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4
잠언 12장 10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12:8절의 주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9절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할망정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어 10절은 일꾼을 착취하지 말고 돌보아야만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은 당연히  자신이 부리는 짐승들의 욕구들조차 알아서 돌보아 줍니다. 하나님은 가축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때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물론, 짐승들도 쉬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0; 23:11–12; 레 25:1–7). 또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가축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열등한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종과 하인을 비롯한 인간에게는 더욱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가축의 필요를 느끼고 돌보라는 말은 자신의 일꾼들을 돌보라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분이 우리의 부엌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9-10).


2020/12/23
열살된 손녀 아멜리가 방 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 목사님은 방문한 손님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하여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천장을 보면 바닥은 볼 수 없게 되고, 바닥을 보면 천장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전체를 파악하는 직관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고 있던 아멜리가 껴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습니다.

“전체만 보는 것도 역시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전체만 보면 전체 외에도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라는 말도 실재의 일부에 불과한 추상에 불과해요. 진리는 모든 부분과 그들의 합인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예요”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멜리는 다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어릴 때의 정약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인식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는 진리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이 창조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14:6). 이 진리의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와 사망의 굴레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2020/12/22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구하는 어느 농장을 찾아 추천장을 그 농장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추천장을 뜯어 보니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일손이 필요하였기에 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강력한 폭풍이 농장이 있는 계곡을 흩어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비와 윙윙 거리는 바람소리에 놀라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구한 일꾼을 불렀지만 그 사람은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헛간으로 뛰어가 가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았더니 놀랍게도 먹을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시 밭으로 뛰어가니 밀 곡식단들이 잘 묶여져 방수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곡식 창고로 뛰어가니 문들은 잘 잠겨 있었고 곡식은 아무 염려 없이 건조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주인은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하는 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은 항상 신실하고, 우리의 사랑은 항상 따뜻하고 우리의 포옹은 단단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였어야만 했는데”라는 고뇌 속에서 뒹굴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떠나는 마지막에 더 절박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늘 감사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5-36).


2020/12/21
때로 아이들은 예사스럽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8살된 소녀의 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 체험도 없어요. 그분이 나에게 오라고 하셔서 나는 왔어요.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면, 그들도 그분에게 안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께 초청하고 계십니다. 위의 소녀는 이 구절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을 주셨다는 귀절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여인들이 섬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실 때까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 승천하셨어도 만유의 주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소녀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안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우 큰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매일묵상

2020/12/14
침례교 가정의 여섯 살 된 아이가 특별히 추운 날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그 아이는 가족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때  ‘성삼위 일체’ 대신 ‘성사위 일체 우리 주로다’라고 노래 하였습니다. 당연히 지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침례받을 때 네 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어요. 목사님이 나를 물 속에서 넣으시고 ‘성부,,,브루루…성자….브루루….성신…브루루의 이름으로’라고 말씀하셨어요.”

공산주의 국가의 지하교회에는 침례당이 없어서 겨울에 침례를 받게 되면 얼음을 뚫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날 역시 추웠기 때문에 목사님이 떠는 소리인 ‘브루루’가 아이에게는 삼 위 중 네 번째 분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침례는 구약에는 없으며, 신구약 중간기(비시400 – AD30)에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와 함께 사용된 의식입니다. 즉 할례받은 이방인들이 물속에서 올라오면 완전한 유대교인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AD28 년에 이르러 침례요한은 이 의식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그들 가운에 오신 메시야를 준비하는 의식로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기독교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침례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보여주고(롬6:3-5), 이후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벧전3:2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2020/12/15
다섯 살 적에 아들 미하이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살구나무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살구씨를 넣고, 흙으로 덮은 다음 물을 주면 때가 되면 살구나무가 자라 나온단다.” 이를 들은 미하이는 흥분해서 자기 동생을 부른 다음, 둘이서 목사님이 가르쳐준대로 하였습니다. 먼저 땅에 보물을 묻은 다음 그 보물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했나 알아보려고 즉시 땅을 파고는 굉장히 실망을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어린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 핵심은 “절대로 너희들이 생각나는대로 하면 안 되고 꼭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하여야만 된단다.” 는 말입니다. 그때 “왜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할 말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단다!” 이것이 고도로 지식이 발달하였다고 자랑하는 인류가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 전에 인간은 어떻게 세상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연구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의 3대 질문 중 하나입니다. 피조된 인간은 인간 마음대로 하면 절대로 소기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다름 없습니다. 인간은 대상을 연구하여 그 속에 있는 지식을 발견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과학과 같이 신앙 역시 비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가면,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 맺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2020/12/16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전쟁을 명령하셨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미하이는 “이건 아마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일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별없이 구약성경을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미하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2세기 초엽 말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흑해 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선박 건조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AD 140년 경 로마의 공동체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제공하였지만,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전파한 교리는 구약의 하나님 야훼는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고 구분한 뒤,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신약의 신이 예수로 나타나셨다 등등의 내용입니다. 서머나 감독 순교자 폴리캅은 그를 만나 대화한 뒤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하였을 정도로 복음은 물론 사도바울을 심각하게 오해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이단들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지금 있는 이단들 역시 교회 역사상 나타났던 어떤 이단의 반복일 뿐입니다. 말시온의 파문 사건 이후 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2020/12/17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알렉스에게 욥기 33장 26절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 드리죠. 그러면 그분이 내게 기도하고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분은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기도를 더 잘하십니다.” 라고 자기나름대로 풀어서 말하였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祈禱)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으로 정의하며, 대체로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어린 알렉스의 말은 옳지 않지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라면 틀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간으로 오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상급으로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란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020/12/18
잠언 12장 9절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Better to be lowly and have a servant
than to play the great man and lack bread.

Proverbs 12:9

일반적인 가르침인 8절(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을 특정한 상황에 적용한 것이 9절입니다. 내용은 비록 사회적인 명성이나 평가는 보잘 것이 없지만, 자신의 사정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는 부요하고 명성을 가진 것처럼 행세를 하나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을 정도의 가난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이 잠언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18:12)” 와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할 잠언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상 인간은 재물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이런 극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벧전5:6-7, 쉬운성경)

매일말씀나눔

2020/12/11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주일학교 헌금으로 일 파운드짜리 동전과 십 펜스짜리 동전을 주었습니다(참고로 1파운드는 100펜스로서 약 1,500원정도함).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하지만, 또한 기쁜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면 그에 적당한 이자를 지급합니다.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의 회사채를 사면 금융기관보다는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기관보다는 위험합니다. 또한 KB 금융 등의 주식에 투자하면 시가의 약 5% 배당을 받을 수 있으나, 주가의 등락 때문에 원금 보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투자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안전합니다. 물론 그 이익은 금전으로만 환산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 생활을 잘 하는 것 역시 성도의 본분 중 하나이기에, 이분들은 믿음의 큰 담력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2020/12/10
어린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가족을 그려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한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네 사람의 머리가 비행기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성모 마리아, 요셉을 그렸구나. 그런데 이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

“아, 그것은 비행사인 폰티어스예요(Pontius, the pilot)!” 그 어린 학생이 ‘폰티어스’라고 한 것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영어로 Pontius Pilate 라 표기하고 ‘폰티어스 파일러트’로 읽습니다. 이 발음은 비행기 조종사인 ‘pilot 파일러트’의 발음과 아주 유사하여 아이는 빌라도 총독을 비행기 조종사로 오인하고 그린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을 배운 한 아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젤리 빵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영어 번역이 ‘daily bread’이나 그것을 ‘jelly bread’로 듣고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해서 아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그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29:49).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법을 묻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되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네가 왜 나를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느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7).


2020/12/09
일곱 살난 아멜리가 어느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와서 자기 개에게 세례를 주길 부탁하였습니다.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마지막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신 고 김준엽 총장(1920-2011)이 그분의 책 ‘장정’에서 쓴 글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부친은 사냥을 돕는 개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매우 개를 사랑하셔서 개가 부친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자, 이를 안 개 역시 먹기를 거절하여 끝내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나 주인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지요. 한편 개의 충직성과 영물성을 체험한 김총장님은 일생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부활할리는 없지만, 아멜리의 개는 부활을 하여도 주인인 아멜리가 없다면 부활한 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을 것입니다. 개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없는 나라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그것보다 의미 없고 지루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가 없다면 아무리 안락하고 휘황찬란하여도 살 곳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움도 행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시84:10-11, 새번역).


2020/12/08

어느 날 손녀 아멜리가 비난조로 할아버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할아버진 창문들(windows)에게 절하지 않아요?”
“성경 어디에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적혀 있던?”

아멜리는 재빨리 “과부들(widows)을 공경하라”는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어로 창문과 과부는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영어는 매우 흡사한 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부’는 ‘창문’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단지 ‘n’ 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아멜리는 과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어휘와 경험 때문에 실수로 ‘n’이 빠져서 인쇄되었다고 좋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 철자를 보충하여 과부를 창문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아멜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명령이 전혀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멜리가 성경이 하시는 말씀에 복종하려는 의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하고 적용한 성경은 전혀 성경의 취지와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어른이면 다 알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는 교리는 물론 의식의 해석 적용에 관하여 많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교회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상관관계를 망각하고 안식일 규정을 해석적용하여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은 성령께서 후일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지만, 지혜에는 어른과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딤후2:25, 새번역)


2020/12/11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2:1-3


위 3개의 절은 잠언 12장의 도입부분으로, 서로 대비되는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도덕적, 신학적 교훈을 주고자 의도되었습니다. 1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성품, 2절은 도덕적 질서를 수호하시는 행위자로서의 주님, 3절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영원한 운명을 말합니다. 결국 2절의 주님(여호와)은 모든 삶과 심판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보전은 주님의 긍정을 받기 때문에, 악인의 소멸은 주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가 악한 제사장들이었기에 아버지 엘리가 훈계하였지만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제사장 엘리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고는 그 증거로 두 아들이 하루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20년이 지난 뒤 집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블레셋과 치룬 아벡의 전투에서 두 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솔로몬의 등극시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에서 파직을 당함으로 심판은 끝났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보전되고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2020/12/04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고, 그 당시 헬라어는 구두점이나 쉽표 등의 문장 기호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어가 죽 나열되었으며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분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루마니아어를 포함하여 어떤 나라의 언어도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9: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루마니아 아이는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 아이를 방문하여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난 아파요. 하지만 거의 아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자기들의 고통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잘못된 이해가 이 아이의 믿음에 결정적인 해를 끼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과 동시에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오셔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당연히 그런 믿음에서 참됨과 사랑이 싹터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자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엡3:16-17).


2020/12/03
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1911-2004)의 부모님은 깊은 신앙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의 조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자 어린 로널드의 부모님은 주의를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아이들에게 식사 시간에 성경을 한 절씩 암송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너도 꼭 하나를 외워야 한다.” 로널드는 불과 네 살이어서, 어머니는 쉬운 구절을 하나 찾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우셨다”(요11:35).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가 울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입니다. 이제 로널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위해 열 명의 아이들이 앉았습니다. 암송할 차례가 오자 첫번째 아이가 “예수께서 우셨다”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자 할아버지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된 로널드는 “예수께서 우신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웃었고, 할아버지는 성경에 그런 구절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로널드는 “그분은 지금 울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린이들이 그분이 오래 전에 우셨다는 것밖엔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아주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사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심히 범죄하자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심히 슬퍼하셨습니다(창6:6-7). 결국 그들은 홍수로 전멸 당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의 불신앙, 죄악, 연약한 믿음, 완악함 등의 사유로 하나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2020/12/02
네 살된 어린아이가 미국 백화점에 갔다가 받은 비스킷에는 미국 지도 모양으로 생긴 것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걸 보니 무엇이 생각나니?”

“날씨요”

그 비스킷은 아이에게 저녁 뉴스 시간에 텔레비전에서 보는 미국의 모양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가인’ 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아벨은 하나님 앞에 형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질투를 받아 결국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의인이요 억울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을 받지 못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을 받은 것을 보자 질투하여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죽으셨으며, 심지어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를 죽이는 동족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아벨의 피는 땅속에서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 바 뿌린 피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각나게 되면 과연 지인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들겠습니까? 아니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먼저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2020/12/01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양복이 딱 한 벌 있었습니다. 그것도 때가 되니 낡아 너덜거리게 되어,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새 양복을 하나 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가정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3:11)

이 말씀은 AD28년 경 유대 광야에서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이 와서 회개하고 자복한 뒤, 묻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에 대하여 대답한 말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구절을 듣자 당시 네 살이던 미하이가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빠는 지금 양복이 두 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벌을 누더기 양복을 입고 있는 X 형제에게 주셔야 해요.”

“그분에게 어느 것을 주랴?”

“물론 새 것을 주셔야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의 말을 따랐습니다. 미하이가 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벌써 그런 해석과 적용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영성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범브란트 목사님에 결코 뒤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늘 돌보아주셔서 헐벗지 않았다는 간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2020/11/30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어린 소녀가 어머니에게 햇빛이 통과해 들어오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들은 성인(聖人)들이시란다.”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소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난 이제 성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어요. 나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나를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게 하는 소녀가 된다는 뜻이예요”

이 어린 소녀의 영적 통찰력은 놀랍습니다. 특히 성인들 중 슬픈 전기나 그들의 생애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그 아이가 내린 성인에 대한 정의가 진실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나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분이 사도 마태입니다. 이분은 당시 민족반역자이자 탐욕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세리의 직업을 가져서, 매우 경멸당하였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과감하게 과거를 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린 슬픈 기록이 있기는 하나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그분의 증인으로 일생을 사도로서 헌신한 뒤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하셨다고 로마순교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다 이와 같이 어둡고 슬픈 과거가 있는 죄인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빛을 통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2020/11/27
누군가가 어린 아멜리에게 수수께끼를 물었습니다. “강가에 서 있는 어떤 남자에게 늑대와 양과 양배추가 있는데, 그는 그것들을 배에 실어 강 건너편으로 가져가야만 한다. 단, 그의 배에는 한 번에 한 가지만 싣고 갈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셋을 다 강 건너편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뽀족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늑대를 먼저 싣고 가면 양이 양배추를 먹어버릴 것이고, 양배추를 먼저 싣고 가면 늑대가 양을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양을 먼저 가져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건너갈 때 그는 양배추나 늑대를 가져가야 할 텐데, 어떤 것을 먼저 가져가든 둘 중 하나는 강 건너편에서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 중 몇 명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드디어 아멜라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전도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늑대와 양이 친구가 될 것이고, 양배추도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니까요”(롬14:17 참조).

아멜라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소녀는 그런 전제하에서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어른들은 좀처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난제 중의 난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오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주님 손에 맡기고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2020/11/26
60대 초반의 어느 분은 부인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습니다. 결혼 생활 3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사업에 충실하다가 가정과 부인을 소홀히 한 때문입니다. 이러면 비록 직장과 사업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일생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중 하나는 각 인생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발달 심리학자 에릭슨은 생애주기를 7단계(또는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할 발달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 영아기의 발달 과업은 돌보아주는 사람에 대힌 신뢰와 애정의 형성입니다.
  • 유아기는 식사 수면 배변 등의 기본 생활 습관 형성하기
  • 아동기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기본적 기능을 익히고, 도덕성의 기초를 형성하기
  •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성 형성과 신체적, 지적, 도덕적 발달을 이루어 성인 준비하기
  • 초기성년기(21-34)는 인생모습이 결정되는 때로서, 청소년기에 형성된 자아정체성이 사회에까지 뻗어 나가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여 본격적인 사회생활 시작하기
  • 성년기(35-60)는 정립된 자아정체성을 기초로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것
  • 노년기(60-)는 건강관리와 은퇴에 적응하기- 신체적 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 죽음을 준비

부활하신 주님 없는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 뿐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하여 집착하거나 아니면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초월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금생과 내생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훌륭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2020/11/25
러시아에서 하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친 부모들에게서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다 무신론을 가르치는 기숙 학교에 넣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인형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되는 때에 ‘기도회 놀이’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인형의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인형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이들 중 하나가 선생님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게 다른 인형을 주실 수 없어요? 이 인형은 너무 바보같아요.”

“왜 그런말을 하니?”

“누구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사람은 바보임에 틀림없으니까요”

그 아이의 말은 공산주의자인 선생에게 믿음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문제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 일화에서도 그 어려운 구 소련의 환경에서 주님을 가르치는 부모들은 고난을 각오하고 신앙유산을 물려주려는 결단을 내리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삶은 신실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가정에서 아이들을 강제로 차출하는 소련 당국의 처사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입니다만, 하나님은 이 시련을 통하여 오히려 아이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시고 당신의 존재를 전하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특히 주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17살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렇게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단 1:8-17).


2020/11/24
열여섯 살의 나이에 딸을 가진 어떤 아랍인은 그 딸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있는 아랍 고아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어머니는 열네 살의 나이였고, 그만 그 딸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가족이 키웠겠지만, 그들에게 딸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어린 아버지는 딸 무나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방문을 고대하며, “바바(아빠의 뜻), 와”라고 중얼거리며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올 때마다 아이는 그에게 매달려서 가지 말든지, 아니면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얼마후 아버지는 재혼하였고, 더 이상 딸을 찾아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의 새 아내는 아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바바, 와”를 되풀이하며 문간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나는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한 선교사는 아이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전혀 다른 아버지로, 그분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무나는 다시 행복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와 사귀게 하시고 친히 죄를 담당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부활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그분을 통해 우리가 공동 상속인이 되도록 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2020/11/23
어느 공산 선교회에서 신앙때문에 감옥에 간 형제의 어머니에게 소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옥에 간 그 그리스도인에게서 선교회로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의 편지입니다.

“나는 우라늄 광산에 끌려 가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큰 바위에 맞았습니다. 그 결과 나는 평생 꼽추가 되었습니다. 나는 굉장히 우울해졌습니다. 나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구가 된 나를 그녀가 받아줄 것인가? 누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줄 것인가?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내 뒤에서 “꼽추! 꼽추!” 하면서 나를 놀렸습니다. 어느 날 어떤 어린 소년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등에 지고 가는 게 뭐예요?’

‘혹이란다’ 또 놀림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는 대답하였으나, 그 아이는 사랑어린 눈으로 보면서,

‘아저씨, 난 그걸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혹 따윈 주지 않으세요. 아저씨 등에 있는 건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는 상자예요. 아저씨가 그걸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사랑스런 마음으로 지고 다니면, 그 상자가 열리고 날개가 펴져서 아저씨는 그 날개로 아름다운 하늘나라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울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여러 가지 상황에 부대끼고 걱정 근심에 쌓일 때 주시는 위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돌보시고 마지막 날는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창 15:1, 새번역).

2020/11/20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우상을 전부 부수어 버린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나와,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달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자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아하,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태양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흰 모시 옷감들이 정원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같은 길로 돌아오다보니 아까 본 옷감들이 흰색이 아니고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추측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집 안에 누군가가 있을 거다. 아마 물감들이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흰 옷감에 물을 들였겠지.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에서 어떤 분도 보지 못하지만 하늘의 색깔이 매일 변하는 것은 볼 수 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어른이 계시는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그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뉴톤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연구하여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만유인력이라는 힘의 작용을 알아내고 그 힘의 크기를 계산하는 방정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법칙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엄청난 법칙들을 만들어 내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논리적 결론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0/11/19
아멜리가 아홉 살 때 굉장히 진지한 문제를 가지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왔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서 틀렸다는 것을 알 때, 무슨 말을 해도 되나요, 아니면 의심을 꿀꺽 삼키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이에 대하여 목사님은 반문하였습니다.

 “다윗이나 욥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 솔직하게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니?”

“두 가지 때문이에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말고 충고를 하셨어야만 해요. 아빠도 명령을 내리거든요. 둘째,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잘못하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별로 잘 사랑하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만약 우리가 우리 이웃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면, 우리 이웃들은 정말 불행할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사랑해야 해요.”

아멜리의 첫 번째 말은 인간의 타락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릴 때,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부모님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동등한 인간 사이를 떠나, 하나님께까지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조업자가 물건을 팔 때 넣어두는 설명서에는 반드시 조작법을 기술합니다. 그것은 충고가 아닌 명령으로,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에 만물이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법칙을 설정하여 놓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할 때 두 번째 말은 일면 수긍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다음 명령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2020/11/18
복종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금방 들은 설교의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너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지? 부모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걸 말이야!”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목사님 설교의 다른 한 쪽은 못들으신 모양이네요.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복종하세요?”

우리 모두는 우리만의 여과 장치를 가지고 있어서, 설교 뿐만 아니라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에도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우리 마음에 드는 것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견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취하는 성향으로,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에는 신경을 쓰지 않거나 외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 자기중심적 왜곡(myside bia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유모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하였다. 어느 때부터 신문에서 매일 담배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사가 계속되자 그는 신문을 끊었다.” 확증편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나, 낙인효과, 각종 왜곡된 보도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비평없는 독재국가나 카리스마적 종교에서는 인권이 유린되고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잘 간직하는 동시에 그 믿음이 사랑 가운데 일하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확증편향이 있더라도 그 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를 위해 쉬지말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훈계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지만, 책망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짐승같이 우둔하다.”(잠12:1).


2020/11/17
뉴욕에 사는 한 소년이 하나님께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하시려면 참 바쁘시겠어요. 그래서 여쭈어 보는 건데요, 제가 하나님과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언제가 제일 좋은 시간이겠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듣고 계신단 건 알지만, 하나님께서 뉴욕 쪽으로 귀를 기울이시는 건 언제예요?”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특히 주목하여 기도를 들으시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좋은 예는 에서입니다. 사냥을 갔다 온 에서는 매우 시장하여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한 그릇의 팥죽과 장자권을 바꾸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겨우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이런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망령된 에서와 같이 값싼 세상의 것들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월이 흐른 지금 소돔, 고모라, 가버나움과 벳새다 역시 회개하기에 너무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연히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자기부인할 것은 부인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2020/11/16
미국에서 발사한 우주 왕복선 중 디스커버리호가 있습니다. 1984년에 초도비행을 시작하여, 국제 우주 정거장 조립 임무와 허블우주망원경을 궤도에 전개하고는 2011년 퇴역, 현재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중입니다. 이 디스커버리호가 불을 내뿜고 발사되는 것을 일단의 아이들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새 별을 하나 더 띄우시는구나!”

여러분은 미소를 지으며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겨우 며칠밖에 못 가는 별이란다.”

그러나 실은 하늘의 모든 별들도 시작이 있었고 또 수명 역시 유한합니다. 그것을 증명한 학자가

허블(1889-1953)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입니다. 그가 발표한 법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그 팽창의 속도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하여 우주에 시작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허블의 법칙이외에도 우주 배경복사를 측정한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기(WMAP)에 의해 우주의 나이는 현재 137.72±0.59억년으로 계산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 내에 있는 별들은 모두 소멸시기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태양도 같습니다. 태양의 수명은 약 123억 6500만년이고 핵우주 연대학에 따르면 45억 672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 창조물들이 변화되도록 창조하셨지만, 앞으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입니다. 인간 역시 죄의 삯으로 죽지만, 신자들은 구속을 이루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3:15, 새번역).

2020/11/0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여섯 살 때 골고다의 그림을 보고 앉아서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선한 분도 죽였고, 악한 사람들도 죽였어요. 그러나 그건 잘못한 일이예요. 그들은 강도들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예수님은요? 예,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한 일은 잘한 일이었어요.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으니까요? 그러나 강도들은 그냥 가두어 놓기만 해야 했어요.”

알렉스의 말은 아이러니합니다. 1988년 마이클 듀카기스와 조지 부시가 미 대선에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TV 토론시 사회자가 사형폐지론을 내세운 듀카기스에게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고 질문하니, 듀카기스는 우물쭈물 하다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하여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결국 듀카기스는 패배하였습니다. 추상적인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됩니다. 죄의 문제는 그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는 이렇게 심각합니다. 그 당사자의 한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연히 범죄에 대하여는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 책임을 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알렉스가 의로우신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근거하여 살아났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요일1:10, 새번역).


2020/11/05
열살된 소녀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은 밀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가?”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게 무슨 말로 설교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소녀는 들판으로 나가 외쳤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곧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의 머리가 굽어져 있다. 너희들도 똑바로 서야 한다.” 

물론 밀들이 머리를 들리가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는 밀의 열매가 익어 무거워질 때 줄기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숙이게 되는 것은 중력의 법칙상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인생과 연결시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와 같은 격언을 만들어 내기도하며, 또 어떻게 보면 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땅이 자기들을 물과 영양분으로 키워준 데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숙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열살된 소녀가 이런 과학적 이치나, 인생의 경험을 잘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 맥락에서 임의로 떼어나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다스리며, 여러 과학적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삶에 무조건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겨우 몇 가지 법칙 정도만 천재적인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선을 다해도 실수가 많은 법입니다. 이런 사실을 겸허히 인식하고 마음을 낮추는 자는 세상과 창조주 사이에 위치한 인간 자신의 신분을 깨달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2020/11/04
범브란트 목사님과 그분의 아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아들 미하이가 다섯 살 되었을 때 그분들은 미하이를 유대인들 예배 장소인 회당으로 데려갔습니다. 왜냐하면 미하이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인 ‘심해 토라’(글자 그대로 율법을 즐거워하는’의 뜻임)를 경험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적은 두루마리가 회당 안에 돌려지면 사람들은, 특히 아이들이 그것에 입을 맞추기 위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행렬이 가까이 왔을 때 미하이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저도 두루마리에 입을 맞춰야 하나요?” “네 마음에 달렸다.” 목사님은 가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날과 의식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랍비가 가까이 와서 미하이가 입을 맞출 수 있도록 두루마리를 낮추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입을 맞추진 않겠습니다.” 아기가 말했습니다. 행렬은 멈추고, 놀란 사람들의 수백 개의 눈들이 미하이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미하이는 굉장히 긴장한 목소리로 다시 반복하였습니다. “전, 입 맞추지 않겠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 친구이기도 한 회당장이 미하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아까 왜 그렇게 했느냐?”

“랍비님, 하나님께선 저희에게 어머니를 주신 건 입맞추라고 주신 거고, 율법을 주신 건 그것을 읽고 복종하라고 주신 거지, 입 맞추라고 주신 건 아닙니다.”

희랍 정교회에서도 굉장히 호사스럽게 장정한 복음서를 돌려서 교인들에게 입을 맞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사람은 매우 적고, 더구나 복음서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0/11/0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작은 우상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장에 가서 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 아브라함은 우상을 사러온 고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보니 할아버진 연세가 꽤 많으시군요. 60-70세는 되어 보시는군요. 그러니 우리 아버지가 만든 이 신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어요?”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도 팔지 못하였으며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에게 매 맞고는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이 신들의 실재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데라의 집에 있는 사당에 여러 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제일 높은 신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제일 높은 신 앞에 좋은 음식을 놓고 지켜보았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도끼를 들어 제일 높은 신 이외의 모든 신상들을 부수고, 도끼를 제일 높은 신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외출했던 아버지 데라는 산산조각이 난 신상들을 보고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제가 신들에게 음식을 갖다 드렸더니 신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큰 신이 작은 신들을 다 죽여버렸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것들은 신이 아니죠”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고 재빨리 마지막 우상을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게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2020/11/02
아브라함이 데라의 우상을 부수어 버린 것과 같은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시13세기경 미디안의 압제로 심히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자로서 기드온을 택하여 여호와의 사자를 보냈습니다(삿6장).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아버지 요아스가 섬기는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고, 그 찍은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밤에 이를 행하자, 다음날 이를 안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갔습니다. 그러자 요아스는 오히려 기드온을 옹호하여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고대야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모든 것을 신의 작용으로 오해하였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바알 숭배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맹신이 지나쳐 참된 하나님마저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좌측으로 치우친 것이죠! 원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드신 모든 것들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시고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쳐 구원하신 것과 같이, 죄와 사망이라는 벌을 받고 마귀의 종이 된 인류를 구원하시 위해 더 큰 기드온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2020/10/30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유명한 말은 교보문고를 만든 대산 신용호 회장(1917-2003)의 삶의 경험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대산은 집안이 가난하였고, 폐병에 들려 학교에 갈 시기를 놓쳤습니다. 배움에 한이 많았던 대산은 그것을 많은 독서를 통하여 극복하였습니다. 대산은 책에서 만난 수많은 주인공 중에 특히 헬렌 켈러와 카네기를 존경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건강 때문에 진학이 좌절됐기에 헬렌 켈러를 통해 도전정신을 배우고 되새겼고, 제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세계 최대 철강회사를 일군 앤드류 카네기는 대산에게 사업가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20세에 만주에 가서 이육사를 만나면서 민족자본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혼란과 6.25의 전쟁을 겪은 대산은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교육과 보험을 연결한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를 세우게 됩니다. 1958년 8월 7일 개업식 때 “저는 25년 이내에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고, 가장 좋은 땅에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말 그대로 20년 안 되어 교보는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고, 광화문에 교보빌딩 22층을 건설함으로 자신의 말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로와 광화문을 잇는 그 지하 1층 1,100평의 요지에 수익성 있는 점포들이 아니라, 서점을 계획하고 100만권의 서적을 비치한 것은 대산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교육철학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가치관은 그 사람의 인생 방향을 결정합니다. 물론 대산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대산의 철학이 따라 올 수 없는 위대한 가르침 뿐만 아니라,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롭게 자신을 평가한 뒤, 옳다고 생각되면 주님을 신뢰하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2020/10/29
어떤 루마니아의 어린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이 다 적혀 있는 책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들었을 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이름을 꼭 써주세요. 제 이름은 라다 이오네스큐입니다. 그러나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제 이름의 철자를 제가 불러드리는게 좋겠어요.” 그리고 나서 소년은 한 자 한 자를 조심스럽게 발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덧붙였습니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혼동되지 않도록 제 이름과 주소와 생일도 써주세요.” 어린이의 이런 기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태평할 때에도 우리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갈등, 노후의 문제, 병의 문제, 재산의 문제, 취업과 일의 문제, 명예와 승진의 문제 등 수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얻는 과정에서,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늘 주님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습관을 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작고하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삶을 생각하면, 세상이냐 하나님 나라를 두고 다시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됨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삼성을 세계적인 회사로 키워낸 인물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그분의 선친인 이병철 회장을 능가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반면, 정경유착과 경영권 확보와 관련되어, 두 번이나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것은 그분의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주권이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 손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1-22).


2020/10/28
여덟 살된 미국 소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빠는 가끔 저를 무릎위에 앉히고 차를 운전하게 해주시지만, 언제나 아빠의 손을 제 손 위에 놓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우리나라가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제발 당신의 손을 그분의 손 위에 놓아주십시오.” 이 기도에는 통찰력이 보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는 중보기도와 관련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사도는 중보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며, 여기에는 특히 임금들, 높은 사람들이 포함되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간구(요청 request), 기도(일반적인 기도), 도고(높은 사람에게 간청함 petition), 감사(감사기도를 의미)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간구란 우리의 부족함과 관련되어 있고, 기도는 헌신의 의미를, 도고는 어린이 같은 신뢰의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늘 감사를 동반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도할 특권을 가진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신 우리 주님을 통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특히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8-10).


2020/10/27
성경과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고 자란 열 살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소년의 부모가 거친 말싸움을 하고 난 뒤 소년은 아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빠, 저를 안과 의사와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데려다 주세요.”

“왜?”

“제 몸에 이상이 있나 봐요. 성경에서 들은 것은 들을 수 없고, 성경에서 본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래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아마 같은 말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직접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드신 세상에 들어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셔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종의 형체를 취하여 인간이 되셨을 때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입니다. 만약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의 관계가 훈훈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한편 세상은 살기 쉽지 않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늘 기뻐하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험할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2020/10/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기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습니다.

“알렉스야, 차에 타거라. 널 의사에게 데려가야겠다.”

“왜요?” 다섯 살짜리가 물었습니다.

“기침 때문에”

이들은 병원에 갔다가 목사님 댁에 들렸습니다. 알렉스는 명랑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분이 어떤가 보러 갔었는데, 아무 탈도 없었어요. 감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갔는데,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이때, 목사님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의 이야기를 또 한 번 들려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범브란트는 유태인으로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전도하신 분은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죄들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것이 예수님과의 첫번째 만남이었고,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순수하고 깨끗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도 없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큰 기쁨으로 채우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1:7, 새번역).

2020/10/23
나디아의 생일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작년 생일에는 아빠가 제게 초콜릿 한 개를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나 지금 아빠는 감옥에 계세요.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예요. 제발 제게 초콜릿 좀 갖다 주세요.” 

이 당시 러시아에서 초콜릿은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언니인 라리싸가 나디아를 꾸짖었습니다.

“우린 정말 필요한 것만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그런 사치품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디아의 어머니도 그말에 동조하였습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위해서, 우리 옷이 떨어졌을 때 옷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단다. 그리고 병이 나면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초콜릿은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라곤 생각되지 않는구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나디아의 생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아이들을 위해 초콜릿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 사건은 나디아의 가족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그분은 절대로 필요한 필수품이 아닌 것들에 대한 기도도 이루어 주시는 데서 기쁨을 느끼시는 분입니다. 물론 어른이라면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초콜릿를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디아와 같은 어린 아이에게 있어 초콜릿은 정말 중요한 물품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 응답입니다. 주관적인 체험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앞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2020/10/22
범브란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 부부는 아이를 보는 여자에게 미하이를 맡기고 외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고 미하이는 그녀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미하이의 기도는 “엄마 아빠가 빨리 집에 오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를 끝낸 후 미하이는 자기를 돌보는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때 목사님 부부는 정말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전혀 가지고 나가지 않고 집을 나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하이는 의기양양하였습니다. “난, 내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기도를 응답하시지는 않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이가 가졌던 어린아이의 기도와 믿음은 우리의 삶에 좋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일단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인생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알게 지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큰 이유는 아마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신실하게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풍성하게 주시는 응답을 체험하고 우리의 마음은 터질듯한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가지는 큰 특권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2020/10/2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어렸을 적에 자기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기도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로버트야?” “내가 그렇게 해보려고 애써 봤거든요.”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로 작정한 후, 저녁이 되어 자신을 돌이켜 보고, 기도없이 착한 사람으로 사는데 성공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다만, 정직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능력도 역시 같습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하루 종일 생각만 하여 무엇인가 이룰려고 노력하였지만, 무익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고 만지고 연구하지 않으면 창조적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나면서부터 교만한 인간이야말로 자기 능력으로는 그런 품성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박사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이거 안돼겠다’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세계에서 최고가는 박사가 될 것입니다.”하자, 모두들 고개를 들고 목사님을 쳐다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잡초를 자르듯이 나올 때마다 싹뚝 싹뚝 잘라 버려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사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확보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다가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주셔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쉬지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엡6:18, 쉬운성경).


2020/10/20
말썽을 피워 일찍 잠자리로 쫓겨갔던 어린 아들이 금방 돌아왔습니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기도했어요.”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잘 했다. 너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다면 말이다.” “아니에요, 나는 좀 다르게 기도했어요. 하나님께 엄마가 지금 이대로 나를 참아 줄 수 있게 해달고 기도했어요.” 이 사례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우리 이웃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분은 식물과 동물을 만드시고, 물과 땅과 하늘, 해 달 별들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곤충, 바이러스 할 것 없이 도대체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존재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를 다스리도록 책임을 부여받은 인간은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혜롭지 않으면 절대로 창조주의 뜻이 실현되도록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들 간에도 서로 다릅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간은 공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못 난 부분은 받아들여 기도해주고, 잘된 부분은 격려하여 더욱 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이웃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다른 이웃이 서 있을 수 있는 공통된 기반을 못 가지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이 이래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는 모든 인류를 주님 안에서 받아들일 근본적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 보다 나 자신이 변화하여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면서까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모범은 우리 행동과 기도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2020/10/19
범브란트 목사님의 가족모임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손자인 어린 알렉스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의 아내이자 알렉스의 할머니가 가볍게 꾸짖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했니?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잖니?” 알렉스가 완강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식사 기도를 했으니, 제게 먹을 것을 주시는 건 할머니 책임이에요.” 알렉스는 어리지만 아주 심오한 진리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마태복음6장 25절 이하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먼저, 마음을 겸허히 하고 우리가 행하여만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세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든, 아니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렉스의 할머니께서 알렉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책임을 가지고 있듯이, 그 다음의 몫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킬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만든 중력의 법칙이 세상 끝날까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작동하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새번역)

2020/10/16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 하던 목사님이 ‘도덕적 용기’의 실례로, “기숙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년들에게 또 다른 실례를 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년이 큰 소리로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들로 가득찬 기숙사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그런 용기를 가진 고위 성직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군부정권이 수 십년 동안 지배하는 동안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압력에 저항한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잘 입증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다윗, 욥, 예레미야 같은 분들은 우리에겐 너무하다고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할 용기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역시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분들과 같은 생각들로 가득찼지만, 그런 생각들을 억눌러 왔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우리 속에 깊숙이 박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큰 소리로 질문한 소년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 논쟁을 벌일 용기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질문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때에도 틀림없이 우리를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대표적인 선지자는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불의한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수탈당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 그런 갈등을 토로하였더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때가 반드시 오니 비록 지체될 지라도 기다려라는 대답을 하시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정답을 주셨습니다. 이에 응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1:6, 새번역).


2020/10/15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못 가진 것들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서 좀 우울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네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러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머리카락과 얼굴과 눈썹과 입술과 이와 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자기 몸의 모든 부분을 다 언급하며 길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우리집에 오신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말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목사님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그 아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은 그 아이의 것들보다 더 큰 크기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집에 온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그 네 살도 안된 아이의 기도는 즉각 응답이 된 셈입니다. 이 깨달음이 오자 목사님은 그 아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다른 면들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목사님은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가을을 맞이하여 우리 역시 한 해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은 성공 뿐만 아니라 실패 역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생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겸허하게 갖고, 모든 일에 지혜롭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허락하신 모든 축복들에 대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삶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세탁기를 잘 사용하기 위해 이리저리 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세탁기는 먼저 만드신 주인을 알아야 하고, 인생의 작동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


2020/10/14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일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때 한 소년이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화번호가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화번호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으로 가는 다섯 개의 단계를 적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함(롬3:23). 둘째, 죄의 결과에 대한 명백한 인식 – 죄의 삯은 사망(롬6:23 전반).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준비하셨음을 깨달음(롬6:23후반). 넷째,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함(롬10:9). 다섯째, 구원의 결과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게 됨(롬5:1). 이와 관련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야, 하나님의 전화번호는 다섯자리 숫자란다 – 회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믿음, 사랑, 진실, 그리고 외로움.’” 다른 전화번호는 다 이해하겠는데, ‘외로움’이라는 마지막 번호는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서로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고독합니다. 그 외로움 고독 두려움 불안 눌림 등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고 그 모든 죄의 결과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수 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모든 외로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갈 곳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하루도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2020/10/13
아침 기도에서 어린 도로시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좋은 아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도 이런 아침을 좋아할 거예요.” 도리시는 비록 어리지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짐승들도 먹이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들의 필요 역시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사람들 뿐 아니라 악인들 위에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마음 보다 넓을 수 있으며, 넓어야만 합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 나이가 70즈음에 이르렀을 때 고향 친구가 찾아오자 밖으로 나가서 발로 차서 쫓아버린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치에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지식이 많고, 제자가 3천에 이르며, 그 중 뛰어난 제자들은 각국에 등용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분은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무시하는 마음도 들어 있어,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친구를 별볼일 없다고 발로 차서 보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유학은 삼라만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할 개념이 없습니다. 물론 성리학은 나름대로 이기론을 내세워 삼라만상과 자신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그것조차 비인격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을 주인으로 모셔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시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존재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당연히 신자들은 청지기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는 물론, 삼라만상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와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 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2020/10/12
신앙 때문에 나디아의 아버지는 구 소련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날 소녀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와 같이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돌아보며 소녀가 사려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이 꽃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빠도 돌봐 주실 거예요.” 소녀는 몇 송이 꽃을 꺽어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빠에게 이 꽃을 갖다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다음날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전해질 식품 꾸러미를 맡기려고 소녀는 어머니를 따라 경찰서에 갔습니다. 나디아는 근무 중인 경찰관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저씨에게도 아이들이 있어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경찰관은 소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어린 딸을 묘지에 묻고 왔습니다. 나디아는 자기가 꺾어온 꽃들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 이 꽃들을 우리 아빠에게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시겠죠, 아저씨?” 그 경찰관은 도저히 어린 소녀를 당해 낼 수 없었고, 그 꽃은 나디아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디아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나디아의 아버지가 옥에 나오는 근본적인 기도는 응답하지를 않으셨는가?” 제가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를 못하여 조심스럽습니다만, 수 십년이 지나서 소련의 공산체제는 종식을 고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옥에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자체가 은총의 산물입니다. 수용소 군도를 쓴 솔체니친이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을 때 그 작가는 자유로운 서방세계의 젊은이들 속에서 정신적 공허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더 큰 절망을 목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주님을 따라 가야만 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