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2/21 – 25)

시편77: 13절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새번역)

본 시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맞아 불안과 근심에 싸인 시인의 고백입니다. 고난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기도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인은 지치고 힘들어 합니다(1-3). 밤에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4). 이렇게 잠못 이루는 밤들을 지새우며, 시인은 과거에 좋았던 세월을 생각하게 되나(5-6), 그 때문에 현실은 더욱 괴롭습니다. 상황은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여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7-9).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인에게 새로운 빛이 떠올랐습니다(10). 그것은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기적들과 그분의 거룩하신 행적들, 위대한 역사, 인자하심에 대한 기억들입니다(11-13). 주님은 지난 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인도하여 내실 때 홍해를 가르심으로 큰 능력과 위엄을 민족들 가운데 알리신 분입니다(14). 더구나 주님은 자신을 주의 백성들과 동일시 하시면서 ‘속량’(고엘-친족 구속자)하여 내셨습니다(15).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지만 자신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고난 속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16-19). 그 주님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지도자를 세워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 것입니다(20). 시인이 이렇게 회상한 위대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려고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뒤 권능의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인보다 훨씬 나은 믿음과 고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시편77: 2절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 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새번역)

본 시편의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의 서두(1-4절)을 읽으면 시인은 고난으로 잠도 못자고 기도합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경이 멈추고, 상황이 호전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은 확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3). 즉,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내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불리한 상황에 반응할 때, 신자는 하나님께 그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구하는 것보다,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아야만 합니다(10-20). 시편 기자는 부르짖고, 끈질기게 추구하며, 잠도 자지 않고 고민하고 기도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짜증스런 거절과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의문만 생겼습니다(7-9). 그런 의문들은 흔들리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6)은 현재를 위한 해결책도, 미래를 위한 처방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보지 않고(3), 이전의 영적 경험들에 집착하지도 않고(6), 오히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행적과 거룩하신 인격, 권능과 섭리적 돌보심(19-20)을 신뢰하고 잠잠히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77:20).

잠언16:20절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새번역)

본문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새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전단은 인생 성공 비법으로 ‘말씀’ 즉, 지혜자의 가르침( 본 잠언의 교훈)에 주의하여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런 교훈은 앞의 구절들(16-19)뿐만 아니라, 이어질 구절들( 21-24: 선한 말의 열매)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후단은 전단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된다’혹은 ‘행복하다’는 말씀 속에는 물질적 번영을 넘어 이웃 사이에서의 화평을 포함합니다. 지혜의 출발점은 주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세상적인 번영과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실로 십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요 지혜자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무시하면 세상적 번영은 얻을 수도 있으나, 이웃 간에 화평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어리석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주님을 경외하여 잠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공동체로부터 명철하다고 칭찬을 받습니다(21). 북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 여로보암은 종교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금송아지 예배를 창안합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보내사 기적까지 보여주면서 준열히 책망하였습니다만, 여로보암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가문은 몰락하였고, 그를 추종한 북이스라엘 열 지파 역시 심판받아 역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롬14:18,사역).

잠언16: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을 명철하다 한다. 말이 부드러우면, 더욱 많은 지혜를 가르친다.”(새번역)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가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본 잠언 교훈합니다.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는 그를 ‘명철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칭찬합니다. ‘명철’이란 히브리 원어는 ‘빈’으로 ‘분별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분별의 지혜가 있는 것은 물론, 인격이 갖추어져서 부드러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공동체 내에서 그의 말은 더 잘 수용되고, 그의 지혜는 공동체에 선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존경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춘 사람은 매우 보기 힘듭니다. 흔히 공자나 소크라테스 등을 지혜자로 예를 들으나, 이들 역시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자는 심지어 70세 즈음에 자신을 찾아 온 친구를 별 볼일 없다고 정갱이를 걷어 차서 쫓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잠언은 오직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아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눅4:22) 하면서,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취하신 속죄의 대업과 그분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주님께 돌아선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부드러운 말을 사용함으로 더욱 많은 지혜(복음)를 가르쳐야 하겠습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잠언16:22절

“명철한 사람에게는 그 명철함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 된다.”(새번역)

21절에서 묘사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은 22절에서는 생명의 샘으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명철한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명철’은 ‘지각있다, 사려깊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세켈’의 번역입니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생명의 샘이 되고, 솟아오르는 물은 너무나도 시원하여, 공동체는 어리석은 행동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생명의 샘이 되어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있습니다(요4:14). 한편, 후단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의 교훈은 어리석음이다’로서, ‘교훈’은 풍자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막대기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핵심은 도덕적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요약하면 22절은 두 종류의 교훈을 보여줍니다.(1) 지혜로운 자가 주는 생명의 가르침. (2) 어리석은 자가 받는 벌. 명철한 자는 앞의 가르침에서 생명의 샘을 발견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 고통스럽고, 쓰디쓴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자 르호보암이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10지파에게 포악한 말로 자신의 도덕적 오만함을 여지 없이 드러냈습니다. 왕국은 갈라지고 오직 유다 지파만 그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는데, 그 원인은 아버지 솔로몬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하고, 하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잠언16:23, 새번역).

매일묵상(2022/02/14 – 18)

시편76: 1절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이 시는 두 부분(1-6, 7-12)으로 된 단순한 구조입니다. 전반부(1-6)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후반부(7-12)는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합니다. 배경은 유대 왕국이 경험한 큰 승리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제국의 침공에서 유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은(열왕기하18,19장) 좋은 예입니다. 이 전쟁에서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다가 하룻밤에 185,000명이 죽었습니다. 사자(Lion)를 경시하다  사고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장막’(2절) 의 히브리 원어는 사자굴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땅에 두신 근거지와 거주지는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이방 국가는 이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자와 같이 무적의 능력을 가지셨지만, 유대 백성들 가운데서 말할 수 없이 겸손한 모습으로 거하시는 주님은 원수의 모든 힘을 압도하는 무서운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할 때 베푸신 주님의 크신 권능은 이스라엘은 물론 애굽 사람들도 너무나 확실히 체험하였습니다. 또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능력은 민수기와 신명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약소국 유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보다 힘센 이방 민족들과 싸워 매번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이방 국가들은 사자를 두려워 하는 것과 같이 유대에 계시는 주님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한편, 예루살렘 성전은 신자의 모형입니다. 신자들 안에는 능력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담대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3:16,새번역)

시편76: 10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장 전반부(1-6)는 하나님의 구원을, 후반부(7-12)는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합니다. 후반부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행동은 유대지역에 국한되지도 않고, 과거에만 있었던 사건도 아니며, 방어적 성격만 있는 것도 아님을 밝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으로서, 도처에 있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7-9). 땅의 모든 민족들은 우주의 왕으로서 야곱의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합니다(7). 그러나 심판의 목적은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시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악인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9). 여기에 신자의 믿음이 요구됩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을 기다리면서 사사로운 분노를 억제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며, 공정한 판결을 내리십니다. 만약 섭리적 심판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당신의 뜻을 따라 최후심판의 날까지 미루어 두신 것입니다(10). 또한 시인은 ‘주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고 권면하혐서,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예물을 드려 경외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땅의 모든 왕들을 당신의 주권에 따라 세우거나 폐하시기 때문입니다(1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심판의 사건이자,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심판은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부르는 구원의 노래요, 감사의 노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잠언16:17절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
(새번역)

지혜라는 단어 자체는 도덕적 색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반드시 도덕이 그 요소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첫 걸음이 주님을 경외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지혜를 정의합니다. ‘길’ 혹은 ‘대로, 큰길’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여, 잠언은 제자들이 ‘윤리적 완전함’을 선택하도록 동기부여 합니다.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보면, 철기 시대 이스라엘(비시1100-600)의 경우 ‘대로,큰길’은 통상 도시 옆을 지나가는 주요 간선 도로였지, 도시 가운데를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시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대로에서 돌이켜 도시로 이어지는 길로 나갔습니다. 이 잠언에서 ‘큰길’은 정직한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을 묘사합니다. 큰길을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암묵적으로 타락과 죄악을 상징합니다. 정직한 자는 정죄받은 도시로 가지 않고 안전하고 장애물 없는 그 큰길로만 걷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생명을 지킨다’는 의미는 정직한 나그네들마다 잠언의 교훈에 깊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유혹을 뿌리치고 큰길로만 행하여 그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전형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 되사서 하나님께 드려진 주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그들의 마음에는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가 늘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35:8).

잠언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6-17절은 윤리적 행동을 다루고, 18-19절은 내적 태도를 다룹니다. 17절과 18절은 ‘길’이라는 은유로 연결되어 있지만, 18절은 목적지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초점을 두고 교훈합니다. 지혜의 첫 번째 원칙은 주님을 두려워 하여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잠15:33). 교만한 사람은 이 원칙에 반하여 하나님과 사람 위로 눈을 치켜뜨고 살다가 넘어져 멸망합니다. 잠언은 정직한 사람(17)과 교만한 사람(18)을 함께 기술하여, 정직한 자는 겸손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선생들에게 순종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교만한 자는 도덕 질서에서 일탈하여 어둠 속에 다니다가 넘어져 파멸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니는 길이 어둡고, 패역하며, 장애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잠언은 같은 교훈을 거듭 가르쳐 제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18절 후단에서는 ‘거만한 마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란 마음과 정신이 거만한 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국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그들의 몸은 산산히 부수어질 것입니다. 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사지가 깨뜨려질 운명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이 되려는 마음에 먼저 패역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치려고 나귀를 타고 군사들을 이끌었습니다. 전쟁터는 숲이 많았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자랑하는 머리털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매달렸고, 결국 요압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잠언16:19,새번역).

잠언16:19절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이 구절은 ‘—보다 더 낫다 : better than’는 잠언 형태로써, 비교 대상 간에 절대적 측면이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 구조는 16:8절,‘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에서 언급되었습니다. 19절에서 ‘겸손’과 ‘재물-전리품’이 비교되었습니다. 겸손’도 중요하고, ‘재물’도 중요합니다. 이 둘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이라는 덕목을 희생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겸손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겸손하게 되면 교만으로 가는 길은 저절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얻게 되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8절과 19절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전리품을 나눈다’는 말은 전쟁용어입니다. 그것은 승리한 자를 지칭하나, 본문은 승리자를 거만한 사람과 동일시 합니다. 무릇 인간이란 승리를 하게되면 자신의 지혜나, 탁월한 군사력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궁핍한 자”는 “전리품을 나누는 자”와 대조되면서 겸손한 자를 지칭합니다. 만약 재물이 지혜자에게 온다면, 대대손손 물려주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배분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재물은 지혜자에게도 재앙의 서곡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1000 명 중 999명은 거만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명의 예외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드물게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 새번역).

매일묵상(2022/02/07 – 11)

시편74:10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예언자도 더 이상 없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아무도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새번역)

고려가 멸망한 뒤 야은 길재 선생은 망국의 한을 시조로 읊었습니다. 이 시 역시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와 유대 왕국 멸망 사건(BC 586)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낸 그 위대한 솔로몬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 때처럼, 천사들을 보내셔서 바벨론 군대들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고 승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황무한 예루살렘 성전을 또 다시 보면서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파괴들과 고함 소리에 잠겨 있습니다(3-8).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선지자들도 보내시지 않았습니다.(9). 그 멸망의 상황은 ‘영원한’ 것 같았습니다(1,10). 시편 기자는 ‘고난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세차게 몰아치나, 주님은 침묵하시는 순간’을 아주 잘 포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의 가슴에는 절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이런 어둠의 날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겪는 경험의 일부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줍니다. 이 시는 고난의 물결이 우리 삶의 배를 휩쓸어 가려고 할 때 그것을 묶을 수 있는 말뚝을 줍니다. 우리는 만유의 창조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하신 행적을 돌이켜보면서(12-17), 고난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견디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약1:2-4,현대인의성경)

시편75: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이, 이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신다.”(새번역)

1,000미터 쇼트트랙 경기에서 편파 판정으로 실격 당한 황대헌 선수는 낙담하지 않고,1,500미터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중국 선수는 한 명도 진출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언론은 한국을 맹비난합니다. 원래 심판은 공정하였는데, 한국이 심판을 압박하여 중국선수만 편파판정으로 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공정한 심판의 필요성!’ 이는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시편75편은 천지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께서(3), 공정한 재판장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7). 그분은 현실의 역사속에서도 정의를 집행하고 계시지만, 궁극적인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정한 기약’이 이르러야 합니다(2). 그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재판장으로 우리 주님이 임명되셨습니다(행17:31).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요5:27). 악을 행하면서 재물,권력,건강과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여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73:18,19).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주 만물, 시간과 공간 그리고 태양 등은 전 인류에게 창조주의 존재를 말없이 그러나 명백히 선포합니다(시19:1-3). 오직 성경만이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엡1:3; 벧전1:3).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만나고 사귀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서로 사귐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은 악인의 오만한 뿔은 모두 꺾어 부수시고, 의인의 자랑스러운 뿔은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시75:10새번역)


잠언16:14절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정당한 진노는 형벌의 집행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사자들’이라는 은유는 우가리트 신화를 암시합니다. 바알은 생명의 신이고 모트는 죽음의 신으로 사신들을 보냅니다. 모트의 사신들이 죽음을 선고하듯이, 왕의 진노는 죽음의 전조입니다. 주님은 악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시는 궁극적 행위자이십니다. 인간은 집행 시기를 모르지만, 집행자를 알고 있습니다. 집행자는 공의로운 왕입니다. 솔로몬은 등극 후 통치의 암적 요소인 군대장관 요압, 이복 형 아도니야, 왕 다윗을 저주하였던 베냐민 지파 시므이를 처형하였습니다. 그 뒤, 그의 왕국이 굳건하게 되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평가하였습니다 (왕상2:22-46).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향한 왕의 진노를 쉬게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겸손(15:33), 참회와 고백(28:13), 왕국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16:6), 그리고 인내하며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15:1). 좋은 예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 사건입니다. 왕은 꿈을 꾸고 그 꿈을 기억해 내지 못하여 고민하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바벨론 지혜자들-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 -은 사형집행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왕에게 온유하게 요청하여 시간을 허락받자,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여 꿈의 내용을 응답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주님의 지혜의 시작이며, 끝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새번역).

잠언16:15절
“임금의 기쁨은 봄비를 실어오는 구름과 같아 그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 모두가 살게 된다”(공동번역)

15절은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통치 대리자인 왕의 호의를 얻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는 직역하면 ‘왕의 얼굴의 빛 속에’입니다. 이 표현은 바벨론의 비유법으로, 누군가를 향한 통치자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태양으로 불리워졌고, 그의 얼굴의 화색은 태양 빛에 비유되었습니다. 시편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관련하여 이 비유를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따라서 그분이 임명한 왕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통치를 받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듯이, 그분의 왕 역시 신하들에게 충만한 삶을 부여하는 매개적 역할을 합니다. 구름은 지면에 생명을 붘돋게 하는 봄비를 예고하기 때문에, ‘임금의 기쁨’은 구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이른 비(가을비)는 10월 중순 경 내려서 땅을 기경할 수 있게 만들고, 늦은 비는 봄에 내려 마지막 추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생명의 저자이신 주님은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의로운 왕(지도자)를 임명하십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을, 호의는 풍성한 삶을 예고하기에 마땅히 왕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좋은 예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틴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통치를 하였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주님이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잠언16: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6:16-30절까지는 ‘선한 말과 나쁜 말’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이 주제는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논해집니다: (1)도입부분(16-19) (2)선한 말(20-24) (3) 나쁜 말(25-30). 16절의 주제는 ‘지혜를 얻는 것’에 관한 교훈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지혜는 귀금속과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값집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물질적인 혜택과 영적인 미덕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잠3:13-18). 이 반면, 지혜가 수반되지 않는 재물은 탐욕이나 무자비한 개인주의에서 나오기에 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의 삶은 주를 경외하여 악을 떠난 삶을 말합니다(욥28:28). 그런 사람의 삶은 당연히 영적인 미덕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철학자들은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꺼냅니다. ‘소외’는 개인이 사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여 거리가 있는 상태를 말하나, 철학의 경우는 ‘인간이 자기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로 정의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부조리로서, 물질(돈)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여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은 물질보다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독정신의 핵심 요소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하나님 – 자신 – 타인 – 물질’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그 안에서 재물을 벌어들이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런 재물은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 16:17,새번역).

매일묵상(2022/01/24 – 28)

잠언16: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어떤 판사는 큰 범죄를 저지른 청년에게 사형이 아니라, 10년 형을 선고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출소 후에 더 큰 범죄를 저질렀고, 그 판사는 몹씨 고뇌하였다고 합니다. 재판은 실상 매우 어렵습니다. 잠언은 재판할 때에 실수 없는 왕으로서 현명한 왕을 제시합니다. 본 구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정의를 행사하시되 현명한 왕에게 영감을 주심으로 오류가 없는 판결을 내리도록 하십니다. 그런 판결은 절대로 정의를 빗나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방의 왕들이 정의를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하물며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의 경우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퀘셈’으로 ‘신탁(神託) oracle’ 입니다. 구약의 도처에서 ‘금지된 이방인들의 신탁’을 뜻하기도 하고, 지금 같은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신탁’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영감된 재판은, 왕이 가져야만 하는 불가양도의 권리입니다(잠8:15).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은사를 부여받은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왕이 그분의 신뢰에 반하는 재판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셨거나(사울) 아니면 최소한 징벌하셨습니다(솔로몬). 이스라엘 열왕기를 보면 그릇 행하지 않은 왕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상적인 왕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요5:19-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잠언16:11절
“정확한 저울과 천평은 주님의 것이며,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당신이 세우신 왕이 재판정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정의를 확립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자에서는 영감되었으며 그릇되지 않는 판결을 통해(10), 후자에서는 당신이 정하신 정확한 저울과 천평을 통해서입니다(11). ‘저울과 천평’은 왕 마다 자의적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하여졌고 다만, 공평하게 집행되도록 왕의 손에 넘겨주셨을 뿐입니다. 왕은 저울과 천평을 표준화시켜 공정한 거래를 확립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거래의 배후에 서 계시며, 거래의 수단과 대상들조차 궁극적 소유자이십니다(11b). 지난 40년 간 전세계는 자유로운 무역을 강조하는 사조,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나, 국가나 개인 혹은 계층 사이의 부의 격차는 매우 심하게 벌어졌습니다. 더구나 소득의 증가 속도가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 가치의 증가 속도를 따르지 못하였기에, 가진 계층은 더욱 부유하게 되었고, 못 가진 계층은 더욱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정의는 이런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런 정의의 확립은 정부의 존립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와 같은 권력구조 역시 주 예수님의 창조물 중 하나입니다(골1:16). 주님은 직접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시기 보다, 국민이 뽑은 정부를 통해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친구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이요 행동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는 균형잡혀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훨씬 낫게 되어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후단)

잠언16:12절
“왕은 악행을 하는 것을 역겨워하여야 한다. 공의로만 왕위가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새번역)

12-13절은 10-11절(정의의 판결)과 14-15절(정의로운 판결의 집행)의 중간에 놓여 있어, 왕은 도덕에 민감하게 통치할 것을 교훈합니다. 12절은 왕은 의를 통하여 통치기반이 확립된다고 선언합니다. 악을 역겨워하는 도덕적 자질이야말로 왕의 중요한 자격입니다. 통상 ‘역겨워 한다, 미워한다’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토에바흐’는 악인과 교만한 자에 대한 주님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왕에게 적용합니다. 왕이나 그의 관리들은 반사회적인 악한 행동들을 극히 미워하며, 정의를 수호하여야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왕의 도덕적 성향은, 지혜(8:7)와 주님(6:16;15:9)의 도덕적 성향과 동일합니다. 이집트 학자 브루너는 파라오의 보좌를 연구하여 12절 후단의 의미를 밝혀주었습니다. 파라오의 보좌를 떠 받치는 기반은 ‘정의와 적절한 신의 질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마아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기호는 히브리어로 ‘의’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마아트’의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이집트의 19, 20왕조에 이르러 왕좌의 기초는 정의, 올바른 질서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한편, 솔로몬 (왕상10:18-20)과 파라오 보좌 사이의 유사한 기록들(특히 6개의 층계)은 솔로몬이 파라오의 보좌 받침대를 본 따서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늙기 전까지 의에 기반을 두어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굳건하게 섰지만, 그가 늙자 여인들의 유혹을 받았고, 주님이 역겨워하는 우상숭배를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혜의 왕이 가장 우둔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공의로운 말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고, 올바른 말하기를 좋아하여야 한다.” (잠언16:13,새번역)

잠언16:13절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잠언은 행위(12)와 언어(13)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왕은 자신의 통치 영역 전반에 걸쳐 도덕적 민감성을 가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의 행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7절을 염두에 두면, 13절은 주님은 당신의 정당한 대표자인 왕을 통해 기쁨과 사랑을 주심을 밝혀줍니다. 잠언(22:11)은 더 나아가 왕의 친구(예, 고문, 관리, 사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서 ‘정결한 마음과 은혜로운 언어’를 언급하여, 훨씬 명확하게 이 부분을 다룹니다. 왕의 친구들은 말하기 전에 정결한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방백들에게 계속적인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그의 고문들은 올바른 것을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과 같습니다(8:8). 여기에 나오는 왕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왕도 이 잠언을 한결 같이 성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죽으시고, 속죄권과 함께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이 만유의 통치자이십니다. 이 잠언은 그 주님의 통치 방식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이 잠언을 유일하게 성취하신 하늘의 왕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교회와 관련 하여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죽음입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경건한 신자로 명예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헌금하기 위해 판 밭의 대금의 일부를 감추고는 마치 전부 드린 양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사형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잠16:14).

매일묵상(2022/01/17 – 21)

잠언16: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5절은 4절 후단의 ‘악인’을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으로 더욱 정확히 정의한 뒤, ‘악한 날’이란 ‘벌을 받는 날’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5절은 악인이 심판받을 것을 법칙화 하고, 그런 이유는 바로 주님이 역겨워 하시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거만(교만)’이란 자신을 높이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비판은 지혜로 가는 길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또한, 거만한 자는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무시하기에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을 두려워하여 늘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낮추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데 참여하지만, 하나님은 정의를 확립시키고 찌기를 제거하십니다. 거만한 자들이 찌기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그 날에 모든 거만한 사람 위에 자신을 높이실 것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고도 마음을 완악하게 한 파라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결국 이집트는 황폐하게 되었고, 그의 군대는 전멸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른 메시야를 찾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거만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졌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야와 신념을 가지고 로마제국과 두 번에 걸친 독립 전쟁을 벌렸으나 멸망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잠언16:6,새번역).  

잠언 16:6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새번역).

‘어질고 진실하게’는 ‘인자와 진리’를 풀어쓴 것입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물론 회개하는 마음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용서받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잠언은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사를 보충하는 인간의 미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레16:21).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희생제사를 드려도 소용없습니다(삼상15:22).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된 것입니다. 6절 후단은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당연히 공동체 속에서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를 그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고는 발생할 수 있어도, 재앙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특질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이를 열어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은 사람의 삶은 주님을 경외하는 열매로 가득차게 됩니다. 결코, 논어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얻어질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면, …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잠언2:1-5)

잠언 16:7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새번역).


5,6절은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벌과(5-6a), 앞으로 저지를 죄(6b)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을 다루었습니다. 본 구절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원수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잠언이 말하는 원수는 의인에 대하여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한 야곱이 다음날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이 범주에 포함되기는 어렵습니다. 야곱은 의인이 결코 아니고, 다만 회개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본 구절이 적용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 찾아 온 흉년이,100년 만에 이삭의 때에 일어났습니다.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이삭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터이니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던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들을 파자, 그때마다 그랄 목자들이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이삭은 양보하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습니다. 주님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잠언 16:8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8절은 이른바 ‘..보다 낫다, better than’ 의 구문으로서, 5-7절에서 선포한 일반적 명제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5-7절은 거만한 자에게는 벌이 내리고, 미덕을 행한 자에게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명제를 가르치지만, 이 세상에서는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때 본문은 판단에 도움을 줍니다. ‘의를 겸한 적은 소득이 낫다’는 의미는, 사람이 공동체를 경건하게 섬기더라도 주님은 즉시로 물질적 보상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당신의 심판의 시기가 올 때까지, 악인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벌어들인 많은 소득’을 누리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본 구절을 15장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와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8절에는 ‘주님(여호와)을 경외하는’이란 어구가 생략되고, ‘의롭게 살며’로 대체되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어 도덕적으로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기 전에는 무심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때가 믿음으로 의를 행할 시기입니다. 인천에 공장을 두고 한국의 유리 산업을 개척하여 큰 공헌을 한 고 최태섭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분은 1951년 1.4 후퇴시 모두 피난갈 때에, 오히려 은행을 찾아가 채무를 갚고 영수증을 받은 뒤 피난을 갔습니다.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받은 영수증은 그분의 신용을 증명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무담보로 2억원을 차용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돈 문제에 직면할 경우 늘 본 잠언을 마음에 두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16:9, 새번역)

잠언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16:1-9절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보여줍니다. 1절은 시작하고, 9절은 같은 표현을 써서 결론을 맺습니다. 양 구절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부분과 그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행동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균형 있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결정권자이시면서도, 그분의 결정은 가장 온전하십니다. ‘그 발걸음’이란 ‘그의 길’과 동의어로서 인생의 행로를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발걸음들’대신에, ‘발걸음’으로 표현하여, 단 한 걸음도 주님의 감독을 떠나 취해질 수 없음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상세하게 자신의 길을 계획할 수 있지만,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계획을 수행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거칠게 깍고 만들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루신다.” 우리는 늘 겸허히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도적으로 삶을 해석하고, 이끌고 나가야만 합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목적을 달성하는 우리의 결정과 방법이 틀리면 주님이 바른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주시고 하란을 떠나라고 하였지 갈 지역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땅을 고민한 뒤, 가나안 지역을 선택하였고 전 재산을 이끌고 갔습니다. 세겜 모레 상수리 나무를 지날 때 주님은 나타나셔서 그의 선택이 옳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1,새번역)

매일묵상(2022/01/10 – 14)

시편73: 1-14 : 진리와 배치되는 현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1절, 새번역)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진리는 아삽의 경험과 충돌하였습니다(2-14). 늙은 아삽은 자신이 매일 겪는 명백한 고통- 질병(?) -과 악인의 번영(3-5)을 비교하며 고뇌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일반은총 (145:9)이 아닙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경외하며(34:8,9)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된 선하심을 말합니다. 아삽은 안팎으로 정결한 삶(13)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도덕적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재앙과 벌만을 경험하자, 믿음이 흔들렸습니다(14). 욥과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반대로 악인은 번영하였으니 저절로 질투가 올라왔습니다. 아삽은 그들이 불치병도 없이 죽는 것까지도 목격하였습니다. 교만이 그들의 성품이었고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6). 그들의 교만한 혀는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가졌습니다(10).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11). 그러나 그들은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였습니다(12). 여러분은 어떻게 이겨나가겠습니까?  ‘호신론 護神論’이란 신학 분야가 있습니다. ‘신이 전능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선하지 않다’, 그리고 ‘신이 선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전능하지 않다’라는 명제가 대립합니다. 좋은 설명은 신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서 악이 있는 세상을 허락하셨다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잠언16:4,새번역).

시편73:15-20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

주님의 통치에 대하여 번민하던 시편기자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자 깨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교만히 행동하고, 말하는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축복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멸망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속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심판으로 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워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처한 환경이 당황스럽더라도, 다음 세대의 주의 백성들을 낙망시키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만 합니다(15). 만약 삼가지 않으면, 주님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악한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를 통해 주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공자는 혼자서 하루 종일 혼자 생각해도 생산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는 것을 버렸다고 논어에서 말합니다. 혼자 너무 기를 쓰고 기도하거나, 생각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16).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병들었을 때 의사가 주는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어 낫듯이, 그분이 준비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시요!(17) 셋째, 영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개하여 대단원을 미리 내려보십시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먼저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주어지는 영원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자명해 집니다. 악인들의 영원은 너무나도 불안합니다(17-19). 그들은 ‘완전한 속임과 멸망’(18)의 희생물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시편73:21-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28,새번역)

이 마지막 부분은 승리의 찬가입니다. 시편기자 아삽은 괴로운 생각이 가득 차고 정서적으로 땅 바닥까지 떨어지자,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삽은 고백합니다: “아, 나는 주님 앞에서 한 마리 짐승과 다름 없었구나!” 그리고 주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27,28). 궁핍한 아삽은 여전히 부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23). 주님은 늘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에 안전한 현재의 삶을 누리고(23), 하늘에 가기까지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날 때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려고 애를 쓴 자신을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하는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여기에 신실한 신자를 위한 사중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동행(23) (2)하나님의 붙드심(23) (3)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는 미래(24- 인도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24-내세의 확신). 악인들은 이것들을 알 수도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아삽은 지혜를 가졌고 하늘의 분깃을 강조합니다(26). 레위지파는 가나안 정복시 땅을 분배받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었습니다(수13:14,33). 주님은 공평하십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전3:13,새번역)   

잠언16:4절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새번역)

많은 성경학자들은 “악한 자들은 자신의 심판의 날(악한 날, 재앙의 날)을 위해 지음받았다(결정론은 아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들과 보디발 아내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시어, 요셉을 이집트의 권력구조의 최정상에 있는 파라오 다음 가는 위치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순히 요셉에게 영광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서운 기근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처와 생명을 공급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자를 요셉의 자리에 앉히셨다면, 이집트 인들은 구원받았겠지만, 야곱의 족속은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자세히 또 끝까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멸망 당할 때(비시605-586년), 유다의 관점에서 이는 ‘재앙의 날’이었습니다. 성전이 불태워지고, 그 사회의 지배자들과 귀족의 자제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이 승리는 그들의 신들이 하사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전합니다. “주님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느브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단1: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선하신 목적들을 이루십니다. 악한 자나 그들의 악한 행동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지혜와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2/01/03 – 07)

시편72:1절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 내용은 솔로몬의 시대에 잘 들어 맞습니다. 그는 시바 여왕을 포함하여 왕들의 존경을 받았으며(10절: 왕상10:1-13), 그의 제국은 평화와 번영이 그 질서를 이루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왕상10:14-29). 솔로몬의 제국은 메시야의 나라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는 본 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적용한 예는 없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왕과 그의 통치에 대한 묘사는 이사야11:1-5과 이사야 60-62장의 예언들과 너무나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그 예언들이 메시아적이라면, 당연히 이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정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의 언급은 솔로몬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솔로몬의 능력이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소명은 오직 메시야 안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아람어로 번역한 탈쿰역을 보면, 1절에 등장하는 ‘왕’ 앞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그 밤, 주님은 솔로몬에게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그는 ‘듣는 마음’ 즉 판단력을 구하였습니다. 주님은 기뻐하셔서 지혜는 물론 부와 명예도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솔로몬이 다윗과 같이 주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킨다면 장수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땅의 지혜를 얻어 성전도 세우고, 부도 얻고 명성과 권력도 얻었지만, 하늘의 지혜인 주님 경외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여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는 60세로 단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시편73:13절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새번역)

이 시는 다윗 왕 시절 성가대장이었던 아삽의 저작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전능하심에 회의가 드는 사건들을 종종 만나거나, 그분의 아버지되심이 무색할 정도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 자체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런 현실에서 숨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직면합니다. 시편 1권(1-41편)은 경건한 자의 번영을 노래하면서 시작합니다(1:3). 그러나 시편2권(42-72퍈)은 인생은 미덕과 보상 간에 비례적 관계가 없다는 눈물어린 고백(42:3,5,9-10)으로 시작합니다. 시편3권은 다음과 같은 퉁명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3장)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고 벌받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에게 주어진 유혹을 우리 역시 느끼곤 합니다. 아삽은 몹씨 고통스러워 하였지만 마침내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17). 그들은 회개할 사이도 없이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마치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이 자신을 붙뜰어 주심을 체험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기에 며칠에 걸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잠언16: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2절은 인간의 경영에 대하여 통치하시는 주님이라는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음의 계획들(1절)을 평가하십니다(2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지만 주님은 진리를 따라 평가하시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이십니다. 주님은 속마음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정당하게 평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였을 때는 그것을 고백하고 자비를 호소해야만 합니다. ‘꿰뚫어 보신다”혹은 “감찰하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측정하다, 양이나 무게 등을 재다’의 뜻입니다. 이런 비유는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후에 자신의 마음이 진리를 잣대로 측정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마음 또는 동기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채, 계획하고 집행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동기와 행동을 달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물론, 동기의 정결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주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잣대로 재고는 스스로 만족해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행동과 결과를 주님께 맡긴 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경영하여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동기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타인을 어떻게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곰곰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주권을 갖고 계시며(1절), 오직 그분만이 동기의 순수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2절). 그러므로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일의 성패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형통할 것입니다(3절). 때로는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승리 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기 마련입니다. 그 반면 2절과 3절은 경고도 줍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정결함을 보지 못하신다면, 우리의 계획은 좌초될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1절과 2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맡기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골렐’이며, 본 뜻은 ‘(돌을) 굴리다’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양들을 먹일 우물을 큰 돌로 덮었다가, 양떼들이 모이면 그 우물에서 돌을 굴려(골렐) 물을 먹입니다. ‘돌을 굴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일을 주님께 굴려서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골렐’은 의성어로서 이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은 마치 돌이 굴러가는 소리와 거의 흡사합니다. 굴러가는 상대방은 다름아닌 주님입니다. ‘일, works’은 계획된 행동이나 수행된 행위를 말합니다. 신실한 신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성취할 것인지 여부나 그들의 동기에 대하여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가나 성공여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지,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을 믿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일의 결과를,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기도와 평화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어제는 계획하고 주님께 그 결과를 맡기면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절하실 권한도 있습니다. 사무엘하7장은 이 측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계획을 밝히자, 나단은 즉시 승인합니다. 그 밤에 주님은 다윗이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주님은 다윗의 가문을 위해 영원한 집을 세울 것이며, 그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윗은 계획을 바꾸어, 남은 생애를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완전히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수립되여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계획을 승인하시고 이루어주셔야 한다는 기도를 그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일의 결정권자이십니다 (1절). 오히려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김으로써, 인간적인 계획은 좌절될지라도, 우리 삶에서 이루어가시는 좀 더 깊은 주님의 계획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15:31절, 32절을 본 구절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뚜렷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왜 솔로몬이,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3:11, 새번역) 교훈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책망을 들어야 비로소 우리 삶과 인격이 교정되어갑니다. 지혜는 여기서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가는 방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어놓으셨습니다(4절).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매일묵상(2021/12/27 – 31)

시편69:22-23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지금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로마서(11:8-9)에서 사도는 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돌립니다. 율법(신29:4), 선지자(사29:10), 그리고 성문서(시편69:22-23)의 말씀이 그 근거로 인용되었습니다. 세 번째 인용된 시편69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삶, 특히 그분의 고난을 뒷받침하는 성경이었습니다(막3:21 등). 사도가 본 구절에 나오는 다윗의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적용한 것은 타당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용된 시편의 상세한 부분 보다 일반적 의미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밥상 table’의 히브리 원어는 ‘식사를 위해 땅 위에 펼쳐놓은 동물의 가죽-보자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가까우며 친숙한 그 가죽 보자기는 때에 따라 덫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모세 율법의 규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매하게 된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사29:10). 성경의 신비입니다. 가장 가깝고 잘 아는 율법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자, 율법은 덫으로 화하여 그들을 실족시켰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이중적 성격(영생과 영벌의 소식)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시편69:25절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가룟 유다의 직을 대신할 사람을 뽑자는 사도 베드로의 제안의 근거입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1:20). 여기의 시편은 69:25절(앞부분)과109:8절(뒷부분)입니다. 또 한 명의 사도였던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시는(행12장) 이런 제안이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시편 69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깊은 곤경을 토로하면서 구원과 원수들의 심판을 호소합니다. 초대교회는 본 시편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을 배반하고 거절한 자들을 묘사한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69:25절은 자연히 가룟 유다에게 적용됩니다. 가룟 유다가 산 밭은 나그네를 위한 매장지로 사용되었고(마27:7), 그의 거처는 황폐하였습니다. 다만 히브리 원문은 ‘그들의 거처’(복수)이지만, 베드로는 ‘그의 거처’(단수)로 변형시켜서, 다윗의 저주가 가룟 유다 한 사람에게 적용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해석과 적용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사도들에게 주어진 지혜와 권한입니다. 이런 사도들도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알 권한은 없었습니다(행1:7). 성경은 세속 역사를 알려주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천지와 같이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어 특정인과 특정 시기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파멸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언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이미 확립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바울의 편지들’임)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벧후3:16, 새번역).

잠언16: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한 단락을 이루는 잠언 15:31-16:15절은 15:31-33절에서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히 살면 명예롭게 될 것이다’는 지혜를 다루고(서론부분),  본론인 16:1-15절에서 그 근거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1절은 계획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결정(말의 응답)은 주님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주시는 것이 아님 – 그 계획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계획은 주님의 통치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서로 상의하여 의논하고 잘 정리하여 주의깊게 계획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수립된 계획은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따라 수행되어야 열매(성공)가 맺힙니다. ‘경영(계획들)’의 원어는 ‘배치 or 정돈’‘을 뜻하는 ‘마르케’로서, 전투진형을 배열하듯이 주의깊게 요소요소에 배치하거나, 혹은 제사를 위해 나무를 차곡차곡 쌓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영’은 생각나는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들을 지칭합니다. 물론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 가야만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음을 듣고 울며 자신이 가서 성벽을 중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금식하였습니다. 어느 날 왕을 섬길 때 그런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곧 주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왕은 선선히 승락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주관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느1, 2장).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잠언21:1새번역)

매일묵상(2021/12/20 – 24)

시편69: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신약의 두 곳, 요한복음(2:17)과 로마서(15:3)에서 본 구절 전단과 후단을 각각 그리스도께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와 말기, 두 번에 걸쳐 성전 정화 작업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초기의 것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7). 원수들은 성전에 대한 다윗의 심오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방하였습니다. 그 만큼 다윗이 주님의 집(성전)에 대한 열심은 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한은 다윗의 경험에서 그리스도에게 발생될 예언적인 패러다임(틀)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현재 당하는 비방은  그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날 비방을 미리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소, 양, 비둘기 등 제사용 제물과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이유는 순결한 예배를 보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열성이 결국 그리스도를 삼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나를 삼키고”라는 부분은 다윗에게는 열정의 강도를 말하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포함시킵니다. 한편,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웃에게 덕을 세우도록 권고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을 행하시다가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바울 역시 다윗의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비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주님의 돌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벧전4:19,새번역).

시편69:21절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마태복음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27:34,48). 같은 사건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28-30). 마태복음은 생략하였습니다만, 요한복음은 본 사건이 구약의 성취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둔 것은 본 시편 구절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의 계획의 일환이며 구약성경에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성취하시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 이를 깨닫고 요한복음을 통해 증언한 것입니다. “응한다”의 원어는 ‘텔레이오세’로서, ‘텔레이오오 –(아무 흠도 없이) 완전하게 만들다’ 의 수동형입니다. 우리 주닝의 모든 생애는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여 완전하게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은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의 주님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시에 수고와 고난이 신자의 삶에 늘 존재하는 이유는 이때문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잠언15: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본 잠언은 ‘밝은 눈’에서 ‘듣는 귀’로 초점을 바꾸지만,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듣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이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 잠언 후단은 그를 ‘지혜자’라 호칭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듣는 귀를 위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마치 음식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구미를 돋구는 것과 같습니다. 현자의 책망을 듣는 자는 누구나 지혜자의 공동체에 속하여, 즉시로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이와 반대로 거만한 자는 혼자 지혜로운체 하며, 지혜자와 어울리지 않습니다(잠15:12). ‘듣는 귀’를 가진 자는 거만한 자와 달리 생명의 원천에 가까이 살면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지혜의 책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2:12).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은 그분으로부터 “듣는 귀와 보는 눈을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신29:4).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중시하여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생명의 경계’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롬3:23)고 선포합니다.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자는 회개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분의 피로 죄를 씻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는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특징지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는 지혜자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교훈을 저버리는 사람은 제 목숨을 잃고 책망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지각을 얻는다.”(잠언15:32,공동번역)

잠언15:32절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책망을 받아들이지, 반발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후단의 표현 중 ‘지식’이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 원문은 ‘레브’로서 ‘속사람, 지성,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나 이 문맥에서는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레브’의 결여는 정신적, 도덕적 능력의 부족을, 그 반대로 ‘레브’를 얻었다는 것은 살아가기에 충분한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잠언19:8절은 “지혜(레브)를 얻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얻는다.”고 하여, ‘레브’를 얻는 것은 ‘자신(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행위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훈계를 싫어 하여 ‘레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책망을 자주 받으면서도 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갑자기 무너져 회복하지 못합니다(29:1).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라고 가르쳤으나 목을 곧게세우고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최초의 징벌이 40년 간 광야의 길을 돌게 하신 것이고, 그 절정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입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깨졌습니다. 지금 팔레스틴 지역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세속국가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분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책망으로부터 참된 지혜(호크마)를 얻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잠3:14,새번역).

잠언15:33절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새번역)

잠언15:30-16:15절의 서론은 15:30-33절이며, 끝 구절인 33절은 16:1-15절에 묘사된 주님의 통치와 섭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열쇠는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이며, 이것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면 겸손하게 되고, 사회적 명예는 덤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가는 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사회적 존중을 받는 길은 겸손입니다. 지혜는 마음(heart)의 문제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혜자 중의 한 명이지만(31),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국어사전은 ‘겸손’을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정의합니다. ‘겸손’의 히브리 원어는 ‘아나바’로서, ‘압제를 당하여 굽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을 충분히 통과하면 겸손해지게 되어있습니다. 거만하고 냉소적인 바보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하지만, 잠언의 제자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도덕질서와 삶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그 질서에 반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주님께 백기를 휘두르고 투항해야 비로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벧전5:6).  유다의 웃시야 왕은 강대해지자 교만하여 왕에게 금지된 제사장직까지 행하려고 하다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아람 장군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겸손히 순종하여 고침을 받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습니다. 우리는 다 모난 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징계를 겸허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회적 성공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새번역)

매일묵상(2021/12/13 – 17)

시편69편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9절)

다윗은 이 시편에서 연약한 사람나와 고백합니다. 구약을 보면 이 시의 배경이 될만한 다윗의 삶은 없습니다. 다윗은 기록되지 않은 부당한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 자신은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헌신하였지만(9), 재정적(?) 부정 행위에 연루되었다거나, 이 때문에 마땅히 행할 국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입니다(4). 다윗이 가진 정의감은 무디지 않았습니다. 비방과 배반이 일어나자 다윗은  자기정죄(5)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성품과 도덕적 민감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생명은 위협당하였고 증오는 계속되었습니다(1-4). 그를 지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모욕당하였고(6), 가족들과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8). 그의 신앙 고백과 삶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10-12). 곤란이 중첩하나 신속한 응답이 없자 의심이 들며 두려워하였습니다(17). 이 모든 것이 주님과 그분의 집에 헌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진정한 공격의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이 시편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저주들(22-28)의 이유입니다. 두 가지가 주목됩니다. 첫째, 이 시가 해결되지 않은 위기의 상황(29) 하에서 기록되었지만, 결국 다윗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 다윗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하고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둘째, 이 시는 시편 중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여러 번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들의 자손이 그 땅을 물려받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다.”(시편69:36 새번역).

시편69편 4절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본 시편은 메시야 시로서 4, 9, 21, 22, 25절은 신약에서 빈번히 인용됩니다. 4절의 전반부는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5:25). ‘율법’이란 시편을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증거하셨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좋은 예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신 기사입니다(요5장). 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리신 사건입니다 (요11장). 유대인들은 표적과 가르침 속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보았으나 오히려 미워하여 원수가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경험을 노래한 구절들을 예수께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형론 Typology’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만약 다윗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얼마나 더 미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율법에 의하여 오히려 정죄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복음의 신비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잠언15: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낸다.”(새번역)

마음은 악한 생각들 혹은 정결한 언어를 구축하며, 탐욕 혹은 관대함의 원천이고(27), 선한 동시에 적절한 대답(23)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 열쇠임을 이 구절이 보여줍니다. 의인의 마음은 상대방의 삶이 선한 열매를 맺도록 적절한 말을 찾아 깊이 생각합니다. 현자는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만(23), 좀 더 적합한 대답을 찾아 여전히 연구합니다(2). 악인의 입은 악한 말, 즉 도덕적으로 불쾌하며 더 나아가서 해로운 말을 불쑥 내뱉고 맙니다. 마음과 입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악한 말을 쏟아낸다’는 문장은 성급함을 말하고,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는 문장은 ‘좋은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70인역이나 탈쿰역은 ‘좋은 것들’을 ‘신실한 것들’로 번역하여 사회적 배려를 강조합니다. 의인은 신중하며 자제력이 있습니다. 의인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본 잠언은 이런 면들이 악인과 다름을 가르쳐 줍니다 . 악인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 꾀, 계획, 거만함으로 꽉 들어차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늘 분주합니다(24:2).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악인은 의인과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대주교였던 페넬롱은 사려깊은 분이었습니다. 조언을 구하는 편지가 오면, 그는 깊이 생각하고 답변을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무려 2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분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엡4:29,새번역)

잠언15:29절
“주님은 악인을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새번역)

이 잠언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의인을 판단하는 신학적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이란 주님이 가까이 하여 기도를 들어 주시는 사람입니다(시145:18).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 만유의 주님의 돌보심은 가장 든든한 보장책입니다. 의인의 자랑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악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주님은 멀리하십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멀리하신다’는 의미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은혜 받지 못함을 뜻합니다. 주님과 악인 사이에는 교제가 없습니다. 양측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극한 상황이 지옥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자비와 영광이 떠나 있습니다. 악인은 종종 경건한 사람으로 위장합니다. 누가 악인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분별합니다. 지혜자는 사람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지 길어올립니다. 지혜자 또한 악인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잠언은 악인이 회개하는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악인이 진정 회개한다면,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회개는 악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악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렇듯이 예외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과의 교제가 생명 보다 나음을 깨닫자 회개합니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구원의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겠습니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9-10, 새번역).

잠언15:30절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잠언15:30-16:15절은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도입부분(15:30-33), 주님의 주권(16:1-9), 그리고 왕을 통한 주님의 통치(16:10-15). 도입부분은 ‘듣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15절은 이를 상세히 교훈합니다. 본 구절에서 ‘눈이 밝다’는,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마음을 지칭합니다. ‘좋은 소식(기별)’이란 문맥상 ‘주님의 통치’(16:1-15)를 언급합니다. ‘윤택하게 한다’는 ‘살찌게 한다’의 의역으로, 풍성함, 충만한 만족 그리고 건강을 말합니다. ‘뼈’는 사람을 뜻하는 제유법으로서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함합니다. 본 잠언의 실례는 빌립보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로마 셋집에 갇혔습니다(AD60년). 빌립보 교회는 또 다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이 예물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 곤궁도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매여 있었지만, 바울의 사정이 로마군대 내에 알려져 복음은 오히려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빌1:12-14). 사도 바울 자신의 눈이 밝아지는 계기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소식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는 매여져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놀라운 소식에 기뻤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은 성도들 사이의 아름다운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도 이같은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교우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빌4:21,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