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7/5 – 9)

2021/07/5
잠언14: 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본 절은 1절과 2절이 추상적으로 표현한 지혜를 대조법을 사용하여 언어 사용에 적용합니다. 앞 부분은 거만한 바보가 자신의 말 때문에 매를 맞는 모습을, 뒷 부분은 지혜자가 자신의 말로 인해 생명이나 재물을 보호하게 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은 바보의 경우 ‘입’이라는 단어를, 지혜자의 말은 ‘입술’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입 – mouth’ 안에는 혀가 있습니다. 그 혀는 말할 때 입 안을 이리저리 치는데 마치 막대기가 자신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바보가 교만한 말을 하는 것은 자만심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쓸데 없는 고통을 자초합니다. 실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신임을 보여줍니다. 한편, 솔로몬은 입술이 다물어진 모습을 보고 슬기로운 자들이 보여준 절제있고 통제된 언어사용의 경험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주의깊게 할 말을 선택하여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실수일지라도 분별없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분노하며, 잘못하면 큰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신자들로 구성된 축구대회에서 바람같이 공을 몰고 가자 의도적 태클이 들어왔고, 심하게 넘어져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후에 그 신자는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의도성이 없다는 등 변명하는 말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물며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할 목적으로 말하는 경우 – 진실로 어리석은 자임 – 해를 당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12:18, 새번역).


2021/07/6
잠언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1절에 집을 세우고 허는 것으로 표현된 지혜와 어리석음의 추상적인 의미는 본 절에서는 사려깊게 산업을 선택하고 투자하는 경제적 활동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본 절은  “비록 농부는 황소를 쓰지 않고 스스로 일함으로써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리석은 결정이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잠언은 매우 짧지만, 히브리 원문은 번뜩이는 문학적 기교를 담고 있습니다(키에스틱 구조). 즉 문장의 처음과 나중은 ‘소’라는 단어, 가운데는 ‘소’가 미치는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바르-깨끗함”과 “로브-많다”(철자의 순서가 반대임)를 연 이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수입의 원천이 되는 산업에 사려깊게 투자할 때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농업사회에서 소로 대표되는 가축들은 쟁기나 마차를 끌고 타작도 하여 노동을 크게 절감시키기 때문입니다. 소 한마리도 그런데 하물며 12겨리 즉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종들과 함께 열 두 고랑을 동시에 간 선지자 엘리사의 집은 매우 부유하였을 것입니다(왕상19:19). 혼자 노력하여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이 들고 어렵더라도 서로 힘을 합쳐야 큰 성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 역시 공동 연구를 하며, 사업을 할 때도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결합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계에 지능을 달아주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는 거미형 인간 즉 여러 분야를 연결하여 네트웤을 만들 수 있는 융복합형 인재를 요구하며, 융복합형 인재의 필수 자질은 서로 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필요성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14:24).


2021/07/7
잠언 14:5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5절은 3절과 같이 ‘말하기’를 다루나, 증인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를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은 4절과 같은 문학적 기교(키에스틱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실한 증인 – no거짓말 – 거짓말 – 거짓 증인. 지금 본 잠언이 전제하는 상황은 법정입니다. 한 측은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하며, 또 다른 측은 그런 일이 없다고 방어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따라서 증거 없이 재판관은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지문, DNA 검사, CCTV 영상 등 많은 증거자료가 있으나, 3천년 전 솔로몬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증인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이 십계명 안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인의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은 증인의 인격내지 성품을 보고 진실 여부를 판단하게 됩니다. 실로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마7:17-18). 증인석에 앉을 때, 신실한 증인은 간청, 뇌물, 혹은 약속의 제시나 심지어 위협을 받더라도 진실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후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하셨다는 성서의 기록이 참됨을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증언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항상 만나고 있으며, 그분의 통치를 섭리 가운데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요15:26, 새번역).


2021/07/8
시편34편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4절, 새번역)

이 시는 깨진 아크로스틱(알파벹) 패턴입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시작은 히브리어의 자음 22개의 순서대로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등이 등장하지만, 한 문자는 사용되지 않았고, 다른 문자는 두 번씩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예측불허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때때로 찾아 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을 회상하고 답을 줍니다. 본 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상 21:10-14 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군대장관과 사위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도망쳐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왕을 아비멜렉으로 부름)에게 망명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의 가치를 알아보고 구류합니다. 또 다시 위기에 처한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체하여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주의할 점은 다윗이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서의 기사만 보았더라면 그런 생각도 가능하나, 본 시편에서 옛일을 회고해 보는 다윗의 심정을 읽으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도망칠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4절)…..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6절)…”에 있습니다. 즉 다윗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건져내셨고(4절), 구원해 주셨기(6절)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시편34:8, 새번역).


2021/07/9
시편34편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한 지혜로운 교훈(1)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9절, 새번역)

이 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10절은 경험이 주는 교훈으로서, 주로 다윗 자신의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11-22절은  삶을 어떻게 다루고 위기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를 교훈합니다. 오늘은 첫 부분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자랑할 것이니…”(1-2절)라는 대목은 심지어 ‘아비멜렉의 손아귀에 떨어져서도’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상황을 겪는 인생의 과정에서 신자의 참된 반응은 명민함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무한한 능력의 주님을 ‘찬양’하고 ‘자랑’ 하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아기스에게 망명하였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심히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마음이 가난하게 되었고, 간절히 기도드려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진리를 체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그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를 둘러 진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그 천사’는 나중에 도성인신하실 우리 주님의 구약적 표현이며, ‘둘러 진치다’는 말은 그분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지상을 순례하시고자 이동식 집에 거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신자들이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분에게 피할 것(8절)을 교훈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 두려움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과 같은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매일묵상(2021/06/28 – 07/02)

2021/06/28
시편32편
“너희는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아라.” (9절,새번역)

시편32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시는 7개의 참회의 시편들(6; 32; 38; 51; 102; 130; 143) 중 하나이며, 이 시편을 통해 사죄의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참회 뿐만 아니라 감사와 지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훈적 요소를 지혜의 문맥에 삽입하여 죄의 고백을 다룹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참회란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으로 고백,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교훈)에 문을 열고 순종하는 모습을 수반하여야 합니다. 이 시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축복(1-2절)은 슬픔, 고백, 그리고 용서의 경험을 전제합니다(3-5절). 용서를 경험한 경건한 자들은 주님께 피난처를 구할 용기를 갖습니다(6-7절).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그 교훈을 마음에 새깁니다(8-10절). 마지막 절은 결론에 합당한데, 다윗은 의로운 모든 자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기를 요청합니다(11절). 성서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체득된 도덕적 지혜가 삶에 배어 있어 하나님의 뜻이 열매맺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이 얻는 도덕적 지혜는 주님의 징계를 통해 옵니다(잠언3:11-12). 그들은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기에 분별력 없는 노새나 말로 상징되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워지시기를 부끄러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9-10a)


2021/06/29
잠언13:25
“의인은 배불리 먹지만, 악인은 배를 주린다”(새번역)

본 잠언은 13장 2-4절에서 이미 언급한 주제, 즉 의로운 자의 욕망은 풍성하게 채워지지만, 악인의 욕망은 계속 부족함을 경험한다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의인은 선한 행동이 보답받아 배불리 먹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의인 역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 행복, 그리고 기쁨을 얻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그러나 충족시켜야 할 욕구가 육체적 혹은 정서적 혹은 영적이건 간에 그 배후에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늘의 왕의 선한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는 사람은 모자라지 않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궁핍할 것임을 가르칩니다(잠28:27;10:3). 또 하나 생각할 점은, 궁핍을 의미하는 ‘배를 주린다’는 말은 하찮은 존재처럼 되거나 치료받지 못하면 죽게 될 운명임을 나타냅니다. 모세율법은 음식의 부여자(하나님)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오직 그분의 백성들이 언약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구약을 읽으면 풍성한 음식이 존재할 때는 올바른 관계,가 흉년이나 음식이 핍절한 때는 주님과 잘못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오직 최후의 심판 때만 100% 옳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뒤엉켜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라’(합2:4) 는 대원칙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욥의 경우와 같이 당신에게 신실한 백성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늘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 새번역).


2021/06/30
잠언 14: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31장10-31절은 지혜로운 여인이 어떻게 자기 집을 세우는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기를 즐거워 하고, 상인을 통하여 무역을 하며, 매일 식구의 음식을 준비하고, 여종들에게는 할 일들을 정하여 맡깁니다. 또한 밭을 살 때에는 잘 살펴서 지혜롭게 사며, 직접 벌어들인 돈으로 포도원도 사서 가꾸며, 가난한 사람을 열심히 돕고, 가솔들을 위해 의복을 지어 입히며, 장래를 대비하고, 남편이 마을 원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게하며 존경을 받고,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 않으며, 집안 일을 두루 살펴보며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녀는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그 혀로는 덕을 끼치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자녀들의 칭송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혜로운 삶의 원천은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31:30). 그러므로 잠언은 이런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뛰어나니, 아들에게 이런 좋은 아내를 얻을 것을 권고합니다. 이 반면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 손으로 가정을 허무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남편과 다투고, 거만하며 고집불통이고, 입만 열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쉽게 분노하고, 절제력이 부족합니다. 이 여인은 결국 혼자 살게 되며, 그 가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아내가 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녀의 행동에 따라 가정이 세워지기도 하고 무너지게될 수도 있기에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2021/07/01
잠언 14:2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자신의 생활양식이 주님이 미리 규정하신 도덕적 질서에 일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욕망 때문에 그 질서를 벗어나는 사람이냐를 기준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냐 아니면 그분을 경멸하는 자냐를 판단합니다. 사실 경건과 불경건, 건설적인 윤리와 파괴적인 행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는 바른 길(‘주님의 길’에 대한 환유법)을 걷는 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그의 인격과 행동이 주님께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에게는 양도불가능한 보물입니다. 이 반면 주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그릇된 길을 걷는 자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그릇된’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여 하나님이 굳게 붇잡으시는 도덕적 질서가 정해놓은 경계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릇된 길’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길들(ways)에서 왜곡된’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정해놓은 진로가 전혀 없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리 저리로 방황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실상 그런 사람은 주님의 미움의 대상이어서 그분과는 아무런 교제도 가질 수 없습니다(3:32).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애착)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에 의해 드러납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범죄하지 않으려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제사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런 거절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출19:5a, 새번역).


2021/07/02
시편33편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

본 시편은 우주와 인간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지혜와 섭리를 깨닫고 찬양하는 시로,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찬양의 요청 – 찬양이 마땅함(1-3절) (2) 찬양의 이유 : 주님의 완전하심(4-5절)과 주님의 능력, 목적, 지혜, 그리고 사랑(6-19절) 위대함. (3) 신뢰의 기대 – 인자하신 주님께서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함(20-22절). 한편, 다윗은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경건한 자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온갖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20-22절). 그러나 경건한 자들이 함께 모일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베푸신 그분의 인자하심을 새로운 상황에서 늘 새롭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섭리의 체험으로서 이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필요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과거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의 역사를 기술하며 주권자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에 섭리의 통치자로 기술된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착되어진 은사, 재물, 명예 등에 만족하시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섭리 가운데 최선의 것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1/6/14 – 18)

2021/6/14
시편 28편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이시다. 내 마음이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에,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셨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기뻐하며 나의 노래로 주님께 감사하련다”(7절, 새번역)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상황에서 간절히 구원을 호소합니다. 만약 주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1절),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당한 치욕으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4절). 의로운 자신은 죄인 처럼 억울하게 죽고,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악인들은 벌을 피해 간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셨고 다윗은 찬양과 동시에, 이런 구원이 주의 백성 전체에 미치도록 기도합니다(6-9절). 얼마전 정봉주 전 의원이 출연한 한 시사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BBQ 사건을 말하다가 기소되어  2011년 대법원에서 1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옥살이 중 250일은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하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지른 잘못이 떠올랐고, 그후부터 눈물을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당한 심문, 고문은 물론 더 나아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 거룩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사 죄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노래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고 구원이심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46:1).


2021/6/15
시편 29편 – 폭풍을 지배하는 왕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11절, 새번역)

이 시는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찬양의 시작은 천상의 존재들이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곳인 하늘에서부터 입니다(1-2절). 이어 그 찬양은 바다에서,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가데스 광야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천둥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3-9절).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은 그 영광의 주님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며 찬양합니다(10-11절). 이 시에서 우리는 다윗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 보다 훨씬 강한 천상의 존재들도 주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예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주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천사 한 명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7만명을 죽이고 이어 예루살렘을 멸하려고 칼을 들고 천지 사이에 선 것을 보고 다윗이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 왕으로 하여금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삼하24장/ 역상21장). 한편, 다윗은 바다와 레바논 그리고 광야를 휩쓰는 폭풍 및 천둥 소리 가운데서도 그런 피조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의 주님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면 힘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처럼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잠3:11).


2021/6/16
잠언 13:19절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겁지만, 미련한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새번역)

12절에 시작된 단락을 마무리 하는 ‘19절의 주된 가르침은 의인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열망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됨으로 즐거움을 경험하지만, 바보들은 악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19절 전단은 심리적인 사실을, 19절 후단은 도덕적 사실을 묘사하여, 진정한 심리적인 기쁨을 누리려면 반드시 도덕적 요소를 구비할 것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되었을 때 영혼에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욕망은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불경건함과 비도덕적인 삶에서 돌이키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만족감을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로 어리석은 자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싦어합니다. 그 결과 바보들은 생명보다 사망을(14절), 은혜보다는 멸망을(15절), 보호보다는 드러내는 것을(16절), 치료보다는 재앙을(17절), 사회적 존경보다는 미덕 없는 수치스러운 가난을(18절)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예가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는 의인과 같이 죽기를 바랐지만, 모압 왕 발락이 주는 재물과 부귀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모세에 의해 죽고 맙니다(민23:10, 31:8). 이들은 지혜자의 영감된 가르침을 멸시하기 때문에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만이 참된 만족과 샬롬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교정한다면,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행동 역시 변화될 것입니다(3:7; 16:6). “지혜란 야훼께서 주시는 것,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로 지식과 슬기를 깨치게 된다.”(잠언2:6, 공동번역)


2021/6/17
잠언 13:20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새번역)

20-25절까지 6 구절은 13장 마지막 단락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가지는 축복된 미래와 바보들이 당할 해로운 결말’을 대조하면서 선과 악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 출발인 20절은 자녀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다닐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다니다 Walk’는 ‘행위나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라는 권고는 현명한 자의 가르침, 격려 그리고 본보기를 가지고 살아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95%가 도덕의 문제이며, 똑 같은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해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 – 교만하거나 탐욕적인 사람, 정욕적인 남녀, 우상숭배자, 쉽게 분노하거나 왜곡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과 사귀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들의 영향에 노출되어,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정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큰 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완전한 모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생명과 축복과 화평의 열매로 가득찹니다. 좋은 예로 에녹(창5:22)이나 노아(창6:9)는 각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전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고, 후자는 방주 예비함을 지시받아 홍수로부터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2021/6/18
잠언13:21절
“죄인에게는 재앙이 따르지만, 의인에게는 좋은 보상이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행위와 운명의 관계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본 잠언은 의인화의 기법을 사용합니다. 즉 ‘재앙’과 ‘좋은 보상’이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타인에게 주는 그 재앙이 돌아와서 그들을 멸망시키며, 의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그 선은 정당하게 그들에게 보상을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재앙’은 마치 사냥꾼과 같이 인격화 되어 있습니다. 그 뉘앙스는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격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한 그 해악들이 죄인들을 맹렬히 추격하고 결국 사냥하여 멸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물론 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악인들이 자신의 부패하고 부풀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저지른 악한 행위의 결과가 돌아와 그들을 물어 죽인 실례들로 차고 넘칩니다. 비히 850년 경 악한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참혹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왕비 이세벨은 자기 시녀들에 의하여 이층에서 던져저 죽었고, 이어 개들이 먹어버림으로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성경과 세상 역사의 차이는 정의의 집행자가 누군인지를 성경은 밝히 드러내고 세상은 모를 뿐입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 반면 의인이 타인에게 베푼 생명을 주는 혜택들은 돌이켜 같은 은택으로 보상합니다. 이 역시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늘 경외하여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매일묵상(2021/6/7 – 11)

2021/6/7
시편 26편 – 선한 양심의 호소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완전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1절)과 끝(11-12절)을 맺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감찰(2절)과 행동(9,10)을 요청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오게 배경은 다윗에게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환경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선한 양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야말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우리가 선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순결하게 살 때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문자를 가지고 죽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만유의 주가 되신 바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명을 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음모를 꾸미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10절) ‘죄인’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하나님 앞에 결백함을 단언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단어들을 보면, 적들은 다윗의 생활양식(3절), 사귀는 동료(4,5절), 종교의 현실(6-8절)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개인적으로나(3절), 사회적으로나(4,5절), 영적으로(6-8절)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이 주님 앞에 드렸던 이 기도와 고백을 우리 역시 끊임없이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2021/6/8
시편 27편 – 기도로 일하는 믿음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절)

시편 26-28편을 읽으면, 먼저 성전(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26편은 예배자가 성전에 가까이 갈 때 신실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묵상면서 양심을 살피다가 마지막 구절(12절)에서 허락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27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성전을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성소요, 비젼의 장소로 여깁니다. 28편에서는 성소에 들어간 시편기자가 공평한 정의를 위해 지성소를 향해 탄원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27편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지지하심
                   ( 4-6절)  안전을 위한 첫번째 기도
                   (7-12절) 안전을 위한 두 번째 기도
(13-14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응답하심

어떤 분은 중학생 때 어둑해 지는 저녁 시간 동네 길을 걷다가 불량배 셋을 만나 주머니 돈을 전부 털렸다고 합니다. 셋만 둘러싸도 겁이 나는데 시편기자는 군대가 둘러싸도 무섭지 않다고 외칩니다. 뭘 믿고 큰 소리 치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과 늘 긴밀한 교제를 나누며 동행한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엿보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다윗은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믿음과 기도가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시며, 이런 주님의 구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교제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2021/6/9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2021/6/10
잠언13:17
“못된 전령은 사람을 재앙에 빠지게 하지만, 충직한 사신은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악한 전령(사신)의 성품과 그가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를 양심적인 전령(사신)과 그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치료효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15절(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을 함께 고려한다면, ‘못된 전령 bad messenger’은 ‘사악한 자’와 상응하여 반역적이고 신뢰성이 없어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전령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 쓰고, 말하는 분야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서, 외교사절, 군인, 왕실의 대변인, 총독, 정보요원, 물건운송, 후견인, 그리고 왕실의 첩자와 같은 많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령이라는 전문적인 수행원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춘 자여야만 하고 군사전략과 전술에 관한 공부까지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훈련과 또 그들의 수행하는 임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가는 그들에게 예외적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특권적인 대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진 문헌에 나타난 매우 희귀한 관료들의 이름 가운데 이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1590년 3월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의 침략야욕을 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 황윤길(서인)과 정반대로 왜군의 침입은 절대로 없을 것으로 보고 하여 조선을 재앙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짓 보고를 한 이유는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돌이켜 진주성을 수비하다가 병사하였지만 역사는 그의 죄책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2021/6/11
잠언 13:18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수치가 따르고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현대인의성경).

본 잠언은 13절과 매치를 이루면서, 13절에서 18절에 이르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은 보상과 벌은 행위의 교정여부에 의존함을 알려줍니다. 특히 본 잠언은 책망을 듣고도 행위를 교정하지 않는 자는 부끄러운 가난에 이르지만, 행위를 교정하는 자는 박수를 받고, 존경과 재물을 넘치도록 받는다고 말하면서(3:16; 8:18)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가난과 수치’ 즉, ‘수치스러운 가난’을 갖게 됩니다. 대조적으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여기서 존경은 사회적 명예 뿐만 아니라, 부를 수반함으로 사회에서 중요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22:4). 한편, 빈곤을 가져오는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 게으름(10:4), 쾌락과 사치를 사랑함(21:17; 28:19), 일하는 대신 수다를 떠는 경향(14:23), 통상의 악함(13:25), 그리고 줄 것을 안 주는 비열함(11:24). 그러나 본 잠언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 즉, 그것은 말과 노새와 같이(시32:9), 잘못된 요소들을 교정하라고 타이를 때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실패로 인한 가난은 불명예를 가져옵니다만, 불의를 거절함으로 찾아오는 가난 – 미덕을 가진 가난(17:1; 19:1) – 은 불명예롭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훈계를 백안시 하는 자들은 가난과 수치로 징계를 받지만, 타인으로부터 오는 그런 징계에 순종하는 자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됩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그것이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고 유익하기 때문이다.”(잠언3:13,14, 새번역).

매일묵상(2021/5/31 – 6/4)

2021/5/31
시편24편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3절, 새번역)

시의 배경으로 100년 간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안치시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삼하6장). 시는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주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으며(3-5절), 주님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가?(7-10절)” 그리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오직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 있으며(4절), 그분은 주권과 영광과 권능과 구속의 권리를 가지고 오신다(7-9절)” 이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로서 시를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창조 –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야훼)으로서(1-2절), 3절 이하 질문의 전제를 이룹니다. (2) 거룩 – ‘거룩’이란 특징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의 장막에 들어갈 자격을 논한 시편15편을 깨끗한 손, 청결한 마음, 참된 신앙, 진실된 말 4가지로 압축합니다(4절). (3) 승리 – ‘고대의 문들’에 대한 도전은 왕과 용사로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벌이는 전투의 외침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쟁들과 애굽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묘사하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하러 인간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권력과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과 싸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고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절)


2021/6/1
시편 25편 – 곤고한 날을 위한 ABC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9절, 새번역)

25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벹 22개의 순서대로(두 군데서 불규칙함)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첫 음절에는 히브리어 자음의 순서인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연속  등장합니다. 내용은 원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눌림, 주님의 인도에 대한 간청, 그리고 죄의식 때문에 발생되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어조는 차분하고, 시인이 가지는 주님에 대한 신뢰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감안한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개인적인 간구(1-21절)
      (1-5절) 신뢰, 소망, 기도
             (6-10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죄인들)
             (11-14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경건한 자들)   
      (15-21절) 신뢰, 소망, 기도

2. 이스라엘을 위한 간구(22절)

한편,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중 하나(b-베트)는 모호하게, 또 하나(q-코프)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알파벹 시 형태는 아닙니다. 또한 개인적인 신뢰, 소망, 기도가 드려지다 22절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은 생로병사와 같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패턴이 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등장하여 흐름을 깬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변함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7:14, 새번역)


2021/6/2
잠언13:14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가르침(토라)’과 ‘계명(미스바)’는 유사 개념으로 함께 등장하나(3:1), 여기서는 14절과 13절에 각각 등장하여 두 구절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지혜자의 가르침’이라는 어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혜자의 가르침’과 ‘계명을 두려워 하는 자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함께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가 치뤄야 할 그 빚은 죽음(14절)이고, 그분의 말씀을 늘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보상은 생명(14절)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잠언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하는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지혜자의 가르침’은 무서운 함정들이 숨겨져 있는 여행길 옆의 땅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샘’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자녀들이나 속기 쉬운 자들은 현명해 질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여 악으로부터 돌아 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샘’은 잠언이 주는 영감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가지는 풍성한 삶(생명)을 의미하며, ‘죽음의 그물’은 남을 잘 믿는 자들이나 둔한 바보들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많은 악의 대행자들 -못된 언어, 못된 행위, 악한 남자들과 여자들 -을 의미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문체와 탁월한 도덕성 때문에 사람들을 이끌어 생명의 진리를 마시게 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생의 여정에 생명의 샘은 오직 하나이지만, 죽음의 덫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잠언14:16, 새번역)


2021/6/3
잠언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5절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판단력, 통찰력을 뜻하는 ‘세켈’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지혜 good sense’는 ‘좋은 판단력’을 뜻하기에, 뛰어난 식견이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이른바 ‘양식(良識)’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16:22절(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에서는 지혜(명철)를 생명의 샘에 비유하면서 13:15절에 나오는 ‘지혜-세켈’와 14절의 ‘생명의 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며 그 가르침에 주의하여 그 샘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훌륭한 도덕적 인식과 이에 따른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호의를 받게 됩니다. 그 반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반역자들은 그 길이 험난하고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의 대표는 요셉, 사무엘,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그들의 뛰어난 판단력과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섬기는 삶은 본 잠언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줄 수 있는 은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받을 수 있다는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받는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을 때 주님의 응답과 돌보심 그리고 항해 경험으로 체득된 지혜로 폭풍 속에 난파될 배로부터 276명 전원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섬기기 위해 기도하십시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랴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2021/6/4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매일묵상(2021/5/24-28)

2021/5/24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의 이 기도를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드리셨습니다. 그 만큼 이 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습니다. 1-21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노래합니다. 22-31절은 구원받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은 시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인의 구원의 체험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경험하였습니다. 1-21절은 버림받은 고통(1절), 무력하게 십자가 상에 달려 있을 때 유대 지도층과 군중들의 비웃는 소리(6-8절). 십자가 상의 목마름의 고통(15절),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장면(16절), 자신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장면(18절)은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2-31절은 부활의 승리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형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요20:17).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다윗과 주님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고난으로 탄식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고난이 놀라운 감사와 찬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축복이며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시22:27, 새번역).


2021/5/25
시편23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6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시로서 시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각각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이라는 대목은 사무엘하17:27-29절을 회상시킵니다. 압살롬에 쫓겨 마하나임으로 피신한 왕 다윗은 군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를 통해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과 원수들이 포진한 비상 사태에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경험한 다윗은 이를 회상하고 감사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인생의 밤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이는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의 특권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2021/5/26
잠언13: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새번역)
8절은 재물과 책망의 주제를 다루고 9절은 이를 발전시켜 의인의 흥왕과 악인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재물 여부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도덕적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여 행복한 운명을 갖게 되는 반면, 이를 거부하는 악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여부는 의인과 악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에, 10절은 책망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은 물론 매우 슬기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충고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만한 바보는 자기 자신이 바르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지혜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여 전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줄 모릅니다. 당연히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들을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를 책망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고 도리어 격한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반면 충고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비판을 들을 때 한 번 더 생각하여 잘못된 점이 있다면 교정합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은 훨씬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에 밝은 유능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일을 추진해야만 할 것입니다. SNS가 발달한 요즈음 고객의 평점은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블랙컨슈머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공한 가게들은 이들의 의견 또한 무시하지 않고 고려하여 가게 발전의 디딤돌로 삼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 새번역).


2021/5/27
잠언 13:11절
“공으로 얻은 재산은 날아가지만 애써 모은 재산은 불어난다.”(공동번역).

7절에서 11절 총 다섯 구절은 부(재산)과 윤리에 관한 소 단락으로, 11절은 그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절이 8절에 암묵적으로 나오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 같이, 11절은 9절에서 논한 결론, 즉 의인의 영구한 부와 악인의 일시적인 부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잠언은 근면 성실하게 모든 재물을 긍정하나 악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정죄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물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는데, 영어는 이를 “easy money”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든 경우를 말하며, 폭정, 불의, 갈취, 거짓말 그리고 횡재 등이 포함됩니다. 이 반면, 인내, 근면, 사려 깊은 행동, 관대함 그리고 믿음이라는 덕들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등장하는 ‘애써 모은’(by hand의 의역)이라는 단어는 ‘점차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천천히, 적게, 꾸준히 손으로 일하여 재물을 축척한다는 의미이지 횡재는 생각도 없습니다. 실상 불의로 얻은 재물이 단명하고 올바르게 획득한 재물이 오래 간다는 말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성품과 가치의 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예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요구하여 쉽게 재물을 획득한 작은 아들은 먼 나라로 이주하여 허랑방탕하다가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 역시 재물을 어이없게 탕진하는데, 그 주된 이유가 재물의 가치와 관리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5/28
잠언 13:12절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새번역)

12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 19절은 ‘소원이 성취된다’라고 하여 8개의 구절(12-19)이 단락을 이루면서,  ‘지혜와 성취, 어리석음과 좌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실을 먹으려면 지혜자의 교훈에 목말라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모은 잠언은 생명샘입니다. 한편, 12절과 11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은 착실하게 모은 의인의 재물은 불어나지만, 힘안들이고 얻은 재산은 없어진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12절은 더 나아가 악인의 소망은 결국 이루지지 않아 마음이 병들지만, 의인의 소원은 성취되어 그의 삶의 생명나무가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망없는 외부적 상황은 심신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정신적, 심리적, 영적 에너지가 몸 전체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인이 가지는 소원성취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에너지를 갱신시키고, 용기를 새롭게 하여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합니다. 비록 윤리적인 단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요소를 반드시 전제하고 이 잠언을 읽어야만 하며,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실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저주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잠언13:14, 새번역).

매일묵상(2021/5/17 – 21)

2021/5/17
시편20편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7절, 새번역)

전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블레셋이 침공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큰 천둥을 보내어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히자 결국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아는 다윗은 전쟁 전날 밤 기도와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승리를 기원하는 본 시편을 지었습니다. 이 시는 여러 목소리가 들립니다. (1) 제사장과 백성의 기도 : 욍이 조용히 기도할 때 제사장과 백성은 왕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구합니다(1-2절). 이어 왕이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그들은 그것이 열납되기를 기도하며(3절), 그 결과 왕의 계획이 성공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를 간구합니다(4-5절). (2) 왕의 확신: 이에 대하여 왕은 기도(6절)와 믿음(7,8절)이 승리로 가는 두 가지 길이라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3) 마지막으로 제사장과 백성은 왕이 승리하도록 주님의 응답을 간구하면서 예배를 마칩니다(9절).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9:11,새번역).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을 배경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준비한 사람은 결전의 날 반드시 주님의 간섭과 은혜를 간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은 이때 좋은 기도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 (잠21:31, 새번역).


2021/5/18
시편21편 – 전쟁 후 : 승리의 노래
“온갖 좋은 복을 왕에게 내려 주시고, 왕의 머리에 순금 면류관을 씌워 주셨습니다”(3절)

환희에 찬 이 시는 왕의 대관식이나 기념일을 경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20편은 전쟁 전 승리를 위한 기도와 믿음을, 21편은 그 간구와 신뢰가 전쟁에서 응답되었음을 회상하며 노래합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언급은 각각 2-7절과 8-12절에 반영되었기에, 본 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1) 왕과 주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경험(1-7절) (2) 왕이 누릴 미래의 승리 (8-12) (3) 주님에게만 찬송을 (13절). 한편, 시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구약 역사의 중심에 놓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며 대륙을 잇는 무역로가 통과하는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많은 이방민족들이 함께 살면서 세력확장의 각축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늘 약소국이었기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이런 전쟁의 의미를 영적인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즉 예수께서 왕이자 용사로서 오셨지만, 로마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죄의 본질)과 사망, 그리고 마귀를 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죄인들의 손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고,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사 지금 이 세상을 배후에서 장악한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계십니다.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2021/5/19
잠언13: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본 잠언은 그 뜻이 매우 모호하여 다양하게 해석됩니만, 겉모습 때문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이런 면을 알기에 겉모습을 보고서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잠언은 물질적 부와 영적인 부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가난하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잠언은 세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1) 탐욕에 대한 책망: 탐욕은 타인을 희생하여 자신을 부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참고: 마16:26). 이 경우 본 잠언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바울에 의해 예증(마19:29; 고후6:10)된 ‘부유한 빈곤 rich poverty’의 역설을 권면합니다. (2) 자기 기만에 대한 경고: 이 경우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생각하나…..,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나 .….”라고 읽혀집니다. 너무나도 눈이 멀어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은 종이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3) 위선에 대한 정죄: 이 경우 본 잠언은 위선자를 정죄합니다. 가난한 바보가 스스로 부한 체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지혜로 성공한 것처럼 보여 사회적 존경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며, 부유한 바보가 가난한 체하는 것은 인색함을 숨기려는 몸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두 거짓말쟁이는 악한 자들로서, 전자는 합당치 못한 명예를 받고, 후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도움을 거절하여, 주님과 사회 모두에 수치가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엡4:15,현대인의성경).


2021/5/20
잠언 13:8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본 잠언은 해석이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 원인은 히브리어 단어 ‘게아라’가 ‘협박’과 ‘책망’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번역은 둘로 나누어 졌지만, 한글 번역 성경들은 모두 ‘협박’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게아라’를 ‘협박, 위협’의 의미로 본다면, 납치된 상황이 떠오르게 됩니다. 만약 부자가 납치되었거나 협박을 받고 있다면, 부자 자신이나 그 가족이 납치범이 요구하는 금액(속전)을 지불해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은 부의 힘을 보여주는 반면, 그런 재물도 협박을 당하지 않도록 할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난하게 된다면, 납치될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납치하여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은 힘이 있지만 그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반면 ‘게아라’를 ‘책망’으로 이해한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어떤 죄책을 지고 있는 상황이 전제됩니다. 그런 죄책을 아는 부자는 위협적인 도덕적 책망을 들으면 반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여 대가를 지불함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가난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NICOT). 여기서 ‘책망’이란 ‘도덕적 비난을 내용으로 하는 분노에 찬 항의’를 표시하며, ‘속(贖)하다ransom’는 목숨을 구하는 대가로 요구되거나 지불될 가격을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이 책망에 반응한 사람이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2021/5/21
잠언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기자는 유사한 히브리어 발음을 가진 두 단어 – ‘가난한- 라쉬’(8절)과 ‘사악한-레솨임’(9절) -를 사용하여 두 구절을 서로 연관시키는 동시에,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8절에 따르면, 사람이 도덕적인 질책을 받아들여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 재물은 죄책을 진 그를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그의 의가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구한 부는 오직 의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올바른 책망에 대하여 기꺼이 반응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도덕적 질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그는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논하고 있는 9절은 확실히 의미가 진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의 빛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성공과 행복 그리고 장수 등을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위 잠언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삽과 같은 시편 기자가 고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시편73편). 왜냐하면 악인이 죽을 때에도 그 힘이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래할 영원한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잠언은 단 한 경우도 예외가 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1-43).

매일묵상(2021/5/10 – 14)

2021/5/10
시편19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절)

본 시편은 3 종류의 목소리(voice)가 차례로 전면에 등장하여 3가지 주제를 연주함으로써 멋진 대위법( 對位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목소리는 창조물의 것(1-6절)으로, 주제는 ‘역설 Paradox’입니다. 온 우주는 아무런 음성도 내지 않지만 피조물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목소리(7-10)로서, 주제는 ‘완전perfection’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완전함을 노래합니다. 세 번째는 죄인의 목소리(11-14)로서, 주제는 ‘기도praying’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기도합니다. 먼저 창조물의 웅변(1-6절)을 들어보겠습니다. 온 우주는 공간과 시간과 땅을 통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선포합니다. 특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4절)에서 사용된 ‘소리’는 ‘줄Lin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할당된 지배권 혹은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 지배권은 날마다 새로이 떠오르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며 모든 곳을 비추는 ‘해’를 통해(5-6절) 행사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늘은 언어를 쏟아내지만, ‘언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 공간의 모든 별들이 서로 연결하는 줄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기이함입니다. 다만, 창조물의 그런 메시지는 제한되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말씀의 목소리’(7-10절)를 노래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2021/5/11
시편19편 (완전: 7-10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절)


모든 창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하지만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인간은 자연 종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7-10절). 그분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야훼)로서 본 단락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그 이름이 들려집니다. 계시된 그분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 법’으로 표현되는 6개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뜻(의지)을 알려주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토라)’은 계시된 그분의 뜻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며, ‘증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된 진리를 나타내고, ‘교훈’은 인생의 세부적 사항에 적용되는 측면을, ‘계명’은 순종의 측면을, ‘경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측면을, 마지막 ‘법’은 권위 있는 결정이라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된 하나님의 뜻은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오염이 없이 순결하며,’ ‘변함없이 영원하고,’ ‘참되고 의로우며,’ ‘귀중하고,’ ‘참된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달콤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참된 생명이 회복되며,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가르침을 받아 기쁘게 되고, 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바라는 놀라운 축복이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11-14절).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시편19:14).


2021/5/12
시편 19편 (기도: 11-14절)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13절, 새번역)

세 번째 목소리로 죄인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번 단락(11-14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권에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주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풍성한 상을 받는 진리를 발견합니다(11).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죄를 확신하고 용서를 구할 준비를 합니다(12). 중생한 그에게는 새로운 열망이 쏟아오르게 되는데, ‘온전한 삶’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것은 말씀 자체가 완전함과 같습니다. 특히 생각과 언어 사용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4). 주님도 자신이 한 말씀으로 그분 자신이 알려지는데(7-10),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창조물은 조용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순종의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신자의 절망과 열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14절이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의 반석이시며, 구속자(고엘)이신 주님께 호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 구속자(고엘)는 룻이 살아갈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한 보아스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사 당신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습니다. 거룩함은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 새번역).


2021/5/13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하기를 싫어하지만, 악인은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한다.”(새번역)

본 절은 말과 일을 의와 악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술이 좋은 열매를 생산하여 그 결과를 먹는 사람(2절), 사려깊은 언어사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3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여 바라는 모든 것을 넉넉히 얻는 사람(4절)을 5절에서는 의인(義人)이라고 정의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분을 삶에서 발견합니다(시42:1-2). 왜냐하면 의인은 거짓 입술을 미워하시나 진실됨을 기뻐하시고, 사람을 귀히 여기시며, 진리로 가장 훌륭하게 섬김받으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거짓말도 아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악인은 썪은 생선처럼 악취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의 허영과 이기심이 사람들의 관계에 독을 풀어 넣고, 사회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태는 결국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공공연히 수치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왕비 이세벨은 거짓 증인 둘을 세운 뒤 의로운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자 세상은 두려워 덮었지만,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후 왕비 이세벨은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7:18-20), 새번역).


2021/5/14
잠언13:6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

본 구절은 ‘공의’와 ‘악’을 인격화시켜서 참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악’을 전복시켜 패망하게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여 1-4절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화자(speakers)와 행위자들(지혜로운 아들, 거만한 사람 등)의 운명과 대칭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자기 입을 ‘지키는’ 자”와 6절의 ‘보호하고’는 같은 동사(나차르)라는 것만 보아도 이런 연결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6절은 그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높이고 있을 뿐입니다.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 즉 비난받을 것이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이들이 내어딛는 발걸음 하나 마다 모두 주님과 그분의 우주적 왕국의 안녕과 복지를 이루는 방향으로 향하져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죄인의 길(way)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여기서 ‘패망하게 한다’는 동사는 ‘살랍’으로 “비틀고 왜곡시켜 윤리에 속한 무언가를 파멸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길(way)이라는 은유는 의와 악이 자신들에 합당한 운명을 구축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신실한 삶만이 그 행하는 자를 보호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거짓말들은 죄인들을 전복시켜 그 결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의인과 악이들 사이에 계셔 지켜보시며 듣고 그 행한 대로 심판하고 계시고, 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전제가 니이체의 철학이나 논어와 맹자의 사상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야말로 모든 도덕질서의 궁극적 보호자이십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잠22:12, 새번역).

매일묵상(2021/5/3 – 7)

2021/5/3
시편 18편 –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2절,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주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뒤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 시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실질상 동일한 내용의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표제를 읽고 시를 감상해 보면 다윗은 상징법을 써서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일생에 주님께서 그룹을 타고 강림하셔서 도와 주신 경우도 없고(10), 여호수아처럼 우박을 보내어 적들을 죽인 경우도 없으며(12), 홍해를 가르신 경험도 다윗은 하지 못하였습니다(15). 다윗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른 수단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블레셋 족속의 침입(삼상23:26이하), 엔게디 광야의 험준한 지형(삼상24:1-3), 쉽게 흔들리는 사울의 양심(삼상24, 26장), 그리고 도주하는 것입니다(삼상27:1).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 돌이켜 보니,  그런 구원은 오직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7-8; 출19:18), 이집트를 심판하시고(9-12; 출9:13)), 홍해를 가르신(15) 바로 그 주님이 배후에서 일하셨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이나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이나 염소바위에 몸을 숨기나 실제로 그의 반석이나 피난처가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셨습니다. 다만 주님은 그의 영광을 숨기시고 하늘 보좌에서 당신의 종을 위해 통치하셨던 것입니다(10-11절). 우리의 일생도 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2021/5/4
시편18편 – 부르짖음과 응답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3절).

시편 18편은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나 다른 교훈들이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절실한 필요와 주님의 구원의 권능 사이에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폭풍 가운데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황량한 광야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만 하였습니다. 다윗은 10년의 도피 기간 동안 많은 시편을 기록하였고, 왕이 될 자질을 검증받았습니다. 다윗의 시는 많은 경우 탄원시입니다. 다윗은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절박한 삶의 경험은 주님의 고난을 노래하기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왕 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잘 예표하는 삶이었습니다. 1-19절의 내용을 보면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를 기다리는 주님의 주권적 권능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은 사망의 줄이 다윗을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미쳤을 때였습니다(4-5). 다윗은 부르짖었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어 20-45절은 다윗이 이런 과거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받은 교훈들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성경의 교훈들을 배우고, 그 교훈들에 담겨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신 성령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 새번역).


2021/5/5
시편18편 –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를 지켰다.”(23절, 새번역)

본 시편이 노래하는 주제 중 또 하나는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입니다. 이 시가 노래하는 방법은 공의로우신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며, 그런 공의가 어떻게 다윗에게 적용되어 그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원칙은 의로운 자를 보답하신다(20-24)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원칙을 삶에서 절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는 비록 그가 어두움 가운데 있더라도 빛을 빛추어 주셨고, 적군 속을 달려도 주님은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25-29).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의로운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 원칙을 경험한 다윗은주님은 완전하시고, 그 말씀은 순수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에게 오는 모든 자의 방패가 되신다(30절)고 노래합니다. 한편, 이런 체험이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자신 스스로를 지키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나, 다윗은 이렇게 살도록 힘주시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 분 역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32). 이 고백은 바울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함입니다(롬8:28-29). 이런 삶이 현재 신자들의 삶이며, 영생의 본질입니다. 결국 주님이 피로 사셔서 이 세상에서 훈련하여 의롭게 변화된 백성들만이 남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시18:1, 새번역). 시편 18편 – 영원한 하나님 나라.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 메시야)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절)


2021/5/6
다윗은 자신의 나라와 왕위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확신 가운데 시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확신은 자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견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보낸 신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2-16). 다윗은 이 말씀을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은 400년 정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여(비시586),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단의 신탁과 이를 근거한 본 시편의 확신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 왕은 단지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50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의 번역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다윗 보다 훨씬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왕 다윗에 대한 소망은 다윗의 씨(후손)인 주 예수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의 부활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사망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막10:48, 새번역)- 맹인 거지 바디매오

매일묵상(2021/04/26 – 30)

2021/04/26
시편17편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14절, 새번역)

이 다윗의 시는 ‘들으소서’(1절), ‘기울이소서’(6절), ‘일어나소서’(13절)의 세개의 호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호소(1-5절)는 다윗의 의로움을 변론하며, 두 번째 호소(6-12절)는 무자비한 원수로부터 절박한 구원의 필요를 알리며, 세 번째 호소(13-14절)는 하나님의 행동을 요청합니다. 결론(15절)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사무엘상 23:25절 이하가 이 시의 배경으로 생각됩니다.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은 군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면 산 저쪽으로 피신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포위되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기치 않은 블레셋 군대의 침입으로 사울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해 북쪽 오아시스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계속 피신한 이유는 사울이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의 이 기도는 응답을 받지만, 자신의 말처럼 의롭게 주님을 뵐 수 있는지 여부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 시험은 엔게디 동굴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일을 보러 동굴에 들어온 사울 왕을 살려줍니다. 다윗은 주님의 시험에서 합격하였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17:15, 새번역)


2021/04/27
잠언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본 절은15절부터 시작되는 12장 후반부를 결론 내리는 장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생명과 사망은 영원한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류를 가지게 됩니다. 의학적인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합니다. 잠언14:32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이 오면 악인은 쓰러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희망이 있다.”(현대인의성경). 잠언 14:32절과 본 구절을 비교한다면, 잠언의 ‘지혜’는 금생의 삶을 돌파하여 죽음을 넘는 삶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공의로운 길에 In the path of righteousness”라는 말은 인간 실존이 걸어가야만 하는 윤리적인 영역 즉,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친절하게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생활방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의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만, 그로 인한 결과들까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들을 산출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도덕질서를 유지하여서 우리들이 행하는 ‘의’가 풍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영역에 머무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의의 댓가(wages)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를 행한다 하여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나오는 어떠한 ‘의’ 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에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셔서 당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다만 지금은 그 맛만을 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충만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10:16).


2021/04/28
잠언13:1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새번역)

잠언13장은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6절) 언어와 윤리, (7-11절) 재물과 윤리, (12-19절) 지혜와 어리석음이 낳는 삶의 결과, (20-25절)영원한 삶의 조망. 13장 1절은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도입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혜로 만든 곳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버지는 지대한 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지혜로운 아들과 거만한(mocker) 사람을 대조하여 그 특징을 묘사함으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자는 아버지가 타이르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후자는 도덕적 꾸지람과 교육 과정을 경멸합니다. ‘꾸지람 rebuke’의 히브리어는 “도덕적으로 분개하여 항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고 가르치는 대행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절은 거만한 자들은 범죄하지만 도덕적 훈계를 받기 거절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실상 지혜로운 사람이 받은 한 마디의 도덕적 책망은 미련한 자가 받는 매 100대 보다 더욱 효과적입니다(잠17:10). 주님께서 거만하며 남을 조롱하는 자들을 통조림(?)으로 만드시는 것을 본다면 순진하여 속기 쉬운 자들 역시 정신차릴 것입니다(잠19:25). 우리 주님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지혜로운 아들의 모델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들이 사는 고통스러운 징계의 학교인 세상에 내려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2021/04/29
잠언13:2
“선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로 복을 누리고 살지만 악한 사람은 폭력을 일삼는다.”(현대인성경)
From the fruit of his mouth a man eats what is good, but the desire of the treacherous is for violence. (ESV)

2절은 ‘먹는다 eat’는 단어를 사용하여. 1절의 ‘듣는다’에서 3절의 ‘말하다’라는 문장으로 부드럽게 이전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충성스럽게 말하는 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산출하나, 불충한 자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들을 먹는다”는 문장은 믿음성 있게 말하는 자가 공동체에 바람직하고 도움이 되는 혜택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일종의 환유법(미국 대통령 대신 ‘백악관’을 사용함)입니다. 그리고 진실되고 신뢰있는 말을 듣는 자들은 영적으로 바르게 양육됩니다. 따라서 2절은 1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등장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나는 아들딸들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자녀가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좋은 것(복록)을 넉넉하게 얻을 것입니다. 이 반면, 반역자는 거짓되거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녀들과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고 약탈합니다. 이 같은 자들(거만한 자가 포함)은 엄히 꾸지람을 들어야만 합니다(1절). 그러나 이들이 행한 강포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인데, 결국 그들에게 “멸망이 찾아옵니다”(3절). 이렇게 불충한 자는 친절이나 좋은 교훈과 관련하여 어떤 욕망도 없고, 충성스러운 자는 강포를 행할 아무런 욕망이 없다는 진실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따르지 말아라.” (잠3:31,새번역).


2021/04/30
잠언13:3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새번역)

3절의 표제어는 ‘입mouth’입니다. 2절에서 ‘입’은 좋은 말을 내어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지만, 여기서는 나쁜 말을 억제하도록 권고합니다. 또, ‘생명’의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그 어근은 ‘목 neck’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미는 ‘욕망’에서 ‘생명’으로 흘러갑니다. 만약 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좋은 것들을 먹습니다(2절). 만약 입을 적절하게 통제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보전합니다(3절). 이제 언어가 먹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생사의 문제로 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언은 결국 ‘공포와 파멸’을 낳기 때문입니다(3절). 물론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에는 성급하고 수다스러운 자기 중심적인 말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 경고하는 것은 폭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입을…여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열다 open”의 원어는 “파사크’인데 에스겔서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열방의 신들에게 분향하는 모습을 거리에서 음행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욕 때문에 음행을 하여 파멸하듯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격랑과 같이 몰려와 절제하지 못하고 입을 함부로 열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들은 거의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분수를 모르고 폭언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이 와서 부역 경감을 청원하자, 불순종하는 자는 “전갈로 징치하겠다”는 포학한 말을 하여 나라의 2/3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약3: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