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5/09 – 13)

시편92: 5절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 주님의 생각이 어찌 이다지도 깊습니까?”(새번역)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적절합니다.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의존해 사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힘껏 일한 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권자이신 주님께 예배드리며 안식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라는 제4계명이 주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주의할 점은, 진정한 안식을 가져온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일요일)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7).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안에서 안식할 줄 아는 신자들은 복이 있습니다(마11:28).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I.      지존자를 찬양 (1–3)
    II.     감사의 노래 ( 4–14)
      A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 4–5)
         B      심판과 존귀 (주님)(6–8)
         B′      심판과 존귀(시인) ( 9–11)
      A′      의인의 번영 (12–14)
    III.      주님을 찬양 (15)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보다 크고, 깊으시며(5), 심판은 아주 공의로우시기에 악인은 멸망당하고, 의인은 높이들릴 것입니다(7-11). 따라서,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신자야말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편92:12).

시편92: 12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목격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나를 엿보던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보며, 나를 거슬러서 일어서는 자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새번역). 그리고 의인의 삶을 생각하자(12), 시편1편의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92편과 1편 모두, 의인의 삶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다만, 1편에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늘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92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심긴 종려나무와 백향목,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른 거목입니다. 1편은 의인의 일상을, 92편은 성전 예배를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살면서, 아름답게 노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늙어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에 차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노후가 영광스러운 진정한 이유는 그가 보다 뜻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노년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당신의 말씀에 정직하시고, 우리가 의지할 바위가 되시는지 그의 삶 자체가 선포합니다(15). 실로 의인의 삶은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인생의 최종평가는 우리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낸 주님의 영광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1:21, 새번역).

잠언 17:16절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새번역)

16절 이하 20절까지 5개의 구절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친구)과 분쟁을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바보를 대비시키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관점에서 교훈을 줍니다. 16절은 ‘왜’ 혹은 ‘어째서’의 뜻을 갖는 히브리어 ‘람마’로 시작되는 수사의문문의 형태입니다. 솔로몬은 기괴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손에 돈을 들고 현자에게로 가서, 지혜를 사고자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왜’에 대한 답은 불필요합니다. 현자는 무척 화를 낼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바보란 자신을 위해서라면, 도덕적 질서를 무시하고, 현자의 바른 질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완고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바보가 돈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고 온다면, 현자가 질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명기에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주님이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받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신23:18). 지혜나 참된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실로, 지혜는 돈을 지불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들음, 신중함, 겸손 등 바른 인격의 축적을 통해서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은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는 법 배우기입니다(1:8). 자기중심적인 바보는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줄 모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는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에, 타인은 물론 친구나 혈육의 가치, 그리고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바보는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습니까?(15:32).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잠언17:17, 새번역).

잠언 17:17절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인 친구와 형제의 가치를 교훈합니다.  친구와 형제는 늘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찾아오는 고난의 시기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악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친구나 혈육을 돌보지 않습니다. 친구는 좋은 시절이건 아니건 언제나 사랑하며 위해주는 관계입니다.  고난의 시기는 참된 친구를 분별하도록 합니다. 역경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의 유배 생활 중  역관 이상적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고,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1844년). 한편, 본 잠언은 형제는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말합니다. 친구와 형제의 차이를 구분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고난의 시기에는 친구들은 떠나고(19:4), 혈육을 나눈 형제만이 도움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구가 역경에 처할 때나,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힘든데, 어느 정도까지 도와 주어야 할까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3년 정도의 적금을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지혜롭게 접근하였습니다. 20년 전 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이들의 변화를 확인할 팰요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 테스트 후 변화를 확인한 요셉은 전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구나 형제가 곤궁해도 남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처할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약1:5).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17:18).  

잠언17: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현대인의성경)

40년 전만 하여도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여야 입사가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역시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수 년이 흘렀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분은 신원보증을 한 친지에게 손해 배상이 청구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 ‘보증’이 사업의 한 부문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개인 간의 보증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보증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였습니다. 17절이 선한 이웃(친구/형제)을 다룬다면, 18절은 어리석은 이웃(친구)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빚 때문에 매우 곤란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어리석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신을 모르고 정에 못이겨 선뜻 보증이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쉽게 타인의 빚에 보증을 서는 사람은 지혜 없는 자라는 잠언의 말씀은 주의해야 합니다. 한편, 17절에는 역경에 처한 친구를 돌보라고 하고, 18절에는 보증 서지 말라고 합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역경에 처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아무런 계산 없이 채무, 특히 고리로 차입한 빚의 보증을 서지는 말라는 훈계입니다. 타인의 빚에 대한 보증을 섰다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묘사한 잠언6:1-5은 특히 청년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기를 좋아 하는 이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잠언17:19, 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2/05/01 – 06)

시편91: 2절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새번역)

시인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할 때, 실로 많은 위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험은 숨어서 기다리며(3), 때로는 음험하게 다가오기도 하며(3,6), 위험이 예상되어 두려워 하게도 됩니다. 더구나 위험의 연속일 때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피난처, 그것도 절대적인 피난처를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확실한 피난처임을 발견하고, 자신의 피난처로 삼았음을 거듭거듭 말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시의 주제 – 확실한 보호
     B1 (2) 개인적 증언
         C1 (3–8) 시인의 확신
    B2 (9a) 개인적 증언
         C2 (9b–13) 시인의 확신
  A2 (14–16) 확증된 주제: 하나님의 보호

시를 읽어내려가면, 하나님을 우리의 요새요, 피난처로 삼았을 때 늘 안전하다는 시인의 확신에 저절로 동의하게 됩니다(9,10). 시의 저자는 알지못하나, 전쟁을 누비는 다윗이 떠오릅니다. 다윗 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또 경험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90편, 91편, 92편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90편에서 모세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호소합니다. 91편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92편에서, 경건한 시인은 찬양을 드립니다. 신약의 두 곳에서 본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마귀가, 또 하나는 주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15절, 새번역)

시편91: 11,12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1,12절에서, 주님은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명령하사 시편 기자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피난처와 반석으로 삼은 시편 기자에게 주신 약속들의 절정입니다. 천사들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영적 존재입니다(히1:14). 더 이상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와 같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은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사자나 독사와 같은 무서운 원수들을 짓밟는 정복자들입니다(13). 정복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귀는 이와 반대입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시는 주님을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는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면서, 본문 11,12절을 안전에 대한 근거로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마4:6,7).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읽는 방식은 마귀의 특질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써보지만 너무나도 힘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40일 금식 후로 지쳤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의 주님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천사의 도움을 보내셨습니다(마4:11; 눅22:43). 요청도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특질입니다 (마26:53,54).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신약에서 인용된 또 하나는 13절입니다. 내일 보내드리겠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시편91:13절)

시편91: 13절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사자와 독사’는 각기 힘과 교활함을 상징하며, 빈번하게 악한 사람이나 능력들의 존재를 표현합니다. 13절은  양자를 함께 등장시켜 ‘그 악한 존재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한 구체적 성취는 본 시편이 아니라, 신약 성서에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악한 존재는 사람 보다는 마귀나 귀신 등 영적인 존재를 지칭합니다. 좋은 예는  70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한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주님께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시편 91:13절에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능력이나 존재도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은 이 진리를 잘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늘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물론, 어디까지 구원하시는지 알려고 주님을 시험하는 따위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경험한 뒤 빠지기 쉬운 교만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때문에, 주님은 승리를 기뻐하는 70 명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교훈하셨습니다. “정녕, 주님은 너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너를 건져 주실 것이다.” (시편91:3,새번역)

잠언 17:14절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두어라.”(새번역)

14절은 12절에서 경고한 성난 바보를 만났을 때, 그의 억눌린 오만과 분노를 자극하면 싸움(소송)이 일어나니 주의하라고 권고합니다. 분노를 품은 어리석은 자와 다툼이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둑이 터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싸움의 시작을 둑(땜)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은유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둑이 터지는 과정은 물이 새어나오면서 시작됩니다. 물은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이윽고 둑이 터지게 되면 그 손해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은 한 번 시작 되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만 두다’의 원어의 뜻은 “단념하다”입니다. 만약 다툼이 조금이라도 시작된다면, 부드러운 대답으로 분노를 쉬게 하는 등  화목으로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상호 간의 손해를 극소화하는 것은 물론, 평정을 되찾게 되어, 이성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선을 악으로 되갚은 자들 앞에서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현명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 대신 다윗은 기도하면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시편38:12-20). 이와 대조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사람은 말썽꾸러기(6:12~19), 비뚤어짐(16:28), 성냄(15:28), 분노(29:22), 오만(28:25), 증오(10:12)와 같은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 모두 피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 (잠언16:32,새번역).

잠언 17:15절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주님께서 싫어하신다.”(새번역)

15절은 10절부터 시작된 “어리석은 자와 벌”이라는 주제를 끝맺음하며, ‘바보와의 싸움을 그치라’는14절의 교훈에 균형 추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정의의 확보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악인을 의롭다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 할 정도로 정의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율법은 시비를 맡은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라”(신25:1)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 규정과 반대로 판결한다면, 큰 재판장이신 주님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싫어하신다”의 원어 “ 토에바”는 구역질나는 것, 혐오, 우상과 같이 가증한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토해 내치고 싶을 정도의 역겨워하고 극도로 혐오스러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불의한 판결을 내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가증한 우상과 같이 파멸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를 알면서도 그릇되이 판결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타락한 재판관들은 죄 있는 자를 무죄방면하고, 죄 없는 자는 아예 재판정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상당히 빈번하였습니다. 속담에 한 명의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보다, 10명의 죄인을 놓아 주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잠언은 이와 관련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있습니다. 판결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악한 천사임)들을 판단할 것입니다(고전6:3). 당연히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 중 하나는 사랑은 정의(=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우선임을 아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잠언 17:16, 새번역).

매일묵상(2022/04/25 – 29)

시편 89: 49절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다윗과 더불어 맹세하신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새번역)

이 탄원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4절) 인자와 진실의 하나님/ (15-37절)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들/ (38-51절) 약속과 다른 현실 그리고 기도입니다. 서두부터 시인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주님이심을 노래합니다(1-14). 이어 시인은 주님의 약속 즉, 다윗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를 후손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기억합니다 (15-37).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다윗의 왕가는 멸망당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은 가나안 땅에서 뽑혀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시인은 외칩니다. 비시586년 베벨론에 멸망당한 후, 이스라엘 상황이 그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후, 다윗 가문에서 결코 통치자인 왕은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탄식하며 심한 좌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합니다. 약 550년 후,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롬1:3).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열망하는 시인에게,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고백한 시인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도 확실한 응답을 주셨습니다(48절).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죄와 사망과 싸워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깨진 것처럼 보일 때, 시인처럼 우리도 약속을 주님 앞에 노래하고, 현실의 실망을 기도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고후1:20, 새번역)

시편90: 12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시편 제1권(1-41)은 개인적 차원을, 제2권과 제3권(42-89)는 국가적인 차원을, 그리고 제4권과 제5권(90-150)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의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4권은  총17편(90-106)으로 대부분 익명입니다. 과거에 이 시(모세의 기도)는 고린도전서15장과 함께 장례식에서 늘 낭독되었습니다. 그때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시는 4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2)영원하신 하나님/(3-6)덧없는 인생/(7-12)진노 하의 인생/(13-17)은혜의 하나님. 배경은 40년 동안의 광야를 방황하던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구출되어, 시내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1년 동안 머무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또 성막과 각종 제사제도를 완비하였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거하셨습니다. 그후, 광야를 가로질러 가데스바네아에 이르자, 정탐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40일 후 그들로부터 장대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 하여 밤새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주님 역시 그들을 버렸습니다(민14:34). 38년 동안 60만명의 장정이 죽었습니다. 모세도 이 세대와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엄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테스트를 거칩니다. 주님은 성적을 매기십니다.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든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하게 됩니다. 3번 부인한 베드로와 같이 말입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시편90:13,새번역).


잠언 17:11절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은 마침내 잔인한 사신의 방문을 받는다.”(새번역)

본 구절은 배신을 잘한다는 악한 사람의 특성과, 그들에게 임할 엄중한 벌을 경고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받아도 교정받지 못합니다(10a). 더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이나 통치자에 대하여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이르게 됩니다(11a). 당연히 잔인한 사자(messenger)가 보내지고, 결국 그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귀결될 것입니다(11b). 잠언은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자를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악인과 동일시합니다. 한편, 잠언에서 왕은 하나님의 통지 대리자입니다. 따라서 왕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왕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이 그 전형입니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보다는 백성을 더 두려웠습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말렉과 그들의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은 멸망시켰으나, 짐승의 떼 중 좋은 것들은 살려두어 자신과 백성의 소유물로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가서,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15:23)고 책망한 뒤, 그의 불순종 때문에 주님께 버림받았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불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다가, 말년에 블레셋 군대에 의하여 세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5,6).

잠언 17:12절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새번역)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이란, 미련한 일 행하기를 극도로 힘쓰는 바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사람이란 단순히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잔인한 폭력성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새끼 빼앗긴 암곰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명백합니다. 곰은 위험한 동물이지만, 새끼 빼앗긴 암곰은 특히 더 위험합니다. 그러나 난폭하고 맹렬한 암곰과 직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바보가 내리는 결정들은 어리석어 커다란 해를 가져오기에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과장섞인 유모를 사용하여 미련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왕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최고의 군대장관이자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희대의 명장인 다윗을 쫓아낸 사울 왕은 원수 블레셋 군대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매장하려 했던 고관들(렘18:20), 메시야를 제거하기 위해 유아 학살도 불사한 헤롯 대왕(마2:16), 왕이 되려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 등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미련할 뿐만 아니라 분별 없는 분노를 품고, 짐승보다 더욱 포악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중국 고사입니다. 범려는 왕 구천을 도와 월나라가 패권을 잡게 한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업을 달성하여 득의양양한 구천을 보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은거하였습니다. 성공한 왕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잠언17:13,새번역).

잠언 17:13절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새번역)

11절에 언급된 반역을 일삼는 바보는 이윽고 ‘악으로 선을 갚는’ 배은망덕한 행위로 나아가게 됩니다( 13a). 반역만 꾀하는 바보에게는  잔인한 죽음의 사자가 보내졌지만(11a), 배은망덕한 바보의 집에는 재앙이라는 악한 손님이 찾아와 떠나지 않습니다(13b).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배은망덕은 인류의 보편적 성품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선물을 차 버리곤 합니다. 창조주의 과수원인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고난 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내가 주인이야!”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주인처럼 행동하여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힙니다. 인간의 그런 무지한 행동 때문에, 인간에게 재앙은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실천해야 합니다.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벗어난 다윗은 충성스러운 헷 사람 우리야까지 죽였습니다. 주님은 악한 손님을 보내셨고, 그 재앙은 다윗 가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근친상간, 살인, 반역적 행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주님께 십자가의 선고를 내리고 자신은 죄가 없다면서 손을 씻었을 때, 유대인들은 외쳤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모든 선한 일을 무시하고 악으로 갚았습니다.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져서 2천년 동안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야만 합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마3:8,새번역).

매일묵상(2022/04/18 – 22)

시편87: 4절
“내가 라합과 바빌로니아를 나를 아는 나라로 기록하겠다. 블레셋과 두로와 에티오피아도 시온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새번역)

총 7절이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증거하는 시입니다. 주제는 ‘도성’, ‘탄생’, ‘책’의 세 가지입니다. 1-3절은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도성을, 4-5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생’을, 마지막으로 6절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명부(책)’입니다(6).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적대적인 이방 국가들(4)로 확장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계20:12). 이 시는 주님께서 생명책에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6; 눅10:20). 하나님의 도성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의 길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35:8)라고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주님의 터→ B1 (2) 주님의 사랑→ C1 (3) 하나님의 도성→ D (4) 우주적 도성→ C2 (5) 지존자의 도성→ B2 (6) 주님의 명부→ A2 (7) 나의 터들. 로마 백부장은 병든 종을 고치러 오시는 주님께 “들어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사 낫게 하십시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의 믿음에 놀라신 주님은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8:11,새번역)고 하셨습니다. 본 시편의 성취를 말하신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시편88: 3
“아,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새번역).


시인은 닥쳐온 심한 고난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는 세 단락(1-9a, 9b-12, 13-18)으로 나누어집니다. 각 단락은 간절한 인내의 기도(2,9,13절), 흑암의 경험(6,12,18절),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두려움(5,10,15절)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정말 기도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받지 못하고 고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들, 멀어진 친구들, 병약한 몸, 그리고 자신을 보아도 공포만 보이고(16), 장래를 바라보아도 어두움은 줄어들지 않습니다(18절). 우리 역시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흑암의 시기를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복음과 확신, 하늘과 보상 등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들은 신음하는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8:1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기도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께 대한 경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13,14). 인생이 늘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분의 주권을 베게 삼아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17:8절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잠언 8절은 뇌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뇌물’의 히브리어는 ‘쏘하드’이며, 선물을 뜻하나,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로운 판결이나 공정한 집행에 나쁜 영향을 미치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뇌물로 번역한 것입니다. 뇌물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강도짓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미가3:11). 그러나 뇌물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로 번역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원어는 ‘에벤-헨’으로 단 한 번만 구약에 등장합니다. ‘헨’은 ‘호의’ 혹은 ‘매력’을, ‘에벤’은 ‘돌’을 의미합니다. 이는 ‘매력 혹은 호의를 만들어 내는 돌’을 뜻합니다. 실로 마법의 돌입니다. 뇌물은 마법처럼 사람의 판단력을 둔화시킵니다. 공의는 굽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재판장이 되었을 때 뇌물의 매력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AD60년 경 유대 로마 총독 펠릭스는 뇌물을 받고자 연금된 바울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뇌물 대신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는 두려워 하였지만,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등을 초청하여야 합니다(눅14:12-14). 왜냐하면 그들은 뇌물은 물론 그 대접조차 결코 되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숨겨져 있던 우리의 의를 주께서 모든 자들에게 드러낼 때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잠언17:9절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새번역)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모욕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을 때, 신자는 현명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본 잠언의 교훈 방식은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비교하는 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관용적인 태도입니다.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은 잘못을 용인하거나 못본 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고 마음으로 긍휼히 여겨 용서주는 것입니다. ‘덮다’의 원어는 ‘메캇쎄’으로서 ‘가리다, 숨기다’의 뜻입니다. 남의 잘못을 실제적으로 용서하고 아예 잊어버림을 말합니다. 관용적인 태도는 사랑을 싹트게 합니다. 하반절은 험담이 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 도구가 됨을 언급합니다.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험담을 여러 번 들으면, 마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이웃관계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남의 험담을 포함하여 복수를 꾀하지 않습니다. 복수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를 금지하는 명령도 그는 숙지하고 있습니다(신32:35). 하나님께서 만민의 재판장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루실 권한과 책임을 다 가지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계신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참고 사항이요 고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수를 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를 실험과 방정식으로 검증하여 아는 물리학자처럼 신자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며, 기쁨과 두려움으로 보석과 같이 말씀을 간직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17:10절
“미련한 사람을 백 번 매질하는 것보다 슬기로운 사람을 한 번 징계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새번역)

미련한 자는 완고하여 고치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교훈을 잘 받아들입니다.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이 둘을 대비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히브리어는 ‘베메빈’입니다. 빈(discerning)은 ‘분별’을 뜻합니다. 단지 두뇌의 명석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판단력을 갖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 민첩하게 수행합니다. ‘미련한 사람’의 원어는 ‘케씰’입니다. ‘케씰’은  ‘살진, 어리석은, 바보스러운’ 등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는 단지 지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판단력이나 의지, 행동 면에서 슬기로운 사람과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한편 ‘백 번 매질’은 과장법입니다. 율법에는 40대 이상의 매를 금하기 때문입니다(신25:2,3). 지금, 솔로몬은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내릴지라도 미련한 자를 교정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다 죽은 부자와 그의 형제들이 좋은 예입니다. 죽어 멀리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회개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지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할 수 있는냐에 귀착이 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할 수 있냐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 특히 어른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야 합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 (잠언17:12,새번역)  

매일묵상(2022/04/03 – 07)

시편86: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새번역)

이 시에서 주님은 35 번 언급되어,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가난과 궁핍으로 도움이 절실 할 때(1), 환난의 날에(7), 그리고 오만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 대적할 때(14), 주님이야말로 다윗 자신이 머리를 놓을 수 있는 베개입니다. 주님은 그가 부르짖는 기도를 듣고(3-4) 구출하여(12-13) 원수들을 수치스럽게 하실(17)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을 당할 때 능력으로 구원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8). 시를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면, 다윗의 기도는 다윗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기 보다,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초점은 주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느헤9:5~31, 32~37), 우리 기도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보다 믿음을 유지시키고 굳건하게 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주님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3). 바닷속 물고기나, 공중의 새도 그분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경외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 온 고난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허락을 받고 닥친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고백하고 구원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을 믿고 말입니다. 이것이 좀 어렵습니다만(히5:11-14), 이 시기야말로 주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 줄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시편86:11,새번역)

시편86:10절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기도의 자세에 관한 이 시의 3가지 교훈입니다. 먼저는 (1) 우리의 신분입니다: 주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합니다. 그는 전하, 폐하로 불리는 왕이나, 주님 앞에서는 그저 ‘주의 종’이고 ‘주의 여종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16).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다윗이나, 늘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노예)’로 자칭한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2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시편에서 ‘가난한 사람’은 ‘억압받는 사람’과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고난이 올 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태도는 교만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온갖 경건치 못한 행태와 절망으로 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에 반하여, 신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근거입니다. 다윗처럼 신자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 속에 늘 기뻐합니다. 결국은 영생입니다. (3) 우리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거합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과 주님의 도우심, 그리고 왕의 권력을 남용할 때 주어진 심판이 아주 잘 기록하였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지는 신자들이 주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편86:15).

잠언 17: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의 이유는 복합적이나, 주로 개인의 귀책사유(게으름 등)로 돌리게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불의한 사회구조 등)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언도 같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10:4) 전자의 경우이며, “가난한 사람이 경작한 밭에서는 많은 소출이 날 수도 있으나, 불의가 판을 치면 그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13:23,새번역)는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난이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사회적 요소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급격한 기술혁명으로 산업구조가 매우 빠르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국가의 재정정책과 재교육정책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은 더 중요한 차원을 언급합니다. 가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를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조롱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인격 모독은 이래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비판이 정당한 한계를 넘어갔을 때 단순히 인간에게 미치는 문제 뿐만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영향을 받습니다. 모독이 아닌 비판 역시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삼가해야만 합니다. 가난 뿐만 아니라 재앙을 당한 사람이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는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를 지으신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입니다.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가 진짜 지혜자입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13:9).

잠언17: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본 잠언은 16:31절,“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을 가족의 측면에서 반복하면서, 백발이라는 영화로운 면류관에 이르는 공의로운 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입니다. 본 잠언은 가족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 관찰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가문의 수치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회라도 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은 당연히 다른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든 수치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자, 손녀를 두었다는 것은 어쨌건 오래 살았고, 다산의 축복을 받았으며, 경건한 삶이 보답(면류관)되었음을 증거합니다. 한편, ‘부모는 자식의 반팔자다’ 는 말도 있듯이, 부모는 자녀의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경건한 부모의 경우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들이 늙었을 때 역시 백발이라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교훈하고 모범을 보여준 부모는 자식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으로 부모가 자식의 수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배우지 못하였을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한 사형수의 고백입니다. 어릴 때 이웃집의 물건을 훔쳐다 어머니를 가져다 주면 아무 말도 안하고 요리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점점 더 큰 범죄에 빠졌는데, 만약 그때 어머니께서 따끔하게 야단을 치셨다면 자신이 이런 자리에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후회하였습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16:17,새번역).

잠언17:7절
“거만한 말이 미련한 사람에게는 안 어울린다. 하물며 거짓말이 통치자에게 어울리겠느냐?”
(새번역)

17:7-28절은 바보들의 종합세트입니다. 솔로몬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분별력을 가져 어리석지 말고, 그들이 야기하는 분노를 다스려라!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7-9절) 도입부(거짓말, 뇌물, 험담)/ (10-15절) 바보들에 대한 벌/(16-20절) 바보와 친구/(21-28절) 바보들과 지혜자. 본 구절(7)은 두 개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먼저, 미련한 자가 하는 ‘거만한 말’(원어-예더)입니다. ‘예더’는 ‘웅변’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폄하하는 거만한 말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그런 바보가 가르친다고 웅변하는 모습은 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존귀한 자 혹은 통치자로 묘사된 지혜자에게 거짓말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친히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생축처럼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분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표적을 요청 받으시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에서 토해져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이, 부활하시어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11:32).

매일묵상(2022/03/28 – 04/01)

시편84:10절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새번역)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노래입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로서 성전과 제사 업무를 맡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직무에 너무나도 만족하여, 성전의 하루가 다른 날보다 1천배 값지다고 고백합니다. 직업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면서 거듭거듭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살펴보니 동료들도 같은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4). 이 시는 ‘복이 있다’는 구절이 3번 등장합니다: (1-4절) 주님을 갈망하여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 받는 축복/ (5-8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의 길에 오른 자들이 받는 축복/(9-12절) 주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쉬는 자들의 축복입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갈망이 없이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런 갈망 때문에 영원한 순례의 길에 접어들지만, 그 순례의 길은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목적지인 하나님 앞에 이르기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순례의 길은 ‘눈물골짜기’로 번역된 ‘바카 골짜기’를 거치게 되는데, 그곳은 물이 없어 매우 메마른 곳입니다. 어려움이 이만 저만 아닙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주님께서 샘을 준비해 놓으실 것을 믿고 나아가며 기도합니다(6). 그 결과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마침내 각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은총을 받습니다(7). 시인은 돌보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갑니다(11). 결국 시인은 축복 받아 주님 안에 안식하게 됩니다(12). 시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시편85:7절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새번역)

인생에서 맞닥드리는 고난이 항상 하나님의 징벌이나 진노의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언제나 혹시라도 고백되지 않은 죄나, 바로 잡지 못한 잘못의 여부를 스스로 성찰하여야만 합니다.  이 시편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기억(1-3), 간구(4-7), 경청(8), 소망(9-13).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단지 기억 속에만 있을 정도로 아련한 과거였습니다(1-3). 현재의 삶은 그분의 진노로 충만하였습니다(4-7).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찬 현실을 보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고뇌 하던 선지자 하박국은 악한 바벨론 때문에 격는 불의한 상황을 불평하며, 하나님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합2:1). 시인 역시 같습니다(8).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영적, 도덕적, 물질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고 있습니다(9-13). 성경에서는 고난이 오면 소망도 함께 주어져 인내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야의 약속을 주셔서 소망의 인내를 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낯선 가나안 땅에서 200년을 이방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소망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경험함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소망의 인내를 하십시요.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잠언17:2절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16:32b)와 짝을 이루는 이 잠언은 슬기로운 종이 수치스러운 아들을 다스리는 경우를 언급하여, 가족의 리더쉽은 타고난 혈통보다는 성품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수치스러운 아들은 추수 때에 잠을 자는 아들입니다(10:5). 어리석습니다. 추수 때 부지런히 거두는 것은, 농경 사회에서 슬기로운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주인집 아들이 게으르고 집을 관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슬기로운 종의 지시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종은 그 집의 보배와 같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유산을 함께 나누어 받는 지위까지 갖게됩니다. 이는 그 당시 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갖지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종이, 법과 관습을 넘어 그의 미덕 때문에 성공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역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자면,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 의하여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렸지만,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섭리로 가정총무가 됩니다.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스렸습니다. 그 출세의 순간에 유혹이 왔으나 뿌리칩니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이때 역시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돌보심으로 감옥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수년 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신 지혜에 의하여 애굽의 총리로 발탁됩니다. 총리로서 아버지 가정은 물론 만 백성의 생명을 기근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새번역).

잠언17: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hearts)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은 은과 금의 순도를 시험하는 도가니와 풀무의 두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가식을 벗기시고, 마음의 진실함과 순결함을 판단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구분하시는 방법은 외모나 말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입니다. 도가니나 풀무는 테스트 뿐만 아니라, 순은과 정금을 만들어 내는 도구입니다. 주님 역시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입증된 참된 인격을 갖추게 합니다. 우리는 평안한 삶을 원하지, 시련과 역경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은 온전한 신앙 인격을 갖춘 신자를 원하십니다. 테스트 없이는 온전한 인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테스트, 특히 도덕 테스트는 주님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또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든 시험-도덕, 고통, 빈곤 등 -을 다 거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순전하게 살아도  타인과 동일한 시련을 받는 것은, 제사장의 역할은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 기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와 같이 천상의 존재들에게 자랑하시려는 것도 주님이 가지신 즐거움이십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인내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십시요!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욥2:3,새번역)

잠언17:4절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17:4,5절은 두 종류의 악인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거짓말 하는 자로서(4), 그는 말로 공동체에 불행을 초래합니다. 또 한 명은 가난한 자를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입니다(5). 전능하신 주님은 이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인 백발은 이들을 피할 것입니다. 특히 4절은 사악한 말을 듣는 자는 바로 악인이고,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 사람이 바로 거짓말쟁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전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이치입니다. 혀와 입술 그리고 귀는 모두 한 인격에 속한 기능들입니다. 인격이 거짓되고 악한 데 어떻게 이 기관들이 다르게 사용되겠습니까? 거짓말하는 자와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자는 모두, 진실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악한 말은 환영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어 없어지나, 환영하게 되면 우리가 사라진다”는 경구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이적으로 고치시자, 둘러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지 아니하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AD70년 로마에게 크게 패배한 바 있었습니다. 그 후 60년이 흘러 바르코흐바가 나타나 유대인들을 선동하자 그를 메시야로 따랐고, 이어 로마와 전쟁하다 민족은 전멸당하고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9,20).


매일묵상(2022/3/21 – 25)

시편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이 시에서 하나님은 천상의 회의를 주재하고 계십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엘로힘) 앞에 그를 모시는 존재들인 엘로힘이 도열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 때문에 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2)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며, 형태는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엘로힘’을 직역하면 ‘신들’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 유일하신 하나님을, 때로는 천사들을 지칭합니다. 또한, 복수의 형태이지만 단수로 사용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으로 여겨져왔습니다. 문맥이 중요합니다. 이 시에서는 하나님(엘로힘)께서 그 엘로힘을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사람처럼 죽는다’(7)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당연히 여러 해석(악한 천사 혹은 재판장 등)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수전절에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증하셨습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요10:34-36). 예수님은 ‘신들’을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은 인간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이 구절 역시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속죄권과 심판권을 아버지로부터 받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요5:27).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시편82:8,새번역).  

시편83:1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이 시는 적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역대하 20장은 이 시의 좋은 예입니다. 비씨840년 경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에돔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치러 올라 왔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다 왕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 뜰에서 백성들과 함께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레위 사람 아삽 자손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인데, 너희들은 싸울 것이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가대에 예복을 입혀 군대 앞 서서 찬송하면서 행진시켰습니다. 찬송이 시작될 때 적군들은 서로 싸워 멸망당하였습니다. 전리품을 거두는데만 3흘이 걸릴 정도의 대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에돔, 이스마엘인, 모압, 하갈인,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그리고 앗수르(6-8)는 주님과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인 세상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시로부터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싸워 가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싫어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요15:18) 믿음과 기도로 맞서 싸워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결론에서 중요한 가르침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의 구원이 아니라, 대적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며, 온 세상에서 주님만이 홀로 가장 높은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시편83:18,새번역)  

잠언16:32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새번역)

‘의’의 토대는 도발을 받았을 때, 야생마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훈련 없이 자신을 통제한다거나, 외부 세상을 다룬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된 행동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무력으로 적을 정복하여 성을 빼앗는 영웅보다도 자신과 사회에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용사는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지만, 인내하는 사람은 냉철하게 감정을 통제함으로 자신과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자여서, 실수를 막는 동시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용사는 물론, 빼앗기 어려운 성을 점령하는 장수보다도 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인간 최고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아보드’라는 유대 문헌의 주석입니다: “누가 강하냐?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는 자이다. 혈육과 벌이는 내적인 싸움에 비교한다면, 성을 점령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을 빼앗기 위한 전투는 하루면 끝나지만, 자기와의 싸움은 피곤하고도 일평생 쉬지 않는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최고의 미덕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절제’의 미덕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의 하나이며, 사랑의 나무에서만 열립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천 가지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때서야 ‘절제’라는 미덕이 나오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새번역)

본 잠언은 인내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자가 최고다(32절)는 말씀에 필요한 경고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절제력과 지혜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한 결과,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게 되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결정권자는 주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제비’라는 단어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지혜로운 촉의 제갈공명이 위의 책사 사마중달과 대치하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작은 전투에서만 약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의 화공 전술에 걸려 전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꺼버렸습니다. 사마중달은 도망쳤습니다. 제갈공명은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한탄하였습니다. 냉철하게 자신을 파악한 사마중달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제갈공명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측한 대로 제갈공명은 과로로 죽었습니다. 사마중달은 낙양(위의 수도)으로 돌아갔고,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AD249년). 손자 사마염은 제위(서진, AD265년)에 올라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제비를 뽑아 범인도 색출하고(아간), 왕도 선출(사울 왕)하는 등 국가나 개인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 이용되었느나(행1:26),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제비를 통한 섭리의 인도는 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고 지혜를 다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뜻입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17:1,새번역).  

잠언17:1절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보다 낫다’는 잠언의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군사적 용맹이나 장수가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교훈한 것처럼(16:32), 가정으로 상징되는 삶의 영적 평화는 잔치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 권력, 명예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다툼 있는 번영보다, 검소할 수 있지만 사랑이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정립과 축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부활의 주님이 가정과 일터의 중심이 되실 때 옵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 이웃, 그리고 물질의 모든 관계는 바르게 정립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난다면, 가치관은 뒤죽박죽이 되고, 우상숭배, 지적 교만, 그리고 쾌락 중심주의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절대로 영적평화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불안초조가 여기에서 나오며, 세상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평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한 곳도, 우리가 주인도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래서 본 잠언의 저자요 지혜자로 명성을 떨친 솔로몬도 주님 중심으로 살아갔을 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였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주님을 떠나자 가치관의 혼란이 와서 혼합종교에 빠졌으며,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국가 간의 평화도 깨졌습니다. 그의 사후 나라는 두 동강났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지혜, 명철, 계략도,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잠21:30).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교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

매일묵상(2022/03/14 – 18)

시편80: 12절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시의 배경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보다 150년 전에 일어난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비시722년)입니다. 3연(1-3절, 4-7절, 8-19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시의 처음과 마지막은 목가적이고 평온합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 깊은 고뇌의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특히 세 번째 연은 북이스라엘의 황폐와 약탈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과 구원을 반복해서 간구합니다. 시인에게서 있어, 이스라엘 민족의 곤경은 언제나 신앙의 문제로 귀착이 됩니다. 그 곤경이 자연재해든 외적의 침입이든 아니면 내적 분열이든 관계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도 불신앙이지만, 지금 내가 겪는 고난을 전부 자신의 능력이나 운 탓으로만 돌려서도 불신앙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악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처럼 고뇌에 찬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7). 중요한 것은 기도 자체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지식도 더하지 못합니다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올 경우, 그 불편한 심기를 주님께 토하십시요. 그러나 계명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구원의 소망 가운데 인내하십시요. 그 믿음의 시련들은 우리의 인격에 절대 필요한 인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약1:3-4).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80:3).

시편81: 11,12절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 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새번역)

이 시는 명절 특히 장막절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막절은 애굽에서 인도를 받은 뒤, 장막을 짓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역사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시는 백성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에서 시작하여(1-5), 행위(6-7)와 말씀(8-10)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적으로 이동합니다. 이어 백성의 불순종에 따른 비참한 결과(11,12와 순종(13)할 경우 주어지는 승리와 풍요로움(14-16)을 강조하면서 순종을 택하라는 하나님의 요구(11-16)로 끝맺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과 그에 대한 응답이 주제입니다.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6)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인 백성이 됩니다(8-10). 왕이 바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8, 13). 그 핵심되는 계명은 9절입니다 :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뒤, “내가 마음껏 먹여 주겠다”(10)고 약속하셨으나,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집대로 가도록 버려두셨습니다. 그들은 고통의 길로 들어갔고, 승리와 축복에서 멀어졌습니다(10-12). 이 시는 이스라엘 역사의 반추이며, 우리 삶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지금 확인할 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잠언16:29절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폭력은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꾀어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친구나 연인 관계 등을 맺고 악인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범죄하려고 친구를 꾀는 모습을 잠언 1:8-19절은 잘 보여줍니다. ‘10아이들아, 악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함께 가서 숨어 기다렸다가, 이유를 묻지 말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자….우리는 온갖 값진 것을 얻게 될 것이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의 집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14너도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 사이에 돈주머니는 하나만 두자.”’ 잠언은 그런 악인들과 교제하지 말것을 잘라말합니다(잠언20:19). 비시 860년 경 북 이스라엘 왕국을 지배한 아합 왕은 남 유다 왕국의 왕 여호사밧과 결혼동맹을 맺었습니다. 북왕국은 남왕국보다 강대하였고, 그 왕 아합은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바알 숭배자 왕비 이세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세벨은 강포한 여인으로 의로운 나봇을 서슴없이 죽여 포도원을 빼앗을 정도였습니다. 그 반면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의로웠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나쁜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남 유대 왕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자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 결과 아합은 죽었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 왕은 주님이 미워하는 자를 도왔다고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탐욕을 버리고 주님의 약속에 주의해야만 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잠언16:30절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이미 우리가 살펴 본 27-29절은 불량한 자, 못돼먹은 자와 강포한 자들이 사회질서와 이웃을 해롭게 하는 사악한 술책에 초점이 있습니다. 30절은 이 세 가지 묘사에 대한 결론 혹은 주석입니다. 특히, 30절은 29절과 쌍을 이룹니다. 30절은 29절의 ‘강포한 사람’의 임무수행 모습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서로 눈짓을 하여 희생자를 고르고, 피해자 배후에서 굳게 입을 다물어 음흉한 결의를 다집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얼굴과 목소리 등을 통해 표출된 그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워야 미리 대처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과 삶의 경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얼마 전 부산사상경찰서 이 경장은 택시 운전사로부터 2000만원이 든 손가방을 수탁받았습니다. 분실물을 찾아 주려고 콜 택시 이용내역을 분석한 뒤, A씨에게 연락하였습니다. A씨는 그 돈이 할머니 수술비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반환절차상 통장내역 등을 확인해야 한다”는 설명에 A씨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이 경사는 즉시 현금 묶음에 날인된 인출은행이 소재한 울산 북부경찰서에 연락하였습니다. 이미 보이스피싱 피해신고가 접수되었으며, 고성경찰서에서는A씨를 보이스피싱 전달책으로 수배 중이었습니다. 이 경사는 A씨에게 경찰서 방문을 안내하고, 돈을 찾으러 오자 바로 검거하였습니다. 현금 2,000만원의 원래 주인은 울산에 거주하는 B(50)씨로, 저금리 안내에 속아 A씨를 직접 만나 현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순진한 마음만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16:31절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16:31-17:6은 한 단락을 이룹니다. 시작은 공의로운 길을 인내하면서 간 결과 얻어지는 영화의 면류관이 백발이라는 선언입니다(16:31). 이를 위해 걸어가야만 하는 공의로운 길 7가지를 나열합니다(16:32-17:5). 마지막은 그렇게 걸어간 결과 그들이 늙었을 때 얻게 될 손자 손녀들이 영광의 면류관임을 밝힙니다(17:6). 잠언은 제자들로 하여금 노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아름다움, 품위, 그리고 권위를 획득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미덕이 없이 머리만 백발인 사람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 구절에서 언급된 ‘영화의 면류관’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1절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진리를 가르치나, 모든 진리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의인이 일찍 죽습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유대인들의 불신의 죄악을 지적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과 같습니다(행7장). 또 노인이 되면 육체와 마음이 약해집니다(전12:1-8). 더구나 현대 사회에서는 심지어는 비도덕적인 기술을 통해 건강한 노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백발이 미덕과는 관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고 공의로운 길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하게 90세에 이른 사람은 모두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다”는 말은 곰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건강하게 90세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32절에서 답을 줍니다: ‘인내’입니다. 즉 백발과 인내는 암묵적 관계가 있으며, 전자는 후자를 통해 얻어집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새번역).

매일묵상(2022/3/07 – 11)

시편78: 42절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시편은 과거의 경험 속에 있는 교훈을 분명히 밝혀내어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등불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적들의 위협(9-11)이나 자연의 위험(40-42)을 포함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셨고, 향후에도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을 믿었어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 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사랑을 자각할 줄 알아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그런 자각 능력은 우리를 구속하셨고, 공급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에 대하여 늘 기억을 새롭게 할 때 비로서 나옵니다. 여기서 ‘구속’(12-14,43-53)은 주님이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구출하셔서 자유를 주신 것을 말합니다. ‘공급’(15-16,54-55)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이 공급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급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17-33, 56-64)은 그분을 아버지로서 알고 있는 자들이 경건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랑’(34-39, 65-72)은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갈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내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언제나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의 비밀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 있는데, 그것들은 기억에 의하여 촉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1:1,2)

시편79:5절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여워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까?”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고, 모든 유대 지도층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간 비시 586년 이후로 추정됩니다. 패전국 유다의 현실은 참혹하였습니다(1-4). 여기에 더하여 신앙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백성들을 향해야 마땅하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심판의 대상이어야 할 이방인들이 ‘야곱’을 삼켰습니다(7). 그들은 ‘도대체 이스라엘이 믿는 야훼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라고 비웃고 있었습니다(10). 시인은 그 때문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자리에 주저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13). 이것은 현재가 유복해서도 아니요, 미래가 예측되서도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될 수 없는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께 먼저 조상들의 죄(8)와 당대의 죄(9)를 회개합니다. 또한 시인은 주님의 성품과 영광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현실을 바로 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나의 죄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영광과 성품을 내세우고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는 간구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 이렇게 드린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응답되어 하루 밤에 185,000명의 앗시리아 군사가 죽었습니다.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79:13).

잠언 16:26절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특히 생존의 욕구-을 충족시키기고자 열심히 일합니다. 잠언26절이 관찰하는 바 입니다. 후단의 ‘입’은 전단의 ‘식욕’과 함께 생각할 때 입의 기능 중 말이 아니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는다’는 어구는 생존 욕구 충족이라는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조직체, 특히 회사의 경우, 이윤 극대화는 노동자의 복지보다 중요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자산이 없습니다. 따라서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본가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적은 급여를 제공하여 일을 시키고자 합니다. 이 잠언이 악한 목적을 위해 쉽게 뒤틀어질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칼 막스는 ‘자본론’에서 이것을 대전제로 삼아 노동자의 정당한 대가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고 공정한 경쟁과 노동자 복지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경주하여, 파국을 막고 오히려 번영하고 있습니다. ‘중대 재해 처벌법’ 제정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런 ‘식욕’도 이겨내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막스가 주장한 공산주의가 빠진 함정으로,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100년도 안되어 멸망한 이유입니다. 중국은 정치체제만 공산주의고 경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운영철학이 틀린 하이브리드 국가입니다. 많은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잠언을 전도서와 함께 읽으면 생존을 위한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허무함을 깨닫게 됩니다(전1:3). 이것은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사람이 먹으려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만, 그 식욕을 채울 길은 없다.” (전6:7,새번역).

잠언16:27절
“불량한 사람은 악을 꾀한다. 그들의 말은 맹렬한 불과 같다.”(새번역)

사람은 됨됨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27-29절은 ‘이쉬-사람’로 시작하여 ‘사람’을 강조합니다. 그 중 27절은 불량한 사람에 초점을 맞춥니다. ‘불량한’의 원어는 ‘벨리얄’로서 ‘가치 없다(worthless)’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불만이 많아 사회 질서를 뒤집어 엎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악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악은 선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선동가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작은 불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증폭시킵니다. 듣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불 같은 분노가 솟아올라옵니다. 그 결과 무질서한 행동이 나오게 되고, 약탈 방화와 같은 집단적 파괴행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롬12:19).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폭력을 써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거나 사랑으로 감싸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선동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선동가들이 있지만 최악의 선동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원어는 ‘디아볼로’입니다. ‘디아’는 ‘사이에’를, ‘볼로’는 ‘던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란 ‘사이에 던져 서로를 이간질 시키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천사 1/3을 선동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와서 작은 불만을 발판으로 하여 분노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을 지배하여 자기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들은 마귀의 전략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잠언16:28절
“못돼먹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수다쟁이는 친한 친구를 갈라 놓는다.”(현대인의성경)

‘못돼먹은’ 혹은 ‘패역한(perverse)’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와 사회적 질서를 뒤집으려는 자를 말합니다. 그의 못돼먹은 행동은 마음에 근원이 있고 말과 눈짓은 그 표현입니다. 그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 진리는 잠언6:14절, “그 비뚤어진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며, 싸움만 부추긴다”에서 거듭 언급됩니다. ‘악한 자는 정의를 위협한다’는 의역이 가능합니다(시리아역). 후단의 ‘수다쟁이’의 동사형은 ‘흠을 찾는다’ 혹은 ‘불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였습니다(사29:24). ‘수다쟁이’가 하는 말들은 악의적인 험담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은 왜곡된 상황 인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결과는 대단히 파괴적이어서, 가장 친밀한 관계조차 갈라지게 만듭니다. 모세가 10계명의 두 돌판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자,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예배하였습니다. 이 백성들은 며칠 전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맹약한 자들입니다. 홍해의 기적,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의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악한 자들을 이용하여 마귀는 백성들에게 못돼먹은 생각을 집어 넣었습니다(출32:1).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모세는 내려와서 우상숭배에 가담한 3천명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세계에 흩어질 전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은 마음이 할례 받은 증거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4:25).

매일묵상(2022/2/28 – 3/4)

시편78:1절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편 78편은 총 72절에 이르는 긴 시입니다. 수 일에 걸쳐 메시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12절(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과 68절(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을 볼 때 이 시의 제목으로 ‘소안에서 시온까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부터 다윗 왕의 통치까지 이스라엘의 격동기를 되새겨 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신32장)처럼, 이 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만 하는 그 ‘신앙 양심’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기적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심판 가운데서도 은혜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선택된 도시와 왕을 통해 그 은혜의 징표들을 보여주셨습니다(68-72). 이 시를 읽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것과 마침내 주님이 선택하신 지파-유대지파(68)-가 선택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약속을 지키신 것은 물론, 그 이상을 행하심으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갈4:26)인 시온 산(영원한 부활의 나라)을 세우셨음을 압니다. 이 시는 다윗 왕을 언급한 뒤 돌연 끝나지만, 그 목적은 다음 세대가 그것을 완성하고 그로부터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의 이야기 역시 같습니다. 복음서에서 시작된 우리 주님의 이야기는 사도들의 전파로 이어지고 로마의 한 셋집(행28:30,31)에서 돌연 끝나버림으로, 다음 세대인 우리가 신실하게 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우리는 그들처럼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는 경고가 됩니다.”(고전10:6,쉬운성경).

시편78:6절
“미래에 태어날 자손에게도 대대로 일러주어, 그들도 그들의 자손에게 대대손손 전하게 하셨다.” (새번역)

72절이나 되는 이 시편은 도입부분(1-8)에서 목적을 밝힙니다 : 각 세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5-6) 다음 세대로 신앙 유산을 흘려보내라. 그것은 각 세대의 거룩한 의무이다. 시편 기자 역시 전 세대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3-4). 전할 내용은 주님의 행적(4)과 말씀(5) 두 가지입니다. 출애굽 시 행하신 10가지 기적과 홍해를 가르신 구원의 행적들은 구속자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직접 선포하시고, 두 돌판에 기록하신 것은 좋은 예입니다. 전달해야 할 목표는 오는 세대들이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7),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서 과거의 잘못들 – 신실하지 못한 삶- 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거에 대한 참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참된 이해를 위해서는 ‘가르침(율법)’과 ‘지난 날의 역사’가 요구됩니다. 가르침(교훈)은 당연히 문학적 기교를 통해 전달됩니다. 잠언, 시편, 욥기 등이 그렇습니다. 에스더는 뛰어난 문학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반을 둔 우리 믿음은 ‘문학, 역사, 철학’에 기반을 둔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신앙이 과학까지 그 대화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모든 실체보다 더 확실한 보이지 않는 실체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인문학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히11:1,2).


잠언16:23절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이 잠언은 사려깊은 자에게 생명샘이 되는 가르침(22)은 지혜자의 마음에서 발원됨을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가 잠언의 교훈을 받아들여 ‘지혜자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도전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리 입술에 올바른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둘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설득력 있게 말하는 지혜자의 입술을 통해,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가게할 것입다. 그런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나 사회는 복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OECD에서 4번째로 심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탑의 위치에 있습니다. 국민소득은 높으나 행복 지수는 밑바닥입니다. 정부는 고성장의 시대에서 저성장의 시대로 진입한 것을 인지하여, 성장과 분배라는 문제를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 논의하여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적 과정은 푸틴이나 시진핑과 같은 권위적인 정치가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타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데, 인간의 본성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지혜의 샘인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를 섬기신 그리스도로부터 자기부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게 하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 때 우리 사회에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고, 쑤시는 뼈를 낫게 하여 준다.”(새번역)
선하면서도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 되라는 주제의 결론으로 24절이 기록되었습니다. 선하고 지혜로운 말은 즐거움을 주며, 엄청난 치료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본 잠언은 이를 꿀송이에 비유합니다. ‘선한 말’은 ‘친절한, 은혜로운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고, 이 ‘은혜로운 말’은 ‘악한 생각들’과 대조될 경우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악한 사람의 꾀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친절한 사람의 말은 정결한 제물처럼 받으신다. (15:26,새번역). 여기서 ‘선한 말’에는 순결하며, 아름다움의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꿀송이’의 히브리 원어는 ‘넘쳐흐르는 꿀덩어리’를 말합니다. 그렇게 비유한 것은 꿀만이 유일하게 달콤하기도 하며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24절후단). ‘마음에 달콤하다’는 뜻은 그 말을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고 또 매력적임을 표시합니다. 또한, ‘낫게 하여 준다’는 표현은, ‘선한 말’의 치유능력을 알려줍니다. 선한 말은 어리석은 자가 쏟아내는 말로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약은 입에 쓰며, 달콤한 것은 약이 아니나 ‘뼈’로 표현된 전 인격을 회복 시키기 위해서는, ‘선한 말’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만 합니다. 이는 조언자의 말이 듣는 자를 거북하게 만든다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꿀을 너무 많이 먹으면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25:16), 선한 말은 아무리 들어도 문제가 없기 때문에, 본 잠언이 ‘선한 말’을 꿀송이에 비유한 한계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잠언16:25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6:16-30절의 주제는 ‘선한 말과 나쁜 말’의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선한 말(20-24)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25절부터는 ‘나쁜 말’(25-30)에 대한 교훈이 시작됩니다. 25절은 야누스적 구절로, ‘선한 말’의 주제를 이어가면서, 파괴적인 언어 사용의 주제로 넘어가도록 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 내용은 네 자신만의 의견을 고집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같은 교훈이 이미 14:12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여행길에 나서는 사람이 여정을 살펴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활방식이 초래할 결과를 생각해 볼 것을 교훈합니다. 요사이 모든 운전자는 네비게이션의 인도를 받아 목적지로 갑니다. 네비게이션이 보여주는 경로로 가다가는 골목길로 다녀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늦게, 불편하게 가게됩니다. 그래서 미리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 철학, 그리고 신념으로 만든 네비게이션은 자신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잘못된 경로와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사망으로 귀결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특히 교만한 사람에게 적절한 교훈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고 여기나 거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숨겨있을 여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교만에 속게 되는 것입니다. 본 잠언은 이 교훈을 언어 사용에 적용합니다. 다른 이를 대할 때는 늘 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경우에 맞는 ‘선한 말’을 하여야지 ‘나쁜 말’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