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30-2/3)

잠언21:10절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새번역)

본 잠언의 악인은 습관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의 원어는 “네페쉬’이며, 생물이나 사람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잠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악인은 오직 악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생물과 같다는 색조를 전달합니다. 만약 이를 ‘욕망’이나 ‘의도’라고 표현하더라도, 악행에 몰두하는 악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개정개역은 ‘영혼’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가까운 이웃’은 그들의 악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웃 사랑의 결여는 악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악인은 가족이나 친척,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악한 목적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무자비하게 대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비(햇빛, 공기, 비 등)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를 배우지 못하니, 타인은 다만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타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경우, 큰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 전형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반성하여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대신,  아벨만 없으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 반대가 의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그 유익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상’은 오직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는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편1:6, 새번역).       

잠언21:11절
“오만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어수룩한 사람이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지식을 더 얻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오만한 자의 벌과 지혜자의 번영을 전제하면서, 이런 결과는 쉽게 흔들리는 어수룩한 사람의 교훈에 효과적임을 밝힙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11절의 취지는 어수룩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특성을 대조한다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어리숙한 사람은 교훈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체험(예- 벌을 받는 오만한 자를 목격함)을 해야 비로서 배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 바로 지식을 얻는 자라고 생각합니다(잠언19:25). 다른 견해는, “어수룩한 사람은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깨달아 지혜자가 되고, 그 후에는 책망만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고 읽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수룩한 사람은 이중의 교육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범죄와 형벌 사이의 인과관계를 배웁니다. 둘째, 그 배움은 분별력으로 이어지고, 미덕과 보상의 관계를 배우는 데까지 갑니다. 그땐 지혜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편, 잠언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를 만드는 것이며(1:8), 이는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고전1:24). 복음을 깨달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죄인은 의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은혜에 감격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이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는 것은, “이 복음은….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언3:15).

잠언 21:12절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2절은 오만한 자는 물론, 모든 악인을 다루시는 주님께 눈을 돌립니다.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이는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압제하는 악인을 뽑아 내시려고 최선을 다 하실 것입니다. 세속 역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활동을 포착하지 못합니다만, 성경기자들은 그것을 보고 기록하여 우리로 교훈을 얻게 합니다(고전10:1-12). 창세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폭력이 충만하고 어릴 때부터 악한 자들로 가득차자,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어 모두 죽이셨습니다. 오직 의를 행하는 노아와 그 여덟식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어 아브라함 시대의 죄인들 소돔과 고모라 성읍 위에 불과 유황을 비오듯이 퍼부어 멸망시켰습니다. 오직 의로운 롯과 그 가족만 구원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빌립보 간수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전도와 연결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한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재앙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사사기부터는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어 살게 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감찰하시고, 그들이 반역의 길을 걸어 갈 때마다 이방민족을 통해 징계하시지만, 회개하면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도 다 그런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지혜의 길입니다.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잘 살핀다.”(잠언21:29,새번역)

시편 124: 1절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새번역)

다윗의 구원의 위대함을 4가지 큰 위험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먼저, 지진입니다. 지진은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3). 둘째는, 홍수입니다. 홍수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습니다(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사나운 맹수를 만나면 산 채로 잡혀 죽습니다(6). 넷째, ‘새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도 같은 운명입니다(7).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다치지 않고 원수의 그물에서 벗어났으며, 위협 그 자체도 파괴되었습니다(7). “주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 이는 다윗의 고백이자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무엘하5장은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분노한 모든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여 두 번 공격하였습니다. 그 위협을 본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처음에는 승리의 확신만을, 다음에는 구체적인 전략을 주심으로 모두 승리합니다(삼하5:17-25). 그 다윗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이르면 다윗이 드린 이 땅에서의 구원의 노래는 영원한 구원의 주제로 발전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 주님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 하늘에 간직한 영원한 유업, 그리고 보호하심을 찬양합니다(벧전1:3-9). 구약과 신약의 구원이란 메시지는 동일하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124:8,새번역).  

시편 125: 1절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새번역)

본 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전을 찾는 신앙 공동체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1,2). 시인이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선과 악이 섞여 분열되었고, 악인들의 득세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3). 시인은 주님이 악한 통치를 종식시키실 때를 소망하면서(4), 평화를 기원합니다(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페르샤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잘 이해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안전의 근거 (1)
B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2)
C    악에 대한 승리의 신뢰(3)
B′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4–5a)
A′   평화의 기원 ( 5b)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은 움직일 수 없는 주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어떤 인생의 폭풍에도 안전하게 됩니다. 둘째, 신뢰는 섭리로 통치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악한 자가 득세할 때 신자는 주님의 심판을 믿고 악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인내합니다. 셋째, 신뢰가 환경에 의해 도전받을 때는 기도의 때입니다. 다만, 그 기도는 악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을 향합니다. 즉 악인은 주님 손(섭리)에 맡기고 주님의 백성들이 악한 통치에 대항하다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환경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합니다. 요약하면, 시인은 “두려움에 솔직하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편125:4,새번역).

매일큐티(2023/1/25-27)

잠언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기심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사이도 파괴시킵니다. 집안의 경제적 주도권을 갖고 다투는 모습이 그 예입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대비된 ‘큰 집에서 산다’는 문구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저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자는 비도 이슬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후자는 윤택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보다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상식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낫지만, 솔로몬은 ‘다투는 여인’ 때문에 전자가 낫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돕고 살면, 초가삼간도 천국같으나, 늘 분쟁하고 다투면 아무리 유복한 환경이더라도 남편은 오히려 떨어져 혼자 지내고자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본 잠언은 먼저 아내를 향해 교훈하고자 합니다. 즉, 가정 화목의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남편의 권위를 존중해 주면서 가정을 세우는 것이지,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면 다툼만 일어나니 삼가야 한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시편 122: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본 시편은 긴 순례의 여정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 내에 들어온 감회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2). 시인은 메섹과 게달과 같은 ‘먼 나라’(120:5)의 ‘이방민족’들 틈에서 긴장하며 살다가, ‘형제와 친구’들(8)이 사는 ‘집’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는 감격에 찼습니다. 그는 잘 계획되고 건설된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 각 지파가 몰려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다윗 가문을 통한 통치의 모습을(3-5) 보자 저절로 ‘평안과 복’을 위해 기도합니다(6-9). 예루살렘 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통일성’입니다. 성의 구조 자체도 그렇고(3), 각기 다른 지파들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한 분이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아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4).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임명한 왕을 통해 사건 사건이 바로 잡혀지는 장소에 와 있습니다((5).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에, 시인은 ‘화평과 번영 그리고 복’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온 세상에서 아주 다양한 주의 백성이 교회로 몰려들어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갖고, 한 성령님 안에서 한 주님과 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엡4:1-16). 따라서, ‘기쁨과 일치를 위한 기도’의 부르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시편 123: 1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본 시편은 고난에 처한 시인의 심정과 믿음의 고백을 노래합니다. 121편의 순례자는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산보다 더 높은 분을 생각하고 이기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 조롱과 멸시에 둘러싸인 시인 역시 눈을 위로 돌려 같은 승리를 얻습니다. 실로, 시인의 언어와 기도는 암울한 환경을 뚫고 치솟아 올라, 오히려 그런 고난들을 충분히 포함하는 믿음의 넓이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15:3). 동일한 믿음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이어지기에,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3중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종과 여종이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으로부터 필요한 양식, 휴식, 그리고 도움을 기대하는 간절한 눈길입니다. 신자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괴로움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한 자에게 붙어 ‘조롱과 멸시’(4)를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신자의 길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끝으로,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43:3). 욕은 물론 조롱과 멸시의 말은 살인과 다름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5:22).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말에는 은혜의 소금을 쳐서 맛을 내야 할 것입니다.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멸시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 (시편123:4, 새번역).

매일묵상(2023/1/16-20)

잠언21:6절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새번역)

악함이란 교만을 등불로 삼고(4), 폭력과 구부러진 말로 표현하며(7-8), 은혜가 없고 타인의 파멸을 갈망합니다(10). 그들은 거만하며(24), 종교적이나 위선되고(27), 뻔뻔하나 반성하지 않습니다(29). 5절의 ‘성급한 사람’은 6절에서 ‘속여서 재산을 모든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가난, 결핍’은 ‘죽음과 안개’로 귀결됩니다. 본 절은, ‘속여서 모은 재산’ 자체가 ‘속여 취한 자’를 속인다는 역설을 교훈합니다. 불의한 재물은 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기에, “계획하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5절로 돌아가야 하며, 그 길은 교만을 버리고, 정의과 공평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경외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기에, 악인의 형통을 미워하시고(4), 악인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구약은,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 것 같은 섭리(6), 혹은 대리자인 왕(지도자)을 통해 집행하시거나(1), 직접 하늘에서 집행하시는 경우 등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범죄자 아간을 찾아낼 때 여호수아가 사용한 방법이고, 둘째는 페르샤 왕으로 하만을 처단하게 하신 경우이며,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멸망시킨 경우입니다. 물론, 악인이 회개하면 주님은 긍휼히 여기사 용서하시지만,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그 반면 주님이 미워하는 자는 잠시 그 형통을 더 누리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끝장입니다 (시편73:18,19). 근심은 탐욕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근심을 주님 손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공급을 신뢰한 뒤, 삶을 계획하고 부지런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12:29).  

잠언21:7 절
“악인의 폭력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가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은 ‘속이는 자’(6)와 ‘폭력을 행하는 자’(7)로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멸망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그들이 알지만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여, 정의와 공의의 주님과 원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니’는, 히브리어 동사 ‘가라르’의 번역으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역사를 보면, 주님은 악인이 재물과 권력을 위해 펼쳐놓은 그물에 악인 자신이 걸려들어 멸망당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세운 그 장대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처형된 사례나, 또, 페르샤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도록 정한 그 날에 칙령이 바뀌어, 오히려 유대인의 대적들이 집단 처형된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인도 회개하여 바르게 살면 생명을 얻습니다. 잠언은 이점을 긍정하지만, 어떻게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야합니다.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가 오자,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칼을 가진 모든 자들은 칼로 망한다” 하신 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마26:52). 기적적 치유와 선함을 경험한 말고는 회개할 기회가 왔습니다. 다만, 선택은 말고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격한 갈등의 세상에 남겨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4,45)

잠언21:8 절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새번역)

8절은 3-7절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거만한 자(4), 성급한 자(5), 속이는 자(6), 폭력을 행하는 자(7)에 대하여 ‘죄인’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길은 이중성 때문에 ‘구부러졌습니다.’ 실로,’올바른 길’ ‘곧은 길’은 그들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누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냐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걷는 길(삶의 방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행실은 올바르고, 곧은 길을 걸어갑니다. 솔로몬은, ‘길’이란 은유 대신 ‘행실’이라고 적어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는 동시에, 그런 행실은 올바른 길을 걸어간 뒤에야 얻어지는 인격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죄인의 길’로 행한 전형이 아담이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길이었고, 그것은 다시 전 인류가 걸어간 길로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길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삶이기에 당연히 구부러질 수밖에 없고, 죄인이란 심판과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사망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로잡혀 전 세계로 흩어졌고, 모든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에 반하여, ‘깨끗한 사람’이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실한 양심의 소유자로서 바른 길,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길, 도덕의 길로 곧장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가운데 주의깊게 보시는 하나님의 칭찬은 그들의 참된 보물이며,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은 그들의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시편120: 1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34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시의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시의 의미입니다. 15편의 시들은, 세 편씩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각 그룹마다 다음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고통의 상황(첫째), 주님의 권능(둘째), 주님 안에서 안전(셋째). 첫 번째 그룹의 시작인 120편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서 시인을 향한 중상모략을 언급합니다.  그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었고, 응답받았습니다(1,2). 시인은 이 경험을 통해 “환난을 당하면 기도하고 주님의 돌보심 속에 머물러라!”고 교훈합니다. 한편, 4절(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은 악인의 본질이나, 혹은 악인에 대한 확실한 보응을 의미할 수 있지만, ‘보복하지 말고 주님 손에 넘겨라’( 잠언20:22; 롬12:19)는 말씀에 귀착하는 면은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잘못, 거짓말, 속임 등으로 피해를 당하였을 경우, 사적인 복수 대신, 그 사안을 주님 손에 맡기고 거기서 떠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화를 가질 수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5-7) 시인에게서 인내의 모습을 보게됩니다(5). ‘메섹’은 이스라엘 북방 한계 밖에, 게셀은 아라비아 광야 남동부에 있기 때문에, 거치른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지금 시인은 평화를 원하나, 세상은 독을 머금고 싸우려 합니다(7).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심판자이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시편121: 1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순례자의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요단 동쪽이나 팔레스틴 평야쪽에서 오르고 있다면, 가파른 산 길이 보이면서 큰 산들이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저 산들 속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무사히 성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혹은 인생의 큰 산들이 가로막을 때 나를 지켜주실 분은 누구인가?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 이때 시인은 믿음의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어떤 것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위협이 일어나도, 삶의 여정이 어려워도 그분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2). 심지어 하늘에 늘 떠 있는 해와 달 역시 그분의 섭리 하에 있기에 안전하게 순례의 여정, 인생의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6). 시인의 마음에는 큰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합니다(3-8).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안전만은 확실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창조주에서 시인을 돌보시고 구출하시는 구속주로 역할이 바뀌어서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영혼을 지키시는 것 뿐만 아니라, 시인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실 ‘동반자’이십니다(8). 시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성부), 구속주이시고(성자), 우리와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분(성령)임을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이렇게 안전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시인은 기쁨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매일묵상(2023/1/9-13)

잠언 21:3절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
(새번역)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이며, 21:3절은 본론의 시작입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한 능력의 주님(2)은, 사람의 외형적 행위 보다 그 이면을 중시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온전한 제사(예배)와 마음을 쏟는 찬송과 기도를 기뻐하시지만, 이런 외형적 예배보다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정의와 공평’이라는 윤리적 행동을 더 좋아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은 이를 분별하기 어려우나, 주님은 모두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주제를 분명히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제사와 의식 규정 보다 십계명을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호세아서는 아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인용 마12:7)고 못 박고,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6:7)며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구약의 제사 및 의식 규정은 폐지되었으나, 도덕규정은 단 하나도 폐지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마517-20). 주님은 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셨습니다(22:37-39). 왜냐하면 아무리 “공평과 정의”를 행한다고 생각하여도, 그 결과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충족하지 못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분별할 지혜를 갖고 삶의 목적과 사명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5:14, 새번역)

잠언21:4절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본 절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과대망상자들의 삶을 말합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다’는 어구는 그들의 심인성 요소를 보여줍니다. ‘눈이 높다’는 말은 ‘눈을 치켜 뜨다’는 의미로 타인을 경멸하는 외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잠언의 지혜는 이런 눈을 미워합니다. 또한, ‘마음이 교만하다’의 원어는 ‘마음을 넓히다’로서, ‘통제되지 않는, 염치없는 마음’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생각은 도덕적 경계가 없어 마치 하나님인양 행동합니다. 한편,  ‘형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니르’는 ‘경작’과 ‘등불’이라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만약 ‘경작’의 의미라면, 악인이 수행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죄’됨을 뜻하며,  만약, ‘등불’이라면, 악인은 교만을 자신을 인도하는 빛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반면 의인을 인도하는 등불은 주님의 말씀입니다(시편119:105). 무엇을 등불로 삼는지는 갈랫길에 접어들면 드러납니다. “모의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다”라는 모의봉격(毛義奉檄)의 고사가 있습니다. 전한 시대의 모의는 가난하였지만 학식과 효성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장봉이 흠모하여 찾아와 대화하는 중, 관청에서 갑자기 모의에게 벼슬을 내린다는 격문이 내려오자 모의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물러갔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의는 사직하였습니다. 장봉 역시 오해를 풀고 널리알려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효자를 인도하는 등불은 부귀나 효자라는 세간의 명성이 아니라 부모공경의 계명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야하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언22:4)

잠언21:5절
“부지런한 사람의 계획은 반드시 이득을 얻지만, 성급한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이란 정직한 노동과 검소함이라는 희생이란 희생 없이 부를 얻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교만을 등불로 삼는 악인’(4)의 한 종류로서, 솔로몬은 부지런히 살려고 계획하는 사람과 대비시켜 그것이 어리석은 길임을 교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혜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삶의 틀로 삼고 창조적으로 계획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행동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이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부하게 되려는 자는 주님이 세우신 세상질서에 대한 생각없이 행동하기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득과 가난이란 단어는 샬롬의 측면이 반영된 것입니다. 반 루벤은 말합니다: “돈의 문제에서 성급함이란 탐욕을 내포하고(28:20), 언어에서 성급함은 생각이 모자람을 보여준다(29:20).” 이는 게으른 사람은 행동이 결여되어 있고, 성급한 사람은 생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진실된 길로 걸어가고, 판단은 명쾌합니다. 한편, ‘반드시’와 ‘뿐이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원어는 동 일하게 ‘아크’로서, 예외 없이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함을 내포합니다. 자신들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하는 자들은 그 기대에 반하여 투자한 이상의 이득(화평 등)을 얻고, 탐욕을 갖고 성급하게 행동에 옮기는 자들은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세상의 질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길은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잠언20:7,새번역)

시편119:161-168절 “신(שַׂ)”연
“권력자는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지만, 내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새번역)

‘신’ 연의 주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신실하게 행동하실 것을 호소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신실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기자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음을 선언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만을 두려워 하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161,168). 더 나아가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탈취물을 얻는 것’같이 즐거워하였고(162), 거짓을 미워하며 의로운 주의 율법을 사랑하였습니다(163). 이런 고백들이 나오는 이유는, 시인이 지금 이유 없이 권력자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어,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인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지만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시인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면서(166), 그분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평화, 안전(민6:24-26), 그리고 구원을 간구합니다(165,166). 좋은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왕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보내고 정처 없는 피신생활을 택하였습니다. 한편, 161-62절에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즐거움’의 역설적인 반응이 보이는데, 신자의 올바른 정서입니다 (86: 4,11 참조).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8:31b)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인 여부, 즉 주님의 말씀에 머무르는 여부를 알고자 한다면 시인이 고백한 정서가 우리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모두 아시니, 내가 주님의 증거와 법도를 지킵니다.”(시편119:168,새번역)

시편119:169-176절 ‘타우(תּ)’연
“주님,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새번역)

마지막 연인 ‘타우’ 연의 주제는 ‘방황하나 순종합니다!’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나 몰아닥친 환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신자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신실하셔서 언약대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시는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69-72절로서, 주님의  행동에 대한 요청입니다. 그것은 ‘깨우침’과 ‘구원’으로서, 시인은 ‘명철’을 받아(단9: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역경에서 구원의 길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 드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자비를 위한 ‘부르짖음’과 ‘간구’만이 남아 있지만,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172). 왜냐하면, 말씀을 믿고 인내하는 시인에게 약속된 구원이 성취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은 진리이고, 이를 선택한 자신의 정당함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173-176절로서, 첫 부분의 주제를 반복합니다. 시인은 기도, 하나님의 말씀(율례, 계명, 법도,율법,규례 등)에 대한 헌신, 그리고 구원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에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는 고백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주님을 사랑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은 결과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119:176).

매일묵상(2023/01/4 – 6)

잠언21: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새번역)
본 잠언은 사람의 판단이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반면, 주님의 판단은 완전하고 공의로우심을 대조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근거로 판단하기에 불완전하나, 주님은 ‘마음’의 동기까지 꿰뚫어 보시므로 공의로우십니다. 동일한 교훈이 잠언16: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다만 각 절이 위치한 문맥이 다릅니다. 16:2절은 사람이 계획하나, 축복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3). 주님을 경외하고(동기), 주님의 뜻 안에서 그 계획을 펼쳐나가야(행동) 성공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1:2절은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는 측면은 같으나, 주님은 당신의 대리자인 왕을 통해 축복한다는 교훈입니다. 왕(=지도자, 권한 있는 자)의 마음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 주님은 왕과 그 신하들이 옳게 여기는 가치에 맞추어 행동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기 기만’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주님을 감안하여 판단하라는 격려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삼상16:7). 장자 엘리압의 큰 키와 훌륭한 용모 때문에 사무엘은 “이 사람이 바로 사울 대신 왕이 될 자가 아닌가?” 생각하였으나, 주님은 “겉모습과 큰 키만 보지 말라. 나는 중심(마음)을 본다”고 하신 뒤, 막내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붓게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과 현자의 조언에 귀 기울이면, 분별력을 갖게될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갈6:7,새번역).

시편119:145-152절‘코프(ק)’ 연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145절)

‘코프’ 연의 주제는 “위기와 신자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기도, 고백, 결단, 헌신, 감사 등을 포함합니다. 이 연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님께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와 상응됩니다. 첫 부분(145-148)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모습입니다. 위기를 맞이한 시인은 전심으로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의 교훈을 지킬 것을 약속하며(145,146),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약속 성취를 고대합니다(147,148). 기도는 순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순종 없는 기도는 혼자 중얼거리고 외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심히 근심하며 하루 종일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의 패배는 불순종(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순종을 위해서는 계명이 전제되며, 그렇지 않은 기도는 헛될 뿐입니다. 둘째 부분(149-152)은 가까이 오신 하나님입니다. 위기가 짙어질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계십니다. 원수는 해를 가하려고 주님은 구원을 위해 가까이 오십니다. 시인이 의지하는 주님은 약속대로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주신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기반을 두는 증거는 영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지금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 증거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2절,새번역).   

시편119:153-160절‘레쉬(ר)’ 연
“내가 주님의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내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153절,새번역)

‘레쉬’ 연의 주제는 ‘신실함과 구원’입니다. 세 가지 신실한 대상이 보입니다: 주님의 법(말씀)을 잊지 않은 신실한 시인(153), 언약, 인자, 그리고 구원에 신실하신 주님(154,156,159) 그리고 결코 변치 않는 신실한 그 말씀(160). 그러나 인간의 신실함은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시인이 신실하게 살려고 하여도, 인생에는 고난이 존재하며, 악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들로 인한 위협 때문에 불안정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야망을 가진 푸틴에 의해 침공당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부르짖는 것 같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약속 그리고 결정에 근거한 갱신과 구원이 계속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건지소서’ ‘살리소서’와 같이, 구원을 위한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리는데, 이는 ‘레쉬’ 연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것은 또 우리가 고난을 통과할 때 드려져야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다리고 그분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근거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적 관계이고, 이 언약적 관계는 주님의 피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이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Yes’가 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후1:20). 끝으로, 본 연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언하면서 마칩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은 모두 영원합니다” (160절,새번역)


매일묵상(2022/12/26-30)

잠언20:29절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입니다. ‘가르침’을 강조하는 도입부 중 첫째 구절(29)은, 젊은 자와 노인에게 각각 영광된 것을 관찰, 비교하면서 젊은 자들에게 지혜를 겸비하라고 장려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젊음과 힘을 믿고 뛰어들다가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 이윽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지혜로서, ‘백발’로 표현되었습니다. 백발은 지혜로운 노인을 말하며, 고대 근동에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들의 일생의 경험은 지식으로 쌓였고, 그들의 인생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백발에 이를 때까지, 역경 가운데서도 자녀들을 양육하며, 생활터전을 확립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에 덕을 끼치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깁니다. 이는 힘과 지혜가 어우러진 열매이자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입니다. 젊은 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힘만 의지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르호보암 왕 같이 실패할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 왕이 된 르호보암이 왕국의 문제를 잘 아는 원로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교만하게 말하자, 북부의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으며, 남북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도, 미덕 없는 백발,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지지 못한 백발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 잠언은, “인생이란, 좋은 것(=힘)이 더 나은 것(백발=지혜)으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이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16:31)

잠언20: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가르침의 중요성’의 관점에서 29절과 30절은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29절은 젊은 자들이 ‘백발의 지혜’를 얻을 것을 권고하나, 본 절은 권고만으로 안될 때, 신체적 징계를 통해 교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잘못에 대하여 고통을 받으면 행동을 고칠 뿐만 아니라, 성숙하게 됩니다(3:11-12). 어린 아이들이야 부모가 매를 들어 교정한다고 하나, 다 큰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 누가 회초리를 들겠습니까? 하나님 혹은 그분의 대리자로서 왕과 같은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를 사용하여 섭리 가운데 교훈하고, 왕은 직접적인 형벌이나 배상 명령을 통해 바로잡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악을 없애는 절대적인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징계할 수 없는 왕(혹은 지도자)은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은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계속 불순종하자, 블레셋 군대의 칼을 통해 죽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징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처단이었습니다. 이 반면 다윗 왕은 늘 순종하다가 간음과 살인 죄를 범하자, 낳은 아들 중 첫째, 둘째, 셋째까지 모두 살해당했고, 왕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던 솔로몬 왕이 말년에 우상숭배를 감행하자 주님의 뜻을 따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평화의 사람 솔로몬은 근심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왕기에 기록된 왕으로서, 흠이 없는 왕은 하나도 없으며, 주님은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심판의 역사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1:1절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봇물’이란 ‘보에 괸 물 혹은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을 의미합니다. 가뭄 때에는 농부들 사이에 물꼬로 인한 다툼이 많이 발생합니다. 농부 자신의 논에 물을 대게 하려는 것이죠! 물론 홍수 시는 반대입니다. 이와 같이 농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계획하듯이, 주님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역사를 관장하십니다. 즉 왕(=지도자)의 마음은 그분의 손에 좌우되며 역사는  당신의 뜻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뜻을 항거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선지자들이 밝히 기록하여 증언는데, 구약성경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특히 역사서(여호수아, 사무엘, 열왕기, 역대,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선지서들은 역사의 배후에서 당신의 뜻을 집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명확히 묘사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굽 왕 파라오와 페르샤 왕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많은 이적과 재앙을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게 하시고, 홍해까지 따라와 주님을 대항하려는 그들을 전부 멸하셨습니다(출10:1-2). 파라오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였습니다. 또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포로로 잡혀온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에스라1:1-4). 그런데 고레스 왕에 의한 바벨론 정복이나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시겠다는 선포는 이미 170년 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바였습니다 (사44:28-45:1-6, 13). 이를 알고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지혜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시편119:137-144절‘차데(צַ)’ 연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7절)

‘차데’ 연의 주제는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말씀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히 표현하시며, 또 말씀 속에 와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기에, 그분이 하신 말씀(약속)은 의롭습니다(137). 따라서, 주님이 주신 ‘증거들’ 역시 의롭고(138,144), 영원합니다(142). 주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인격, 마음, 판단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 높은 곳이나, 바다 깊은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의로운 말씀에 사로잡혔고(139),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실로,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철저하게 검증된 진실한 증거입니다(140).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에 비하면, 지위(미천)와 평판(멸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141). 성취되는 것은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이지, 인간의 의견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그분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얻어, 고난 속에서 살아갈 힘을 갖습니다(143). 고난이 어려운 것은 고통과 장래에 대한 절망 때문인데, 주님을 신뢰하는 시인은 오히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니다(롬5:3-5). 그러므로, 시인은 주님을 시험하지 않고, 그 대신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갖도록 기도의 과녁을 맞추고, 신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소망, 사랑의 삶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길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119:144).   

매일묵상(2022/12/19-23)

마태복음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월 25일은 성탄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주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 즉 메시야의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들어오셨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이 사명은 33년 후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길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좌우편에 앉게 하여달라고 어머니를 통해 간청을 드릴 때 주님이 직접 선포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고 확증하신 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제자들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조차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정도라면, 성육신은 불필요하고, 미가엘 천사만 보내면 족합니다. 아무리 로마를 몰아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죄와 사망은 물론, 이를 근거로 죄를 짓게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심판과 사망입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마태복음1:24,25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탄절이 오면, 우리는 두 분을 꼭 기억하게 됩니다. 모친 마리아와 양부 요셉입니다. 두 분 모두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한 동네 나사렛의 청년으로,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통상의 약혼 기간은 1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3개월 동안 유대에 갔다온 뒤, 임신한 정황이 나타나자 의로운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고자 하였습니다(1:19). 마리아 역시 설명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꿈을 통해 개입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꿈은 이 당시 계시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요지는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녀가 낳을 아들은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의 성취이니 아내로 데리고 와라”(1:20-23)는 분부였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였습니다만, 일평생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믿음의 삶은 이해받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의하여 초자연적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는 점이, 단순한 도덕적 순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께서 12살 될 때까지만 나타납니다. 사람이 알기에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만은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맏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중생).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누가복음 1: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은 모친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정혼한 사이로서 통상의 행복을 꿈꾸었지만, 이보다 더 큰 행복을 계획하신 하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실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개입하셨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2,33).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하여도, 잉태한 사실 자체와 그 낳은 아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키울 것인가는 심각한 과제였습니다. 정혼자 요셉의 순종 역시 요구되는 순간입니다(38). 두 분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어려운 세상살이에도 메시야를 키우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 후 마리아는 요셉의 자녀를 여러 명 낳았고, 주님은 형제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나셨습니다. 예수가 계신 마리아의 가정이 부자나 권력자가 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들은 성전의 헌물로 드렸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엄청난 계시와 보물들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어 남편 요셉과 장남 예수의 목수의 일을 통해 평범하게 살아갔습니다(막6:1-6).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섬김. 외형적으로는 똑같아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가 계신 사람과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요한복음 7: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은 양부 요셉과 마리아의 소생으로 4명의 남동생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과 누이들이 있었습니다(마13:55,56; 막6:3). 물론 세상에서 보기에는 예수님조차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중 야고보(행1:14; 15:13; 21:18; 고전15:7; 갈1:19; 2:9)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수십 년 동안을 가족으로 살았고, 요한의 침례 후 행하신 많은 표적과 뛰어난 가르침을 보고 들었습니다(요7:4).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에 주님을 붙잡으러 친척들이 나섰을 때, 모친과 동생들 역시 염려되어 설교하시는 집의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막3:21, 31-32)). 어떻게 보면 수긍이 갑니다. 표적과 가르침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언된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선언은 육신으로 보면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눅4:16-30). 그러나 주님은 친절하셨습니다(요7:7-9). 그들 역시 당신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목격한 모친 마리아는 물론 모든 동생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고전15:7), 승천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서 당신의 형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순교하였고, 야고보서도 썼으며, 유다서는 역시 주의 동생 유다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고전2:12; 중생).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친절히 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식, 재산, 권력, 명예, 건강, 친구들 등이 있어도, “공연히 구체적인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에 대하여는 형사상, 민사상 책임 모두 다 인정되어 처벌을 받습니다(명예훼손죄-형법307조). 그러나 이 죄는 형법전의 수백 가지 중 오직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이 수백 가지 죄 중 하나만 범해도 평생 두려움의 종이 됩니다. 벗어나는 방법은 죄값을 치루거나, 대통령이 사면·복권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면·복권의 행사가 주님이 베푸시는 속죄와 칭의로 인한 구원과 유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요5:29;롬3:23). 인간이 참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피조물인 우상을 섬기거나 자신을 주인으로 둠으로써, 마귀의 손아귀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간질시키거나(마귀의 원어인 ‘디아볼로’ 의 의미), 욕망을 부추키거나, 죽음의 논리로 위협하여 인간으로 죄의 길, 탐욕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요일5:19). 하나님은 너무나 인간이 불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진리,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요일5:20). 그리고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요3:16; 롬3:24-26).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와 같이 혈육에 함께 속하신 이유이며,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조차 내려와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매일묵상(2022/12/12-16)

잠언20:26절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그들 위에 타작기의 바퀴를 굴린다.”(새번역)

잠언은 사사로이 악을 갚지 말고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권고하지만(22), 왕은 다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고 악을 제거하여야만 합니다. 본절은 농경사회에서 흔히 보는 타작의 이미지를 들어, 왕이 악인을 분별하고 그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잠언20:8). 왕의 책임 중 첫 번째는 키질로, 두 번째는 타작으로 암시되고 있으나, 고대 중동에서는 키질하기 전에 타작합니다. 타작 시에는 가시가 달린 무거운 수레(타작기)를 곡식 줄기 위로 반복적으로 굴려, 곡식을 분리한 뒤,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고, 알곡은 곡간에 쌓고 쭉정이는 태우거나 썩혀서 거름으로 썼습니다. 이것이 알곡은 선을, 쭉정이는 악을 상징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통치는 완전하지 않고 또 유한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왕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 왕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임을 선포합니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에서 추수와 타작마당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타작마당은 일년 중 추수 때만 바쁘게 이용됨으로, 일생 동안 쌓은 선과 악을 마지막 순간에 헤아린다는 최후의 심판과도 비슷합니다. 이를 배경으로, 침례 요한은 이미 메시야가 그들 가운데 오셔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3:17)라 외쳤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내어’ 영원히 없앨 것입니다.“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새번역)

잠언20:27절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27절은 세상통치 배후에 계신 전지하신 주님을 등장시킵니다. 전단은 등불이라는 은유로 주님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고, 후단은 그 해석을 보여줍니다.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니쉬마”로 ‘숨, 호흡’을 뜻하는데,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 그 단어입니다. 따라서 직역하면, “사람의 호흡은 여호와의 등불이라…”입니다. 사람 속에서는 숨과 함께 말도 나옵니다. 따라서, ‘니쉬마’는 ‘단어 혹은 말’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사람의 말은 내면 가장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의 생각, 성향, 의지를 드러내게 하는 주님의 등불입니다. 왕(혹은, 잠언의 제자들)은 이를 통해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본절은 정의를 위한 왕의 권력(26)을 상대화합니다. 이는 왕 역시 하나님의 감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동기를 알고 계시기에, 통치 대행자인 왕를 섭리가운데 도와주고 계십니다. 즉, 왕에게 영감을 주시며(16:10, 이른바 직업적 영감), 당신의 뜻을 따라 왕을 인도하십니다(21:1). 좋은 예가 에스더서에 있습니다. 하만에 의한 유대인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어느 날 밤,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는 잠이 오지를 않아, 역대 일기를 읽혔습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음을 알고 부지 중 그의 원수 하만으로 하여금 모르드개를 높이게 합니다. 하만의 음모가 좌절되는 섭리의 예표이었습니다 . 물론, 이는 에스더와 유대인들의 결사적인 금식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잠언은 의인을 위로하고 악인을 근신하게 만듭니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잠언20:22, 새번역)”

잠언20:28절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왕’이라는 주제어는 악인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26)과 힘없는 백성(22)위한 ‘인자와 진리’와 잘 어울리며, 이 단락을 자신이 아닌 주님을 신뢰하도록 결론을 맺게 합니다. 전단은 ‘인자와 진리’라는 미덕을 왕의 수호자로서 의인화시켰습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후단의 ‘인자’의 원어 역시 ‘헷세드’로서, 왕이 ‘언약적 사랑’에 충실하면, 사람이 음식과 보약을 먹어 몸을 튼튼하게 만들듯이, 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인자와 진리’라는 통치를 위한 ‘음식과 보약’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잠언14:22,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이 말합니다. 왕(지도자)이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면 주님이 주십니다. 왕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때, 즉 정의를 베풀고, 백성을 돌볼 때 왕 역시 주님으로부터 언약에 기반한 신실한 사랑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모든 권력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엡1:22). 여기서 왕이란 모든 지도자의 한 예이고, 그 완전한 성취는 우리 주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나병환자와 같은 궁핍한 자의 간구를 멸시하지 않고 고쳐주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시102:16)

시편119:121-128절‘아인(ע)’ 연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121절)

‘아인’ 연의 주제는 ‘주님이 일하실 것을 탄원함’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함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고자 한 시인의 단호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득세하게 되자, 그는 두려웠고 (121,122) 주님의 구원과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다가 지쳤습니다(123). 시인은 얼마나 더 견딜수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진리가 무시되었기에 마지막 보루는 그분이 일(행동)하시는 것뿐입니다 (126). ‘일하실’(126)이란 단어는 ‘행하였사오니’(121)와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아사’)로서, 마치 시인이 ‘내 모든 노력이 실패하였으니 이제 주께서 떠맡으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126절은, 시인이 121-125절에서 드리는 기도의 절정을 이루고, 나머지 두 개의 절(127-128)에서 시인은 순종을 다짐하며 끝을 맺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한 시인이 위험에 처하자 안전을 간구하는 자세는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기도로 바뀝니다(125). 왜냐하면 시인에게 주의 계명(미스바)들은 순금보다도 더 귀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127), 모든 일에서 그 계명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지키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배우고자 기도하며, 그분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지식), 그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128). 이런 삶의 자세가 참된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매사에 주님의 모든 법도를 어김없이 지키고, 모든 거짓행위를 미워합니다.”(시편119:128,새번역)

시편119:129-136절‘페(פֶּ)’ 연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129절)

‘페’ 연의 주제는 ‘주의 말씀이 주는 은택’입니다. 시인은 이 혜택을 깨닫고 감사드린 후(129-131), 그가 이중의 적- 잘못된 행위와 인간의 억압-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기도(132-135)하고, 그 말씀을 버린 자들을 크게 개탄합니다(136). 주님의 말씀의 유익 중,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주의 증거의 놀라움입니다(129). ‘놀라움’의 원어는 ‘펠레’인데, 출애굽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므로, ‘초자연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 증거들을 통해 시인은 주님의 초자연적 행동과 완전하심에 관한 통찰을 얻습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삶의 현실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단순한 자들도 지혜를 얻게 됩니다(130).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헐떡이면서 물을 찾듯이,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고 있습니다(131). 그 만큼 주의 말씀은 경건한 자들을 채워주고 새롭게 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주님께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분이 축복하시면 은혜를 받고(132), 죄악과 역경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해 주며, 일생동안 그분의 호의 가운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135a). 그뿐 아니라, 시인의 요청은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합니다(132a).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법도들’을 지키겠다는 헌신의 고백을 하면서,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의 뜻을 행하며 배우고, 축복의 주님을 굳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편119:136).

매일묵상(2022/12/5-9)

잠언 20:23절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는 주님께서 미워하신다. 속이는 저울은 나쁜 것이다.”
(새번역)

유사한 잠언 두 개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20:10);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 상거래에서 특히 정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이 위치한 문맥은 ‘공평과 정의’라는 의미에, 독특한 교훈을 더합니다. 가렛의 통찰입니다: “이 구절은 독자가 징벌하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확신을 준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복수할 필요는 없다”  또, 말빔이란 학자는, “만약 당신이 거래 중에 속았다면, 다음에는 당신 차례라면서 그를 속여 앙갚음하려는 유혹을 받지 말아라. 여기서 주어진 예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여 물건을 파는 경우이다. 당신 역시 복수하기 위해서 거짓 저울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라! 어쨌든, 저울을 만져 속이는 행위는 전능자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리석은 자에게 어리석게 반응한다면, 우리 또한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26:4). 신자는 세상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주인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 그분의 판단을 두려워합니다. 16:11절에 따르면, 저울은 주님의 소유이고, 추와 돌은 그분이 만드신 것임을 천명합니다. 따라서, 저울과 관련하여 속이는 모든 행위마다 그분을 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정직하지 못한 모든 행위가 그렇지만 말입니다. 시장과 종교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잠언20:22, 새번역)

잠언 20:24절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겠느냐!” (새번역)

주님(야훼)이 등장하는 세 번째 잠언으로 그분의 주권을 다루는데, 성경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책임이 있습니다. 지혜를 다루는 잠언, 전도서, 욥기 등에서 전능자의 주권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인간이 책임있게 살아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길을 분별하게 하지만,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자를 속게 한다”(14:8)와 같은 많은 교훈이 잠언에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참된 길을 인식하고 그것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16:2), 우리에게는 그 길만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일과 사건의 배후에 계신 진정한 행위자이십니다. 이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두렵고, 또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이 두 진리 – 주권과 책임 -는 성경에서 결코 조화를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조화될 수도 없습니다. 40년 전, 20대 비행교관 브라이언 시프는 비행학교 교장을 태우고 유망 청년 사업가 스티브 잡스와 그의 전자장비를 수송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무더운 날씨, 스티브의 짜증과 재촉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비행중량계산 후 인근 비행장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활주로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비행내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임무를 마치자 교장실로 호출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원칙을 지킨 브라이언을 칭찬하더니 월급을 두 배나 올려 주었습니다. 현재 이분은 베테랑 조종사로 은퇴하여 비행교관과 안전 강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잠언21:32,새번역)

잠언 20:25절
“경솔하게 “이것은 거룩하다” 하여 함부로 서원하여 놓고,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이 걸리기 쉬운 올가미이다”
(새번역)

사람은 종교적으로 흥분하게 되면 성급하게 서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쓸데없이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행동은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거나, 헌신의 열망이 생겨 서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행18:18). 만약 주님께서 그 서원을 응답하시면, 반드시 이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가르칩니다(전5:5). 문제는, 사람이란 난관을 만나거나, 은혜(?)를 받아 거룩한 감정이 생기면 경솔히 서원을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승리하면 제일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이러석은 서원을 합니다. 이를 알리 없는 외동딸이 제일 먼저 마중나왔습니다. 입다는 두고두고 자신의 서원을 후회하면서, 참담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약속받은 헌금을 모두 합해보면 5백억원은 된다고 허탈해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성소가 있는 실로로 가서 이행하였고, 그의 아내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주님께 그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뒤, 사무엘을 낳고 젖을 떼자, 황소 두 마리와 함께 실로에 가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은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낳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균형잡힌 판단력을 갖고  냉철하게 생각하는 성품을 길러가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5:4).

시편119:105-112절‘눈(נ)’연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5)

‘눈’ 연의 주제는 “등과 빛되신 주의 말씀”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면서 주의 말씀의 놀라운 효능을 알려줍니다. 잠언 6:23절,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과 같이, 시인은 어두운 길을 비취는 주님의 말씀을 목격한 것입니다(105). 주의 말씀은 손전등과 같은 존재로서, 인생의 밤을 위해 반드시 구비해 두어야 하는 필수품입니다. 우리가 낯설고 위험한 지역을, 그것도 밤에 지나가야 한다면, 등불 내지 손전등을 손에 꼭 쥐고 가듯이, 고난의 시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늘 묵상하면서 다녀야 합니다. 시인은 그 가치를 잘 알기에, 어떤 위험을 무릎쓰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106). 시인은 생명이 위협을 받고, 악인들이 올무를 놓은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길로만 걷겠다고 결단합니다(109,110).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시인에게 기쁨의 완전한 근거이며, 또 때가 되면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도착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107). 그러므로, 시인은 ‘입으로 드리는 자원제물’을 노래합니다(108). 이는 ‘즐거이 드리는 헌물’을 의미하며, 시인은 찬양의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고난이라는 밤의 노래들은 성막을 위해 드리는 자원예물(출36:3)보다,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입술의 제사’(시편19:15; 히13:15)입니다. 시인이 ‘주의 증거들’은 그의 유업이요 즐거움이라는 고백을 우리 역시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111). 순종없는 기쁨은 천박하며, 기쁨없는 순종은 도덕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편119:112)

시편119:113-120절‘사멕(ס)’ 연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3)

‘사멕’ 연의 주제는 ‘일편단심’입니다. 시인은 우유부단한 자, 행악자, 방황하는 자 그리고 악인들과 대치해 서 있습니다. 이들 사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주의 법(말씀)’인데, 그 말씀은 시인이 사랑하고(113,119), 간직하며(115), 피난처와 방패 그리고 소망의 기반(114)으로서, 한결같이 마음을 쏟는 중심점(117)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씀과 주님의 순서를 혼동하지않습니다. 시인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존재는 주님이며, 그분의 말씀은 그분을 존중하는 가장 으뜸된 수단으로서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근거로 소망을 품는 것은 주님께 피한다는 의미이며(114), 말씀은 ‘내 하나님의 계명’(115)으로, 말씀을 경외함과 주님을 경외함은 같은 뜻입니다(120). 반대로, 말씀을 거부하는 현실 타협자와 악인들은 주님께 배척당하는데(118), 그들의 마음과 삶이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서,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멕’ 연은 ‘눈’ 연이 강조하는 ‘헌신’의 의미를 발전시킵니다. 그 헌신은 선택적도, 타협될 수도 없습니다. 실로, 시인이 드리는 헌신의 본질은 주님과 교제하고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판단을 두려워 합니다.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 솔로몬도 그분의 말씀과 어긋난 우상숭배를 시작하자 심판받았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의 삶’은 주님에 대한 사랑(그분의 계시를 사랑함으로 확인됨)이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마음에 의해 균형잡혀져만 합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시편119:120).

매일묵상(2022/11/28-12/2)

잠언20:20절
“부모를 저주하는 자식은 암흑 속에 있을 때에 등불이 꺼진다.”(새번역)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전 우주적 진리로서, 십계명에 규정되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5:16). 이 계명은 ‘부모공경’이라는 긍정적인 의무와 함께, ‘장수와 형통’의 약속을 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부모공경’의 계명을 ‘약속을 가진 첫 계명’으로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임을 가르칩니다(엡6:1-3).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저주하는 자녀들의 피를 그들의 손에 넘겨 놓으시고 심판하도록 규정하셨을 정도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출21:17). 잠언은 지혜라는 시각에서 그 이면을 밝힙니다. 학교가 없던 시절, 부모는 지혜의 주된 원천이었습니다 (잠언1:8,9). 따라서, 그런 부모의 말씀에 순종은커녕 저주하는 자녀들은 바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나아가, 본 잠언은 자신의 부모를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합니다. “등불”이란 사람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암흑 속에 있을 때 등불이 꺼진다”는 문구는 패륜 자식을 기다리는 무서운 결과를 말하며, 사망과 영원한 형벌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근거로 인용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주석가 고 박윤선 목사님은 결혼한 자녀들에게 잠언30:17절을 인용하여, 부모를 비판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지만, 자녀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우리의 타산지석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언9:10,새번역).

잠언20:21절
“처음부터 빨리 모은 재산은 행복하게 끝을 맺지 못한다.”
(새번역)

흔히들 창업과 수성(지키기) 중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창업은 좋은 아이디어와 사업적 수완을 결합하여 기업을 일으키게 되는 단발적인 노력인데 비해, 수성은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맞추어 끊임없이 회사를 적응시켜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사업 시작부터, 혹은 젊은 나이에 큰 노력 들이지 않고 빨리 재산을 모은 사람은 수성의 지혜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좋은 예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입니다. 돈을 관리하는 법을 몰라, 가족 간의 갈등은 물론,  모르는 사업에 투자하여 당첨된 돈 전부를 잃어버렸다는 보도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 나중 형편은 처음보다 훨씬 못합니다. 왜냐하면 돈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직업, 건강, 가정 모두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 잠언은, 전 절(20절)에 등장하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식’의 행동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 불효자식은 부모의 재산을 빨리 받아내려고 패륜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재산으로 어떻게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탕자의 비유가 잘 말해줍니다(눅15장). 물론, 주의해야 할 사례도 있습니다. 삼성 그룹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20초반에 만석의 부자인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요청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오늘의 삼성그룹을 일구어냈습니다. 정주영 회장 역시 10대에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훔치는 등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끝에 오늘날의 현대그룹을 세웠습니다. 물리법칙이 아닌 인간의 문제에 예외 없는 일반원칙은 없지만, 이분들 역시 많은 난관을 겪고 사업적 지혜를 갖춘 분들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앞길은 동틀 녘의 햇살 같아서 점점 밝아져 대낮처럼 환해진다” (잠언4:18, 새번역)

잠언 20:22절
“악을 갚겠다” 하지 말아라. 주님을 기다리면, 그분이 너를 구원하신다.”
(새번역)

이 잠언은 바보들의 나쁜 말을 듣고 어리석게 대응하지 말고,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신뢰함으로써, 지혜롭게 반응하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심판자 되신 주님은, 당신을 믿고 기다리는 경건한 백성의 손해를 보상해주시며, 그에게 잘못 행한 자에게 공정한 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이루어질까요? 마지막 날 내려질 최후의 심판 전까지, 모든 상과 벌은 섭리를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이 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겸손히 기다려야만 합니다(합2:3). 시편25:3, 27:14, 37:14, 그리고 마태복음5:38-48, 누가복음18:7,8 등을 보면 같은 취지입니다. 물론 로마서 12:17-21도 빼놓을 수 없는데, 사도 바울 역시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같은 명령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복수의 감정이 치솟으면, 오판은 물론, 죄에 비하여 지나친 보복이 가해지는 사례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1963년 한국 사회를 떠들석하게 한 고재봉 상병이 죄 없는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의 명령이 율법이나 형법 등에 형벌이 규정된 범죄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범죄들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나 재판부의 권한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잠언의 명령이 적용되는 범위는, 참을 수 있는 사소한 모욕이나 부당한 조치들, 잘못은 분명하나 규정된 벌칙이 없는 경우, 그리고 네로와 같이 너무나 권력이 강하여 법률이 집행될 수 없는 경우 등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5:41,새번역).

시편119:89-96절‘라메드(לְ )’연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하늘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89,새번역)

‘라메드’ 연의 주제는 ‘주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첫째 행(89)에서 출발하여 전체 연을 이끌고 나가다가, 마지막 행(96)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영원히’라는 단어는 주님이 한결같이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그 증거는 그분의 말씀이 창조한 하늘이 굳건하고 영속적인데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더욱 확실합니다. 하늘을 지배하는 그 말씀은 하늘 아래의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권위를 행사할 위치에 있습니다(90).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성품과 뜻을 표현합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들- 하늘, 땅, 인간 등 -은 그분의 뜻을 준행하는 종들입니다(91). 시인 역시 주님의 종인 것은 피조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분의 영원한 말씀을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증언합니다(92). 고난이 닥칠 때 사람들은 재물이나 권세 있는 사람을 의지하지만, 시인은 주님의 영원한 말씀을 보화처럼 즐거워하였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의 경험은 헌신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굳건한 말씀이 시인을 멸망에서 지켜준 것처럼, 이제 갱신도 가져왔습니다(93). 이같이, ‘말씀에 대한 헌신’ 은 주님께 속한 자들을 구분하는 특징이며(94), 고난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적대적인 악인들은 아직 시인을 엿보고 있지만, 시인은 신실하게 주님의 증거를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95). 이것이 바로 시인이 살면서 발견한 생명의 길이며, 우리의 길입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시편119:96).

시편119:97-104절‘멤(מְָ)’연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멤’ 연의 주제는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간청은 없지만, 시인은 희열에 차서 참된 지혜의 원천인 ‘주의 법’(토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기에 종일 묵상하였고, 이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멤’ 연은 97-103절과 104절로 구분됩니다. 앞부분(97-103)은 두 개의 ‘어찌’로 묶여집니다: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97)와 ‘어찌 그리 단지요’(103). 뒷부분(104)은 결론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종일 묵상하는 시인은, 원수보다 우월하며(98), 인간 스승보다 더 크고(99), 전통을 능가하는 지혜를 얻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로써 지성의 훈련은 말씀 묵상을 통해 주어짐을 깨닫게 합니다. 더욱이, 시인이 사랑하는 말씀은 그의 삶을 지도합니다(101-103). 즉, 그것은 시인을 가르쳐서 악한 길을 피하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 말씀은 주님 자신이 가르치는 음성이며  본질적으로 즐거움의 원천입니다(103). 요컨데, “말씀에 대한 사랑”은 건전한 마음(명철-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믿을 수 있는 감정(‘미워하다’)과 바른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묵상과 순종의 순서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일관된 묵상의 삶(97,98,99)은 순종의 삶을 낳기에(100), 말씀은 삶을 바꾸는 능력의 원천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깨닫고, 꿀보다 더한 기쁨을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101). 따라서, 신자의 순종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공존합니다. “주님의 법도로 내가 슬기로워지니, 거짓된 길은 어떤 길이든지 미워합니다.” (시편119:10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