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5/31 – 6/4)

2021/5/31
시편24편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3절, 새번역)

시의 배경으로 100년 간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안치시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삼하6장). 시는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주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으며(3-5절), 주님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가?(7-10절)” 그리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오직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 있으며(4절), 그분은 주권과 영광과 권능과 구속의 권리를 가지고 오신다(7-9절)” 이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로서 시를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창조 –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야훼)으로서(1-2절), 3절 이하 질문의 전제를 이룹니다. (2) 거룩 – ‘거룩’이란 특징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의 장막에 들어갈 자격을 논한 시편15편을 깨끗한 손, 청결한 마음, 참된 신앙, 진실된 말 4가지로 압축합니다(4절). (3) 승리 – ‘고대의 문들’에 대한 도전은 왕과 용사로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벌이는 전투의 외침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쟁들과 애굽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묘사하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하러 인간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권력과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과 싸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고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절)


2021/6/1
시편 25편 – 곤고한 날을 위한 ABC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9절, 새번역)

25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벹 22개의 순서대로(두 군데서 불규칙함)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첫 음절에는 히브리어 자음의 순서인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연속  등장합니다. 내용은 원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눌림, 주님의 인도에 대한 간청, 그리고 죄의식 때문에 발생되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어조는 차분하고, 시인이 가지는 주님에 대한 신뢰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감안한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개인적인 간구(1-21절)
      (1-5절) 신뢰, 소망, 기도
             (6-10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죄인들)
             (11-14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경건한 자들)   
      (15-21절) 신뢰, 소망, 기도

2. 이스라엘을 위한 간구(22절)

한편,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중 하나(b-베트)는 모호하게, 또 하나(q-코프)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알파벹 시 형태는 아닙니다. 또한 개인적인 신뢰, 소망, 기도가 드려지다 22절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은 생로병사와 같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패턴이 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등장하여 흐름을 깬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변함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7:14, 새번역)


2021/6/2
잠언13:14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가르침(토라)’과 ‘계명(미스바)’는 유사 개념으로 함께 등장하나(3:1), 여기서는 14절과 13절에 각각 등장하여 두 구절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지혜자의 가르침’이라는 어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혜자의 가르침’과 ‘계명을 두려워 하는 자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함께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가 치뤄야 할 그 빚은 죽음(14절)이고, 그분의 말씀을 늘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보상은 생명(14절)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잠언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하는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지혜자의 가르침’은 무서운 함정들이 숨겨져 있는 여행길 옆의 땅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샘’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자녀들이나 속기 쉬운 자들은 현명해 질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여 악으로부터 돌아 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샘’은 잠언이 주는 영감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가지는 풍성한 삶(생명)을 의미하며, ‘죽음의 그물’은 남을 잘 믿는 자들이나 둔한 바보들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많은 악의 대행자들 -못된 언어, 못된 행위, 악한 남자들과 여자들 -을 의미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문체와 탁월한 도덕성 때문에 사람들을 이끌어 생명의 진리를 마시게 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생의 여정에 생명의 샘은 오직 하나이지만, 죽음의 덫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잠언14:16, 새번역)


2021/6/3
잠언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5절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판단력, 통찰력을 뜻하는 ‘세켈’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지혜 good sense’는 ‘좋은 판단력’을 뜻하기에, 뛰어난 식견이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이른바 ‘양식(良識)’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16:22절(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에서는 지혜(명철)를 생명의 샘에 비유하면서 13:15절에 나오는 ‘지혜-세켈’와 14절의 ‘생명의 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며 그 가르침에 주의하여 그 샘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훌륭한 도덕적 인식과 이에 따른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호의를 받게 됩니다. 그 반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반역자들은 그 길이 험난하고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의 대표는 요셉, 사무엘,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그들의 뛰어난 판단력과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섬기는 삶은 본 잠언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줄 수 있는 은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받을 수 있다는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받는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을 때 주님의 응답과 돌보심 그리고 항해 경험으로 체득된 지혜로 폭풍 속에 난파될 배로부터 276명 전원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섬기기 위해 기도하십시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랴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2021/6/4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매일묵상(2021/5/24-28)

2021/5/24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의 이 기도를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드리셨습니다. 그 만큼 이 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습니다. 1-21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노래합니다. 22-31절은 구원받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은 시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인의 구원의 체험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경험하였습니다. 1-21절은 버림받은 고통(1절), 무력하게 십자가 상에 달려 있을 때 유대 지도층과 군중들의 비웃는 소리(6-8절). 십자가 상의 목마름의 고통(15절),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장면(16절), 자신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장면(18절)은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2-31절은 부활의 승리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형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요20:17).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다윗과 주님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고난으로 탄식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고난이 놀라운 감사와 찬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축복이며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시22:27, 새번역).


2021/5/25
시편23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6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시로서 시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각각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이라는 대목은 사무엘하17:27-29절을 회상시킵니다. 압살롬에 쫓겨 마하나임으로 피신한 왕 다윗은 군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를 통해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과 원수들이 포진한 비상 사태에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경험한 다윗은 이를 회상하고 감사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인생의 밤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이는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의 특권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2021/5/26
잠언13: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새번역)
8절은 재물과 책망의 주제를 다루고 9절은 이를 발전시켜 의인의 흥왕과 악인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재물 여부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도덕적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여 행복한 운명을 갖게 되는 반면, 이를 거부하는 악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여부는 의인과 악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에, 10절은 책망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은 물론 매우 슬기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충고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만한 바보는 자기 자신이 바르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지혜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여 전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줄 모릅니다. 당연히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들을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를 책망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고 도리어 격한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반면 충고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비판을 들을 때 한 번 더 생각하여 잘못된 점이 있다면 교정합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은 훨씬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에 밝은 유능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일을 추진해야만 할 것입니다. SNS가 발달한 요즈음 고객의 평점은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블랙컨슈머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공한 가게들은 이들의 의견 또한 무시하지 않고 고려하여 가게 발전의 디딤돌로 삼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 새번역).


2021/5/27
잠언 13:11절
“공으로 얻은 재산은 날아가지만 애써 모은 재산은 불어난다.”(공동번역).

7절에서 11절 총 다섯 구절은 부(재산)과 윤리에 관한 소 단락으로, 11절은 그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절이 8절에 암묵적으로 나오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 같이, 11절은 9절에서 논한 결론, 즉 의인의 영구한 부와 악인의 일시적인 부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잠언은 근면 성실하게 모든 재물을 긍정하나 악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정죄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물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는데, 영어는 이를 “easy money”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든 경우를 말하며, 폭정, 불의, 갈취, 거짓말 그리고 횡재 등이 포함됩니다. 이 반면, 인내, 근면, 사려 깊은 행동, 관대함 그리고 믿음이라는 덕들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등장하는 ‘애써 모은’(by hand의 의역)이라는 단어는 ‘점차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천천히, 적게, 꾸준히 손으로 일하여 재물을 축척한다는 의미이지 횡재는 생각도 없습니다. 실상 불의로 얻은 재물이 단명하고 올바르게 획득한 재물이 오래 간다는 말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성품과 가치의 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예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요구하여 쉽게 재물을 획득한 작은 아들은 먼 나라로 이주하여 허랑방탕하다가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 역시 재물을 어이없게 탕진하는데, 그 주된 이유가 재물의 가치와 관리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5/28
잠언 13:12절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새번역)

12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 19절은 ‘소원이 성취된다’라고 하여 8개의 구절(12-19)이 단락을 이루면서,  ‘지혜와 성취, 어리석음과 좌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실을 먹으려면 지혜자의 교훈에 목말라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모은 잠언은 생명샘입니다. 한편, 12절과 11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은 착실하게 모은 의인의 재물은 불어나지만, 힘안들이고 얻은 재산은 없어진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12절은 더 나아가 악인의 소망은 결국 이루지지 않아 마음이 병들지만, 의인의 소원은 성취되어 그의 삶의 생명나무가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망없는 외부적 상황은 심신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정신적, 심리적, 영적 에너지가 몸 전체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인이 가지는 소원성취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에너지를 갱신시키고, 용기를 새롭게 하여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합니다. 비록 윤리적인 단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요소를 반드시 전제하고 이 잠언을 읽어야만 하며,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실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저주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잠언13:14, 새번역).

매일묵상(2021/5/17 – 21)

2021/5/17
시편20편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7절, 새번역)

전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블레셋이 침공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큰 천둥을 보내어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히자 결국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아는 다윗은 전쟁 전날 밤 기도와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승리를 기원하는 본 시편을 지었습니다. 이 시는 여러 목소리가 들립니다. (1) 제사장과 백성의 기도 : 욍이 조용히 기도할 때 제사장과 백성은 왕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구합니다(1-2절). 이어 왕이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그들은 그것이 열납되기를 기도하며(3절), 그 결과 왕의 계획이 성공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를 간구합니다(4-5절). (2) 왕의 확신: 이에 대하여 왕은 기도(6절)와 믿음(7,8절)이 승리로 가는 두 가지 길이라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3) 마지막으로 제사장과 백성은 왕이 승리하도록 주님의 응답을 간구하면서 예배를 마칩니다(9절).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9:11,새번역).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을 배경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준비한 사람은 결전의 날 반드시 주님의 간섭과 은혜를 간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은 이때 좋은 기도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 (잠21:31, 새번역).


2021/5/18
시편21편 – 전쟁 후 : 승리의 노래
“온갖 좋은 복을 왕에게 내려 주시고, 왕의 머리에 순금 면류관을 씌워 주셨습니다”(3절)

환희에 찬 이 시는 왕의 대관식이나 기념일을 경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20편은 전쟁 전 승리를 위한 기도와 믿음을, 21편은 그 간구와 신뢰가 전쟁에서 응답되었음을 회상하며 노래합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언급은 각각 2-7절과 8-12절에 반영되었기에, 본 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1) 왕과 주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경험(1-7절) (2) 왕이 누릴 미래의 승리 (8-12) (3) 주님에게만 찬송을 (13절). 한편, 시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구약 역사의 중심에 놓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며 대륙을 잇는 무역로가 통과하는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많은 이방민족들이 함께 살면서 세력확장의 각축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늘 약소국이었기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이런 전쟁의 의미를 영적인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즉 예수께서 왕이자 용사로서 오셨지만, 로마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죄의 본질)과 사망, 그리고 마귀를 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죄인들의 손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고,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사 지금 이 세상을 배후에서 장악한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계십니다.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2021/5/19
잠언13: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본 잠언은 그 뜻이 매우 모호하여 다양하게 해석됩니만, 겉모습 때문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이런 면을 알기에 겉모습을 보고서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잠언은 물질적 부와 영적인 부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가난하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잠언은 세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1) 탐욕에 대한 책망: 탐욕은 타인을 희생하여 자신을 부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참고: 마16:26). 이 경우 본 잠언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바울에 의해 예증(마19:29; 고후6:10)된 ‘부유한 빈곤 rich poverty’의 역설을 권면합니다. (2) 자기 기만에 대한 경고: 이 경우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생각하나…..,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나 .….”라고 읽혀집니다. 너무나도 눈이 멀어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은 종이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3) 위선에 대한 정죄: 이 경우 본 잠언은 위선자를 정죄합니다. 가난한 바보가 스스로 부한 체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지혜로 성공한 것처럼 보여 사회적 존경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며, 부유한 바보가 가난한 체하는 것은 인색함을 숨기려는 몸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두 거짓말쟁이는 악한 자들로서, 전자는 합당치 못한 명예를 받고, 후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도움을 거절하여, 주님과 사회 모두에 수치가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엡4:15,현대인의성경).


2021/5/20
잠언 13:8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본 잠언은 해석이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 원인은 히브리어 단어 ‘게아라’가 ‘협박’과 ‘책망’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번역은 둘로 나누어 졌지만, 한글 번역 성경들은 모두 ‘협박’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게아라’를 ‘협박, 위협’의 의미로 본다면, 납치된 상황이 떠오르게 됩니다. 만약 부자가 납치되었거나 협박을 받고 있다면, 부자 자신이나 그 가족이 납치범이 요구하는 금액(속전)을 지불해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은 부의 힘을 보여주는 반면, 그런 재물도 협박을 당하지 않도록 할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난하게 된다면, 납치될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납치하여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은 힘이 있지만 그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반면 ‘게아라’를 ‘책망’으로 이해한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어떤 죄책을 지고 있는 상황이 전제됩니다. 그런 죄책을 아는 부자는 위협적인 도덕적 책망을 들으면 반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여 대가를 지불함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가난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NICOT). 여기서 ‘책망’이란 ‘도덕적 비난을 내용으로 하는 분노에 찬 항의’를 표시하며, ‘속(贖)하다ransom’는 목숨을 구하는 대가로 요구되거나 지불될 가격을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이 책망에 반응한 사람이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2021/5/21
잠언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기자는 유사한 히브리어 발음을 가진 두 단어 – ‘가난한- 라쉬’(8절)과 ‘사악한-레솨임’(9절) -를 사용하여 두 구절을 서로 연관시키는 동시에,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8절에 따르면, 사람이 도덕적인 질책을 받아들여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 재물은 죄책을 진 그를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그의 의가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구한 부는 오직 의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올바른 책망에 대하여 기꺼이 반응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도덕적 질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그는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논하고 있는 9절은 확실히 의미가 진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의 빛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성공과 행복 그리고 장수 등을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위 잠언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삽과 같은 시편 기자가 고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시편73편). 왜냐하면 악인이 죽을 때에도 그 힘이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래할 영원한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잠언은 단 한 경우도 예외가 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1-43).

매일묵상(2021/5/10 – 14)

2021/5/10
시편19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절)

본 시편은 3 종류의 목소리(voice)가 차례로 전면에 등장하여 3가지 주제를 연주함으로써 멋진 대위법( 對位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목소리는 창조물의 것(1-6절)으로, 주제는 ‘역설 Paradox’입니다. 온 우주는 아무런 음성도 내지 않지만 피조물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목소리(7-10)로서, 주제는 ‘완전perfection’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완전함을 노래합니다. 세 번째는 죄인의 목소리(11-14)로서, 주제는 ‘기도praying’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기도합니다. 먼저 창조물의 웅변(1-6절)을 들어보겠습니다. 온 우주는 공간과 시간과 땅을 통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선포합니다. 특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4절)에서 사용된 ‘소리’는 ‘줄Lin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할당된 지배권 혹은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 지배권은 날마다 새로이 떠오르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며 모든 곳을 비추는 ‘해’를 통해(5-6절) 행사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늘은 언어를 쏟아내지만, ‘언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 공간의 모든 별들이 서로 연결하는 줄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기이함입니다. 다만, 창조물의 그런 메시지는 제한되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말씀의 목소리’(7-10절)를 노래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2021/5/11
시편19편 (완전: 7-10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절)


모든 창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하지만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인간은 자연 종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7-10절). 그분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야훼)로서 본 단락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그 이름이 들려집니다. 계시된 그분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 법’으로 표현되는 6개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뜻(의지)을 알려주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토라)’은 계시된 그분의 뜻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며, ‘증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된 진리를 나타내고, ‘교훈’은 인생의 세부적 사항에 적용되는 측면을, ‘계명’은 순종의 측면을, ‘경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측면을, 마지막 ‘법’은 권위 있는 결정이라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된 하나님의 뜻은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오염이 없이 순결하며,’ ‘변함없이 영원하고,’ ‘참되고 의로우며,’ ‘귀중하고,’ ‘참된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달콤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참된 생명이 회복되며,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가르침을 받아 기쁘게 되고, 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바라는 놀라운 축복이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11-14절).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시편19:14).


2021/5/12
시편 19편 (기도: 11-14절)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13절, 새번역)

세 번째 목소리로 죄인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번 단락(11-14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권에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주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풍성한 상을 받는 진리를 발견합니다(11).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죄를 확신하고 용서를 구할 준비를 합니다(12). 중생한 그에게는 새로운 열망이 쏟아오르게 되는데, ‘온전한 삶’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것은 말씀 자체가 완전함과 같습니다. 특히 생각과 언어 사용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4). 주님도 자신이 한 말씀으로 그분 자신이 알려지는데(7-10),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창조물은 조용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순종의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신자의 절망과 열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14절이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의 반석이시며, 구속자(고엘)이신 주님께 호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 구속자(고엘)는 룻이 살아갈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한 보아스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사 당신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습니다. 거룩함은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 새번역).


2021/5/13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하기를 싫어하지만, 악인은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한다.”(새번역)

본 절은 말과 일을 의와 악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술이 좋은 열매를 생산하여 그 결과를 먹는 사람(2절), 사려깊은 언어사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3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여 바라는 모든 것을 넉넉히 얻는 사람(4절)을 5절에서는 의인(義人)이라고 정의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분을 삶에서 발견합니다(시42:1-2). 왜냐하면 의인은 거짓 입술을 미워하시나 진실됨을 기뻐하시고, 사람을 귀히 여기시며, 진리로 가장 훌륭하게 섬김받으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거짓말도 아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악인은 썪은 생선처럼 악취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의 허영과 이기심이 사람들의 관계에 독을 풀어 넣고, 사회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태는 결국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공공연히 수치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왕비 이세벨은 거짓 증인 둘을 세운 뒤 의로운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자 세상은 두려워 덮었지만,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후 왕비 이세벨은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7:18-20), 새번역).


2021/5/14
잠언13:6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

본 구절은 ‘공의’와 ‘악’을 인격화시켜서 참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악’을 전복시켜 패망하게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여 1-4절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화자(speakers)와 행위자들(지혜로운 아들, 거만한 사람 등)의 운명과 대칭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자기 입을 ‘지키는’ 자”와 6절의 ‘보호하고’는 같은 동사(나차르)라는 것만 보아도 이런 연결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6절은 그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높이고 있을 뿐입니다.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 즉 비난받을 것이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이들이 내어딛는 발걸음 하나 마다 모두 주님과 그분의 우주적 왕국의 안녕과 복지를 이루는 방향으로 향하져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죄인의 길(way)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여기서 ‘패망하게 한다’는 동사는 ‘살랍’으로 “비틀고 왜곡시켜 윤리에 속한 무언가를 파멸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길(way)이라는 은유는 의와 악이 자신들에 합당한 운명을 구축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신실한 삶만이 그 행하는 자를 보호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거짓말들은 죄인들을 전복시켜 그 결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의인과 악이들 사이에 계셔 지켜보시며 듣고 그 행한 대로 심판하고 계시고, 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전제가 니이체의 철학이나 논어와 맹자의 사상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야말로 모든 도덕질서의 궁극적 보호자이십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잠22:12, 새번역).

매일묵상(2021/5/3 – 7)

2021/5/3
시편 18편 –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2절,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주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뒤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 시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실질상 동일한 내용의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표제를 읽고 시를 감상해 보면 다윗은 상징법을 써서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일생에 주님께서 그룹을 타고 강림하셔서 도와 주신 경우도 없고(10), 여호수아처럼 우박을 보내어 적들을 죽인 경우도 없으며(12), 홍해를 가르신 경험도 다윗은 하지 못하였습니다(15). 다윗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른 수단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블레셋 족속의 침입(삼상23:26이하), 엔게디 광야의 험준한 지형(삼상24:1-3), 쉽게 흔들리는 사울의 양심(삼상24, 26장), 그리고 도주하는 것입니다(삼상27:1).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 돌이켜 보니,  그런 구원은 오직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7-8; 출19:18), 이집트를 심판하시고(9-12; 출9:13)), 홍해를 가르신(15) 바로 그 주님이 배후에서 일하셨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이나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이나 염소바위에 몸을 숨기나 실제로 그의 반석이나 피난처가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셨습니다. 다만 주님은 그의 영광을 숨기시고 하늘 보좌에서 당신의 종을 위해 통치하셨던 것입니다(10-11절). 우리의 일생도 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2021/5/4
시편18편 – 부르짖음과 응답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3절).

시편 18편은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나 다른 교훈들이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절실한 필요와 주님의 구원의 권능 사이에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폭풍 가운데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황량한 광야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만 하였습니다. 다윗은 10년의 도피 기간 동안 많은 시편을 기록하였고, 왕이 될 자질을 검증받았습니다. 다윗의 시는 많은 경우 탄원시입니다. 다윗은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절박한 삶의 경험은 주님의 고난을 노래하기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왕 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잘 예표하는 삶이었습니다. 1-19절의 내용을 보면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를 기다리는 주님의 주권적 권능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은 사망의 줄이 다윗을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미쳤을 때였습니다(4-5). 다윗은 부르짖었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어 20-45절은 다윗이 이런 과거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받은 교훈들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성경의 교훈들을 배우고, 그 교훈들에 담겨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신 성령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 새번역).


2021/5/5
시편18편 –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를 지켰다.”(23절, 새번역)

본 시편이 노래하는 주제 중 또 하나는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입니다. 이 시가 노래하는 방법은 공의로우신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며, 그런 공의가 어떻게 다윗에게 적용되어 그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원칙은 의로운 자를 보답하신다(20-24)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원칙을 삶에서 절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는 비록 그가 어두움 가운데 있더라도 빛을 빛추어 주셨고, 적군 속을 달려도 주님은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25-29).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의로운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 원칙을 경험한 다윗은주님은 완전하시고, 그 말씀은 순수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에게 오는 모든 자의 방패가 되신다(30절)고 노래합니다. 한편, 이런 체험이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자신 스스로를 지키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나, 다윗은 이렇게 살도록 힘주시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 분 역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32). 이 고백은 바울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함입니다(롬8:28-29). 이런 삶이 현재 신자들의 삶이며, 영생의 본질입니다. 결국 주님이 피로 사셔서 이 세상에서 훈련하여 의롭게 변화된 백성들만이 남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시18:1, 새번역). 시편 18편 – 영원한 하나님 나라.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 메시야)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절)


2021/5/6
다윗은 자신의 나라와 왕위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확신 가운데 시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확신은 자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견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보낸 신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2-16). 다윗은 이 말씀을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은 400년 정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여(비시586),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단의 신탁과 이를 근거한 본 시편의 확신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 왕은 단지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50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의 번역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다윗 보다 훨씬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왕 다윗에 대한 소망은 다윗의 씨(후손)인 주 예수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의 부활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사망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막10:48, 새번역)- 맹인 거지 바디매오

매일묵상(2021/04/26 – 30)

2021/04/26
시편17편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14절, 새번역)

이 다윗의 시는 ‘들으소서’(1절), ‘기울이소서’(6절), ‘일어나소서’(13절)의 세개의 호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호소(1-5절)는 다윗의 의로움을 변론하며, 두 번째 호소(6-12절)는 무자비한 원수로부터 절박한 구원의 필요를 알리며, 세 번째 호소(13-14절)는 하나님의 행동을 요청합니다. 결론(15절)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사무엘상 23:25절 이하가 이 시의 배경으로 생각됩니다.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은 군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면 산 저쪽으로 피신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포위되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기치 않은 블레셋 군대의 침입으로 사울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해 북쪽 오아시스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계속 피신한 이유는 사울이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의 이 기도는 응답을 받지만, 자신의 말처럼 의롭게 주님을 뵐 수 있는지 여부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 시험은 엔게디 동굴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일을 보러 동굴에 들어온 사울 왕을 살려줍니다. 다윗은 주님의 시험에서 합격하였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17:15, 새번역)


2021/04/27
잠언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본 절은15절부터 시작되는 12장 후반부를 결론 내리는 장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생명과 사망은 영원한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류를 가지게 됩니다. 의학적인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합니다. 잠언14:32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이 오면 악인은 쓰러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희망이 있다.”(현대인의성경). 잠언 14:32절과 본 구절을 비교한다면, 잠언의 ‘지혜’는 금생의 삶을 돌파하여 죽음을 넘는 삶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공의로운 길에 In the path of righteousness”라는 말은 인간 실존이 걸어가야만 하는 윤리적인 영역 즉,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친절하게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생활방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의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만, 그로 인한 결과들까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들을 산출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도덕질서를 유지하여서 우리들이 행하는 ‘의’가 풍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영역에 머무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의의 댓가(wages)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를 행한다 하여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나오는 어떠한 ‘의’ 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에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셔서 당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다만 지금은 그 맛만을 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충만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10:16).


2021/04/28
잠언13:1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새번역)

잠언13장은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6절) 언어와 윤리, (7-11절) 재물과 윤리, (12-19절) 지혜와 어리석음이 낳는 삶의 결과, (20-25절)영원한 삶의 조망. 13장 1절은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도입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혜로 만든 곳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버지는 지대한 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지혜로운 아들과 거만한(mocker) 사람을 대조하여 그 특징을 묘사함으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자는 아버지가 타이르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후자는 도덕적 꾸지람과 교육 과정을 경멸합니다. ‘꾸지람 rebuke’의 히브리어는 “도덕적으로 분개하여 항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고 가르치는 대행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절은 거만한 자들은 범죄하지만 도덕적 훈계를 받기 거절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실상 지혜로운 사람이 받은 한 마디의 도덕적 책망은 미련한 자가 받는 매 100대 보다 더욱 효과적입니다(잠17:10). 주님께서 거만하며 남을 조롱하는 자들을 통조림(?)으로 만드시는 것을 본다면 순진하여 속기 쉬운 자들 역시 정신차릴 것입니다(잠19:25). 우리 주님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지혜로운 아들의 모델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들이 사는 고통스러운 징계의 학교인 세상에 내려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2021/04/29
잠언13:2
“선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로 복을 누리고 살지만 악한 사람은 폭력을 일삼는다.”(현대인성경)
From the fruit of his mouth a man eats what is good, but the desire of the treacherous is for violence. (ESV)

2절은 ‘먹는다 eat’는 단어를 사용하여. 1절의 ‘듣는다’에서 3절의 ‘말하다’라는 문장으로 부드럽게 이전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충성스럽게 말하는 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산출하나, 불충한 자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들을 먹는다”는 문장은 믿음성 있게 말하는 자가 공동체에 바람직하고 도움이 되는 혜택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일종의 환유법(미국 대통령 대신 ‘백악관’을 사용함)입니다. 그리고 진실되고 신뢰있는 말을 듣는 자들은 영적으로 바르게 양육됩니다. 따라서 2절은 1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등장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나는 아들딸들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자녀가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좋은 것(복록)을 넉넉하게 얻을 것입니다. 이 반면, 반역자는 거짓되거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녀들과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고 약탈합니다. 이 같은 자들(거만한 자가 포함)은 엄히 꾸지람을 들어야만 합니다(1절). 그러나 이들이 행한 강포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인데, 결국 그들에게 “멸망이 찾아옵니다”(3절). 이렇게 불충한 자는 친절이나 좋은 교훈과 관련하여 어떤 욕망도 없고, 충성스러운 자는 강포를 행할 아무런 욕망이 없다는 진실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따르지 말아라.” (잠3:31,새번역).


2021/04/30
잠언13:3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새번역)

3절의 표제어는 ‘입mouth’입니다. 2절에서 ‘입’은 좋은 말을 내어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지만, 여기서는 나쁜 말을 억제하도록 권고합니다. 또, ‘생명’의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그 어근은 ‘목 neck’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미는 ‘욕망’에서 ‘생명’으로 흘러갑니다. 만약 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좋은 것들을 먹습니다(2절). 만약 입을 적절하게 통제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보전합니다(3절). 이제 언어가 먹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생사의 문제로 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언은 결국 ‘공포와 파멸’을 낳기 때문입니다(3절). 물론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에는 성급하고 수다스러운 자기 중심적인 말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 경고하는 것은 폭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입을…여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열다 open”의 원어는 “파사크’인데 에스겔서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열방의 신들에게 분향하는 모습을 거리에서 음행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욕 때문에 음행을 하여 파멸하듯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격랑과 같이 몰려와 절제하지 못하고 입을 함부로 열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들은 거의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분수를 모르고 폭언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이 와서 부역 경감을 청원하자, 불순종하는 자는 “전갈로 징치하겠다”는 포학한 말을 하여 나라의 2/3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약3:5, 새번역).

매일묵상(2021/04/19 – 23)

2021/04/19
시편 16편 – 영원한 안전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5절, 새번역)


16편은 다윗이 지켜주실 것을 탄원하는 시로서 무엇 때문에 다윗이 부르짖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홀( 음부 – 죽은 뒤 가는 장소)로 대표되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이나 위험 때문에 다윗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이유를 나열하고 안심합니다. 다윗이 열거하는 증거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우리가 직면할 때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1)주님만이 그의 산업이요 소득이며 그의 몫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2)그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성도의 교제), (3)주님이 주시는 유산은 찬란하다. (4)주님은 늘 좋은 생각과 교훈을 주신다. 그러나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9-11절에 이르면 다윗은 영원한 안전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 생명의 길로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신의 삶을 늘 기뻐합니다(11). 다윗의 이 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실현되지 않은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 시편(특히 10-11절)이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행2:24-32). 당연히,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양자될 때 즉 우리 몸이 부활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23-24).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편16:7).


2021/04/20
신체 일부가 마비된 한 소녀를 모두가 피하였는데, 드디어 소녀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불평을 그치고, 재미있는 우스개소리를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마침내 전문적인 개그우먼이 되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국부론에서 분업이야말로 기술진보의 첨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여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길,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기계의 발명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여 능숙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고 말씀하십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 가르침을 받고 다각도로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 뛰어난 외교가요 정치가로서 미국의 역사에 존경받는 분으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계 최고의 인쇄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이는 그가 인쇄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인쇄업으로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이신론(理神論)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상기 3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노력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만, 불행히도 사람들은 세상의 주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지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1/04/21
잠언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개정개역)


“좋은 말(word)”은 한 마디라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실상 그런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사람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잠언은 자신이 신뢰할 친구를 선택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생명의 길을 벗어나 사망의 길로 이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인도자가 된다”는 구절에서 “인도자가 된다”는 표현은 숨겨진 것을 찾기 위하여 주의깊고,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조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웃(친밀한 친구)을 위함입니다. 의인의 눈은 넓게 열려져 있어 자신의 친구들이 가지는 고집셈, 속임, 어리석은 수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친구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허영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서 그런 것을 보지 못하며, 그 결과 자신의 친구를 교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는 지혜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는 좋은 친구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한 행위를 지혜로운 행위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됩니다. 한편 이웃의 좋은 인도자로 나오미(룻의 시어머니)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모세 율법에 규정된 고엘(친족구속)제도를 활용하여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 보내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줍니다. 그 인도를 따라 간 룻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국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멀리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지만, 악을 꾀하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잠12:2, 새번역).


2021/04/22
잠언10:22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새번역)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고 선언한 잠언은 그렇게 되는 원인을 본문에서 밝힙니다. 즉 부지런히 일한다고 저절로 부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재물을 주시는 장본인은 바로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자명한 진리를 적은 것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평과 정의라는 법칙을 온 우주의 형성 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참된 부(wealth)라는 주님의 축복은 부지런하게 일하여야만 작동합니다. 어리석은 자 보다 게으른 자는 더욱 문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일해 줄 것을 기대하나 게으르게 일에 임하여 예상하지 못한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의로움이야말로 부를 영속시키는 직접적 근원이 됩니다. 대표적인 분이 400년 동안 부를 이어 온 경주 최부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만유의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며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이 주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점은 힘을 들여서 그리고, 격렬하게 노동한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노동은 야망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 사람에게 일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를 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심판 하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을 경외하여 한 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딤전6:9, 새번역)


2021/04/23
잠언12:27
“게으른 사람은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귀한 재물을 얻는다”(새번역)


이 잠언은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서로 대조하여 지혜의 길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이 본 절에서 불확실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냥한 것”이란 먹기 위해 사냥한 들짐승(노루, 산양 등)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일과 같이, 사냥을 위해서도 치밀한 계획, 인내, 기술 그리고 끈질긴 노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이 들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를 전제로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가지고 두 종류의 번역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스스로 사냥하지 않는다”(개정개역), 다른 하나는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는다”(새번역)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식량을 위해 사냥하러 나가지 않던, 사냥은 성공적으로 하였으나 굽지를 않았다면 결국 먹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게으름으로 인하여 자신의 기회를 던져버린다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징계를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이 영적으로 굶주리는 것과 같이, 게으른 자도 풍부한 음식을 굽지 않아 육체적으로 굶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핑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도 성경 구절을 핑계로 기도로만 병을 고치겠다거나, 수혈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나고 있습니다. 이 반면,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반은총을 잘 이용하여 야생의 들에 풍성하게 존재하는 귀한 재물인 들짐승들을 잡아 구워먹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반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잠언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잠13:1, 새번역). 

매일큐티(2021/04/12 – 16)

2021/04/12
시편 15편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절, 새번역)

본 시편은 시인(다윗)이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열거된 대답은 예배자들이 성소에 들어갈 조건을 물어보면, 제사장은 이에 응답하는 형태를 따서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하나님은 주인이고, 인간은 손님의 위치에서 주고 받는 것입니다. 주인의 조건은 깨끗한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진실된 사람,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주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고리대를 받지 않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조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장막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스파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여부입니다. 신자는 모두 성령님의 증거를 받아 그리스도를 알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입니다. 실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추악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의롭다 선언하신 하나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어찌 결심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조사하여 철저히 살피셨으나 나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입으로 범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시편17:3, 현대인의성경)


2021/04/13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소년(9살)이 범브란트 목사님이 소속 선교회로 보낸 편지입니다.
“ 범브란트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목사님이 쓰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책을 읽어 주셨어요. 저는 공산국가의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전해 듣고 울었습니다…….우리는 로디지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데, 왜 우리나라엔 오시지 않습니까? 많은 로디지아인들이 목사님의 일을 도와 드릴 거예요. 전 목사님의 선교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드리겠어요. 한 번에 장군도 되고, 총무도 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목사님네 장군들(선교회의 일꾼을 지칭함)도 구세군의 장군들처럼 제복을 입나요? 꼭 알려 주세요.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들의 천사들이 매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총책임자의 책임을 설명한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선교회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아홉 살 그 소년은 어머니의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시,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사람이 총 사령관과 장관이 될 것이다”라고 공포하니, 그의 조카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서 총사령관이 됨은 물론 천하명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욕이 너무 강해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면 이종사촌(아마사)을 암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수고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만, 애를 쓰는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금생과 내생에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마11:12, 현대인의성경).


2021/04/14
5살 어린 아들의 말하였습니다: “엄마, 내가 성탄절 선물로 제일 원하는 게 무언지 아세요?” 어머니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엄마에요. 나는 엄마를 굉장히 사랑해서, 엄마가 오래오래 살길 원해요.”
그렇게 말한 후 아이는 통통한 팔로 어머니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야만 하였고, 그후로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향한 사랑이 담배 중독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준 것이었습니다. 1945년 나찌로부터 해방된 루마니아는 소련이 통치하였습니다. 당연히 루마니아 그리스도인들은 모조리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브란트 목사님 부부는 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자신들도 잡혀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마침내 응답되었습니다. 먼저 1948년 목사님은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석방되지만, 석방 후에도 담대하게 지하교회를 다니며 간증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감옥의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체포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역시 응답되어 1959년 밀고를 받아 들이닥친 경찰에게 잡혀 6년을 복역합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선택하신 것은 고통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랑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


2021/04/15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네 동생과 나누어 먹어라.”
“무슨 뜻이예요?”
“네 동생에게 큰 쪽을 주란 말이다.”
그러자 그 아들은 사과를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줘서 그 아이가 예수님의 방법으로 나와 사과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어요.”
이 아이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사과가 아니라 큰 재산 혹은 권력을 나누는 문제라면 어른들 사이에서 역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 방지를 위해 합리적 기준이 법률로 제정되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수고한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는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포도원을 가꾸기 원하는 주인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여러 번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용한 일꾼은 오후 4시에 고용되었으나, 품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동일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보내어 맨 나중에 온 일꾼부터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시켰습니다. 당연히 아침에 들어와 더 많은 고생을 한 일꾼들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친구여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모두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것이 아니냐? 네 것을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내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열심히 일하였으나 남이 먼저 승진하거나,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가질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허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나눌 때는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33).


2021/04/16
잠언12:25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번민이 일지만, 좋은 말 한 마디로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새번역)
이 잠언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언어 사용을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근심 때문에 마음이 무겁더라도, 좋은 말 한 마디나, 좋은 소식 하나가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기쁜 마음을 갖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근심이란 삶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심한 정서적 고통입니다. 근심이 마음에 들어 오면 그런 사람은 불안정한 바다와 같이 요동하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을 가지게 되면 매사에 합리적으로 사고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만큼 근심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에 반하여 좋은 말(a good word)이란 그런 근심을 만들어 내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상쇄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근심이 사람을 쫓아내는 반면, 인격적이며 친절하고, 즐거우며 부드럽고, 적절하며 사려깊은 말은 사람을 회복시켜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요셉이 아직 이집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게 된 야곱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말(메시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복음의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왕으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러분의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올려 놓으셔야 합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4:6-7, 새번역).

매일묵상(2021/4/5 – 4/9)

2021/4/5
시편14편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바보)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6)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절(7절)에 가면 시편 기자의 관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1:18절 이하에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피조물 중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 뱀, 물고기, 곤충 등-의 본을 따 만든 우상을 섬기고, 창조주가 제정한 남과 여의 법칙을 무시하여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운 짓을 행하도록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은 온갖 죄를 범하도록 유도해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며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은 한 마디로 지적, 도덕적 자살자들입니다. 또한 교양있는 무신론자들은 그런 무모한 도덕적 타락까지 내려가지는 않으나 남의 행동이 그르다고 판단하면서도 자신도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2021/4/6
어떤 무신론자의 아들(소년)이 그 부모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게 더 안전하겠어요. 그러면 우리를 일단 천국으로 데려갈지 모르잖아요?”
­이 세상은 절대로 인간이 창조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론, 빛, 시간, 공간, 물, 공중의 새, 꽃, 나무와 돌 등을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살다가 예외 없이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런 낯설고 무서운 장소에 살게 된 인간은 고민합니다. 여기서 수 많은 철학과 종교가 태어났습니다. 무신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무신론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 주장의 성격이 있습니다. 신을 전제 하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 한계는 최선을 다하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이체와 그의 초인사상입니다. 불행히도 니이체는 10년 동안 정신병자가 되었고, 결국 그의 의지에 반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네가 틀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메시지를 전개하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여러 사건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이 증거를 가진 사도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였으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근거 없이 떠들지 말고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행17:31, 새번역).


2021/4/7
범브란트 목사님 가족이 함께 지낸적 있는 인디언 가족은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생전 처음 아주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아 신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리가 아파 구두를 벗고 있었는데, 이를 본 그 아이는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서 목사님에게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받지 않았더니 묻기를 “목사님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구두 한 짝을 벗어 주게 된 과정은, 식사 도중 “누구든지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주라” 침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자신의 삶에 적용하였으나 상식에 어긋나서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19세기말 조선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신자 몇명이 등 뒤에 X 자로 나무를 만들어 지고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결국 주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27:14, 새번역) 혹은 “미련한 사람이 입에 담는 잠언은, 술 취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다.”(26:9)고 경계하여 분별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분별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마땅히 이 분별력을 기초로, 그리고 그 분별력을 따라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잠3:15, 새번역).


2021/4/8
어느 여성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청바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청바지는 유명 패션 모델 지지하디드가 입은 청바지로서 댓글이 수천개가 달려있었습니다. : “너무 예쁘다! 이거 어느 회사의 것이야? 어디서 살 수 있지? 얼마야? …..” 그러나 너무 비쌌습니다. 이때 이 여성은 유사한 청바지를 저렴하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2년여 시장 조사 끝에 확신을 얻어 시티은행원 자리를 나와 3명이 패션 스타트업 추시(Choosy)를 만들었습니다(2018년). 그리고 60억원의 투자자금을 모집하자, 알고리즘부터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제작할 옷을 선정하였습니다. 그 옷은 고객의 실시간 피드백이 반영된 제품으로서 100달러 이하의 값으로 소량만을 주문받아 제작됩니다. 2018년 7월 서비스가 시작되자 옷마다 금방 완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전정신, 창의성, 치밀한 계산을 거쳐 사업에 뛰어든 추시 CEO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앉아서 영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치밀하게 계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면 세상적으로 잃어버릴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섰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막10:29-31, 새번역).


2021/4/9
잠언12:24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은 다스리게 되나, 게으른 사람은 힘에 겨운 일을 하게 되는 운명을 대조함으로서 부지런함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들로서 독립성과 힘을 갖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자들로서 결국 강제로 노동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을 피하는 손은 결국 가장 힘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독립성을 잃고 고된 일을 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맡아 부지런히 완수하여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 잠언은 솔로몬의 것입니다. 솔로몬은 통치 말기에 여로보암을 주목하여 감독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능력 있고, 부지런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솔로몬의 범죄 때문에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떼어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한 여로보암은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10지파를 대표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대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르호보암이 강제노동을 경감해 줄 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동조하는 10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반면 통치에 어리석고 게을렀던 르호보암은 두 지파만 거느린 약소국 유대 왕국의 왕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쓴 잠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 둔다.”(잠6:6-8, 새번역). 

매일묵상(2021/3/29 – 4/2)

2021/3/29
2021년 고난주간은 3월28일 시작되어 4월 3일 토요일에 끝납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날입니다. 시편118편을 묵상하겠습니다.

시편118편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22-23절)


출애굽의 목적은 노예 해방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구속에 있습니다. 본 시편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행진하여 성전 문들에 이르고(19), 그 문들을 통과하여 제단으로 가고 있습니다(27). 이 과정에서 순례자들과 지도자 사이에서는 구원의 체험을 노래하는 찬송과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1-18). 그러나 19절을 넘어가면 어조가 바뀝니다. 순례자들은 주님께 가서 경배하고자 의의 문들을 열라고 외치는데, 문지기는 이 문은 주님께 속한 것이니 의인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20). 시편기자는 이미 주님의 능력으로 원수들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며 감사 드립니다(21). 옛 이스라엘에서 집을 지을 때 필요 없다고 버린 돌이 다른 경우에는 오히려 집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요긴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습니다. 바로의 노예가 된 민족이 선택되어 구속받음으로 인간 구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분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모두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이를 듣고 보는 자마다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누가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주님으로 인하여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드려야만 합니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시편118:10, 새번역).


2021/3/30
오늘은 고난 주간 중 세 번째 날(화요일)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어떤 불가능한 난제도 다 이루어지고 해결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신구약 성경의 공통된 주제이며, 많은 실례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적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사르고, 죽었던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경우이며, 신약에는 소경이 눈을 뜨고, 베드로가 죽어 있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린 경우입니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른바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조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오늘 기도의 교훈을 주신 주님 역시 3흘 뒤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중핵에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번이나 기도를 드렸으나 응답받지 못한 후 이를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는 늘 시편 기자의 외침이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시편118:9, 새번역).


2021/3/31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자, 주님은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날은 하나님 아버지이외는 어떤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신자들은 주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전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2021/4/1
목요일: 예루살렘 성 내에서 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지내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축약적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그리고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제자들과 후에 믿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자마자, 로마 군인과 성전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안나스의 사위이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또 받은 후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마26:62-66).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후 또 다시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마26:68-69).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 베드로가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8).


2021/4/2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요18:36-37).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정치적 목적을 따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요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5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