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3/08 – 12)

2021/03/08
시편11편 – 믿음과 진리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공동번역)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왕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다윗이 산 속에서 숨어지내는 상황이 연상됩니다. 그 상황은 매복한 적에게 화살을 맞을 것과 같이 위급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블레셋과 같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보호를 믿는 다윗조차 죽을 가능성에 심히 불안하게 됩니다(1-3). 이때 늘 신실하게 살아온 다윗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이 모든 상황을 감찰하시고 공정한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님의 정의와 심판을 믿고 큰 안위를 가지게 됩니다(4-7). 이렇게 고백한 다윗은 계속된 사울의 추적에 엔게디의 한 굴로 피신합니다. 그때 사울은 3천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울은 용변을 보러 다윗이 6백명의 군사들과 함께 숨어 있는 굴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것은 쉬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를 네 손에 붙일 것이라는 신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안전하게 굴을 나가도록 부하들을 단속까지 합니다. 이후 한 번 더 다윗은 자신을 수색하는 사울을 살려주면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고난의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손에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는 고난의 과정에서 다윗이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의로우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되 사사로운 지혜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우셔서, 정의로운 일을 사랑하는 분이시니, 정직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시11:7, 새번역).


2021/03/09
성탄절이 가까워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 아직도 집을 못 구했어요?”

정말 어린 학생다운 순진한 질문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집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사렛에 정착하였다고 하니 집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가족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땅 위에 있는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공수래 공수거! 오래 전 미술개론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참 재능 있어 일본에서 상당한 이름을 떨친 어떤 한국 미술가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예술에만 정진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었고, 혈육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인생은 공이다”라는 편지가 자신에게 와 급히 찾아 갔더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습니다. 이분은 살아 있을 때는 거주할 집이 있었지만,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갈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 중, 아니 온 인류 중에 오직 한 분만이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님의 가족들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소망을 가지고 땅에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2021/03/10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가 여덟 살 때 이스라엘을 며칠 방문하고는,
“이곳은 고양이들이 할퀴지 않고, 개들이 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나라예요.” 그러나 후에 고양이를 만나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아멜리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어떤 고양이는 할퀴지만, 아마 그들은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고양이들일 거예요.”

우리는 역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 방문하고 나쁜 일을 경험한 뒤, “이 나라 국민성은 아주 나빠.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어디있어?”라고 말하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의 국민성은 나쁘지만, 더러는 좋은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하나, 어느 정도의 한계 내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개개인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악인과 선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 깊은 밀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입니다. 누가 선하고 악하냐는 동기에까지 파고들어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시면서 마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역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실 때까지 가룟 유다에게 선을 베푸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는 흑백논리를 넘어 지혜를 가지고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행하신 하나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13:49).


2021/03/11
범브란트 목사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복음을 전혀 모르는 러시아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에게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침례, 산상수훈, 비유, 기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그 장교는 매우 기뻐하여,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외쳤습니다.
“요정같이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나는 이때까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은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 당한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실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증거를 예수님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말에 그 장교는 찬성하였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제 구주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죽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여주었을 때 비로서 그의 얼굴은 다시 환하게 빛났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웃고 울리게 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모든 민족에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단군신화,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세종 대왕과 같은 이야기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야기 없이 제대로 형성된 민족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그들이 자라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집필된 동기였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2021/03/12
잠언12:21절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지만,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새번역)

이 잠언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절과 함께 볼 때 속임을 베푸는 자(악인)와 화평케 하려는 자(의인) 사이에 서로 다른 운명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의할 부분은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악인이 의인에게 해악을 의도하여도 의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여 받는 마지막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약속은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날에 흠 없는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결국 현재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시대를 통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최선의 것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과 협력하여 모든 것들이 선에 이르도록 일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롬8:28). 그 뿐이 아닙니다.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은 우리가 시험받을 때 붙들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구해주시고, 더 나아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한편 잠언은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현실에서의 괴리를 목격하지만, 확실한 것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전제할 때 악인에게 발생하는 가장 무서운 일은 형통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홀연히 찾아와 악인을 데리고 갈 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뿐입니다. “죄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지 말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러면, 너의 미래가 밝아지고, 너의 소망도 끊어지지 않는다.”(잠23:17,18, 새번역)

매일묵상(2021/03/02 – 05)

2021/03/02
시편 10편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해주십시오.”(시10:2, 새번역)

시편 9편에 이은 10편 중심에는 악인에 대한 다가올 심판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세상에 편만한 악인들의 행위를 보고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서 왜 멀리서서 심판을 신속하게 집행하시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이렇게 심판이 지체되니 악인들은 탐욕과 포악을 행한 뒤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4), “하나님은 보고 있지 않는다”(11),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13) 등, 주님을 모독하고 안심한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할 것을 요청하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행동하셔서 세상이 정화될 것이나(16-18) 의인들은 그분을 기다려야만(15) 한다는 신뢰와 믿음의 가르침을 줍니다. 시편기자의 탄식과 같이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으나, 응답이 더딘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가 진정한 믿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전파에 심히 방해가 되는 장애가 몸에 있자 간절히 3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 9)는 십자가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 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 방법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한 손 아래 여러분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골1:11, 새번역).


2021/03/03
러시아의 그리스도인 겐하디 말라쵸프가 선고받은 감옥 생활을 다 끝내고 석방되자 그의 가족이 찾아 왔습니다. 감옥 문에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실거예요?”
“너희들과 같이 집에 가야지”
“아녜요, 아버지가 계실 곳은 바로 여기예요.”
“왜 그러니?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게 기쁘지 않니?”
“기쁘지 않아요. 전 언제나 아버지가 계실 곳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감옥이란 말을 들어왔어요”

이 딸은 아버지가 감옥에 간 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산 경험이 없습니다. 비록 부녀 관계라 하더라도, 삶을 함께 나누지 못하였다면 서먹서먹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같습니다. 만약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 그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창조와 심판의 하나님은 되실 수 있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구속의 하나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삶에 대한 공통의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겪으셨으며, 속죄의 대업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당신의 임재이신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황이 생각과 달리 여의치 않아도 주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16:1, 새번역).


2021/03/04
신앙으로 감옥에 갇힌 미쉘 사크하로브에게 아내와 딸이 면회하러 갔습니다. 미쉘은 자기 딸을 향해 팔을 뻗으며 “애야 이리 와라” 하자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나는 저 사람에게 가기 싫어요. 난 아빠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아주 미남이었어요. 빼빼 마르고 주름살 투성이의 이 사람은 아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늘 보고 싶어하는 분을 몰라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자녀들만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사랑했으나, 종의 형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힘 없는 아기로 나셨고, 양부 요셉 역시 목수로 보잘 것 없는 계층이었습니다. 더구나 나사렛이란 산 동네에서 선생 없이 자라시자 예루살렘의 지식인들은 무시하였습니다. 한편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신 후 전도하시다가 고향 나사렛에 들려 회당에서 설교하자,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저 사람의 누이동생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않느냐?”(막6:3) 하면서 고향 사람들 역시 주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승천하여 섭리 가운데, 여러 모양으로 – 가난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연약하며, 의 때문에 핍박당하는 모습 등 – 지금도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약 해외 선교사 부부가 왔을 때 손님 대접을 잘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집에서 극진히 섬기는 것은 코로나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용이 들더라도 호텔에 숙박시켜야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10-11a).


2021/03/05
잠언12: 20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이 잠언은 악을 도모하여 고통을 가하려는 자들과 화평을 위해 권고하는 자들을 대조하면서, 전자에게는 ‘속임’이, 후자에게는 ‘기쁨’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그 특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속임을 꾀하는 자들은 진실한 기쁨을 가질 수 없지만, 화평을 도모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고가 상대방은 물론 공동체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기에 희락이 있습니다. 여기서 ‘속임 Deceit’이란 악을 꾀하는 자들의 마음에 뿌리박혀 인격의 한 구성부분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속이는 자들은 냉정하게 계산하여 상대방을 능숙하게 해치지만, 어리석은 자들(18절, 바보) 충동적이고 생각없이 말하는 자들로서 전자가 훨씬 악한 인격체입니다. 당연히 그런 인격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은 비난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락’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듯이, 악을 행하는 자의 삶에는 희락과 화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여서 타인을 해치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익의 판단기준은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주인이 계시고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당하게 받는 재물과 명성 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경외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십시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풍성히 우리의 삶을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2:26, 새번역)

매일묵상(2021/02/22 – 25)


2021/02/22
시편 9편
“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받을 때에 피신할 견고한 성이십니다.”(9절, 새번역)

시편 9편과 10편은 하나의 시입니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히브리 원문의 사본이 이 두 시편을 하나로 취급하고 있고, 형식적으로도 두 시가 하나로 묶여지는 기교(acrostic pattern)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를 드립니다(1-3). 그 다음으로 이방 국가들에 대한 재판장으로서의 야훼를 상술합니다(4-8). 셋째로, 야훼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분은 친히 피난처가 되십니다(9-14). 마지막으로, 악인들에 합당한 심판을 묘사하면서 9편을 마칩니다(15-20). 한편, 9절에 있는 ‘요새’와 ‘견고한 성’은 같은 히브리 단어(misgab)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히브리 단어는 접근이 불가능한 높고 견고한 바위로 된 장소로서, 침입해 오는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께 피한다면 안전할 수 있습니다. 비시1,30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태평세월을 거치자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미디안을 불러들여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셨고, 7년 간 미디안의 학정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서서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은 이들의 회개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보내어 미디안을 쳐 부수고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피할 요새가 되심은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고, 시편 기자처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약5:13, 새번역).


2021/02/23
어떤 사람이 12살 된 유대 소년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이런 경고를 하였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사실인데, 네가 믿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마찬가지 이유로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데 선생님이 이것들을 믿는다면, 선생님은 멸망하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대인들과의 이 논쟁은 2천년이나 되었고, 이 논쟁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습니다(AD48). 논쟁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정통 보수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규정된 할례, 안식일, 음식 규정 등을 지키며, 선행을 하되, 범하는 죄악들에 대한 속죄는 제물, 기도, 회개, 그리고 선행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비교하여 선을 행한 것이 많으면 천국에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심판을 내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상의 속죄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어떤 방법도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속죄를 이루신 뒤, 부활 승천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전형적인 유대인은 사도 바울입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도마 등 수 많은 유대 증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만유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2021/02/24
러시아에서 한 안내인이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설명하고, 끔찍한 종교 재판 장면과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죄에서 구해 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거죠. 더구나 그들은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고, 그 부활한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답니다.”
그러자 열두 살된 소녀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 동무,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 행위를 하였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관 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다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
소녀는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비록 현대에서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해도,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짓눌려 살고, 천당을 놓치는 것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제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겠어요.” 자신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행17: 32, 새번역).


2021/02/25
잠언12:19절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이 잠언은 짧지만 기교가 들어가 있습니다. 중심된 내용은 ‘영원히’와 ‘잠시 동안’이라는 부사의 대조입니다. 이 두 부사는 히브리 원문에는 이 구절의 중심에 배치되어 뜻이 대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단어 사용의 재치(wordplay)가 들어 있습니다. 원문의 순서대로 풀어 보면 “진실한 입술은 굳게 세워지는데 그 기간은 무한정이다 그러나 눈 깜빡할 동안 존재하는 혀가 있는데 (그 혀는) 거짓되었다.” 진실한 입술이 영원히 굳게 세워지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창조하신 질서에 일치하기 때문이고, 거짓된 입술이 눈 깜빡할 사이에만 존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거짓된 혀들을 미워하십니다. 거짓과 관련된 드라마틱한 성경의 사건은 바로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10명의 이복형제들입니다. 이들은 질투의 대상이 된 요셉을 은 20량에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후 찢은 요셉의 옷에 양의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이고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야곱은 속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고된 훈련을 통과시키면서 훌륭한 신앙인이자 정치가로 키워내셨습니다. 거짓말은 탄로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는커녕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형들의 입장은 그야말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여러분의 자녀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진실한 사람으로 키워내실 것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매일묵상(2021/02/15 – 19)

2021/02/15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2021/02/16
6살 된 도로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형 ‘엘리자벳’을 그냥 인형으로만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 항의하였습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소녀란 말예요. 그녀가 만약 그냥 인형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자벳은 그냥 인형이 아니예요”

물론 도로시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도로시의 생각이 현실화 되는 메타버스(가상 우주)게임에서는 그 인형이 소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 우주 공간은 인간이 만든 그야말로 가상의 세계이고, 우리가 숨쉬고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현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주장한다고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규정에 합당하여야 비로서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미부여’정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시각(철학, 관점, 세계관)에서 만물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토대로 자신들의 삶을 전개해 나가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들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거나 아니면 모르겠다 등의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의 생각과 틀리게 되면 어린 도로시의 생각과 같게 됩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의 이성은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전제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형은 인형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성숙한 이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롬1:22, 새번역).


2021/02/17
여섯 살 된 소년이 부모와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식사 도중에 아이가 여주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사님, 요리가 맛이 없어요 정말 요리할 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하셨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잘못 이해한다면 위의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게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지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 역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발명한 문자와 문학 그리고 상식 역사 철학 등이 도구가 되어 기록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문학작품이요 역사책이고 철학(신학)책입니다. 시편이 그렇고 잠언이 그러하며, 욥기, 에스더, 신명기, 요한복음, 로마서, 사도행전 등이 그러합니다. 어린 아이는 도저히 이런 성경들을 쓰거나 이해할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주님은 하나님 사랑괴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사는 그런 삶이 번제와 제물보다 더 낫다고 동조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고백과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면 나는 빠른 시일 안에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오만방자한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19-20).


2021/02/18
미하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관이 허름한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가자, 식당을 본 알렉스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누추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알렉스는 자기가 식사 기도를 하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당신께서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바깥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흉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언제나 안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안을 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극작가 도로시 세이어즈(1893-1957)는, “… 지적이고 호소력을 지닌 배우가 대사 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불어넣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극작가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배우가 난해한 해석을 적절하게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이다.”(창조자의 정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소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온갖 모험, 스릴, 고난, 기쁨, 슬픔, 고통, 두려움, 삶과 죽음 등이 존재합니다. 자유의지가 등장 인물 각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각자는 반응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러 난관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지만, 인내하면서 통과해 내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욥의 모든 역경을 돌이켜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시 삶의 여러 부분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2:20, 새번역).


2021/02/19
잠언12장 18절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새번역)

잠언은 사려깊은 언어 사용을 격려합니다. 그 방법은 생각 없이 쏟아 내는 말이 주는 정신적 상처를 비수에 찔린 치명적인 육체의 상처와 대비시키거나, 혹은 사려깊은 말이 미치는 좋은 영향을 육신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양약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말이나 혹은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잠언에서 바보들이나 하는 반응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한편, ‘비수(검)’는 죽이기 위하여 고안된 전투 무기로서 의도적이고 무정한 살인자를 상징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말(혀)은 치료제입니다. 이 비유는 해로운 갈등들을 풀어서 화목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존 빌립 목사님은 차를 몰고 2틀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친구 부인이 암으로 임종 직전에 있었고,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의 죽음이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친구를 만나 고린도전서3:21-23을 펴서 “메리가 죽어가고 있으나 그 죽음은 네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말하여주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인 동시에 선물의 성격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메리에게 죽음은 고통을 잠잠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좋은 ‘약’이 있어 사람들을 치료하기 너무나 좋은 위치에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엡4:29, 새번역).

매일묵상(2021/02/08 – 10)

2021/02/08
시편 7편
“주님께서는 뭇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8절, 새번역)

이 시는 원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시입니다. 시편 기자의 적들은 사자 같이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피신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법정에 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악행을 한 피고들을 심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무죄한 자들을 놓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재판장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사상은 시편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두려움과 가슴이 철렁하는 경악감 대신 신뢰와 위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가볍게 그리고 경솔하게 취급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판관 포청천 앞에 선 원고나 피고 모두 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도록 합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과업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34, 현대인의 성경).


2021/02/09
미하이가 어렸을 때 늘 중간에 자면서도 철야기도회에 따라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너무 짧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종종 한 말입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을 교회에 가서 사는 게 어때요? 교회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야 해요.”

미하이는 정말 교회가 놀이터인 양 행동했으며, 어느 주일 예배 때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 오자 미하이를 징계하기로 한 뒤 엄히 물었습니다.
“네가 목사의 아들이라서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빠는 내가 설교를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어요.”
“좋다. 그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아빠는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열심히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해요.” 목사님은 더 이상 야단 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자금법을 위반하여 5천만원을 받았다고 수사를 받던 한 정치인은 당과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아파트 17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여비서가 성추행 당하였다고 고소하려고 하자 그 날로 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서울시장도 생각납니다. 이분들에게 세상 것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가 탄로나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올 심판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용서의 근거를 만드시고 또 한편으로는 심판할 준비를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눅 24:45, 현대인의 성경).


2021/02/10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매일묵상(2021/02/01 – 05)

2021/02/01
시편 6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절)

이 다윗의 시는 초대교회에서 읊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입니다.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 일곱 개의 시편들을 읽고 노래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와 함께 이로 인한 감정적인 괴로움을 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합니다.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병과 근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1-5), 시편기자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6-7),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승리의 선언(8-10).

시편 기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구원이 없다면 자신은 죽어 ‘스올’에서 거처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려주시기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도 없고, 어둡고 소망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를 가진 시편기자도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구약도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반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새 창조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빛이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함과 고난을 당하는 분들 앞에서 함께 울고 기도해 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인류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2021/02/02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네 살 가량 되었을 때 가족이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이가 도중에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책임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냄새나게 만들어도 가만 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미하이의 표현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미하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책임자에 대하여 오히려 좋은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실상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존중하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4-27). 우리로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데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범 되신 주님은 훌륭하게 이를 행하시고 속죄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고 본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만들어진 새로운 종(種)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021/02/03
미하이가 다섯 살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를 심히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는 네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있다. 그 페이지에 하나님은 네 죄를 낱낱이 적어 놓으신다. 거기에 그저께도 하나 적혔고, 어제도 하나 적혔는데, 너는 오늘도 다시 죄를 지었다.”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내가 저지르는 나쁜 짓만 써 놓으신다고 생각하세요? 착한 일은 써 놓지 않나요?”

미하이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법을 어긴 사람만 단속하는 경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인 동시에 해로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잘 한 행위를 기록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바로 이 측면을 단단히 붙잡고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나그네 3명을 대접한 뒤 알고 보니 주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주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심판자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린 후, 의인의 수를 계속 낮추다가 10명까지 허락을 받았습니다. 즉, 1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이 없던 소돔 성은 불과 유향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반면 어떤 성인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때, “주여, 제가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유념하여야만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1/02/04
어떤 아이가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쥐고 교회로 가다가 도중에 넘어져 동전들을 떨어 뜨렸는데, 하나는 도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동전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입니다. 17살에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섭리 가운데 왕립학교에서 3년을 공부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학생들에게 주는 음식 특히, 고기와 포도주는 모세율법의 규정상 먹을 수 없어서 – 우상에게 미리 바쳐진 음식 등의 이유 –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튼튼하게 자라겠는가?”라는 환관장의 입장 역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를 무릅쓸 것이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고자 음식 담당자에 10흘만 채식을 주어 비교해 보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 채식으로만 목적이 달성되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시험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도록 만드셨고,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2021/02/05
잠언12장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6절은 15절의 서론적 교훈을 언어와 관련한 도덕과 신학을 다루는 부분들(17-22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심적 교훈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지게 되는 위험한 감정(분노 등)들을 잘 통제하라는 권위적 충고입니다. 랍비 일레아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컵, 지갑 그리고 근심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즉 마시는 동안, 돈 거래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흥분상태에 있을 동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fool)는 몸짓과 언어로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배우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무시합니다. 여기서 무시한다는 히브리어 ‘코세’는 ‘덮어 보이지 않게 하다 혹은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구경 거리가 되느니 참아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자를 못 본체 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여러 구절(17-22절)에서 지혜자는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든 상황에 반응할 수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결국 그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인 자제력으로 인하여 선한 결과가 도래되어 그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벌주려고 광분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매일묵상(2021/01/25-29)

2021/01/29
잠언12: 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새번역)

12장의 두 번째 단락은 말(16-23)과 행위(24-27)가 맺는 열매들을 다양하게 언급하면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15절은 서론입니다. 본절은 ‘지혜로운 사람”와 “어리석은 사람”을 권위가 있는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여부에 따라 정의합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의 대표가 잘 고치는 의사입니다. 이분들이 건강에 관한 준 충고와 처방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이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도 같습니다. 사랑과 진실함을 늘 베풀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잠언의 거듭된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면 건강을 잃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영혼을 잃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어리석은 자의 경우 거만하여 충고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바보들, 특히 거만한 바보는 자신의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합니다만 실상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확증편향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이 자신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사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이 반면 지혜자는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때문에 권위있는 사람의 충고를 귀 담아 듣고 자신의 길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근력이 다져지며, 인자와 진리는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은 심판날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를 받으려고 전 인생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4:21, 새번역)


2021/01/28
어떤 소년이 “하나님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8살쯤 된 그리스도인 소년이 말하였습니다.

“아냐, 할 수 있어. 하나님도 한때는 너와 나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자라는 어린 소년이었어. 그분들이 그에게 매일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쳤어, 만일 예수님이 어떤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악한 부모들이 그에게 욕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술마시는 걸 가르쳤을거야.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어.”

이 아이는 자신도 모르면서 매우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을 선한 길로 가르쳤을 것이고, 어린 소년이었을 때 우리 주님 역시 겸손하게 배우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강보에 싸여 무력하게 울고 있는 어린 아이가 시간과 공간과 만유를 ‘그 능력의 말씀으로 붙잡고’(히1:3)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실까? 이것이 우리 지식과 논리의 한계입니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여름에 피서하는 열하에 가서 생전보지도 듣지도 못한 짐승들 – 코끼리(?). -을 보고 “어떻게 이런 동물들이 있었을까?”는 감탄을 발하였습니다. 세상 일도 이런대 하물며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비로서 온 우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골1:27, 새번역)


2021/01/27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일곱 살의 알렉스가 할아버지에게 들려 준 설명입니다.

“경기를 하는 동안엔 우리편이 지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몇 초 동안에 경기가 반전되어 우리편이 이길 수도 있어요.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예요. 성 금요일엔 하나님이 완전히 진 것 같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태를 반전시켜, 부활 주일 새벽에 하나님께서 마귀의 골 문에 공을 던져 넣은 거예요. 결국 경기가 끝났을 때 하나님이 승자였어요.”

어린 알렉스의 훌륭한 비유입니다. ‘사망’이라는 단어는 모든 인간사의 마지막 말이요, 절망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진실로 사망은 끝판왕입니다. 죽은 자를 누가 기억합니까? 전도서 기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2:16)라고 쓰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사실과, 죽은 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우리 몸이 죽는 원인은 아담이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받는 심판은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범한 죄들입니다. 아담을 핑계로 둘러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시기 위함이요,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에 선고된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문제로 너무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2021/01/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는 요나가 어떻게 해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왔나를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 손녀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제법 자신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어. 그 말은 그가 상당히 똑똑했다는 뜻이야. 그는 배에 탔을 때, 배들이 종종 가라앉는다는 것과, 그러니까 자기도 어쩌면 고기에게 잡혀 먹힐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안전을 기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주머니에 빨간 고추를 넣고 탔지. 그가 고기의 코에다 고추를 밀어넣으니까, 고기가 기침을 하게 되는 바람에 그가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어린이의 말이지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나의 구출 사건은 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고 부활하실 예표적 사건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만을 바라고 실생활에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아멜리의 빨간 고추만큼이나 우스꽝스럽습니다. 실로 이런 태도는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삶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면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순종하고 완악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즉,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선지자적인 선포를 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그만 폭풍우를 만나 결국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죄인 요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물고기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 풍랑이 몰아치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늘 돕는 분이시다”는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가 체험한 기적을 체험하려고 노력하지말고, 요나 사건의 가르침을 섭리 가운데 배우려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때에 언제나 돕는 분이시다.”(시46:1, 현대인의 성경).” 


2021/01/25
시편 5편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5:12, 새번역)

이 시는 구원을 위하여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3절을 보면 이 시는 아침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다윗의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5장은 구원에 대한 간구로 시작하여(1-3),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선포합니다 (4절). 그리고 그 성품을 기준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5-6, 9-10)과 의인들이 가지는 소망 (7-8, 11-12)을 노래합니다. 결론으로 주님께서 바르게 살아가는 자신을 복주시고 방패와 같이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확신합니다(12). 이와 같이 시편 5편은 하나님의 왕되심과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3천년 전 다윗 왕의 시대나 첨단기술문명의 시대인 21세기에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통치하십니다. 구글의 초창기 야후에게 기업 인수를 요청하였지만, 야후는 거절하였습니다.  만약 구글의 미래를 알았더라면 야후는 몰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후 영원한 나라로 대체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의 성품은 우리로 악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두려움을 주지만, 또한 정직한 삶에서 만나는 큰 문제에 산성과 같은 피난처가 되십니다. 늘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명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시46:1, 새번역).

매일묵상(2021/01/18-22)

2021/01/22
잠언12:14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개역개정)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새번역).

14절은 1-12절의 결론적으로 말과 행위의 결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은 늘 하나님의 섭리 하에 놓여 있습니다. 나무가 생산하는 품질좋은 농산물과 같이, 선한 가르침, 화평으로 이끄는 지도력, 경건한 권고, 위로를 주는 격려 등은 사람의 기본적인 인격을 드러내며, 자연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고,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람’은 의인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배(belly,위장)는 좋은 것들로 넉넉하게 채워지게 되고 삶은 윤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품성은 좋은 열매를 생산해내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때 그런 선함은 돌아와 그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손이 행하는’이란 말은 윤리적으로 관련된 행위를 나타내며, “복록=복되고 영화로운 삶”이란 호의적인 행위를 보여줍니다. 14절은 언행일치, 즉 의인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어긋남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죠! 책임을 지려고 하니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는다”는 표현은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는 분리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합을 만들어 내는 분은 다름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가장 초라한 행위도 마지막 날에 풍성하고도 영원히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12:14절의 진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새번역)


2021/01/21
기독교를 가르치는 교사가 그의 반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들 중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느냐?” 몇 학생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 교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너희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쌍한 죄인들로 태어난 거야”

이 문제에 대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우리는 죄를 지으며 태어나진 않지만 죄인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모들을 통해 이 은혜가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전해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 독특한 기독교의 인간관이 담겨 있으며, 기독교에 반발하는 인문학조차 현실 세계에서 소설과 역사 그리고 철학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모태에서 정직하게 살도록 지으셨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어진 세상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한 번이라도 범하면, 그는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2021/01/20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부님이 개비라는 네 살된 어린 한 소녀와 마주쳤습니다. 신부님이 입맞추고 축복받으라는 의미로 십자가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오히려 “내가 왜 십자가에 입을 맞춰야 하죠? 십자가는 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신부님이예요?” 하면서 신부님의 빰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의 탄식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에는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울부짖는 소리에는 귀가 먼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선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 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녀의 행위는 옳은 것이다.”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노나라 대부 맹손은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진서파는 어미 사슴이 울면서 수레를 따라 오는 것을 보고는 불쌍히 생각하여 풀어주었습니다. 이를 안 맹손은 크게 노하여 진서파를 추방하였다가 3개월 후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아들을 맡겼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부의 질문에 맹손은 “새끼 사슴을 불쌍히 여길 정도라면 사람의 자식은 얼마나 귀히 다루겠는가? 내 아들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이 되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한비자). 사람의 됨됨이는 사랑의 열매로 파악하나, 됨됨이는 생각에 의해, 생각은 가치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복음은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5-6).


2021/01/21
무신론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논리를 고수하자니 도대체 삼라만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딜레마를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러시아에서 한 선생님이 진화론을 가르치자, 한 아이의 대답입니다. “선생님, 이런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악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악한 건 고릴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는 “그건 사실일 리가 없어요. 나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즐겁게 놀고 있었고 땅콩을 던져주면 고맙다는 표시를 해요. 나는 잔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원숭이들처럼 행복한 동물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공통점은 공산주의자들이 잔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만, 공산주의 이념을 떠나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악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히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독일민족이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복음전도의 한계도 여기 있습니다. 믿음은 강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과 법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마음에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간직한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답할 준비를 하고 선한 양심으로 생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선한 일을 헐뜯고 욕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벧전3:15-16, 현대인의성경).


2021/01/22
시편 3장 4절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새번역)

시편 3장은 표제가 달린 첫 번째 시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유대 지파를 제외하고는 전 이스라엘 지파가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대적자들은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고,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2절). 문제는 다윗이나 대적자들이나 모두 여호와에 대한 같은 신앙과 고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구의 판단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욥과 세 친구와의 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원리는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축복을”이라는 도식입니다. 이를 근거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재앙은 그의 불의와 죄악을 증명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예외도 있음을 믿고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두 주장의 대립 및 전개가 욥기의 주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다윗도 같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수 많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이번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 하나님의 실제적 구원이 오기까지 자신의 믿음이 옳바름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구원을 부르짖고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8절). 사무엘상의 기록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결국 다윗의 손을 들어주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구원은 언제나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법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입니다.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3:5, 새번역).

매일묵상(2021/01/11 – 15)

2021/1/15
잠언12장 13절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개역개정)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새번역)

13절은 14절(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과 함께 언어와 행위의 결과를 나타내면서 12장 첫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죄인의 언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13절), 의인의 언어는 좋은 것들로 그를 채우게 됩니다(14절).
13절은 무죄한 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죄악된 말 때문에 악인 자신이 덫에 걸리게 됨으로, 언어 사용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즉, 모함이라는 ‘그물’은 악인 자신이 설치한 것이지만, 결국 말하고 있는 자신이 걸리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의로운 다니엘을 모함한 페르샤 제국 신하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에스더서입니다. 하만에게 모함 당한 의로운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죽을 운명에 놓여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결국 섭리 가운데 거꾸로 하만과 그 일족은 멸망하고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구출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을 경우 입술로 죄를 범하기 쉬우니, 기도하고 심중에 말하며 잠잠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의인도 악인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3:16-17, 새번역).


2021/1/14
어떤 가족이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가족의 어린 아들은 새 집에 감탄하여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집 너무 멋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부활의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로 상속을 받을 때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다가 드디어는 이 아이와 같은 탄성을 질러댈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세상을 우리는 약속받았고, 그 보증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엡1:14)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약속의 충분한 성취를 기다리기 때문에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진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있는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법적인 신분은 죄인으로부터 약속의 자녀들이요 도래할 유업의 상속자들로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새집에 부모님을 따라 들어간 아이처럼, 우리가 이 사실에 너무나 감격하여 상속자처럼 살아가는가의 여부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 – 돈, 명예, 권력, 지식, 지위 등 -은 이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이것들은 순리대로 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청지기의 지위에서 생각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부요하게 만들 줄 알아야만 합니다. 청지기의 직분을 잘하면 주님의 축복을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모두 받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1/13
과거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서 침례교인 피터즈는 비밀리에 인쇄된 성경을 옳기다가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슬피 울자 그의 네 살된 아들이 물었습니다.

“엄마 천국은 아주 더럽고 나쁜 곳이에요?”

“너는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니?”

“엄마 아빠는 늘 나에게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아빠가 천국에 갔는데 왜 엄마가 자꾸 우시는지 모르겠어요.”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어는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옳겨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는 더 좋은 나라가 올 때까지 평안히 주님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 손녀 아멜리는 여덟 살 때 많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뒤 사도 바울의 안녕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멜리 왈.

“바울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라는 말로 편지를 끝내곤 했는데, ‘우리’란 말 속엔 다른 사도들도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게 아니예요? 성경에는 그들이 죽으면 더 이상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써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어린아이다운 생각이나, 배울 점이 있습니다. 어린 아멜리도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사는데는 남 못지 않지만 과연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와 가족을 위해, 곤란에 빠진 친지와 성도들을 위해, 시험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만 합니다. 심판 때 주님은 우리의 변명에 “왜 기도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으실 것이 뻔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


2021/1/12
최근 경기도 7급 공무원 채용시험 한 합격생이 인터넷에 올린 저속한 글과 그 내용이 문제가 되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철저히 조사해서 필요할 경우 합격을 취소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또 대전광역시 9급 공무원 합격생 중 한 명은 품행문제로 직접 고발까지 당하여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실은 있으나 그 내용대로 행한 적은 없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KBS 열린토론에 나온 한 토론자는 자신이 낸 세금이 그런 분들에게 사용될 수는 없다고 하고, 어떤 청취자는 사기업에서조차 채용될 수 없다는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문제되는 두 분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자신들이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였습니다. 그저 안정되고 보수도 괜찮고, 연금이 보장된 직장으로만 접근하였지, ‘봉사’라는 공무원으로서의 사명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오직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려는 권리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혹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습니까? 신앙은 말이 아니라 인격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언어의 사용에서부터 ‘사랑의 열매’가 있는지 반추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마7:24, 새번역).


2021/1/11
시편4장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4장의 저자는 다윗으로 주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다윗의 심정을 토로 한 것입니다. 오늘은 ‘실용적 신앙의 유혹’을 다루는 6절을 묵상하겠습니다.

신앙의 실용주의라 함은 믿음을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누릴 혜택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실용적인 믿음이 불러오는 교묘한 유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신앙의 핵심에는 “개인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나 예배의 목적은 현실의 이익입니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내게 그 점을 보여주어라!” 실용주의 신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종교나 설교 등을 찾아 쇼핑하게 됩니다. 다윗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의 종식과 풍부한 소출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만 해결되면 거짓 신들에게라도 달려가 안도감을 가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봉자들은 바알이 이 가뭄에 비를 내려 풍부한 농업의 산출물들을 줄 권능이 있으니, 바알에게 제물을 드려 어려움을 빠져나가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과 여러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하여 순전한 믿음‘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는 단호한 결의를 갖고 있습니다. 욥이 그 대표로서, 극한 절망 중에서도조차 주님을 굳게 붙잡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것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매일묵상(2021/1/4-8)

2021/1/8

잠언12: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개역개정)
“악당들의 견고한 망대는 무너져도 착한 사람은 뿌리를 내린다.”(공동번역)

10절과 11절에서 재물이나 경제적 번영은 현실적인 노동과 일(10-11a)을 통해 얻어져야 하지, 허망한 꿈을 쫓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적은 잠언 기자는 12절에 이르러 경제적 이득에 관한 분별력을 한 단계 높여주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다른 악인들이 사람들을 착취하여 획득한 망대나 불의한 이득을 가지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믿고 그것을 탐을 내지만 사실상 그 망대는 신뢰할 수 없는 방어막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부자는 재산이 요새가 되고, 높은 성벽이 되려니 생각한다.”(18:11, 공동번역)라고 설파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악인의 삶은 덧 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인들은 자신들의 인격에 뿌리내려져 결실한 정당하고도 신뢰할 만한 망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망루의 결정체는 바로 주님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18:10, 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대기근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물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안전하게 구출된 것은 물론 많은 은금을 얻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부지런히 가축을 길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일을 망치는 자와 형제간이다”(잠18:9, 새번역).


2021/1/7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거예요. 우리가 살아을 때 어머니들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 것처럼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고함 지르진 않으실 거예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힘 없는 아이들이 경히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큰 선물입니다. 특히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양에서 농노의 지위가 향상되고 급기야 해방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던 것입니다. 지금 계속하여 인구가 감소하여 50만명에 턱걸이 하고 있는 포항시는 51만명 회복에 전 행정력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위상추락은 물론 50만을 기점으로 엄청난 행정상의 지원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구감소는 많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합니다. 그래서 충북 제천시에서는 3 번째 자녀를 낳은 순간 4천5백만원에 해당하는 은행 빚을 시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한 명의 아이가 절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장 귀한 선물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고함을 지르는 대신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면서 양육하여 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물론 잘못된 행동은 교정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성경의 가르침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엡6:4, 현대인의 성경).


2021/1/6
범브란트 목사님의 부부는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친척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고, 그분들의 가족과 친척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죄로 나치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을 때,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는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같이 기도하자 미하이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죽일까요?” 이때 그는 겨우 네 살이었습니다.“어쩌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나요?” “경찰이 와서 우리를 차에 태워 데려갈 것이다.” 목사님이 설명하였습니다. 미하이는 차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좋아했습니다.“그럼 그들이 우리를 차에 오래 태워 줄까요?” “그래 주겠지,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선 총으로 우리를 쏘아 죽이겠지.”미하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진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조금 죽이고 나면, 우리는 후에 많이 부활할 거예요. 그리고 천국에 가겠죠. 경찰은 하늘까지 올라 오는 사다리를 모르니까 그곳까지 우리를 따라오진 못할 거예요.”

어린 미하이의 말 속에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일부를 그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모여든 수만명의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시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분”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과 심판에 대한 믿음은 나찌의 공포 속에서 사는 어린 아이에게조차 위안과 담대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점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2021/1/5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유대지도층의 시기로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7:17-18). 이 대목을 배운 열두 살된 어떤 남자아이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의사들이 예수님을 시기했어요. 예수님이 공짜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 아버지는 파산하고 말거예요.”

이 아이는 어리지만 선악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악판단 능력이 올바른 판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판단 전에 복잡한 세상사를 이해할 능력 즉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분야에서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어도, 마구잡이로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믿고 오는 사람들만을 고쳐주셨고,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불치병들을 많이 고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표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죽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칭 기적의 한계입니다. 기적은 죄 때문에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뒤 이은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는 아이들과 같이 지혜에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히5:13-14).


2021/1/4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창36:6-8).

야곱은 밧단아람으로부터 수 십년만에 아버지 이삭이 계신 헤브론으로 돌아가서는 에서와 함께 거주하였습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는 가나안 땅 남서쪽 세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애증의 관계를 맺고 수 천년 동안 이웃에서 살아갔으며 로마에 함께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에돔의 도시 데만 사람들은 지혜로 유명하였습니다(예레미야 49:7). 그러므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에서는 야곱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그럼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의 존부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하신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에서의 후손은 믿음에서 떠나 ‘코스’로 추정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언약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창37:1).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습니다. 외형적인 삶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에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는 생명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삶, 즉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마음에는 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시63:3,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