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0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우상을 전부 부수어 버린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나와,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달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자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아하,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태양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흰 모시 옷감들이 정원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같은 길로 돌아오다보니 아까 본 옷감들이 흰색이 아니고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추측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집 안에 누군가가 있을 거다. 아마 물감들이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흰 옷감에 물을 들였겠지.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에서 어떤 분도 보지 못하지만 하늘의 색깔이 매일 변하는 것은 볼 수 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어른이 계시는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그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뉴톤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연구하여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만유인력이라는 힘의 작용을 알아내고 그 힘의 크기를 계산하는 방정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법칙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엄청난 법칙들을 만들어 내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논리적 결론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0/11/19
아멜리가 아홉 살 때 굉장히 진지한 문제를 가지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왔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서 틀렸다는 것을 알 때, 무슨 말을 해도 되나요, 아니면 의심을 꿀꺽 삼키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이에 대하여 목사님은 반문하였습니다.

 “다윗이나 욥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 솔직하게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니?”

“두 가지 때문이에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말고 충고를 하셨어야만 해요. 아빠도 명령을 내리거든요. 둘째,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잘못하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별로 잘 사랑하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만약 우리가 우리 이웃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면, 우리 이웃들은 정말 불행할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사랑해야 해요.”

아멜리의 첫 번째 말은 인간의 타락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릴 때,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부모님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동등한 인간 사이를 떠나, 하나님께까지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조업자가 물건을 팔 때 넣어두는 설명서에는 반드시 조작법을 기술합니다. 그것은 충고가 아닌 명령으로,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에 만물이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법칙을 설정하여 놓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할 때 두 번째 말은 일면 수긍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다음 명령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2020/11/18
복종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금방 들은 설교의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너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지? 부모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걸 말이야!”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목사님 설교의 다른 한 쪽은 못들으신 모양이네요.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복종하세요?”

우리 모두는 우리만의 여과 장치를 가지고 있어서, 설교 뿐만 아니라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에도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우리 마음에 드는 것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견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취하는 성향으로,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에는 신경을 쓰지 않거나 외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 자기중심적 왜곡(myside bia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유모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하였다. 어느 때부터 신문에서 매일 담배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사가 계속되자 그는 신문을 끊었다.” 확증편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나, 낙인효과, 각종 왜곡된 보도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비평없는 독재국가나 카리스마적 종교에서는 인권이 유린되고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잘 간직하는 동시에 그 믿음이 사랑 가운데 일하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확증편향이 있더라도 그 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를 위해 쉬지말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훈계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지만, 책망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짐승같이 우둔하다.”(잠12:1).


2020/11/17
뉴욕에 사는 한 소년이 하나님께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하시려면 참 바쁘시겠어요. 그래서 여쭈어 보는 건데요, 제가 하나님과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언제가 제일 좋은 시간이겠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듣고 계신단 건 알지만, 하나님께서 뉴욕 쪽으로 귀를 기울이시는 건 언제예요?”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특히 주목하여 기도를 들으시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좋은 예는 에서입니다. 사냥을 갔다 온 에서는 매우 시장하여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한 그릇의 팥죽과 장자권을 바꾸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겨우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이런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망령된 에서와 같이 값싼 세상의 것들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월이 흐른 지금 소돔, 고모라, 가버나움과 벳새다 역시 회개하기에 너무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연히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자기부인할 것은 부인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2020/11/16
미국에서 발사한 우주 왕복선 중 디스커버리호가 있습니다. 1984년에 초도비행을 시작하여, 국제 우주 정거장 조립 임무와 허블우주망원경을 궤도에 전개하고는 2011년 퇴역, 현재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중입니다. 이 디스커버리호가 불을 내뿜고 발사되는 것을 일단의 아이들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새 별을 하나 더 띄우시는구나!”

여러분은 미소를 지으며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겨우 며칠밖에 못 가는 별이란다.”

그러나 실은 하늘의 모든 별들도 시작이 있었고 또 수명 역시 유한합니다. 그것을 증명한 학자가

허블(1889-1953)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입니다. 그가 발표한 법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그 팽창의 속도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하여 우주에 시작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허블의 법칙이외에도 우주 배경복사를 측정한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기(WMAP)에 의해 우주의 나이는 현재 137.72±0.59억년으로 계산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 내에 있는 별들은 모두 소멸시기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태양도 같습니다. 태양의 수명은 약 123억 6500만년이고 핵우주 연대학에 따르면 45억 672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 창조물들이 변화되도록 창조하셨지만, 앞으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입니다. 인간 역시 죄의 삯으로 죽지만, 신자들은 구속을 이루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3:15, 새번역).

2020/11/0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여섯 살 때 골고다의 그림을 보고 앉아서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선한 분도 죽였고, 악한 사람들도 죽였어요. 그러나 그건 잘못한 일이예요. 그들은 강도들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예수님은요? 예,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한 일은 잘한 일이었어요.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으니까요? 그러나 강도들은 그냥 가두어 놓기만 해야 했어요.”

알렉스의 말은 아이러니합니다. 1988년 마이클 듀카기스와 조지 부시가 미 대선에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TV 토론시 사회자가 사형폐지론을 내세운 듀카기스에게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고 질문하니, 듀카기스는 우물쭈물 하다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하여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결국 듀카기스는 패배하였습니다. 추상적인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됩니다. 죄의 문제는 그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는 이렇게 심각합니다. 그 당사자의 한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연히 범죄에 대하여는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 책임을 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알렉스가 의로우신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근거하여 살아났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요일1:10, 새번역).


2020/11/05
열살된 소녀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은 밀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가?”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게 무슨 말로 설교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소녀는 들판으로 나가 외쳤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곧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의 머리가 굽어져 있다. 너희들도 똑바로 서야 한다.” 

물론 밀들이 머리를 들리가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는 밀의 열매가 익어 무거워질 때 줄기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숙이게 되는 것은 중력의 법칙상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인생과 연결시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와 같은 격언을 만들어 내기도하며, 또 어떻게 보면 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땅이 자기들을 물과 영양분으로 키워준 데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숙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열살된 소녀가 이런 과학적 이치나, 인생의 경험을 잘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 맥락에서 임의로 떼어나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다스리며, 여러 과학적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삶에 무조건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겨우 몇 가지 법칙 정도만 천재적인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선을 다해도 실수가 많은 법입니다. 이런 사실을 겸허히 인식하고 마음을 낮추는 자는 세상과 창조주 사이에 위치한 인간 자신의 신분을 깨달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2020/11/04
범브란트 목사님과 그분의 아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아들 미하이가 다섯 살 되었을 때 그분들은 미하이를 유대인들 예배 장소인 회당으로 데려갔습니다. 왜냐하면 미하이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인 ‘심해 토라’(글자 그대로 율법을 즐거워하는’의 뜻임)를 경험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적은 두루마리가 회당 안에 돌려지면 사람들은, 특히 아이들이 그것에 입을 맞추기 위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행렬이 가까이 왔을 때 미하이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저도 두루마리에 입을 맞춰야 하나요?” “네 마음에 달렸다.” 목사님은 가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날과 의식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랍비가 가까이 와서 미하이가 입을 맞출 수 있도록 두루마리를 낮추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입을 맞추진 않겠습니다.” 아기가 말했습니다. 행렬은 멈추고, 놀란 사람들의 수백 개의 눈들이 미하이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미하이는 굉장히 긴장한 목소리로 다시 반복하였습니다. “전, 입 맞추지 않겠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 친구이기도 한 회당장이 미하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아까 왜 그렇게 했느냐?”

“랍비님, 하나님께선 저희에게 어머니를 주신 건 입맞추라고 주신 거고, 율법을 주신 건 그것을 읽고 복종하라고 주신 거지, 입 맞추라고 주신 건 아닙니다.”

희랍 정교회에서도 굉장히 호사스럽게 장정한 복음서를 돌려서 교인들에게 입을 맞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사람은 매우 적고, 더구나 복음서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0/11/0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작은 우상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장에 가서 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 아브라함은 우상을 사러온 고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보니 할아버진 연세가 꽤 많으시군요. 60-70세는 되어 보시는군요. 그러니 우리 아버지가 만든 이 신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어요?”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도 팔지 못하였으며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에게 매 맞고는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이 신들의 실재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데라의 집에 있는 사당에 여러 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제일 높은 신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제일 높은 신 앞에 좋은 음식을 놓고 지켜보았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도끼를 들어 제일 높은 신 이외의 모든 신상들을 부수고, 도끼를 제일 높은 신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외출했던 아버지 데라는 산산조각이 난 신상들을 보고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제가 신들에게 음식을 갖다 드렸더니 신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큰 신이 작은 신들을 다 죽여버렸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것들은 신이 아니죠”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고 재빨리 마지막 우상을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게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2020/11/02
아브라함이 데라의 우상을 부수어 버린 것과 같은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시13세기경 미디안의 압제로 심히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자로서 기드온을 택하여 여호와의 사자를 보냈습니다(삿6장).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아버지 요아스가 섬기는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고, 그 찍은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밤에 이를 행하자, 다음날 이를 안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갔습니다. 그러자 요아스는 오히려 기드온을 옹호하여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고대야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모든 것을 신의 작용으로 오해하였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바알 숭배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맹신이 지나쳐 참된 하나님마저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좌측으로 치우친 것이죠! 원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드신 모든 것들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시고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쳐 구원하신 것과 같이, 죄와 사망이라는 벌을 받고 마귀의 종이 된 인류를 구원하시 위해 더 큰 기드온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2020/10/30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유명한 말은 교보문고를 만든 대산 신용호 회장(1917-2003)의 삶의 경험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대산은 집안이 가난하였고, 폐병에 들려 학교에 갈 시기를 놓쳤습니다. 배움에 한이 많았던 대산은 그것을 많은 독서를 통하여 극복하였습니다. 대산은 책에서 만난 수많은 주인공 중에 특히 헬렌 켈러와 카네기를 존경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건강 때문에 진학이 좌절됐기에 헬렌 켈러를 통해 도전정신을 배우고 되새겼고, 제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세계 최대 철강회사를 일군 앤드류 카네기는 대산에게 사업가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20세에 만주에 가서 이육사를 만나면서 민족자본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혼란과 6.25의 전쟁을 겪은 대산은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교육과 보험을 연결한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를 세우게 됩니다. 1958년 8월 7일 개업식 때 “저는 25년 이내에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고, 가장 좋은 땅에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말 그대로 20년 안 되어 교보는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고, 광화문에 교보빌딩 22층을 건설함으로 자신의 말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로와 광화문을 잇는 그 지하 1층 1,100평의 요지에 수익성 있는 점포들이 아니라, 서점을 계획하고 100만권의 서적을 비치한 것은 대산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교육철학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가치관은 그 사람의 인생 방향을 결정합니다. 물론 대산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대산의 철학이 따라 올 수 없는 위대한 가르침 뿐만 아니라,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롭게 자신을 평가한 뒤, 옳다고 생각되면 주님을 신뢰하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2020/10/29
어떤 루마니아의 어린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이 다 적혀 있는 책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들었을 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이름을 꼭 써주세요. 제 이름은 라다 이오네스큐입니다. 그러나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제 이름의 철자를 제가 불러드리는게 좋겠어요.” 그리고 나서 소년은 한 자 한 자를 조심스럽게 발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덧붙였습니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혼동되지 않도록 제 이름과 주소와 생일도 써주세요.” 어린이의 이런 기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태평할 때에도 우리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갈등, 노후의 문제, 병의 문제, 재산의 문제, 취업과 일의 문제, 명예와 승진의 문제 등 수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얻는 과정에서,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늘 주님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습관을 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작고하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삶을 생각하면, 세상이냐 하나님 나라를 두고 다시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됨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삼성을 세계적인 회사로 키워낸 인물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그분의 선친인 이병철 회장을 능가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반면, 정경유착과 경영권 확보와 관련되어, 두 번이나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것은 그분의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주권이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 손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1-22).


2020/10/28
여덟 살된 미국 소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빠는 가끔 저를 무릎위에 앉히고 차를 운전하게 해주시지만, 언제나 아빠의 손을 제 손 위에 놓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우리나라가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제발 당신의 손을 그분의 손 위에 놓아주십시오.” 이 기도에는 통찰력이 보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는 중보기도와 관련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사도는 중보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며, 여기에는 특히 임금들, 높은 사람들이 포함되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간구(요청 request), 기도(일반적인 기도), 도고(높은 사람에게 간청함 petition), 감사(감사기도를 의미)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간구란 우리의 부족함과 관련되어 있고, 기도는 헌신의 의미를, 도고는 어린이 같은 신뢰의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늘 감사를 동반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도할 특권을 가진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신 우리 주님을 통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특히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8-10).


2020/10/27
성경과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고 자란 열 살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소년의 부모가 거친 말싸움을 하고 난 뒤 소년은 아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빠, 저를 안과 의사와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데려다 주세요.”

“왜?”

“제 몸에 이상이 있나 봐요. 성경에서 들은 것은 들을 수 없고, 성경에서 본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래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아마 같은 말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직접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드신 세상에 들어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셔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종의 형체를 취하여 인간이 되셨을 때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입니다. 만약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의 관계가 훈훈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한편 세상은 살기 쉽지 않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늘 기뻐하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험할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2020/10/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기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습니다.

“알렉스야, 차에 타거라. 널 의사에게 데려가야겠다.”

“왜요?” 다섯 살짜리가 물었습니다.

“기침 때문에”

이들은 병원에 갔다가 목사님 댁에 들렸습니다. 알렉스는 명랑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분이 어떤가 보러 갔었는데, 아무 탈도 없었어요. 감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갔는데,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이때, 목사님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의 이야기를 또 한 번 들려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범브란트는 유태인으로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전도하신 분은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죄들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것이 예수님과의 첫번째 만남이었고,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순수하고 깨끗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도 없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큰 기쁨으로 채우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1:7, 새번역).

2020/10/23
나디아의 생일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작년 생일에는 아빠가 제게 초콜릿 한 개를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나 지금 아빠는 감옥에 계세요.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예요. 제발 제게 초콜릿 좀 갖다 주세요.” 

이 당시 러시아에서 초콜릿은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언니인 라리싸가 나디아를 꾸짖었습니다.

“우린 정말 필요한 것만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그런 사치품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디아의 어머니도 그말에 동조하였습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위해서, 우리 옷이 떨어졌을 때 옷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단다. 그리고 병이 나면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초콜릿은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라곤 생각되지 않는구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나디아의 생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아이들을 위해 초콜릿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 사건은 나디아의 가족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그분은 절대로 필요한 필수품이 아닌 것들에 대한 기도도 이루어 주시는 데서 기쁨을 느끼시는 분입니다. 물론 어른이라면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초콜릿를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디아와 같은 어린 아이에게 있어 초콜릿은 정말 중요한 물품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 응답입니다. 주관적인 체험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앞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2020/10/22
범브란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 부부는 아이를 보는 여자에게 미하이를 맡기고 외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고 미하이는 그녀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미하이의 기도는 “엄마 아빠가 빨리 집에 오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를 끝낸 후 미하이는 자기를 돌보는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때 목사님 부부는 정말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전혀 가지고 나가지 않고 집을 나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하이는 의기양양하였습니다. “난, 내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기도를 응답하시지는 않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이가 가졌던 어린아이의 기도와 믿음은 우리의 삶에 좋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일단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인생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알게 지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큰 이유는 아마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신실하게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풍성하게 주시는 응답을 체험하고 우리의 마음은 터질듯한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가지는 큰 특권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2020/10/2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어렸을 적에 자기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기도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로버트야?” “내가 그렇게 해보려고 애써 봤거든요.”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로 작정한 후, 저녁이 되어 자신을 돌이켜 보고, 기도없이 착한 사람으로 사는데 성공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다만, 정직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능력도 역시 같습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하루 종일 생각만 하여 무엇인가 이룰려고 노력하였지만, 무익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고 만지고 연구하지 않으면 창조적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나면서부터 교만한 인간이야말로 자기 능력으로는 그런 품성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박사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이거 안돼겠다’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세계에서 최고가는 박사가 될 것입니다.”하자, 모두들 고개를 들고 목사님을 쳐다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잡초를 자르듯이 나올 때마다 싹뚝 싹뚝 잘라 버려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사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확보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다가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주셔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쉬지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엡6:18, 쉬운성경).


2020/10/20
말썽을 피워 일찍 잠자리로 쫓겨갔던 어린 아들이 금방 돌아왔습니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기도했어요.”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잘 했다. 너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다면 말이다.” “아니에요, 나는 좀 다르게 기도했어요. 하나님께 엄마가 지금 이대로 나를 참아 줄 수 있게 해달고 기도했어요.” 이 사례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우리 이웃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분은 식물과 동물을 만드시고, 물과 땅과 하늘, 해 달 별들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곤충, 바이러스 할 것 없이 도대체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존재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를 다스리도록 책임을 부여받은 인간은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혜롭지 않으면 절대로 창조주의 뜻이 실현되도록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들 간에도 서로 다릅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간은 공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못 난 부분은 받아들여 기도해주고, 잘된 부분은 격려하여 더욱 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이웃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다른 이웃이 서 있을 수 있는 공통된 기반을 못 가지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이 이래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는 모든 인류를 주님 안에서 받아들일 근본적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 보다 나 자신이 변화하여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면서까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모범은 우리 행동과 기도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2020/10/19
범브란트 목사님의 가족모임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손자인 어린 알렉스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의 아내이자 알렉스의 할머니가 가볍게 꾸짖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했니?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잖니?” 알렉스가 완강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식사 기도를 했으니, 제게 먹을 것을 주시는 건 할머니 책임이에요.” 알렉스는 어리지만 아주 심오한 진리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마태복음6장 25절 이하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먼저, 마음을 겸허히 하고 우리가 행하여만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세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든, 아니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렉스의 할머니께서 알렉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책임을 가지고 있듯이, 그 다음의 몫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킬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만든 중력의 법칙이 세상 끝날까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작동하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새번역)

2020/10/16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 하던 목사님이 ‘도덕적 용기’의 실례로, “기숙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년들에게 또 다른 실례를 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년이 큰 소리로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들로 가득찬 기숙사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그런 용기를 가진 고위 성직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군부정권이 수 십년 동안 지배하는 동안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압력에 저항한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잘 입증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다윗, 욥, 예레미야 같은 분들은 우리에겐 너무하다고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할 용기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역시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분들과 같은 생각들로 가득찼지만, 그런 생각들을 억눌러 왔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우리 속에 깊숙이 박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큰 소리로 질문한 소년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 논쟁을 벌일 용기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질문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때에도 틀림없이 우리를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대표적인 선지자는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불의한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수탈당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 그런 갈등을 토로하였더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때가 반드시 오니 비록 지체될 지라도 기다려라는 대답을 하시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정답을 주셨습니다. 이에 응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1:6, 새번역).


2020/10/15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못 가진 것들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서 좀 우울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네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러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머리카락과 얼굴과 눈썹과 입술과 이와 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자기 몸의 모든 부분을 다 언급하며 길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우리집에 오신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말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목사님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그 아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은 그 아이의 것들보다 더 큰 크기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집에 온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그 네 살도 안된 아이의 기도는 즉각 응답이 된 셈입니다. 이 깨달음이 오자 목사님은 그 아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다른 면들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목사님은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가을을 맞이하여 우리 역시 한 해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은 성공 뿐만 아니라 실패 역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생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겸허하게 갖고, 모든 일에 지혜롭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허락하신 모든 축복들에 대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삶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세탁기를 잘 사용하기 위해 이리저리 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세탁기는 먼저 만드신 주인을 알아야 하고, 인생의 작동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


2020/10/14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일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때 한 소년이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화번호가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화번호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으로 가는 다섯 개의 단계를 적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함(롬3:23). 둘째, 죄의 결과에 대한 명백한 인식 – 죄의 삯은 사망(롬6:23 전반).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준비하셨음을 깨달음(롬6:23후반). 넷째,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함(롬10:9). 다섯째, 구원의 결과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게 됨(롬5:1). 이와 관련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야, 하나님의 전화번호는 다섯자리 숫자란다 – 회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믿음, 사랑, 진실, 그리고 외로움.’” 다른 전화번호는 다 이해하겠는데, ‘외로움’이라는 마지막 번호는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서로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고독합니다. 그 외로움 고독 두려움 불안 눌림 등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고 그 모든 죄의 결과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수 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모든 외로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갈 곳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하루도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2020/10/13
아침 기도에서 어린 도로시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좋은 아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도 이런 아침을 좋아할 거예요.” 도리시는 비록 어리지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짐승들도 먹이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들의 필요 역시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사람들 뿐 아니라 악인들 위에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마음 보다 넓을 수 있으며, 넓어야만 합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 나이가 70즈음에 이르렀을 때 고향 친구가 찾아오자 밖으로 나가서 발로 차서 쫓아버린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치에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지식이 많고, 제자가 3천에 이르며, 그 중 뛰어난 제자들은 각국에 등용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분은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무시하는 마음도 들어 있어,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친구를 별볼일 없다고 발로 차서 보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유학은 삼라만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할 개념이 없습니다. 물론 성리학은 나름대로 이기론을 내세워 삼라만상과 자신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그것조차 비인격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을 주인으로 모셔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시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존재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당연히 신자들은 청지기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는 물론, 삼라만상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와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 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2020/10/12
신앙 때문에 나디아의 아버지는 구 소련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날 소녀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와 같이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돌아보며 소녀가 사려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이 꽃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빠도 돌봐 주실 거예요.” 소녀는 몇 송이 꽃을 꺽어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빠에게 이 꽃을 갖다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다음날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전해질 식품 꾸러미를 맡기려고 소녀는 어머니를 따라 경찰서에 갔습니다. 나디아는 근무 중인 경찰관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저씨에게도 아이들이 있어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경찰관은 소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어린 딸을 묘지에 묻고 왔습니다. 나디아는 자기가 꺾어온 꽃들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 이 꽃들을 우리 아빠에게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시겠죠, 아저씨?” 그 경찰관은 도저히 어린 소녀를 당해 낼 수 없었고, 그 꽃은 나디아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디아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나디아의 아버지가 옥에 나오는 근본적인 기도는 응답하지를 않으셨는가?” 제가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를 못하여 조심스럽습니다만, 수 십년이 지나서 소련의 공산체제는 종식을 고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옥에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자체가 은총의 산물입니다. 수용소 군도를 쓴 솔체니친이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을 때 그 작가는 자유로운 서방세계의 젊은이들 속에서 정신적 공허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더 큰 절망을 목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주님을 따라 가야만 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5-18).

2020/10/8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순종의 미덕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단 위에서 이러저리 걷고 있는 그 선생님이 풍기는 분위기는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그는 큰 소리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잠시 뜸을 들이면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이들을 노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줄 알고 있습니까?” 그는 누군가가 “선생님이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꾸밀 줄 모르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러합니다. 다만 벌이 무서워서 거짓말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모두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점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인간들의 장기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죄된 경향성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보고 그대로 쏟아냈다가는 인간관계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결점을 보고 “입을 다물 때가 있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전3:7). 이런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덕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입을 다물고 주님께 이 문제를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언제나 솔직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때는 열일을 제쳐두고 반드시 주님 앞에 이 문제를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간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인격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2-14).


2020/10/7
어떤 소년이 어머니에게 배가 아프다고 말하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어쩌면 네 위가 비었기 때문일 수도 있단다. 네게 먹을 걸 만들어 주마.” 얼마 후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을 오셨다가 우연히 머리가 아프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목사님, 아마 목사님의 머리가 비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머리에 무얼 좀 먹이십시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들도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할 줄 압니다. 다만, 아직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서 지혜가 부족하고, 따라서 그 적용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잘못 이해하거나, 적용을 잘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라고 부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말 ‘어리석다’의 어원은 ‘어리다’입니다. 국문학자 홍윤표 박사의 글입니다.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란 뜻을 가진 ‘어리석다’란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어리다’가 ‘어리석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의 ‘어린 百姓’은 ‘나이 어린 백성’이 아니고 ‘어리석은 백성’이란 뜻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뜻을 가졌던 ‘어리다’는 오늘날 ‘어리석다(愚)’의 뜻은 사라지고 ‘나이가 적다(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어리다’는 원래의 ‘슬기롭지 못하다’는 뜻을 ‘어리석다’에 넘겨주고 자신은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일에 어리석은 사람, 즉 경험이 적고, 판단력이 미성숙한 사람을 배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우리가 어리석어야만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죄악은 경험이 적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른이고 어린이건 가릴 것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도 경험할수록 커가는데, 처음에는 하나의 죄된 행동이지만, 다음으로는 습관(죄인)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인격화(오만방자한 성격)됩니다. 그래서 시편의 첫 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우리 삶에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4:20, 새번역).


2020/10/6
영국의 어느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갇혀 있게 되었을 때, 누구하고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소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 전문가요.” 정답입니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의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이생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들만 해도 이미 너무 복잡한데, 거기다가 지구 온난화 문제,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의 문제, 기상이변의 문제, 날로 증가하는 부도덕성, 범죄, 폭력 등이 난무하니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출구를 찾고 있으나 이 지구 상에는 없습니다. 그래 미국의 일론 머스크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어김 없이 죄와 사망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비극의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전자를 가지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후자를 가지고 우리의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가르침을 따르는 세상은 참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 너 자신의 존엄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라는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안 보이는 하나님은 말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보이는 이웃 사랑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낮추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자신을 낮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무능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비로서 주님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낮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혀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마18:2-4, 새번역).


2020/10/5
한 무신론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린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나에게 보여 주면 네게 일 파운드를 주겠다.”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겐 오십 펜스짜리 하나밖에 없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보여 준다면 이 동전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어린이는 매우 현명한 아이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대중을 향하여 강연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었습니다. 한 동안 하나님을 모욕하더니니 그치고는 청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하나님이 조용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욕을 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 청중 가운데 한 노신사가 일어나더니 강단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하는 그 철학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강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철학자의 일생에 아무런 징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버림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에 대하여 징벌을 받아도 그 때문에 회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정말 행운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우리 모두가 선다는 생각은 이처럼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세상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반역자들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를 벌하시는 것 이외에 어떤 일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 모든 죄악의 결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2020/9/29
어린 알렉스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림을 그리라면 어떻게 그리겠니?”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있는 걸 그리지요.” “죽음은 어떻게 그리겠니?” “관 속에 사람이 누워 있고, 관 위엔 빨간 십자가가 놓여 있는 걸 그리지요. 십자가는 우리를 구해줘요.” “삶은 어떻게 그리겠니?” “사람과 해를 그리겠어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이들의 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림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돌려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삶에 대하여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한 우리의 답을 적기 전에,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때는 목요일 저녁 식사 중으로, 주님께서 체포되시기 불과 5시간 전이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지금 당신을 팔려고 대제사장들에게서 은 30량을 받고 밀고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마지막까지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어주시면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발을 다 씻겨주신 뒤, 주님은 다시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사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체험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난 뒤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만유의 주님께서 자신들을 섬기려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삶을 생각하면 섬기는 삶으로 요약되고, 그 대표적인 표상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들 각 자의 삶을 관찰하시고는 어떤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주시겠습니까? 오늘 마음에 곰곰히 생각하시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10:45).   


2020/9/28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최종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동기가 아주 훌륭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표준전과입니다. 이 땅에는 좋은 것도 많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들(하나님 공경, 부모공경 등)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이때 죄가 드러나면 죄의 삯을 치루어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도 가진 것도 없는 영적으로 파산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이 그 대가를 치룰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수단으로서, 이사야의 표현에 따르면 ‘주님의 팔’로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서 온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모두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영생불사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방법을 적어 놓은 성경의 주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문장으로 요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짜 네가 나를 주님으로 영접하였는가?”를 판단하시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이른바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당연히 그날에는 입술의 고백을 뒷받침할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통교리는 그에 합당한 삶으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반면 정통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준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신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열망의 실천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25:37-39).­­­

2020/9/25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받고 싶니?’ 죽은 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면 아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아빠가 저 사진틀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합니다. ‘본능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저절로 생기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됩니다. 헬라 원문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서두에 나옴으로써,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본지는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당신의 제자들 사이에 당신으로 인하여 부자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만 법적인 의미로만 이해된다면, 우리 마음에 별 다른 감정이 생기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하여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성령님을 통하여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아이가 ‘아빠가 저 사진틀에서 나와서 우리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함께 살고싶은 마음 그것이 우리가 중생하였다는 좋은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 양자의 영(성령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우리 마음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첫 마디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이 되고, 이것이 영생의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시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9-31).


2020/9/24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거니? 아픈 거니?” 다른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굉장히 아픈 거야, 할머니는 진짜 어른인데, 할머니 얼굴에 있는 주름살 좀 봐. 그러나 진짜가 아닌 사람들만이 그걸 보기 흉하다고 생각해. 나는 할머니를 사랑해.”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입니다. 실상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잠17:6)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인이 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물론, 머리털조차 백발로 변하게 됩니다. 이 백발에 대하여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16:31)고 하여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백발 머리가 영광의 면류관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천하의 명장이고 단 한 번의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던, 다윗의 조카인 요압은 사사로이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로서 사울의 사후 다윗에게 항복하기 위해 왔으나, 전쟁 중 동생 아사헬을 죽였던 것에 복수심을 품고 암살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아마샤로서 요압대신 군대장관을 삼고자 한다고 다윗이 공포하니 그대로 죽여버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건립에 공이 많은 요압의 죄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솔로몬에게 그를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왕상2:6). 요압은 솔로몬이 등극하자 마자 처형당하였습니다. 이런 요압과 대조적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의 백발은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졌습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고, 당시 최강대국 애굽을 80년 동안 통치하면서 많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는 아버지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430년 동안 정착하고 민족을 이루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공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서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결국 감옥에 수 년 동안 갇혀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죄수의 신분에서 총리의 신분으로 뛰어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요셉은 제국을 통치할 기술과 지혜는 물론 인성까지 연마한 뒤였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한 줄기 빛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장래 자신이 할 더 큰 일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백발 역시 젊을 때부터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손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새번역).


2020/9/23
한 여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무엇이 들어 있지?” 한 여학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집 성경에는 굉장히 많은 날짜와 결혼과 죽음과 신문기사 오린 것과 생일 카드와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 있어요. 그게 아마 다일 거에요.” 성경에서 그런 것밖엔 찾을 수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영적으로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은혜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줄이 처져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서 맺은 성령님의 열매의 간증으로 가득차 있는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치매 그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마음에 간직하며,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면 삼심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그 주초를 반석 위에 세운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춤 하나, 게임 하나 마스터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수 천번이나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도를 하여야만 합니다. 아이들은 이것이 재미있어, 야단을 맞고 돈이 들어도 계속하여 마침내 상당한 게임의 경지에 이릅니다. 선한 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의 것은 거기에 따르는 보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가치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딤전4:7-8, 현대인의 성경).


2020/9/22
다섯 살짜리 소년이 저녁마다 자기 전에 하는 기도를 암송했습니다. “나 이제 잠자리에 듭니다. 주님 내 영혼을 지켜 주세요. 만일 내가 죽으면…..” 여기서 그 소년은 멈추고 물었습니다. “아빠, 죽음은 어떻게 생겼어요?” “캄캄한 거란다.” 그 소년의 아버지가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것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껴 울며 어둠 속에서 잠이 깬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주일학교에 보내는 분이었습니다.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죽음에 대해 굉장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이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굉장히 흥분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엄마! 엄마는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무덤을 통과하시면서 뒤에다 빛을 남겨두고 가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죽음의 권세에 일시적으로 굴복하셔서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는 죽지 아니할 몸을 입고 영원히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이 살아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 역시 그분과 같은 경험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첫 번째 종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종이 행하실 사역을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 이는 여호와의 종을 통해 죄와 사망 가운데 갇혀 영원한 흑암에 거할 우리들을 풀어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데 ‘사망’이란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대해 붙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어도 영원한 몸으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그 부활의 날을 고대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분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2020/9/21
방금 아침 기도를 마친 아이에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무엇에 대해 기도했니?” “하나님께 쉬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이제 내가 깼으니까 하나님은 편안히 주무시라고요.”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역시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당신의 뜻을 준행하겠습니다.”는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약 3,200년 전에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인 어린 사무엘이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양육될 때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이자 사사는 엘리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막 안에서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네 번이나 거듭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까지는 엘리의 음성인 줄 알고 엘리에게 나아갔었습니다. 이에 주님의 부르심인 줄 깨달은 제사장 엘리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행할 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서서 네 번째 부르시자 비로서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가문의 죄악과 그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무엘의 소명 사건입니다. 이후 하나님은 사무엘을 사사와 선지자로 세우셔서 왕정이 시작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맡아 충성을 다하여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왕 사울과 그 다음의 왕 다윗을 세울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선지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의 견제 때문에 은퇴하여 후학을 양육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누구나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소명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섬길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길 기회들을 발견하였을 때는, “이 일에 제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주님은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수고의 대가는 주님께서 섭리를 통하여 주시고 그 마지막은 칭찬과 함께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맡은 사람에게 더없이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고전4:2, 쉬운성경).

2020/9/18
KBS 라디오 “말 같은 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날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럼 좋은 문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명언에 그런 말이 많습니다. 명언은 오랜 세월을 거쳐 살아남은 말입니다. 내용도 좋지만 문장의 형식도 좋습니다. 어떤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수사가 어떻해야 하는지 형식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명언을 외우다 보면 문장의 형식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러면 응용해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다더라’ 하면서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풍부해 집니다. 명언 주인공의 권위를 빌려 말의 신뢰를 높이고 듣는 사람에게 통찰을 일으킵니다. …… 한 때 명언이 들어 있는 일기장이 인기였습니다. 어지간히 유명한 명언은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아포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명언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포리즘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경험된 진리를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젊은 세대들이 이런 아포리즘을 찾는 걸까요? 간결함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그들의 취향에 맞아서일까요? 아니면 어디에선가 위로받고 용기를 얻고 싶은데 주변 어른들의 말은 왠지 꼰대스러워서일까요? 뭐 이런 건 아닐런지요? 그러면 나만의 명언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까요?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의견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세요. 이것에 대한 내 의견은 무엇인가? 그때 이것은 우리 경제일 수도 있고, 코로나 사태일수도 있고, 화제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바로 그것이 나의 명언입니다. 늘 생각하고, 메모하고, 말해보면서 내 안에 명언을 쌓아나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상이나, 책, 논문 등에는 반드시 제목이 따라다닙니다. 그 제목은 그 책이 쓰여진 목적이나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해주는 글입니다. 자신이 읽은 아티클이나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으면,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1754 페이지의 방대한 책의 주제와 결론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이며 모든 교리와 사상 그리고 신학은 물론 우리의 행동까지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한 마디, 한 문장입니다. 그 한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이 짧은 문장을 풀어놓은 것이 바로 신구약 66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골2:6).  


2020/9/17
여섯 살의 아멜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기까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도망치기로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도와 드리려다가 꾸중만 들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아예 그런 사람들을 뽑은 것은 예수님 잘못 아닌가? 만약 성인이 어린 아멜리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그분은 성경이 증거하는 주된 메시지를 이해못한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자기 뜻대로 어떤 것이든지 하실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선하시다. 그런데 왜 우주에 악이 들어와 있고 나에게 이런 불행과 어려움이 있는가? 하나님은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탄에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도록 허락하셨는가? 또한 모든 사람이 심판대상인데, 전부를 구원하지 않고 왜 당신이 선택하신 일부만 구원을 하시는가?.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왜 악마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 지옥에 먼저 던져 넣지 아니하시는가? 그럴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이냐 아니면 선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냐? 등등의 많은 문제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더 좋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악이 허락된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셨다”는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당신의 정의로운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기준에서 벗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는 어린 아멜리가 어른이 되어 세상을 보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엡3:10, 쉬운성경)


2020/9/16
“의미 요법”이라는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유명한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크(1905-1997)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던 중 동생 윌터가 잡혀 가는 등 나치의 압박이 심해오자,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하여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부친이 파괴된 회당에 갔다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 하나를 가지고 오셨는데 그 돌에는 히브리어 한 단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부친의 말씀이 “십계명 중 이 단어로 시작되는 것은 제 5계명밖에는 없기 때문에 이 돌 조각은 5계명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는 이를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치의 통치 하에 의사로서 일하던 중 빅터는 틸리 그로서와 결혼하였습니다(1941년). 그러나 1942년 빅터와 그의 아내와 부모는 테레지엔 슈타트 캠프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는 병으로, 어머니는 가스실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44년 빅터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우슈비츠로 옮겨졌으며, 그는 다시 아내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아내가 자유를 얻어 수용소에서 함께 몰려 나오던 중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리 피신한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모든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절실한 실존주의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기품있게 살아가며 생존확률도 높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질서한 삶을 살면서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정신분석학사에 길이 남을 로고테라피 즉 ‘의미요법’을 창시하게 됩니다. 그것은 종교든, 지식이든, 가족이든, 철학이든, 명예이든 무엇이든지 좋으니 삶의 의미를 가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존주의적 삶의 방식으로, 그분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런 식으로 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부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모습이어야만 할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요, 목적이고, 참된 진리이며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2020/9/15
빅토 프랭크 의사는 전쟁이 끝난 뒤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의 딸이 여섯 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빠, 왜 우린 늘 ‘좋으신’ 주님이란 말을 쓰지요? “ “네가 며칠 전에 홍역에 걸렸지. 그때 좋으신 주님께서 너를 낫게 해주셨잖니?” 그의 딸이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아빠의 대답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빠, 먼저 내게 홍역을 보내신 것도 그분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불과 6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대답을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는 의례적인 종교적 대답이나 하나님에 대한 값싼 선전으로 아이들을 쉽게 속여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지성을 갖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 세상에서 상당한 기간을 살아본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력의 법칙과 같은 자연법칙들이 언제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에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관관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반론을 매우 경계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는 일본에서 선교할 때 A 라는 주재원이 교회의 일에 훼방을 많이 놓았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그분 나중에 보니 망하였더라…는 등의 연결은 매우 위험한 등식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누구도 그런 사건이 그런 병이 혹은 그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정확히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남을 아래로 보고, 손이 잔인하며, 머리가 능수능란한 사람이 세상에서 재물도 많이 모으고, 권력도 가지며, 명예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파멸에 두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못 가는데 형통하는 경우 회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재단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말하기를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8:14) 하였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하고, 또 냉철한 지혜가 요구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경주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6-17).


2020/9/14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스는 아이들에게 모래를 던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벌로 매일 교장실로 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훈계를 들어야만 하였습니다. 알렉스는 아빠에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 자기를 위해 교장 선생님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알렉스 아빠는 이 일을 계기로 그에게 귀중한 교훈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네가 죄를 지으면, 너는 낚시에 꿰이게 되는 것이야!” 그 말에 어린 알렉스는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하면 낚시를 벗어날 수 있지요.” 매우 똑똑한 아이입니다. 사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이보다 더 가볍게 벌을 면하였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회개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몇 마디 말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다음의 실화를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님의 어린 시절 그 동네에 두 사람의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A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학교 선생님이었고, B는 믿지 않는 사람이며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등감을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B가 술에 취하여 사람들과 언쟁을 하는 것을 보자 A가 말렸습니다. B는 장난삼아 ‘너 맞아 볼래’ 하면서 A를 향해 휘두르다가 의도하지 않게 뒤통수를 갈기게 되었습니다. A는 뇌진탕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B는 뼈저리게 후회와 참회를 하였고, 사정이 참작되어 과실치사로 3년의 징역형을 산 뒤 출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 특히 친구를 죽였다는 자책감에서 놓여나지를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아내에게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뒤 소식이 없기에 찾아보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후였습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언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런 은혜를 가진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4-5).

2020/9/11
아직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아주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가치관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할아버지인 범브란트 목사님 가정에 진주 같은 지혜를 비추어 그분들의 삶을 자주 밝게 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다 좋아해요. 나는 하나님에게 속했거든요. 그러나 마귀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요.” 그 어린 알렉스가 가지고 있는 영분별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1-2). 알렉스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도, 이미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번은 TV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있을 때 알렉스에게 극의 줄거리를 설명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목사님은 알렉스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알렉스의 대답은 그가 단순히 이해 정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예, 할머니가 예수님의 줄리엣이예요.” 알렉스는 어떤 신학적인 설명을 해 주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품고 계신 사랑이, 신랑이 신부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에 의해 중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니고데모는 성경과 세상의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랍비였지만, 죄와 사망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종의 쇠사슬에서 풀어주셔야만 하는 것과, 이를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달아야만 비로소 자신만을 사랑하는 인간이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의 길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2020/9/10
어떤 아이가 할아버지의 팔에 안겨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할아버지를 만드셨어요?”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그럼 나는 누가 만드셨어요” “너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지.” “그렇다면 요즘 하나님 솜씨가 많이 좋아지셨네요. 실습을 많이 하셨을테니까요. 이젠 얼굴에 주름 같은 건 만들지 않게 되셨나봐요.” 하나님께서 나아지신다? 이 아이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36:11)는 말씀을 받아 포로로 잡혀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대보다 우리 세대의 한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순전히 건강과 관련해 본다면 우리들은 좋은 의료진들과 시설을 갖춘 나라에서, 양질의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혜택이 코로나19로 인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50년 이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질병이 많고, 가난한 나라로서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폐병은 매우 무서운 병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폐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무서웠던 폐병은 지금 한국에서 소멸된 전염병 중 하나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의학과 과학의 진보가 있었던 것은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하면 안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진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 신자들은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 이웃들은 물론 이웃 국가들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코로나 19 백신만 주면 중국과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까지 한 상태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당장 우리 북쪽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역사의 키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와 도움의 영역을 넓혀 가야만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8).


2020/9/9
“애야, 네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에 대해 나한테 애기 좀 해 봐라” 어떤 남자가 어린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소년은 단순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작아서 하나님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소년은 순교자 저스틴(‘유스티아누스’라고도 불리움)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했을 때 하였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저스틴의 생애는 그의 저작인 유대 랍비 ‘트리폰과의 대화’와 그에 관한 순교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AD 100년 경 팔레스틴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리에 목마른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였지만,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중 어느날 체사리아 바닷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저스틴이 기독교 안에 있는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분의 영혼에 섬괌이 일어나면서 플라톤 사상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상에는 그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을 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죽음에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화를 받고 여기 진정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이후 로마에서 그리스도 철학을 강의하며 많은 글을 남겼으며 3권의 책과 몇가지 서신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65년경 저스틴과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혔습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오현제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161-180)로서 기독교를 맹렬히 박해한 황제였습니다. 로마 장군 루스티쿠스 앞에 선 저스틴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라는 것을 거절하는 동시에 제기된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는 제자들과 함께 참수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 이분의 이름 앞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붙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2020/9/8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큰 분이세요.” 알렉스가 어린애다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때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19세기 초에 파푸아 뉴기니아 섬에서 순교당한 이탈리아의 선교사 요한 마주코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대양을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작은 배를 타고 석달 걸려 그것을 건넜다. 만약 어떤 분이 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면, 대양은 모래 한 알보다 작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차지하려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단 한분만이 크시고 또한 영원하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하신 뒤 할례의 언약과 이삭의 출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늙은 것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셔서 지금과 같은 수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상에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과 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억압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경건하지 못한 나라, 내 진노의 ​​백성”(사10 : 6)이라고 불리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로 주님이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Yes’입니다. 우주는 다시 만들어 질 것입니다 (사65:17).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호 2:23; 사 65:19).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일은 여호와의 종 즉 메시야를 통해 주어진 교훈 때문에 일어날 것으로 이사야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네 번의 종의 노래(이사야 42장-53장)에서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 여호와의 종이 실제 나타나신 바가 된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모든 시험을 다 겪으시면서 참된 교훈을 주신 뒤, 우리의 모든 죄를 끌어 안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예수께서 만유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주신 계명들을  마음에 두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2020/9/7
어거스틴이 성 삼위론에 관해 책을 쓸 생각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바닷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아예 책을 쓰려던 계획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간 그는 울고 있는 한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보세요. 내가 모래 속에 이렇게 큰 구멍을 파놓았는데도 여기에 바다 전부를 담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은 할 수 있겠어요?” 어거스틴은 그 아이의 질문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주신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힘을 얻어 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우리는 매우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우리 역시 바닷가의 그 어린이처럼 저 너머에 있는 것과 거기 계신 분에 대하여 아주 조금밖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자 하면, 그 사람의 이름이나 외적인 모습. 직업 등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성장과정, 교우관계, 관심사 등을 찾아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고 함께 오래 사귀면서 삶을 공유한 후에야 비로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고결한 종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책입니다.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은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체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직접 우리와 함께 살아가신 것입니다. 실상 이 세상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려고 지으신 장소입니다. 우리와 영원한 대화를 나누시기 위해 조성하신 곳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하나님이 주신 은혜 등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가운데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품고 땅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주님 때문에 우리 마음과 몸 속에 그분의 은혜와 훈훈한 사랑이 늘 배어 있게 됩니다. 온도의 차이를 우리 손이 쉽게 분별하듯이, 사람들은 그 차이를 금방 인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사람을 보는 순간 그 원인을 알고자 하며, 그 사람 역시 주님 앞으로 와 만남을 경험하고 또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