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6/19-23)

잠언23:21절
“(왜냐하면)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본절에서 현자는  ‘가난’에 주목하면서 20절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술과 고기를 탐하는 자’란 방탕한 자를 말하며,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게으른 자입니다. 그들은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대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노력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모두 탕진하고 결국 가난에 이르게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게으른 자의 행태와 그 결과를 경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장래도 바람직한 소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잠언은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21:25) 하여, 죽음이 이들을 기다린다고 밝힙니다. ‘가난’과 ‘죽음’이란 운명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그들은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며, ‘악한 자’나 ‘미련한 자’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게으른 종을 ‘악한 종’(마25:26) 이자, ‘무익한 종’(마25:30)이라고 선언하시며,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신 것입니다. 한편, 노동이란 소득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인격형성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땀을 흘린 만큼 대가를 받고 살아야, 온전한 인격을 가질 수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는 재산이 필요하나, 세상을 떠날 때는 노동의 수고를 통해 닦인 인격만이 남아 영원한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래성 있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우리 자신의 인격발전을 도모해야지 이런 자들과 함께 어두운 곳으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잠언23:22절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새번역)

제5 계명은 부모공경의 계명으로, 내용은 공경의 명령과  장수와 축복의 약속입니다(출20:12;신5:16).  22-25절은 제5계명의 잠언판으로, 22-23절은  공경의 명령과 방법, 24-25절은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너를 낳아 준 아버지’와 ‘늙은 어머니’란  부부가 자녀를 낳고  늙을 때까지 부모와 자녀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말합니다. 부모의 흰 머리는 그들의 면류관으로 지혜롭게 일생을 살아왔음을 증명하며 (16:31), 자녀들은 그 면류관을 아름답게 하는 장식이라 하겠습니다(17:6).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명령은 부모가 준 가르침을 결코 버리지 말라는 의미로서, 전단의 ‘순종’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순종’이란 부모를 존경하고 그분들의 말씀이 무겁게 여겨질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공경 恭敬- 공손히 받들어 모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베드’는 ‘무겁게 여겨라’는 뜻으로,  ‘존경하라= Honor’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와 그 가르침을  크게 중요히 여기고 행동해야 합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순종한 룻입니다. 그는 시모의 말에 따라 계속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고 그 결과 성공적인 이삭 줍기와 보아스와의 결혼까지 성사되었습니다. 룻의 인생 성공의 비결은 늙은 시어머니의 말을 중히 여기고 순종한 결과로서. 제5계명이 약속한 그대로입니다. 내일은, 잠언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훈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잠언23:23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조선 시대 홀로 4형제를 키우고 있던 한 어머니는  우연히 마당에 파묻힌 금괴짝을 발견하자 파묻고 곧 바로 멀리 이사 갔습니다. 삯바느질로 자녀들을 공부시켜 모두 성공시킨 뒤, 비로소 수십 년 전에 있던 금괴짝 사건을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금과 지혜 중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깨달은 지혜자입니다. ‘진리, 지혜,훈계,명철’ 4총사는 자녀들의 바른 인생을 위한 핵심 요소들로 이와 비교될 수 있는 보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부모라면 자녀의 축복된 삶을 위해서, 이를 가르쳐 습득시킬 것입니다. 잠언의 부모 역시 같습니다. 자녀가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수 십년을 가르친 후, 부모는 이제 늙었습니다(22). 그러나 이 진리가 너무나 중요하여 부모는 ‘사고 팔다’라는 상업적 용어로 이 진리를 또 한 번 가르칩니다. 솔로몬은 잠언3:13-18절에서 같은 내용을 아름답게 말합니다:“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장수가 있고 …부귀가 있나니…즐거운 길이요… 다 평강이니라…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지혜를 얻어 진리를 행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부모는 그런 자녀를 보고 싶어할 것이며, 그런 자녀를 둔 부모는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와 진리’의 가장 중심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깨달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은과 금을 구하듯, 그것을 찾으면 주님 경외하기를 터득할 것입니다(2:1-5).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님께서 친히 지식과 명철을 주시기 때문이다.”(잠언2:6,새번역).

잠언23:24,25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4,25절은 자녀들이 부모가 가르친 의와 지혜와 진리의 길로 행할 동기유인으로, 부모님의 즐거움을 언급합니다. 피상적으로 볼 때 효도의 권면(22)과 진리 추구의 권면(23)은 관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권면은 부모를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살펴 본 바 있습니다. 부모의 훈계대로 참되게 살아가는 모습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며, 이는 부모공경의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더 나아가,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측면과, 22-25절이 제5계명(부모공경)의 잠언판 해석인 점을 감안한다면, 본절은 부모공경의 계명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여기서 제5계명의 전개과정을 보겠습니다. 제5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2백만명에게 호렙 산에서 직접 하나님이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십계명의 하나로, 주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의 약속을 담고 있으며(출20:12), 40년 뒤 광야의 신세대에 대한 설교집인 신명기에서는 ‘장수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5:16). 1500년 후 사도 바울은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에게 신명기의 약속을 적용하되, ‘하나님이 네게 준 땅’이란 표현을 삭제하여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전 세계화 우주화시켰습니다(엡6:1-3). 따라서 성경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에베소서6:1-3절은 그 적용 방법을 가르쳐줍니다.“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잠언23:26절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6-28절은 음녀의 위험성에 관한 아버지의 훈계입니다. 아버지는 음녀는 깊은 ‘구덩이와 좁은 함정’(27), 그리고 ‘강도’(28)이니, 그녀가 있는 길로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공자는 “아는 자(知之者)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好之者),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 하는 자(樂之者)만 못하다”(논어 옹야편)고 갈파한 바 있듯이, 부모의  교훈의 길로 행하기를 즐거워 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즐거워 하는가?”를 보면 그의 장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요일2:17).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적어도 10명 이상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순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적 사업의  틀을 마음에 만들어 놓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지혜는 불경건한 세상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잠언을 공부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모범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시고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이 지금 온 우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때  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나 기도하는 가운데 기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야훼께 여쭈어라.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주시리라.”(잠언3:6, 공동번역 )

매일묵상(2023/6/12-16)

잠언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부모는 자녀가 친구들이나 어른들의 나쁜 롤 모델로 인하여 잘못될까 걱정합니다. 3천년 전 현자 역시 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유혹하는 현실을 넘어서서 주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을 합니다(17). ‘부러워하지’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예칸네)는 ‘질투하다’ ‘열심을 내다’의 뜻으로, 무자한 라헬이 4명의 아들을 낳은 레아를 향해 품은 감정과 같은 매우 격렬한 감정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창30:1). 이는 다른 이와 비교하여 갖지 못한 어떤 것을  동경하고 나아가 시기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그 부러움의 대상은 ‘죄인의 형통’입니다.  ‘형통’이란 단어는 번역자가 삽입한 것으로, 원문의 직역은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실로, 악인들의 불법적 이익은 부러워할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들에게는 항상 주님을 경외한다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표지입니다. 1885년 옥스포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의 학장 허버트 워렌(32세)이 졸업생들에게 행한 ‘모들린 사람의 사명’에 관한 연설입니다: “저명 인사가 되고, 큰 일을 이루고, 남 앞에 서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필요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편에 서는 꼭 필요한 사람,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들린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은 18절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축복을 언급하며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내일 자세히 보겠습니다.“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3:18)    

잠언23:18절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7절은 악인의 형통을 시샘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고, 18절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경건한 자의 복은 많지만, 본절은 미래의 측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본절의 전단과 후단은 동일한 내용이며,  전단은 긍정문으로과 후단은 부정문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특히 후단의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부정어 ‘로’와 미완료 동사를 결합하여 신자의 소망이 결코 끊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장래’와 ‘소망’이란 단어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돌보심은 물론, 최후의 심판 때 주님으로부터 올 칭찬까지 포함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건강하고 축복받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숨은 선행도, 신실하게 살아간 모습도 없어서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산 일생은 헛되다 하겠습니다(전1:2,3).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 속담처럼,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 자입니다. 이 땅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 보다 인간적인 술수를 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더 형통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장래도 소망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는 가장 신경을 많이 쓰나, 죽음에 임박하여 가장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하던 비즈니스이며,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운명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외양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만, 아삽도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할 정도로 어렵습니다(시편73). 내일 이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일2:17,새번역)

시편73:13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편 기자들 역시 죄인의 번영과 경건한 자의 고난이라는 현실에 당황하며, 기도로 호소하는 장면이 시편에 많이 등장합니다. 본시의 저자인 아삽도 그랬습니다.  자신은 아침마다 징벌을  당하지만,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불어났습니다. 고통스러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은 풀기 너무 어려웠습니다(16). 그러나 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마침내 악인의 종말을 깨닫습니다(17). 그들은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은 자신을 붙뜰어 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고백합니다(27,28).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아삽은 부유한 사람입니다(23). 성벽처럼, 주님은 신자를 지키시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23).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은 고난 속에서도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쓴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이는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하늘나라는 고난 속에 보화와 지혜를 감추어 놓았으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23:17,18)

잠언23:19절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17,18절은 주를 경외하는 자는 장래와 소망이 있기에,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이어지는 19-21절은 계명을 듣고 깨달아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살아가라고 교훈한 뒤(19), 방탕한 자들의 몰락을 동기유인으로 제시합니다 (20,21). 먼저, 19절을 보면, 명령형으로 된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 ‘들으라, 지혜로우라, 인도하라’.  이 3가지 표현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의 반복으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돼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후단에서’길’이란 행동 양식, 삶에 대한 태도, 특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함축합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실한 제자로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 이유는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며(골1:10), 그 결과 늘 교훈을 따라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실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경건한 삶의 가장 큰 특징이며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하면 비로소 악에서 떠나게 되고, 보이는 길은 주님의 계명의 길뿐입니다. 악에서 떠난 그는 모든 연륜, 학식, 재주, 힘을 가진 자를 뛰어넘어, 원수 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 보다 명철하고, 노인 보다 분별력이 있게 됩니다(시편119:97-101). 세상이 지어진 가장 목적은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인가?’를 보시려는데 있으며, 그들만 남아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119:105).  

잠언23:20절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19절의 권면 후에, 20절은 바른 길이 아닌 대표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걷지 말아야 하는 길은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 사귀는 삶입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들’이란 술꾼을, ‘고기를 탐하는 자들’이란 식탐에 빠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술과 고기를 먹고 즐기기 위해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자들로서, 한 마디로 ‘방탕한 자들’입니다. 신명기21:18-21은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모세는 사람에게 아들이 있어 고집부리고 불순종하면, 그 부모가 그를 끌고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를 돌로쳐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 신명기의 명령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과도 관련있기 때문에, 그 벌이 특히 중하게 내려졌지만, 본절이 말하는 자들 역시 공동체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정도의 악인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경외함이 없고, 오직 술과 음식에 대한 탐욕만이 가득차 있습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로서 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엡5:5). 따라서, 현자는 이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훈계하나, 원문은 더욱 강렬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한 자리에 있지도 말아라.’ 따라서, 바른 길로 행하는 삶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죄인들의 삶의 자리 자체를 멀리해야 합니다(시1:1). 더욱이 허랑방탕한 자의 결국은 가난으로 귀결됩니다. 21절은 이를 지적하여 잘못된 길을 버리도록 동기유인을 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매일묵상(2023/6/5-9)

잠언23:11절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10절은 고아로 대변되는 약자의 권리를 침범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11절은 그 중요한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힘 없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확립하신 사회적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주님 자신이 친히 압제자들을 벌하사,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시기에, 그들이 믿음으로 호소하여 오면, 그들의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실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속자’란 히브리어 ‘고알람’의 번역으로, ‘가족 보호자’라는 의미며, 본절에서는 주님 자신을 지칭합니다. 이 단어는 동사 ‘속전을 주고 구출하다(구속), 복수하다, 친족의 역할을 하다’는 동사 ‘고알’에서 파생되었고,  ‘고엘-친족 구속자’ 역시 여기서 나왔습니다. 고엘 제도가 작동하는 상황은 대략 4가지입니다. (1)가난 때문에 팔린 친족의 밭이나(레25:25), 빚으로 종이 된 사람을 되사오는 경우로(레25:48), 가까운 친족의 의무였습니다. (2)주님에게 드린 재산이나 짐승을 다시 가져오는 경우, ‘고엘’은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소유자로서 1/5을 더하여 되사야(구속)합니다. (3)친족이 살해당하였을 때 가까운 친족은 ‘피의 보복자’로서 행동하며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엘’로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역할이며,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사례가 적절합니다. 우리가 강할 때는 공의로운 주님을 두려워 하여 행동을 삼가해야 하나, 우리가 도움을 호소할 길이 없을 때, 만유의 주님이 계심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 (잠언15:25,공동번역).

잠언23:12절
“12훈계를 너의 마음에 간직하고, 지식이 담긴 말씀에 너의 귀를 기울여라.

23:12-24:2은  ‘순종하는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잠언의 제자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단락입니다. 12절은 출발점으로 ‘훈계를 간직하라’는 당부가 먼저 오고, 이어 훈계의 내용이 각각 등장합니다: 자녀의 징계문제, 정직의 장려, 죄인의 형통에 대한 질투 금지, 음식 탐하는 자와 교제금지,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 지혜와 지식의 추구, 음녀와 술를 멀리하라는 가르침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절의 ‘마음’은 핵심 단어로서 잠언의 제자와 부모를 단단히 연결해 주는 고리입니다. 지금, 아버지는 아들이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후단으로, ‘너의 귀를 기울여라’는 표현을 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미련한 자로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잠언은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라’고 이미 가르쳤기 때문입니다(23:9). 마음과 귀는 서로 협력하여 일하는데,  마음은 귀를 열고, 귀는 마음을 형성합니다. 즉, 마음이란 속사람의 기관은 신체의 귀를 열어 듣게 하고,열려진 귀는 마음 자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지식이 담긴 말씀’과 훈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어  마음 자신을 재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기 마련입니다(잠언18:15). 따라서, ‘부주의한 마음은 부주의한 귀를 만든다’는 학자 브리지의 지적은 합당합니다. 솔로몬은 부여받은 왕의 직무를 잘 수행 하기 위해 ‘듣는 마음’(왕상3:9)을 달라고 주님께 요청함으로 이 양자를 결합하고 있음은, 그가 왜 지혜자인지를 보여줍니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잠언19:27)

           
잠언23:13,14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훈계의 목적은 아이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채찍’이란 단어를 보아 잠언은 아이들에 관한 어떤 환상도 없음을 알려주지만, 그렇다고 ‘주마가편’의 고사성어와 같이 아이들에게서 최고의 능력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지혜란 무수히 반복되어 교훈된 후에만  아이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게 되며, 이 과정 중에 ‘채찍’과 같은 글자그대로의 각인도 필요한 법입니다. 만약 훈계를 멈추는 부모가 있다면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부모이며, 그들의 자녀들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의 최고의 교육의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으로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종종 회초리도 동원되어야, 아이의 마음에서 미련을 벗겨낼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을 경외하여 모든 것을 행하려는 마음을 품지 못하면, 그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거나,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다윗은  자녀들에게 채찍은커녕 ‘왜 이런 일을 하였느냐?”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첫째, 둘째, 셋째 모두의 비명횡사였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채찍질은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지만, 아이에게 생명의 교훈을 갖게 하고, 채찍이 없으면 일시적인 고통이 없지만,  그 아이는 죽을 운명(영원한 심판도 포함)에 처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을 간직하지 못하면 바보입니다(욥28:28). 따라서 훈계의 상황에서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매라도 가하여 그들로 지혜를 얻어 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에게 매를 들어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들볶아 죽여서는 안 된다.” (잠언19:18,공동번역)

잠언23:15절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맹자는 군자 삼락을 말합니다: 첫째는 부모와 형제자매가 무고한 것이고, 둘째는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즐거움입니다. 첫째 즐거움은 하늘에서 내려주어야 하고, 둘째는 인격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셋째는 맹자의 지식을 나누어줌으로써 갖는 기쁨입니다. 여기 맹자와 같이 제자를 두어 가르치는 선생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즐거울 때는 제자가 배운 그대로 행하거나, 가르침을 넘는 이치를 터득하여 지혜를 보여줄 때입니다. 여기서 ‘지혜’란 남보다 빠른 두뇌회전이나 높은 IQ가 아니라,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을 말합니다. 잠언의 제자는 사태를 파악하여 결정할 때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님을 우선 고려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임을 선포하고(1:7), 가장 먼저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도록 교훈합니다. 그렇다고, 본절에서 말하는 지혜에  예법, 군사, 경제, 농사, 목축, 통치술 등 삶의 지식이 제외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잠언은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임을 또한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18:9). 문제는 이런 일에 탁월하여도 그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만을 도모하여 타인을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역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자신의 일은 물론, 타인의 이익까지 고려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실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며 그 주된 결과는 정직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내일 살펴볼 16절은 이를 확증합니다.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잠언23:16).

잠언23:16절
“네가 옳은 말을 하면 내가 정말 즐거워할 것이다”
(새번역)

15-16절은  마음과 언어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음을 가르치는데, 지혜로운 마음은 정직한 말을 이끌어 내고, 듣는 자는 그가 지혜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생은 제자가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처럼 말하기를 바랍니다: “내 말은 건전하고 참되며 하나도 잘못되었거나 악한 것이 없다.”(8:6). 잠언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출세지상주의, 성공지상주의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정직한 말과 올곧은 삶을 지향하도록 교훈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추구하는 석사, 박사와 같은 ‘든 사람’이나 출세하여 입신양명을 이루는 ‘난 사람’이 아닌 잠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자녀양육의 첫 번째 목적이요 가장 우선된 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즐거워하는 일은 우리가 정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소위 하나님 사랑을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그것이 우리가 자녀 양육 시 첫째에 놓이고,  다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미가6:8). 미가서의 이 구절은 지혜의 시작이고 방법이며 목적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심오한 곳이 아니며 너무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지 말라고 전도서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발견해 내도록 구조가 짜인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지혜를 갖고,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고, 늘 겸손하나 신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매일묵상(2023/5/29-6/2)

잠언23:6절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6-8절과 1-3절은 소재와 표현과 유사하지만, 1-3절은 조심성 있게 관원과의 식사자리에 나가라는 권면이나, 6-8절은 식사자리가 상징하는 마음의 교제 자체를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악한 눈’이란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불량하고 악한 마음으로,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선한 눈’과 대조됩니다(22:9). 그는 손님의 행복과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관철하고자 합니다. ‘음식을 먹지 말며’란 단순한 식사가 아닌 마음을 함께 나누는 식탁의 교제를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의  식탁 교제는 같은 계층의 가까운 사람들과만 나누었기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말은  교제를 중단하라는 경고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고, 악인에게 속한 것은 음식은 물론 그 어떤 것에든지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잠언에 대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까지 쫓아가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4명의 왕을 격파하고, 조카 롯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왕곡에 이르자  소돔 왕이 나오면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사람은 물론 의당 자신이 가져야 할 전리품조차도 악한 소돔 왕의 소유물은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악인의 재물로 치부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 해도 받지 않았지만, 계속 소돔 땅에 머물면서 악한 자와 교제를 한 롯은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시141:4).               

잠언23:7절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 그가 말로는 ‘먹고 마셔라’ 하여도,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새번역)

7절은 식사자리에 초청한 주인의 위선을 벗김으로써, 6절이 말하는 권면의 실체를 알게 해줍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이란 주인의 속마음을 묘사하는데, 그는 손님을 초청해 놓고 비용을 계산하는 중입니다. 겉으로야 ‘먹고 마셔라’ ‘마음껏 즐겨라’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돈을 아까워 하고 있습니다. ‘ 사람됨’이란, 인격을 말하며, 사람의 인격은 외양보다도 속마음을 알아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후단이 연회를 상정하여, 악인의 겉모양과 속마음의 괴리를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색한 주인이 음식을 차려놓고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외양을 갖춘 것은 이기적인 의도를 성취하기 위해서지,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속마음은 너를 떠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후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청년 A는, 외롭게 지내는 중 마음 따뜻한 형을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며 자신의 속마음도 털어 놓고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 형은 칼을 하나 주면서 자신을 따라 오라 하여, 간 곳은 K라는 룸살롬이었습니다. 아비규환이 일어났고, 그 범죄자는 사라졌으며, A만 모든 범죄를 뒤집어 썼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늘 의심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평소에 조금씩 그 속마음을 테스트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일에 마음이 드러나면, 그는 큰 일에도 그렇게 행동할 것입니다(눅16:10). 우리의 목적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행복을 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잠언23:8절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본절은 악한 자와 교제를 나누지 말라는 메시지를 위해 문학적 기교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어순입니다. 동사가 문두에 오는 통상의 히브리어 구문과 달리, 8절은 ‘핏테카- 조각, 작은 부스러기’라는 명사로 시작됩니다.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악인의 호의를 받아 진수성찬을 먹을지라도 조금의 유익도 없다.  둘째, 식사는 우정을 나누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현자는 이를 재료 삼아 악인과 교제 결과를 보여줍니다. 손님을 초대한 주인은 성심성의로 대접하기 위해 먹기에도, 보기에도, 그리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골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며, 초대받은 손님은 그 정성과 환대, 진귀한 요리에 또 감사하며, 아름다운 식탁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악인은 의도를 갖고 초대한 것입니다, 그 이기적인 의도를 알게 된 손님은 구토를 하고, 주고받은 덕담도  소용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절의 식탁의 교제의 결과는 악인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예일뿐입니다. 따라서, 인색한 자들과는 진심으로 교제할 수 없고, 그들과 친분을 쌓으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셋째, 본절은 교차대구의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조금 먹은 것도) – (네가 토하겠고)-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네 말도). 악인과 교제 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조금의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잠언23:9절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가장 지혜로운 충고도, 바보의 귀에 닿으면 튕겨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런 지혜가 오히려 그들의 적의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바보들은 지혜로운 말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지혜자를 대척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고,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선지자들이 대부분 고난과 핍박을 받은 이유는, 들을 귀가 없는 미련한 백성과 통치자들에게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도 이를 증언합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왕 부차는 초에서 도망 온 명장 오자서와 함께 월나라를 정복시켰습니다. 월왕 구천을 죽이자는 오자서의 건의를 오왕 부차는 무시하고 대신 소변과 똥을 먹이는 치욕을 준 후, 살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오자서는 계속 월나라를 경계하라고 여러 차례 진언을 올리다가 마침내 오왕 부차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때 월나라의 명신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기회를 엿보다가, 오자서 없는 오나라를 공격하여 부차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범려의 충언을 듣고 부차를 죽여 후환을 없앴습니다. 어느 날, 범려가 구천과 말하다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월나라를 떠나 화를 면하였습니다.그러므로 마땅히 상대방을 가려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잠언23:10,11절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10절과 11절은 열한 번째의 교훈으로, 10절은 잠언의 제자들로 하여금 고아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라는 명령이며, 11절은 그 이유로 하나님이 그들의 보호자임을 말합니다. 먼저, 10절을 보겠습니다. “ 선조가 세운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22:28)고 이미 교훈한 것처럼, 지계석은 토지의 경계와 그 소유주를 알려주는 경계선 돌입니다. 고대 근동은 토지가 기반이된 농업 사회로서 지계석은 중요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뒤, 그들이 언약을 지키는 한에 있어서, 그 거룩한 땅에서 살아갈 권리를 확보하도록 각 지파에게 밭을 제비 뽑아 분배하여 영원히 빼앗기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아로 대변되는 힘 없는 약자들부터 율법에 규정된 그들의 권한이 침범당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왕과 그 신하들의 책임이었습니다만, 강한 이들부터 그들의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 옮기지 말며…침범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지계석을 한 번 옮긴 후 확보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밭’의 원어는 ‘사데’로서 풀밭, 넗은 들, 그리고 땅을 의미합니다. 본절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이스라엘에서 밭으로 상징하는 토지의 소유자는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시기 위해 행동하셔야만 하고, 11절에서 그것은 ‘고아들’의 ‘고엘- 구속자’로서 표현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도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약할 때는 기도하시고, 강할 때는 두려워 해야만 합니다.다음 주에 11절을 상론하겠습니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잠언23:11).

매일묵상(2023/5/22-26)

잠언 22:26,27절
“이웃의 손을 잡고 서약하거나,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아라. 너에게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네가 누운 침대까지도 빼앗기지 않겠느냐?”(새번역)

잠언은 보증을 서서, 타인의 빚에 얽혀들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고대의 보증은, 보증인이 채무자의 손을 잡고 채권자 앞에서 서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자는 경고합니다. 만약 자기가 보증을 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야 하는데, 그때 재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침상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신은 맨 땅이나 마루에서 자게 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자신과 가족의 몸을 노예로 팔아 보증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이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참고 6:1–5; 11:15; 17:18; 20:16).  한편,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권고하며,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선언하나(19:17), 보증은 예외입니다. ‘관대하다’는 말은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나, 보증인은 거저 주는 관대함 대신에 채무자가 변제를 하여 자신을 보증채무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보증인은 늘 불안합니다. 특히 잘모르는 낯선 사람을 위해 서는 보증이 그렇습니다(20:16). 그러나 사회에는 대출에 대한 수요와 함께 보증에 대한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신용과 위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이런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돈을 버는 은행업, 보증업 등은 법제화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 비상한 발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업의 영역에서는 본잠언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의 보증을 선 사람은 자기의 옷을 잡혀야 하고, 모르는 사람의 보증을 선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잡혀야 한다” (잠언20:16,새번역).

잠언 22:28절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지계석은 토지의 경계와 그 소유주를 알려주는 경계선 돌입니다. 고대 근동은 토지가 기반이된 농업 사회로서 지계석은 중요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래 제비를 뽑아 각 지파별로 토지를 분배받았고, 영원히 팔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나봇의 포도원).  만약 가난  등의 이유로 타인에게 귀속된다면, 모세 율법은 친족이 되사올 수 있게 하는 고엘제도와 더 나아가 희년이 되면 반드시 원 소유주에게 그대로 귀속되게 규정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토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백성들은 균일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하나님만 섬기며 상호간에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래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받은 땅은 그대로 후손에게 대물림되어 갔습니다. ‘지계석’은 이런 토지 소유권을 확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증표로서, 지계석을 옮기는 행동은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신27:17). 그러나, 악인은 지계석을 한 번에 조금씩 이동시켜 마침내 약자의 밭을 상당부분 잠식하는 묘수(?)를 발견합니다. 원한에 사로잡힌 고아와 과부를 누가 돌보아줄 것입니까? 잠언은 이런 악인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경계선을 지켜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15:25). 물론, 대행자는 왕이지만, 주님 자신도 섭리 가운데 도우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주님은 과부처럼 불의를 당하여 기도할 때 신속하게 응답하실 것을 믿고 인내하라고 가르치시셨음을 유념해야 합니다(눅18: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8).

잠언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앞에 것이요 천한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본절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맡은 일을 능숙하게 해 내어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라는 권면입니다. ‘보았느냐’는 능숙한 사람을 간파할 정도로 예리한 분별력을 지녔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능숙한’ 이란 신속하면서도 숙련된 일꾼이 지닌 뛰어난 재능을 의미하며, 그는 왕 앞에 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천한 자’앞에 선다는 말은 그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여 무시당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잠언의 이 교훈은 인간이 사는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나 참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노력하여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크린의 어머니는 본절을 벤자민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서  행하게 하였고, 벤자민은 그 당시 최첨단인 인쇄술에서 탁월한 기술을 갖추고  늘 이를 자랑하였지만, 그는 이신론자이지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한편, 어떤 회사의 인사팀장은 가능하면 기독교인을 신입사원으로 뽑지 않았는데, 열심인 신자일수록 회사에 대한 애정도 책임감도 없어 촌각을 다투는 일에도 교회를 핑계로 퇴근해 버리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예배도 좋고 일도 좋습니다. 이 모든 일에 균형을 잡을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이 이방 사회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총리가 된 것은 신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일에 능숙하고 민첩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왕앞에’ 서도록 노력해야만 하며, 또 성경은 우리를 위해 좋은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 23:1-3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목에 칼을 것이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

본절은 관원의 식사 초청 시 긴장하여  의도를 파악하라는 현자의  7번째 교훈입니다. ‘관원’이란 ‘다스리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평민이나 하급관리가 아닌 통치자를 보좌하는 궁정의 고위직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대단한 권세와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에는 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으므로, 제자들은 잔치에 초청받은 속내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화려한 대접에 마음이 팔려 경솔히 행동한다면,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자나 권세 있는 자들은 결코 공짜로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제자는 마땅히 숙고하면서 초청에 응해야 하고, 식사 시에도 ‘목에 칼을 두라’는 현자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관원의 면전에서 식탐을 부리면 관원의 속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어 올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식탐 때문에 리브가와 야곱에게 이용당하였고 결국 에서를 축복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따라서, 현자의 권고에는 음식에 대한 하찮은 식탐 때문에 정의를 그릇치기 보다는 네 목을 긋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를 상기시킵니다. (1)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2) 범죄하게 이끈다면 몸의 일부라도 잘라내겠다는 결의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30).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본절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권면합니다. ‘애쓰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힘써 일하다’ ‘곤비하다’라는 뜻으로, 본문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지칠정도로 과도하게 노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가난이 나쁜 것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부자와 행복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와 기회라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재물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안되고(전9:11), 하나님이 재물얻을 능력을 주셔야만 가능함을 깨닫는 것입니다(신8:18). 또한, 부자가 재물을 맡은 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 재물은 독수리처럼 날아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를 목표로 산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돈에서 안전과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 본성이기에 인간은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주인 삼은 뒤에, 비로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안전을 추구할 것입니다 (마6:24,25). 그러므로, 부가 현명한 노력, 즉 부지런히(10:4), 절제하며(21:17),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획득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축복입니다(3:16).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마음으로 획득된다면, 부는 저주가 됩니다(10:2;11:4). 우리는 늘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매일묵상(2023/5/15-19)

잠언22: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73년의 인생을 살며 3000명의 제자를 둔 공자의 입학금은 “한 다발의 건육”이었고, 교과목은 ‘육례(六禮)’라는 현실교육이었습니다: 예절, 음악, 활쏘기, 말 타기, 글쓰기, 셈하기 등 6가지 전문 과목으로, 평민들도 배워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논어는 동양의 리더들을 키워냈습니다. 물론 <논어>에는 신에 대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아, 성경과는 그 출발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같은 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근원에서 어떤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22절부터 나올 ‘서른 가지 교훈’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둘째는 고결한 인격입니다. 부에 대한 갈망, 부자의 호의를 받으려는 자세, 술취함, 부모에 대한 불순종, 성적인 부도덕, 기타 이 같은 행동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서른 가지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추가적으로, 본절은 그들을 보낸 자들( 부모나 후견인)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부합된 삶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갈대아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왕을 섬기도록 훈련받았습니다(단1:3-4).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은 모세율법을 아는 오직 이 네 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기도하며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2: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2절과 23절은 한 쌍의 교훈으로, 22절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금지하고, 23절은  그릇 행동한 자는 재판장이신 주님께 목숨을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먼저 22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자를’에 해당하는 원어는 ‘딸’이며,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하반절의 ‘곤고한 자’란 히브리어 ‘아니’의 번역으로, 누군가에 의해 부당하게 압제와 고통 당함을 뜻합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된 출입구로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경제적 측면이나 사법적 측면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약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도리어 보호하고 변호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당연하나,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경제적 불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여 거래과정에서의 불공정성을 막으려고 노력하며, 재판과정에서의  불의를 막기 위해 헌법에서조차 약자 보호규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은 힘있는 자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혹시 기준이 되는 법률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려할 때,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의 문제까지도 처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법률과 제도만으로는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담겨야만 비로서 온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들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잠언22:23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새번역)

23절은 약자를 탈취하고, 압제하는 자를 처단하시는 우주의 재판장을 밝힙니다.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 지식은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만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을 통해 이방민족들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심판 집행은 섭리 가운데 숨겨져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라는 도구 전에, 국가라는 질서를 세우시고 범죄를 인간이 다루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 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롬13:1)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권력집단의 범죄는 매우 심각하나 국가 자체에서 다루기 쉽지 않아서, 심판의 섭리가 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섭리적 심판을 통해 이들을 몰락시키시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는다는 것이 본잠언의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 통치자 아합 왕이 범죄하자, 주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범죄한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켰습니다 (왕하9장,10장). 한편, 하나님의 정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주님을 재판장으로 정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행18:31). 성도에게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약5:8,새번역).

잠언22:24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아라.”(새번역)

좋은 보금자리를 놓고 싸우다 진 바닷가재에게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을 주입하면, 다시 힘을 내어 승자에게 무모한 도전을 한다고 합니다.  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지만, 바닷가재는 호르몬의 작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그런 행태가 습관화 인격화 되어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현자는 제자들에게 이를 경계합니다. 현자가 보기에, ‘성급한 사람’과의 교제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라, 강도짓(22,23)을 하여 파멸당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은 약자를 압제하는 자를 심판하여 생명까지 몰수하시는 반면, 성을 잘내는 사람의 길에는 자기파괴의 함정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급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주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교만하며 경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1:20).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분냄’이란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하나로,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갈5:21), 이웃에게도 회피 대상이고, 경멸을 받습니다. 문제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래의 심판이 뻔히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친구나 배우자 등을 선택할 때 신앙의 요소만큼이나 인격의 요소도 이처럼 중요합니다. 24절의 교훈은 당연하나, 25절은 좀 더 큰 이유를 알려줍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29:1)

잠언22:25
네가  행위를 본받아서 올무에 걸려 들까 염려된다.”(새번역)

‘성을 잘내는 사람’이란 ‘히브리어에서 ‘분노의 사람’이란 뜻으로, 현자는 제자들이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제자들 역시 쉽게 화를 내는 사람과 동행하면 그와 유사한 성격으로 발전해 나갈 우려와 자신을 지킨다고 하여도 타인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연류되어, 뜻하지 않는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좋지 못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악(惡)에 물들게 된다(근묵자흑)’는 교훈이나, 공자가 말한 ‘지란지교’도 같은 내용입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향기 그윽한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향기는 맡을 수 없게 되지만, 자연히 그에게 동화되어 착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치 악취가 풍기는 절인 어물을 파는 가게에 들어간 것과도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악취는 맡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에게 동화되어 악한 사람이 된다.” 성경의 사례입니다. 여호사밧은 경건한 유다 왕이지만 북왕국의 악한 왕 아합 과 연혼하여 큰 위기들을 겪습니다.먼저, 아합 왕의 요청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 왕과 전쟁을 할 때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은 화살에 맞아 죽었으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후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경책을 받았습니다. 더 문제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그 아들 여호람은 아주 악한 왕이 되었으며, 악한 여자 아달랴의 구데타에 의해 유다 왕국은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못된 사람은 입술을 잘못 놀려 올가미에 걸리지만 착한 사람은 곤경에서 벗어난다.”(잠언12:13,공동번역)

매일묵상(2023/5/8-12)

잠언22:18
“(
왜냐하면)이것을 속에 보존하며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원문은 ‘키-왜냐하면’로 시작하여, ‘지혜자의 말씀을 들어라’는 권면(17절)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약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두 가지 유익한 결과를 낳습니다: (1)자신의 아름다운 인격, (2) 지혜를 전하는 원천. 이어 비유로 소화기관이 사용됩니다. ‘네 속’의 문자적 의미는 ‘네 창자’이며, ‘이것을 네 속(창자)에  보존한다’는 표현은, 교훈들을 잘 소화하여 인격을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또, ‘네 입술 위에 함께 있다”는 의미는 인격으로 통합된 지혜의 말씀을 표현할 능력을 힘써 갖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후단에서 ‘아름다우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17, 18절은 인격을 가꾸는 방법과 그 효과를 말합니다. 먼저, 지혜의 말씀을 귀로 잘 듣고,  마음으로 묵상하며, 더 나아가 간절히 사모하고 열망함으로써 인격화(내재화)시킨 후, 자신만의 지혜의 표현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인격이 형성되고, 타인에게 교훈을 전하는 지혜의 또 다른 원천(지혜자)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힘써 아름다운 말을 연구하여 잠언 3천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 중 으뜸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보배를 담기 위해 택함 받은 거룩한 질그릇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의 향기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그릇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잠언22:19,20절
“이는 네가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건전한 충고가 담긴 서른 가지 교훈을 써 주지 않았느냐?”(새번역)

19절은 제자들이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는 것”을 교훈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스승은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자신의 비법을 ‘특별히 알려 준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그분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이자 영생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그러면, 현자의 가르침이 하는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핵심은 교훈의 궁극적 저자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마음을 다하여 의뢰하게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입니다. 현자의  교훈들, 즉 22절부터 등장하는 ‘건전한 충고가 담긴 서른 가지 교훈’은 이미 현자의 삶에서 그 가치가 검증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마음에 간직하여 행한다면 역시 큰 유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은 필수적입니다. 19절은 ‘오늘’이라고 이 사실을 힘주어 말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간직한 바로 지금 실천해야 하며, 이는 고대의 교훈을 현재와 미래 세대에 연결시켜주는 고리입니다. 잠언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주님을 능동적으로 신뢰하는 삶은 고대 근동의 현자들과 솔로몬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이란 놀라운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은 현자의 가르침을 포괄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애게 온전한 삶의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유대인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시키는 표지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시편148편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새번역)

본시는 개인과(146편) 공동체(147편)의 찬양을 넘어, 모든 창조물로부터 드려지는 창조주에 합당한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할렐루야(1a)
    B 하늘에서 찬양(1b-6)
    C 땅에서 찬양(7-14b)
 D 할렐루야(14c)
 “주님을 찬양하여라”는 동일한 명령이 하늘(1)과 땅(7)에 내려지며, 찬양의 요청마다 시인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5-6,13-14). 하늘의 찬양이 합당한 것은 주님(야훼)은 만물을 창조, 유지, 통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5-6). 또 그분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님으로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온땅이 찬양을 드리는 것 역시 마땅합니다. 실로, 시인이 믿음의 눈을 뜨자 광풍조차도 그분의 말씀(명령)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8). 선지자 요나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는 고백과 함께 던져졌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되어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 한 바 있습니다. 자연과 언약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인입니다(9-13). 이것이 신자가 갖고 있는 지혜와 특권으로서, 세상은 두려워 하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내하고, 그 영광스러운 섭리를 경험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따라서, 시인은 끝 절에서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은혜와 영광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시편148:14).

시편149편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새번역)

본시편은 하나님의 새 일, 즉 장래에 도래할 그분의 왕국과 성도들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쁨에 가득차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할렐루야(1a)
        B 주님의 새 일 찬양-구원(1b-4)
        C 주님의 새 일 찬양-승리(5-9b)
    D 할렐루야(9c)
시인은 주님이 행하실 새 일로 인해 ‘춤,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합니다. 그것은 구원(1-4)과 승리(5-9)로 현실화 될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1)은 성전에 모이는 ‘시온의 주민’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들(2)의 상징입니다. 신약에 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고 성령께서 중생시킨 자들이며, 구원에 대한 감사함을 갖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4;요1:12,13). 그들은 그들의 ‘왕’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 역사를 보면 야곱의 육신의 후손들이 세운 다윗 왕국은 이미 멸망하였으나, 그 왕국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통치 때문입니다(사9:6,7). 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시대인 현재는 복음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면서 확장됩니다. 성도들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두 다 응답받는 특권(요15:16)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시킬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6; 눅10:19).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은 물론 악한 천사들도 심판하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마19:28). 본시는 이를 믿음으로 증거하고(6-9), 이 또한 우리 소망 중의 하나입니다..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시편149:9).

시편150편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절)

마지막 시편입니다. 세상을 이긴 성도들(149:5-9)이 ‘구속받은 자’의 찬송을 부르는 장면으로, 소리,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약, 퉁소, 제금 등이 총 동원되었습니다. 150편은 노래하며,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0) 예언하고, 요한계시록은 그 완전한 성취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계19:3; 5:8–14; 7:9–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도성인신하셨고, 죽고 부활·승천하사 지금 불복종하는 모든 것을 복종시킴으로써 구속사를 완성하고 계십니다 (사45:23;빌2:11). 그러므로, 예배 시 우리의 찬양은 이런 만유의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어야 마땅하며, 이것이 복음이 간직한 영광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과 축복에 비한다면, 애굽에서의 구원, 가나안 땅을 주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그 사랑은 상징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두 돌판(십계명), 성막, 성전 등의 파괴, 범죄로 인해 영원히 약속된 가나안 땅에서의 추방, 또 영원한 약속을 가진 다윗 왕조의 멸망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 복음이 계시하는 여러 진리들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부활, 마음의 할례 등 -은 이것들의 실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본시편의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찬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불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150:6).

매일묵상(2023/5/1-5)

잠언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본절은 이른바 ‘사랑의 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얽히다’는  ‘줄로 단단히 매다’라는 의미로,  아이의 마음에 단단히 매어진 ‘미련한 것’을 채찍으로 쳐서 제거하도록 교훈합니다. 물론, 그 전에 타이르고, 모범도 보이는 등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가르쳐야 하나, 미성숙한 아이의 몸에 가해진 충격은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징계의 채찍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징계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의 인격을 다듬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울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하지 않아 아이가 잘못되는 것과,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자녀라는 은사를 지혜롭게 교육하여 많은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가정에서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 나라의 본질은 그분의 계명이 실천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한편, 본절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성인이나, 정신적,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비추어 볼 때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격에 견고하게 묶여져 있는 영적 우둔함, 징크스에 대한 두려움, 죄의 성향들을 제거하기 위해 강한 채찍이나 회초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징계 후에는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어질 것이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7:14).

잠언22:16
이익을 탐해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과,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22:1-16절의 주제는 ‘부와 도덕’에 관한 교훈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재물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신8:17,18). 따라서 겸손히 그분의 뜻(도덕)을 행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15-16절은 이 단락의 결론이며, 아이들에 대한 바른 교육(15)과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주님의 주권(16)을 교훈합니다 . 만약,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많은 재물 보다’는 ‘좋은 이름’을 추구해야 합니다(22:1). 사람이 부를 증식시키고, 세력을 확대하는 두 가지 방법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그 반대의 결과를 말합니다: “가난해질 뿐이다.” 왜 이런 역설이 성립할까요? 부자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부자의 호의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아주 냉정하게 차 버립니다. 따라서,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한 그는 가난해지기 마련입니다. 또, 가난한 자를 학대하여 그들의  삶에 긴요한 재산을  빼앗는 자는 선물이 필요 없는 부자에게 주는 사람과 같은 바보입니다. 그는 주님의 심판의 칼을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31). 주님은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가난한 자를 보호하시는 ‘도덕적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입니다. 따라서 권력, 명예, 재물을 가질수록 주님을 경외해야만 한다는 교훈이,  22:1-16 단락의 결론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잠언22:17절
“17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0:1-22:16은 솔로몬  잠언의 모음집이지만, 22:17- 24:34은 익명의 현자들의  교훈집으로, 주님(야훼)을 경외하는 실천적 지혜의 삶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2:17-21), 30개의 교훈(22:22-24:22), 그리고 6개의 추가적인 교훈(24:23-34)으로 되어 있습니다. 17절의  ‘지혜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문구는, 전통적으로 전해진 익명의 현자들의 가르침이며, 이집트를 비롯한 근동의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 기원이 외국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은 주님 중심의 이스라엘의 지혜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한편, ‘지혜자의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은 바로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은 어느 현자가 전통의 교훈들을 묵상하고 실천하여 자기 것(지식)으로 만들고 제자들에게 전달하면서 순종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둘지어다.’ 우리는 지혜의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그 가르침에 몰두하여야 합니다(1:8). 그러나 모든 지혜의 말씀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16). 실로,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죄인을 구원시키고 믿음으로 신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삶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본절을 포함한 모든 현자의 가르침의 목적이 여기(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시편146편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 새번역)

146편에서 150편까지 다섯 편의 시는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과 끝을 맺으면서, 오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찬양(146편)이 공동체로(147편), 그리고 하늘과 땅으로 확대 되고(148편), 진정한 찬양의 주체인 영광을 얻을 성도들의 찬양(149편)에 이어, 호흡이 있는 모든 것들의 찬양(150편)의 촉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46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초대(1–4)
      B      창조주 하나님(5–6)
         C      보존하시는 하나님(7–9)
      B′      왕이신 하나님(10a)
    A′      찬양의 초대(10b)

‘할렐루야- 너희들은 야훼를 찬양하라’는 외침은 복수형이지만, 곧 단수로 바뀌어 시인의 개인적 찬양의 이유가 열거됩니다. 죽을 인간은 의지할 가치가 없으나(3-4),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변치않는 분이기에 신뢰해야 합니다(6). 주님은 긍휼과 정의를 베푸시며, 갇힌 자를 해방시키며, 맹인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7-9). 끝으로, 시인은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대대로 통치” 하시기에 참으로 그분을 찬양하자고 초대합니다(10). 아직 현실은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지만, 마지막 부활의 새창조 때에는 이 시편의 찬양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승천하셨고,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심’(눅1:33)으로 이 찬양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146:5,새번역).

시편147편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합니다. 먼저, 주목할 표현은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입니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마땅한 일이란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합니다. 시편기자가 창조, 보존, 구속의 사건들을 묵상해 보니,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분이시며, 그분에 대한 찬양과 찬송은 ‘마땅한 일’이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7, 12절에는 각각 찬양의 선포가 나오며, 시는 이를 중심으로 3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세실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위대하신 분인 동시에, 도덕적 분별력을 가진 백성을 돌보시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7-11절에서, 시인은 그분이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도 먹이를 공급하시는 넉넉한 분이므로, 당신의 백성들은 군대(기병과 보병)나 힘이 아니라,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인자를 바라고 살기 원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12-20절은, 창조세계를 통제하는 핵심적 요소는 그분의 말씀임을 묵상한 뒤, 이방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분의 ‘법도(말씀)’를 간직하는가의 여부임을 밝히면서, ‘할렐루야’로 끝맺습니다. 본시에서 흐르는 주제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적 재물, 명예, 권력, 지혜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자들입니다 (중생).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시편147:19,새번역)

매일묵상(2023/04/24-28)

잠언22:12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새번역)

본문에서 ‘지식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다아트’는 ‘지식’ 혹은 ‘지혜’를 의미하는 추상 명사로서, ‘지식’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을 보호하사,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거짓된 말로 지식을 왜곡하려 시도할 때, 오히려 그의 말을 무너뜨리고 지식을 견고히 세우십니다. 한편, ‘신의가 없는 사람’의 원어 ‘보게드’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신실하지 못한 부부 관계를 의미하며 (말2:14), 이는 주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본절의 ‘보게드’ 역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의가 없는 악인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는 어떤 말을 하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그는 패망할 것입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믿고, 30Km 떨어진 요단 강으로 가서 7번 몸을 담그자 그의 나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냥 시리아로 가지 않고 선지자에게 와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흙을 싣고 떠났습니다. 이를 분하게 여긴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 선지자가 요청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집에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엘리사 앞에서 여전히 거짓말을 하자, 그는 엘리사의 저주를 받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잠언의 경고가 늘 성취되지는 않지만,  최후의 심판 시에는 확연히 성취될 것을 믿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잠언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13절(게으른 자)과 14절(음녀)은,  ‘신의가 없는 사람’(12절)의 예입니다. 게으름 자체가 죄이지만,  쉽게 돈을 벌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죄에 빠질 우려가 큽니다. 그러나 그 게으른 자는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깁니다”(16:16). 그는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을 수  많은 핑계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13절은 그 중 하나로서,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자라는 ‘놀라운 핑계’를 밝힙니다. 물론, 그 당시 삼림에는 많은 사자가 있어, 밭이나 들에서 종종 사자를 만나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 한복판에 야생의 사자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거리’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사자’이기에, 지금 잠언은 ‘게으른 자’의 말에 담긴 거짓을 폭로합니다. 만약 밭에 나가 사자를 만나는 것이 싫으면, 장사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집을 세워야만 합니다(창3:17-19). 사람의 모든 수고에는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위험이 클수록 보답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핑계에 안주하고 일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수고에 의지해 살아야 하기에, 사자뿐만 아니라 전쟁, 전염병, 질병 등 일하지 않을 ‘환상적인 구실’을 계속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런 게으른 생활 방식 때문에, 그의 인생(독신)이나 공동체(지도자) 그리고 가정(결혼)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게으름은 물론, 불신앙과 두려움으로 핑계거리를 찾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언26:14)

잠언22:14절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23:27절에서는 “음녀는 깊은 구덩이다” 하여,  음녀 자신이 ‘깊은 함정’으로 묘사되나, 13절은 “음녀의 입”이 깊은 함정이라 말합니다. 이 치명적인 여자는 이미 2장, 5장, 6장,7장, 9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었으며, 본절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여사냥꾼으로 등장시키는바, ‘깊은 함정’은 바로 그녀의 입에 있습니다. 달콤한 ‘말’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은, 불길한 위험과 회복할 수 없는 파멸을 숨긴 덫입니다. 잠언 2장에서 밝힌 그녀의 정체는, 거리 거리를 다니며 청년을 유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음녀가 사람을 해친다는 사자보다 위험한 것은, 야생의 사자가 다닐 수 없는 성곽 내의 거리를 활보하는 매우 위험한 맹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규정을 두셨지만(출20:14), 본잠언은 간음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즉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란 표현 자체가, 주님의 명백한 심판의 색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간음자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음녀의 깊은 함정에 빠졌을 때입니다. 한편, 23:28절에 가면 그녀의 이미지는 사냥꾼에서 ‘강도’로 변합니다. 이 두 개의 묘사를 통해,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자는 모든 재산과 심지어 귀한 생명까지 빼았긴다는 경고를 듣게됩니다. 대표적인 성경의 예는 삼손과 들릴라입니다. 삼손은 음녀 들릴라의 함정에 빠져 원수에게 잡혔고, 두 눈을 잃은 것은 물론, 명예와 생명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특히 조심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2:22).

시편144편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13)

144편은 140-143편의 칠흙같은 밤을 지나 오래 기다렸던 여명을 노래합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1-4)과거의 구원, (5-11)현재의 건지심, (12-15) 미래의 번영. 먼저, 1-4절에서 다윗은 과거의 구원을 회상하며 찬양드립니다. 다윗은 드디어 왕좌에 올랐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잘 것 없는 자신에게 베푸신 그 선하심에 놀라워 합니다. ‘반석’은 불변성을, ‘피난처’는 보호하심을, ‘요새’는 둘러싸는 힘을, ‘산성’은 접근 불가의 안전을, ‘방패’는 공격의 순간에 보호하심을 각 의미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구원자라는 진리를 외치고 있습니다(참고18:2). 둘째로, 5-11절에서 다윗은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건져달라고 간구합니다. 5-6절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18:9-17절과 유사합니다. 과거에 구원을 받아 찬양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만, 현재 위험은 계속되고 있으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였습니다. ‘반석과 방패’라는 믿음의 고백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은 다윗은,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서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한편, 오른 손은 맹세를 할 때 사용되었기에, ‘거짓의 오른 손’이란 원수들의 신의 없음을 표현합니다. 끝으로, 12-`15절에서 다윗은 미래의 번영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 새롭게 왕이 된 다윗은 가정, 경제, 그리고 국가의 축복을 구하면서 주님의 백성임을 생각하고 번영을 확신합니다. 이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하는 모델이자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백성이 이리 되니, 아, 복스러워라. 야훼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백성, 참으로 복스러워라.” (시편144:15 공동번역)

시편145편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절)

본시편은 마지막 알파벹시로서(21절),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도입부(1-2),, 주님의 위대하심(3-7), 은혜로우심(8-16), 의로우심(17-20)을 노래하는 본문,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자는 결론(21)의 구조입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3-7)과 은혜로우심(8-16)을 함께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이 두 속성은 그분의 창조물에 모두 공존되어 있습니다. 태양은 매우 거대하지만, 자그마한 지구 역시 만드시고 그 태양의 빛과 열기로 생물이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16). 구속사를 보면, 홍해를 가르시는 등 위대한 능력으로  야곱의 후손들을 구속하여 내신 그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십니다(8; 출34:6-7).  백성들의 황금송아지 예배를 참으시고, 다시 두 돌판에 십계명을 적어 주셨습니다.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신 동시에 위대하십니다(17). 그러므로,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두  보호하시지만, 악인은 다 멸하실 것입니다(18-20). 그분의 이 속성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과거). 한편, 왕으로 등극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불순종하는 모든 것들을 복종시키고 계시며(현재), 마지막 날 사망을 멸하시고 우리를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미래).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다서25절)

매일묵상(2023/4/17-21)

잠언22: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랍비들의 격언 모음집’은 관대함, 겸손,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3대 특질이라고 말하는 바, 본 잠언에서 ‘선한 눈’이라 함은 ‘관대한 사람’을 말합니다. 관대한 사람은 8절에 언급된 악을 뿌리는 사람과 대조됩니다. 전자는 자신의 소유조차 남에게 주는데, 후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9절 후단은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준다’는 말로 관대한 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실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자신의 고기와 곡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푸는 모습이야말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은 축복의 성격과 축복을 주시는 분에 대하여 상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의 장본인이시고, 겸손하며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 영광,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22:4)생명 속에는 그분과의 교제가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분이었기에 ‘주의 벗’으로 불렸습니다(사41:8).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가자, 가신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승리하고 일체의 재물을 되찾아 예루살렘 근처 왕곡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살렘 왕 멜기세덱이 영접하자, 그는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지만, 악한 소돔 왕에게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려주었습니다. 악인의 소유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14-15장). 이런 행동은 아브라함이 관대함을 넘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재물, 영광, 생명(장수)도 누렸지만, 실로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삶이 지향할 목표를 보여줍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29:7).

잠언22: 10
거만한 사람을 쫓아내면 다툼이 없어지고, 싸움과 욕설이 그친다.”(새번역)

‘다툼’이란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면 잘 나타나는 현상으로, 10절에서 말하는 ‘거만한 사람’이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거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츠’이며 조롱을 뜻합니다. ‘거만한 사람’은 죄(잠 14:9)와 심판(잠 19:28)을 비웃으며, 자신을 위한 길을 고집하는데,  그의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중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의 특징적 악은 ‘교만’입니다. 그는 미련한 자임에 틀림 없지만 고칠 수가 없는 것은, 어떤 책망이나 지혜로운 말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조롱하시고 쫓아내십니다(잠3:34).  반 루엔이 말합니다: “한 공동체의 가입과 탈퇴 기준은 중요하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한 어떤 단체도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때때로  구성원을 추방시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거만한 백성을 심판하여 추방시키거나 멸절시킨 예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첫 번째 예로, 그들을 추방시킴으로 에덴 동산은 비로소 평화를 찾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일곱 족속들은 그들의 범죄로 거의 멸절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역시 거만하게 모세 율법을 도외시 하다가,  1천년 동안 살던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이는 또한 최후의 심판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많은 무리에게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 자신의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섬길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잠언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개정개역)

오래 전 미국 여행 시 차량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미국 사정에 밝은 처남 가족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아니라, 권력자인  왕과 친분관계가 있다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런 관계에 호소하여 국법질서가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왕은 친구가 없고, 혹 있어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을 친구로 삼을 것입니다. 왕의 친구는 통상 고결한 지혜자로서, 그의  입에서는 왕이 감탄할 만한 덕스러운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로 번역되나, 정결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연히 품위 있게 말한다는 취지의 개정개역이 타당합니다.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기에,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는 말도 품위 있게 하기 마련입니다(16:23). 다윗 왕의 친구로 아렉 사람 후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반역 시에도  충성스럽게 예루살렘 성 내에 머물면서 당대의 모사 아히도벨의 급습 전략을 막아 다윗을 돕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도,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주저 없이 모리아 산으로 향한 것은  불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요15:13-16). 그리고 그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이어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친구되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마지막 날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행하십시오! 그러면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시편143편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6절)

이 시의 저자는 다윗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시는 주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 온 시인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요청으로 시작됩니다(1). 시인은 이 고난이 혹시 내 죄로 인한 심판은 아닌가 고민합니다(2). 이는 고난 당하는 모든 사람이 갖는 갈등이며, 우리를 좀 더 경건하게 합니다. 한편, 시인은 원수의 추격을 받아 언제 발각되어 죽을지 모르기에 낙담합니다(3-4). 그러나, 시인은 믿음을 갖고 주님의 과거 구원의 행적들을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키다가(5), 드디어 6절의 기도에 이르러 비상할 준비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주님의 은총과 구원이 절실합니다. 따라서 7절부터 시인은 11개의 탄원을 쏟아내며 더욱 열정적인 기도를 드립니다(7-12).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우리의 기도가 활화산과 같이 나오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푸른 풀밭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막11:22-2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 시편의 구성입니다.

   A1 (1–2) 관계- 주님의 성품
    B1 (3–4) 위험- 낙담하기 쉬운 인간
      C1 (5–6) 신뢰- 주님의 행적들
         D (7) 절박감 – 오직 주님뿐!
      C2 (8) 신뢰- 주님이 주시는 사랑
    B2 (9–10) 위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
  A2 (11–12) 관계- 주님의 성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편143:10).

시편143편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2절)

“감옥은 의인들로 붐비고, 교회는 죄인들로 넘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범죄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억울해 하는 반면, 훌륭한 시민들은 교회에 가서 오히려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면 의가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을 갖게 마련입니다(롬3:20).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 만군의 주님을 보자 자신의 입술이 부정함에 절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자, ‘주여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눅5:8). 본 시편 2절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여실히 느낀 다윗이 긍휼을 탄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 내용이 “(언약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에게 이르렀을 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는 선포가 나왔고, 갈라디아서2:16과 로마서 3:9, 20에서는 죄의 보편성을 단언하는 구약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나면, 복음의 소망을 간직하고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20대에 살인범으로 몰려 25년 간 복역하다가 DNA 감식으로 무죄가 입증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복수심으로 불타 10여년을 복역하는 중 어릴 때의 기독교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 무죄로 석방되는 날 “이제 남을 미워할 시간이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