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2021/09/27-10/1)

시편48편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시편46편, 47편, 48편은 모두 구원받은 후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46편은 위협이 제거되었다는 것에, 47편은 복종된 이방민족들도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고 48편은 심히 위태로웠던 시온 성(=예루살렘 성)의 안전한 보존에 각각 초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12, 13). 본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왕 (1–3)
        B      그 위대한 왕의 능력과 구원( 4–11)
    A′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 (12–14)
이 시의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유대 왕 히스기야 시대(BC 700)의 앗시리아 침공과 하룻 밤 사이에 전멸된 앗시리아 군대를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수십만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으나,  화살 하나 쏘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단 한 명의 천사에게  전멸 당하여 퇴각하였습니다. 그때 시온 성은 돌 하나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었고(11-13), 주님의 명성은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10). 그러나 이 시온 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표상일 뿐입니다(히12:22). 왜냐하면 시온 성은 유대 백성의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지 2천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과거 시온 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는 진정한 시온 성에 이미 들어 간 우리들을 ‘죽을 때까지”는 물론 영원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시편49편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사망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우리의 인도자로 신뢰할 수 있는가의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본 시편 15절은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 성도들은 죽음 이후의 소망이 없었다고 주장되나(근거: 시편6:5 등), 이런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특별한 경험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에 죽어간다고 – 올바른 생각이건 아니건 간에 – 생각한 사람의 말입니다. 본 시편은 분명하게 사망의 두 측면을 말합니다: 소망 없는 죽음(13,14)과 소망으로 가득찬 죽음(15). 존귀에 처하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죽거나(12,20), 아니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아 소망 가운데 죽거나(15,20) 양자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음(스올)은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 시편 1-4절에서 시편 기자가 풀어보라고 던진 우주의 수수께끼의 답이며, 요한복음5장28-29절에서 상론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 중해서 그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6-8). 더구나 부를 자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부에 취하여 속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9-11). 성도 여러분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도착되어진 것들에 만족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신 아버지께 항상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시편49:12,13, 새번역).

잠언14:32절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새번역)

본구절은 15절에서 시작된 단락의 결론입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사람과 반 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 간에는 전혀 다른 운명이 찾아오며, 이는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공동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거나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웃을 모해하거나, 까닭 없이 다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29-31). 만약 이를 위배하여 악을 행하면 이웃을 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결국 그 사람은 넘어져 파멸됩니다. 왜냐하면 유리그릇이 단단히 고정된 선반 위에 놓여졌을 때는 안전하였지만,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진다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는 평강도 피난처도 없습니다. 이 반면, 의인은 죽음에 이르러도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 피난처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주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그는 죽으면 에덴 동산(낙원의 상징)에 간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전형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범죄자와 같이 처형을 받는 수모와 고난을 겪었지만, 당신의 영혼을 피난처이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는 것은 물론, 함께 못박힌 한 강도에게 그가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악이나 선에 대한 보상 모두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이를 심판하실 분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입니다 (행17:31). “바른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 (잠14:2,새번역).

잠언14:33절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마음에는 간직되지만, 심지어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도 알려진다”(쉬운성경)

33절 후단의 번역은 여러 가지이나 쉬운성경이 문맥과 잘 어울려서 그것을 채택하였습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덕질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상황과 그 결과를 꿰뚫어 보고 통찰한 바를 수행합니다. 지혜는 내적 자질로서 마음에 머무릅니다. ‘머물고 – 누아’는 최종적 승리, 구원의 색조를 띠면서 특정 장소에 평화롭게 정착한 삶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지혜롭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마음으로 결말을 보고 시작하기에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성문광장에 있는 수 많은 바보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표현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지만, 아무런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추구하기에 아름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종종 지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간직된다”는 것은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 정착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보들은 거만하며 고집스럽기 때문에 지혜를 듣고 보지만 그것을 간직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지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교훈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고 그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지혜의 정수인 복음에서도 참되어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한 자들로 정의되는 것입니다.“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         
잠언14:34절
“정의는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민족을 욕되게 한다”(새번역)

이 잠언은 지혜(33절)를 윤리와 동일시 하고 개인에서 국가차원으로 높여 적용합니다. 또한 교차대구(chiastic)라는 구조를 사용하여, 지혜를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국가라도 하나님의 도덕 기준에 맞게 살아가야만 하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함으로 이웃 국가나, 공동체 자체를 해롭게 하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고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요사이 중국이 행하는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인당 소득 1만달러와 국가 GDP가 미국의 70%에 이르게 되자, 교만하여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중국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잠언의 말대로입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중국 민족 자체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길은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참된 것입니다. 실로 국가 흥망성쇠의 궁극적 요인은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힘이 아니라 그 민족의 경건과 윤리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역사를 잘 보면 죄된 민족은 조약을 깨뜨리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속임수를 베풀고, 약자를 억압하는 깡패와 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사법적 정의를 파괴하여 범죄자와 게으름뱅이들이 보답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은 과중한 세금부담을 지고 두려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교육에 있지만, 그 이전에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나 주가 선고한다. 가사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암1:6)

매일묵상(2021/09/13-09/17)

시편46편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4)

이 시의 주제는 피난처와 힘이 되신 주님입니다, 루터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는 여성 합창단(알라못)을 위한 곡으로, 배경은 앗수르 산헤립 왕의 침공과 같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연 재해라는 환난에서  도움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1-3). 이어 전쟁의 환난에서 강한 성(城)과 같은 피난처요 능력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4-7). 끝으로,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얻었지만, 그 승리는 앞으로 도래할 완전한 평화의 맛보기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완전한 평화가 올 것을 믿으나, 그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8-11).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제국 때문에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 밤에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킵니다(왕하19:35). 그러므로  4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절은 파도가 얼마나 크게 일렁이며, 물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한 시내’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강한 민족들이 으르렁거려 왕국이 흔들리는 엄청난 전쟁의 위협도 주님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되며(6), 그런 재앙 역시 목적이 있습니다(7). 그 목적은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지혜를 우리로 깨닫고 기쁨으로 그분 안에서 내적인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심판을 통해 오는데, 그 시기는 ‘새벽, 동틀녘’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5). 그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46:5)

시편47편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5)

이 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바라보고 벅찬 감격과 환호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노래를 넘어 예언입니다. 실로 본 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완성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1) 찬양의 촉구 : 온 땅의 큰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1-2절) (2) 찬양의 내용 : 열국을 복종시키사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심(3-4절). (3) 찬양의 촉구 :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5-7절). (4) 찬양의 내용 : 보좌에 앉으사 뭇 나라를 다스리실 것임(8-9절). 유대인들은 본 시를 나팔절에 낭송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하곤 하였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에 낭송하여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왕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는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인 승리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불순종이라는 이 영적 문제 때문에 모든 불행, 사망, 썪음, 자연재해, 전쟁, 미움 등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순종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5절은 바로 이것을 노래합니다. 보좌에 오르신 주님은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불순종의 인간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날 재림하여셔서 심판을 행하시고, 물리적으로도 온 우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잠언14:29절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새번역)

본 잠언은 매사에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도덕질서를 긍정하며, 후자는 어리석게도 도덕적 무례함(오만)을 드러내놓고 범하기 때문입니다. 원어에 ‘참을성 있다’는 단어는 ‘얼굴의 긴장을 풀다’는 의미로 ‘인내의 표정’을 말합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얼굴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행동합니다. 물론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는 잠잠히 주님을 신뢰하지, 충동적 반작용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하나님의 행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반역을 행하였지만, 인내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고, 범죄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요나4:2). 이 반면 ‘성미가 급하다’는 말은 사회적 불의를 보고 너무나도 빠르게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죄를 짓게된다는 의미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의 원어는 ‘들어 올린다’로 ‘가장 커다랗게 어리석음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도덕적 오만에서 나옵니다(5:23). 그는 어리석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먹이가 됩니다(14:17). 그 이유는 주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급하게 그리고 불경건하게 복수를 꾀하며 그 결과 자신도 해를 받습니다. 주님은 공정한 재판장이십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의 문제를 듣자 충동적으로 보복에 나섰고, 어리석게도 모든 세겜 사람을 학살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6; 39:5-7).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14:30절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새번역)

29절은 참을성 있는 사람과 조급해 하는 사람의 성품을 대조하여 누가 명철하고 어리석은지를 보여주지만, 30절에서 이런 성품은 단지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판단을 넘어 생명과 죽음의 문제까지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다만 29절은 외적인 신체를 –‘긴장이 없는 얼굴 (= 인내)’과 ‘가쁜 숨’(=조급함)’, 30절은 속사람의 모습 – ‘평안한 마음’과 ‘뼈의 썩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평온함은 제자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조급해 하는 것은 그를 죽음에 몰아 넣을 것입니다. 특히 질투는 뼈까지 썩게 만들어 결국 파멸과 사망으로 악화되기 마련입니다. 본 잠언의 가르침대로 질투나 분개심은 몸으로 치면 뼈암과 같아서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모든 염려, 적개심과 원수 갚는 것을 심판자이신 주님 손에 맡기고 선을 행하라는 명령입니다(롬12:19-20). 그리고 다윗 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면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시편39편). 이런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최초의 살인은 질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투는 동생 아벨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 자신의 제물은 거절하셨다는 단순한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이때 가인은 회개하면 되었지만, 질투는 그를 삼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녀를 양육시 실력양성 뿐만 아니라, 조용히 빈 곳을 찾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균형잡힌 지혜가 필요합니다.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잠언14:29, 새번역)

잠언14:31절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새번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사회 윤리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질투로 뜨거워진 자(30절)가, 이제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궁핍한 사람을 억압하거나 비방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란 고대의 일용 근로자로서 밭이나 기타 생계 수단이 없어 타인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궁핍한 자들을 억압하고 제대로 품삯을 주지 않으면, 정말 그들을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명예롭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존재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물론 그 이웃들은 감동하고, 은연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인애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그런 사람을 본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목격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갈 사회적 명성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가 벌받지 않을 수 없고, 역으로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자가 상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늦어도 마지막 날 모든 정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궁핍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가난한 자가 다른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비방하는 경우가 있음을 언급합니다(28:3) “지혜는 명철한 사람의 마음에 머물고, 미련한 사람 마음에는 알려지지 않는다.”(잠14:33,새번역).

매일묵상(2021/09/6-10)

2021/9/6
시편44편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롬8:33절에서 인용)

이 시는 고라 자손의 교훈시이며, 지휘자의 지도로 연주된 민족적 탄원시입니다. 주제는 급박한 위기에서 국가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의 배경으로 앗시리아 산헤립의 재차 침입으로 멸망의 위기에 놓인 유대 히스기야 왕 때로 추정됩니다(BC 701년).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A1 (1–3) 과거의 하나님
                 B1 (4–8) 증거- 진실한 믿음
                         C (9–16) 탄식- 비탄스러운 현재
                 B2 (17–22) 증거- 올바른 행동
           A2 (23–26) 미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먼저 과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확인한 뒤(1-3), 이를 근거로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내립니다(4-8).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민족은 멸망 직전에 있음을 탄식합니다(9-16). 그렇다고 유대민족이 불신앙 가운데 행하지는 않았습니다(17-22). 시인은 신속한 구원을 탄원합니다(23-26). 하나님의 길은 신비스럽습니다. 인생에 닥치는 고난은 종종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과거에 하나님 자신이 확립한 방법과 모순된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는 하나님께 달려가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히스기야는 이사야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응답으로 주의 천사가 내려와 산헤립의 군사는 밤사이에 18만 5천명이 죽었습니다. 앗시리아는 당연히 퇴각하였고 유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2021/9/7
시편 45편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4)

이 시는 제왕시로서 왕의 결혼식 축가이지만,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신자)의 언약적 삶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 삶의 질서는 하나님만이 왕이며, 지상에 있는 다윗 왕과 그 후손은 단지 그분의 뜻을 집행하는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하나님이 임명한 지상의 통치자에게 바라는 그분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4절이 대표적). 먼저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A 도입부(1)
             B 왕에게 드리는 헌사(2-5)
                   C 신랑의 영광(6-9)
             B1 신부에게 드리는 헌사(10-15)
 A1 결론(16-17)

히브리서(1:8)는 이 시(특히 6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표상하는 진정한 실체로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크리스마스는 위대한 용사요 위대한 왕과 진정한 신랑의 도착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시기에 그분의 피로 씻어 하나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고 계십니다(시45:16; 요1:12,13). 그러므로 신약은 결혼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결합임을 가르쳐줍니다(엡5:31-32). 이렇게 시편은 역사상 이스라엘 왕의 결혼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나,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귀착하는 다층적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19:7)


2021/9/8
잠언 14:26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안전한 요새가 있으니 이것이 그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은택을 보도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존경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온 천지를 창조하신 만유의 주님으로서 화와 복의 궁극적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주님의 보호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런데 후단은 더 나아가, 주께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이 자녀들에게까지 미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어떤 것도 혹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물론 그의 자녀들에게도 만유보다 크신 주님이 그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란 단어는 ‘자연, 제도, 혹은 사회에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피난처에 대한 언급은 시편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특히 시편25편). 또한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와 ‘그의 자녀’들을 ‘안전한 요새’ 및 ‘피난처’와 관련하여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의 자녀가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살 때 그들에게 안전한 요새가 있으며, 그들의 부모는 거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본 잠언의 취지는 그대로 신약의 구원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지진과 기적을 경험하고 두려워 하여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할 때 사도 바울께서 그 구원이 가족까지 미침을 말한 것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2021/9/9
잠언14:27절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라’는 주제는 26절에 이어 계속됩니다. 특히 이 잠언은 13:14절,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과 비교하면,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결국 ‘지혜자의 가르침’이나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나 ‘주님의 계명’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의 샘….. 죽음의 그물’이라는 비유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계명과 지혜자의 가르침을 숙고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권면을 듣고 행하면 풍성한 삶(27a)을 누리고, 그들과 다른 이들을 죽음에서 건지는 길(27b)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삼촌 부부를 따라 런던에 있는 햄프톤 법원의 유명한 미로에 구경을 갔다가 도저히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삼촌은 근처의 벨을 눌러 안내원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곧 안내원이 나타나서 “길을 잃었습니까? 나를 따라오십시요!”하고는, 앞장 서서 나갔습니다. 그를 따른 일행은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 미로보다도 너무나 복잡하고 곳곳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 가면, 다시 말하면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모든 죽음의 함정을 피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생명의 샘을 마실 것입니다.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2021/9/10
잠언14:28절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적은 것은 통치자의 몰락이다.”(새번역)

모든 사람 위에서 통치하는 왕은 특히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는 왕국의 제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의 판단은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되어 신하나 백성의 지지는 줄어들고, 결국 사회적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 시대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백성은 몰래 그 나라를 떠나 좀 더 나은 국가를 찾아 갔고, 그 나라의 국력은 쇠퇴하여 몰락하였습니다. 여기서 ‘왕’이란 리더의 한 모형입니다. 사실 이 잠언은 제자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신뢰받는 지도자로 우뚝서야지, 백성이 떠나는 종류의 리더가 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유능한 왕은 믿음직하면서도 인자하며(20:28), 정의롭고(16:10), 공정하고(16:12), 참되고(16:13), 마음이 청결하고 은혜로우며(22:11), 분별력이 있고(25:2),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지혜(25:3), 악인들을 심판하고(20:8), 술에 취하지 않는 건전한 마음(31:4) 같은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왕은 당당하게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지만(30:31), 르호보암이 배운 것 같이 백성의 지지를 잃어버리면 좌초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 셀 수 없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장면은 분명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계7:9,10). 그러나 본 잠언은 주님의 면전에서는 사람의 숫자는 가치가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균형을 이뤄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6)

매일묵상(2021/8/30 – 9/3)

2021/8/30
시편42편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절)

시편 제2권은 총 31편(42-72편)의 시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성전 찬양대인 고라 자손들(42-49), 성가대장 아삽, 다윗, 솔로몬, 기타 무명의 시인들입니다. 먼저 42편과 43편을 보면, 이 두 시는 사실상 잘 짜여진 하나의 시입니다. 시인은 팔레스틴 북단으로 사로잡혀 갔으며(42:6), 포로에서 풀려 하나님의 전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성가대원입니다. 그는 이런 열망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소망 속에 탄원의 기도로 표현합니다. 시의 구성입니다:
           42:1-5 잃어버린 과거/ 6-11 고난 많은 현재/ 43:1-5 기대되는 미래
시인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과 같이 큰 시련을 당해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42:1-2), 응답은 신속히 오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며 조롱하였고, 시인은 매우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격려하면서,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11). 신자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신자는 영원을 위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늘 주님께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고난 속에 있으면 흔들리기 쉽습니다. 본 시편기자는 이런 두 측면을 깊이 체험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신자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과부와 재판장 비유에서 주님은 신속한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난에 처할 때 우리 마음은 이 약속에 닻을 내려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2021/8/31
시편43편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비록 고난의 폭풍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점점 커지고 있는 모습이 42편 내내 나타났습니다. 43편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정도까지 시편기자는 낙담하였습니다(2,5).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기도로 대체됩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1)라고 호소함으로 좀더 현실적인 간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밀어닥친 어두움과 불안정한 삶은 긍정적인 요청, 즉 빛과 진리(예, 하나님의 신실하심)를 간구함으로 쫓겨나간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3). 하나님의 빛과 진리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곳으로부터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십사 하는 간접적인 호소가 3절에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주어진다면, 시인은 비록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팔레스틴 북쪽 극단에 포로로 있지만, 주님의 거룩한 산과 제단의 그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3,4). 그리고 이미 42:5, 11에 등장하고 세 번째 43:5에서 나타나는 후렴은 시편기자가 가지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국에 있건 포로로 잡혔건 간에, 그는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움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 때문입니다(5). 하나님은 그의 ‘구원자’라는 믿음 때문에 외적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시편기자는 승리를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드리는 밤의 노래는 이런 소망에서 나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43:5,새번역).


2021/9/1
잠언14:23절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열심히 일한 경우와 수다스럽기만 하는 경우의 결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선을 계획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흘린 땀 때문에 비용을 제하고도 이득이 남는 자들입니다. 이어 대조적으로 말만 많고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놀랍게도 삶이 피폐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득’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몰타르’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입술의 말들’로서, 입술만 수고하여 나오는 ‘말(word)’이란 의미입니다. 확실히 몇몇 잠언은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수다스러움을 책망하고 있으나,  이 반면 많은 구절에서 ‘말(word)’은 힘이 있다고 교훈하고 있기 때문에(예, 14:25), 어느 잠언을 적용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렇게 잠언의 가르침을 선택하여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하며, 선택의 기준은 주님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지 여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수고는 입술만 움직여서 나오는 빈 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썩어질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유복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난해질 것이며, 마지막 날 주님과 결산시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다루는 법을 배워가야만 합니다. 이 과정은 믿음의 삶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2021/9/2
잠언14: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18절에서 언급된 면류관은 본절에서 다시 등장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행위가 반영된 지혜로운 처신의 결과를 배웁니다. 본절은 20절에서 시작된 부와 빈곤의 주제를 계속 다루면서, 23절에서 근면성실하게 일하여 얻은 이익(재물)을 면류관이라고까지 높여줍니다. 이렇게 양 구절을 함께 보면, 게으른 수다장이는 미련한 자들을, 근면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라 함은 하나님이 보여주는 호의의 표지입니다(4:9;12:4). 지혜로운 자에게 하나님은 재물을 주심으로 그들이 중요한 사회적 신분, 품위, 권한을 갖게 하는 한편,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십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은 부를 신뢰하지 말아야 하고(10:15; 11:28), 악한 행동에 의해서도 재물은 획득될 수 있지만,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물을 주심으로 보답하심 역시 사실입니다(3:16; 22:4).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친 해석으로 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이란 도덕적 진리에 둔감한 사람들이 가지는 도덕적 오만함으로 이것은 정말 다루기 힘듭니다. 그들이 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타인의 마음과 삶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물론, 부메랑과 같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불명예를 소유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여 10지파를 잃어버리고 겨우 유다지파 하나만을 소유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잠언14:18)


2021/9/3
잠언 14:25절
“증인이 진실을 말하면 남의 생명을 건지지만, 증인이 위증을 하면 배신자가 된다”(새번역)

14:25-32절은 마지막 단락으로, 생명 혹은 사망의 문제를 다룹니다. 25절은 그 첫번 째로 법정에 선 정직한 증인과 거짓 증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본절과 5절은 비슷하지만, 본절은 증인의 성품 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실한 증인은 용감하게 양심을 따라 말하여 속이지 않지만, 위증자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무죄한 자가 벌받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율법은 두 명 혹은 세 명의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비로서 유죄를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5).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위증 사례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넘기기를 거부하자 왕 아합은 몸져 누웠습니다. 이를 본 왕비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들에게 왕명으로 거짓 증인을 둘을 세워 나봇을 처지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로들은 그대로 행하여 나봇의 일가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왕상21장). 그 심판은 약 20년 뒤 군대장관 예후의 반란으로 아합의 손자 때에 집행되었습니다(왕하9-10장). 거짓이 증인과 결부되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데, 하물며 거짓 예언과 가르침은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사도들은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현재 대한민국에도 많은 거짓 예언자, 거짓 선생들이 나와 있습니다. 마땅히 분별이라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일4:1,새번역)

매일묵상(2021/08/23-27)

2021/08/23
시편41편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1절, 새번역)

이 시는 죄, 질병, 적의, 소외, 은혜의 주제를 담고 있어, 시편38-40편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큰 질병 중에 당한 악의와 배반은 왕 다윗에게 고뇌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고치시는 주님은, 죄를 고백하는 다윗을 고쳐주셨고 원수들에게 왕으로서 정의를 행하도록 은혜 내려주셨습니다(10). 이는 다윗이 어느 상황에 처해서나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12). 본시의 구조입니다.
 1–3 (A1)원리적인 주님의 은총/ 4 (B1) 범죄시 추구되야 할 은혜 / 5–9 (C)미움, 거짓, 수군거림, 배반 / 10 (B2)원수와 관련된 은혜/ 11–12 (A2) 경험된 주님의 은총

한편, 1절의 단어 ‘복-에쉐르’은  시편1:1절에도 등장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 반면 41: 1절에서 복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돌보는 사람으로서,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완성됩니다. 이렇게 시편의 첫번째 책 총 41편의 시들은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복이 우리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2021/08/24
시편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 구절에서 ‘가까운 친구’의 히브리어 원어는 “샬롬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배신자는 친구는 물론 심지어 형제나,  자녀나, 부모일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도 평범한 친구들이었으나, 자신이 조그만한 지위와 권력 그리고 돈이 생기자 그만 목이 뻣뻣하게 나오는 사람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외가 없었습니다. 마음에는 내심 몹씨 섭섭하고 불쾌하였지만, 만약의 경우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생각에 두려움도 느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기에,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루시퍼를 천사장 중 하나로 창조하셨지만, 그는 반역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믿었던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년에 심한 내란을 겪었고, 헷 사람 우리아는 믿었던 왕 다윗으로 인하여 가정이 빼앗겼고, 믿었던 상관 요압은 왕 다윗의 지시를 우선시 하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이 모든 것 중 백미는 가룟 유다가 은 30량에 주님을 팔아넘긴 사건으로 주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오늘 본문을 인용하심으로 경고하셨습니다(요13:18). 그러나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가룟 유다를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요6:70,71). 즉, 배신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철회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어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2021/08/25
잠언 14:20절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악인이 선인(의인) 앞에 엎드린다’는 19절의 가르침에 악인이라도 잠시 동안은 부자가 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의 본지는 가난한 자가 당하는 사회적 관계의 빈곤을, 부자가 누리는 사회적 이득과 대조하면서, 인간 본성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물을 충분히 소유하나 도덕적으로는 빈곤한 부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하나 도덕적으로는 결코 결핍된 존재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가난’과 ‘부’ 말들은 극단적인 물질적 결핍과 유족함얼 뜻하지만, 전자는 역시 사회적 관계, 예를 들면 친구들 -에서도 빈약함을, 이 반면 후자는 가까운 친구들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더 슬픈 것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하는데, 이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의 어두운면을 드러 내면서, 이 잠언은 ‘가난과 부’ 모두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자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후자는 잘못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로서, 주님 안에서 보다는 인간들을 의지해서 삶과 존재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로써 20절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독특하고, 좀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여야 올바른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새번역)


2021/08/26
잠언 14:21절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새번역)

20절을 뒤이어 기록된 21절은 20절의 본지를 잘못 이해하여, 가난한 이웃과 거리를 두려는 부패한 마음을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실로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 죄는 거만의 죄요,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입니다. 이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따뜻하게 영접하여 친절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호의에는 불쌍함, 자비심 그리고 관대함 등의 요소가 작동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지 강요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호의를 가지고 혹은 은혜롭게 대하다’ 는 말은 가난한 자를 돕고, 배고푼 자를 먹이고, 패배와 죽음 등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잠언이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현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에 대한 기대 때문에, 겸손하면서도 무척 즐거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이런 행복한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잠언은 제자들에게 몰인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삼가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웃을 따뜻하고 품위 있게 대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겸손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2021/08/27
잠언 14:22절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새번역)

본절의  표제어 ‘선’ 과 ‘악’은19-22절의 단락을 끝맺음 하면서,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성품(21)에는 인자(kindness)와 진리(faithfulness)가 있음을 교훈합니다(출34:6). 더구나, 22절은 이웃을 경멸하는 자는 그 이웃에게 악을 꾀하는 자로, 호의를 베푸는 자는 선을 계획하는 자로 변화되어감을 지적합니다. 그런 죄인은 구원의 소망 없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선인은 도움을 요할 때 사람들, 특히 주님으로부터 인자(친절)하심을 경험합니다. 한편, ‘악을 계획하는 사람’이란 마치 능숙한 장인들과 같이 해악이라는 재료를 외견상 도덕행위와 결부하여 “경멸”이라는 악의 작품을 만드는 자들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길을 잘못 간다’는 의미는 악을 계획하는 자들이 길을 잃어 버려 방황하다가 죽음을 만나는 운명을,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만나는 축복을 묘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악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kindness)를 경험해도 오히려 죽음의 길로 가지만,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주님의 많은 친절과 인자를 경험 하였지만 돌이키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요셉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보디발, 간수, 관리 및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위해 선을 계획함으로, 그들로부터 인자와 진실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법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빌1:11,새번역).

매일묵상(2021/08/16-20)

2021/08/16
시편40편 – 내용과 구조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4절, 새번역)
다윗은 38,39편에서 죄와 질병과 원수들의 준동 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에 이르면 주님을 기다린 다윗의 승리의 외침이 울려퍼집니다. 이제 그 기다림은 끝이 났고(1-3), 그의 신뢰는 올바른 행동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4-5).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다짐하며(6-8) 많은 회중 앞에서 체험한 구원을 증언하기로 약속합니다(9-10).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님의 도우심(11-13), 원수들에 대한 심판(14-15), 주님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기도합니다(16). 왜냐하면 다윗 자신은 산적한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연약하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심판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또 한 번 기다리게 됩니다(17). 이런 다윗의 삶의 패턴은 그대로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본질은 기다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유의 주님을 의지하며  충성되게 사는 신자들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A1 열매 맺은 기다림(1-3)
                       B1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행동(4-5)
                              C 지극히 중요한 마음의 모습들(6-13) – 순종,선포,겸손
.B2 미래에 행하실 주님의 행동(14-16)
. A2 또 기다림(17)

한편, 히브리서는 6-9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내일 묵상해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편40:7; 히10:7).


2021/08/17
시편 40: 6-8절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절)


하나님이 베푸신 큰 은혜를 체험한 다윗의 귀에(5)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도 않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6)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제사 즉, 계시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예배는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러-‘내가 왔나이다’-, 자기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말씀드립니다. ‘두루마리 책’은 모세 율법을 뜻하며, 모세율법은 하나님을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조차 그분의 뜻을 행하는 신하에 불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분이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8) 외친 것입니다. 이는 중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헌신을 위한 맹세는 할 수 있지만, 이를 신실하게 실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실 분은 메시야이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근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5-10절에서 시편40:6-8절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들어오실 때 하신 말씀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희생 제사 의식이나 율법이 규정한 의 자체가 성취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인간 구원을 위한 새 언약과 새 제도를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히10:9)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2021/08/18
잠언14:17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잠언은 계속해서 어리석음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 두 종류의 바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성을 내어 타인을 해롭게 하거나(술 취해서 고성방가하는 사람), 그런 분노를 참고 은밀히 계획을 세워 타인을 해치는 사람입니다(암살자). 먼저,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주전자가 끓으면 옆으로 넘치게 되는 것과 같이, 훈련이 안된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머리가 분노로 뜨거워 졌을 때 그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고, 그 가운데 내린 결정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도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지혜 있는 말로 진정시켜야만 합니다(15:1, 29:8). 실상 지혜의 이상적인 모습은 분노 가운데서도 실수하지 않는 침착한 사람입니다. (잠16:32). 대조적으로 냉철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는 훈련되어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합니다. 그 결과 그는 통찰력 있게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합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혜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지만, 악인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잘못된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비밀리에 우회적으로 범죄를 행합니다. 이들은 모두 타인과 자신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며, 이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나 공동체에 의하여 버림받게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2021/08/19
잠언14: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이 잠언은 두 종류의 사람을 묘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은 히브리어 ‘페티’로서 15절에서는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믿는 ‘어수룩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반응하는 사람(simple-minded)입니다. 이런 사람은 속기 쉽기 때문에,  ‘어리석다(folly)’라는 불명예를 지울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의 히브리어는 ‘이벨렛’으로  17절에서 화를 잘내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도덕적으로 오만하여 다루기 힘든 사람이 행한 결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삼다’란 통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에서는 풍자적으로 쓰여서, 어리석은 사람의 행위는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슬기로운 사람에 속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혜자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지식들로 면류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계시된 도덕적 진리들을 마음에 새겨 참된 지식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인생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과 위험을 뚫고 나아가서 드디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존경을 받는 자들입니다. 캐나다에서 있던 일입니다. 선교사 출신의 한 사람이 검은 모래를 채취하여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서를 가지고 투자를 받았습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그런 외형에 속아 투자를 하였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신중하여 직접 검은 모래를 채취한다는 장소를 가서 보고 사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새번역).


2021/08/20
잠언14:19
“악인은 선한 사람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새번역)

18절에서 지식으로 면류관을 쓴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개념은 본 구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선한 사람을 마치 왕에게 비유하고, 악인을 그 밑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의 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 때문에 선한 사람(의인)과 연결되어 있고, 지혜의 가르침에 주목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악인과 불의한 사람들과 맺어집니다. 잠언 2:20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와 같이, 악인은 불의한 사람과 같고, 선한 사람은 의인과 같습니다. 본 잠언은 공동체를 섬기는 자가 높아져 다스리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종처럼 낮아져 그들 앞에 엎드린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침으로,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는 말은 의인이 심판석에 앉아 정의를 집행함으로써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죄인을 벌한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요셉을 노예로서 애굽에 팔아 넘긴 열 명의 형제가 20년 뒤 높아져 심판석에 앉은 애굽의 총리 요셉 앞에 와서 엎드린 사건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잠언의 이 교훈을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밝혀지는 그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2:10,11절은 잠언의 이 가르침이 완전히 성취되는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10,11새번역).  


매일묵상(2021/08/9-13)

2021/08/02
시편39편 – 총괄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절,새번역)

이 시는 하나님은 연약하고 덧없는 피조물인 사람을 부지런히 징계하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시편38편과 비슷합니다: (1)방관자들 앞에 침묵을 지키는 모습(38:12, 13; 39:2), (2) 죄를 징계하시는 주님의 행동(38:1–3; 39:9–11), (3) 오직 주님만이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소망(38:15, 21, 22; 39:7)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릅니다. 시편38편에서 질병은 죄의 문제를 드러냈고,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반면 시편39편에서 질병은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절실히 알게하는 동시에, 현생에서의 행복한 삶 또한 소중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인생무상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서, 불멸의 세계가 완전히 계시된 후라도 그런 개념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삶은 귀중한 것이며, 인생에서 누리는 기쁨과 사랑들은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매우 근심하였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켰을 때 “근심에 근심을 면했다”할 정도로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빌2:27). 다윗 또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님의 징계로 죽게 되었을 때, 결국 만나게 될 것을 알지만 아기가 죽지 않도록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삼하12:22-23). 지금은 자신의 남은 생애가 질병으로 단축될 수 있음을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12, 13).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모두 잘 간직하여 너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잠언3:21, 새번역).


2021/08/03
시편39편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11절)

이 시는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 항의 / 4-6절 이 덧없는 인생 / 7-11절 엄중한 징계/ 12,13절 작은 간구. 오늘은 4-11절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복잡하였지만, 그의 첫 기도는 인생의 본질을 깨닫도록 요청합니다(4). 그는 자신이 겪는 질병의 고통을 주님이 주시는 징벌로 받아 들이면서,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도 볼 수 있기 위해 기도드립니다(4-6). 특히 ‘헛되다’다로 번역된 ‘헤벨 hebel’은 ‘입김’ 내지 ‘수증기’로서, 3번이나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다윗이 배운 바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허사뿐이다’(5), ‘헛된 일로 소란하며’(6),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11절)(전도서의 주제임). 그런데 세 번째 단락(7-11)에 이르면 다윗은 욥을 괴롭힌 역설을 겪게 됩니다. 이들은 지상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들에게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너무나도 심한 처우를 하시는 것 같아 탄식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설들과 같이 이것도 발굴되지 않은 보화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원을 위해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롬8:11-24). 좀이 아름다운 옷을 먹는 것과 같이 인간이 잘못하여 교만할 때 그 영화를 치심으로,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하여 영원을 함께 살아가시려는 주님의 거룩한 뜻입니다(물론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미함). 이 주제는 우리가 씨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7절,새번역).


2021/08/04
잠언14:1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새번역)

이 잠언은 ‘레브 – 마음’라는 단어를 통해 13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현재 보이는 겉모습들은 기만적이고, 참된 실체는 결론에 가서 드러남을 말하지만, 본 구절은 그 결론을 따른 마지막 보응을 논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따르는 현재의 아픔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결국에는 주님께서 선을 행한 자를 상주시고, 악을 행한 자를 벌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겉모습이 어떻든, 행위와 운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길-way’이라는 비유로 예증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 잠언은 마음이 변하여 악을 행하는 비뚤어진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한 길을 선택한 후에, 신자는 인내하며 무조건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처음에는 사회나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고 살지만, 나중에는 그 길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전에 무슨 선한 행위를 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에 대하여는 완전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가 행한 선한 행위들 역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예레18:7-10). 이렇게 본 잠언은 비뚤어진(혹은 반역적인/왜곡된) 사람을 선한 사람과 대조합니다. 실로 악인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 완전한 벌을, 의인 역시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고백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롬다 하심을 받습니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6).


2021/08/05
잠언14:15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새번역)

본 잠언은 두 개의 기능을 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걷고(1-7) 보이는 대로 걷지말라(8-15)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또 하나는 지적-영적 성품을 대조하면서 교훈을 주는 단락(16-32)을 도입합니다. 이를 위해 ‘길’이라는 비유에 ‘걸음’이라는 비유를 더함으로 본 잠언은 제자를 잘못 이끌게 되는 어수룩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바보들의 일종으로 이들은 쉽게 속아넘어가지만, 신중한 사람은 드러난 겉모습을 믿지 않고 그 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자신의 걸음마다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가는 길이 참된 경건과 윤리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항상 점검하면서, 삶을 테스트 합니다. 물론 ‘걸음(step)’은 ‘길(way)’의 동의어로서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청년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듣도록 권면하는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부주의한 ‘어수룩한 사람’에 속하는지 혹은 주의깊게 행동하는 ‘슬기로운 사람’ 에게 속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 왜냐하면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어수룩한 사람은 자신의 생활방식에 주의를 기울지 않지만, 인간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 슬기로운 사람은 혹시나 자신이 가는 그 길이 거짓된 걸음은 아닐까 하면서 경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신뢰합니다(요나3:4;출4:1-3). 슬기로운 사람은 늘 이렇게 밝은 빛 가운데로 걷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3:21, 새번역).


2021/08/06
잠언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잠언은 젊은 청년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설득 합니다. 그 방법은 전자를 ‘지혜로운 자’, 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야르’로서 ‘경외, 염려, 사망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잠언 도처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주님을 두려워(경외) 한다’ 혹은 ‘계명을 두려워 한다’는 뜻을 전달하는데 사용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1:7). 그러므로 여기 지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악을 피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방자하여 악을 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믿고 조심할 줄을 모릅니다. ‘방자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르’이며, 그 뜻은 ‘분노하다’입니다. 즉 바보가 주님이나 그분을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여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보의 눈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이는 하늘의 CCTV를 못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잠언이 드러내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만만해 하지 않고 늘 조심하지만, 자만심에 찬 바보는 악에서 돌이키는 것을 싫어 한다(잠13:19)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늘 주님을 경외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감으로써 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2:12, 새번역)

매일묵상(2021/8/2 – 6)

2021/8/2
시편 38편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1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세 번째 참회시로서 죄 때문에 발생한 영육 간의 고통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시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절 내리막길/ 13-22절 오르막길. 시에서 언급된 고통은 다양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죄짐, 고약한 질병으로 인한 부서질 것 같은 육체적인 아픔, 친구들로부터의 소외, 그를 파멸시키려는 원수의 움직임 등이 더해짐으로 그의 고뇌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 두 절은 본 시의 주제와 놀라움을 요약하여 알려줍니다. 그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과 구원해 주실 분이 같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의 범죄 때문에, 주님은 분노하였고 진노하셨으며(1), 그분이 심판의 화살이 날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2). 그러나 그가 가까이 가서 도움과 구원을 호소할 대상 역시 같은 주님이셨습니다(22). 왜냐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주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가져올 결과들을 여실히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할 시가 지어진다면, 바로 이 시가 그렇습니다. 죄는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죄인에게 부담을 주어 무겁게 하며, 행복을 상처 투성이로 바꾸어 버립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빼앗아 갑니다(1-8). 더 나아가 죄 때문에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가며, 우리는 고독하고 슬퍼질 뿐만 아니라 원수는 기회를 잡아 준동하기 시작합니다(9-12). 죄를 지은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13,14). 그러나 죄는 기도의 문을 닫지도 못하고, 우리가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막지도 못합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38:22)


2021/8/3
시편38:1-12절 내리막길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4절, 새번역)

다윗은 죄의 짐을 지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주님은 죄 때문에 그의 대적이 되셨습니다 (1-3).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2)라는 표현대로 질병, 고통, 버림받음, 적대와 주님의 질책이 모두 다윗에게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결과 다윗의 육신은 심한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고, 몸도 마음도 힘이 없고(5-10) 친구도 없습니다(11). 원수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2). 특히 5-8절은 고통스러운 육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에 대한 벌로서 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몇몇 경우는 그렇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C.S, 루이스) 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시간은 곧 성찰의 시간입니다. 본 시편의 경우, 죄와 질병이 서로 관련되어 있고, 그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증상들이 번갈아 . 그런데 주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 때문에, 다윗이 곤경에 처하자,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원수들의 위협이 다가왔습니다. 11절은 이에 대한 생생한 필치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새번역). 환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긴 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손으로 꽉 붙들어 주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잔칫집에는 가지 않아도 초상집에는 꼭 가 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처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2021/8/4
시편 38:13-22절- 오르막길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앞 부분(1-12)은 개인적인 육체적 고통과 죄의 짐에 눌린 심적 고통에서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원수들에 의한 생명까지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말하였습니다. 본 단락에서 다윗은 절망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마음을 다지고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합니다(13-14). 이를 위해 적들의 외침에 귀를 닫고 마음을 오로지 구원하실 주님을 향해 돌립니다(15-16). 물론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태도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신뢰성 있는 자세(15),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허한 마음(18), 그리고 신속한 구원을 부르짖는 외침(22)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의 모든 고난 및 죄에 대한 용서를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명시적인 기도는 16절에 드디어 나타납니다: “내가 재난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새번역). 그리고 다윗은 절박하여 주님을 붙잡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질병과 죄짐에 눌려 곧 멸망당할 것과 같이 연약한 자신을 원수들이 비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다윗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17-20). 그의 기도를 듣고 구원하실 그 주님은 430년 전 애굽인들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도성인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죄는 물론 질병이나 원수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2021/8/5
잠언 14:12절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새번역).

본 구절은 “보이는 대로 살지말라”는 교훈을 말하는 단락(8-15절)의 중심 부분에 놓여져 있고,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앞 부분의 ‘바른-야살’은 ‘길’과 결합하여 올바른 행위로 판단되어 성공으로 가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잠언에서 윤리적인 행동은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성공으로 이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그의 길은 많은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판단하고 취한 그 행동들은 사실상 왜곡되었으며 죄된 것들이었습니다(2:13). 왜냐하면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의 대단원이 죽음이라면, 자신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길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안전한지 그리고 그 마지막의 운명이 어떤지는 항상 보여지는 것과 같지는 않습니다(마7:13,14). 우리는 ‘기만적인 길’은 명백히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길만큼이나 확실히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투명한 인식과 주님이 창조하신 현실 그 자체 사이에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집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인간 인식론, 즉 인간의 시각에 접근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라는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진리는 유한한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 바른 길을 계시하셔야만 하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3:7). 이 잠언은 또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6:25).


2021/8/6
잠언14:13
“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 슬플 때가 있다.”(새번역)

13절에서 잠언 기자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마음의 아픔을 위장하는 행태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감추고 있던 슬픔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임을 말하여 12절과 같이 피상적인 판단을 유보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부르짖는 아이의 울음으로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웃음은 마음의 고통으로 엷어지고(14:13a), 결국 슬픔이 기쁨을 뒤따라옵니다(13b절). 인간은 죽기 때문에 기쁨은 반드시 슬픔으로 귀결됩니다. 파티는 늘 끝나고, 사랑의 행동들은 그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27:1,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색조는 잠언의 주된 주제 즉, “의인을 위해 기다리는 것은 ‘기쁨, 생명 그리고 소망’이지만, 악인은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10:28)/ 24:19. 20).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 계속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구원과 참된 가정(true home)이 있음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3:1-12).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로 현재 경험하는 기쁨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성숙해져가면서, 지금 권면하는 잠언의 지혜가 완전히 빛을 내게되는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3,새번역).

매일묵상(2021/07/19 – 23)

2021/07/19
시편36편 – “한 분 하나님 그리고 두 가지 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10절, 새번역)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A (1절) 악인과 그의 철학
          B(2-4절) 악인의 특성
              C(5-8절) 주님의 성품
          B’(9-11절)주님을 아는 자들
      A’(12절) 악인의 운명

이 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이 두 종류의 사람과 두 종류의 운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쪽은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다른 쪽은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갈래길에서 각자의 선택을 함으로 자신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갈래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계시한 뜻을 거부하면 우리는 마음의 욕망을 따라 살게 되고, 결국 무가치한 인생으로 귀착됩니다. 이 반면, 계시를 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 광명, 공급하심 그리고 보호하심을 누릴 것입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리스도인이자 리투아니아 총영사인 스기하라 치우네(40살)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이미 게슈타포에게서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비자발급을 중단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고민 끝에 불복종합니다. 그리고 28일 동안 쉬지않고 비자를 발급하여 6천명의 생명을 구하고, 토교로 소환된 직후 사직 당합니다. 그는 일생 전구를 팔면서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2021/07/20
시편 37편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11절)

이 시는 다윗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시로서, 신자의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하며, 어조나 문체는 잠언에 유사하고,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주님의 보호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고뇌에 찬 긴장과 함께 시작하는데,  그 긴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의인’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며 신앙의 삶에서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한편, 이 시의 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작성되었고, 네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절  악인의 번영 – 온유해라
   12-20절 악인의 적대감 – 주님의 돌보심을 믿어라
   21-31절 악인의 거짓된 행동 – 주님의 심판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32-40절 악인의 운명 –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다.
이 시에 맞는 악인과 의인은 단연 왕 사울과 신하 다윗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종의 갈래길에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하고(사무엘상 15장의 아말렉과의 전투 사건),  골리앗을 죽인 능력있는 신하 다윗을 까닭없이 질투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이 반면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받는 절박한 순간에도 순종의 갈래길에서 의를 행합니다. 결국 사울과 그 가문은 멸망 당하고, 주님은 의로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사 왕으로 삼습니다. 온유하게 주님의 뜻을 따른 다윗이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팔복 중 3번 째 말씀(마5:5)을 체험하고, 본 시로 아주 훌륭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5, 새번역).


2021/07/21
잠언14:8-15절 : 구조와 메시지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8절, 새번역)

잠언14장 8-15절은 ‘속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핵심된 교훈은 “보이는대로 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솔로몬은 이 경고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11절을 중심에 두고 교차대구의 구조를 사용합니다. 즉, 8절과 15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9절과 14절은 “죄에 대한 보상”, 10절과 13절은 “마음의 비밀”, 그리고 중심에 놓인 11절,12절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번영”을 말하며 “죽음에 이르는 속이는 길”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쌍을 이루는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절은 ‘미련한 사람이 자기를 속인다’라고 하나,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15절이 ‘미련한 자는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순진성을 지적함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3절은 어떤 사람도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행복의 외양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9절은 악인은 속건제가 요구하는 보상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지만, 14절에서는 주님의 응보가 확실함을 선언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즉각적으로 벌이 내리지 않기에 악인은 속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회초리는 확실하기에, 악인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이루는 11절, 12절은 악인의 눈에 확 뜨이는 성공은 짧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번영은 항구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망의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주는 교훈’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잠언14: 15절, 새번역)


2021/07/22
잠언14: 9절 :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9절, 새번역)

이 구절은 ‘어리석음/바보”라는 주제어를 통해 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보들은 속고 속이면서 이득을 취하기에(8절), 관계회복을 의미하는 속죄제사를 경멸합니다(9절). “속죄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샴’으로 ‘속건제사’를 의미합니다. “속죄제사”와 달리 “속건제사”는 거짓맹세, 도둑질, 그리고 속여 재산상 이득을 보는 경우를 포함하며, 이 경우 원물에 20%를 더하여 배상하고, 제물을 드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함 받습니다. 본 잠언은 손해를 가하고도 배상하기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물론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받아들이고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실로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들 사이에서 샬롬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죄의식을 불러 일으킬 상황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에 합당한 배상을 행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을 행하고도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우습게 여김으로, 하나님과 이웃들 사이에서 화평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사랑 가운데 화합을 이루려고 하기에 그 태도는 어리석은 자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 회복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이 지향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2021/07/23
잠언14: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만 알고, 마음의 기쁨도 남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새번역)
마음의 ‘고통과 기쁨’이란 인간의 감정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타인은 모르고 오직 당해 사건의 당사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외적 환경이 있지만, 만약 그런 외양만 감안한다면,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서적, 지성적, 종교적 그리고 도적적 움직임은 너무나 복합적이고도 내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경험할 수도, 타인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고, 두 명의 부인을 둔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매우 괴로웠으며, 또 한 명의 부인은 이런 한나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남편은 한나의 마음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주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잠언은 각 개인이 가지는 존엄성과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타인의 심정도 헤아릴 것입니다. 이 반면 만약 우리가 타인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한나와 같이 하늘에 계신 자비하신 대제사장인 우리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히4:15-16). 이와 동시에 우리는 타인 특히 배우자를 배려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지도를 만들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매일묵상(2021/07/12 – 16)

2021/07/12
시편34편 – 다윗의 교훈(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22절, 새번역).

이 시의 두 번째 단락(11-22절)은 3가지 비결을 말합니다: (1) 선한 삶의 비결(11-14절)은 주님을 경외하는데 있으며, 그 방법은 우리의 혀를 지키고(13), ‘악을 버리겠다’는 자기 부정의 도덕적 목표와 ‘선을 행하겠다’는 긍정적인 도덕적 목표를 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14). (2) 문제에 직면하는 비결(15-18절)은, 문제의 시작과 함께 기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의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당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얻기 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는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15). (3)구원의 비결(19-22절)은 신자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인)은 하나님과 친족 구속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산다고 고통 없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19), 보호하시고(20), 우리 편에 서시고(21), 우리에게 대가가 요구되는 것은 전부 지불하시고(22), 자신을 안전한 피난처로 제공하십니다(22). 이런 관계와 경험은 다윗의 주님되신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신약에 와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신자의 친족구속자(고엘)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2021/07/13
시편35편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분발하여 일어나셔서, 재판을 여시고 시비를 가려 주십시오.”(23절, 새번역)

본 시는 체계적인 시라기 보다, 적의와 고난이 끝이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감정이 끓어 올라 지은 시입니다. 배경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편집광적으로 증오하던 그 오랜 기간이 적당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사울에게 알랑거리며, 부당하게 다윗의 고난을 악화시켰습니다. 34편처럼, 이런 상황의 유일한 해법은 기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응답을 주신 34편에서의 고백과 달리(34:6), 현재 당하는 고난은 끈질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필요를 주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 시는 3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뜻 밖의 위험에 처하여 드리는 기도(1-10절) (2) 부당하게 당하는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1-18절) (3) 악의가 가득한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9-28절). 각 단락은 반복하여 시편기자 자신을 위해 행동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상황을 당할 경우, 본 시편은 좋은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 주님 역시 “까닭 없이 나를 미워 하는 자들”에 관한 내용을(19절)을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밤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요15:25) 명백한 이유 없이 고난 당하는 자들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당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경건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에 힘쓰면 우리 신앙에 큰 유익으로 돌아오며, 우리는 사람들을 얻을 것입니다. 마치 여자가 해산하여 자녀를 얻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 새번역).


2021/0714
잠언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지혜는 거만한 자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만한 자도 지혜를 추구하지만, 발견하여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들이 찾지 못하는 지혜는 경건과 도덕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말합니다.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죽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섬기려는 도덕적 미덕이 결여 됨으로써, 정작 자신이 지혜롭다고 소리를 쳐도 그에게서 배울 것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명철(明哲-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 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습니다. 심지어 한 마디의 말을 들어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명철”로 번역된 원어는 ‘빈(discerning)’ 으로 단지 두뇌가 명석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신중하게 모든 것을 결정하고 민첩하게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명철한 자의 대명사는 솔로몬입니다.  약관의 나이가 안되어 왕 위에 오른 솔로몬은 왕국을 견고히 세웠으나, 통치자로서 부족함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마음에 소원이 있음을 아신 주님은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왕이 되었으나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고백한 솔로몬은 백성의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듣는 마음”을 구하였고,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17:6).


2021/07/15
잠언14:7
“미련한 사람의 앞을 떠나라. 네가 그의 말에서 지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젊은이들에게 바보들의 교훈을 멀리하라고 강력히 충고합니다. 이런 충고는 이미 언급한 13:27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는 교훈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바보가 아닙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는 매우 지혜롭다는 의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그 말과 행위 속에서 자신의 미련함을 스스로 표현합니다. 만약 우리가 미련한 자임을 보고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리석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미련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14장은 바보의 특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적절한 행동과 말로 가정이나 관계를 파괴하며(1절), 상황파악을 못해 파멸을 자초하고(3절), 스스로 어리석음 속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고(6, 18, 24절), 스스로 어리석음을 표현하고(7절), 스스로를 속이고(8절), 거만하여 경건함을 조롱하고(9절), 모든 말을 쉽사리 믿고(15절), 경솔하며(16절), 음모를 꾸미거나 툭 하면 화를 내어 일을 그릇치고(17, 29절), 결국에는 자승자박하게 됩니다(33절). 특히 바보 중의 바보는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거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거나(시14:1), 혹은 자신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바보들을 만나게 된다면 신속히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얻을 도덕적 영적지식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2021/07/16
잠언14:8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새번역)

이 구절은 자기 행위의 결과를 주목하는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대조함으로써, ‘속임’에 관한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행위와 운명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의 문제들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지금 잠언은 잘 배우고(6절) 좋은 교사를 선택하라는(7절) 훈계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통제하라는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의 주어는 댓구를 이루는데 반해 –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와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  술어들 – ‘자기의 길을 주의한다’와 ‘속인다’ – 사이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숨어 있는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한 댓구가 이루어지도록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의 길에 주의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과 남을 해치는 속임수를 피한다.” 즉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도덕적 지혜를 따라 발걸음을 선택함으로 자신과 타인의 확실한 삶을 보장하지만, 바보들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하여 타인의 희생을 꾀하다가, 뜻하지 않게 자신도 희생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외양적인 필요와 결과만 생각하지 않고, 그 이면을 통찰하고는 그 길이 과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심사숙고합니다. 경건과 도덕의 비법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진심으로 구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요7:18,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