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2/08 – 10)

2021/02/08
시편 7편
“주님께서는 뭇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8절, 새번역)

이 시는 원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시입니다. 시편 기자의 적들은 사자 같이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피신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법정에 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악행을 한 피고들을 심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무죄한 자들을 놓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재판장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사상은 시편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두려움과 가슴이 철렁하는 경악감 대신 신뢰와 위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가볍게 그리고 경솔하게 취급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판관 포청천 앞에 선 원고나 피고 모두 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도록 합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과업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34, 현대인의 성경).


2021/02/09
미하이가 어렸을 때 늘 중간에 자면서도 철야기도회에 따라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너무 짧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종종 한 말입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을 교회에 가서 사는 게 어때요? 교회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야 해요.”

미하이는 정말 교회가 놀이터인 양 행동했으며, 어느 주일 예배 때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 오자 미하이를 징계하기로 한 뒤 엄히 물었습니다.
“네가 목사의 아들이라서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빠는 내가 설교를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어요.”
“좋다. 그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아빠는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열심히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해요.” 목사님은 더 이상 야단 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자금법을 위반하여 5천만원을 받았다고 수사를 받던 한 정치인은 당과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아파트 17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여비서가 성추행 당하였다고 고소하려고 하자 그 날로 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서울시장도 생각납니다. 이분들에게 세상 것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가 탄로나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올 심판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용서의 근거를 만드시고 또 한편으로는 심판할 준비를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눅 24:45, 현대인의 성경).


2021/02/10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매일묵상(2021/02/01 – 05)

2021/02/01
시편 6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절)

이 다윗의 시는 초대교회에서 읊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입니다.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 일곱 개의 시편들을 읽고 노래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와 함께 이로 인한 감정적인 괴로움을 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합니다.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병과 근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1-5), 시편기자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6-7),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승리의 선언(8-10).

시편 기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구원이 없다면 자신은 죽어 ‘스올’에서 거처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려주시기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도 없고, 어둡고 소망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를 가진 시편기자도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구약도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반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새 창조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빛이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함과 고난을 당하는 분들 앞에서 함께 울고 기도해 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인류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2021/02/02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네 살 가량 되었을 때 가족이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이가 도중에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책임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냄새나게 만들어도 가만 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미하이의 표현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미하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책임자에 대하여 오히려 좋은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실상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존중하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4-27). 우리로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데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범 되신 주님은 훌륭하게 이를 행하시고 속죄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고 본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만들어진 새로운 종(種)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021/02/03
미하이가 다섯 살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를 심히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는 네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있다. 그 페이지에 하나님은 네 죄를 낱낱이 적어 놓으신다. 거기에 그저께도 하나 적혔고, 어제도 하나 적혔는데, 너는 오늘도 다시 죄를 지었다.”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내가 저지르는 나쁜 짓만 써 놓으신다고 생각하세요? 착한 일은 써 놓지 않나요?”

미하이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법을 어긴 사람만 단속하는 경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인 동시에 해로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잘 한 행위를 기록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바로 이 측면을 단단히 붙잡고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나그네 3명을 대접한 뒤 알고 보니 주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주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심판자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린 후, 의인의 수를 계속 낮추다가 10명까지 허락을 받았습니다. 즉, 1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이 없던 소돔 성은 불과 유향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반면 어떤 성인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때, “주여, 제가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유념하여야만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1/02/04
어떤 아이가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쥐고 교회로 가다가 도중에 넘어져 동전들을 떨어 뜨렸는데, 하나는 도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동전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입니다. 17살에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섭리 가운데 왕립학교에서 3년을 공부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학생들에게 주는 음식 특히, 고기와 포도주는 모세율법의 규정상 먹을 수 없어서 – 우상에게 미리 바쳐진 음식 등의 이유 –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튼튼하게 자라겠는가?”라는 환관장의 입장 역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를 무릅쓸 것이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고자 음식 담당자에 10흘만 채식을 주어 비교해 보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 채식으로만 목적이 달성되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시험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도록 만드셨고,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2021/02/05
잠언12장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6절은 15절의 서론적 교훈을 언어와 관련한 도덕과 신학을 다루는 부분들(17-22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심적 교훈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지게 되는 위험한 감정(분노 등)들을 잘 통제하라는 권위적 충고입니다. 랍비 일레아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컵, 지갑 그리고 근심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즉 마시는 동안, 돈 거래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흥분상태에 있을 동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fool)는 몸짓과 언어로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배우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무시합니다. 여기서 무시한다는 히브리어 ‘코세’는 ‘덮어 보이지 않게 하다 혹은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구경 거리가 되느니 참아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자를 못 본체 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여러 구절(17-22절)에서 지혜자는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든 상황에 반응할 수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결국 그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인 자제력으로 인하여 선한 결과가 도래되어 그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벌주려고 광분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매일묵상(2021/01/25-29)

2021/01/29
잠언12: 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새번역)

12장의 두 번째 단락은 말(16-23)과 행위(24-27)가 맺는 열매들을 다양하게 언급하면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15절은 서론입니다. 본절은 ‘지혜로운 사람”와 “어리석은 사람”을 권위가 있는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여부에 따라 정의합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의 대표가 잘 고치는 의사입니다. 이분들이 건강에 관한 준 충고와 처방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이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도 같습니다. 사랑과 진실함을 늘 베풀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잠언의 거듭된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면 건강을 잃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영혼을 잃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어리석은 자의 경우 거만하여 충고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바보들, 특히 거만한 바보는 자신의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합니다만 실상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확증편향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이 자신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사는 정신병자들입니다. 이 반면 지혜자는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때문에 권위있는 사람의 충고를 귀 담아 듣고 자신의 길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근력이 다져지며, 인자와 진리는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은 심판날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를 받으려고 전 인생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4:21, 새번역)


2021/01/28
어떤 소년이 “하나님은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8살쯤 된 그리스도인 소년이 말하였습니다.

“아냐, 할 수 있어. 하나님도 한때는 너와 나처럼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자라는 어린 소년이었어. 그분들이 그에게 매일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고 정직하라고 가르쳤어, 만일 예수님이 어떤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악한 부모들이 그에게 욕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술마시는 걸 가르쳤을거야.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어.”

이 아이는 자신도 모르면서 매우 심오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을 선한 길로 가르쳤을 것이고, 어린 소년이었을 때 우리 주님 역시 겸손하게 배우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강보에 싸여 무력하게 울고 있는 어린 아이가 시간과 공간과 만유를 ‘그 능력의 말씀으로 붙잡고’(히1:3)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실까? 이것이 우리 지식과 논리의 한계입니다. 18세기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여름에 피서하는 열하에 가서 생전보지도 듣지도 못한 짐승들 – 코끼리(?). -을 보고 “어떻게 이런 동물들이 있었을까?”는 감탄을 발하였습니다. 세상 일도 이런대 하물며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비로서 온 우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골1:27, 새번역)


2021/01/27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일곱 살의 알렉스가 할아버지에게 들려 준 설명입니다.

“경기를 하는 동안엔 우리편이 지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몇 초 동안에 경기가 반전되어 우리편이 이길 수도 있어요.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예요. 성 금요일엔 하나님이 완전히 진 것 같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태를 반전시켜, 부활 주일 새벽에 하나님께서 마귀의 골 문에 공을 던져 넣은 거예요. 결국 경기가 끝났을 때 하나님이 승자였어요.”

어린 알렉스의 훌륭한 비유입니다. ‘사망’이라는 단어는 모든 인간사의 마지막 말이요, 절망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진실로 사망은 끝판왕입니다. 죽은 자를 누가 기억합니까? 전도서 기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2:16)라고 쓰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사실과, 죽은 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우리 몸이 죽는 원인은 아담이 범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받는 심판은 우리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범한 죄들입니다. 아담을 핑계로 둘러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시기 위함이요,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에 선고된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문제로 너무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2021/01/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는 요나가 어떻게 해서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왔나를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 손녀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제법 자신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어. 그 말은 그가 상당히 똑똑했다는 뜻이야. 그는 배에 탔을 때, 배들이 종종 가라앉는다는 것과, 그러니까 자기도 어쩌면 고기에게 잡혀 먹힐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안전을 기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주머니에 빨간 고추를 넣고 탔지. 그가 고기의 코에다 고추를 밀어넣으니까, 고기가 기침을 하게 되는 바람에 그가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어린이의 말이지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나의 구출 사건은 기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고 부활하실 예표적 사건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만을 바라고 실생활에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아멜리의 빨간 고추만큼이나 우스꽝스럽습니다. 실로 이런 태도는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삶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면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순종하고 완악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즉,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선지자적인 선포를 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그만 폭풍우를 만나 결국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죄인 요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물고기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 풍랑이 몰아치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늘 돕는 분이시다”는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가 체험한 기적을 체험하려고 노력하지말고, 요나 사건의 가르침을 섭리 가운데 배우려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때에 언제나 돕는 분이시다.”(시46:1, 현대인의 성경).” 


2021/01/25
시편 5편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5:12, 새번역)

이 시는 구원을 위하여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3절을 보면 이 시는 아침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확고하게 뿌리박은 다윗의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5장은 구원에 대한 간구로 시작하여(1-3),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선포합니다 (4절). 그리고 그 성품을 기준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5-6, 9-10)과 의인들이 가지는 소망 (7-8, 11-12)을 노래합니다. 결론으로 주님께서 바르게 살아가는 자신을 복주시고 방패와 같이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확신합니다(12). 이와 같이 시편 5편은 하나님의 왕되심과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3천년 전 다윗 왕의 시대나 첨단기술문명의 시대인 21세기에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통치하십니다. 구글의 초창기 야후에게 기업 인수를 요청하였지만, 야후는 거절하였습니다.  만약 구글의 미래를 알았더라면 야후는 몰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후 영원한 나라로 대체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의 성품은 우리로 악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두려움을 주지만, 또한 정직한 삶에서 만나는 큰 문제에 산성과 같은 피난처가 되십니다. 늘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명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시46:1, 새번역).

매일묵상(2021/01/18-22)

2021/01/22
잠언12:14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개역개정)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새번역).

14절은 1-12절의 결론적으로 말과 행위의 결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은 늘 하나님의 섭리 하에 놓여 있습니다. 나무가 생산하는 품질좋은 농산물과 같이, 선한 가르침, 화평으로 이끄는 지도력, 경건한 권고, 위로를 주는 격려 등은 사람의 기본적인 인격을 드러내며, 자연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고, 공동체가 유지되도록 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람’은 의인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배(belly,위장)는 좋은 것들로 넉넉하게 채워지게 되고 삶은 윤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품성은 좋은 열매를 생산해내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때 그런 선함은 돌아와 그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손이 행하는’이란 말은 윤리적으로 관련된 행위를 나타내며, “복록=복되고 영화로운 삶”이란 호의적인 행위를 보여줍니다. 14절은 언행일치, 즉 의인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어긋남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죠! 책임을 지려고 하니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는다”는 표현은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는 분리될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합을 만들어 내는 분은 다름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랑의 가장 초라한 행위도 마지막 날에 풍성하고도 영원히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12:14절의 진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새번역)


2021/01/21
기독교를 가르치는 교사가 그의 반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들 중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느냐?” 몇 학생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 교사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너희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쌍한 죄인들로 태어난 거야”

이 문제에 대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우리는 죄를 지으며 태어나진 않지만 죄인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모들을 통해 이 은혜가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전해질 수 있을 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 독특한 기독교의 인간관이 담겨 있으며, 기독교에 반발하는 인문학조차 현실 세계에서 소설과 역사 그리고 철학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모태에서 정직하게 살도록 지으셨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어진 세상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한 번이라도 범하면, 그는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전에는 어떤 누구도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2021/01/20
루마니아의 정교회 신부님이 개비라는 네 살된 어린 한 소녀와 마주쳤습니다. 신부님이 입맞추고 축복받으라는 의미로 십자가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오히려 “내가 왜 십자가에 입을 맞춰야 하죠? 십자가는 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신부님이예요?” 하면서 신부님의 빰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의 탄식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에는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울부짖는 소리에는 귀가 먼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선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 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녀의 행위는 옳은 것이다.”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노나라 대부 맹손은 새끼 사슴을 잡아 진서파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진서파는 어미 사슴이 울면서 수레를 따라 오는 것을 보고는 불쌍히 생각하여 풀어주었습니다. 이를 안 맹손은 크게 노하여 진서파를 추방하였다가 3개월 후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아들을 맡겼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부의 질문에 맹손은 “새끼 사슴을 불쌍히 여길 정도라면 사람의 자식은 얼마나 귀히 다루겠는가? 내 아들을 맡기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이 되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한비자). 사람의 됨됨이는 사랑의 열매로 파악하나, 됨됨이는 생각에 의해, 생각은 가치관에 의해 형성됩니다. 복음은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5-6).


2021/01/21
무신론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논리를 고수하자니 도대체 삼라만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딜레마를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러시아에서 한 선생님이 진화론을 가르치자, 한 아이의 대답입니다. “선생님, 이런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악할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악한 건 고릴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는 “그건 사실일 리가 없어요. 나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즐겁게 놀고 있었고 땅콩을 던져주면 고맙다는 표시를 해요. 나는 잔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원숭이들처럼 행복한 동물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공통점은 공산주의자들이 잔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입니다만, 공산주의 이념을 떠나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악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히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독일민족이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복음전도의 한계도 여기 있습니다. 믿음은 강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과 법률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마음에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간직한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답할 준비를 하고 선한 양심으로 생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선한 일을 헐뜯고 욕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벧전3:15-16, 현대인의성경).


2021/01/22
시편 3장 4절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새번역)

시편 3장은 표제가 달린 첫 번째 시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유대 지파를 제외하고는 전 이스라엘 지파가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대적자들은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고,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2절). 문제는 다윗이나 대적자들이나 모두 여호와에 대한 같은 신앙과 고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구의 판단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욥과 세 친구와의 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원리는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인에게는 축복을”이라는 도식입니다. 이를 근거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재앙은 그의 불의와 죄악을 증명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예외도 있음을 믿고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습니다. 두 주장의 대립 및 전개가 욥기의 주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다윗도 같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수 많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이번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 하나님의 실제적 구원이 오기까지 자신의 믿음이 옳바름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구원을 부르짖고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8절). 사무엘상의 기록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결국 다윗의 손을 들어주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구원은 언제나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고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법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입니다.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3:5, 새번역).

매일묵상(2021/01/11 – 15)

2021/1/15
잠언12장 13절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개역개정)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새번역)

13절은 14절(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과 함께 언어와 행위의 결과를 나타내면서 12장 첫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죄인의 언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13절), 의인의 언어는 좋은 것들로 그를 채우게 됩니다(14절).
13절은 무죄한 자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죄악된 말 때문에 악인 자신이 덫에 걸리게 됨으로, 언어 사용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즉, 모함이라는 ‘그물’은 악인 자신이 설치한 것이지만, 결국 말하고 있는 자신이 걸리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의로운 다니엘을 모함한 페르샤 제국 신하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에스더서입니다. 하만에게 모함 당한 의로운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죽을 운명에 놓여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결국 섭리 가운데 거꾸로 하만과 그 일족은 멸망하고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구출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을 경우 입술로 죄를 범하기 쉬우니, 기도하고 심중에 말하며 잠잠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의인도 악인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3:16-17, 새번역).


2021/1/14
어떤 가족이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가족의 어린 아들은 새 집에 감탄하여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집 너무 멋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부활의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로 상속을 받을 때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다가 드디어는 이 아이와 같은 탄성을 질러댈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세상을 우리는 약속받았고, 그 보증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우리 유업의 보증이 되시는 분(엡1:14)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약속의 충분한 성취를 기다리기 때문에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진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있는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법적인 신분은 죄인으로부터 약속의 자녀들이요 도래할 유업의 상속자들로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새집에 부모님을 따라 들어간 아이처럼, 우리가 이 사실에 너무나 감격하여 상속자처럼 살아가는가의 여부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모든 빛나는 것들 – 돈, 명예, 권력, 지식, 지위 등 -은 이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이것들은 순리대로 와야만 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청지기의 지위에서 생각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부요하게 만들 줄 알아야만 합니다. 청지기의 직분을 잘하면 주님의 축복을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모두 받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1/13
과거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서 침례교인 피터즈는 비밀리에 인쇄된 성경을 옳기다가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슬피 울자 그의 네 살된 아들이 물었습니다.

“엄마 천국은 아주 더럽고 나쁜 곳이에요?”

“너는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니?”

“엄마 아빠는 늘 나에게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아빠가 천국에 갔는데 왜 엄마가 자꾸 우시는지 모르겠어요.”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어는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옳겨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는 더 좋은 나라가 올 때까지 평안히 주님 안에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 손녀 아멜리는 여덟 살 때 많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뒤 사도 바울의 안녕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멜리 왈.

“바울은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라는 말로 편지를 끝내곤 했는데, ‘우리’란 말 속엔 다른 사도들도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게 아니예요? 성경에는 그들이 죽으면 더 이상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써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어린아이다운 생각이나, 배울 점이 있습니다. 어린 아멜리도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사는데는 남 못지 않지만 과연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와 가족을 위해, 곤란에 빠진 친지와 성도들을 위해, 시험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만 합니다. 심판 때 주님은 우리의 변명에 “왜 기도하지 않았는가?”라고 되물으실 것이 뻔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


2021/1/12
최근 경기도 7급 공무원 채용시험 한 합격생이 인터넷에 올린 저속한 글과 그 내용이 문제가 되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철저히 조사해서 필요할 경우 합격을 취소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또 대전광역시 9급 공무원 합격생 중 한 명은 품행문제로 직접 고발까지 당하여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실은 있으나 그 내용대로 행한 적은 없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KBS 열린토론에 나온 한 토론자는 자신이 낸 세금이 그런 분들에게 사용될 수는 없다고 하고, 어떤 청취자는 사기업에서조차 채용될 수 없다는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문제되는 두 분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자신들이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하였습니다. 그저 안정되고 보수도 괜찮고, 연금이 보장된 직장으로만 접근하였지, ‘봉사’라는 공무원으로서의 사명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오직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려는 권리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혹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습니까? 신앙은 말이 아니라 인격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언어의 사용에서부터 ‘사랑의 열매’가 있는지 반추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마7:24, 새번역).


2021/1/11
시편4장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4장의 저자는 다윗으로 주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다윗의 심정을 토로 한 것입니다. 오늘은 ‘실용적 신앙의 유혹’을 다루는 6절을 묵상하겠습니다.

신앙의 실용주의라 함은 믿음을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누릴 혜택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윗은 실용적인 믿음이 불러오는 교묘한 유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신앙의 핵심에는 “개인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사나 예배의 목적은 현실의 이익입니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내게 그 점을 보여주어라!” 실용주의 신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종교나 설교 등을 찾아 쇼핑하게 됩니다. 다윗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의 종식과 풍부한 소출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만 해결되면 거짓 신들에게라도 달려가 안도감을 가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봉자들은 바알이 이 가뭄에 비를 내려 풍부한 농업의 산출물들을 줄 권능이 있으니, 바알에게 제물을 드려 어려움을 빠져나가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과 여러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에 반하여 순전한 믿음‘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는 단호한 결의를 갖고 있습니다. 욥이 그 대표로서, 극한 절망 중에서도조차 주님을 굳게 붙잡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것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매일묵상(2021/1/4-8)

2021/1/8

잠언12: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개역개정)
“악당들의 견고한 망대는 무너져도 착한 사람은 뿌리를 내린다.”(공동번역)

10절과 11절에서 재물이나 경제적 번영은 현실적인 노동과 일(10-11a)을 통해 얻어져야 하지, 허망한 꿈을 쫓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적은 잠언 기자는 12절에 이르러 경제적 이득에 관한 분별력을 한 단계 높여주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다른 악인들이 사람들을 착취하여 획득한 망대나 불의한 이득을 가지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믿고 그것을 탐을 내지만 사실상 그 망대는 신뢰할 수 없는 방어막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부자는 재산이 요새가 되고, 높은 성벽이 되려니 생각한다.”(18:11, 공동번역)라고 설파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악인의 삶은 덧 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인들은 자신들의 인격에 뿌리내려져 결실한 정당하고도 신뢰할 만한 망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망루의 결정체는 바로 주님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성루이므로, 의인이 그 곳으로 달려가면, 아무도 뒤쫓지 못한다.”(18:10, 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대기근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물이 풍성한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안전하게 구출된 것은 물론 많은 은금을 얻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부지런히 가축을 길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일을 망치는 자와 형제간이다”(잠18:9, 새번역).


2021/1/7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거예요. 우리가 살아을 때 어머니들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 것처럼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고함 지르진 않으실 거예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힘 없는 아이들이 경히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큰 선물입니다. 특히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양에서 농노의 지위가 향상되고 급기야 해방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던 것입니다. 지금 계속하여 인구가 감소하여 50만명에 턱걸이 하고 있는 포항시는 51만명 회복에 전 행정력을 투입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위상추락은 물론 50만을 기점으로 엄청난 행정상의 지원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구감소는 많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합니다. 그래서 충북 제천시에서는 3 번째 자녀를 낳은 순간 4천5백만원에 해당하는 은행 빚을 시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한 명의 아이가 절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장 귀한 선물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고함을 지르는 대신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면서 양육하여 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물론 잘못된 행동은 교정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성경의 가르침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엡6:4, 현대인의 성경).


2021/1/6
범브란트 목사님의 부부는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친척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고, 그분들의 가족과 친척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죄로 나치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을 때,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는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같이 기도하자 미하이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죽일까요?” 이때 그는 겨우 네 살이었습니다.“어쩌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나요?” “경찰이 와서 우리를 차에 태워 데려갈 것이다.” 목사님이 설명하였습니다. 미하이는 차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좋아했습니다.“그럼 그들이 우리를 차에 오래 태워 줄까요?” “그래 주겠지,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선 총으로 우리를 쏘아 죽이겠지.”미하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진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조금 죽이고 나면, 우리는 후에 많이 부활할 거예요. 그리고 천국에 가겠죠. 경찰은 하늘까지 올라 오는 사다리를 모르니까 그곳까지 우리를 따라오진 못할 거예요.”

어린 미하이의 말 속에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일부를 그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모여든 수만명의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시고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분”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과 심판에 대한 믿음은 나찌의 공포 속에서 사는 어린 아이에게조차 위안과 담대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점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2021/1/5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유대지도층의 시기로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7:17-18). 이 대목을 배운 열두 살된 어떤 남자아이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되어 있어요. 의사들이 예수님을 시기했어요. 예수님이 공짜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 아버지는 파산하고 말거예요.”

이 아이는 어리지만 선악의 판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악판단 능력이 올바른 판단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판단 전에 복잡한 세상사를 이해할 능력 즉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적인 분야에서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어도, 마구잡이로 고치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믿고 오는 사람들만을 고쳐주셨고,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불치병들을 많이 고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표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죽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칭 기적의 한계입니다. 기적은 죄 때문에 사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뒤 이은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는 아이들과 같이 지혜에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젖을 먹고서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히5:13-14).


2021/1/4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창36:6-8).

야곱은 밧단아람으로부터 수 십년만에 아버지 이삭이 계신 헤브론으로 돌아가서는 에서와 함께 거주하였습니다. 이삭이 죽자 에서는 가나안 땅 남서쪽 세일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애증의 관계를 맺고 수 천년 동안 이웃에서 살아갔으며 로마에 함께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에돔의 도시 데만 사람들은 지혜로 유명하였습니다(예레미야 49:7). 그러므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에서는 야곱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그럼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의 존부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하신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에서의 후손은 믿음에서 떠나 ‘코스’로 추정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언약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창37:1).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습니다. 외형적인 삶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에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는 생명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삶, 즉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마음에는 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시63:3, 새번역)


2020/12/24
잠언 12장 10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12:8절의 주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9절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할망정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어 10절은 일꾼을 착취하지 말고 돌보아야만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은 당연히  자신이 부리는 짐승들의 욕구들조차 알아서 돌보아 줍니다. 하나님은 가축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때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물론, 짐승들도 쉬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0; 23:11–12; 레 25:1–7). 또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가축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열등한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종과 하인을 비롯한 인간에게는 더욱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가축의 필요를 느끼고 돌보라는 말은 자신의 일꾼들을 돌보라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분이 우리의 부엌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9-10).


2020/12/23
열살된 손녀 아멜리가 방 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 목사님은 방문한 손님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하여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천장을 보면 바닥은 볼 수 없게 되고, 바닥을 보면 천장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전체를 파악하는 직관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고 있던 아멜리가 껴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습니다.

“전체만 보는 것도 역시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전체만 보면 전체 외에도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라는 말도 실재의 일부에 불과한 추상에 불과해요. 진리는 모든 부분과 그들의 합인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예요”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멜리는 다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어릴 때의 정약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인식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는 진리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이 창조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14:6). 이 진리의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와 사망의 굴레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2020/12/22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구하는 어느 농장을 찾아 추천장을 그 농장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추천장을 뜯어 보니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일손이 필요하였기에 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강력한 폭풍이 농장이 있는 계곡을 흩어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비와 윙윙 거리는 바람소리에 놀라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구한 일꾼을 불렀지만 그 사람은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헛간으로 뛰어가 가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았더니 놀랍게도 먹을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시 밭으로 뛰어가니 밀 곡식단들이 잘 묶여져 방수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곡식 창고로 뛰어가니 문들은 잘 잠겨 있었고 곡식은 아무 염려 없이 건조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주인은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하는 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은 항상 신실하고, 우리의 사랑은 항상 따뜻하고 우리의 포옹은 단단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였어야만 했는데”라는 고뇌 속에서 뒹굴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떠나는 마지막에 더 절박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늘 감사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5-36).


2020/12/21
때로 아이들은 예사스럽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8살된 소녀의 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 체험도 없어요. 그분이 나에게 오라고 하셔서 나는 왔어요.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면, 그들도 그분에게 안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께 초청하고 계십니다. 위의 소녀는 이 구절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을 주셨다는 귀절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여인들이 섬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실 때까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 승천하셨어도 만유의 주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소녀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안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우 큰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매일묵상

2020/12/14
침례교 가정의 여섯 살 된 아이가 특별히 추운 날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그 아이는 가족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때  ‘성삼위 일체’ 대신 ‘성사위 일체 우리 주로다’라고 노래 하였습니다. 당연히 지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침례받을 때 네 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어요. 목사님이 나를 물 속에서 넣으시고 ‘성부,,,브루루…성자….브루루….성신…브루루의 이름으로’라고 말씀하셨어요.”

공산주의 국가의 지하교회에는 침례당이 없어서 겨울에 침례를 받게 되면 얼음을 뚫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날 역시 추웠기 때문에 목사님이 떠는 소리인 ‘브루루’가 아이에게는 삼 위 중 네 번째 분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침례는 구약에는 없으며, 신구약 중간기(비시400 – AD30)에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와 함께 사용된 의식입니다. 즉 할례받은 이방인들이 물속에서 올라오면 완전한 유대교인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AD28 년에 이르러 침례요한은 이 의식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그들 가운에 오신 메시야를 준비하는 의식로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기독교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침례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보여주고(롬6:3-5), 이후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벧전3:2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2020/12/15
다섯 살 적에 아들 미하이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살구나무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살구씨를 넣고, 흙으로 덮은 다음 물을 주면 때가 되면 살구나무가 자라 나온단다.” 이를 들은 미하이는 흥분해서 자기 동생을 부른 다음, 둘이서 목사님이 가르쳐준대로 하였습니다. 먼저 땅에 보물을 묻은 다음 그 보물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했나 알아보려고 즉시 땅을 파고는 굉장히 실망을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어린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 핵심은 “절대로 너희들이 생각나는대로 하면 안 되고 꼭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하여야만 된단다.” 는 말입니다. 그때 “왜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할 말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단다!” 이것이 고도로 지식이 발달하였다고 자랑하는 인류가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 전에 인간은 어떻게 세상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연구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의 3대 질문 중 하나입니다. 피조된 인간은 인간 마음대로 하면 절대로 소기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다름 없습니다. 인간은 대상을 연구하여 그 속에 있는 지식을 발견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과학과 같이 신앙 역시 비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가면,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 맺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2020/12/16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전쟁을 명령하셨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미하이는 “이건 아마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일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별없이 구약성경을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미하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2세기 초엽 말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흑해 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선박 건조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AD 140년 경 로마의 공동체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제공하였지만,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전파한 교리는 구약의 하나님 야훼는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고 구분한 뒤,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신약의 신이 예수로 나타나셨다 등등의 내용입니다. 서머나 감독 순교자 폴리캅은 그를 만나 대화한 뒤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하였을 정도로 복음은 물론 사도바울을 심각하게 오해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이단들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지금 있는 이단들 역시 교회 역사상 나타났던 어떤 이단의 반복일 뿐입니다. 말시온의 파문 사건 이후 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2020/12/17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알렉스에게 욥기 33장 26절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 드리죠. 그러면 그분이 내게 기도하고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분은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기도를 더 잘하십니다.” 라고 자기나름대로 풀어서 말하였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祈禱)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으로 정의하며, 대체로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어린 알렉스의 말은 옳지 않지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라면 틀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간으로 오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상급으로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란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020/12/18
잠언 12장 9절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Better to be lowly and have a servant
than to play the great man and lack bread.

Proverbs 12:9

일반적인 가르침인 8절(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을 특정한 상황에 적용한 것이 9절입니다. 내용은 비록 사회적인 명성이나 평가는 보잘 것이 없지만, 자신의 사정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는 부요하고 명성을 가진 것처럼 행세를 하나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을 정도의 가난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이 잠언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18:12)” 와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할 잠언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상 인간은 재물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이런 극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벧전5:6-7, 쉬운성경)

매일말씀나눔

2020/12/11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주일학교 헌금으로 일 파운드짜리 동전과 십 펜스짜리 동전을 주었습니다(참고로 1파운드는 100펜스로서 약 1,500원정도함).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하지만, 또한 기쁜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면 그에 적당한 이자를 지급합니다.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의 회사채를 사면 금융기관보다는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기관보다는 위험합니다. 또한 KB 금융 등의 주식에 투자하면 시가의 약 5% 배당을 받을 수 있으나, 주가의 등락 때문에 원금 보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투자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안전합니다. 물론 그 이익은 금전으로만 환산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 생활을 잘 하는 것 역시 성도의 본분 중 하나이기에, 이분들은 믿음의 큰 담력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2020/12/10
어린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가족을 그려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한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네 사람의 머리가 비행기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성모 마리아, 요셉을 그렸구나. 그런데 이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

“아, 그것은 비행사인 폰티어스예요(Pontius, the pilot)!” 그 어린 학생이 ‘폰티어스’라고 한 것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영어로 Pontius Pilate 라 표기하고 ‘폰티어스 파일러트’로 읽습니다. 이 발음은 비행기 조종사인 ‘pilot 파일러트’의 발음과 아주 유사하여 아이는 빌라도 총독을 비행기 조종사로 오인하고 그린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을 배운 한 아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젤리 빵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영어 번역이 ‘daily bread’이나 그것을 ‘jelly bread’로 듣고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해서 아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그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29:49).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법을 묻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되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네가 왜 나를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느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7).


2020/12/09
일곱 살난 아멜리가 어느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와서 자기 개에게 세례를 주길 부탁하였습니다.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마지막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신 고 김준엽 총장(1920-2011)이 그분의 책 ‘장정’에서 쓴 글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부친은 사냥을 돕는 개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매우 개를 사랑하셔서 개가 부친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자, 이를 안 개 역시 먹기를 거절하여 끝내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나 주인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지요. 한편 개의 충직성과 영물성을 체험한 김총장님은 일생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부활할리는 없지만, 아멜리의 개는 부활을 하여도 주인인 아멜리가 없다면 부활한 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을 것입니다. 개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없는 나라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그것보다 의미 없고 지루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가 없다면 아무리 안락하고 휘황찬란하여도 살 곳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움도 행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시84:10-11, 새번역).


2020/12/08

어느 날 손녀 아멜리가 비난조로 할아버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할아버진 창문들(windows)에게 절하지 않아요?”
“성경 어디에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적혀 있던?”

아멜리는 재빨리 “과부들(widows)을 공경하라”는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어로 창문과 과부는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영어는 매우 흡사한 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부’는 ‘창문’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단지 ‘n’ 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아멜리는 과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어휘와 경험 때문에 실수로 ‘n’이 빠져서 인쇄되었다고 좋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 철자를 보충하여 과부를 창문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아멜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명령이 전혀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멜리가 성경이 하시는 말씀에 복종하려는 의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하고 적용한 성경은 전혀 성경의 취지와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어른이면 다 알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는 교리는 물론 의식의 해석 적용에 관하여 많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교회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상관관계를 망각하고 안식일 규정을 해석적용하여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은 성령께서 후일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지만, 지혜에는 어른과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딤후2:25, 새번역)


2020/12/11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2:1-3


위 3개의 절은 잠언 12장의 도입부분으로, 서로 대비되는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도덕적, 신학적 교훈을 주고자 의도되었습니다. 1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성품, 2절은 도덕적 질서를 수호하시는 행위자로서의 주님, 3절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영원한 운명을 말합니다. 결국 2절의 주님(여호와)은 모든 삶과 심판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보전은 주님의 긍정을 받기 때문에, 악인의 소멸은 주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가 악한 제사장들이었기에 아버지 엘리가 훈계하였지만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제사장 엘리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고는 그 증거로 두 아들이 하루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20년이 지난 뒤 집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블레셋과 치룬 아벡의 전투에서 두 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솔로몬의 등극시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에서 파직을 당함으로 심판은 끝났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보전되고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2020/12/04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고, 그 당시 헬라어는 구두점이나 쉽표 등의 문장 기호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어가 죽 나열되었으며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분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루마니아어를 포함하여 어떤 나라의 언어도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9: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루마니아 아이는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 아이를 방문하여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난 아파요. 하지만 거의 아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자기들의 고통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잘못된 이해가 이 아이의 믿음에 결정적인 해를 끼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과 동시에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오셔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당연히 그런 믿음에서 참됨과 사랑이 싹터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자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엡3:16-17).


2020/12/03
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1911-2004)의 부모님은 깊은 신앙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의 조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자 어린 로널드의 부모님은 주의를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아이들에게 식사 시간에 성경을 한 절씩 암송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너도 꼭 하나를 외워야 한다.” 로널드는 불과 네 살이어서, 어머니는 쉬운 구절을 하나 찾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우셨다”(요11:35).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가 울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입니다. 이제 로널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위해 열 명의 아이들이 앉았습니다. 암송할 차례가 오자 첫번째 아이가 “예수께서 우셨다”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자 할아버지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된 로널드는 “예수께서 우신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웃었고, 할아버지는 성경에 그런 구절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로널드는 “그분은 지금 울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린이들이 그분이 오래 전에 우셨다는 것밖엔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아주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사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심히 범죄하자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심히 슬퍼하셨습니다(창6:6-7). 결국 그들은 홍수로 전멸 당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의 불신앙, 죄악, 연약한 믿음, 완악함 등의 사유로 하나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2020/12/02
네 살된 어린아이가 미국 백화점에 갔다가 받은 비스킷에는 미국 지도 모양으로 생긴 것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걸 보니 무엇이 생각나니?”

“날씨요”

그 비스킷은 아이에게 저녁 뉴스 시간에 텔레비전에서 보는 미국의 모양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가인’ 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아벨은 하나님 앞에 형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질투를 받아 결국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의인이요 억울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을 받지 못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을 받은 것을 보자 질투하여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죽으셨으며, 심지어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를 죽이는 동족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아벨의 피는 땅속에서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 바 뿌린 피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각나게 되면 과연 지인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들겠습니까? 아니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먼저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2020/12/01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양복이 딱 한 벌 있었습니다. 그것도 때가 되니 낡아 너덜거리게 되어,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새 양복을 하나 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가정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3:11)

이 말씀은 AD28년 경 유대 광야에서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이 와서 회개하고 자복한 뒤, 묻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에 대하여 대답한 말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구절을 듣자 당시 네 살이던 미하이가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빠는 지금 양복이 두 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벌을 누더기 양복을 입고 있는 X 형제에게 주셔야 해요.”

“그분에게 어느 것을 주랴?”

“물론 새 것을 주셔야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의 말을 따랐습니다. 미하이가 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벌써 그런 해석과 적용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영성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범브란트 목사님에 결코 뒤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늘 돌보아주셔서 헐벗지 않았다는 간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2020/11/30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어린 소녀가 어머니에게 햇빛이 통과해 들어오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들은 성인(聖人)들이시란다.”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소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난 이제 성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어요. 나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나를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게 하는 소녀가 된다는 뜻이예요”

이 어린 소녀의 영적 통찰력은 놀랍습니다. 특히 성인들 중 슬픈 전기나 그들의 생애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그 아이가 내린 성인에 대한 정의가 진실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나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분이 사도 마태입니다. 이분은 당시 민족반역자이자 탐욕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세리의 직업을 가져서, 매우 경멸당하였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과감하게 과거를 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린 슬픈 기록이 있기는 하나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그분의 증인으로 일생을 사도로서 헌신한 뒤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하셨다고 로마순교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다 이와 같이 어둡고 슬픈 과거가 있는 죄인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빛을 통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