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8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순종의 미덕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단 위에서 이러저리 걷고 있는 그 선생님이 풍기는 분위기는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그는 큰 소리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잠시 뜸을 들이면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이들을 노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줄 알고 있습니까?” 그는 누군가가 “선생님이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꾸밀 줄 모르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러합니다. 다만 벌이 무서워서 거짓말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모두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점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인간들의 장기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죄된 경향성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보고 그대로 쏟아냈다가는 인간관계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결점을 보고 “입을 다물 때가 있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전3:7). 이런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덕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입을 다물고 주님께 이 문제를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언제나 솔직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때는 열일을 제쳐두고 반드시 주님 앞에 이 문제를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간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인격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2-14).


2020/10/7
어떤 소년이 어머니에게 배가 아프다고 말하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어쩌면 네 위가 비었기 때문일 수도 있단다. 네게 먹을 걸 만들어 주마.” 얼마 후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을 오셨다가 우연히 머리가 아프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목사님, 아마 목사님의 머리가 비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머리에 무얼 좀 먹이십시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들도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할 줄 압니다. 다만, 아직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서 지혜가 부족하고, 따라서 그 적용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잘못 이해하거나, 적용을 잘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라고 부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말 ‘어리석다’의 어원은 ‘어리다’입니다. 국문학자 홍윤표 박사의 글입니다.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란 뜻을 가진 ‘어리석다’란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어리다’가 ‘어리석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의 ‘어린 百姓’은 ‘나이 어린 백성’이 아니고 ‘어리석은 백성’이란 뜻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뜻을 가졌던 ‘어리다’는 오늘날 ‘어리석다(愚)’의 뜻은 사라지고 ‘나이가 적다(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어리다’는 원래의 ‘슬기롭지 못하다’는 뜻을 ‘어리석다’에 넘겨주고 자신은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일에 어리석은 사람, 즉 경험이 적고, 판단력이 미성숙한 사람을 배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우리가 어리석어야만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죄악은 경험이 적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른이고 어린이건 가릴 것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도 경험할수록 커가는데, 처음에는 하나의 죄된 행동이지만, 다음으로는 습관(죄인)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인격화(오만방자한 성격)됩니다. 그래서 시편의 첫 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우리 삶에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4:20, 새번역).


2020/10/6
영국의 어느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갇혀 있게 되었을 때, 누구하고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소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 전문가요.” 정답입니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의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이생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들만 해도 이미 너무 복잡한데, 거기다가 지구 온난화 문제,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의 문제, 기상이변의 문제, 날로 증가하는 부도덕성, 범죄, 폭력 등이 난무하니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출구를 찾고 있으나 이 지구 상에는 없습니다. 그래 미국의 일론 머스크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어김 없이 죄와 사망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비극의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전자를 가지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후자를 가지고 우리의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가르침을 따르는 세상은 참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 너 자신의 존엄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라는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안 보이는 하나님은 말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보이는 이웃 사랑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낮추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자신을 낮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무능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비로서 주님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낮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혀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마18:2-4, 새번역).


2020/10/5
한 무신론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린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나에게 보여 주면 네게 일 파운드를 주겠다.”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겐 오십 펜스짜리 하나밖에 없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보여 준다면 이 동전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어린이는 매우 현명한 아이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대중을 향하여 강연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었습니다. 한 동안 하나님을 모욕하더니니 그치고는 청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하나님이 조용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욕을 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 청중 가운데 한 노신사가 일어나더니 강단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하는 그 철학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강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철학자의 일생에 아무런 징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버림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에 대하여 징벌을 받아도 그 때문에 회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정말 행운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우리 모두가 선다는 생각은 이처럼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세상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반역자들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를 벌하시는 것 이외에 어떤 일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 모든 죄악의 결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2020/9/29
어린 알렉스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림을 그리라면 어떻게 그리겠니?”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있는 걸 그리지요.” “죽음은 어떻게 그리겠니?” “관 속에 사람이 누워 있고, 관 위엔 빨간 십자가가 놓여 있는 걸 그리지요. 십자가는 우리를 구해줘요.” “삶은 어떻게 그리겠니?” “사람과 해를 그리겠어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이들의 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림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돌려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삶에 대하여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한 우리의 답을 적기 전에,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때는 목요일 저녁 식사 중으로, 주님께서 체포되시기 불과 5시간 전이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지금 당신을 팔려고 대제사장들에게서 은 30량을 받고 밀고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마지막까지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어주시면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발을 다 씻겨주신 뒤, 주님은 다시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사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체험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난 뒤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만유의 주님께서 자신들을 섬기려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삶을 생각하면 섬기는 삶으로 요약되고, 그 대표적인 표상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들 각 자의 삶을 관찰하시고는 어떤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주시겠습니까? 오늘 마음에 곰곰히 생각하시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10:45).   


2020/9/28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최종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동기가 아주 훌륭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표준전과입니다. 이 땅에는 좋은 것도 많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들(하나님 공경, 부모공경 등)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이때 죄가 드러나면 죄의 삯을 치루어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도 가진 것도 없는 영적으로 파산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이 그 대가를 치룰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수단으로서, 이사야의 표현에 따르면 ‘주님의 팔’로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서 온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모두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영생불사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방법을 적어 놓은 성경의 주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문장으로 요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짜 네가 나를 주님으로 영접하였는가?”를 판단하시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이른바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당연히 그날에는 입술의 고백을 뒷받침할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통교리는 그에 합당한 삶으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반면 정통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준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신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열망의 실천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25:37-39).­­­

2020/9/25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고 싶니?’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면 아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빠가 저 사진틀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합니다. ‘본능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저절로 생기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됩니다. 헬라 원문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서두에 나옴으로써,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본지는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당신의 제자들 사이에 당신으로 인하여 부자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만 법적인 의미로만 이해된다면, 우리 마음에 별 다른 감정이 생기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하여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성령님을 통하여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아이가 ‘아빠가 저 사진틀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함께 살고싶은 마음 그것이 우리가 중생하였다는 좋은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 양자의 영(성령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우리 마음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첫 마디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이 되고, 이것이 영생의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시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9-31).


2020/9/24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거니? 아픈 거니?” 다른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굉장히 아픈 거야, 할머니는 진짜 어른인데, 할머니 얼굴에 있는 주름살 좀 봐. 그러나 진짜가 아닌 사람들만이 그걸 보기 흉하다고 생각해. 나는 할머니를 사랑해.”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입니다. 실상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잠17:6)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인이 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물론, 머리털조차 백발로 변하게 됩니다. 이 백발에 대하여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16:31)고 하여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백발 머리가 영광의 면류관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천하의 명장이고 단 한 번의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던, 다윗의 조카인 요압은 사사로이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로서 사울의 사후 다윗에게 항복하기 위해 왔으나, 전쟁 중 동생 아사헬을 죽였던 것에 복수심을 품고 암살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아마샤로서 요압대신 군대장관을 삼고자 한다고 다윗이 공포하니 그대로 죽여버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건립에 공이 많은 요압의 죄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솔로몬에게 그를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왕상2:6). 요압은 솔로몬이 등극하자 마자 처형당하였습니다. 이런 요압과 대조적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의 백발은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졌습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고, 당시 최강대국 애굽을 80년 동안 통치하면서 많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는 아버지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430년 동안 정착하고 민족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공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서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결국 감옥에 수 년 동안 갇혀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죄수의 신분에서 총리의 신분으로 뛰어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요셉은 제국을 통치할 기술과 지혜는 물론 인성까지 연마한 뒤였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한 줄기 빛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장래 자신이 할 더 큰 일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백발 역시 젊을 때부터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손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새번역).


2020/9/23
한 여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무엇이 들어 있지?” 한 여학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집 성경에는 굉장히 많은 날짜와 결혼과 죽음과 신문기사 오린 것과 생일 카드와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 있어요. 그게 아마 다일 거에요.” 성경에서 그런 것밖엔 찾을 수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영적으로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은혜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줄이 처져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서 맺은 성령님의 열매의 간증으로 가득차 있는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치매 그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며,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면 삼심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그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춤 하나, 게임 하나 마스터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수 천번이나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도를 하여야만 합니다. 아이들은 이것이 재미있어, 야단을 맞고 돈이 들어도 계속하여 마침내 상당한 게임의 경지에 이릅니다. 선한 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의 것은 거기에 따르는 보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가치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딤전4:7-8, 현대인의 성경).


2020/9/22
다섯 살짜리 소년이 저녁마다 자기 전에 하는 기도를 암송했습니다. “나 이제 잠자리에 듭니다. 주님 내 영혼을 지켜 주세요. 만일 내가 죽으면…..” 여기서 그 소년은 멈추고 물었습니다. “아빠, 죽음은 어떻게 생겼어요?” “캄캄한 거란다.” 그 소년의 아버지가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껴 울며 어둠 속에서 잠이 깬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주일학교에 보내는 분이었습니다.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죽음에 대해 굉장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이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굉장히 흥분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엄마! 엄마는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무덤을 통과하시면서 뒤에다 빛을 남겨두고 가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죽음의 권세에 일시적으로 굴복하셔서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는 죽지 아니할 몸을 입고 영원히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이 살아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 역시 그분과 같은 경험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첫 번째 종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종이 행하실 사역을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 이는 여호와의 종을 통해 죄와 사망 가운데 갇혀 영원한 흑암에 거할 우리들을 풀어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데 ‘사망’이란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대해 붙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어도 영원한 몸으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그 부활의 날을 고대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분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2020/9/21
방금 아침 기도를 마친 아이에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무엇에 대해 기도했니?” “하나님께 쉬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이제 내가 깼으니까 하나님은 편안히 주무시라고요.”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당신의 뜻을 준행하겠습니다.”는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약 3,200년 전에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인 어린 사무엘이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양육될 때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이자 사사는 엘리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막 안에서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네 번이나 거듭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까지는 엘리의 음성인 줄 알고 엘리에게 나아갔었습니다. 이에 주님의 부르심인 줄 깨달은 제사장 엘리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행할 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서서 네 번째 부르시자 비로서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가문의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무엘의 소명 사건입니다. 이후 하나님은 사무엘을 사사와 선지자로 세우셔서 왕정이 시작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맡아 충성을 다하여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왕 사울과 그 다음의 왕 다윗을 세울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의 견제 때문에 은퇴하여 후학을 양육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누구나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소명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섬길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길 기회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이 일에 제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주님은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는 주님께서 섭리를 통하여 주시고 그 마지막은 칭찬과 함께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맡은 사람에게 더없이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고전4:2, 쉬운성경).

2020/9/18
KBS 라디오 “말 같은 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날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럼 좋은 문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명언에 그런 말이 많습니다. 명언은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말입니다. 내용도 좋지만 문장의 형식도 좋습니다. 어떤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수사가 어떻해야 하는지 형식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명언을 외우다 보면 문장의 형식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응용해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더라’ 하면서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풍부해 집니다. 명언 주인공의 권위를 빌려 말의 신뢰를 높이고 듣는 사람에게 통찰을 일으킵니다. …… 한 때 명언이 들어 있는 일기장이 인기였습니다. 어지간히 유명한 명언은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아포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명언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포리즘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경험된 진리를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젊은 세대들이 이런 아포리즘을 찾는 걸까요? 간결함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그들의 취향에 맞아서일까요? 아니면 어디에선가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싶은데 주변 어른들의 말은 왠지 꼰대스러워서일까요? 뭐 이런 건 아닐런지요? 그러면 나만의 명언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까요?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의견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세요. 이것에 대한 내 의견은 무엇인가? 그때 이것은 우리 경제일 수도 있고, 코로나 사태일수도 있고, 화제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바로 그것이 나의 명언입니다. 늘 생각하고, 메모하고, 말해보면서 내 안에 명언을 쌓아나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상이나, 책, 논문 등에는 반드시 제목이 따라다닙니다. 그 제목은 그 책이 쓰여진 목적이나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해주는 글입니다. 자신이 읽은 아티클이나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으면,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1754 페이지의 방대한 책의 주제와 결론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이며 모든 교리와 사상 그리고 신학은 물론 우리의 행동까지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한 마디, 한 문장입니다. 그 한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 짧은 문장을 풀어놓은 것이 바로 신구약 66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골2:6).  


2020/9/17
여섯 살의 아멜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기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도망치기로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도와 드리려다가 꾸중만 들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아예 그런 사람들을 뽑은 것은 예수님 잘못 아닌가? 만약 성인이 어린 아멜리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그분은 성경이 증거하는 주된 메시지를 이해못한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자기 뜻대로 어떤 것이든지 하실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선하시다. 그런데 왜 우주에 악이 들어와 있고 나에게 이런 불행과 어려움이 있는가? 하나님은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탄에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도록 허락하셨는가? 또한 모든 사람이 심판대상인데, 전부를 구원하지 않고 왜 당신이 선택하신 일부만 구원을 하시는가?.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왜 악마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 지옥에 먼저 던져 넣지 아니하시는가? 그럴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이냐 아니면 선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냐? 등등의 많은 문제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더 좋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악이 허락된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셨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당신의 정의로운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기준에서 벗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는 어린 아멜리가 어른이 되어 세상을 보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엡3:10, 쉬운성경)


2020/9/16
“의미 요법”이라는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유명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크(1905-1997)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던 중 동생 윌터가 잡혀 가는 등 나치의 압박이 심해오자,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하여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부친이 파괴된 회당에 갔다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 하나를 가지고 오셨는데 그 돌에는 히브리어 한 단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부친의 말씀이 “십계명 중 이 단어로 시작되는 것은 제 5계명밖에는 없기 때문에 이 돌 조각은 5계명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는 이를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치의 통치 하에 의사로서 일하던 중 빅터는 틸리 그로서와 결혼하였습니다(1941년). 그러나 1942년 빅터와 그의 아내와 부모는 테레지엔 슈타트 캠프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는 병으로, 어머니는 가스실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44년 빅터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옮겨졌으며, 그는 다시 아내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아내가 자유를 얻어 수용소에서 함께 몰려 나오던 중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리 피신한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모든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절실한 실존주의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기품있게 살아가며 생존확률도 높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질서한 삶을 살면서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정신분석학사에 길이 남을 로고테라피 즉 ‘의미요법’을 창시하게 됩니다. 그것은 종교든, 지식이든, 가족이든, 철학이든, 명예이든 무엇이든지 좋으니 삶의 의미를 가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존주의적 삶의 방식으로, 그분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런 식으로 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부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모습이어야만 할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요, 목적이고, 참된 진리이며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2020/9/15
빅토 프랭크 의사는 전쟁이 끝난 뒤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의 딸이 여섯 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빠, 왜 우린 늘 ‘좋으신’ 주님이란 말을 쓰지요? “ “네가 며칠 전에 홍역에 걸렸지. 그때 좋으신 주님께서 너를 낫게 해주셨잖니?” 그의 딸이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아빠의 대답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빠, 먼저 내게 홍역을 보내신 것도 그분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불과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대답을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는 의례적인 종교적 대답이나 하나님에 대한 값싼 선전으로 아이들을 쉽게 속여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지성을 갖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 세상에서 상당한 기간을 살아본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력의 법칙과 같은 자연법칙들이 언제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에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관관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반론을 매우 경계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는 일본에서 선교할 때 A 라는 주재원이 교회의 일에 훼방을 많이 놓았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그분 나중에 보니 망하였더라…는 등의 연결은 매우 위험한 등식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누구도 그런 사건이 그런 병이 혹은 그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남을 아래로 보고, 손이 잔인하며, 머리가 능수능란한 사람이 세상에서 재물도 많이 모으고, 권력도 가지며, 명예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파멸에 두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못 가는데 형통하는 경우 회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말하기를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8:14) 하였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하고, 또 냉철한 지혜가 요구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경주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6-17).


2020/9/14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스는 아이들에게 모래를 던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벌로 매일 교장실로 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훈계를 들어야만 하였습니다. 알렉스는 아빠에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 자기를 위해 교장 선생님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알렉스 아빠는 이 일을 계기로 그에게 귀중한 교훈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네가 죄를 지으면, 너는 낚시에 꿰이게 되는 것이야!” 그 말에 어린 알렉스는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하면 낚시를 벗어날 수 있지요.” 매우 똑똑한 아이입니다. 사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이보다 더 가볍게 벌을 면하였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회개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몇 마디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다음의 실화를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님의 어린 시절 그 동네에 두 사람의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A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학교 선생님이었고, B는 믿지 않는 사람이며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등감을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B가 술에 취하여 사람들과 언쟁을 하는 것을 보자 A가 말렸습니다. B는 장난삼아 ‘너 맞아 볼래’ 하면서 A를 향해 휘두르다가 의도하지 않게 뒤통수를 갈기게 되었습니다. A는 뇌진탕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B는 뼈저리게 후회와 참회를 하였고, 사정이 참작되어 과실치사로 3년의 징역형을 산 뒤 출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 특히 친구를 죽였다는 자책감에서 놓여나지를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아내에게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뒤 소식이 없기에 찾아보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후였습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런 은혜를 가진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4-5).

2020/9/11
아직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아주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가치관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할아버지인 범브란트 목사님 가정에 진주 같은 지혜를 비추어 그분들의 삶을 자주 밝게 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다 좋아해요. 나는 하나님에게 속했거든요. 그러나 마귀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요.” 그 어린 알렉스가 가지고 있는 영분별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1-2). 알렉스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도, 이미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번은 TV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있을 때 알렉스에게 극의 줄거리를 설명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목사님은 알렉스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알렉스의 대답은 그가 단순히 이해 정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예, 할머니가 예수님의 줄리엣이예요.” 알렉스는 어떤 신학적인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품고 계신 사랑이, 신랑이 신부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에 의해 중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니고데모는 성경과 세상의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랍비였지만, 죄와 사망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종의 쇠사슬에서 풀어주셔야만 하는 것과, 이를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자신만을 사랑하는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의 길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2020/9/10
어떤 아이가 할아버지의 팔에 안겨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할아버지를 만드셨어요?”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그럼 나는 누가 만드셨어요” “너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그렇다면 요즘 하나님 솜씨가 많이 좋아지셨네요. 실습을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젠 얼굴에 주름 같은 건 만들지 않게 되셨나봐요.” 하나님께서 나아지신다? 이 아이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36:11)는 말씀을 받아 포로로 잡혀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대보다 우리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순전히 건강과 관련해 본다면 우리들은 좋은 의료진들과 시설을 갖춘 나라에서, 양질의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혜택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50년 이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질병이 많고, 가난한 나라로서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폐병은 매우 무서운 병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폐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무서웠던 폐병은 지금 한국에서 소멸된 전염병 중 하나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의학과 과학의 진보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하면 안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진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 신자들은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 이웃들은 물론 이웃 국가들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코로나 19 백신만 주면 중국과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까지 한 상태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장 우리 북쪽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역사의 키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와 도움의 영역을 넓혀 가야만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8).


2020/9/9
“애야, 네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에 대해 나한테 애기 좀 해 봐라” 어떤 남자가 어린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소년은 단순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작아서 하나님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소년은 순교자 저스틴(‘유스티아누스’라고도 불리움)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했을 때 하였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저스틴의 생애는 그의 저작인 유대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와 그에 관한 순교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AD 100년 경 팔레스틴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리에 목마른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였지만,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중 어느날 체사리아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저스틴이 기독교 안에 있는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분의 영혼에 섬괌이 일어나면서 플라톤 사상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상에는 그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을 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죽음에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화를 받고 여기 진정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후 로마에서 그리스도 철학을 강의하며 많은 글을 남겼으며 3권의 책과 몇가지 서신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65년경 저스틴과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혔습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오현제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161-180)로서 기독교를 맹렬히 박해한 황제였습니다. 로마 장군 루스티쿠스 앞에 선 저스틴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라는 것을 거절하는 동시에 제기된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는 제자들과 함께 참수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 이분의 이름 앞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붙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2020/9/8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큰 분이세요.” 알렉스가 어린애다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때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19세기 초에 파푸아 뉴기니아 섬에서 순교당한 이탈리아의 선교사 요한 마주코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대양을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작은 배를 타고 석달 걸려 그것을 건넜다. 만약 어떤 분이 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면, 대양은 모래 한 알보다 작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차지하려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단 한분만이 크시고 또한 영원하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하신 뒤 할례의 언약과 이삭의 출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늙은 것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셔서 지금과 같은 수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상에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억압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경건하지 못한 나라, 내 진노의 ​​백성”(사10 : 6)이라고 불리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로 주님이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Yes’입니다. 우주는 다시 만들어 질 것입니다 (사65:17).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호 2:23; 사 65:19).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일은 여호와의 종 즉 메시야를 통해 주어진 교훈 때문에 일어날 것으로 이사야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네 번의 종의 노래(이사야 42장-53장)에서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 여호와의 종이 실제 나타나신 바가 된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모든 시험을 다 겪으시면서 참된 교훈을 주신 뒤, 우리의 모든 죄를 끌어 안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예수께서 만유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주신 계명들을  마음에 두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2020/9/7
어거스틴이 성 삼위론에 관해 책을 쓸 생각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바닷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아예 책을 쓰려던 계획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간 그는 울고 있는 한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보세요. 내가 모래 속에 이렇게 큰 구멍을 파놓았는데도 여기에 바다 전부를 담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은 할 수 있겠어요?” 어거스틴은 그 아이의 질문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주신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힘을 얻어 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우리는 매우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우리 역시 바닷가의 그 어린이처럼 저 너머에 있는 것과 거기 계신 분에 대하여 아주 조금밖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자 하면, 그 사람의 이름이나 외적인 모습. 직업 등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성장과정, 교우관계, 관심사 등을 찾아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고 함께 오래 사귀면서 삶을 공유한 후에야 비로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고결한 종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책입니다.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체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직접 우리와 함께 살아가신 것입니다. 실상 이 세상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려고 지으신 장소입니다. 우리와 영원한 대화를 나누시기 위해 조성하신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하나님이 주신 은혜 등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가운데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품고 땅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주님 때문에 우리 마음과 몸 속에 그분의 은혜와 훈훈한 사랑이 늘 배어 있게 됩니다. 온도의 차이를 우리 손이 쉽게 분별하듯이, 사람들은 그 차이를 금방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사람을 보는 순간 그 원인을 알고자 하며, 그 사람 역시 주님 앞으로 와 만남을 경험하고 또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2020/9/4
위에 있는 사진은 홀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세상의 빛” 혹은 “문을 두드리는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서 찬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색채가 훌륭하다고 말하고, 한 사람은 예수님 얼굴 표정에 대해 말하고, 또 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은 안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에 문 바깥쪽에 손잡이가 없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예수님의 발이 문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분은 사람들에게 거절 당한 경험이 너무 많아서 지금도 떠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헌트는 “나는 단순히 좋은 주제가 아니라, 비록 내가 합당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렸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특이할 것은 그림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문은 오직 안에서만 열려질 수 있습니다. 헌트는 자신이 이렇게 그린 것은 “완벽하게 닫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50년 뒤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밖에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어린이는 그림을 그린 화가 보다도 더욱 중요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빠, 그래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으로 들어 오시게 했나요?” 그것은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그림의 주제입니다. 그 외의 다른 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믿음의 문을 열었는지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것은 지혜, 용기, 정의, 온유와 같은 아름다운 덕들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들 위에 복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정립하여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립된 지식 위에는 절제를 공급하여 그 지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채워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할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더욱 힘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선택해 주셨다는 데 대한 확실한 경험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벧후1:10-11, 현대인의 성경).


2020/9/3
어떤 과학자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지요?” 주님의 존재 이외에 우주에 절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성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입니다. 만약 우주에 이 이론과 배치되는 현상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당장 상대성 이론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가지고 노벨상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주장에 대해 건설적인 의심을 품어 보아야 합니다. 한 추기경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만일 모든 과학자들이 성경에 있는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추기경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잠깐 동안 기다리겠습니다.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던 것을 그리 오래 주장하지 않더군요.” 타당한 대답입니다. 카톨릭 사제로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는 벨기에의 천문학자인 조르주 르메트르(1894~1966)입니다. 이분은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하여 우주가 팽창한다는 논문을 쓰고, 이른바 우주상수로 고민하던 아인슈타인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 우주상수를 집어넣은 것은 잘한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또 어느 순간 작은 점에서 발생한 대폭발로부터 우주가 시작됐다는 가설을 발표하자 당시 천문학자였던 프레드 호일은 “그러면 빅뱅이라도 있었던 것이냐”고 비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 빅뱅이론이 힘을 얻자, “빅뱅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의미한다”라고 교황이 공식적으로 선포하려 하자, 조르주 사제는 “성경은 물리학을 모르고, 물리학은 성경을 모릅니다.”라고 설득하여 말렸습니다. 이렇게 과학과 성경을 서로 연결시켜 성경의 진위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혹은 성경을 근거로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과학은 존재목적이나 진리를 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나 문학작품 그리고 신문의 보도기사가 엄밀한 과학적 지식을 결여하였다고 비판받지 말아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인류 역사에서 행하신 것을 보도한 책으로 이해하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 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2-3).


2020/9/2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히브리어로 이것을 읽으면 그 첫 단어는 ‘베레슈트’이며, 그 첫 음절 ‘베’의 자음 ‘ㅂ’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음은 ‘ב’‎ (베트라고 읽는다)로 표기합니다. 결국 성경의 시작은 ‘ב‘(베트)라는 자음입니다. 이 문자는 4면이 아니라 앞이 터진 삼면을 가진 상자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때문에 상자의 열린 부분이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왜 이 글자로 시작하는가에 대하여 랍비들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위와 뒤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으리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쪽만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시려고 하는 방향입니다. 이런 설명이 빛을 발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어린 아멜리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으리라는 걸 틀림없이 알고 계셨을 거에요. 왜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죄가 있고, 우리는 그것과 맞서 꾸준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때 쓸데없이 ‘왜’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금방 방울뱀에게 불린 사람이 치료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왜 방울뱀에게 물렸는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설명도 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그대로 경건하게 삶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들에는 ‘왜’라는 질문보다는 현실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즉 “나로서는 이만큼은 알지만,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29:29, 새번역).


2020/9/1
뉴톤은 어느 날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왜 사과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연구에 들어가 자연계에 작용하는 중력(만유인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시절 이후 품은 질문 “우리가 만약 빛의 속도로 달리면 빛은 어떻게 보일까?”라는 문제를 풀다가 상대성 이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문학의 모든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에 대한 답은 성서가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주님은 무려 287개의 질문을 던지시면서 삶의 핵심주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최초의 선언이라고 기록된 것도 사실은 질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유월절에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그때 12살된 어린 예수님은 선생들 가운데 앉아 질문을 주고받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는 부모에게 “왜 당신들이 나를 찾았습니까?”(눅2:49)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 어린아이 같은 점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도 그분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 후에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 사울을 만나서도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행9:4). 범브란트 목사님은 유대인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였고, 그에 대하여 성경에서 발견한 답도 두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얼굴, 햇볕처럼 맑고 별떨기처럼 눈부신 이분은 누구인가?”(아가서 6:10)라는 대답입니다. 둘째로, 누가 진정으로 따를 수 있는 믿을 만한 목자인가? 에 대한 질문은,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눅12:42)는 대답을 발견하였습니다. 질문이 ‘누구?’인데, 대답도 ‘누구?’입니다. 질문은 참된 신앙과 신학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2020/8/31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다섯 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오후 목사님이 집에 오니 미하이가 벌을 받아야 할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번에는 좀 다른 방법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미하이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다음날 미하이를 부른 목사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것과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묻기를 “너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예”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너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도 다시 대답하였습니다. “예.” 목사님이 세 번째 미하이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 그는 자기가 전 날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아빠가 자기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세 번째 대답하였습니다. “예,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 아이가 단순히 베드로의 대답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은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어린 미하이는 사려깊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건 묻지 않으셨어요. 그분은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으로 만족하셨어요” 사실 사랑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일화입니다만, 잘 알려진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당수(가라데)를 연마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가는데 소 한 마리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 당수로 치니 그만 소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 주인은 그분의 부친에게 와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저녁에 그 부친은 아들을 불렀습니다. “네가 소를 죽였니?” “네” “왜 죽였니?” “소가 저를 째려보기에 화가나서 당수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소 주인에게 소 값을 물어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그 아들은 부친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여기까지 저를 사랑하시니 제가 이제 올바른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결심을 말씀드리고는 바른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13:4-7, 현대인의 성경).

매일말씀나눔

2020. 24 – 28

당근과 콩 속에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으니 당근과 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탕과 아이스크림 속엔 비타민을 넣지 않으셨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기 같으면 이런 대답을 하였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이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기 싫어하는 것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어 쓰기를, “우리는 좋은 일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일에서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좋지 않은 일도 환영해야 합니다. 하니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데,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도 그 ‘모든 일’ 속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섭리(攝-다스릴 섭; 理- 다스릴 리)는 “자연계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라는 사전적인 정의가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일컫습니다. 영어는 Providence 라고 번역합니다. 어떤 블로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섭리 (providence)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Deus povidet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이다. 창 22장에 등장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이삭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사건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번 코로나 19의 재발로 우리 모두 걱정과 혼란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의 행태는 많은 부끄러움을 가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발발로 대한민국이 방역 강국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 2차 확산 역시 예상되었던 것이고 저는 훌륭하게 극복하리라고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교회들이 예배를 포함한 제반 모임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이번 코로나 19는 한국 교회의 병폐를 많이 드러냈습니다. 섭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 사태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각종 사건을 만날 때,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분이 무엇을 예비하셨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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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죄를 고백했을 때, 어머니가 아이를 이런 말로 안심시켰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너를 깨끗하게 씻어 주었단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엄마는 저번에 내가 죄를 지었을 때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땐 예수님의 피는 어디 있지요? 그땐 무얼 하고 있어요?” 이 어린 아이는 엄청난 주님의 피가 항상 탱크 속에 준비되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이 퍼 가지고 씻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피는 5리터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짓는 죄만해도 상당한데, 어떻게 전 인류의 죄를 그분의 피로 다 씻으실 수 있을까요? 신약 특히 바울 서신에 나오는 ‘속량(贖良)하다’ 혹은 ‘구속(救贖)하다’ 는 말은 헬라어 ‘엑사고라조(시장에서 값을 치루고 노예를 사다)’ 또는 ‘루트로오마이(값을 치루고 노예를 구출하여 풀어주다)’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단어의 연원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안전히 구원받았을 때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13)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서 ‘구속’은 히브리어 ‘갈’을 번역한 것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마치 노예살이로 고난을 당하는 친족을 구원하여 풀어준 ‘고엘’ 즉 ‘친족 구속자’에 비유된 것입니다. 고대의 헬라어 번역성경은 이를 ‘루트로오마이’라는 헬라어로 표현하였고,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적용하였습니다. 즉, 주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셨고, 왕이자 상속자로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피값을 하나님께 드리고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길의 소유권은 주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경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 천국의 소유자이신 주님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굳게 맹세하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온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새언약(계약)’ 때문에 형벌을 받지 않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를 피로 씻는다는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하여질 책임이 있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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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룰로라는 전도자가 하이티의 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예수님을 아니?” “그게 미국에서 새로 나온 음료수인가요? 난 코크밖엔 물라요.”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선전하는 사람들보다 코카콜라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더 효과적인 선전을 한 셈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예수’라는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갖지 못한 이로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것은 그들의 일이지만,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가 소개하는 분은 한 번 마신 사람이 다시는 목마름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는 생명의 물을 가진 분이십니다. AD28년 5월 경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남서쪽으로 약 800미터 지점에 이스라엘 조상 야곱이 4,000년 전에 팠다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도 존재하는데 깊이가 30미터나 하고 가장 밑바닥에서는 샘물이 흘러가며 그 중 일부가 우물에 고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행로에 피곤하셔서 이 우물 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저녁 6시 경 마실 물을 긷기 위해 혼자 이 우물로 왔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남편을 5섯명이나 두었으나 전부 사별하거나 헤어졌고, 지금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사랑하거나 돌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독한 이 여인은 우연히, 아니 하나님이 정한 그 때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직접 그 여인을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알고보니 이 여인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자신이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그녀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얻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도 그녀가 지고 있는 세상의 불행과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녀는 매일 우물가로 물을 길러 와야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이분을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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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어느 목사님이 아침에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드리고 나오니  어린 아들이 묻기를 “아빠 무엇하셨어요?” 하였습니다. “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지” “아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안 이를께. 내가 몰래 보니 하나님은 안 보이고 아빠 혼자 중얼거리고 나왔지?”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아들에게 설명하기를 “너 생각 보았니?” “아니요” “그러나 생각이 있지” “네” “하나님도 생각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어느 정도 이해를 하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어요?”라는 것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너 만화경의 상(像)은 어떻게 생겼느냐?”라고 물으면서 대화를 시작하라고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화경의 상은 계속 바뀌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의 언어와 생각으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은 사랑, 모든 것을 사르는 불, 사자, 바위, 전사(戰士), 태초부터 계신 이 등 많은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습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분이 아니라 열렬히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일 뿐, 우리가 이러리라고 상상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습과 형체가 없으며, 보여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삶 그리고 행동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이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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