 베풀어주게 된 요양원의 건립 때 자기가 방해했던 점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시장의 약속은 잘 이행되어 요양원은 길을 내는 허가 등을 받는데 많은 도움을 받아 해주 요양원은 계속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과 같이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다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 가운데서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