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분의 육신 안에서 죄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리시고 죽음이라는 벌을 집행하신 목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뜻인 율법(도덕법)이 실천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칭의(의롭다고 선언하심)는 성화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즉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막중하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결단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를 받아야만 비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화 즉 거룩한 삶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성육신), 그 아들의 육신 안에서 죄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속죄).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성화가 우리 안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죄의 삯을 치루신 것입니다. (2) 거룩이라는 것은 율법의 의, 곧 율법이 우리에게 주장하는 의로운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4절은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율법(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3) 거룩은 성령님의 사역이기에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해야만 육신(자기 중심성)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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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을 끝낸 우리는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로마서 8장에 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사랑받는 장들 중 하나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율법의 위치에 대하여 주목하였다면, 여기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이 역설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대조는 율법의 연약함과 성령님의 능력 사이에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정당한 뜻을 보여주고 명령하나 자기중심성에 물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율법은 우리의 부패성을 자극하게 되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낳게 만들고, 그 결과 사망(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촉진하는 원리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사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여시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시는 것은 물론, 그런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인도하심으로 죄 대신 의를, 사망 대신 생명(영생)을 낳도록 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사과나 딸기가 맛있다고 설명을 해도 그 맛을 깨닫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이런 진리는 설명으로는 안되고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만약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을 부정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참된 제자도는 생각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느냐 아니면 탐심을 따르느냐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사역을 적은 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구원은 확실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장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님의 사역(1-27) (2)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28-39).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살피고 맛보십시오. 그분께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시34:8,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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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7장 14-8:4은 율법은 정당하고 의로우나 타락한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신자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도덕법)을 준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처하나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는 7장 14-17절과 18-25절에서 동일한 내용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합니다. 먼저 두 단락은 우리의 상태,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솔직한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14절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아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당한 하나님의 뜻인 율법(도덕법)을 지킬 수가 없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는 자신이 “죄의 노예로 팔린 자가 되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에 상응되는 18절 역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아야 할 문제의 본질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경험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처해 있는 엄중한 현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을 얻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더라도 심한 갈등속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육신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두 단락(14-17절; 18-25절)에서 반복하여 그로 인해 생긴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처절한 갈등에서 당신의 영을 보내사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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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절) 라고 사도는 탄식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한편으로는 생명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을 초래할 수 있을까요?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망이 율법의 허물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은 단호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죄악 된 우리의 본성은 나쁜 목적을 위해 선한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율법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되고 죄악 자체를 비난해야 합니다.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죄를 범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형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그가 자신의 범법행위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감옥에 가둔 법을 비난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정죄한 것은 법이지만 법을 어긴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유발시키며, 그것을 정죄할 뿐입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에 대한 책임을 율법에 돌려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패성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율법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독립성, 즉 죄된 마음이 내주하고 있기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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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종된 것은 ‘영의 새로운 것’을 위한 것이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 7장 6절에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는 메시지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메시지를 고린도 후서 3:6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사이의 철저한 대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 공동번역). 옛 언약은 문자, 곧 우리 밖에 있는 돌판에 새긴 외적인 계약입니다. 새로운 계약 즉 새 언약은 복음, 곧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의 할례요,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방법이요, 현재 우리의 새로운 종의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율법은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충족시키심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 반면, 우리의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종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시며, 우리 또한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지위에서 나오는 감사가 율법에 대한 복종의 원인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복음은 “살아났으니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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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20년의 부활절은 4월12일입니다. 부활절을 이렇게 결정하게 된 계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서 결정된 것이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2020년 3월 21일이 지나고 첫 만월은 4월 7일경(음력3월15일)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월12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0년의 경우 4월 5일(일요일)부터 4월 11일(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으로 부릅니다. 금년의 고난주간도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요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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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로마서 제7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권은 율법(모세율법을 의미- 다수학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의로 구원의 방법으로서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말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규범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이를 지키도록 허용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도 제사법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적 규정의 모세 율법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법에 충돌된다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십계명(안식일 규정 제외)으로 대변되는 도덕법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나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소위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함하여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만이 받은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롬9: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모세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되어 심히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14, 15절). 바울이 이러한 주장이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율법(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7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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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6:15). 이 구절은 정확히 1절의 질문(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반박하기 위해 도입한 수사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6장은 전반부(1-14)와 후반부(15-23)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믿음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우리 자신을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우리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23). 이를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종이 대조되는데, 사도는 계속하여 그 두 종의 발단(17-18절), 전개(19절) 그리고 결말(20-22절)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며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띠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하에 들어가게 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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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모든 욕심과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앞의 죽음은 법적인 죽음 즉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이 반면 후자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으로 비윤리적인 삶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에 속한 것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한 사건으로 결코 반복될 수 없으며, 후자는 현재에 속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회심할 때).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는 날마다 죽어야만 합니다. 로마서 6장은 이 두 죽음 가운데 첫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의 이전의 자아(옛 사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어떻게 죄 된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7절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NIV).” 개역개정이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번역들은 헬라어 단어 “데디카이오타이 δεδικαίωται”에 없는 “자유롭게 되었다” 의미를 삽입하여 번역하고 있으나, 그 단어 는 ‘의롭다 하심을 얻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진 사람이 사회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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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성령님을 통한 체험과 결부시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 역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성취되고 말 것임을 믿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망은 확실한 근거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흘러넘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와 죄인들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도록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 이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 곧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삼으로십시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넘쳐나도록 쉬지 말고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삼켜버린 바 되도록 하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앞 단락(1-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와 궁극적인 구원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시켰습니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추해 답변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행위로 인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를 입증해줍니다. 로마서 5장 12-19절은 어떻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심)’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는지 이른바 ‘칭의의 중보자’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역사를 짧게 언급합니다. 그 인간의 역사는 아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5: 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12절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역사를 세 단계로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첫째, 죄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으며, 둘째, 그 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으며(사망은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에), 셋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보는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죄의 침투와 사망의 침투, 그리고 인류의 사망이라는 세 단계의 역사이며, 모든 인류의 사망은 한 사람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어 13-14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가 어떻게 모든 사람의 사망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주된 내용은 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사망이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이른 바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들도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최후의 심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모르는 어린 아이는 최후의 심판 대상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왜냐하면)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롬5:13 공동번역). 13절은 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대표성 원리를 뒷받침하는지 논증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 곧 인류의 타락부터 율법이 주어지기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보자면, 이 기간 중에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하나 그들의 죄는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를 죄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14절은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공동번역)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사망한 이유가 아담처럼 고의적으로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가 그들의 머리인 아담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한편,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14절)이기에,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15절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롬5:15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로마서에서 매우 어려운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15절의 핵심 사상은 많은 사람이 한 사람(아담 혹은 그리스도)의 행위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인물 사이의 유일한 유사점입니다. 반면에 이들간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 측면을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롬5:21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15).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에 두 인물 사이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사점은 한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며, 차이점(세 가지)은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동기와 결과 그리고 특성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의 동기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동기와 다르고, 아담의 죄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와도 다르며, 아담의 행위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행위의 특성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두 행위의 동기 : 15절은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범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프토마 transgression.”입니다. 이 단어는 정도에서 이탈한 행위, 탈선한 행위를 뜻합니다. 아담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은사 恩賜: 임금이 은혜로써 신하에게 물건을 내려 주던 일. 또는 그 물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카리스마’로서 은혜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담 자신의 고집과 생각대로 행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위는 자기 희생의 행위, 곧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의 행위 사이의 대조적인 동기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아담의 행위의 동기는 자기 주장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의 동기는 자기 희생이었다.” “(왜냐하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둘째,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 행위의 결과에 있어서 나타난 차이점을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 15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죄가 많은 사람에게 사망의 무서운 형벌을 가져왔지만, 하나님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은사를 충분히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15절은 사망을 생명과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16-17절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 정반대의 결과를 대조합니다.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따라서 아담의 행위는 우리에게 정죄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는 칭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죄로 인해서는 사망이 왕노릇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서는 생명이 왕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정죄와 칭의, 사망과 생명, 이러한 대조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로 이전에는 사망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소속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의 종과 노예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제 사망의 법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을 함께 누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