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0/24-28)

잠언20: 5절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새번역)

본절의 ‘사람’은 현자, 보통사람, 미련한 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물론 도덕과 경건의 요소도 그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똑똑한 바보는, 지식, 재물,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자입니다. 만약, 현자라면, 그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아 아무도 모르지만, 다른 현자는 그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왕후가 죽어 새 왕후를 뽑아야 하였지만 황제는 전혀 속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대신이 반지를 여러 개 만들되 그 중 하나를 특히 아름답게 장식하여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반지의 주인공을 찾아 황후로 천거한 고사가 있습니다. 황제나 신하 모두 현명하였습니다. 만약, ‘보통사람’의 경우 자신조차 모를 수 있지만, 현자는 그 의중을 길어내어 조언을 주거나 바른 처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두 남녀가 사귀고 있었습니다. 자매는 형제의 결혼의사 여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지혜로운 제안을 하여 형제의 마음속의 생각을 길어낸 뒤, 그를 떠났습니다. 그 자매는 그후 좋은 형제를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만약, 미련한 자(악인)라면, 그의 악한 생각은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간파합니다. 두 여자가 각자 갓난아이의 어미라고 다투자, 솔로몬 왕은 칼로 그 아이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두 사람의 생각을 드러낸 재판은 유명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이 제일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물론 지혜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고, 또 현자의 조언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잠언21:30,새번역).

잠언20: 6절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말하기는 쉽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입니다. 흔히들 자신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인 것을 자랑하나 막상 일이 터지면 그들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전7:28), 예나 지금이나 희귀합니다. 인간의 연약함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에서 전술핵 사용도 가능하다고 언급하자, 나토 회원국 사이에 전술핵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작은 전술핵도 한 발에 탱크 30대를 궤멸시키는 위력 때문에, 유럽에 배치한 전술핵의 관리는 미국(핵 자체 관리)과 나토(운반할 전투기 관리)로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40년 전에, 유럽은 미국이 임의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을 지켜줄 의지가 미국에게 있는가를 의심합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유럽과 전술핵 투하 훈련을 매년 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안심시키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한편, ‘인자’란 ‘헷세드’로서 언약관계에서 나오는 ‘변함없는 사랑’을 지칭합니다. 예컨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후,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는 하셨지만, 생수와 만나를 주시는 등 이들을 신실하게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에게 늘 신실한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위선과 연약함을 파악할 줄 알고, 바위 같이 든든한 친구를 부지런히 찾아 인생의 길을 함께 가라고 교훈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잠언20:7,새번역)

잠언20: 7절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새번역)

7절은 6절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인자)’을 보여줄 자는,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입니다. 7절의 전, 후단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전단에서 ‘의인’이란,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이웃에게 변함없는 친절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의’란 주님을 경외하면서(하나님 사랑)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것이 없는 삶(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의인’은 순전(결백)합니다. 그 대표자는 욥입니다(욥1:1). 물론 의만 행하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롬3:9-20). 그러나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이란, 결코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욥9:1-2), 주님(야훼)께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고 분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윗처럼 죄를 지적받으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후단은 그들의 후손이 받는 축복을 언급합니다. 솔로몬이 의인의 일생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 후손이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의인이 후손에게 미친 의로운 유산과 영향력에 기인합니다. 의인은 후손들에게 영적유산(행복한 기억은 축복임)과 실질적인 유산(지혜, 명예 등) 모두를 남기면서(잠13:22), 그들의 삶의 모델이 됩니다. 그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라는 가훈을 마음에 새기고, 겸손과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 악에 떠나게 됩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주십니다(잠22:4). 이것이 의인의 유산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처럼, 의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좋은 롤 모델 자체입니다.”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시편119:9-16절 ‘베트(בְּ)’ 연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알레프’ 연은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이, ‘베트’ 연에서는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라는 수사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실제적인 길은 청년의 열망을 “주님의 말씀(다바르- 말의 내용에 초점)”과 주님 자신(10,12)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의 삶의 순결은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삶의 여부는, 의지의 방향, 마음과 기억의 내용, 입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들, 생각의 주제 등에 달려 있습니다. 한 마디로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많은 재물을 가진 것처럼 즐거워합니다(14). 이것이 시인의 경건의 비결입니다. 그에게는 ‘주의 말씀’이 재산이자 보물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주의 말씀에 향하게 되고, 그런 보물을 주신 주님께 일편단심인 동시에(10,14), 당연히 ‘주님의 말씀(이므라- 말의 소리에 초점)’을 소중히 간직합니다(11). 더 나아가 주의 모든 규례(미쉬파트- 재판 규범)를 입술로 선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법도(픽쿠드-교훈)를 늘 묵상하면서(13,15) 보물의 가치를 음미하고, 주의 증거들의 도(데레크- 길)와 율례들(훅카- 석비에 새겨진 확립된 규정)을 보물을 보듯이 즐거워 합니다(14,16). 시인은 부자가 재산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합니다(16). 그러나, 주님께서 도우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만 열매를 맺기에 시인은 또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찬송을 받으실 주님, 주님의 율례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12)

시편119:17-24절 – ‘기멜(גּ)’ 연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8)


‘기멜’ 연은 두 절씩 연결됩니다. 17-18(순종을 가능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은 21-22(불순종은 벌하시고 순종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뒷받침되고, 19-20(세상의 나그네로서 시인)은 23-24(비방의 대상으로서 시인)에 의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도 거룩한 삶은 쉽지 않습니다(9). 여기에 환경조차 호의적이지 않는다면(비방 등)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23).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애를 쓰는 성도들에게는 낯선 곳이며(19), 나그네처럼 배척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21).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기멜’ 연에 시인의 비결이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께 ‘필요한 것을 충분히 공급해 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17). 이중, “주의 율법(토라-가르침)”에 숨겨진 ‘놀라운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18). ‘주의 가르침’은 세상이 갖지 못한 우리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마7:12-황금률). 성경말씀 속에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은 물론, 그분의 구원의 행적들(출애굽, 부활의 기적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과거의 사건이고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동일한 경이와 믿음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시면 그 생생한 의미를 깨닫고 험한 세상을 이길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재산입니다. “주님의 증거가 나에게 기쁨을 주며, 주님의 교훈이 나의 스승이 됩니다.” (시편119:24,새번역)

매일묵상(2022/10/17-21)

잠언20:2절
“왕의 노여움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면 목숨을 잃는다.”(새번역)

술취한 자의 떠들석한 모습을 바보들의 목록(19:24-20:1)에 포함시킨 솔로몬은, 이제 그 바보를 왕의 손에 넘겨놓았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만약 누군가 왕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면 치명적이고도 즉각적인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사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누구나 목격할 수 있는 위험한 동물로서, 사자를 만난다는 것은 죽은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더구나 부르짖음은 사자가 먹이를 잡았을 때 하는 승리의 외침으로, 그 누구도 사자의 손에서 먹이를 구해내올 수 없습니다. 왕을 격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와 같아, 만일 그 앞에 불경한 태도를 보이거나, 맡은 일에 신실치 못하다면 목숨이 위태하고,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잠언은 19:12절(“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에서 같은 교훈을 주었으나, 후단이 다릅니다. 19:12절은 위험과 혜택 양쪽을 다루나, 본절에서는 위험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방탕하다가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 각자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인이 혼인 집을 가려고 출타하였을 때,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술먹고,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이르러 엄히 벌하신다는 교훈입니다(눅12:41-48).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는 말씀 자체여야 할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잠언20:3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다툰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을 주제로 합니다. 먼저, 바보들의 목록을 열거하고(19:24-20:1),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들을 교정하고 벌하는 자로 왕을 등장시킵니다(20:2-11). 그들은 게으른 자, 거만한 자, 불효막심한 자, 교훈에서 돌이키는 자, 악한 증인, 심판을 비웃는 오만한 자, 술취한 자, 다투는 자 등입니다. 본절의 전단은 다툼을 삼갈 경우 ‘지혜로운 자’라는 사회적 존경을 받지만, 후단은 모든 바보는 다툼을 시작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왕이 미련한 자들을 노여워하고 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결과가 다툼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분쟁을 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쟁을 평화롭게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사람이 왜 분쟁을 시작하고, 거기에 가담하겠습니까? 자존심(교만)을 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자존심을 내세우는 행동에서 다툼이 시작되고, 그 사람의 덕망은 실추되고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명예로 가는 길은 자신의 명예를 방어하지 않는 길이다”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수자, 전쟁 시작 전에 요청받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이 상하여 크게 다투었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인 전과를,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는 비유와 함께 말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풀고 다툼을 피하였습니다 (삿8장). 모욕을 참고 겸손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잠언의 지혜자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  

잠언20:4절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게으른 자’는 바보들의 목록 중 첫 번째(19:24)이며, 그에 대한 벌은 ‘사회적 불명예’(10:5)와 ‘빈곤’ 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늦가을(10월-3월)이 밭을 갈 시기였습니다. 게셀(솔로몬 왕의 요새)의 달력비문(BC10세기) 내용입니다: “두 달 모으기(올리브), 두 달 파종(곡물-보리와 밀), 두 달 늦게 파종(콩과 채소), 한 달 괭이질(건초를 위함), 한 달 보리 수확, 한 달 수확(밀) 그리고 (곡식)의 무게를 재면서 포도를 수확하는 두 달, 여름 과일을 거두는 한 달.” 그러므로 늦 가을의 두 달은 곡식의 씨를 뿌려야 하고, 이는 단단한 밭을 괭이로 갈 것을 요구하나, 밭 가는 일은 비가 내려 땅이 부드러워져야 가능합니다(이른 비). 만약 그 시기를 놓치면 그 해 농사는 망친 것이며, 6개월 후의 추수의 때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장의 빈곤을 넘어 다음 해를 위한 씨조차 없는 가난한 자로 전락하여, 여기 저기 도움을 요청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8). 이를 통해  인간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은 하나님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 명령을 무시하여, 부지런한 부자는 마음을 낮추지 못해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경건한 부지런함’의 덕목은 어릴 때부터 마음과 몸에 심겨야 하기에, “청년의 때란, 도덕적 지혜가 뿌리내리기 위해 인격의 모판을 준비할 시기입니다” (말빔).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잠언13:4,새번역)

시편119: 1,2절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새번역)

시편 중 가장 긴 시로서(176절), 주제는 ‘주님(야훼)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서 있다는 고백과 기도”입니다. 시인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22개 단락으로, 각 단락은 두 구절로 이루어진 8개의 행(이행연구, 二行聯句, couplets)으로 구성하여 이 주제를 22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9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다바르, 이므라, 미쉬파트, 에다, 호크, 토라, 미스바, 픽쿠드, 데렉 – 단락의 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문학적 탁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며, 각 단락은 주의 깊게 작성된 가르침이자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선생님은 주님 자신이지, 인간 멘토가 아닙니다(102). 그러므로 이 시는 ‘토라(모세 오경을 통한 야훼의 가르침) 시’이지, ‘지혜의 시’는 아니며, 묵상의 분위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곳에, 섬김은 완전한 자유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일탈하는 순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우리 생활양식을 경건한 토대 위에서 지어올리도록 하여 죄의 쇠사슬을 부수게 하시고(105,133), 또한 우리 보다도 더 위대한 지혜를 만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71). 앞으로 시를 한 단락 씩 묵상하겠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새번역)

시편119: 1-8절 – 알레프(אַ)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1-8절의 첫단어는 ‘아쉬레-복이 있다’입니다. ‘알레프(אַ)‘로 시작되며, 통상 ‘복’으로 번역된 ‘에쉐르’의 복수형입니다. ‘에쉐르’는 ‘곧다’ ‘똑바로 가다’란 뜻과 ‘번영하다, 성공하다’란 파생적인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쉬레’는 바른 길을 걷기에, 누리게 되는 번영과 성공의 삶 그 자체를 나타내며, 과정과 결과가 다 포함됩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고, 그 열쇠는 ‘여호와의 율법(토라- 가르침)’에 대한 순종입니다. 일편단심 그분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은 곱절로 ‘복이 있습니다’(1-3).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4). 그러므로, 주님의 율례(호크-석비에 새긴 변함없는 법령)를 행하게 도와달라고 외친 시인의 기도(5)는 첫연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주의 모든 계명(미추와- 명령을 뜻함)’에 주의하게 되어(6), 수치를 당하지 않고, 배울 수 있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7).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주의할 것은, ‘여호와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시인에게 그것은 모세율법(의식법, 제사법, 도덕법 포함)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가르침)’입니다 (고전9:21). 유대인들이 부딪힌 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롬9:32). 그들의 우상은 모세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시인에게는 올바른 순종이, 나중에는 오히려 불순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토라)’에 대한 문자적 순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알아야하며, 그분은 아들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요5:23).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편119:8)

매일묵상(2022/10/10-14)

잠언 19:28절
“악한 증인은 정의를 비웃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통째로 삼킨다”(새번역)

9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입니다. 본 잠언은 잘못 양육시킨 자녀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법정에서 악한 증인으로까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도대체 없고 악한 동기로 사법 정의를 비웃으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모세율법의 ‘동해보복’ 규정(출21:22-25; 레24:16-22)은, 악한 증인을 벌할 때도 또 반복됩니다(신19: 15-21). 아간(황금과 옷), 게하시(은과 옷),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경건한 신자 명예)는 탐욕 때문에 거짓말을 하였으며, 그 벌로 돌에 맞아 죽고(아간), 문둥병자(게하시)가 되고,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생명을 거두어가셨습니다(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러나, 거짓 증인들은 그것을 넘어서, 법정에서 의인을 죽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합 왕 때 나봇의 포도원 사건, 우리 주님에 대한 재판, 스데반의 재판의 경우입니다. 이 시대는 증인의 진술이 재판을 결정지었기에, 모세율법은 반드시 두 증인 이상으로부터 진술을 듣고 재판하도록 하였습니다(신19:15).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도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모두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그 선한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 규정만 충족하였지, 목적 달성을 위해 거짓된 증인들을 내세워 “죄악을 통째로 삼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요8:44).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고백이 고백이 아니고, 진실하고 선한 열매가 맺어져야만 참된 제자입니다 (눅8:15; 롬2:28,29).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 (잠언19:29,새번역).

잠언 19:29절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새번역)

본 잠언은 28절의 사법 정의를 농단하는 악한 증인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벌이 준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악한 증인’은 대표적인 오만한 사람 중 하나로서, 정의와 심판을 비웃지만, 오만한 사람은 곧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서 심판과 벌을 준비하고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시14:1). 하나님은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합당한 벌을 내리셔야 당신의 영원한 공의와 질서를 확립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들은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길로 행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에 대하여 질책을 받으면 통렬히 여기고 마음에 새겨 지혜를 더합니다. 단순하여 잘 속아넘어가는 자녀들은 벌(매)을 받으면 그때야 지혜를 얻어 돌이킵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아주 미련하여 100대의 매를 맞아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19:25). 이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어두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마25:41;유13). H.G. 웰즈는 『타임머신』, 『투명인간』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를 넘어 성경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한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 소망은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중 런던이 폭격받는 동안, 그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폭탄이 아니라 어두움이다. 나는 일생 그 어두움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고 옆에 있는 보웬 여사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웰즈는 그 어두움만 두려워하였지, 빛되신 주님에게 갈 지혜는 없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잠언20:1절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술취한 자의 모습은 잘못 양육된 자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는 정신이 나가서, 절제도 없으며, 미친 것과 다름없어 분별의 한계와, 도덕 그리고 예절의 경계를 깨드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독주는 지혜와 삶을 파괴하는 악당과 다름없기에 자녀들을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으로, 잠언은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3:10).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하셨고,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포도주를 가지고 영접하였습니다 (창14:18).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지만, 남용하면 안 되며, 상황에 따라서는 그 선한 것들이 혜택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포도주 역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출발선은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 사에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간의 지혜가 언제나 그 상황에 대한 최종 판결은 아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인간의 지성을 활용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인간 관계가 정의만큼이나 고려되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전7:16). 그래서 르무엘 왕의 모친은 포도주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괴로운 자에게 주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도록 하라고 가르칩니다 (잠언31:6,7). 물론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전도서7:18,새번역).     

시편118:22,23절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본 시의 ‘돌’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돌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는 구원과 심판 모두 되셨습니다 (벧전2:6-8;마21:42-44;롬9:32-33). 이스라엘의 공공건축물은 상부구조와 기초에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건축자들은 여러 돌 중 적합한 돌을 고른 뒤, 필요 없는 돌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공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돌이 후에는 꼭 필요한 돌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아주 중요한 자리에 놓여 건물의 두 벽을 결합시키고 상부구조를 올리는 기초가 된 건축현장의 사례가 구원과 심판이라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작고, 노예 처치에 있는 쓸모 없는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건축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약속이라는 특권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으로 가득차, 불순종하고 끝내는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쓸모 없는 돌로서 버렸습니다(행4:10-11).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켜 구원의 주춧돌로 삼으시고, 모세율법을 폐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 위에 성전이 지어지게 하셨습니다 (엡2:11-22). 이같이 ‘버린 돌’이 이방인을 위해서는 ‘구원의 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심판의 돌’로 변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은 구원 받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8).

시편118:25,26절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새번역)

시의 배경은 축제(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24)로서, 필시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장막절 중 하나입니다. 이미 성전 안에 무리는 왕과 함께 오고 있는 다른 무리를 영접하면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 년 동안 ‘상징과 그림자들’(히10:1)로서 행하였던 그 시편이 갑자기 실재가 되었습니다 AD30년,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구원의 능하신 표적들을 본 수 많은 군중들은 주님을 영접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마21:9)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외친 ‘호산나’는 원래 히브리어 ‘호쉬아나’로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의미로서, 메시야에 대한 노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심으로 본 시편의 성취를 언급하셨습니다 (눅37-40).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슥9:9;마21:4,5). 이어지는 구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27)는 십자가 위에 밧줄로 매어진 주님의 팔들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제 구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고전5:7).

매일묵상(2022/10/3-7)

잠언 19:25절
“오만한 사람을 치면, 어수룩한 사람도 깨닫는다. 명철한 사람을 꾸짖으면, 그가 지식을 얻는다.” (새번역)


‘오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쉬’로서 마음이 교만하고 고칠수 없으며, 모든 책망을 거부하는 자를 지칭합니다. 술에 잔뜩 취해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주정을 부리는 사람과 같이, 그는 교만과 자아도취에 잔뜩 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25절의 ‘오만한 사람’은 그 정도가 낮아, 교훈을 받아들이는 어수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1-9장의 교훈의 대상인 ‘어리석은 자녀’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세상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잘 속아넘아가는 자녀들’이라, 징계를 받으면 지혜를 얻어 돌이킬 수 있습니다. 본 잠언의 ‘오만한 사람’ 역시, 매 백대를 맞아도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정도의 거만한 자는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미성숙 때문에 마음을 높이게 된 것이라서, 벌을 받으면 바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상자가 미성숙으로 인한 오만한 자냐, 아니면 악한 자로 말할 정도의 오만함(9:7)이냐를 분별하여 합당한 훈육을 해야 합니다. 이같이 교육 혹은 훈계란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작동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로써, 바울 역시 이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이에 반하여, 후단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길로 접어든 사람을 말하며, 그런 사람은 계속하여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깨닫고 지식을 더합니다.“더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쓰여 있습니다.” (약4:6,현대인의성경).

잠언 19:26절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내는 자식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다.” (새번역)


25절의 ‘오만한 사람’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받지 못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26), 교훈을 듣지 않고(27),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28) 3 가지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 전형적 행동이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낸다’는 본잠언의 묘사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이 세상에 세운 질서와 권위의 가장 근본을 이룹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중종, 민재인)은, ‘효는 백행의 근본’임을 적어 놓았습니다. 출간 동기는 그 당시 풍속이 병들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여 금수와 가깝게 됨을 애통하게 여긴 마음입니다. 물론 이 책은 유교 질서인 임금, 신하, 부모, 자녀, 부부 등 다섯 관계의 도리(오륜)를 가르치면서,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동몽선습’이 가르칠 수 없는 부모권위의 유래와 한계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도 주 안에서 해야 하며, 그 계명을 어길 경우 섭리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징벌하십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성장한 자녀들은,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듣지만, 성장하여 부모가 늙고 힘 없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오만해집니다. 그들은 힘 없는 늙은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지경까지 타락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필연이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지혜와 용기를 위해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엡6:4,새번역)     

잠언 19: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27절을 직역하면, “내 아들아 훈계(교훈)듣는 것을 중단하라, 그러면 너는 지식의 말씀들에서 떠나 방황할 것이다”, 이지만, 공동번역과 같이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을 등지려거든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좋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 교훈을 듣고 삶을 바꾸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은 일생을 거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제자들이 더 이상의 교훈이 필요없는 지점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본 잠언의 교훈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장소이기에, 지혜와 지식의 추구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만약, 귀찮다고 교훈에 등을 돌리면(27a), 지혜와 지식에서 떠나게 되고(27b), 부모에게조차 범죄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26). 정상적인 경우라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의 인간성은 두 번 재고할 여지도 없이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반역한 아담과 하와의 품행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효막심한 행동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표상으로 볼 수 있는 부모에게 불순종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본 잠언을 쓴 솔로몬조차 자신의 교훈에 주의하기를 그친 순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에서 떠났고,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성전 바로 앞 감람산에 산당들을 지어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참 어리석은 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잠언1:7,새번역).



시편117:1절
“너희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칭송하여라.”(새번역)


이 시는 단 두 절이지만, 믿음은 위대하고, 시야는 전 세계에 미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메시야임을 전하는 근거로서 이 시를 인용하였으며(롬15:11), 그 완전한 성취를 요한계시록에서 미리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계7:9,새번역). 시인은 1절에서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라고 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의 핵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천하 만민의 복의 통로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 규정은 이 언약을 반영하여 처음부터 이방인을 언약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출12:48-49). 490년 후 드린 솔로몬 성전 건축 기도에서도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왕상8:41-43). 또한 홍해를 가르신 것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한 표적들은 동시에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표적이었음을 시편 기자들은 선언하였습니다(예:96-98편).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입니다(2). 그것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심으로 명백해졌습니다 (롬5:8).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기쁨의 외침을 드리게 됩니다(2).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주님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할렐루야” (시편117:2,새번역).

시편118:1절 – 호산나!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새번역)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불려진, ‘애굽의 할렐’은 본 시편이 마지막 시입니다. 시를 읽어가면 성전으로 가서 예배드리려는 백성들의 행진이 있고, 그 중심에 그들을 이끄는 한 예배자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예배의 목적은 시편116편과 같이 개인적 구원 때문에 감사제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에게 합당한 승리의 찬양을 올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배의식(1-4), 개인적(5-14), 대중적(15f.)인 목소리들; 그리고 중심 인물과 그의 행렬이 예루살렘 성문에 접근하고 입성을 요구하고(19), 응답과 찬사를 받고(20, 26), 마침내 제단에서 순례를 마치고 있습니다(27). 시의 구조입니다.

     A  감사로의 초청(1-4)
         B 감사의 이유: 구원(5-21)
     A′ 감사 의식의 노래(22-29) – 호산나  이 시를 처음으로 노래한 사람들은 애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긴 역사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끝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마지막 승리의 입성과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내용을 전하는 복음서를 읽으면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의 메아리가 본 시편의 전체에 걸쳐 울려퍼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특히 22절이하). 즉 본 시편의 절정은 신약입니다. 출애굽과 성전이 예표한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를 자세히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고, 그 기록이 복음서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

매일묵상(2022/09/26-30)

잠언 19:22절
“사람이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가난함이 낫다.”(현대인의성경)


본절은 “야훼 잠언들”인 21절과 23절 사이에 놓여 있어, 자녀들로 하여금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도록 교훈합니다. 부자는 재물에는 높은 가치를, 사람, 특히 가난한 자에게는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사람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바란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헷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언약적 관계’의 핵심을 묘사합니다. ‘언약적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언급할 수 있으나, 문맥상 여기서는 후자입니다.  후단은 재물보다는 인격의 온전함(고결함, 정직)이 낫기에, 인격적 고결함을 잃어버릴 바에는 가난(재물의 상실)을 선택하라는 권고입니다. 물론, 그것이 부를 비하한다는 말은 아니며, 오직 재물과 부의 가치는 상대적임을 밝혀줍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준수되어야 할 절대적 가치입니다. 후단을 전단에 비추어 생각하면, ‘헷세드-언약적 사랑’이 내포하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 사이에 신실하라는 교훈입니다. ‘헷세드’는 많은 미덕을 내포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람 사이에는 ‘신실하라‘ 혹은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며, 여기서의 주된 의미입니다.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거짓말은 신뢰를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리는 행동으로, 잠언은 이를 상당히 경계합니다((6:16–19; 13:5; 14:5; 25:18).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잠언 19:23절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새번역)


본절은 16절에서 시작한 “궁핍한 자에게 친절하라”는 주제를 다루는 단락(19:16-22)의 결론입니다. 16절에서 죽지 않고 생명에 이르기 위해 ‘부모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하는데, 23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라’고 교훈함으로써, 부모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표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으로부터 자녀들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계명에 머무르면 성경이 약속한 모든 축복을 다 받습니다. 계명 가운데 머무르는 자를 보시고 축복을 주시고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는 분은 결국 우리 주님입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주님이 정하신 길은 이웃 사랑의 삶으로,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게 되며, 술은 물론 도덕적으로 유해한 환경에는 가지 않기 때문에 제도적인 보호장치가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위험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도 성경은 이 가르침을 간직한 제자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결코 주리게 되거나 재앙에 빠지지 않고, 만족스럽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실례를 증언합니다. 고대에 여행은 위험하였습니다. 짐승도 많았지만, 도적 떼나 강도 그리고 불량한 사람들의 문제는 더 컸습니다. 좋은 예가, 창세기18장에서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를 해하려고 모여든 소돔사람들과 사사기 19장에서 기브아를 지나는 레위인의 첩을 빼앗고 그를 죽이려고 한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로운 롯을 불과 유황의 심판에서 건져주셨으나, 첩을 둔 레위인은 재앙에서 건져주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4:9).

잠언19:24절
“게으른 사람은 밥그릇에 손을 대고서도, 입에 떠 넣기를 귀찮아한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새 단락으로 주제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입니다. 19:24-20:1절과 20:2-11절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전자는 교정이나 벌이 필요한 바보들의 목록을 나열하고, 후자는 바보들과 이들을 다스리는 의로운 왕에 관한 것입니다. 24절은 게으른 자의 행태를 아주 냉소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먹기 위해 그릇에 손을 넣을 수 있는 만큼 충분한 힘이 있지만, 배고픔조차도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일을 끝내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즉, 게으른 자는 기회가 있음에도 게으름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줍니다. 게으른 자는 게으르기 때문에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시편115:16절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새번역)

시편115편 중 특히 16절은 세상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가 축복, 번성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15b). 주님(야훼)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통치에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 손으로 만든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3-8)? 시인은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자유를 노래하다가, 16절에 이르러 창조물의 일부인 “땅”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뜻을 밝힙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전체를 말합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짐승, 식물, 흙, 나무, 해, 달, 별 등을 그 창조 목적에 맞도록 관리할 권리와 의무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전에 주어진 인간 창조를 위한 고유 목적 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수단이 바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인간 자신의 필요를 채우도록 계획하셨기에,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그분이 자신들의 아버지됨을 인식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따뜻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행14:17,새번역)        

시편116:10절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번역)

116편은 경건하고 밝게 빛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질병, 모함 등으로 사망에 처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3,8,10). 어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11), 시인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4).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은 순진한 시인을 지키셨고 그 어려움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시를 읽으면, 시인의 경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비록 쓰라린 추억이었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며, 신실하시고 위대하신 분임을 체험하는 계기였습니다. 또한 그런 긴박하였던 상황에서 구출된 후에, 시인은 자신이 누리는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히 간직되어야 하는지를 노래합니다(9). 시인의 감사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에는 영생의 축복이 포함되어야 합니다(딤후4:17-18).  시의 구조입니다.
     A  구원에 대한 감사(1-3)
         B 구원자 하나님과 신실하신 성품(4-6a)
     A′  구원에 대한 감사(6b-7)
         B′ 구원자 하나님과 신실한 믿음(8-13)
     A″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서원(14-19)

주목할 것은, 본 감사의 시는 정열적인 사랑의 노래와 같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해 기록된 성경의 진리들을 – 신실하심, 능력, 지혜 등 – 시인이 여실히 체험하여 살아움직이는 현실이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시편116:9,새번역)

매일묵상(2022/09/19-23)

잠언19:19절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하여 준다고 해도 그 때뿐, 구하여 줄 일이 또 생길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주님에게 벌받는 사람을, 아들로부터(18) 성격이 불 같은 자로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잠언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26:4), 습관적으로 맹렬히 노하는 사람은 돕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혜를 줍니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은 교만한 바보의 특징 중 하나로서, 훈계없이 양육된 자녀의 미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의 대상은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입니다. 이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습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도와준다고 고칠 수는 없으며, 벌을 받아 보아야, 비로서 행실을 바로잡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을 동정하는 것도 좋으나 그런 동정이 지혜로운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지혜 안에서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빌1:9-11). 미국에서는 아동 학대와 관련한 처벌이 엄격하기에 공개적으로 아이를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몰에서 너무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자, 그 아이의 어머니는 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엉덩이를 꽉 물어 나쁜 버릇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부모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이 확립하신 ‘벌과 치료’라는 도덕 질서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섵부르게 뛰어들었다가는, 그의 자녀들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건강한 성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한편, 자녀들이 훈계를 받아들여야 비로서 의미가 있기에, 잠언은 20절에서 교훈의 대상을 아들로 바꾸었습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잠언19:20)

잠언19:20절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지혜롭게 된다”(새번역)

지혜자는 하룻밤에 혹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는 학식과 인품 갖추어진 스승이나, 그 분야에 지혜로운 자에게 배우고, 교정받아야만 합니다. 즉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던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 재판업무를 위임하여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학문, 인격, 신앙 모두 같습니다. 학문을 위해 한석봉의 어머니는 10년을 목표로 유학을 보냈으나, 3년만에 돌아온 아들과 세기의 대결을 펼칩니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도 고른 두께로 떡을 썰은 뒤 엉망인 글씨를 보인 석봉을 야단쳐 돌려보냅니다. 석봉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절치부심, 결국 남은 7년을 채워 조선의 명필이 되었습니다. 인격의 경우입니다.  퇴계의 제자 이함형은 전주에서 안동까지 와서 유학하고 돌아갈 때 부부간 불화를 호소하였습니다. 퇴계는 “난 두 번 장가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러나 부부간의 문제는 크게 보면 모두 남편에게 달려 있다”는 편지를 주었습니다. 이함형은 ‘웬만하면 남편이 참으라’는 의미임을 깨닫고 애처가로 거듭났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배운 것입니다. 한편, 신앙도 같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지만 (행18:27-28),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삶의 굴곡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각고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태초부터 계신 분을 깨닫게 되고(요일2:12-14), 마침내 아비의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고전4:15). 늘 성령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대는 배워서 확신하고 있는 진리를 따라 계속 생활하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이것을 배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딤후3:14,현대인의성경).  

잠언19:21절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새번역)

본잠언의 교훈은 삶의 현장에서 자주 목격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로마로 가려고 계획하였으나 좌절되었습니다(롬1:13; 15:21). 드디어 AD58년경,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드린 구제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 후 얼마 안 되어 성전에서 체포되었고, 기약 모르는 연금을 당하였습니다. 2년 후 로마 황제에게 호소를 하였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하였으나 배가 난파되어 구사일생으로 도착하였습니다(행28장). 잠언 16장은 이 진리를 잘 가르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1,새번역)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16:2)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33). 사람들은 많은 전략을 수립합니다만, 결국 하나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체험들은,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3:5)는 교훈을 탄생시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길에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사람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곧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시편114: 8절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본시는 ‘애굽 할렐(찬양)”시들 중 하나로서(113-118), 유월절을 기념할 때마다 불리워졌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가나안 땅을 주시기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현현-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요단강을 가르신 역사 등 – 을 근거로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르그만은 “시편114편은 각 세대가 세상을 변혁시킨 이 사건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함으로, 출애굽 세대의 전통과 믿음의 삶에 동참시키게 한다.”고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언약의 백성(1-2)
          B  자연에 행하신 이적들(3-6)
      A′ 언약의 주님(7-8)
시인은 가나안 정복 후의 세대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믿음과 감정은 차이가 있습니다.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서 합격한 것을 믿고 기뻐하는 학생 같습니다. 시인은 성경에서 자신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과거에 르비딤에서(출애굽 당시), 그리고 가데스에서(38년 후) 바위로부터 물을 내신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맹인이나 절름발이 귀먹은 자 말 못하는 자가 고침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직접오셔서 고치신다는 약속만 있습니다(사35:4-6). 그렇게 오신 분이 주 예수입니다. 중요한 점은, 맹인 등을 치유하신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 죄인들의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거지 바디매오)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10:52)

시편115: 11절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새번역)
시인은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2)라고 질문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은, 조롱하는 세상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아마 최근의 승리를 왕이나 군대에게 돌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1). 또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4). 그러나 시인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는 야훼라는 신앙 고백을 하고(15,16) 그분만 의지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인자와 진실의 야훼 찬양(1-3)
         B 우상과 그 추종자들(4-8)
         B′ 야훼와 그분의 백성(9-15)
      A′  창조주이신 야훼 찬양(16-18)
본시의 9,10,11절은 각각 돌림 합창 노래로서, 주제는 신뢰입니다. 신뢰의 히브리어는 ‘바타’이며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의지하면, 그 대상으로부터 평강, 복지, 안전이 온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방인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으나, 생명 없는 우상이 도와줄리 만무입니다. 시인은 그들을 조롱합니다만(4-8), 현대인은 돈이면 제일이라는 맘몬 우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 역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은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항상 의지하여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매일묵상(2022/09/13-16)

잠언19:17절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새번역)

최근 대한민국의 원화 환율이 1,400원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미국 기준금리의 상승때문입니다. 9월 중에 그것은 3.25%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모든 투자자들이 달러를 사려고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현재 미달러 채권이 가장 안전하고 많은 금리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달러보다 안전하고, 수익률이 높은 투자자산은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그 계명들은 누구나, 언제든지 살 수 있으며, 갚으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 이익은 정금보다 낫습니다(잠3:14).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그 환난 가운데 돌보는 것입니다(약1:27). 잠언은 이를 행하는 자를 지혜자요, 아주 현명한 투자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채무자가 된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채무자가 되시면 그 채권은 안전한 동시에 그 이익 역시 엄청날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헌금함 앞에 앉아 계신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보고,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막12:41-44). 그 헌금은 하나님 아니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였을 것이기에, 본 잠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과부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 과부가 집에 돌아갔을 때 그녀의 집 문 앞에서 세리장 삭개오가 주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자녀들에게도 돈을 포함한 경건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잠언19:18절
“네 아들을 훈계하여라. 그래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생각은 품지 말아야 한다.”(새번역)

세상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밝혔습니다(전3:1-8). 자녀 양육에도 시의 적절한 훈계는 필수적입니다. 그런 훈계를 몸과 마음에 간직한 자녀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인생은 결정되어졌다기 보다, 오히려 패턴화 되어 있기에(코박스), “어떤 패턴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당연히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에 머물러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에서 부모의 훈계는 사랑에 근거하지, 결코 해를 가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훈계가 없다면, 그 자녀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는 영원히 단절된 삶으로 가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훈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영원한 죽음에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목격하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언어로 책망하지 않고, 적절한 체벌이라도 가하여 반복을 방지하지 않는다면, 부모 또한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만든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5:23). 형법에서도, 환자를 맡았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죽게한 의사를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의 실패한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분은 자녀들(암논,압살롬)의 범죄시 적절한 징계를 가하지 않아, 가정과 국가가 파탄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아도니야에게는 한 마디도 책망한 적이 없었습니다(열상1:6). 잘못된 행동에 적절한 훈계를 받지 못한 위 세 아들은 모두 살해당하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22:15,새번역).

시편112: 1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전 시편은 주님을 경외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를 축복하면서 끝나는데(111:10), 본 시편은 이를 발전시켜 경건한 자의 행위를 주제로 삼았습니다(지혜시).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랐고, ‘..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형식을 갖추며, 지혜 문학이 사용하는 단어와 관심을 보여주고, 의인과 악인 사이를 대조하면서 지혜의 축복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본시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행하는 신자들에게 명예, 자녀, 그리고 재물의 축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또한 고난의 존재를 분명히 받아들입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의인의 축복 선언(1)
     B  의인의 삶의 현실: 축복과 고난의 병존(2-9)
  C  악인의 말로(10)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계명을 지키라는 지혜의 교훈은 역경 속에서도 큰 유익이 있음을 3번이나 강조합니다(4, 7, 8). 그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고”(4), “나쁜 소식”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며(7),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볼 것입니다(8).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까?”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생각으로 꽉들어찼습니다. 이때문에, 의로운 행위들, 경건한 성품을 가꿈(은혜롭고, 자비롭고, 충성되며, 신실함),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이 그의 일생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이며, 이런 특질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을 통해 형성되어집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시편113:3절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시편113-118까지의 시는 ‘애굽의 할렐’로 불리우는 구원의 간타타로서, 출애굽기6:6-7을 노래로 주석하였습니다. ‘할렐’이란 찬양이란 뜻이고, ‘야’는 주님의 이름(야훼)의 약자입니다. 따라서 ‘할렐루야’는 ‘주(야훼)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1) 할렐루야로 마칩니다(9). 시의 구조입니다.

A  주님을 찬양하자(1-3)
           B  주님의 주권(4-6)
      A′ 주님의 구원의 행위를 찬양하자(7-9)
본시의 주제는 우주적이고 초월하신 주님(야훼)으로서, 그분은 하늘과 땅 위에 높아지셨고, 모든 시대를 다스리시고, 모든 공간을 채우시며, 열방 위에 높으시고, 가난한 자를 들어올리시며 좌절하는 자들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만유의 주님으로부터 미천한 각 사람을 돌보시는 구원의 행위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이런 찬양에 부합한 사건은 출애굽입니다. 그 당시 가장 강한 국가인 애굽의 군사들을 홍해에서 뒤엎으시고(출14:30-31), 광야에서 주님은 백성들에게 메추라기, 만나 그리고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모형일 뿐입니다(엡2:1-10).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로서,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함께 포함됩니다(엡2:11-22).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 할렐루야.” (시편113:9,새번역)

매일묵상(2022/09/5-7)

잠언19:14절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
(새번역)

좋은 것들(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지만, 좋은 아내를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선물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경건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잠언은 ‘슬기로운 아내’와 ‘다투는 아내’(13)를 비교함으로써 아내에 관한 가르침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잠언은 여자를 비하하지 않습니다. 그런 여자는 가정의 조화를 깨뜨리는 여자들이고, 미덕을 갖춘 여인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31:10-31). 실로 남자의 운명은 아내가 가진 도덕적 유능함에 달려 있습니다. 슬기로운 아내는 가정의 문제와 해법을 파악하고, 가정이 성공적으로 세워지도록 모든 힘을 다합니다(14:1). 삼손과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내를 택할 권한은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주님 손에 맡기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섭리는 룻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아스는 중년이 되도록 아내가 없었습니다(잠31:10).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보아스를 위하여 비슷한 처지의 아내를 주셨습니다. 즉 보아스는 믿음의 이방여인 기생 라합의 아들이었으며, 룻 역시 야훼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여인 과부였습니다. 현실적 차원에서 둘 다 경건하고 마음이 착한 자들로서 그 신앙과 착한 마음이 서로 맞아서 적법한 절차(보아스보다 선 순위 친족이 있었음)를 거쳐 결혼하였습니다. 지혜란, 결혼을 포함하여 모든 삶을 주의깊게 따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가지만, 그후의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자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16:9,새번역)

잠언19: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13절에서 유산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아들의 정체는 게으른 자입니다. 게으른 자의 도덕성은 어리석은 자보다 더 퇴보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의 결과를 알면서 거기에 눈감고 부모나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나쁜 사람입니다. 농업과 목축이 주업인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게으름이란 가업을 망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게을러서야 어떻게 짐승을 매일 먹이고, 밭에서 제초작업을 하겠습니까? 사자나 사나운 짐승들이 여기 저기 다니고 있는 중에도 핑계대지 말고 부지런히 양떼와 소떼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한 해 농사를 망치면 그 가족 전체가 굶든지 , 빌어먹든지, 아니면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팔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은 ‘고엘’이란 ‘친족구속자’(룻기의 보아스 등)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족 개인에게 의존하는 ‘고엘’이란 제도는 불완전하였기에, 현대 국가는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의료보험, 고용보험, 실업수당, 연금제도 등. 한편, 잠언은 게으른 자를 ‘개미에게 배워야 할 자’(6:6),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하게 나고 돌담이 무너지도록 한 ‘지각이 부족한 자’(24:30,31), 바보 보다 더 비열한 자(26:12-16)로 묘사합니다. 급변하는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부지런함은 필수입니다. 게으르면 자신의 삶이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하여, 그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위태롭습니다. 결국 소득의 원천을 상실하여 굶주게 되고, 그의 운명은 술취한자나 탐식하는 자와 같을 것입니다(23:21). ‘주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이 담긴 의미를 숙고해야만 합니다.’“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제 목숨을 지키지만, 자기 행실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 (잠언19:16,새번역)

잠언19:16절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제 목숨을 지키지만, 자기 행실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다.”(새번역)

잠언18:22-19:23절은 재물과 지혜에 관해 3부분- (a)18:22-19:7, (b)19:8-15, (c)19:16-22- 으로 나눠 교훈합니다. 세 번째 부분(c)은 ‘궁핍한 자에게 친절하라’는 주제를 다루며, 16절은 그 도입절로서, 무책임한 아들(15)과 책임성 있는 아들(16) 간의 대조를 그리면서, ‘목숨을 지키려면 아버지의 말씀(계명)을 준행하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말씀(계명)은 사람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13:13-14). 아비의 계명을 지키는 아들은 지혜자 중 하나이며 사망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받습니다(전7:12). 어리석은 아들은 인생을 살며 형성된 아비의 훈계를 멸시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행실)이 가져오는 나쁜 성품, 행동 그리고 그 결과를 무시해버립니다. 그 결론은 사망이며, 이는 주님 및 그분의 백성과의 단절을 내포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경멸하고, 백성들을 억압하며, 심지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습니다. 늙은 엘리 제사장은 역시 제사장이었던 두 아들들을 불러 그 악행을 타일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보냄을 받아 엘리 집의 멸망을 선언하였고, 그 어린 사무엘의 입을 통해 그 메시지는 확증되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루 아침에 전쟁터에서 죽었고, 엘리 가문은 약 150년 뒤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에서 파직됨으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삼상2-4장;열상2:26,27).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잠언19:23,새번역)

매일큐티(2022/8/29-9/2)

잠언19: 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사람 사이에 갈등은 필연입니다. 본 잠언은 분노를 포기하고 허물(페샤-죄, 선을 넘는 언행 등)을 용서할 줄 아는 사려 깊은 행동을 하라고 교훈합니다. 슬기로운(세켈-상황을 파악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줄 아는 능력) 사람은 참을 줄 알기에, 뜨거워진 논쟁은 가라앉게 됩니다(15:18). 물론 쉽지 않습니다. 특히 타인에게 도를 넘는 말을 듣거나 처우를 받아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모두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그 분노를 그대로 발산시키면 평화로운 공존은 사라지고, 갈등과 불화만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후처로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면서 그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겸손하였으나, 주님은 노하셨고 결국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립니다 (민12:1-3). 모세는 미리암을 위해 중보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만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밧단 아람에서 큰 부를 축적한 야곱은 외삼촌 라반 몰래 도망을 갔고, 라반은 불과 같이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날 밤 라반에게 현몽하여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야곱을 해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딸들과 손자들을 축복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과 라반의 기사 중 라반이 잘한 대목입니다(창31장). 이들 양자는 각기 허물이 있었기에, 이의 완벽한 모범은 당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20).

잠언19: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고대에는 제멋대로 통치하는 왕이 군림하고 있어, 신하들은 왕의 노여움을 피하고 그의 호의를 받는 것이 생존과 출세의 비법이었습니다. 사람의 분노의 결과는 언제나 어리석습니다만(잠14:17), 권세자 특히 왕의 분노는 먹이를 잡은 사자의 표호와 같이 두렵고 위험합니다. 당연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나라의 사가 사마천은 쓴 소리를 하여 한 무제를 격노하게 하였고, 궁형(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함)에 처해졌습니다. 너무나도 수치스러웠지만, 사마천은 굴하지 않고 역사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20여년에 걸쳐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책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후에 무제는 뉘우치고 중서령의 직을 내려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상과 벌을 마음 내키는대로 주는 전제군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전제군주의 권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롬13:1-7). 그러나, 여기에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라는 지혜와 섬김의 길이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자신이 죽이고 살릴 권세가 있다고 위협하자, 주님은 오히려 위에서 그런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19:9-11). 누가 재판장이고 피고인지 잘 모를 정도로 주님은 당당하셨지만, 그렇다고 72,000명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외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는 사실을 존중하되, 그 권세를 남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정의로운 비폭력의 자세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벧전4:14).“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잠언19: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솔로몬은 사회생활의 문제에서 가정으로 눈을 돌립니다(13-15). 13-14절은 역기능 가정(미련한 아들, 다투는 아내)과 순기능 가정(유산, 슬기로운 아내)을 대조하고, 15절은 미련한 아들의 전형이 게으른 자라는 것을 밝힙니다. 가정은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고, 살아갈 물질적 터전(집, 재산)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특히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하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연로한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받아 보전하고 부모를 섬길 조력자로서의 자녀들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가 유능하지 못하여 가업을 몰락시키거나,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다면 그의 아비에게는 재앙 그 자체입니다. 한편, 가정의 평온 없이는 행복은 불가능하고, 아내는 그 평온으로 닻입니다. 많은 일로 걱정하는 남편을 위로하고 조언을 주어 함께 가정이라는 배를 안전하게 항진하도록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나 지붕이 새서 빗물이 계속 떨어지는 것처럼 틈만 생기면 다투고자 하는 아내 역시 고통 그 자체입니다. 노년의 톨스토이처럼 그는 집을 나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다투는 아내’란 단순히 잔소리를 넘어 ‘미련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정은 늘 세파에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이때 슬기롭지 못한 아내는 그에 대처하는 지혜도 없으며, 사태의 본질도 자신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감정과 생각대로 주장할 것입니다. 당연히 가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대조적인 여인이 14절의 슬기로운 아내이고 그 좋은 예가 잠언31:10-31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시편110: 4절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절은 하나님이 주님께 하신 두 번째 말씀으로, 그분은 레위 지파 제사장과는 관계 없이(출29:9),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맹세가 뒤따릅니다. 제사장 엘리의 집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영원히 제사장직을 담당할 것이 약속되었으나,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로 그 약속은 취소되었습니다 (삼상2:30; 왕상2:26,27). 그러나 다윗 왕의 주님이 영원한 제사징직을 수행할 수 있는 까닭은, 첫째, 맹세로 보증되었고, 둘째 그분은 결코 그 제사장직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왕좌에 앉아 공평과 정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림으로 영원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사9:7). 이런 영원한 왕과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죽지 않는 부활의 몸이 필연입니다. 한편,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다스리는 제사장이자 왕으로서 적군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구약 성경에는 창세기 14장과 시편110편에만 등장합니다. 신약 히브리서에서 이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한 신학적 설명이 있습니다(히5:5-10; 6:19-7:28). 다윗 왕의 주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구원하시나(히5:5-10),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여.. 머리를 깨뜨리실”(5-7)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짧은 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명백히 드러나 있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2).

시편111: 2절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시편111-113편은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나, 111편과 112편은 알파벹 시의 특색을 갖고 있습니다. 즉 두 시는 각각 22개의 행으로 구성된 10개의 구절로 이루어졌으며, 각 행은 히브리어 알파벹(22개)의 순서로 시작됩니다. 주제는 111편은 하나님 자신을, 112편은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본시의 구조입니다.

A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를 찬양(1-3)
         B 구속을 위한 주님의 일하심(4-9)
A′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10)

시인은 구속하신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기적)들을 연구하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정의의 실현이요(3), 그 정의는 은혜와 자비를 동시에 구현하였습니다(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은혜로 주시고 백성이 행할 법도를 제정하여 세우셨습니다(7-9).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법도를 지켜 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여 가나안 족속은 쫓겨났습니다. 그 길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끝은 그분의 법도를 행함으로 ‘훌륭한 지각(sense)을 가진 자’로 칭찬받는 것입니다(10). 시인은 본시에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선하심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기적) 속에서 드러남을 선포합니다(3,4). 이같이 그분의 선하심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여기에 믿음 생활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서 맺어지는 현실 속에서 세워져가기 때문입니다(빌1:10-1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20).

매일묵상(2022/08/22-26)

잠언19: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언18:22-19:22절은 “재물과 지혜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세 부분-(a)18:22-19:7절, (b)19:8-15절, (c)19:16-22절– 으로 나뉘어집니다. 첫 부분(18:22-19:7- ‘가난, 재물 그리고 친구’)을 이미 살펴보았으며, 지금부터 두 번째 부분(19:8-15절)을 다루겠습니다. 주제는 “사회생활에서의 지혜”입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은 형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고 당장은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지만, 잠언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고 장차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잠19:1,8). ‘지혜’로 번역된 원어는 ‘레브’로서 ‘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인들은 마음은 지혜가 거주하는 곳이라고 여겼습니다(욥32:8). 따라서 본문에서 ‘레브’는 지혜를 의미하는 ‘호크마’와 같은 의미이며, 후단에서 ‘명철(=테부나- 분별)’과 짝을 이룹니다. 또 ‘영혼’은 ‘생명, 생물’이란 뜻도 갖는 ‘네페쉬’로서, 이 문맥에서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육체적 생명 보다 영혼의 생명을 지키라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으로, 이는 지혜야말로 육체적 안전보다 영혼의 건강에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를 얻고..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먼저 생명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복(=토브-좋은 것)’을 곧 얻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는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풍부한 삶을 누리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잠언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그런 생명을 주시러 오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잠언19: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9-12절은 거짓 증인에 대한 형벌에서 시작하여(9), 사회생활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교훈합니다. 9절과 5절은 끝의 동사를 제외하고는 구문이나 내용이 같습니다(‘피하지 못하리라’대신 ‘망할 것이니라’). ‘거짓 증인’은 십계명에서 금지된 행위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 당시 재판은 증언에 거의 의존하였기 때문에, 거짓 증언은 재판상 정의 구현에 심각한 침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재판규범인 십계명은 이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대한 민국 형법에도 ‘위증, 모해위증’(152조)의 규정을 두고 형벌(5년이하 징역 등)로서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재판 극화에서 잘 나오지만, 증인이 되려면 진실만을 말할 것을 ‘법률에 의해 선서’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거짓말을 한다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됩니다. 모세 율법도 그에 대한 형벌을 가하고 있습니다(신19:15-21). 발각되면 당연히 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짓 증인은 아니라도 “거짓말을 뱉는 자’는 진리를 왜곡하여,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의 생명, 재산, 명예에 위해를 가하고,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허물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벌을 받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요행히 피해가도 마지막 날 심판에서는 발각되어 ‘망할 것입니다.’(눅12:2,3) 우리 중 어떤 누구도 거짓말하는 사람과 사귀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이, ‘거짓말을 뱉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잠언19: 10절
“미련한 사람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마땅하지 않은데, 하물며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이랴?” (새번역)

자연세계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름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서리가 내린다든지, 가을 추수기에 비가 많이 내린다든지 말입니다. 날씨가 이렇다면 부적절한 것은 물론, 큰 해를 당하게 됩니다. 인간사도 같습니다. 본잠언은 솔로몬이 목격한 가장 부적절한 사회현상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란 ‘케씰’의 번역으로 지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매우 우둔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기서는 ‘도덕적으로 우둔한 자’라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세상적으로 영악하여 법을 무시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재물을 얻은 바보말입니다. 더 나아가 남의 도움으로 자신의 재물을 보존하고 증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바보도 포함합니다. 이들이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매우 못마땅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온의 부자 나발이 그러해서, 격분한 다윗은 그를 죽일 뻔하였습니다(삼하25장). 다른 한 예는 종이 고관을 다스리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종’은 주인과의 관계라기 보다, 맡은 일의 성격에 초점이 있습니다. 종은 주어진 일만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며,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하는 데는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적절치 않은 자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큰 혼란이 생겨나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에게는 영예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마치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과 같다.”(잠26:1,새번역)

시편110: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본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인용하셨고,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시로서 신학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시의 주제는 이스라엘 통치자 다윗 왕이 주님으로 부르는 위대한 주권자가 계시며, 그분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모든 원수를 정복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는 두 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왕(1-3)과 제사장(4-7)입니다. 각각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하고, 야훼께서는 다윗의 주님을 왕과 제사장으로 선언하시고, 시온에서부터 땅의 왕들을 압도하는 주님의 통치를 약속합니다. 또한 이시는 주님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을 민족들의 전복과 대비시키며, 왕이자 제사장인 그분 자신을 젊음이 넘치는 활력으로 늘 새롭게 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A    정복에 대한 약속 (1)
B   승리 (2–3)
A′   영원한 제사장 약속 (4)
B′  승리 (5–7)
마가복음12장에서 주 예수님은 본 시편이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지은 다윗의 시이며, 자신의 메시아직의 성격과 내용을 드러냈다고 확인해 주셨습니다(36-37). 1절에서 다윗 왕은 자신보다 더 높은 왕권을 가진 한 존재를 주님으로 부릅니다(히1:3,13). 하나님은 그분이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여 발 밑에 굴복시킬 때까지(발판의 의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신약의 기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주 예수께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고 만유를 통치하고 계심을 증거합니다(행2:32-36/히10:12-13/엡1:20-22).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

시편110: 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2,3절은 다윗 왕의 주님, 곧 그리스도께서 현재 통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다윗의 주님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좌정하셨습니다. 그 좌정하심은 속죄의 거룩한 과업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의미하고, 이제 영원한 왕으로 앉으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고 계십니다(히10:12,13).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어보내신다’는 의미는 사도행전1장과 2장에 따른,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사도들이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죄사함과 심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는 물리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을 통한 말씀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400년 뒤 선지자 이사야는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고”, 그 결과 모든 나라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전쟁을 그치고 평화롭게 살아가게 됨을 말합니다(사2:1-4). 또한,이사야9:6,7절은, 그분은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셔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요 평강의 왕”이라 불림을 받으며, 다윗의 왕좌에 앉아 군림하시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실 분임을 선포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부활 없이 영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섬기며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갈 것입니다(시110:3). ‘자발성’ 그 자체가 신약의 성도들의 섬김의 모습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너무나도 감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28:18,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