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8/9-13)

2021/08/02
시편39편 – 총괄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절,새번역)

이 시는 하나님은 연약하고 덧없는 피조물인 사람을 부지런히 징계하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시편38편과 비슷합니다: (1)방관자들 앞에 침묵을 지키는 모습(38:12, 13; 39:2), (2) 죄를 징계하시는 주님의 행동(38:1–3; 39:9–11), (3) 오직 주님만이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소망(38:15, 21, 22; 39:7)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릅니다. 시편38편에서 질병은 죄의 문제를 드러냈고,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반면 시편39편에서 질병은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절실히 알게하는 동시에, 현생에서의 행복한 삶 또한 소중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인생무상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서, 불멸의 세계가 완전히 계시된 후라도 그런 개념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삶은 귀중한 것이며, 인생에서 누리는 기쁨과 사랑들은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매우 근심하였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켰을 때 “근심에 근심을 면했다”할 정도로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빌2:27). 다윗 또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님의 징계로 죽게 되었을 때, 결국 만나게 될 것을 알지만 아기가 죽지 않도록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삼하12:22-23). 지금은 자신의 남은 생애가 질병으로 단축될 수 있음을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12, 13).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모두 잘 간직하여 너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잠언3:21, 새번역).


2021/08/03
시편39편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11절)

이 시는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 항의 / 4-6절 이 덧없는 인생 / 7-11절 엄중한 징계/ 12,13절 작은 간구. 오늘은 4-11절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복잡하였지만, 그의 첫 기도는 인생의 본질을 깨닫도록 요청합니다(4). 그는 자신이 겪는 질병의 고통을 주님이 주시는 징벌로 받아 들이면서,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도 볼 수 있기 위해 기도드립니다(4-6). 특히 ‘헛되다’다로 번역된 ‘헤벨 hebel’은 ‘입김’ 내지 ‘수증기’로서, 3번이나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다윗이 배운 바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허사뿐이다’(5), ‘헛된 일로 소란하며’(6),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11절)(전도서의 주제임). 그런데 세 번째 단락(7-11)에 이르면 다윗은 욥을 괴롭힌 역설을 겪게 됩니다. 이들은 지상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들에게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너무나도 심한 처우를 하시는 것 같아 탄식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설들과 같이 이것도 발굴되지 않은 보화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원을 위해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롬8:11-24). 좀이 아름다운 옷을 먹는 것과 같이 인간이 잘못하여 교만할 때 그 영화를 치심으로,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하여 영원을 함께 살아가시려는 주님의 거룩한 뜻입니다(물론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미함). 이 주제는 우리가 씨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7절,새번역).


2021/08/04
잠언14:1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새번역)

이 잠언은 ‘레브 – 마음’라는 단어를 통해 13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현재 보이는 겉모습들은 기만적이고, 참된 실체는 결론에 가서 드러남을 말하지만, 본 구절은 그 결론을 따른 마지막 보응을 논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따르는 현재의 아픔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결국에는 주님께서 선을 행한 자를 상주시고, 악을 행한 자를 벌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겉모습이 어떻든, 행위와 운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길-way’이라는 비유로 예증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 잠언은 마음이 변하여 악을 행하는 비뚤어진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한 길을 선택한 후에, 신자는 인내하며 무조건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처음에는 사회나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고 살지만, 나중에는 그 길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전에 무슨 선한 행위를 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에 대하여는 완전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가 행한 선한 행위들 역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예레18:7-10). 이렇게 본 잠언은 비뚤어진(혹은 반역적인/왜곡된) 사람을 선한 사람과 대조합니다. 실로 악인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 완전한 벌을, 의인 역시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고백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롬다 하심을 받습니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6).


2021/08/05
잠언14:15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새번역)

본 잠언은 두 개의 기능을 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걷고(1-7) 보이는 대로 걷지말라(8-15)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또 하나는 지적-영적 성품을 대조하면서 교훈을 주는 단락(16-32)을 도입합니다. 이를 위해 ‘길’이라는 비유에 ‘걸음’이라는 비유를 더함으로 본 잠언은 제자를 잘못 이끌게 되는 어수룩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바보들의 일종으로 이들은 쉽게 속아넘어가지만, 신중한 사람은 드러난 겉모습을 믿지 않고 그 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자신의 걸음마다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가는 길이 참된 경건과 윤리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항상 점검하면서, 삶을 테스트 합니다. 물론 ‘걸음(step)’은 ‘길(way)’의 동의어로서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청년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듣도록 권면하는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부주의한 ‘어수룩한 사람’에 속하는지 혹은 주의깊게 행동하는 ‘슬기로운 사람’ 에게 속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 왜냐하면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어수룩한 사람은 자신의 생활방식에 주의를 기울지 않지만, 인간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 슬기로운 사람은 혹시나 자신이 가는 그 길이 거짓된 걸음은 아닐까 하면서 경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신뢰합니다(요나3:4;출4:1-3). 슬기로운 사람은 늘 이렇게 밝은 빛 가운데로 걷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3:21, 새번역).


2021/08/06
잠언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잠언은 젊은 청년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설득 합니다. 그 방법은 전자를 ‘지혜로운 자’, 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야르’로서 ‘경외, 염려, 사망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잠언 도처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주님을 두려워(경외) 한다’ 혹은 ‘계명을 두려워 한다’는 뜻을 전달하는데 사용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1:7). 그러므로 여기 지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악을 피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방자하여 악을 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믿고 조심할 줄을 모릅니다. ‘방자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르’이며, 그 뜻은 ‘분노하다’입니다. 즉 바보가 주님이나 그분을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여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보의 눈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이는 하늘의 CCTV를 못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잠언이 드러내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만만해 하지 않고 늘 조심하지만, 자만심에 찬 바보는 악에서 돌이키는 것을 싫어 한다(잠13:19)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늘 주님을 경외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감으로써 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2:12, 새번역)

매일묵상(2021/8/2 – 6)

2021/8/2
시편 38편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1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세 번째 참회시로서 죄 때문에 발생한 영육 간의 고통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시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절 내리막길/ 13-22절 오르막길. 시에서 언급된 고통은 다양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죄짐, 고약한 질병으로 인한 부서질 것 같은 육체적인 아픔, 친구들로부터의 소외, 그를 파멸시키려는 원수의 움직임 등이 더해짐으로 그의 고뇌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 두 절은 본 시의 주제와 놀라움을 요약하여 알려줍니다. 그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과 구원해 주실 분이 같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의 범죄 때문에, 주님은 분노하였고 진노하셨으며(1), 그분이 심판의 화살이 날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2). 그러나 그가 가까이 가서 도움과 구원을 호소할 대상 역시 같은 주님이셨습니다(22). 왜냐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주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가져올 결과들을 여실히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할 시가 지어진다면, 바로 이 시가 그렇습니다. 죄는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죄인에게 부담을 주어 무겁게 하며, 행복을 상처 투성이로 바꾸어 버립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빼앗아 갑니다(1-8). 더 나아가 죄 때문에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가며, 우리는 고독하고 슬퍼질 뿐만 아니라 원수는 기회를 잡아 준동하기 시작합니다(9-12). 죄를 지은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13,14). 그러나 죄는 기도의 문을 닫지도 못하고, 우리가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막지도 못합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38:22)


2021/8/3
시편38:1-12절 내리막길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4절, 새번역)

다윗은 죄의 짐을 지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주님은 죄 때문에 그의 대적이 되셨습니다 (1-3).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2)라는 표현대로 질병, 고통, 버림받음, 적대와 주님의 질책이 모두 다윗에게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결과 다윗의 육신은 심한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고, 몸도 마음도 힘이 없고(5-10) 친구도 없습니다(11). 원수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2). 특히 5-8절은 고통스러운 육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에 대한 벌로서 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몇몇 경우는 그렇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C.S, 루이스) 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시간은 곧 성찰의 시간입니다. 본 시편의 경우, 죄와 질병이 서로 관련되어 있고, 그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증상들이 번갈아 . 그런데 주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 때문에, 다윗이 곤경에 처하자,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원수들의 위협이 다가왔습니다. 11절은 이에 대한 생생한 필치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새번역). 환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긴 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손으로 꽉 붙들어 주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잔칫집에는 가지 않아도 초상집에는 꼭 가 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처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2021/8/4
시편 38:13-22절- 오르막길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앞 부분(1-12)은 개인적인 육체적 고통과 죄의 짐에 눌린 심적 고통에서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원수들에 의한 생명까지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말하였습니다. 본 단락에서 다윗은 절망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마음을 다지고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합니다(13-14). 이를 위해 적들의 외침에 귀를 닫고 마음을 오로지 구원하실 주님을 향해 돌립니다(15-16). 물론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태도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신뢰성 있는 자세(15),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허한 마음(18), 그리고 신속한 구원을 부르짖는 외침(22)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의 모든 고난 및 죄에 대한 용서를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명시적인 기도는 16절에 드디어 나타납니다: “내가 재난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새번역). 그리고 다윗은 절박하여 주님을 붙잡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질병과 죄짐에 눌려 곧 멸망당할 것과 같이 연약한 자신을 원수들이 비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다윗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17-20). 그의 기도를 듣고 구원하실 그 주님은 430년 전 애굽인들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도성인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죄는 물론 질병이나 원수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2021/8/5
잠언 14:12절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새번역).

본 구절은 “보이는 대로 살지말라”는 교훈을 말하는 단락(8-15절)의 중심 부분에 놓여져 있고,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앞 부분의 ‘바른-야살’은 ‘길’과 결합하여 올바른 행위로 판단되어 성공으로 가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잠언에서 윤리적인 행동은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성공으로 이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그의 길은 많은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판단하고 취한 그 행동들은 사실상 왜곡되었으며 죄된 것들이었습니다(2:13). 왜냐하면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의 대단원이 죽음이라면, 자신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길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안전한지 그리고 그 마지막의 운명이 어떤지는 항상 보여지는 것과 같지는 않습니다(마7:13,14). 우리는 ‘기만적인 길’은 명백히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길만큼이나 확실히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투명한 인식과 주님이 창조하신 현실 그 자체 사이에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집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인간 인식론, 즉 인간의 시각에 접근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라는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진리는 유한한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 바른 길을 계시하셔야만 하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3:7). 이 잠언은 또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6:25).


2021/8/6
잠언14:13
“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 슬플 때가 있다.”(새번역)

13절에서 잠언 기자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마음의 아픔을 위장하는 행태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감추고 있던 슬픔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임을 말하여 12절과 같이 피상적인 판단을 유보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부르짖는 아이의 울음으로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웃음은 마음의 고통으로 엷어지고(14:13a), 결국 슬픔이 기쁨을 뒤따라옵니다(13b절). 인간은 죽기 때문에 기쁨은 반드시 슬픔으로 귀결됩니다. 파티는 늘 끝나고, 사랑의 행동들은 그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27:1,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색조는 잠언의 주된 주제 즉, “의인을 위해 기다리는 것은 ‘기쁨, 생명 그리고 소망’이지만, 악인은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10:28)/ 24:19. 20).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 계속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구원과 참된 가정(true home)이 있음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3:1-12).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로 현재 경험하는 기쁨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성숙해져가면서, 지금 권면하는 잠언의 지혜가 완전히 빛을 내게되는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3,새번역).

매일묵상(2021/07/19 – 23)

2021/07/19
시편36편 – “한 분 하나님 그리고 두 가지 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10절, 새번역)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A (1절) 악인과 그의 철학
          B(2-4절) 악인의 특성
              C(5-8절) 주님의 성품
          B’(9-11절)주님을 아는 자들
      A’(12절) 악인의 운명

이 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이 두 종류의 사람과 두 종류의 운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쪽은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다른 쪽은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갈래길에서 각자의 선택을 함으로 자신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갈래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계시한 뜻을 거부하면 우리는 마음의 욕망을 따라 살게 되고, 결국 무가치한 인생으로 귀착됩니다. 이 반면, 계시를 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 광명, 공급하심 그리고 보호하심을 누릴 것입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리스도인이자 리투아니아 총영사인 스기하라 치우네(40살)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이미 게슈타포에게서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비자발급을 중단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고민 끝에 불복종합니다. 그리고 28일 동안 쉬지않고 비자를 발급하여 6천명의 생명을 구하고, 토교로 소환된 직후 사직 당합니다. 그는 일생 전구를 팔면서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2021/07/20
시편 37편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11절)

이 시는 다윗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시로서, 신자의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하며, 어조나 문체는 잠언에 유사하고,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주님의 보호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고뇌에 찬 긴장과 함께 시작하는데,  그 긴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의인’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며 신앙의 삶에서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한편, 이 시의 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작성되었고, 네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절  악인의 번영 – 온유해라
   12-20절 악인의 적대감 – 주님의 돌보심을 믿어라
   21-31절 악인의 거짓된 행동 – 주님의 심판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32-40절 악인의 운명 –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다.
이 시에 맞는 악인과 의인은 단연 왕 사울과 신하 다윗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종의 갈래길에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하고(사무엘상 15장의 아말렉과의 전투 사건),  골리앗을 죽인 능력있는 신하 다윗을 까닭없이 질투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이 반면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받는 절박한 순간에도 순종의 갈래길에서 의를 행합니다. 결국 사울과 그 가문은 멸망 당하고, 주님은 의로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사 왕으로 삼습니다. 온유하게 주님의 뜻을 따른 다윗이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팔복 중 3번 째 말씀(마5:5)을 체험하고, 본 시로 아주 훌륭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5, 새번역).


2021/07/21
잠언14:8-15절 : 구조와 메시지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8절, 새번역)

잠언14장 8-15절은 ‘속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핵심된 교훈은 “보이는대로 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솔로몬은 이 경고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11절을 중심에 두고 교차대구의 구조를 사용합니다. 즉, 8절과 15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9절과 14절은 “죄에 대한 보상”, 10절과 13절은 “마음의 비밀”, 그리고 중심에 놓인 11절,12절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번영”을 말하며 “죽음에 이르는 속이는 길”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쌍을 이루는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절은 ‘미련한 사람이 자기를 속인다’라고 하나,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15절이 ‘미련한 자는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순진성을 지적함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3절은 어떤 사람도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행복의 외양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9절은 악인은 속건제가 요구하는 보상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지만, 14절에서는 주님의 응보가 확실함을 선언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즉각적으로 벌이 내리지 않기에 악인은 속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회초리는 확실하기에, 악인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이루는 11절, 12절은 악인의 눈에 확 뜨이는 성공은 짧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번영은 항구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망의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주는 교훈’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잠언14: 15절, 새번역)


2021/07/22
잠언14: 9절 :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9절, 새번역)

이 구절은 ‘어리석음/바보”라는 주제어를 통해 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보들은 속고 속이면서 이득을 취하기에(8절), 관계회복을 의미하는 속죄제사를 경멸합니다(9절). “속죄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샴’으로 ‘속건제사’를 의미합니다. “속죄제사”와 달리 “속건제사”는 거짓맹세, 도둑질, 그리고 속여 재산상 이득을 보는 경우를 포함하며, 이 경우 원물에 20%를 더하여 배상하고, 제물을 드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함 받습니다. 본 잠언은 손해를 가하고도 배상하기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물론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받아들이고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실로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들 사이에서 샬롬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죄의식을 불러 일으킬 상황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에 합당한 배상을 행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을 행하고도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우습게 여김으로, 하나님과 이웃들 사이에서 화평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사랑 가운데 화합을 이루려고 하기에 그 태도는 어리석은 자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 회복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이 지향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2021/07/23
잠언14: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만 알고, 마음의 기쁨도 남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새번역)
마음의 ‘고통과 기쁨’이란 인간의 감정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타인은 모르고 오직 당해 사건의 당사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외적 환경이 있지만, 만약 그런 외양만 감안한다면,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서적, 지성적, 종교적 그리고 도적적 움직임은 너무나 복합적이고도 내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경험할 수도, 타인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고, 두 명의 부인을 둔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매우 괴로웠으며, 또 한 명의 부인은 이런 한나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남편은 한나의 마음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주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잠언은 각 개인이 가지는 존엄성과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타인의 심정도 헤아릴 것입니다. 이 반면 만약 우리가 타인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한나와 같이 하늘에 계신 자비하신 대제사장인 우리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히4:15-16). 이와 동시에 우리는 타인 특히 배우자를 배려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지도를 만들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매일묵상(2021/07/12 – 16)

2021/07/12
시편34편 – 다윗의 교훈(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22절, 새번역).

이 시의 두 번째 단락(11-22절)은 3가지 비결을 말합니다: (1) 선한 삶의 비결(11-14절)은 주님을 경외하는데 있으며, 그 방법은 우리의 혀를 지키고(13), ‘악을 버리겠다’는 자기 부정의 도덕적 목표와 ‘선을 행하겠다’는 긍정적인 도덕적 목표를 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14). (2) 문제에 직면하는 비결(15-18절)은, 문제의 시작과 함께 기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의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당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얻기 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는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15). (3)구원의 비결(19-22절)은 신자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인)은 하나님과 친족 구속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산다고 고통 없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19), 보호하시고(20), 우리 편에 서시고(21), 우리에게 대가가 요구되는 것은 전부 지불하시고(22), 자신을 안전한 피난처로 제공하십니다(22). 이런 관계와 경험은 다윗의 주님되신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신약에 와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신자의 친족구속자(고엘)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2021/07/13
시편35편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분발하여 일어나셔서, 재판을 여시고 시비를 가려 주십시오.”(23절, 새번역)

본 시는 체계적인 시라기 보다, 적의와 고난이 끝이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감정이 끓어 올라 지은 시입니다. 배경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편집광적으로 증오하던 그 오랜 기간이 적당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사울에게 알랑거리며, 부당하게 다윗의 고난을 악화시켰습니다. 34편처럼, 이런 상황의 유일한 해법은 기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응답을 주신 34편에서의 고백과 달리(34:6), 현재 당하는 고난은 끈질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필요를 주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 시는 3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뜻 밖의 위험에 처하여 드리는 기도(1-10절) (2) 부당하게 당하는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1-18절) (3) 악의가 가득한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9-28절). 각 단락은 반복하여 시편기자 자신을 위해 행동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상황을 당할 경우, 본 시편은 좋은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 주님 역시 “까닭 없이 나를 미워 하는 자들”에 관한 내용을(19절)을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밤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요15:25) 명백한 이유 없이 고난 당하는 자들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당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경건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에 힘쓰면 우리 신앙에 큰 유익으로 돌아오며, 우리는 사람들을 얻을 것입니다. 마치 여자가 해산하여 자녀를 얻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 새번역).


2021/0714
잠언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지혜는 거만한 자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만한 자도 지혜를 추구하지만, 발견하여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들이 찾지 못하는 지혜는 경건과 도덕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말합니다.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죽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섬기려는 도덕적 미덕이 결여 됨으로써, 정작 자신이 지혜롭다고 소리를 쳐도 그에게서 배울 것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명철(明哲-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 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습니다. 심지어 한 마디의 말을 들어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명철”로 번역된 원어는 ‘빈(discerning)’ 으로 단지 두뇌가 명석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신중하게 모든 것을 결정하고 민첩하게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명철한 자의 대명사는 솔로몬입니다.  약관의 나이가 안되어 왕 위에 오른 솔로몬은 왕국을 견고히 세웠으나, 통치자로서 부족함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마음에 소원이 있음을 아신 주님은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왕이 되었으나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고백한 솔로몬은 백성의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듣는 마음”을 구하였고,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17:6).


2021/07/15
잠언14:7
“미련한 사람의 앞을 떠나라. 네가 그의 말에서 지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젊은이들에게 바보들의 교훈을 멀리하라고 강력히 충고합니다. 이런 충고는 이미 언급한 13:27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는 교훈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바보가 아닙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는 매우 지혜롭다는 의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그 말과 행위 속에서 자신의 미련함을 스스로 표현합니다. 만약 우리가 미련한 자임을 보고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리석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미련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14장은 바보의 특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적절한 행동과 말로 가정이나 관계를 파괴하며(1절), 상황파악을 못해 파멸을 자초하고(3절), 스스로 어리석음 속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고(6, 18, 24절), 스스로 어리석음을 표현하고(7절), 스스로를 속이고(8절), 거만하여 경건함을 조롱하고(9절), 모든 말을 쉽사리 믿고(15절), 경솔하며(16절), 음모를 꾸미거나 툭 하면 화를 내어 일을 그릇치고(17, 29절), 결국에는 자승자박하게 됩니다(33절). 특히 바보 중의 바보는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거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거나(시14:1), 혹은 자신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바보들을 만나게 된다면 신속히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얻을 도덕적 영적지식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2021/07/16
잠언14:8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새번역)

이 구절은 자기 행위의 결과를 주목하는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대조함으로써, ‘속임’에 관한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행위와 운명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의 문제들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지금 잠언은 잘 배우고(6절) 좋은 교사를 선택하라는(7절) 훈계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통제하라는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의 주어는 댓구를 이루는데 반해 –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와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  술어들 – ‘자기의 길을 주의한다’와 ‘속인다’ – 사이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숨어 있는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한 댓구가 이루어지도록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의 길에 주의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과 남을 해치는 속임수를 피한다.” 즉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도덕적 지혜를 따라 발걸음을 선택함으로 자신과 타인의 확실한 삶을 보장하지만, 바보들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하여 타인의 희생을 꾀하다가, 뜻하지 않게 자신도 희생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외양적인 필요와 결과만 생각하지 않고, 그 이면을 통찰하고는 그 길이 과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심사숙고합니다. 경건과 도덕의 비법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진심으로 구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요7:18, 새번역)


매일묵상(2021/07/5 – 9)

2021/07/5
잠언14: 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본 절은 1절과 2절이 추상적으로 표현한 지혜를 대조법을 사용하여 언어 사용에 적용합니다. 앞 부분은 거만한 바보가 자신의 말 때문에 매를 맞는 모습을, 뒷 부분은 지혜자가 자신의 말로 인해 생명이나 재물을 보호하게 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은 바보의 경우 ‘입’이라는 단어를, 지혜자의 말은 ‘입술’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입 – mouth’ 안에는 혀가 있습니다. 그 혀는 말할 때 입 안을 이리저리 치는데 마치 막대기가 자신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바보가 교만한 말을 하는 것은 자만심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쓸데 없는 고통을 자초합니다. 실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신임을 보여줍니다. 한편, 솔로몬은 입술이 다물어진 모습을 보고 슬기로운 자들이 보여준 절제있고 통제된 언어사용의 경험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주의깊게 할 말을 선택하여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실수일지라도 분별없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분노하며, 잘못하면 큰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신자들로 구성된 축구대회에서 바람같이 공을 몰고 가자 의도적 태클이 들어왔고, 심하게 넘어져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후에 그 신자는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의도성이 없다는 등 변명하는 말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물며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할 목적으로 말하는 경우 – 진실로 어리석은 자임 – 해를 당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12:18, 새번역).


2021/07/6
잠언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1절에 집을 세우고 허는 것으로 표현된 지혜와 어리석음의 추상적인 의미는 본 절에서는 사려깊게 산업을 선택하고 투자하는 경제적 활동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본 절은  “비록 농부는 황소를 쓰지 않고 스스로 일함으로써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리석은 결정이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잠언은 매우 짧지만, 히브리 원문은 번뜩이는 문학적 기교를 담고 있습니다(키에스틱 구조). 즉 문장의 처음과 나중은 ‘소’라는 단어, 가운데는 ‘소’가 미치는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바르-깨끗함”과 “로브-많다”(철자의 순서가 반대임)를 연 이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수입의 원천이 되는 산업에 사려깊게 투자할 때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농업사회에서 소로 대표되는 가축들은 쟁기나 마차를 끌고 타작도 하여 노동을 크게 절감시키기 때문입니다. 소 한마리도 그런데 하물며 12겨리 즉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종들과 함께 열 두 고랑을 동시에 간 선지자 엘리사의 집은 매우 부유하였을 것입니다(왕상19:19). 혼자 노력하여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이 들고 어렵더라도 서로 힘을 합쳐야 큰 성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 역시 공동 연구를 하며, 사업을 할 때도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결합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계에 지능을 달아주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는 거미형 인간 즉 여러 분야를 연결하여 네트웤을 만들 수 있는 융복합형 인재를 요구하며, 융복합형 인재의 필수 자질은 서로 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필요성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14:24).


2021/07/7
잠언 14:5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5절은 3절과 같이 ‘말하기’를 다루나, 증인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를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은 4절과 같은 문학적 기교(키에스틱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실한 증인 – no거짓말 – 거짓말 – 거짓 증인. 지금 본 잠언이 전제하는 상황은 법정입니다. 한 측은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하며, 또 다른 측은 그런 일이 없다고 방어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따라서 증거 없이 재판관은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지문, DNA 검사, CCTV 영상 등 많은 증거자료가 있으나, 3천년 전 솔로몬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증인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이 십계명 안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인의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은 증인의 인격내지 성품을 보고 진실 여부를 판단하게 됩니다. 실로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마7:17-18). 증인석에 앉을 때, 신실한 증인은 간청, 뇌물, 혹은 약속의 제시나 심지어 위협을 받더라도 진실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후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하셨다는 성서의 기록이 참됨을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증언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항상 만나고 있으며, 그분의 통치를 섭리 가운데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요15:26, 새번역).


2021/07/8
시편34편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4절, 새번역)

이 시는 깨진 아크로스틱(알파벹) 패턴입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시작은 히브리어의 자음 22개의 순서대로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등이 등장하지만, 한 문자는 사용되지 않았고, 다른 문자는 두 번씩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예측불허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때때로 찾아 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을 회상하고 답을 줍니다. 본 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상 21:10-14 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군대장관과 사위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도망쳐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왕을 아비멜렉으로 부름)에게 망명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의 가치를 알아보고 구류합니다. 또 다시 위기에 처한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체하여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주의할 점은 다윗이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서의 기사만 보았더라면 그런 생각도 가능하나, 본 시편에서 옛일을 회고해 보는 다윗의 심정을 읽으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도망칠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4절)…..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6절)…”에 있습니다. 즉 다윗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건져내셨고(4절), 구원해 주셨기(6절)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시편34:8, 새번역).


2021/07/9
시편34편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한 지혜로운 교훈(1)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9절, 새번역)

이 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10절은 경험이 주는 교훈으로서, 주로 다윗 자신의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11-22절은  삶을 어떻게 다루고 위기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를 교훈합니다. 오늘은 첫 부분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자랑할 것이니…”(1-2절)라는 대목은 심지어 ‘아비멜렉의 손아귀에 떨어져서도’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상황을 겪는 인생의 과정에서 신자의 참된 반응은 명민함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무한한 능력의 주님을 ‘찬양’하고 ‘자랑’ 하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아기스에게 망명하였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심히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마음이 가난하게 되었고, 간절히 기도드려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진리를 체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그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를 둘러 진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그 천사’는 나중에 도성인신하실 우리 주님의 구약적 표현이며, ‘둘러 진치다’는 말은 그분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지상을 순례하시고자 이동식 집에 거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신자들이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분에게 피할 것(8절)을 교훈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 두려움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과 같은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매일묵상(2021/06/28 – 07/02)

2021/06/28
시편32편
“너희는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아라.” (9절,새번역)

시편32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시는 7개의 참회의 시편들(6; 32; 38; 51; 102; 130; 143) 중 하나이며, 이 시편을 통해 사죄의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참회 뿐만 아니라 감사와 지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훈적 요소를 지혜의 문맥에 삽입하여 죄의 고백을 다룹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참회란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으로 고백,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교훈)에 문을 열고 순종하는 모습을 수반하여야 합니다. 이 시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축복(1-2절)은 슬픔, 고백, 그리고 용서의 경험을 전제합니다(3-5절). 용서를 경험한 경건한 자들은 주님께 피난처를 구할 용기를 갖습니다(6-7절).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그 교훈을 마음에 새깁니다(8-10절). 마지막 절은 결론에 합당한데, 다윗은 의로운 모든 자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기를 요청합니다(11절). 성서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체득된 도덕적 지혜가 삶에 배어 있어 하나님의 뜻이 열매맺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이 얻는 도덕적 지혜는 주님의 징계를 통해 옵니다(잠언3:11-12). 그들은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기에 분별력 없는 노새나 말로 상징되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워지시기를 부끄러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9-10a)


2021/06/29
잠언13:25
“의인은 배불리 먹지만, 악인은 배를 주린다”(새번역)

본 잠언은 13장 2-4절에서 이미 언급한 주제, 즉 의로운 자의 욕망은 풍성하게 채워지지만, 악인의 욕망은 계속 부족함을 경험한다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의인은 선한 행동이 보답받아 배불리 먹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의인 역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 행복, 그리고 기쁨을 얻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그러나 충족시켜야 할 욕구가 육체적 혹은 정서적 혹은 영적이건 간에 그 배후에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늘의 왕의 선한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는 사람은 모자라지 않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궁핍할 것임을 가르칩니다(잠28:27;10:3). 또 하나 생각할 점은, 궁핍을 의미하는 ‘배를 주린다’는 말은 하찮은 존재처럼 되거나 치료받지 못하면 죽게 될 운명임을 나타냅니다. 모세율법은 음식의 부여자(하나님)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오직 그분의 백성들이 언약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구약을 읽으면 풍성한 음식이 존재할 때는 올바른 관계,가 흉년이나 음식이 핍절한 때는 주님과 잘못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오직 최후의 심판 때만 100% 옳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뒤엉켜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라’(합2:4) 는 대원칙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욥의 경우와 같이 당신에게 신실한 백성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늘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 새번역).


2021/06/30
잠언 14: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31장10-31절은 지혜로운 여인이 어떻게 자기 집을 세우는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기를 즐거워 하고, 상인을 통하여 무역을 하며, 매일 식구의 음식을 준비하고, 여종들에게는 할 일들을 정하여 맡깁니다. 또한 밭을 살 때에는 잘 살펴서 지혜롭게 사며, 직접 벌어들인 돈으로 포도원도 사서 가꾸며, 가난한 사람을 열심히 돕고, 가솔들을 위해 의복을 지어 입히며, 장래를 대비하고, 남편이 마을 원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게하며 존경을 받고,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 않으며, 집안 일을 두루 살펴보며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녀는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그 혀로는 덕을 끼치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자녀들의 칭송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혜로운 삶의 원천은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31:30). 그러므로 잠언은 이런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뛰어나니, 아들에게 이런 좋은 아내를 얻을 것을 권고합니다. 이 반면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 손으로 가정을 허무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남편과 다투고, 거만하며 고집불통이고, 입만 열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쉽게 분노하고, 절제력이 부족합니다. 이 여인은 결국 혼자 살게 되며, 그 가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아내가 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녀의 행동에 따라 가정이 세워지기도 하고 무너지게될 수도 있기에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2021/07/01
잠언 14:2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자신의 생활양식이 주님이 미리 규정하신 도덕적 질서에 일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욕망 때문에 그 질서를 벗어나는 사람이냐를 기준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냐 아니면 그분을 경멸하는 자냐를 판단합니다. 사실 경건과 불경건, 건설적인 윤리와 파괴적인 행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는 바른 길(‘주님의 길’에 대한 환유법)을 걷는 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그의 인격과 행동이 주님께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에게는 양도불가능한 보물입니다. 이 반면 주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그릇된 길을 걷는 자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그릇된’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여 하나님이 굳게 붇잡으시는 도덕적 질서가 정해놓은 경계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릇된 길’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길들(ways)에서 왜곡된’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정해놓은 진로가 전혀 없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리 저리로 방황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실상 그런 사람은 주님의 미움의 대상이어서 그분과는 아무런 교제도 가질 수 없습니다(3:32).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애착)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에 의해 드러납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범죄하지 않으려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제사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런 거절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출19:5a, 새번역).


2021/07/02
시편33편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

본 시편은 우주와 인간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지혜와 섭리를 깨닫고 찬양하는 시로,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찬양의 요청 – 찬양이 마땅함(1-3절) (2) 찬양의 이유 : 주님의 완전하심(4-5절)과 주님의 능력, 목적, 지혜, 그리고 사랑(6-19절) 위대함. (3) 신뢰의 기대 – 인자하신 주님께서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함(20-22절). 한편, 다윗은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경건한 자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온갖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20-22절). 그러나 경건한 자들이 함께 모일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베푸신 그분의 인자하심을 새로운 상황에서 늘 새롭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섭리의 체험으로서 이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필요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과거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의 역사를 기술하며 주권자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에 섭리의 통치자로 기술된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착되어진 은사, 재물, 명예 등에 만족하시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섭리 가운데 최선의 것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1/6/14 – 18)

2021/6/14
시편 28편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이시다. 내 마음이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에,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셨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기뻐하며 나의 노래로 주님께 감사하련다”(7절, 새번역)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상황에서 간절히 구원을 호소합니다. 만약 주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1절),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당한 치욕으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4절). 의로운 자신은 죄인 처럼 억울하게 죽고,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악인들은 벌을 피해 간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셨고 다윗은 찬양과 동시에, 이런 구원이 주의 백성 전체에 미치도록 기도합니다(6-9절). 얼마전 정봉주 전 의원이 출연한 한 시사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BBQ 사건을 말하다가 기소되어  2011년 대법원에서 1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옥살이 중 250일은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하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지른 잘못이 떠올랐고, 그후부터 눈물을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당한 심문, 고문은 물론 더 나아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 거룩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사 죄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노래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고 구원이심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46:1).


2021/6/15
시편 29편 – 폭풍을 지배하는 왕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11절, 새번역)

이 시는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찬양의 시작은 천상의 존재들이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곳인 하늘에서부터 입니다(1-2절). 이어 그 찬양은 바다에서,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가데스 광야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천둥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3-9절).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은 그 영광의 주님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며 찬양합니다(10-11절). 이 시에서 우리는 다윗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 보다 훨씬 강한 천상의 존재들도 주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예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주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천사 한 명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7만명을 죽이고 이어 예루살렘을 멸하려고 칼을 들고 천지 사이에 선 것을 보고 다윗이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 왕으로 하여금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삼하24장/ 역상21장). 한편, 다윗은 바다와 레바논 그리고 광야를 휩쓰는 폭풍 및 천둥 소리 가운데서도 그런 피조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의 주님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면 힘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처럼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잠3:11).


2021/6/16
잠언 13:19절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겁지만, 미련한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새번역)

12절에 시작된 단락을 마무리 하는 ‘19절의 주된 가르침은 의인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열망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됨으로 즐거움을 경험하지만, 바보들은 악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19절 전단은 심리적인 사실을, 19절 후단은 도덕적 사실을 묘사하여, 진정한 심리적인 기쁨을 누리려면 반드시 도덕적 요소를 구비할 것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되었을 때 영혼에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욕망은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불경건함과 비도덕적인 삶에서 돌이키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만족감을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로 어리석은 자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싦어합니다. 그 결과 바보들은 생명보다 사망을(14절), 은혜보다는 멸망을(15절), 보호보다는 드러내는 것을(16절), 치료보다는 재앙을(17절), 사회적 존경보다는 미덕 없는 수치스러운 가난을(18절)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예가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는 의인과 같이 죽기를 바랐지만, 모압 왕 발락이 주는 재물과 부귀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모세에 의해 죽고 맙니다(민23:10, 31:8). 이들은 지혜자의 영감된 가르침을 멸시하기 때문에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만이 참된 만족과 샬롬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교정한다면,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행동 역시 변화될 것입니다(3:7; 16:6). “지혜란 야훼께서 주시는 것,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로 지식과 슬기를 깨치게 된다.”(잠언2:6, 공동번역)


2021/6/17
잠언 13:20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새번역)

20-25절까지 6 구절은 13장 마지막 단락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가지는 축복된 미래와 바보들이 당할 해로운 결말’을 대조하면서 선과 악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 출발인 20절은 자녀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다닐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다니다 Walk’는 ‘행위나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라는 권고는 현명한 자의 가르침, 격려 그리고 본보기를 가지고 살아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95%가 도덕의 문제이며, 똑 같은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해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 – 교만하거나 탐욕적인 사람, 정욕적인 남녀, 우상숭배자, 쉽게 분노하거나 왜곡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과 사귀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들의 영향에 노출되어,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정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큰 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완전한 모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생명과 축복과 화평의 열매로 가득찹니다. 좋은 예로 에녹(창5:22)이나 노아(창6:9)는 각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전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고, 후자는 방주 예비함을 지시받아 홍수로부터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2021/6/18
잠언13:21절
“죄인에게는 재앙이 따르지만, 의인에게는 좋은 보상이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행위와 운명의 관계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본 잠언은 의인화의 기법을 사용합니다. 즉 ‘재앙’과 ‘좋은 보상’이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타인에게 주는 그 재앙이 돌아와서 그들을 멸망시키며, 의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그 선은 정당하게 그들에게 보상을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재앙’은 마치 사냥꾼과 같이 인격화 되어 있습니다. 그 뉘앙스는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격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한 그 해악들이 죄인들을 맹렬히 추격하고 결국 사냥하여 멸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물론 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악인들이 자신의 부패하고 부풀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저지른 악한 행위의 결과가 돌아와 그들을 물어 죽인 실례들로 차고 넘칩니다. 비히 850년 경 악한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참혹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왕비 이세벨은 자기 시녀들에 의하여 이층에서 던져저 죽었고, 이어 개들이 먹어버림으로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성경과 세상 역사의 차이는 정의의 집행자가 누군인지를 성경은 밝히 드러내고 세상은 모를 뿐입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 반면 의인이 타인에게 베푼 생명을 주는 혜택들은 돌이켜 같은 은택으로 보상합니다. 이 역시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늘 경외하여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매일묵상(2021/6/7 – 11)

2021/6/7
시편 26편 – 선한 양심의 호소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완전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1절)과 끝(11-12절)을 맺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감찰(2절)과 행동(9,10)을 요청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오게 배경은 다윗에게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환경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선한 양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야말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우리가 선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순결하게 살 때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문자를 가지고 죽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만유의 주가 되신 바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명을 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음모를 꾸미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10절) ‘죄인’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하나님 앞에 결백함을 단언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단어들을 보면, 적들은 다윗의 생활양식(3절), 사귀는 동료(4,5절), 종교의 현실(6-8절)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개인적으로나(3절), 사회적으로나(4,5절), 영적으로(6-8절)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이 주님 앞에 드렸던 이 기도와 고백을 우리 역시 끊임없이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2021/6/8
시편 27편 – 기도로 일하는 믿음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절)

시편 26-28편을 읽으면, 먼저 성전(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26편은 예배자가 성전에 가까이 갈 때 신실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묵상면서 양심을 살피다가 마지막 구절(12절)에서 허락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27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성전을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성소요, 비젼의 장소로 여깁니다. 28편에서는 성소에 들어간 시편기자가 공평한 정의를 위해 지성소를 향해 탄원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27편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지지하심
                   ( 4-6절)  안전을 위한 첫번째 기도
                   (7-12절) 안전을 위한 두 번째 기도
(13-14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응답하심

어떤 분은 중학생 때 어둑해 지는 저녁 시간 동네 길을 걷다가 불량배 셋을 만나 주머니 돈을 전부 털렸다고 합니다. 셋만 둘러싸도 겁이 나는데 시편기자는 군대가 둘러싸도 무섭지 않다고 외칩니다. 뭘 믿고 큰 소리 치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과 늘 긴밀한 교제를 나누며 동행한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엿보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다윗은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믿음과 기도가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시며, 이런 주님의 구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교제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2021/6/9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2021/6/10
잠언13:17
“못된 전령은 사람을 재앙에 빠지게 하지만, 충직한 사신은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악한 전령(사신)의 성품과 그가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를 양심적인 전령(사신)과 그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치료효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15절(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을 함께 고려한다면, ‘못된 전령 bad messenger’은 ‘사악한 자’와 상응하여 반역적이고 신뢰성이 없어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전령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 쓰고, 말하는 분야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서, 외교사절, 군인, 왕실의 대변인, 총독, 정보요원, 물건운송, 후견인, 그리고 왕실의 첩자와 같은 많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령이라는 전문적인 수행원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춘 자여야만 하고 군사전략과 전술에 관한 공부까지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훈련과 또 그들의 수행하는 임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가는 그들에게 예외적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특권적인 대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진 문헌에 나타난 매우 희귀한 관료들의 이름 가운데 이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1590년 3월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의 침략야욕을 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 황윤길(서인)과 정반대로 왜군의 침입은 절대로 없을 것으로 보고 하여 조선을 재앙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짓 보고를 한 이유는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돌이켜 진주성을 수비하다가 병사하였지만 역사는 그의 죄책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2021/6/11
잠언 13:18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수치가 따르고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현대인의성경).

본 잠언은 13절과 매치를 이루면서, 13절에서 18절에 이르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은 보상과 벌은 행위의 교정여부에 의존함을 알려줍니다. 특히 본 잠언은 책망을 듣고도 행위를 교정하지 않는 자는 부끄러운 가난에 이르지만, 행위를 교정하는 자는 박수를 받고, 존경과 재물을 넘치도록 받는다고 말하면서(3:16; 8:18)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가난과 수치’ 즉, ‘수치스러운 가난’을 갖게 됩니다. 대조적으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여기서 존경은 사회적 명예 뿐만 아니라, 부를 수반함으로 사회에서 중요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22:4). 한편, 빈곤을 가져오는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 게으름(10:4), 쾌락과 사치를 사랑함(21:17; 28:19), 일하는 대신 수다를 떠는 경향(14:23), 통상의 악함(13:25), 그리고 줄 것을 안 주는 비열함(11:24). 그러나 본 잠언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 즉, 그것은 말과 노새와 같이(시32:9), 잘못된 요소들을 교정하라고 타이를 때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실패로 인한 가난은 불명예를 가져옵니다만, 불의를 거절함으로 찾아오는 가난 – 미덕을 가진 가난(17:1; 19:1) – 은 불명예롭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훈계를 백안시 하는 자들은 가난과 수치로 징계를 받지만, 타인으로부터 오는 그런 징계에 순종하는 자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됩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그것이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고 유익하기 때문이다.”(잠언3:13,14, 새번역).

매일묵상(2021/5/31 – 6/4)

2021/5/31
시편24편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3절, 새번역)

시의 배경으로 100년 간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안치시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삼하6장). 시는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주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으며(3-5절), 주님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가?(7-10절)” 그리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오직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 있으며(4절), 그분은 주권과 영광과 권능과 구속의 권리를 가지고 오신다(7-9절)” 이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로서 시를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창조 –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야훼)으로서(1-2절), 3절 이하 질문의 전제를 이룹니다. (2) 거룩 – ‘거룩’이란 특징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의 장막에 들어갈 자격을 논한 시편15편을 깨끗한 손, 청결한 마음, 참된 신앙, 진실된 말 4가지로 압축합니다(4절). (3) 승리 – ‘고대의 문들’에 대한 도전은 왕과 용사로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벌이는 전투의 외침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쟁들과 애굽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묘사하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하러 인간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권력과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과 싸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고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절)


2021/6/1
시편 25편 – 곤고한 날을 위한 ABC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9절, 새번역)

25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벹 22개의 순서대로(두 군데서 불규칙함)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첫 음절에는 히브리어 자음의 순서인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연속  등장합니다. 내용은 원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눌림, 주님의 인도에 대한 간청, 그리고 죄의식 때문에 발생되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어조는 차분하고, 시인이 가지는 주님에 대한 신뢰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감안한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개인적인 간구(1-21절)
      (1-5절) 신뢰, 소망, 기도
             (6-10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죄인들)
             (11-14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경건한 자들)   
      (15-21절) 신뢰, 소망, 기도

2. 이스라엘을 위한 간구(22절)

한편,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중 하나(b-베트)는 모호하게, 또 하나(q-코프)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알파벹 시 형태는 아닙니다. 또한 개인적인 신뢰, 소망, 기도가 드려지다 22절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은 생로병사와 같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패턴이 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등장하여 흐름을 깬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변함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7:14, 새번역)


2021/6/2
잠언13:14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가르침(토라)’과 ‘계명(미스바)’는 유사 개념으로 함께 등장하나(3:1), 여기서는 14절과 13절에 각각 등장하여 두 구절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지혜자의 가르침’이라는 어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혜자의 가르침’과 ‘계명을 두려워 하는 자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함께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가 치뤄야 할 그 빚은 죽음(14절)이고, 그분의 말씀을 늘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보상은 생명(14절)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잠언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하는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지혜자의 가르침’은 무서운 함정들이 숨겨져 있는 여행길 옆의 땅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샘’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자녀들이나 속기 쉬운 자들은 현명해 질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여 악으로부터 돌아 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샘’은 잠언이 주는 영감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가지는 풍성한 삶(생명)을 의미하며, ‘죽음의 그물’은 남을 잘 믿는 자들이나 둔한 바보들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많은 악의 대행자들 -못된 언어, 못된 행위, 악한 남자들과 여자들 -을 의미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문체와 탁월한 도덕성 때문에 사람들을 이끌어 생명의 진리를 마시게 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생의 여정에 생명의 샘은 오직 하나이지만, 죽음의 덫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잠언14:16, 새번역)


2021/6/3
잠언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5절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판단력, 통찰력을 뜻하는 ‘세켈’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지혜 good sense’는 ‘좋은 판단력’을 뜻하기에, 뛰어난 식견이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이른바 ‘양식(良識)’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16:22절(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에서는 지혜(명철)를 생명의 샘에 비유하면서 13:15절에 나오는 ‘지혜-세켈’와 14절의 ‘생명의 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며 그 가르침에 주의하여 그 샘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훌륭한 도덕적 인식과 이에 따른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호의를 받게 됩니다. 그 반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반역자들은 그 길이 험난하고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의 대표는 요셉, 사무엘,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그들의 뛰어난 판단력과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섬기는 삶은 본 잠언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줄 수 있는 은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받을 수 있다는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받는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을 때 주님의 응답과 돌보심 그리고 항해 경험으로 체득된 지혜로 폭풍 속에 난파될 배로부터 276명 전원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섬기기 위해 기도하십시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랴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2021/6/4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매일묵상(2021/5/24-28)

2021/5/24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의 이 기도를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드리셨습니다. 그 만큼 이 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습니다. 1-21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노래합니다. 22-31절은 구원받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은 시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인의 구원의 체험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경험하였습니다. 1-21절은 버림받은 고통(1절), 무력하게 십자가 상에 달려 있을 때 유대 지도층과 군중들의 비웃는 소리(6-8절). 십자가 상의 목마름의 고통(15절),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장면(16절), 자신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장면(18절)은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2-31절은 부활의 승리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형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요20:17).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다윗과 주님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고난으로 탄식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고난이 놀라운 감사와 찬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축복이며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시22:27, 새번역).


2021/5/25
시편23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6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시로서 시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각각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이라는 대목은 사무엘하17:27-29절을 회상시킵니다. 압살롬에 쫓겨 마하나임으로 피신한 왕 다윗은 군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를 통해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과 원수들이 포진한 비상 사태에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경험한 다윗은 이를 회상하고 감사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인생의 밤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이는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의 특권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2021/5/26
잠언13: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새번역)
8절은 재물과 책망의 주제를 다루고 9절은 이를 발전시켜 의인의 흥왕과 악인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재물 여부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도덕적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여 행복한 운명을 갖게 되는 반면, 이를 거부하는 악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여부는 의인과 악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에, 10절은 책망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은 물론 매우 슬기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충고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만한 바보는 자기 자신이 바르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지혜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여 전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줄 모릅니다. 당연히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들을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를 책망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고 도리어 격한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반면 충고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비판을 들을 때 한 번 더 생각하여 잘못된 점이 있다면 교정합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은 훨씬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에 밝은 유능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일을 추진해야만 할 것입니다. SNS가 발달한 요즈음 고객의 평점은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블랙컨슈머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공한 가게들은 이들의 의견 또한 무시하지 않고 고려하여 가게 발전의 디딤돌로 삼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 새번역).


2021/5/27
잠언 13:11절
“공으로 얻은 재산은 날아가지만 애써 모은 재산은 불어난다.”(공동번역).

7절에서 11절 총 다섯 구절은 부(재산)과 윤리에 관한 소 단락으로, 11절은 그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절이 8절에 암묵적으로 나오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 같이, 11절은 9절에서 논한 결론, 즉 의인의 영구한 부와 악인의 일시적인 부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잠언은 근면 성실하게 모든 재물을 긍정하나 악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정죄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물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는데, 영어는 이를 “easy money”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든 경우를 말하며, 폭정, 불의, 갈취, 거짓말 그리고 횡재 등이 포함됩니다. 이 반면, 인내, 근면, 사려 깊은 행동, 관대함 그리고 믿음이라는 덕들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등장하는 ‘애써 모은’(by hand의 의역)이라는 단어는 ‘점차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천천히, 적게, 꾸준히 손으로 일하여 재물을 축척한다는 의미이지 횡재는 생각도 없습니다. 실상 불의로 얻은 재물이 단명하고 올바르게 획득한 재물이 오래 간다는 말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성품과 가치의 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예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요구하여 쉽게 재물을 획득한 작은 아들은 먼 나라로 이주하여 허랑방탕하다가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 역시 재물을 어이없게 탕진하는데, 그 주된 이유가 재물의 가치와 관리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5/28
잠언 13:12절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새번역)

12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 19절은 ‘소원이 성취된다’라고 하여 8개의 구절(12-19)이 단락을 이루면서,  ‘지혜와 성취, 어리석음과 좌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실을 먹으려면 지혜자의 교훈에 목말라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모은 잠언은 생명샘입니다. 한편, 12절과 11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은 착실하게 모은 의인의 재물은 불어나지만, 힘안들이고 얻은 재산은 없어진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12절은 더 나아가 악인의 소망은 결국 이루지지 않아 마음이 병들지만, 의인의 소원은 성취되어 그의 삶의 생명나무가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망없는 외부적 상황은 심신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정신적, 심리적, 영적 에너지가 몸 전체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인이 가지는 소원성취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에너지를 갱신시키고, 용기를 새롭게 하여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합니다. 비록 윤리적인 단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요소를 반드시 전제하고 이 잠언을 읽어야만 하며,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실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저주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잠언13:14,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