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11/21-25)

잠언20:17절
“사람들은 속여서 얻은 빵이 맛있다고 하지만, 훗날에 그 입에 모래가 가득 찰 것이다.”(새번역)

히브리 본문의 직역은 “속인 빵은 사람에게 달콤하다 그러나 후에는 그의 입이 자갈로 채워질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겨납니다 : “어떤 면에서 빵이 거짓일까?”  빵은 주된 음식이나, 인간의 모든 물질적 소유를 상징할 수 있는데, 그 획득방법에 따라 그 ‘빵’이 혹은 그 ‘의복’이 혹은 그 ‘학위’가 거짓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잠언은, 거짓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얻은 소유물은 처음에는 즐겁고 유익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됨을 가르쳐줍니다.  “빵인 것처럼 보여 먹었더니, 실제로는 자갈이라서 뱉어내야하다니!” 이것이 그 정확한 뉘앙스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비시 830년경)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것을 본 시종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요청인 것처럼 거짓으로 말한 뒤,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구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오히려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고 게하시의 집까지 배달해 주고 떠났습니다. 게하시는 그것들을 집에 감춘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엘리사 앞에 나아갔습니다. 엘리사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게하시야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탐욕과 거짓 행위를 지적하고는,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갈 것이고, 네 자손도 영원히 그 병을 앓을 것이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게하시가 엘리사에게서 물러나오자, 온 몸에 나병이 발병하였습니다(왕하5장). 잠언은 가르칩니다: “거짓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20:18절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 놓고 하여라.”(새번역)

18절과 19절은 “그러므로 지혜를 받으라”는 결론입니다. 지혜자는 충동적이 아니라, 신중히 숙고한 후에 일에 착수합니다(15:28; 19:2). 전단은, 모든 영역에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수행하여야 할 일반원칙을, 후단은 특히 전략을 세워야 승리를 챙취할 수 있는 전쟁을 예로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전략은 매우 중요합니다(24:6). 경솔히 전쟁에 돌입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쁜 일들만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러시아는 전략을 충분히 세우지 않고 공격한 결과,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강력한 저항에 허를 찔렸습니다. 계획은 삶의 여타 영역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본 잠언은 효과적으로 이 교훈을 가르치고 적용하도록, 뛰어난 병행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사업, 시험, 아이들의 교육, 그리고 소송에서도 먼저 조사하고 전문가들과 의논하여 중지를 모은 뒤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잘 모르며, 더구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좋은 삶을 누리도록 의도하신 창조주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책 몇 권 읽고 독단적으로 결정하거나, 지식 없는 사람들과만 의논하거나,  혼자 골방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떠오르는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어리석은 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주의해야할 부분은 지혜의 존재 의미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우리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어지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목적입니다 (고전10:31). “너는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하지도 말아라.” (잠언24:1,새번역).

잠언20:19절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는 사람이니, 입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라.”(새번역)

“언어와 사업”에 관한 단락(20:12-19)의 결론인18, 19절은 서로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18절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의논하라’는 뜻을, 19절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만 의논해라”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11:13절,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은 비교 구절입니다. 다만, 13절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과 ‘분별력 있게 말하는 사람”을 대조하고, 19절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과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을 동일시하여, 같은 교훈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험담(gossip)하는 사람’은 ‘두루다니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험담’은 지혜의 부족을 보여주는데, 이는 험담 자체가  사랑의 결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사람을 헐뜯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도 없고, 또 가볍게 여기기에 별 생각없이 화제꺼리로 삼게 됩니다. 더구나, 험담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넘어,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 사이를 파괴시키곤 합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험담이 너무나도 매력적입니다. 잠언은 험담을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는 표현을 통해 ‘험담’의 힘을 보여줍니다(18:8). 그리스도인들은 험담의 욕구가 올라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험담을 피하듯이, 험담하는 사람을 피하여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12:36,새번역).

시편119:73-80절 ‘요드(יָ)’연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73)

‘요드’ 연의 주제는 ‘인생, 계명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주신 총명을 갖고 그분의 계명을 배우기 몹씨 원합니다. 계명의 원어는 ‘미추와’로서 ‘명령’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은 그분의 명령대로 존재합니다(시33:9). 그러므로, 그분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은 멸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시인을 조성하셨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인이 인생을 통해 계명을 배우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되어야 그분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73). 이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후, 바로 가나안 땅이 아니라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사람과 달리, 신자의 마음에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살아 움직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계명을 가르쳐 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배우게 되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유익을 토로한 시인은(7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의 메시지를 되새기는데 (74), 바울의 경험과 일치합니다: 환난-인내-인격-소망-사랑(롬5:3-5). 한편, 주님의 약속이 시인의 삶에서도 증거되기를 원하는 경건한 신자들을 생각하게 되자(79), 이들을 위해서도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시인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75-77). 지금, 교만한 자들이 거짓 행동으로 시인을 괴롭히지만 (78), 시인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우리의 고백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율례들을 완전히 지켜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시편119:80,새번역).

시편119:81-88절 ‘카프(כָּ)’연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카프’ 연의 주제는 ‘고난, 삶의 그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교만한 대적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고(85), 신실한 시인은 주의 구원을 기다리다 지쳤습니다(81). 그래서 시인은 외칩니다 :”Help me!”(86).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시인은 상황의 변화를 위해 절실히 주님께 간청합니다(81-84). 그가 당하는 고난이 너무나도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의를 당한 과부처럼, 시인은 도움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5-88). ‘카프’ 연이 ‘탄원의 기도’로 가득찬 이유입니다. 시인의 기도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인생의 필요와 고난의 현실까지 토로하는 탄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인내의 끝에 ‘기도’라고 불리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내의 끝에 가게 되어 절망할 때 혼자 그 고통을  안고 살지, 기도로 주님 앞에 가지 않습니다. 원죄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기도가 고난의 첫 번째 희생제사가 될 때가 정말 많지만, 반면 그 기도는 현실적으로 가장 확실한 치료제입니다. 왜냐하면 절망의 끝에는 ‘소망’(81-82)이라 불리는 방과 ‘순종’(83,87)이라는 또 다른 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 방들로 가는 다리이자, 능력입니다. 고난은 극도로 불편할 수 있지만, 순종으로 이겨야 합니다(88). 이는 신자에게 놓여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삶의 현재 규칙 (83,87,88)이며, 장래의 소망(81-82)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증거를 지키겠습니다”(시편119:88,새번역)


매일묵상(2022/11/14-18)

잠언20:14절
“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아담 스미스는 물은 효용이 큰데 교환가치가 적고, 다이아몬드는 효용은 적은데 교환가치가 높은 데서 알 수 있듯이(가치의 역설) 상품의 가치와 효용은 비례하지 않고 노동이 가치의 척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공급측 강조). 100년 후, ‘가격은 한계효용에 결정된다”고 주장한 한계효용학파가 등장하여 이 역설을 해결하였습니다(수요측 강조). 오늘날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됨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보다 2,800년에 지어진 본잠언의 목적은 경제현상을 논하는데 있지 않고, 경제활동을 통해 나타난 인간 심리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순진하게 살아가면 안 되고, 그 이면을 꿰뚫어 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득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거래 현장에서, 판매자는 손님이 생각하는 ‘이익’ 혹은 ‘심리’를 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구매자는 사고 싶은 물건을 발견하면, 좀 더 싸게 사려고 여러 가지 흠을 들추어 내면서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판매자는 손님이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과 판매하려는 물건의 적정가치를 비교형량하여, 할인 폭을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손님에게는 ‘이런 가격으로는 도저히 팔 수 없지만, 당신에게만 특별히 드리겠습니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구매자는 속으로 기뻐하며 돌아가서 싸게 샀다고 자랑하지만, 판매자는 그 위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입니다. 겉모습과 실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잠언의 취지를 고려해 볼 때, 어릴 때부터 거래나 아르바이트를 시켜서 실제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잠언20:5,새번역).

잠언20:15절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삼국지』를 읽으면, 유비는 자신을 도울 지혜자 제갈공명을 얻고자 애를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고초려). 사업에 입문한 사람 역시, 경험 많은 상인에게 장사의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좋은 판단력을 갖고 적절한 권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희귀한 보배입니다(15). 이런 보배와 같은 사람을 얻으면,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지식과 지혜로 인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입술은 소유하기 쉽지 않습니다. 본절에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값진 금속들로 이루어진 장인의 작품들(목거리, 반지 등)은 단순한 금이나 진주 보다 훨씬 귀합니다. 귀금속이 이들의 재료인 것은 물론, 훌륭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정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입술’도 같습니다. ‘생각이 담긴 언어’는 하나님이 확립하신 도덕질서에 맞는 지혜를 담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고된 훈련과 교육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귀금속들이나, 귀금속 장식보다 훨씬 귀중한 지혜가 나오는 ‘입술’입니다. ‘귀중한 이유는’ 지혜를 얻으면, 부, 명예, 장수 그리고 화평 모두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잠3:15). 다만, 지혜나 명철도 주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에 모사로 초청받은 아히도벨은 다윗의 진영을 파할 좋은 지략을 주었지만, 아렉 사람 훗세의 반론에 막혀 채택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집안을 정리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지혜자 아히도벨은 주인을 잘못 택하였고 실패하였습니다.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이다.” (잠언25:11,새번역)

잠언20:16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공동번역)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겉옷을 담보로 제공하더라도 해질녘까지는 돌려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신24:10-13).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통은 겉옷은 담보로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외규정이 등장합니다. ‘취하라, 잡을지니라’는 명령형은 본잠언의 메시지를 잘 전달합니다. 그 방향은 채권자에게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 잠언은 아무관계도 없으며 낯선 타인의 빚 보증을 서지 말라고 누차 경고하나, 이를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갚을 것이 없으면 누운 침상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잘모르는 낯선 ‘타인’은 물론, 아무관계도 없는 외국인(‘외인’)의 빚보증을 서려고 하는 사람은 철이 없거나 바보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2:26,27). 잠언은 통상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하며, 그런 행위는 주님께 꾸어드리는 의로운 삶임을 밝힙니다(14:31;19:17). 그러나, 타인 혹은 외인의 빚의 보증물로 제공된 자의 의복이나 몸을 취할 경우는 아닙니다. 자기 빚도 아니고 잘모르는 남을 위해, 외국인을 위해 보증을 서는 바보의 의복이나 몸을 취하는 채권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대신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채무불이행이 있을 때, 채권자는 가차없이 의복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종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게 보증을 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열렬히 그리고 부지런히 채권자에게 가서 자비를 호소하는 길이외에는 없습니다(잠언6:1-2).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채권자, 채무자, 보증인의 관계를 잘 규율하고 있습니다만, 본잠언의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새겨야만 지혜로운 비즈니스의 삶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잠언19:29,새번역)

시편119:57-64절 – ‘헤트(חֵָ)’ 연
“주님, 주님은 나의 분깃, 내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57,새번역)

‘헤트’연의 주제는 ‘순종의 원천과 모습’이며, 주님(야훼)에 대한 신뢰로 시작하고(57), 주님의 신실한 사랑(헷세드)으로 맺습니다(64).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이 온 세상에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64). 그 ‘인자’ 하신 주님 자신이 시인의 분깃(한 몫으로 받은 유산)임을 고백하는데(57),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와 같습니다 (수13:14,33). 이것이 시인의 순종의 원천이며, 순종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에 대한 헌신,  약속에 대한 신뢰, 율례에 일치되는 삶 등(55-56). 지금 시인은 역경 속을 헤쳐가지만, 순종은 지속됩니다. 그는 ‘주님의 증거를 따라 갔고’(59), 계명을 서둘러 지켰으며(60), ‘악인들의 줄(권모술수)이’ 두루 얽혔어도 주님의 법을 잊지 않은 것은 물론(61), 주님의 의로운 규례 때문에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감사를 드렸습니다(62). 한편, 시련 가운데서 시인은 은혜를 간구합니다만, 주님의 구원은 지체되고 있습니다(58). 그럼에도 그는 충성스러웠습니다(61).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밤에 오히려 감사의 노래를 합니다(62). 광풍이 몰아친 갈릴리 바다가 생각납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깊은 잠을 자고 계신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일어나셨고,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즉시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시인의 순종과 믿음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인자하심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주님의 율례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시편119:64,새번역)  

시편119:65-72절 ‘테트(ט)’연
“주님,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나를 잘 대해 주셨습니다.” (65,새번역)

‘테트’ 연의 주제는 ‘주님의 선하심’입니다. 5개 절이 ‘선하심, good’(토브)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은  시인을 ‘잘 대해 주셨고’(65), ‘좋은 명철과 지식’의 원천이며(66), ‘선하신 분’이며(68), 고난조차도 ‘유익이며’(71), 그분의 율법(토라)은 금은보화보다 더욱 ‘귀하다’(72)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시인의 배움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모함을 당하는 등 여러 사건 속(69,70)에서 주님의 지혜와 돌보심을 경험하자, 모두 싫어하는 고난조차 긍정적인 가치가 있음을 배웠습니다(71).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다가,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 실망과 분노는 통상의 사람보다 더 합니다. 욥은 그 좋은 예입니다(욥6:1-4). 그러나 그 자체가 자신의 연약임을 깨닫게 되면, 질투와 미움에서 돌이켜 주님의 그 길을 곧장 가게 됩니다. 시인은 학교에서 국어와 산수를 배워 문장을 짓고 셈을 하게 되듯이, 삶의 길(율법)을 배우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빌4:12,13). 이것이 신자들의 보화로서, 시인은 ‘주의 입의 법이 천천 금은보다 좋습니다’ 와 같이 그 깨달음을 노래합니다(72). 그러나, 악한 세상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good) 통찰력과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주십시오’(66)하고 기도를 드리는 바, 이 또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매일묵상(2022/11/07-11)

잠언20:11절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드러낸다’의 원어 ‘나카르’는 ‘알아내다’와 ‘가장하다’의 두 개의 뜻이 있기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전자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아이조차도 행동으로 자신을 알리는 것처럼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 알게 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사람의 죄된 속성을 강조하여 아이조차도 행동으로 자신을 위장하는데, 어른은 더 하기에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자의 취지를 따른 것이 개정개역이나 새번역이며, 문맥상 타당합니다. 품행은 아이의 인격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이미 마음의 깨끗함과 정직함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만약 아이가 “나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해도, 어른은 아이의 행동을 본 뒤 판단할 것입니다. 하물며, 다 성장한 사람의 말은 행동의 증거 없이 믿을 수 없습니다(창8:21). 그러므로 잠언은 외모와 말 보다 행동이 더 나은 판단 기준임을 가르칩니다. 한편, 행동을 볼 때 재물에 대한 태도와 사용을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눅12:34). 사람의 가치관, 정직성, 품성 등이 그 사람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에 모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속담에도 ‘그 사람을 알려면 금전 거래를 해 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행동에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면, 선한 행동을 위해서는 좋은 성품이 필연이고, 좋은 성품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뿌리를 잘 내릴 수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 주님 경외함을 가르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잠언9:10,새번역).

잠언20:12절- ‘언어와 사업’ 관련 잠언(20:12-19)
“듣는 귀와 보는 눈, 이 둘은 다 주님께서 지으셨다.”(새번역)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19:24-20:11절)의 단락 후, 솔로몬은 “언어와 사업”(20:12-19)에 관한 새 단락(20:12-19)을 시작합니다. 2 절씩 총 4쌍으로된 이 잠언의 구조입니다: 도입부(12-13), 본문(14-17, 신중하지 못한 언어와 사업), 그리고 결론(지혜를 받아들여라,18-19). 12절은 전 단락과 새 단락을 연결하면서, 지혜 가운데 성장하라고 교훈합니다. 상인은 정직이 최고 자질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두 종류의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여 고객을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20:9). 이처럼, 모든 인간은 도덕적 무능력에 빠져 있습니다. 마땅히, 주님이 지으신 두 종류의 인식의 기관- ‘듣는 귀와 보는 눈’ -을 사용하여 선을 위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12). 잠언에서 ‘귀’란 ‘듣고 순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듣겠습니까? 솔로몬과 같은 현자입니다. 한편, ‘듣는 귀’는 ‘보는 눈’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눈’이란 ‘깨어 경성하여라’는 뜻이 있습니다만, 지혜는 ‘듣는 것’을 ‘보는 것’ 위에 놓습니다. 귀는 무조건 듣게 되지만, 눈은 초점을 맞추는 동작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의미는 실질적으로 순종을 의미합니다. 창조주께서 ‘귀’와 ‘눈’을 만드신 이유는 부지런히 배우고 삶에 적용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만약 잠언의 제자들이 이 두 기관을 통해 경건한 지혜를 얻는다면, 사업에서 성공하지 실패하지 않으며, 살아나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언3:18).

잠언20:13절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본절에서 ‘눈’은 12절과 13절을 묶는 주제어로서, ‘보는 눈’(12)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게으른 자는 잠자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의 눈이 떠 있어야만,  자신의 재물이 상실되거나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타인이, 종(17:2)이든 도둑이든 거래 상대방(20:14)이든 말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자들은 주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지혜를 갖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삶을 위한 기관(눈,귀)들을 주셨지만, 그것들을 책임 있게 사용할 의무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대신 보아주시거나,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지혜를 주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부지런히 양 기관을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복한 삶을 찾아 가도록 디자인하셨음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현자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여 부지런히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찾지만, 게으른 자는 힘든 노동이 싫어서 혹은 세상이 두려워 침상 위에서 구르며 살아갑니다.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사업과 집안을 보살피고, 근면하게 살아가지,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잠31:27).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업과 일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위험성 역시 경고합니다. 우리는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이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시127:2, 새번역).

시편119:41-48절 ‘와우(וִֽ  )’ 연
“(그리고)주님,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내게 베풀어 주십시오.” (41,새번역)

‘와우’연의 8개 절은 모두 접두사 ‘와우(그리고)’로 시작되나, 개정개역 등 한글 번역에서는 이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와우’를 매 절마다 사용하여, 간구와 결단한 내용을 순차적으로 노래합니다. 시인은 순결한 삶을 열망하지만(베트), 세상은 낯선 곳(기멜)이며 압박들로 가득차 있고(달레트), 마음 역시 탐욕 등으로 갈등을 겪습니다(헤). 이때 주님의 ‘인자하심- 헷세드’과 ‘구원’의 약속은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41). ‘헷세드’는 우리가 도움이 절실할 때마다, 그 필요를 아시고, 돌아보사 공급하시며, 구원하시되, 결코 한 번도 실패하시지 않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절하며 간구하자, 주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셔서, 손을 대시어 즉시 완치시켜주신 사건은 좋은 예입니다(막1:40-42). 따라서, 시련을 당하여 침울할 때, 시인은 ‘살아나도록’ 기도하고(40), ‘그리고 인자와 구원’도 잊지 않도록 간구합니다(41). 이어지는 42-48절은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담대함, 규례를 사모함,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순종, 주님을 거침없이 증거함, 율례에 대한 즐거움과 묵상 -을 순차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면 그분의 일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과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게 되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44-46). 고난의 열매 중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계명들을 내가 사랑하기에, 두 손을 들어서 환영하고, 주님의 율례들을 깊이 묵상합니다.”(시편119:48,새번역).

시편119:49-56절 – ‘자인(ֽ זָ)’ 연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9)

‘자인’연의 주제는 ‘고난 속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고난의 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를” 기도하며(49), 자신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을 기억한다고 두 번이나 단언합니다(52,55). 시인이 고난 중에 ‘소망’을 갖는 이유는 주님의 약속의 확실함 때문입니다(49).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근간이자, 경건의 확실한 기초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구원을 고대하는 중에 주님의 율법은 자신에게 소망의 상징이요 위로의 수단이 됨을 노래합니다(50,54). 지금 시인은 대적에게 심한 조롱과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자 다시 살아남을 경험합니다(50,51).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는 우리의 노래요, 밤에도 감사와 찬양의 근원이 되기에, 오히려 역경은 소망을 강화시킴을 깨닫게 됩니다(51). 시인은 조롱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그분의 말씀을 버린 악인 때문에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53). 그렇지만 본 시에서는 ‘율법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며, 믿음에 대한 자만심이 아니라 소망과 겸손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 보입니다. 한편, ‘자인’ 연의 구체적인 예는, 빌립보에서 오해를 받아 매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그 밤에 하나님을 찬양한 바울과 실라입니다. 주님은 옥터를 흔드시고, 그들이 당신의 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 같은 구원의 사건의 묵상은, 고난에 처한 우리의 위로이자 행복입니다 “주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삶에서 내 행복을 찾습니다.” (시편119:56,새번역).  

매일묵상(2022/10/31-11/4)

잠언20: 8절
“재판석에 앉은 왕은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낸다.
”(새번역)

본 잠언은 정의롭고 현명한 왕을 전제합니다. 그 왕은 냉철한 판단력과 통찰로써 그의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색출, 제거하여 정의를 구현합니다. 정조 대왕이 어느 선비의 시집간 딸이 억울하게 죽자 수사하여 범죄자들을 색출(시어머니, 조카)하여 악을 제거한 뒤, “과인이 통치하는 이 조선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한 것은 좋은 예입니다. ‘한눈’으로 의역된 ‘왕의 눈’은 어떤 불의도 왕의 심판을 피해가지 못함을. ‘가려낸다’의 원어 ‘메자레’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 내기 위해 ‘키질하다, 까부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왕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악을 제거함으로 그 세력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필요한 자질은 지혜로서, 지혜는 올바른 법적 판단을 내릴 때 특히 요구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두 창녀의 소송을 지혜로 해결한 사례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이 잠언이 적용된 예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이스라엘도 왕을 통해 정의가 달성되지 못하였는데, 인류 전체의 역사의 경우 왕권이 얼마나 남용되었겠습니까?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가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고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도록 제도화한 것은 역사에서 얻은 지혜라 하겠습니다. 지금은 악의 완전한 제거가 불가능하지만,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모든 악을 한눈에 가려내어’ 영원히 없앨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새번역)

잠언20: 9절
“누가 “나는 마음이 깨끗하다. 나는 죄를 말끔히 씻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새번역)

9절은 지혜자를 일깨우는 잠언으로, 그들은 의롭게 살지만 때때로 자기 의와 같은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들 역시 죄와 씨름을 해야만 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욥9:2). 그러므로 현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늘 인식하여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며 사는 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잘못 평가하여, 그의 행동과 언어 속에 미련한 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다윗 역시 잠시 경계를 늦추자,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에게 죄를 지적 받자마자,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시51:7). 이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회개한 후 다윗은 “주의 성신을 내게 거두어 가지 마시옵소서” (시51:11)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는 주의 제자들은 성령께서 스승이 되셔야만 탐심과 죄된 자아를 이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연약한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과 함께 자신을 낮추어야 비로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롬8:13-14).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자기극복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극복을 위해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후에, 비로서 믿을 수 있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비록 우리 힘으로는 죄에서 깨끗함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 안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았음을 성경은 선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1:7,새번역).

잠언20: 10절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와 되는 모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새번역)

신명기는,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신25:13-15a)고 규정합니다. 이런 바른 상도의가 행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에,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25:15b)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정직’은  상인의 이웃사랑의 핵심입니다. 잠언은 요약합니다: ‘돌과 돌, 에바와 에바 그 둘 모두 주님이 미워하신다’(원문직역). ‘돌’은 천칭과 같은 양팔 저울로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추로 사용되었고, ‘에바’(약22L)는 밀과 같은 부피를 재는 말이나 되를 의미합니다. 만약 동일한 ‘저울추와 되’를 사용하지 않고, 상대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한다면, 거짓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자를 미워하십니다. 물건을 파는 상인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만약 군인들이었다면 “강제로 빼앗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아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침례요한). 이런 가르침들은 십계명의 ‘탐내지 말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도착되어 있기 때문에,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십시오. 자족의 마음이 있으면 우리 믿음 생활은 큰 유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속여서 남의 것을 취하기보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함을 주님께 기도드리시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b-3).

시편119:25-32절 ‘달레트(דּ)’ 연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25)

 ‘달레트’ 연은 ‘기멜’ 연이 고백한 낯선 환경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현실을 토로합니다. 굴욕감(25), 곤비함(28), 거짓 행위에 대한 유혹(29), 주님의 증거를 지키다가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당혹감(31) 등이 그렇습니다. ‘진토’란 죽음을 상징합니다(창3:19). 시인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경건한 신자이기에, 주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호소합니다. 경건한 신자인지 아닌지는 이때 확연히 보여집니다. 전자에게는 인생이 너무나 힘들다(28) 느껴지는 환난의 때는 절망하는 순간이 아니라, 기도의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달레트’ 연은 7 개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살아나게 하소서’(보전, 25), ‘율례를 배우게 하소서…깨닫게 하소서’(지식, 26-27), ‘나를 세우소서’(힘, 28), ‘주의 법을 은혜로이 베푸소서’(은혜, 29),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결과, 31) 등입니다. 한편, 환난의 때는 특별한 헌신의 때입니다. 시인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30)하며 헌신을 다짐합니다. 또한, 환난의 때는 안식의 때인데,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에 신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5b,28b,29b). 그래서 시인은 ‘주의 말씀대로’ 구원받아 주님의 뜻대로 살 것을 믿습니다. 여기에 신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고난의 시기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의 신실하심과, 주님의 계명의 참된 의미를 배우는 좋은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편119:32)

시편119:33-40절 – ‘헤(ה)’ 연
“주님, 주님의 율례들이 제시하는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언제까지든지 그것을 지키겠습니다.”(33,새번역)


‘헤’연은 선생과 지도자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주님(야훼)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3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33-35절 (전적인 헌신 다짐) 36-37절(탐욕에 흐르지 않도록 간구), 38-40절(주님의 보살핌과 공급하심을 요청함).  ‘주님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겠다는 시인의 결심(32)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적대적인 환경(‘기멜’ 연)도 아니고, 인생의 환난(‘달레트’ 연)도 아닙니다. 마음의 불순종입니다. 순종하기 원하지만(34), 탐욕이나(36), 안목의 정욕은 가장 큰 적입니다(37). 불순종하려는 마음에 의하여 순종하려는 마음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에는 늘 긴장이 감돌고 있습니다. 시인의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시인은 9 번이나 간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순종의 그 길을 지켜주시며(33), 마음을 깨닫게 하셔서 그분의 법을 준행할 수 있게 하시며(34), 우리로 참된 기쁨의 삶으로 이끄시고(35), 무가치한 것들을 추구하지 않게 막아주시고(36-37), 우리를 실망에서 건지시며(39), 의롭게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40). 어두운 밤에 조명을 비추면 동상이 보이는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순종으로 이끄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어떻게요? 사도 바울 역시 그 해답은 ‘기도입니다. 그는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서 교인들 모두에게 성령님을 통해 나오는 지혜와 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합니다 (엡1:17;빌1:9;골1:9).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편119:40).  

매일묵상(2022/10/24-28)

잠언20: 5절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새번역)

본절의 ‘사람’은 현자, 보통사람, 미련한 자를 모두 포함합니다. 물론 도덕과 경건의 요소도 그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똑똑한 바보는, 지식, 재물,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자입니다. 만약, 현자라면, 그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아 아무도 모르지만, 다른 현자는 그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왕후가 죽어 새 왕후를 뽑아야 하였지만 황제는 전혀 속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대신이 반지를 여러 개 만들되 그 중 하나를 특히 아름답게 장식하여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반지의 주인공을 찾아 황후로 천거한 고사가 있습니다. 황제나 신하 모두 현명하였습니다. 만약, ‘보통사람’의 경우 자신조차 모를 수 있지만, 현자는 그 의중을 길어내어 조언을 주거나 바른 처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두 남녀가 사귀고 있었습니다. 자매는 형제의 결혼의사 여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지혜로운 제안을 하여 형제의 마음속의 생각을 길어낸 뒤, 그를 떠났습니다. 그 자매는 그후 좋은 형제를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만약, 미련한 자(악인)라면, 그의 악한 생각은 마음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간파합니다. 두 여자가 각자 갓난아이의 어미라고 다투자, 솔로몬 왕은 칼로 그 아이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두 사람의 생각을 드러낸 재판은 유명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이 제일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물론 지혜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고, 또 현자의 조언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잠언21:30,새번역).

잠언20: 6절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말하기는 쉽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입니다. 흔히들 자신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인 것을 자랑하나 막상 일이 터지면 그들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전7:28), 예나 지금이나 희귀합니다. 인간의 연약함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에서 전술핵 사용도 가능하다고 언급하자, 나토 회원국 사이에 전술핵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작은 전술핵도 한 발에 탱크 30대를 궤멸시키는 위력 때문에, 유럽에 배치한 전술핵의 관리는 미국(핵 자체 관리)과 나토(운반할 전투기 관리)로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40년 전에, 유럽은 미국이 임의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을 지켜줄 의지가 미국에게 있는가를 의심합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유럽과 전술핵 투하 훈련을 매년 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안심시키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한편, ‘인자’란 ‘헷세드’로서 언약관계에서 나오는 ‘변함없는 사랑’을 지칭합니다. 예컨데,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후,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는 하셨지만, 생수와 만나를 주시는 등 이들을 신실하게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에게 늘 신실한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말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위선과 연약함을 파악할 줄 알고, 바위 같이 든든한 친구를 부지런히 찾아 인생의 길을 함께 가라고 교훈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잠언20:7,새번역)

잠언20: 7절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새번역)

7절은 6절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인자)’을 보여줄 자는,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입니다. 7절의 전, 후단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전단에서 ‘의인’이란,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이웃에게 변함없는 친절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의’란 주님을 경외하면서(하나님 사랑)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것이 없는 삶(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의인’은 순전(결백)합니다. 그 대표자는 욥입니다(욥1:1). 물론 의만 행하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롬3:9-20). 그러나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이란, 결코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욥9:1-2), 주님(야훼)께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고 분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다윗처럼 죄를 지적받으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후단은 그들의 후손이 받는 축복을 언급합니다. 솔로몬이 의인의 일생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 후손이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의인이 후손에게 미친 의로운 유산과 영향력에 기인합니다. 의인은 후손들에게 영적유산(행복한 기억은 축복임)과 실질적인 유산(지혜, 명예 등) 모두를 남기면서(잠13:22), 그들의 삶의 모델이 됩니다. 그들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라는 가훈을 마음에 새기고, 겸손과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 악에 떠나게 됩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주십니다(잠22:4). 이것이 의인의 유산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처럼, 의인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좋은 롤 모델 자체입니다.”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시편119:9-16절 ‘베트(בְּ)’ 연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알레프’ 연은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이, ‘베트’ 연에서는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라는 수사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실제적인 길은 청년의 열망을 “주님의 말씀(다바르- 말의 내용에 초점)”과 주님 자신(10,12)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의 삶의 순결은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삶의 여부는, 의지의 방향, 마음과 기억의 내용, 입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들, 생각의 주제 등에 달려 있습니다. 한 마디로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많은 재물을 가진 것처럼 즐거워합니다(14). 이것이 시인의 경건의 비결입니다. 그에게는 ‘주의 말씀’이 재산이자 보물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주의 말씀에 향하게 되고, 그런 보물을 주신 주님께 일편단심인 동시에(10,14), 당연히 ‘주님의 말씀(이므라- 말의 소리에 초점)’을 소중히 간직합니다(11). 더 나아가 주의 모든 규례(미쉬파트- 재판 규범)를 입술로 선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법도(픽쿠드-교훈)를 늘 묵상하면서(13,15) 보물의 가치를 음미하고, 주의 증거들의 도(데레크- 길)와 율례들(훅카- 석비에 새겨진 확립된 규정)을 보물을 보듯이 즐거워 합니다(14,16). 시인은 부자가 재산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합니다(16). 그러나, 주님께서 도우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만 열매를 맺기에 시인은 또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찬송을 받으실 주님, 주님의 율례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12)

시편119:17-24절 – ‘기멜(גּ)’ 연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8)


‘기멜’ 연은 두 절씩 연결됩니다. 17-18(순종을 가능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은 21-22(불순종은 벌하시고 순종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뒷받침되고, 19-20(세상의 나그네로서 시인)은 23-24(비방의 대상으로서 시인)에 의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도 거룩한 삶은 쉽지 않습니다(9). 여기에 환경조차 호의적이지 않는다면(비방 등)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23).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애를 쓰는 성도들에게는 낯선 곳이며(19), 나그네처럼 배척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21).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기멜’ 연에 시인의 비결이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께 ‘필요한 것을 충분히 공급해 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17). 이중, “주의 율법(토라-가르침)”에 숨겨진 ‘놀라운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18). ‘주의 가르침’은 세상이 갖지 못한 우리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마7:12-황금률). 성경말씀 속에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은 물론, 그분의 구원의 행적들(출애굽, 부활의 기적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과거의 사건이고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동일한 경이와 믿음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시면 그 생생한 의미를 깨닫고 험한 세상을 이길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재산입니다. “주님의 증거가 나에게 기쁨을 주며, 주님의 교훈이 나의 스승이 됩니다.” (시편119:24,새번역)

매일묵상(2022/10/17-21)

잠언20:2절
“왕의 노여움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면 목숨을 잃는다.”(새번역)

술취한 자의 떠들석한 모습을 바보들의 목록(19:24-20:1)에 포함시킨 솔로몬은, 이제 그 바보를 왕의 손에 넘겨놓았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만약 누군가 왕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면 치명적이고도 즉각적인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사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누구나 목격할 수 있는 위험한 동물로서, 사자를 만난다는 것은 죽은 목숨과도 같았습니다. 더구나 부르짖음은 사자가 먹이를 잡았을 때 하는 승리의 외침으로, 그 누구도 사자의 손에서 먹이를 구해내올 수 없습니다. 왕을 격노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와 같아, 만일 그 앞에 불경한 태도를 보이거나, 맡은 일에 신실치 못하다면 목숨이 위태하고,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잠언은 19:12절(“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에서 같은 교훈을 주었으나, 후단이 다릅니다. 19:12절은 위험과 혜택 양쪽을 다루나, 본절에서는 위험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방탕하다가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우리 각자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주인이 혼인 집을 가려고 출타하였을 때,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술먹고,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이르러 엄히 벌하신다는 교훈입니다(눅12:41-48).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는 말씀 자체여야 할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잠언20:3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다툰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을 주제로 합니다. 먼저, 바보들의 목록을 열거하고(19:24-20:1), 하나님을 대리하여 이들을 교정하고 벌하는 자로 왕을 등장시킵니다(20:2-11). 그들은 게으른 자, 거만한 자, 불효막심한 자, 교훈에서 돌이키는 자, 악한 증인, 심판을 비웃는 오만한 자, 술취한 자, 다투는 자 등입니다. 본절의 전단은 다툼을 삼갈 경우 ‘지혜로운 자’라는 사회적 존경을 받지만, 후단은 모든 바보는 다툼을 시작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왕이 미련한 자들을 노여워하고 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결과가 다툼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분쟁을 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쟁을 평화롭게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사람이 왜 분쟁을 시작하고, 거기에 가담하겠습니까? 자존심(교만)을 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자존심을 내세우는 행동에서 다툼이 시작되고, 그 사람의 덕망은 실추되고 낮아집니다. 그러므로 “명예로 가는 길은 자신의 명예를 방어하지 않는 길이다”는 역설이 성립합니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수자, 전쟁 시작 전에 요청받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이 상하여 크게 다투었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인 전과를,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는 비유와 함께 말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풀고 다툼을 피하였습니다 (삿8장). 모욕을 참고 겸손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잠언의 지혜자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  

잠언20:4절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게으른 자’는 바보들의 목록 중 첫 번째(19:24)이며, 그에 대한 벌은 ‘사회적 불명예’(10:5)와 ‘빈곤’ 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늦가을(10월-3월)이 밭을 갈 시기였습니다. 게셀(솔로몬 왕의 요새)의 달력비문(BC10세기) 내용입니다: “두 달 모으기(올리브), 두 달 파종(곡물-보리와 밀), 두 달 늦게 파종(콩과 채소), 한 달 괭이질(건초를 위함), 한 달 보리 수확, 한 달 수확(밀) 그리고 (곡식)의 무게를 재면서 포도를 수확하는 두 달, 여름 과일을 거두는 한 달.” 그러므로 늦 가을의 두 달은 곡식의 씨를 뿌려야 하고, 이는 단단한 밭을 괭이로 갈 것을 요구하나, 밭 가는 일은 비가 내려 땅이 부드러워져야 가능합니다(이른 비). 만약 그 시기를 놓치면 그 해 농사는 망친 것이며, 6개월 후의 추수의 때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장의 빈곤을 넘어 다음 해를 위한 씨조차 없는 가난한 자로 전락하여, 여기 저기 도움을 요청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8). 이를 통해  인간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은 하나님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 명령을 무시하여, 부지런한 부자는 마음을 낮추지 못해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경건한 부지런함’의 덕목은 어릴 때부터 마음과 몸에 심겨야 하기에, “청년의 때란, 도덕적 지혜가 뿌리내리기 위해 인격의 모판을 준비할 시기입니다” (말빔).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잠언13:4,새번역)

시편119: 1,2절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새번역)

시편 중 가장 긴 시로서(176절), 주제는 ‘주님(야훼)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서 있다는 고백과 기도”입니다. 시인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22개 단락으로, 각 단락은 두 구절로 이루어진 8개의 행(이행연구, 二行聯句, couplets)으로 구성하여 이 주제를 22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9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다바르, 이므라, 미쉬파트, 에다, 호크, 토라, 미스바, 픽쿠드, 데렉 – 단락의 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문학적 탁월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며, 각 단락은 주의 깊게 작성된 가르침이자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선생님은 주님 자신이지, 인간 멘토가 아닙니다(102). 그러므로 이 시는 ‘토라(모세 오경을 통한 야훼의 가르침) 시’이지, ‘지혜의 시’는 아니며, 묵상의 분위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곳에, 섬김은 완전한 자유가 된다’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일탈하는 순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우리 생활양식을 경건한 토대 위에서 지어올리도록 하여 죄의 쇠사슬을 부수게 하시고(105,133), 또한 우리 보다도 더 위대한 지혜를 만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71). 앞으로 시를 한 단락 씩 묵상하겠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새번역)

시편119: 1-8절 – 알레프(אַ)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1-8절의 첫단어는 ‘아쉬레-복이 있다’입니다. ‘알레프(אַ)‘로 시작되며, 통상 ‘복’으로 번역된 ‘에쉐르’의 복수형입니다. ‘에쉐르’는 ‘곧다’ ‘똑바로 가다’란 뜻과 ‘번영하다, 성공하다’란 파생적인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쉬레’는 바른 길을 걷기에, 누리게 되는 번영과 성공의 삶 그 자체를 나타내며, 과정과 결과가 다 포함됩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고, 그 열쇠는 ‘여호와의 율법(토라- 가르침)’에 대한 순종입니다. 일편단심 그분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은 곱절로 ‘복이 있습니다’(1-3).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4). 그러므로, 주님의 율례(호크-석비에 새긴 변함없는 법령)를 행하게 도와달라고 외친 시인의 기도(5)는 첫연의 중심축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주의 모든 계명(미추와- 명령을 뜻함)’에 주의하게 되어(6), 수치를 당하지 않고, 배울 수 있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7). 이것은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주의할 것은, ‘여호와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시인에게 그것은 모세율법(의식법, 제사법, 도덕법 포함)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가르침)’입니다 (고전9:21). 유대인들이 부딪힌 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롬9:32). 그들의 우상은 모세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시인에게는 올바른 순종이, 나중에는 오히려 불순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토라)’에 대한 문자적 순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알아야하며, 그분은 아들을 높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요5:23).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편119:8)

매일묵상(2022/10/10-14)

잠언 19:28절
“악한 증인은 정의를 비웃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통째로 삼킨다”(새번역)

9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입니다. 본 잠언은 잘못 양육시킨 자녀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법정에서 악한 증인으로까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도대체 없고 악한 동기로 사법 정의를 비웃으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모세율법의 ‘동해보복’ 규정(출21:22-25; 레24:16-22)은, 악한 증인을 벌할 때도 또 반복됩니다(신19: 15-21). 아간(황금과 옷), 게하시(은과 옷),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경건한 신자 명예)는 탐욕 때문에 거짓말을 하였으며, 그 벌로 돌에 맞아 죽고(아간), 문둥병자(게하시)가 되고,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생명을 거두어가셨습니다(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러나, 거짓 증인들은 그것을 넘어서, 법정에서 의인을 죽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합 왕 때 나봇의 포도원 사건, 우리 주님에 대한 재판, 스데반의 재판의 경우입니다. 이 시대는 증인의 진술이 재판을 결정지었기에, 모세율법은 반드시 두 증인 이상으로부터 진술을 듣고 재판하도록 하였습니다(신19:15). 그러나, 아무리 선한 것도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모두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그 선한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 규정만 충족하였지, 목적 달성을 위해 거짓된 증인들을 내세워 “죄악을 통째로 삼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요8:44). 그리스도인들도 외형적 고백이 고백이 아니고, 진실하고 선한 열매가 맺어져야만 참된 제자입니다 (눅8:15; 롬2:28,29).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 (잠언19:29,새번역).

잠언 19:29절
“오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준비되어 있다”(새번역)

본 잠언은 28절의 사법 정의를 농단하는 악한 증인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벌이 준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악한 증인’은 대표적인 오만한 사람 중 하나로서, 정의와 심판을 비웃지만, 오만한 사람은 곧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서 심판과 벌을 준비하고 계심을 알지 못합니다(시14:1). 하나님은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합당한 벌을 내리셔야 당신의 영원한 공의와 질서를 확립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들은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길로 행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에 대하여 질책을 받으면 통렬히 여기고 마음에 새겨 지혜를 더합니다. 단순하여 잘 속아넘어가는 자녀들은 벌(매)을 받으면 그때야 지혜를 얻어 돌이킵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아주 미련하여 100대의 매를 맞아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19:25). 이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어두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마25:41;유13). H.G. 웰즈는 『타임머신』, 『투명인간』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를 넘어 성경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한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 소망은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중 런던이 폭격받는 동안, 그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폭탄이 아니라 어두움이다. 나는 일생 그 어두움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고 옆에 있는 보웬 여사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웰즈는 그 어두움만 두려워하였지, 빛되신 주님에게 갈 지혜는 없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잠언20:1절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술취한 자의 모습은 잘못 양육된 자녀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는 정신이 나가서, 절제도 없으며, 미친 것과 다름없어 분별의 한계와, 도덕 그리고 예절의 경계를 깨드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와 독주는 지혜와 삶을 파괴하는 악당과 다름없기에 자녀들을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으로, 잠언은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3:10).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하셨고,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포도주를 가지고 영접하였습니다 (창14:18).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지만, 남용하면 안 되며, 상황에 따라서는 그 선한 것들이 혜택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포도주 역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출발선은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 사에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간의 지혜가 언제나 그 상황에 대한 최종 판결은 아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인간의 지성을 활용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인간 관계가 정의만큼이나 고려되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전7:16). 그래서 르무엘 왕의 모친은 포도주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괴로운 자에게 주어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도록 하라고 가르칩니다 (잠언31:6,7). 물론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전도서7:18,새번역).     

시편118:22,23절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본 시의 ‘돌’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돌로 상징되는 그리스도는 구원과 심판 모두 되셨습니다 (벧전2:6-8;마21:42-44;롬9:32-33). 이스라엘의 공공건축물은 상부구조와 기초에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건축자들은 여러 돌 중 적합한 돌을 고른 뒤, 필요 없는 돌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공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돌이 후에는 꼭 필요한 돌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아주 중요한 자리에 놓여 건물의 두 벽을 결합시키고 상부구조를 올리는 기초가 된 건축현장의 사례가 구원과 심판이라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작고, 노예 처치에 있는 쓸모 없는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선택하셔서 인류 구원의 건축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약속이라는 특권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으로 가득차, 불순종하고 끝내는 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쓸모 없는 돌로서 버렸습니다(행4:10-11).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켜 구원의 주춧돌로 삼으시고, 모세율법을 폐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 위에 성전이 지어지게 하셨습니다 (엡2:11-22). 이같이 ‘버린 돌’이 이방인을 위해서는 ‘구원의 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심판의 돌’로 변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은 구원 받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8).

시편118:25,26절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새번역)

시의 배경은 축제(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24)로서, 필시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장막절 중 하나입니다. 이미 성전 안에 무리는 왕과 함께 오고 있는 다른 무리를 영접하면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 년 동안 ‘상징과 그림자들’(히10:1)로서 행하였던 그 시편이 갑자기 실재가 되었습니다 AD30년,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구원의 능하신 표적들을 본 수 많은 군중들은 주님을 영접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마21:9)를 외쳤습니다. 이들이 외친 ‘호산나’는 원래 히브리어 ‘호쉬아나’로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의미로서, 메시야에 대한 노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청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심으로 본 시편의 성취를 언급하셨습니다 (눅37-40). 물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슥9:9;마21:4,5). 이어지는 구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27)는 십자가 위에 밧줄로 매어진 주님의 팔들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제 구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고전5:7).

매일묵상(2022/10/3-7)

잠언 19:25절
“오만한 사람을 치면, 어수룩한 사람도 깨닫는다. 명철한 사람을 꾸짖으면, 그가 지식을 얻는다.” (새번역)


‘오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쉬’로서 마음이 교만하고 고칠수 없으며, 모든 책망을 거부하는 자를 지칭합니다. 술에 잔뜩 취해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주정을 부리는 사람과 같이, 그는 교만과 자아도취에 잔뜩 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25절의 ‘오만한 사람’은 그 정도가 낮아, 교훈을 받아들이는 어수룩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1-9장의 교훈의 대상인 ‘어리석은 자녀’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세상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잘 속아넘아가는 자녀들’이라, 징계를 받으면 지혜를 얻어 돌이킬 수 있습니다. 본 잠언의 ‘오만한 사람’ 역시, 매 백대를 맞아도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정도의 거만한 자는 아닙니다. 다만, 그의 미성숙 때문에 마음을 높이게 된 것이라서, 벌을 받으면 바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상자가 미성숙으로 인한 오만한 자냐, 아니면 악한 자로 말할 정도의 오만함(9:7)이냐를 분별하여 합당한 훈육을 해야 합니다. 이같이 교육 혹은 훈계란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작동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로써, 바울 역시 이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이에 반하여, 후단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길로 접어든 사람을 말하며, 그런 사람은 계속하여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깨닫고 지식을 더합니다.“더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쓰여 있습니다.” (약4:6,현대인의성경).

잠언 19:26절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내는 자식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다.” (새번역)


25절의 ‘오만한 사람’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받지 못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26), 교훈을 듣지 않고(27),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28) 3 가지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 전형적 행동이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쫓아낸다’는 본잠언의 묘사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이 세상에 세운 질서와 권위의 가장 근본을 이룹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중종, 민재인)은, ‘효는 백행의 근본’임을 적어 놓았습니다. 출간 동기는 그 당시 풍속이 병들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여 금수와 가깝게 됨을 애통하게 여긴 마음입니다. 물론 이 책은 유교 질서인 임금, 신하, 부모, 자녀, 부부 등 다섯 관계의 도리(오륜)를 가르치면서,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동몽선습’이 가르칠 수 없는 부모권위의 유래와 한계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도 주 안에서 해야 하며, 그 계명을 어길 경우 섭리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징벌하십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성장한 자녀들은,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듣지만, 성장하여 부모가 늙고 힘 없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오만해집니다. 그들은 힘 없는 늙은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지경까지 타락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과 수치를 끌어들이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필연이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지혜와 용기를 위해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엡6:4,새번역)     

잠언 19: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27절을 직역하면, “내 아들아 훈계(교훈)듣는 것을 중단하라, 그러면 너는 지식의 말씀들에서 떠나 방황할 것이다”, 이지만, 공동번역과 같이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을 등지려거든 꾸지람을 듣지 않아도 좋다.”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 교훈을 듣고 삶을 바꾸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은 일생을 거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제자들이 더 이상의 교훈이 필요없는 지점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본 잠언의 교훈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장소이기에, 지혜와 지식의 추구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만약, 귀찮다고 교훈에 등을 돌리면(27a), 지혜와 지식에서 떠나게 되고(27b), 부모에게조차 범죄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26). 정상적인 경우라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의 인간성은 두 번 재고할 여지도 없이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반역한 아담과 하와의 품행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효막심한 행동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표상으로 볼 수 있는 부모에게 불순종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본 잠언을 쓴 솔로몬조차 자신의 교훈에 주의하기를 그친 순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에서 떠났고,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성전 바로 앞 감람산에 산당들을 지어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참 어리석은 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잠언1:7,새번역).



시편117:1절
“너희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칭송하여라.”(새번역)


이 시는 단 두 절이지만, 믿음은 위대하고, 시야는 전 세계에 미칩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메시야임을 전하는 근거로서 이 시를 인용하였으며(롬15:11), 그 완전한 성취를 요한계시록에서 미리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계7:9,새번역). 시인은 1절에서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라고 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의 핵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천하 만민의 복의 통로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 규정은 이 언약을 반영하여 처음부터 이방인을 언약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내용을 포함하였습니다(출12:48-49). 490년 후 드린 솔로몬 성전 건축 기도에서도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왕상8:41-43). 또한 홍해를 가르신 것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한 표적들은 동시에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표적이었음을 시편 기자들은 선언하였습니다(예:96-98편).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입니다(2). 그것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심으로 명백해졌습니다 (롬5:8).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기쁨의 외침을 드리게 됩니다(2).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주님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할렐루야” (시편117:2,새번역).

시편118:1절 – 호산나!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새번역)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불려진, ‘애굽의 할렐’은 본 시편이 마지막 시입니다. 시를 읽어가면 성전으로 가서 예배드리려는 백성들의 행진이 있고, 그 중심에 그들을 이끄는 한 예배자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예배의 목적은 시편116편과 같이 개인적 구원 때문에 감사제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에게 합당한 승리의 찬양을 올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배의식(1-4), 개인적(5-14), 대중적(15f.)인 목소리들; 그리고 중심 인물과 그의 행렬이 예루살렘 성문에 접근하고 입성을 요구하고(19), 응답과 찬사를 받고(20, 26), 마침내 제단에서 순례를 마치고 있습니다(27). 시의 구조입니다.

     A  감사로의 초청(1-4)
         B 감사의 이유: 구원(5-21)
     A′ 감사 의식의 노래(22-29) – 호산나  이 시를 처음으로 노래한 사람들은 애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긴 역사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끝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마지막 승리의 입성과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내용을 전하는 복음서를 읽으면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의 메아리가 본 시편의 전체에 걸쳐 울려퍼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특히 22절이하). 즉 본 시편의 절정은 신약입니다. 출애굽과 성전이 예표한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를 자세히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셨고, 그 기록이 복음서입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

매일묵상(2022/09/26-30)

잠언 19:22절
“사람이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가난함이 낫다.”(현대인의성경)


본절은 “야훼 잠언들”인 21절과 23절 사이에 놓여 있어, 자녀들로 하여금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도록 교훈합니다. 부자는 재물에는 높은 가치를, 사람, 특히 가난한 자에게는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사람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바란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헷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언약적 관계’의 핵심을 묘사합니다. ‘언약적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모두 언급할 수 있으나, 문맥상 여기서는 후자입니다.  후단은 재물보다는 인격의 온전함(고결함, 정직)이 낫기에, 인격적 고결함을 잃어버릴 바에는 가난(재물의 상실)을 선택하라는 권고입니다. 물론, 그것이 부를 비하한다는 말은 아니며, 오직 재물과 부의 가치는 상대적임을 밝혀줍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준수되어야 할 절대적 가치입니다. 후단을 전단에 비추어 생각하면, ‘헷세드-언약적 사랑’이 내포하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 사이에 신실하라는 교훈입니다. ‘헷세드’는 많은 미덕을 내포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람 사이에는 ‘신실하라‘ 혹은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며, 여기서의 주된 의미입니다.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거짓말은 신뢰를 근본적으로 깨뜨려 버리는 행동으로, 잠언은 이를 상당히 경계합니다((6:16–19; 13:5; 14:5; 25:18).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잠언 19:23절
“주님을 경외하며 살면 생명을 얻는다. 그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새번역)


본절은 16절에서 시작한 “궁핍한 자에게 친절하라”는 주제를 다루는 단락(19:16-22)의 결론입니다. 16절에서 죽지 않고 생명에 이르기 위해 ‘부모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하는데, 23절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라’고 교훈함으로써, 부모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표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으로부터 자녀들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계명에 머무르면 성경이 약속한 모든 축복을 다 받습니다. 계명 가운데 머무르는 자를 보시고 축복을 주시고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는 분은 결국 우리 주님입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주님이 정하신 길은 이웃 사랑의 삶으로,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게 되며, 술은 물론 도덕적으로 유해한 환경에는 가지 않기 때문에 제도적인 보호장치가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위험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도 성경은 이 가르침을 간직한 제자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결코 주리게 되거나 재앙에 빠지지 않고, 만족스럽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실례를 증언합니다. 고대에 여행은 위험하였습니다. 짐승도 많았지만, 도적 떼나 강도 그리고 불량한 사람들의 문제는 더 컸습니다. 좋은 예가, 창세기18장에서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를 해하려고 모여든 소돔사람들과 사사기 19장에서 기브아를 지나는 레위인의 첩을 빼앗고 그를 죽이려고 한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로운 롯을 불과 유황의 심판에서 건져주셨으나, 첩을 둔 레위인은 재앙에서 건져주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4:9).

잠언19:24절
“게으른 사람은 밥그릇에 손을 대고서도, 입에 떠 넣기를 귀찮아한다.”(새번역)

잠언19:24-20:11절은 새 단락으로 주제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육과 벌”입니다. 19:24-20:1절과 20:2-11절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전자는 교정이나 벌이 필요한 바보들의 목록을 나열하고, 후자는 바보들과 이들을 다스리는 의로운 왕에 관한 것입니다. 24절은 게으른 자의 행태를 아주 냉소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먹기 위해 그릇에 손을 넣을 수 있는 만큼 충분한 힘이 있지만, 배고픔조차도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일을 끝내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즉, 게으른 자는 기회가 있음에도 게으름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줍니다. 게으른 자는 게으르기 때문에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시편115:16절
“하늘은 주님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새번역)

시편115편 중 특히 16절은 세상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가 축복, 번성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15b). 주님(야훼)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통치에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 손으로 만든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3-8)? 시인은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자유를 노래하다가, 16절에 이르러 창조물의 일부인 “땅”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뜻을 밝힙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전체를 말합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짐승, 식물, 흙, 나무, 해, 달, 별 등을 그 창조 목적에 맞도록 관리할 권리와 의무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전에 주어진 인간 창조를 위한 고유 목적 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수단이 바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인간 자신의 필요를 채우도록 계획하셨기에,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그분이 자신들의 아버지됨을 인식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따뜻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행14:17,새번역)        

시편116:10절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번역)

116편은 경건하고 밝게 빛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질병, 모함 등으로 사망에 처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3,8,10). 어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도(11), 시인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4).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은 순진한 시인을 지키셨고 그 어려움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시를 읽으면, 시인의 경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비록 쓰라린 추억이었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며, 신실하시고 위대하신 분임을 체험하는 계기였습니다. 또한 그런 긴박하였던 상황에서 구출된 후에, 시인은 자신이 누리는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히 간직되어야 하는지를 노래합니다(9). 시인의 감사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에는 영생의 축복이 포함되어야 합니다(딤후4:17-18).  시의 구조입니다.
     A  구원에 대한 감사(1-3)
         B 구원자 하나님과 신실하신 성품(4-6a)
     A′  구원에 대한 감사(6b-7)
         B′ 구원자 하나님과 신실한 믿음(8-13)
     A″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서원(14-19)

주목할 것은, 본 감사의 시는 정열적인 사랑의 노래와 같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해 기록된 성경의 진리들을 – 신실하심, 능력, 지혜 등 – 시인이 여실히 체험하여 살아움직이는 현실이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시편116:9,새번역)

매일묵상(2022/09/19-23)

잠언19:19절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하여 준다고 해도 그 때뿐, 구하여 줄 일이 또 생길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주님에게 벌받는 사람을, 아들로부터(18) 성격이 불 같은 자로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잠언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대답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26:4), 습관적으로 맹렬히 노하는 사람은 돕지 말라는 암묵적인 지혜를 줍니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은 교만한 바보의 특징 중 하나로서, 훈계없이 양육된 자녀의 미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의 대상은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입니다. 이는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습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도와준다고 고칠 수는 없으며, 벌을 받아 보아야, 비로서 행실을 바로잡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을 동정하는 것도 좋으나 그런 동정이 지혜로운지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지혜 안에서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빌1:9-11). 미국에서는 아동 학대와 관련한 처벌이 엄격하기에 공개적으로 아이를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몰에서 너무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자, 그 아이의 어머니는 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엉덩이를 꽉 물어 나쁜 버릇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부모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이 확립하신 ‘벌과 치료’라는 도덕 질서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섵부르게 뛰어들었다가는, 그의 자녀들은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건강한 성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한편, 자녀들이 훈계를 받아들여야 비로서 의미가 있기에, 잠언은 20절에서 교훈의 대상을 아들로 바꾸었습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잠언19:20)

잠언19:20절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지혜롭게 된다”(새번역)

지혜자는 하룻밤에 혹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는 학식과 인품 갖추어진 스승이나, 그 분야에 지혜로운 자에게 배우고, 교정받아야만 합니다. 즉 “충고를 듣고 훈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던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받아 재판업무를 위임하여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학문, 인격, 신앙 모두 같습니다. 학문을 위해 한석봉의 어머니는 10년을 목표로 유학을 보냈으나, 3년만에 돌아온 아들과 세기의 대결을 펼칩니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도 고른 두께로 떡을 썰은 뒤 엉망인 글씨를 보인 석봉을 야단쳐 돌려보냅니다. 석봉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절치부심, 결국 남은 7년을 채워 조선의 명필이 되었습니다. 인격의 경우입니다.  퇴계의 제자 이함형은 전주에서 안동까지 와서 유학하고 돌아갈 때 부부간 불화를 호소하였습니다. 퇴계는 “난 두 번 장가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러나 부부간의 문제는 크게 보면 모두 남편에게 달려 있다”는 편지를 주었습니다. 이함형은 ‘웬만하면 남편이 참으라’는 의미임을 깨닫고 애처가로 거듭났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배운 것입니다. 한편, 신앙도 같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지만 (행18:27-28),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삶의 굴곡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각고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태초부터 계신 분을 깨닫게 되고(요일2:12-14), 마침내 아비의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고전4:15). 늘 성령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대는 배워서 확신하고 있는 진리를 따라 계속 생활하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이것을 배웠는지 알고 있습니다” (딤후3:14,현대인의성경).  

잠언19:21절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새번역)

본잠언의 교훈은 삶의 현장에서 자주 목격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로마로 가려고 계획하였으나 좌절되었습니다(롬1:13; 15:21). 드디어 AD58년경,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드린 구제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 후 얼마 안 되어 성전에서 체포되었고, 기약 모르는 연금을 당하였습니다. 2년 후 로마 황제에게 호소를 하였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하였으나 배가 난파되어 구사일생으로 도착하였습니다(행28장). 잠언 16장은 이 진리를 잘 가르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1,새번역)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16:2)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6:33). 사람들은 많은 전략을 수립합니다만, 결국 하나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체험들은,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3:5)는 교훈을 탄생시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길에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사람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곧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시편114: 8절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본시는 ‘애굽 할렐(찬양)”시들 중 하나로서(113-118), 유월절을 기념할 때마다 불리워졌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가나안 땅을 주시기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현현-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요단강을 가르신 역사 등 – 을 근거로 언약에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부르그만은 “시편114편은 각 세대가 세상을 변혁시킨 이 사건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함으로, 출애굽 세대의 전통과 믿음의 삶에 동참시키게 한다.”고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언약의 백성(1-2)
          B  자연에 행하신 이적들(3-6)
      A′ 언약의 주님(7-8)
시인은 가나안 정복 후의 세대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을 믿었습니다. 믿음과 감정은 차이가 있습니다.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서 합격한 것을 믿고 기뻐하는 학생 같습니다. 시인은 성경에서 자신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과거에 르비딤에서(출애굽 당시), 그리고 가데스에서(38년 후) 바위로부터 물을 내신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맹인이나 절름발이 귀먹은 자 말 못하는 자가 고침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직접오셔서 고치신다는 약속만 있습니다(사35:4-6). 그렇게 오신 분이 주 예수입니다. 중요한 점은, 맹인 등을 치유하신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 죄인들의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거지 바디매오)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10:52)

시편115: 11절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새번역)
시인은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2)라고 질문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은, 조롱하는 세상 앞에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아마 최근의 승리를 왕이나 군대에게 돌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1). 또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4). 그러나 시인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는 야훼라는 신앙 고백을 하고(15,16) 그분만 의지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인자와 진실의 야훼 찬양(1-3)
         B 우상과 그 추종자들(4-8)
         B′ 야훼와 그분의 백성(9-15)
      A′  창조주이신 야훼 찬양(16-18)
본시의 9,10,11절은 각각 돌림 합창 노래로서, 주제는 신뢰입니다. 신뢰의 히브리어는 ‘바타’이며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의지하면, 그 대상으로부터 평강, 복지, 안전이 온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방인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으나, 생명 없는 우상이 도와줄리 만무입니다. 시인은 그들을 조롱합니다만(4-8), 현대인은 돈이면 제일이라는 맘몬 우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 역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은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항상 의지하여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