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보다도 신앙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힘써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주님과 바른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경건한 삶” 혹은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인간들이 세상에서 경험하여 터득한 지혜를 배우고, 일을 할 때 오는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릎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22:16) 혹은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22:13)는 격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주인이 계십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22:12)라고 선언함으로써, 주님을 성공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눈밖에 나면 주님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부수어버리시곤 합니다(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하여도 현실적이어야만 합니다.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잠22:7). 당연히 부자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빚쟁이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너의 양 떼의 형편을 잘 알아 두며, 너의 가축 떼에게 정성을 기울여라. 재물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며, 왕관도 대대로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잠27:23-24) 라거나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잠12:12)과 같은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잠22:2)는 말을 마음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지혜롭게 돌볼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부와 빈곤의 문제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균형추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제대로 다룰 지혜의 원천은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잠21:30-31).2020. 7. 27 – 31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어린 알렉스가 부모와 같이 휴가에서 돌아오자, 그 아이는 “이게 우리집이야”라는 소리를 연발하며 현관문과 자기 베개와 여러 가지 물건에 입을 맞추며 돌아나녔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아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집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어린 알렉스가 행동한 것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고 있는 신자들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순례자이며 이방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사십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탔습니다. 그 배에는 아프리카로 코끼리 사냥을 갔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도 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자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지만, 선교사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처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대통령은 집에 돌아왔지만, 너는 아직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늘에 있는 우리 집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천만천사의 환영을 받는 것은 물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기 위해 알현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린 알렉스와 같이 우리의 진짜 집의 현관과 문턱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히12:22-24, 새번역)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오늘부터는 공산치하 루마니아에서 신앙 때문에 무려 15년 간이나 감옥에 갇혀 온갖 고난을 당하신 범브란트 목사님(1909-2001)의 책 “어린이 신학”을 중심으로 현실에서의 영성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어떤 신학보다도 어린아이들의 신학을 틀림없이 더 좋아하셨을 것이며, 실로 그것을 장려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18:3).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어떤 다른 면에서보다 신학 문제에 있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내 손자 알렉스가(여섯 살에 이미 성경을 꽤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이들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아이들(Children of Israel)만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해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뒤에 그냥 남아 있었단 말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이들(Children of God)만이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은 어른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될 거예요.”’ 어린 알렉스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진리에 가까운가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은 정확히 무엇이겠습니까? 성서에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11:6)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혼한 부모를 가진 어떤 어린아이가 이 구절을 읽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왜 우리 어린이들이 자기들을 인도하도록 맡기지 않지? 우리 같으면 절대로 술집이나 도박장이나 핵전쟁 같은 것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텐데. 우리가 인도자라면 때리는 일이나 이혼 같은 것은 없을텐데” 주님이 우리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우리가 어린 시절의 순진함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일 이 문제를 조금 더 논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131:1-2).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여기서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닥치는 각종 역경으로 사도는 35절에서 일곱 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헬라어 ‘휘페르니코멘’으로 그 뜻은 ‘정복자 이상이다 more than conquerors’이며, 현재형으로 사도의 확신과 경험을 집약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쓸 당시 이미 사도는 많은 위협과 전도 여행에 따른 위험 굶주림 파선 등을 당하는 가운데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야말로 넉넉하게 이겨가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의 비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는 짧은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두 번째 언급은 매우 중요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 상의 고난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입증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우리를 그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끊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도의 진술은 38, 39절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말씀은 ‘나는 확신했고, 지금도 계속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망의 위기나 생명의 재난, 선하든 악하든 우주의 모든 초인간적인 힘(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시간(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공간(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곧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명시되었고,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사도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확신을 따라 살고 죽을 수 있게 되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죄 죽임’과 ‘열망’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비결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 없이는 참된 삶이 없으며, 갈망이라는 훈련 없이도 참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몸의 행실을 죽이는 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 왜냐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기 때문이다”(롬8:13, 사역)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때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8:6, 사역)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을 억제하고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고 이른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한국기독교총연맹회(한기총) 대표회장으로 각종 기행을 낳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전광훈 목사에 대하여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정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 법률적인 쟁점이 있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법원이 전 목사의 자격을 거론한 대목입니다. 서울신문은 “한기총은 규정상 `성직자로서의 영성과 도덕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된 자´로 대표회장 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전 목사는 이 조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대표회장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교회법의 자격 조건을 사회 실정법이 재단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전 목사는 …. 배임수재와 기부금품법 위반, 불법시위 주도 등 10여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똑같이 정치 활동을 하였지만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았던 미국의 마르틴 루터킹 목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삶을 돌려야만 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며, 그 사랑의 길은 생명과 평안을 이루게 하는 길입니다. 당연히 육신의 죄 죽임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이 끊임없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야만 합니다.”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3-25).” 이 구절은 신자들이 받게 될 두 번째 영광은 ‘양자됨’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23절에서 ‘양자 養子’란 말은 이미 15절에서 사도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 완전히 나타나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될 때까지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아직 몸이나 인격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됨은 아직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19절)이라 했던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세상이 아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지 못하지만(요일3:1),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분명하게 천명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 불리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피조물도 그 영광을 우리와 함께 얻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 역시 이 영광스러운 미래의 유업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으며, 여러분은 무슨 근거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유업을 받을 확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그리고 만약 자녀들이라면 또한 상속자들입니다. 만약 우리 역시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하여 고난을 함께 받는다면 하나님의 상속자들,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들입니다.”(롬8:17, 사역). 17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필수적이라는 전제가 담겨있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은 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사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고난조차 미래의 영광과는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18절에서 단언하면서 25절까지 우리의 유업을 보증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들은 장래 우리에게 계시될 그 영광과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롬8:18, 사역). 현재의 고난들과 미래의 영광 이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조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미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들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사도 바울은 장엄하고도 우주적인 배경을 마음에 두고 본 단락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 곧 교회가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에 어떻게 함께 포함되어 있는지를 사도는 본 단락의 후반부에서 계속해서 보여 줍니다. 두 피조물, 곧 옛적 그대로의 피조물과 새롭게 된 교회가 현재 함께 고난을 받고 있지만, 결국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3장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저주를 함께 받았고, 지금도 그 고난을 받고 있듯이 피조물은 인간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했던 구속함을 받게 될 때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입니다(19절). 기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현재에서는 만유가 회복되지 않았기에 절반만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재림시 가져오실 그 완전한 구원을 우리는 믿고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기대는 전혀 어긋남이 없을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죄 죽임’과 ‘열망’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비결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 없이는 참된 삶이 없으며, 갈망이라는 훈련 없이도 참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몸의 행실을 죽이는 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 왜냐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기 때문이다”(롬8:13, 사역)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때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8:6, 사역)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을 억제하고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고 이른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한국기독교총연맹회(한기총) 대표회장으로 각종 기행을 낳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전광훈 목사에 대하여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정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 법률적인 쟁점이 있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법원이 전 목사의 자격을 거론한 대목입니다. 서울신문은 “한기총은 규정상 `성직자로서의 영성과 도덕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된 자´로 대표회장 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전 목사는 이 조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대표회장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교회법의 자격 조건을 사회 실정법이 재단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전 목사는 …. 배임수재와 기부금품법 위반, 불법시위 주도 등 10여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똑같이 정치 활동을 하였지만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았던 미국의 마르틴 루터킹 목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삶을 돌려야만 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며, 그 사랑의 길은 생명과 평안을 이루게 하는 길입니다. 당연히 육신의 죄 죽임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이 끊임없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야만 합니다.”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와 연결되어 생각하게 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짝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었으나, 오직 열매를 맺는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뿐이었습니다.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좋은 땅이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합니다(눅8:11,15).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삶 가운데 풍성하게 맺는다는 말이며,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의 9가지 열매가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풍성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냐 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믿는 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는 바로 우리 가운데서 인간이 되어 사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입니다. 그분은 참된 가르침을 주심과 동시에 어떤 누구도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통하여 많은 선한 일을 행하시다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화평을 확보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천하에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만지고 함께 살았던 사도들의 증언을 우리가 신약성경의 형태로 가지고 있고, 그들은 비록 2천년 전에 죽어 마지막 날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께서 지금도 그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눈을 여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자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결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물론 선만 행하고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는 자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매일말씀나눔
성령님 안에서의 삶의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앞서 설명한 로마서 8장 4절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고 구속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이 성령님의 지도를 받고 그분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면 ‘율법의 정당한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5절부터 사도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고, 영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5, 사역).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잠23:7)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5절에서 갈파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율법이 성취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육신’ 혹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누신’은 몰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심, 곧 우리의 열망과 우리의 관심을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일은 자기 중심성이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있는 일들입니다. 영의 일들은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 자신이나, 자녀들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중 어디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면, ‘지금 당신의 시간과 돈, 힘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을 어디에 헌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을 쏟고 있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관심이 있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