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4/19 – 23)

2021/04/19
시편 16편 – 영원한 안전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5절, 새번역)


16편은 다윗이 지켜주실 것을 탄원하는 시로서 무엇 때문에 다윗이 부르짖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홀( 음부 – 죽은 뒤 가는 장소)로 대표되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이나 위험 때문에 다윗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이유를 나열하고 안심합니다. 다윗이 열거하는 증거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우리가 직면할 때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1)주님만이 그의 산업이요 소득이며 그의 몫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2)그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성도의 교제), (3)주님이 주시는 유산은 찬란하다. (4)주님은 늘 좋은 생각과 교훈을 주신다. 그러나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9-11절에 이르면 다윗은 영원한 안전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 생명의 길로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신의 삶을 늘 기뻐합니다(11). 다윗의 이 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실현되지 않은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 시편(특히 10-11절)이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행2:24-32). 당연히,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양자될 때 즉 우리 몸이 부활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23-24).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편16:7).


2021/04/20
신체 일부가 마비된 한 소녀를 모두가 피하였는데, 드디어 소녀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불평을 그치고, 재미있는 우스개소리를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마침내 전문적인 개그우먼이 되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국부론에서 분업이야말로 기술진보의 첨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여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길,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기계의 발명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여 능숙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고 말씀하십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 가르침을 받고 다각도로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 뛰어난 외교가요 정치가로서 미국의 역사에 존경받는 분으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계 최고의 인쇄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이는 그가 인쇄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인쇄업으로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이신론(理神論)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상기 3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노력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만, 불행히도 사람들은 세상의 주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지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1/04/21
잠언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개정개역)


“좋은 말(word)”은 한 마디라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실상 그런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사람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잠언은 자신이 신뢰할 친구를 선택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생명의 길을 벗어나 사망의 길로 이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인도자가 된다”는 구절에서 “인도자가 된다”는 표현은 숨겨진 것을 찾기 위하여 주의깊고,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조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웃(친밀한 친구)을 위함입니다. 의인의 눈은 넓게 열려져 있어 자신의 친구들이 가지는 고집셈, 속임, 어리석은 수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친구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허영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서 그런 것을 보지 못하며, 그 결과 자신의 친구를 교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는 지혜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는 좋은 친구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한 행위를 지혜로운 행위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됩니다. 한편 이웃의 좋은 인도자로 나오미(룻의 시어머니)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모세 율법에 규정된 고엘(친족구속)제도를 활용하여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 보내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줍니다. 그 인도를 따라 간 룻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국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멀리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지만, 악을 꾀하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잠12:2, 새번역).


2021/04/22
잠언10:22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새번역)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고 선언한 잠언은 그렇게 되는 원인을 본문에서 밝힙니다. 즉 부지런히 일한다고 저절로 부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재물을 주시는 장본인은 바로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자명한 진리를 적은 것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평과 정의라는 법칙을 온 우주의 형성 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참된 부(wealth)라는 주님의 축복은 부지런하게 일하여야만 작동합니다. 어리석은 자 보다 게으른 자는 더욱 문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일해 줄 것을 기대하나 게으르게 일에 임하여 예상하지 못한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의로움이야말로 부를 영속시키는 직접적 근원이 됩니다. 대표적인 분이 400년 동안 부를 이어 온 경주 최부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만유의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며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이 주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점은 힘을 들여서 그리고, 격렬하게 노동한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노동은 야망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 사람에게 일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를 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심판 하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을 경외하여 한 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딤전6:9, 새번역)


2021/04/23
잠언12:27
“게으른 사람은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귀한 재물을 얻는다”(새번역)


이 잠언은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서로 대조하여 지혜의 길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이 본 절에서 불확실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냥한 것”이란 먹기 위해 사냥한 들짐승(노루, 산양 등)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일과 같이, 사냥을 위해서도 치밀한 계획, 인내, 기술 그리고 끈질긴 노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이 들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를 전제로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가지고 두 종류의 번역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스스로 사냥하지 않는다”(개정개역), 다른 하나는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는다”(새번역)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식량을 위해 사냥하러 나가지 않던, 사냥은 성공적으로 하였으나 굽지를 않았다면 결국 먹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게으름으로 인하여 자신의 기회를 던져버린다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징계를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이 영적으로 굶주리는 것과 같이, 게으른 자도 풍부한 음식을 굽지 않아 육체적으로 굶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핑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도 성경 구절을 핑계로 기도로만 병을 고치겠다거나, 수혈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나고 있습니다. 이 반면,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반은총을 잘 이용하여 야생의 들에 풍성하게 존재하는 귀한 재물인 들짐승들을 잡아 구워먹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반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잠언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잠13:1, 새번역). 

매일큐티(2021/04/12 – 16)

2021/04/12
시편 15편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절, 새번역)

본 시편은 시인(다윗)이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열거된 대답은 예배자들이 성소에 들어갈 조건을 물어보면, 제사장은 이에 응답하는 형태를 따서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하나님은 주인이고, 인간은 손님의 위치에서 주고 받는 것입니다. 주인의 조건은 깨끗한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진실된 사람,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주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고리대를 받지 않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조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장막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스파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여부입니다. 신자는 모두 성령님의 증거를 받아 그리스도를 알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입니다. 실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추악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의롭다 선언하신 하나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어찌 결심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조사하여 철저히 살피셨으나 나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입으로 범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시편17:3, 현대인의성경)


2021/04/13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소년(9살)이 범브란트 목사님이 소속 선교회로 보낸 편지입니다.
“ 범브란트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목사님이 쓰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책을 읽어 주셨어요. 저는 공산국가의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전해 듣고 울었습니다…….우리는 로디지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데, 왜 우리나라엔 오시지 않습니까? 많은 로디지아인들이 목사님의 일을 도와 드릴 거예요. 전 목사님의 선교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드리겠어요. 한 번에 장군도 되고, 총무도 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목사님네 장군들(선교회의 일꾼을 지칭함)도 구세군의 장군들처럼 제복을 입나요? 꼭 알려 주세요.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들의 천사들이 매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총책임자의 책임을 설명한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선교회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아홉 살 그 소년은 어머니의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시,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사람이 총 사령관과 장관이 될 것이다”라고 공포하니, 그의 조카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서 총사령관이 됨은 물론 천하명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욕이 너무 강해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면 이종사촌(아마사)을 암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수고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만, 애를 쓰는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금생과 내생에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마11:12, 현대인의성경).


2021/04/14
5살 어린 아들의 말하였습니다: “엄마, 내가 성탄절 선물로 제일 원하는 게 무언지 아세요?” 어머니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엄마에요. 나는 엄마를 굉장히 사랑해서, 엄마가 오래오래 살길 원해요.”
그렇게 말한 후 아이는 통통한 팔로 어머니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야만 하였고, 그후로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향한 사랑이 담배 중독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준 것이었습니다. 1945년 나찌로부터 해방된 루마니아는 소련이 통치하였습니다. 당연히 루마니아 그리스도인들은 모조리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브란트 목사님 부부는 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자신들도 잡혀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마침내 응답되었습니다. 먼저 1948년 목사님은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석방되지만, 석방 후에도 담대하게 지하교회를 다니며 간증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감옥의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체포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역시 응답되어 1959년 밀고를 받아 들이닥친 경찰에게 잡혀 6년을 복역합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선택하신 것은 고통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랑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


2021/04/15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네 동생과 나누어 먹어라.”
“무슨 뜻이예요?”
“네 동생에게 큰 쪽을 주란 말이다.”
그러자 그 아들은 사과를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줘서 그 아이가 예수님의 방법으로 나와 사과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어요.”
이 아이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사과가 아니라 큰 재산 혹은 권력을 나누는 문제라면 어른들 사이에서 역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 방지를 위해 합리적 기준이 법률로 제정되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수고한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는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포도원을 가꾸기 원하는 주인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여러 번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용한 일꾼은 오후 4시에 고용되었으나, 품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동일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보내어 맨 나중에 온 일꾼부터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시켰습니다. 당연히 아침에 들어와 더 많은 고생을 한 일꾼들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친구여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모두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것이 아니냐? 네 것을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내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열심히 일하였으나 남이 먼저 승진하거나,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가질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허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나눌 때는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33).


2021/04/16
잠언12:25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번민이 일지만, 좋은 말 한 마디로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새번역)
이 잠언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언어 사용을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근심 때문에 마음이 무겁더라도, 좋은 말 한 마디나, 좋은 소식 하나가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기쁜 마음을 갖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근심이란 삶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심한 정서적 고통입니다. 근심이 마음에 들어 오면 그런 사람은 불안정한 바다와 같이 요동하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을 가지게 되면 매사에 합리적으로 사고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만큼 근심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에 반하여 좋은 말(a good word)이란 그런 근심을 만들어 내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상쇄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근심이 사람을 쫓아내는 반면, 인격적이며 친절하고, 즐거우며 부드럽고, 적절하며 사려깊은 말은 사람을 회복시켜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요셉이 아직 이집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게 된 야곱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말(메시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복음의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왕으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러분의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올려 놓으셔야 합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4:6-7, 새번역).

매일묵상(2021/4/5 – 4/9)

2021/4/5
시편14편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바보)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6)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절(7절)에 가면 시편 기자의 관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1:18절 이하에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피조물 중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 뱀, 물고기, 곤충 등-의 본을 따 만든 우상을 섬기고, 창조주가 제정한 남과 여의 법칙을 무시하여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운 짓을 행하도록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은 온갖 죄를 범하도록 유도해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며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은 한 마디로 지적, 도덕적 자살자들입니다. 또한 교양있는 무신론자들은 그런 무모한 도덕적 타락까지 내려가지는 않으나 남의 행동이 그르다고 판단하면서도 자신도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2021/4/6
어떤 무신론자의 아들(소년)이 그 부모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게 더 안전하겠어요. 그러면 우리를 일단 천국으로 데려갈지 모르잖아요?”
­이 세상은 절대로 인간이 창조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론, 빛, 시간, 공간, 물, 공중의 새, 꽃, 나무와 돌 등을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살다가 예외 없이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런 낯설고 무서운 장소에 살게 된 인간은 고민합니다. 여기서 수 많은 철학과 종교가 태어났습니다. 무신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무신론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 주장의 성격이 있습니다. 신을 전제 하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 한계는 최선을 다하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이체와 그의 초인사상입니다. 불행히도 니이체는 10년 동안 정신병자가 되었고, 결국 그의 의지에 반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네가 틀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메시지를 전개하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여러 사건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이 증거를 가진 사도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였으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근거 없이 떠들지 말고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행17:31, 새번역).


2021/4/7
범브란트 목사님 가족이 함께 지낸적 있는 인디언 가족은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생전 처음 아주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아 신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리가 아파 구두를 벗고 있었는데, 이를 본 그 아이는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서 목사님에게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받지 않았더니 묻기를 “목사님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구두 한 짝을 벗어 주게 된 과정은, 식사 도중 “누구든지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주라” 침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자신의 삶에 적용하였으나 상식에 어긋나서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19세기말 조선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신자 몇명이 등 뒤에 X 자로 나무를 만들어 지고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결국 주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27:14, 새번역) 혹은 “미련한 사람이 입에 담는 잠언은, 술 취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다.”(26:9)고 경계하여 분별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분별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마땅히 이 분별력을 기초로, 그리고 그 분별력을 따라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잠3:15, 새번역).


2021/4/8
어느 여성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청바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청바지는 유명 패션 모델 지지하디드가 입은 청바지로서 댓글이 수천개가 달려있었습니다. : “너무 예쁘다! 이거 어느 회사의 것이야? 어디서 살 수 있지? 얼마야? …..” 그러나 너무 비쌌습니다. 이때 이 여성은 유사한 청바지를 저렴하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2년여 시장 조사 끝에 확신을 얻어 시티은행원 자리를 나와 3명이 패션 스타트업 추시(Choosy)를 만들었습니다(2018년). 그리고 60억원의 투자자금을 모집하자, 알고리즘부터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제작할 옷을 선정하였습니다. 그 옷은 고객의 실시간 피드백이 반영된 제품으로서 100달러 이하의 값으로 소량만을 주문받아 제작됩니다. 2018년 7월 서비스가 시작되자 옷마다 금방 완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전정신, 창의성, 치밀한 계산을 거쳐 사업에 뛰어든 추시 CEO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앉아서 영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치밀하게 계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면 세상적으로 잃어버릴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섰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막10:29-31, 새번역).


2021/4/9
잠언12:24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은 다스리게 되나, 게으른 사람은 힘에 겨운 일을 하게 되는 운명을 대조함으로서 부지런함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들로서 독립성과 힘을 갖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자들로서 결국 강제로 노동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을 피하는 손은 결국 가장 힘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독립성을 잃고 고된 일을 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맡아 부지런히 완수하여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 잠언은 솔로몬의 것입니다. 솔로몬은 통치 말기에 여로보암을 주목하여 감독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능력 있고, 부지런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솔로몬의 범죄 때문에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떼어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한 여로보암은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10지파를 대표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대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르호보암이 강제노동을 경감해 줄 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동조하는 10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반면 통치에 어리석고 게을렀던 르호보암은 두 지파만 거느린 약소국 유대 왕국의 왕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쓴 잠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 둔다.”(잠6:6-8, 새번역). 

매일묵상(2021/3/29 – 4/2)

2021/3/29
2021년 고난주간은 3월28일 시작되어 4월 3일 토요일에 끝납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날입니다. 시편118편을 묵상하겠습니다.

시편118편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22-23절)


출애굽의 목적은 노예 해방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구속에 있습니다. 본 시편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행진하여 성전 문들에 이르고(19), 그 문들을 통과하여 제단으로 가고 있습니다(27). 이 과정에서 순례자들과 지도자 사이에서는 구원의 체험을 노래하는 찬송과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1-18). 그러나 19절을 넘어가면 어조가 바뀝니다. 순례자들은 주님께 가서 경배하고자 의의 문들을 열라고 외치는데, 문지기는 이 문은 주님께 속한 것이니 의인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20). 시편기자는 이미 주님의 능력으로 원수들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며 감사 드립니다(21). 옛 이스라엘에서 집을 지을 때 필요 없다고 버린 돌이 다른 경우에는 오히려 집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요긴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습니다. 바로의 노예가 된 민족이 선택되어 구속받음으로 인간 구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분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모두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이를 듣고 보는 자마다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누가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주님으로 인하여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드려야만 합니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시편118:10, 새번역).


2021/3/30
오늘은 고난 주간 중 세 번째 날(화요일)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어떤 불가능한 난제도 다 이루어지고 해결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신구약 성경의 공통된 주제이며, 많은 실례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적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사르고, 죽었던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경우이며, 신약에는 소경이 눈을 뜨고, 베드로가 죽어 있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린 경우입니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른바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조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오늘 기도의 교훈을 주신 주님 역시 3흘 뒤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중핵에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번이나 기도를 드렸으나 응답받지 못한 후 이를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는 늘 시편 기자의 외침이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시편118:9, 새번역).


2021/3/31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자, 주님은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날은 하나님 아버지이외는 어떤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신자들은 주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전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2021/4/1
목요일: 예루살렘 성 내에서 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지내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축약적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그리고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제자들과 후에 믿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자마자, 로마 군인과 성전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안나스의 사위이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또 받은 후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마26:62-66).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후 또 다시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마26:68-69).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 베드로가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8).


2021/4/2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요18:36-37).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정치적 목적을 따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요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53:11-12).

매일묵상(2021/3/22-26)

2021/03/22
시편13편 – 쓸쓸함이 환희로 변화함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5절, 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3파트로 나누어집니다. 마음이 비탄에 젖었으나(1,2절), 이 비탄은 절박한 도움의 기도로 융합되어(3,4절), 마지막으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믿고 평온한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5,6절). 시인이 비탄에 젖은 까닭은 절박한 상황이나 하나님은 신속히 응답하지 않고(영적인 차원), 자기 영혼은 근심 속에 빠져 있는데(개인적 차원), 원수는 의기양양하게 나다니는 상황(상황적 차원)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세 부분을 모두 언급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의 결과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믿게 되고, 시인의 슬픔은 기쁨이 됩니다. 그것은 근심스러운 상황을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의 비탄은 기도를 통하여 환희로 변화되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길 때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였습니다(삼하15-17장).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자 그의 모략이 어리석게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새에게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항복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라고 밀령을 내렸습니다. 다윗은 울며 맨발로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은 기습작전을, 후새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제안하였고 후새의 전략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멸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묘책을 좌절시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신뢰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16:33).


2021/03/23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십자가형과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한 어린이가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일 리가 없어요”
“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목사님이 그 이야기를 할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났을 거예요”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종려주일로서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이 연도에 나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요한복음은 백성들이 얼마 전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환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 본인은 성에 다가오시자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환호하는 유대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멸망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주님의 말씀대로 40년 이내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나귀 타고 입성하신 지 5일 후 유대지도층의 고발로 십자가 형에 처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본 사실이고, 실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원하여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사실은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왕으로 임명되셨다는 사실은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 보다 더 강력한 증언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왕의 등극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소식과 선포이지 논리가 아닙니다. 보도를 들은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5:8).


2021/03/24
어떤 소년의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교회에 가서 요람에 누인 아기 예수의 상을 꺼내 집으로 가져오면서 그 상에게 말하였습니다.
“자, 이제 엄마가 없는 게 어떤 건지 알겠지?”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회복되었고, 소년은 아기 예수의 상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마음은 달리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히 소년의 행동과 소년의 어머니의 회복은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정신 심리학의 목표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어린 아이적 요소 – 상처 입은 자아 등 -로 인한 정신 질환을 치료하여 정상적인 어른의 수준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의사와 함께 굿굿하게 이겨나가면 마음은 치료받게 됩니다. 물론 여러 약물이 투여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치료와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장사된 후 사흘만에 부활하사 어두움의 세력들을 포함한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주의 진정한 주인으로 임명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사화복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그분의 결정을 거치지 않으면 발생 불가능하며,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짐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같은 고난을 당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징크스에 휘들리거나, 어린아이처럼 움추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맡기고 굿굿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니, 자연히 정신 심리학이 달성하려는 목표가 성취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과 같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시편125:1, 새번역).


2021/03/25
다섯 살 된 미하이가 말썽을 부리다 전기 충격을 받자 보모는 “넌 이제 죽을 거야!”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믿은 미하이가 그런 슬픈 사연을 말하자, 아빠는 안심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혹 네가 죽더라도 넌 천당에 갈 테니까” 그러자 미하이는
“그러겠지요. 그러나 난 여기 살면서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하였습니다.

R.풀검은 책(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 말합니다.
 “지혜는…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매일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경이로움을 느끼자./ 금붕어와 햄스터와 흰쥐와 스티로폼컵 속의 작은 씨앗마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속에 들어 있다. 황금률과 사랑과 기본적인 위생, 그리고 환경과 정치와 평등과 건강한 삶까지”
만약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상기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은 천당(1,000당)은 아니어도 팔백당(800당)은 될 것입니다. 그밖에 병들고 죽고, 낡아지는 문제 등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나라를 도래시킬 때까지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치원생 미하이의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


2021/03/226
잠언12:23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12:16-23절을 전체적으로 볼 때, 바보는 자신의 위험한 감정이나 도덕적인 오만함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모욕과 지식 모두를 감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자는 올바른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자신의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통찰을 숨겨두는 반면, 바보들은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오만한 행동과 말을 쏟아냄으로 끊임없이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혜자는 바른 상황을 기다릴 수 있는 자기통제력과 어느 시기에 입을 열어야 하는지를 분간할 신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절제하는 동안 자신의 상황을 통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그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요청하는 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숨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들을 귀가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나, 밝힐 경우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감추어 두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이 잠언을 배웠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모든 진리가 예외 없이 각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며, 또 모든 때와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도외시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로운 욥을 책망하고 끊임없이 회개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쏟아낸 오만한 도덕적 판단으로 재앙을 당한 욥은 더욱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욥을 변호하셨고, 세 친구의 어리석음에 노하셨습니다. 욥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슬기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매일묵상(2021/03/15 – 19)

2021/03/15
시편12편 – 다윗의 시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6절, 새번역)

시의 형태는 기도(1-2) – 약속(3-6) – 기도(7-8)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악인들의 거짓말로 신실한 사람들이 없어지는 등 위협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약속을 듣고 안심합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의 말과 달리 주님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이 여전히 주위에 우글거리는 현실 역시 도외시 하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중상모략하는 일은 3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은 ‘말(word)’이 갖는 위력을 보여줍니다. 첫 조상의 타락 역시 ‘말’ 때문입니다. 순진한 하와와 아담은 그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결과 인류는 마귀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 말씀은 ‘복음’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진실하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공자는 60이 되면 “이순- 耳順” 즉 귀가 순하여져 말을 분별한다는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분은 성경을 모르는 분이나 열심히 노력하여 그런 분별력을 가졌음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분별력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게 되면 저 세상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큰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시19:11, 새번역).



2021/03/16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훌륭하다고 여기는 일’을 언급합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하여 평생을 들여다 보다가 물에 익사하여 수선화(narcissus)가 됐다고 합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 소년이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도 나르시시스트예요. 그분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해요. 그런데 머린랜드에 구경갔을 때 보니까 고래와 물개들이 기가막힌 재주를 다 피우던데요. 몸무게가 사십 톤이나 나가는 사람이 뒤로 돌 수 있겠어요? 성경은 왜 예수님을 사자나 양이라고 불러요? 사자는 사람보다 강하고 양은 사람보다 겸손하기 때문이지요.”

확실히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동물계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에, 인간속에는 창조자의 형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여 주인되신 하나님을 머리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 대신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채워버렸습니다. 이것이 죄의 근본이요, 원죄입니다. 모두 나르시시스트(자기애에 빠진 사람)가 된 것입니다. 물론 건전한 ‘자기애(自己愛)’는 인간 창조의 구성부분이지만, 인간은 모두 균형을 못잡고 넘어졌습니다. 회개는 여기서 돌이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겸손의 의사표시입니다. 그러나 범한 죄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께 돌아갈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그 길을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여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2021/03/17
미국 콜로라도 주의 오로라시에 살고 있는 찰리라는 8살 소년은 아주 장난이 심하였습니다. 한번은 일부러 다른 학생들의 학용품을 부수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찰리의 어머니는 그에게 줄 용돈으로 학용품값을 대신 물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화가 났습니다.

“내가 말썽을 부리면 용돈을 빼앗기는데, 우리 부모가 크게 싸우고 말썽을 부려도, 하나님은 그분들의 용돈을 빼앗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찰리의 동생은 할머니에게 “형은 하나님을 방문하기 위해 천국에 갔으니까 두어 주일 지나면 돌아올 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판단력과 경험이 미숙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부모에게는 미성숙한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양육할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해야만 한다는 방향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적용에서는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인간의 지혜에 맡겨져 있습니다. 현대의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어린아이의 발육과정, 가정환경, 그리고 정신심리적인 관계를 다룬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젖이나 우유를 먹고 자라는 데도 아무런 탈이 없는 이유는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나오지만, 4-5살이 되면 이 효소가 사라지기에 (특히 동양인들) 반드시 젖을 떼고 밥을 먹여야만 합니다. 이를 배운 사람들은 아이들의 신체변화를 이해하고 양육 시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농부처럼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는 주님을 경외하는 성숙한 어른이 될 것입니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워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1:7, 공동번역).


2021/03/18
레닌이 어렸을 때 교회에 결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레닌의 부친이 신부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였을 때, “때려요, 힘껏 때려야 합니다.”라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어린 레닌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레닌의 전기 작가들은 어린 레닌이 이때 맞은 한 번 매가 그로 하여금 평생토록 하나님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유고슬라비아 독재자 티토는 어렸을 때 미사 때 신부를 돕다가 포도주를 엎질렀고, 신부에게 뺨을 맞으면서 꺼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티토는 그 사건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고 혁명을 위해 대량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에게 책을 읽어 주어도 소는 알아듣지 못합니다만, 소도 자신의 새끼를 돌볼 줄 압니다. 또한 닭은 부화된 병아리들을 이끌며 먹이를 주지만, 타조는 사막에 알을 낳고는 개의치 않고 그냥 떠납니다. 그러나 달릴 때는 말 탄 자 보다 빠릅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작품이요 의지의 반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이끌려 결정하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즉 감정의 동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교회는 편애나, 거치른 말, 이유 없는 벌 등으로 자녀들이 분노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나는 부모에게 귀한 존재다”라는 사랑의 감정을 갖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을 포함한 세상은 사랑의 훈련장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희생이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참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14:14, 공동번역).


2021/03/19
잠언12:22
“주님은 거짓말을 하는 입술은 미워하시지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기뻐하신다.”(새번역)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감찰하시어, 거짓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시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미워하신다” 라는 단어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그분을 구역질나게 하여서 그들을 제쳐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 입술(들)”이란 어리석은 자들(바보들)을 지칭하고,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그들이 가진 자기 중심적 성향은 의도적으로(19절) 혹은 의도치 않았던(17절) 간에 상황을 왜곡시키게 만듭니다. 그 반면 “진실하게”란 말은 신뢰할 수 있는 성품에서 솟구쳐 나오는 선한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기뻐하신다”라는 단어는 주님께 인정을 받아서, 그분이 주시는 보호와 축복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잠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온 세상의 주인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무신론 자들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심판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시고 집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참으로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이신 후에 능히 심판하여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았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혀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입니다. 우리들은 마지막 날 주님을 대면할 것이기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온 세상을 다 얻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골1:10, 새번역).

매일묵상(2021/03/08 – 12)

2021/03/08
시편11편 – 믿음과 진리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공동번역)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왕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다윗이 산 속에서 숨어지내는 상황이 연상됩니다. 그 상황은 매복한 적에게 화살을 맞을 것과 같이 위급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블레셋과 같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보호를 믿는 다윗조차 죽을 가능성에 심히 불안하게 됩니다(1-3). 이때 늘 신실하게 살아온 다윗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이 모든 상황을 감찰하시고 공정한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님의 정의와 심판을 믿고 큰 안위를 가지게 됩니다(4-7). 이렇게 고백한 다윗은 계속된 사울의 추적에 엔게디의 한 굴로 피신합니다. 그때 사울은 3천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울은 용변을 보러 다윗이 6백명의 군사들과 함께 숨어 있는 굴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것은 쉬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를 네 손에 붙일 것이라는 신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안전하게 굴을 나가도록 부하들을 단속까지 합니다. 이후 한 번 더 다윗은 자신을 수색하는 사울을 살려주면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고난의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손에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는 고난의 과정에서 다윗이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의로우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되 사사로운 지혜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우셔서, 정의로운 일을 사랑하는 분이시니, 정직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시11:7, 새번역).


2021/03/09
성탄절이 가까워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 아직도 집을 못 구했어요?”

정말 어린 학생다운 순진한 질문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집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사렛에 정착하였다고 하니 집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가족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땅 위에 있는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공수래 공수거! 오래 전 미술개론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참 재능 있어 일본에서 상당한 이름을 떨친 어떤 한국 미술가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예술에만 정진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었고, 혈육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인생은 공이다”라는 편지가 자신에게 와 급히 찾아 갔더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습니다. 이분은 살아 있을 때는 거주할 집이 있었지만,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갈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 중, 아니 온 인류 중에 오직 한 분만이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님의 가족들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소망을 가지고 땅에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2021/03/10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가 여덟 살 때 이스라엘을 며칠 방문하고는,
“이곳은 고양이들이 할퀴지 않고, 개들이 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나라예요.” 그러나 후에 고양이를 만나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아멜리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어떤 고양이는 할퀴지만, 아마 그들은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고양이들일 거예요.”

우리는 역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 방문하고 나쁜 일을 경험한 뒤, “이 나라 국민성은 아주 나빠.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어디있어?”라고 말하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의 국민성은 나쁘지만, 더러는 좋은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하나, 어느 정도의 한계 내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개개인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악인과 선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 깊은 밀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입니다. 누가 선하고 악하냐는 동기에까지 파고들어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시면서 마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역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실 때까지 가룟 유다에게 선을 베푸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는 흑백논리를 넘어 지혜를 가지고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행하신 하나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13:49).


2021/03/11
범브란트 목사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복음을 전혀 모르는 러시아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에게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침례, 산상수훈, 비유, 기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그 장교는 매우 기뻐하여,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외쳤습니다.
“요정같이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나는 이때까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은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 당한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실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증거를 예수님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말에 그 장교는 찬성하였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제 구주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죽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여주었을 때 비로서 그의 얼굴은 다시 환하게 빛났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웃고 울리게 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모든 민족에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단군신화,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세종 대왕과 같은 이야기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야기 없이 제대로 형성된 민족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그들이 자라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집필된 동기였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2021/03/12
잠언12:21절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지만,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새번역)

이 잠언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절과 함께 볼 때 속임을 베푸는 자(악인)와 화평케 하려는 자(의인) 사이에 서로 다른 운명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의할 부분은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악인이 의인에게 해악을 의도하여도 의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여 받는 마지막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약속은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날에 흠 없는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결국 현재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시대를 통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최선의 것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과 협력하여 모든 것들이 선에 이르도록 일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롬8:28). 그 뿐이 아닙니다.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은 우리가 시험받을 때 붙들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구해주시고, 더 나아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한편 잠언은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현실에서의 괴리를 목격하지만, 확실한 것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전제할 때 악인에게 발생하는 가장 무서운 일은 형통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홀연히 찾아와 악인을 데리고 갈 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뿐입니다. “죄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지 말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러면, 너의 미래가 밝아지고, 너의 소망도 끊어지지 않는다.”(잠23:17,18, 새번역)

매일묵상(2021/03/02 – 05)

2021/03/02
시편 10편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해주십시오.”(시10:2, 새번역)

시편 9편에 이은 10편 중심에는 악인에 대한 다가올 심판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세상에 편만한 악인들의 행위를 보고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서 왜 멀리서서 심판을 신속하게 집행하시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이렇게 심판이 지체되니 악인들은 탐욕과 포악을 행한 뒤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4), “하나님은 보고 있지 않는다”(11),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13) 등, 주님을 모독하고 안심한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할 것을 요청하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행동하셔서 세상이 정화될 것이나(16-18) 의인들은 그분을 기다려야만(15) 한다는 신뢰와 믿음의 가르침을 줍니다. 시편기자의 탄식과 같이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으나, 응답이 더딘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가 진정한 믿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전파에 심히 방해가 되는 장애가 몸에 있자 간절히 3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 9)는 십자가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 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 방법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한 손 아래 여러분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골1:11, 새번역).


2021/03/03
러시아의 그리스도인 겐하디 말라쵸프가 선고받은 감옥 생활을 다 끝내고 석방되자 그의 가족이 찾아 왔습니다. 감옥 문에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실거예요?”
“너희들과 같이 집에 가야지”
“아녜요, 아버지가 계실 곳은 바로 여기예요.”
“왜 그러니?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게 기쁘지 않니?”
“기쁘지 않아요. 전 언제나 아버지가 계실 곳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감옥이란 말을 들어왔어요”

이 딸은 아버지가 감옥에 간 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산 경험이 없습니다. 비록 부녀 관계라 하더라도, 삶을 함께 나누지 못하였다면 서먹서먹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같습니다. 만약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 그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창조와 심판의 하나님은 되실 수 있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구속의 하나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삶에 대한 공통의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겪으셨으며, 속죄의 대업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당신의 임재이신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황이 생각과 달리 여의치 않아도 주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16:1, 새번역).


2021/03/04
신앙으로 감옥에 갇힌 미쉘 사크하로브에게 아내와 딸이 면회하러 갔습니다. 미쉘은 자기 딸을 향해 팔을 뻗으며 “애야 이리 와라” 하자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나는 저 사람에게 가기 싫어요. 난 아빠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아주 미남이었어요. 빼빼 마르고 주름살 투성이의 이 사람은 아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늘 보고 싶어하는 분을 몰라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자녀들만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사랑했으나, 종의 형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힘 없는 아기로 나셨고, 양부 요셉 역시 목수로 보잘 것 없는 계층이었습니다. 더구나 나사렛이란 산 동네에서 선생 없이 자라시자 예루살렘의 지식인들은 무시하였습니다. 한편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신 후 전도하시다가 고향 나사렛에 들려 회당에서 설교하자,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저 사람의 누이동생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않느냐?”(막6:3) 하면서 고향 사람들 역시 주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승천하여 섭리 가운데, 여러 모양으로 – 가난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연약하며, 의 때문에 핍박당하는 모습 등 – 지금도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약 해외 선교사 부부가 왔을 때 손님 대접을 잘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집에서 극진히 섬기는 것은 코로나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용이 들더라도 호텔에 숙박시켜야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10-11a).


2021/03/05
잠언12: 20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이 잠언은 악을 도모하여 고통을 가하려는 자들과 화평을 위해 권고하는 자들을 대조하면서, 전자에게는 ‘속임’이, 후자에게는 ‘기쁨’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그 특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속임을 꾀하는 자들은 진실한 기쁨을 가질 수 없지만, 화평을 도모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고가 상대방은 물론 공동체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기에 희락이 있습니다. 여기서 ‘속임 Deceit’이란 악을 꾀하는 자들의 마음에 뿌리박혀 인격의 한 구성부분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속이는 자들은 냉정하게 계산하여 상대방을 능숙하게 해치지만, 어리석은 자들(18절, 바보) 충동적이고 생각없이 말하는 자들로서 전자가 훨씬 악한 인격체입니다. 당연히 그런 인격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은 비난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락’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듯이, 악을 행하는 자의 삶에는 희락과 화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여서 타인을 해치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익의 판단기준은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주인이 계시고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당하게 받는 재물과 명성 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경외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십시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풍성히 우리의 삶을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2:26, 새번역)

매일묵상(2021/02/22 – 25)


2021/02/22
시편 9편
“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받을 때에 피신할 견고한 성이십니다.”(9절, 새번역)

시편 9편과 10편은 하나의 시입니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히브리 원문의 사본이 이 두 시편을 하나로 취급하고 있고, 형식적으로도 두 시가 하나로 묶여지는 기교(acrostic pattern)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를 드립니다(1-3). 그 다음으로 이방 국가들에 대한 재판장으로서의 야훼를 상술합니다(4-8). 셋째로, 야훼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분은 친히 피난처가 되십니다(9-14). 마지막으로, 악인들에 합당한 심판을 묘사하면서 9편을 마칩니다(15-20). 한편, 9절에 있는 ‘요새’와 ‘견고한 성’은 같은 히브리 단어(misgab)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히브리 단어는 접근이 불가능한 높고 견고한 바위로 된 장소로서, 침입해 오는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께 피한다면 안전할 수 있습니다. 비시1,30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태평세월을 거치자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미디안을 불러들여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셨고, 7년 간 미디안의 학정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서서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은 이들의 회개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보내어 미디안을 쳐 부수고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피할 요새가 되심은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고, 시편 기자처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약5:13, 새번역).


2021/02/23
어떤 사람이 12살 된 유대 소년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이런 경고를 하였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사실인데, 네가 믿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마찬가지 이유로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데 선생님이 이것들을 믿는다면, 선생님은 멸망하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대인들과의 이 논쟁은 2천년이나 되었고, 이 논쟁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습니다(AD48). 논쟁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정통 보수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규정된 할례, 안식일, 음식 규정 등을 지키며, 선행을 하되, 범하는 죄악들에 대한 속죄는 제물, 기도, 회개, 그리고 선행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비교하여 선을 행한 것이 많으면 천국에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심판을 내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상의 속죄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어떤 방법도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속죄를 이루신 뒤, 부활 승천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전형적인 유대인은 사도 바울입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도마 등 수 많은 유대 증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만유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2021/02/24
러시아에서 한 안내인이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설명하고, 끔찍한 종교 재판 장면과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죄에서 구해 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거죠. 더구나 그들은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고, 그 부활한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답니다.”
그러자 열두 살된 소녀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 동무,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 행위를 하였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관 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다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
소녀는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비록 현대에서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해도,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짓눌려 살고, 천당을 놓치는 것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제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겠어요.” 자신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행17: 32, 새번역).


2021/02/25
잠언12:19절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이 잠언은 짧지만 기교가 들어가 있습니다. 중심된 내용은 ‘영원히’와 ‘잠시 동안’이라는 부사의 대조입니다. 이 두 부사는 히브리 원문에는 이 구절의 중심에 배치되어 뜻이 대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단어 사용의 재치(wordplay)가 들어 있습니다. 원문의 순서대로 풀어 보면 “진실한 입술은 굳게 세워지는데 그 기간은 무한정이다 그러나 눈 깜빡할 동안 존재하는 혀가 있는데 (그 혀는) 거짓되었다.” 진실한 입술이 영원히 굳게 세워지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창조하신 질서에 일치하기 때문이고, 거짓된 입술이 눈 깜빡할 사이에만 존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거짓된 혀들을 미워하십니다. 거짓과 관련된 드라마틱한 성경의 사건은 바로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10명의 이복형제들입니다. 이들은 질투의 대상이 된 요셉을 은 20량에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후 찢은 요셉의 옷에 양의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이고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야곱은 속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고된 훈련을 통과시키면서 훌륭한 신앙인이자 정치가로 키워내셨습니다. 거짓말은 탄로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는커녕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형들의 입장은 그야말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여러분의 자녀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진실한 사람으로 키워내실 것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매일묵상(2021/02/15 – 19)

2021/02/15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2021/02/16
6살 된 도로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형 ‘엘리자벳’을 그냥 인형으로만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 항의하였습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소녀란 말예요. 그녀가 만약 그냥 인형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자벳은 그냥 인형이 아니예요”

물론 도로시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도로시의 생각이 현실화 되는 메타버스(가상 우주)게임에서는 그 인형이 소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 우주 공간은 인간이 만든 그야말로 가상의 세계이고, 우리가 숨쉬고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현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주장한다고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규정에 합당하여야 비로서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미부여’정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시각(철학, 관점, 세계관)에서 만물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토대로 자신들의 삶을 전개해 나가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들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거나 아니면 모르겠다 등의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의 생각과 틀리게 되면 어린 도로시의 생각과 같게 됩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의 이성은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전제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형은 인형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성숙한 이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롬1:22, 새번역).


2021/02/17
여섯 살 된 소년이 부모와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식사 도중에 아이가 여주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사님, 요리가 맛이 없어요 정말 요리할 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하셨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잘못 이해한다면 위의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게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지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 역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발명한 문자와 문학 그리고 상식 역사 철학 등이 도구가 되어 기록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문학작품이요 역사책이고 철학(신학)책입니다. 시편이 그렇고 잠언이 그러하며, 욥기, 에스더, 신명기, 요한복음, 로마서, 사도행전 등이 그러합니다. 어린 아이는 도저히 이런 성경들을 쓰거나 이해할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주님은 하나님 사랑괴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사는 그런 삶이 번제와 제물보다 더 낫다고 동조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고백과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면 나는 빠른 시일 안에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오만방자한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19-20).


2021/02/18
미하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관이 허름한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가자, 식당을 본 알렉스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누추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알렉스는 자기가 식사 기도를 하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당신께서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바깥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흉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언제나 안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안을 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극작가 도로시 세이어즈(1893-1957)는, “… 지적이고 호소력을 지닌 배우가 대사 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불어넣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극작가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배우가 난해한 해석을 적절하게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이다.”(창조자의 정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소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온갖 모험, 스릴, 고난, 기쁨, 슬픔, 고통, 두려움, 삶과 죽음 등이 존재합니다. 자유의지가 등장 인물 각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각자는 반응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러 난관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지만, 인내하면서 통과해 내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욥의 모든 역경을 돌이켜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시 삶의 여러 부분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2:20, 새번역).


2021/02/19
잠언12장 18절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새번역)

잠언은 사려깊은 언어 사용을 격려합니다. 그 방법은 생각 없이 쏟아 내는 말이 주는 정신적 상처를 비수에 찔린 치명적인 육체의 상처와 대비시키거나, 혹은 사려깊은 말이 미치는 좋은 영향을 육신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양약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말이나 혹은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잠언에서 바보들이나 하는 반응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한편, ‘비수(검)’는 죽이기 위하여 고안된 전투 무기로서 의도적이고 무정한 살인자를 상징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말(혀)은 치료제입니다. 이 비유는 해로운 갈등들을 풀어서 화목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존 빌립 목사님은 차를 몰고 2틀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친구 부인이 암으로 임종 직전에 있었고,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의 죽음이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친구를 만나 고린도전서3:21-23을 펴서 “메리가 죽어가고 있으나 그 죽음은 네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말하여주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인 동시에 선물의 성격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메리에게 죽음은 고통을 잠잠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좋은 ‘약’이 있어 사람들을 치료하기 너무나 좋은 위치에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엡4:29,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