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야 할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많은 방법 중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섰을 때 강물의 흐름이 그치고 땅 역시 말려서 백성들이 건너가는 방법을 채택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목격하여 큰 담력을 가질 것이고, 적들은 간담이 서늘해 질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나아갔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 자기들의 장막을 떠났습니다. 곡식을 거두는 시기라 요단 강의 물은 언덕에 넘칠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믿음으로 요단 강에 들어갔고 그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곧 그쳐 매우 멀리, 즉 여리고 북방 약 22킬로미터 떨어진 요단강과 얍복강이 합쳐지는 지역에 있는 아담 성읍 근처에서 일어나 한 곳에 쌓였습니다. 그리고 강 바닥은 바로 말라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여리고 앞으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경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첫걸음을 떼라고 요구하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한계가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이 믿음이고 무엇이 시험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매우 중요한 지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모세는 하나님이 배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을 때, 즉 파라오에게 맞서라고 하셨을 때 뒷걸음질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의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발을 조금만 떼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자 지팡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뱀은 이집트에서 숭배의 대상이었고 독이 있다고 여겨지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는 명령을 듣고 겁이 났을 것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말합니다: “만일 내가 독사를 잡아야만 한다면, 나는 머리 바로 뒤를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꼬리를 잡으면 뱀에게 물릴 확률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첫걸음의 원리를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뱀을 집었고 그것은 다시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뱀을 집어야 했습니다. 즉 모세는 첫걸음을 내딛어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패턴이 거듭 반복됩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을 치료받기 전에 물속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어야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작은 도시락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씨앗은 더 위대하고 풍성한 열매로 부활하기 전에 먼저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경험하고 싶다면 첫걸음의 원리를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듣고 읽어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직접 우리의 발을 적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작년(2018)에 작고하셨던 미디어 사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그리스도인인 밥 버포드씨의 일화입니다. 밥은 엄청난 수익을 올릴 것처럼 보이는 사업기회를 40대 중반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밥이 그 사업제안을 덥썩 받아들이는 여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워싱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과거 자신의 법률고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밥에게 제기된 사업제안을 다루는 팀장이었습니다. 밥은 그에게 그 투자문제를 언급하는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업가적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자한다는 열정 역시 알려 주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혹입니다.” 밥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성경을 펼치고 그 대목을 찾아 묵상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유혹자는 밥에게 말하기를 “시도해라. 이것은 너의 기회이다. 모든 너의 조심성을 던져 버려라. 너는 이런 기회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 거래는 제대로 작동한다면 엄청난 수익이 돌아오지만 몇 가지 비즈니스의 중력의 법칙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밥은 그 사업분야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밥의 속 사람의 목소리는 “인생은 진실로 그렇게 쉽지 않다. 네가 아는 것들에 붙어 있으라! 네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가지고 사업하거라.” 밥은 곧 중심가치를 붙뜰고 워싱턴으로 되돌아 갔을 때, 전화를 걸어 자신 없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첫걸음의 원리는 이런 한계를 제대로 평가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마르틴 루터에게 한 가엾은 작은 여인이 와서 말했습니다. “오, 박사님, 저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이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루터는 묻기를 “부인, 당신은 사도신경을 믿습니까?” 그녀는 손을 맞잡고 대답했습니다. “예, 믿습니다. 그것은 가장 분명한 진실입니다.!” 그 말에 루터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안히 가십시오. 당신은 나보다 믿음이 좋습니다.” 그리고는 루터가 쓰기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는 더 잘 믿어야 해. 너는 더 많이 믿어야 해. 너의 믿음은 강하지 않고 부족해”라는 생각을 집어 넣는 것은 마귀다. 마귀는 이렇게 하여 사람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다” 하였습니다. 의심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믿음을 갖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더 열심히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더 가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저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 알수록, 여러분은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성장에 필요한 모험심, 인내, 지혜, 신뢰, 사랑 등 모든 요소들이 다 담겨 있는 A급 종합비타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우리에게는 ‘영적 안전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가장 편안하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안전 지대를 넘어서라고 부르시면 불안하고 불편해집니다. 우리는 교회 친구들과 편안하게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믿지 않는 직장 동료에게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불편해 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편안하지만 하나님이 내 직업을 재조정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불안해집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쉽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에 관해서는 훌륭하게 토론할 수 있지만,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친구에게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이런 우리의 영적 안전 지대를 넓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직접 나서는 것입니다. 매일 조금씩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어디서 발을 물에 적셔야 하는지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요. 두려워서 피해 다녔던 사람에게 전화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의 신앙을 표현하며,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우정을 보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배우자, 부모, 친구에게 진실을 말하고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모험을 감수하십시요. 그 모든 걸음이 여러분이 원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게 되고 실패하였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믿음이 성장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3,24).

매일말씀나눔

현대 사회는 이제 소명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직업이라는 측면을 더 많이 부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직업에 인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어떤 대학 교수는 직업이야말로 사람들이 경배하고 시간을 바치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족, 공동체, 신앙에 헌신하기보다는 직업을 통해 의미, 인간관계, 자존감을 얻길 기대합니다. 직업과 소명을 분명히 나누기는 어렵지만 이를 구분해 본다면, 직업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소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직업은 지위, 돈, 힘을 약속하지만 소명은 일반적으로 역경과 심지어 고난, 하나님께 사용될 기회를 약속합니다. 직업은 상향 이동성을 갖지만 소명은 일반적으로 하향 이동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는 일도 발전과 성취를 지향한다면 직업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면 사업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긱기 위해 한다면 그 사업이 소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직업은 은퇴와 많은 ‘물건’을 남기고 끝날 수 있지만 소명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게 됩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를 담임하였던 목사님의 결정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귀감을 줍니다. 그분은 부임시 수백명에 불과하였던 교회를 이 천명의 교회로 성장시켰으나 목회 노선에서 당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입 다물고 조금 더 목회를 하고 은퇴하면 많은 물질적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으나, 주님께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니, 만약 물질적 보상을 받으면 자신이 그 동안 주님을 섬긴 일이 돈을 위해 한 것처럼 오인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목사님은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성장하고 있는 그 교회를 그냥 떠났습니다. 이렇게 소명을 따르는 길은 주님의 칭찬만을 바라고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성경에는 노예, 포로, 유배되고 투옥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들의 경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모두 비범한 방법으로 소명을 성취하였습니다. 파라오는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모세는 소명을 가졌습니다. 보디발은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요셉은 소명을 가졌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다니엘은 소명을 가졌습니다. 아합은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엘리야는 소명을 가졌습니다. 빌라도는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소명을 가지셨습니다. 경력과 직업에 대한 보상은 매우 가시적이면서 한시적이지만 소명의 중요성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경력의 끝이 소명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사용되지 못하는 스페어 부품이 아니며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조립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조립은 주님께서 소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이끄시어 일생을 통해 만들어가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크신지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묘사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반석, 요새, 강한 성, 용사이시며, 구름을 병거로 삼고 바람의 날개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언젠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넘어가실 때 큰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며칠 전 태풍 링링이 우리 나라를 강타하였을 때 그 위력을 실감하셨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몰아 닥치는 광풍 역시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엄청난 물결을 수반하여 조그만 배에 탄 예수님의 일행들은 공포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두려워 하던 제자들이 와서 깨우자 비로서 일어나신 주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고 그저 뱃전으로 가셔서 바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멈춘 것은 물론 뛰놀던 물결조차 즉시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기사만 가지고는 용감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에 부족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확신시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인간의 마음과 인격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려면 특정한 행동과 경험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특정한 행동과 경험은 우리쪽에서는 위험이 따르며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꾸짖으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이러 저러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능히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1:9)

금요일터예배

성경에서 순종하기 가장 어려운 명령 중 하나는 자신을 “정직하게 판단(sober judgment)하라”는 말입니다. 나의 열정, 은사, 한계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인생의 큰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려면 엄청난 자기 인식과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의 이해를 도와줄 다른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명료화 위원회’를 구성한다면 어떤 친구가 좋을까 생각하니 밥 버포드가 떠올랐습니다. 밥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방송계의 재벌이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그의 훌륭한 배에서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책 《하프타임》의 표현을 빌리면, “성공에서 의미로” 움직이길 원하게 된 것입니다. 밥과 아내 린다는 한 조언자와 오랫동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조언자는 밥의 목적 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 후, 약간 미심쩍은 다음 단계를 제시했습니다. “당신의 회사를 팔아 지금까지 우리가 의논한 사역 프로젝트에 투자하십시오.” 밥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그 결정의 의미에 깜짝 놀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린다도 나만큼 놀란 것 같았다. 전형적인 목사, 선교사, 수도사의 모습을 생각하는 아내의 머리 속이 내게도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머니가 텅 빌 때까지 돈을 나누어 주는 박애주의 부부가 될 수 있을까? 목사와 사모의 옷차림을 해야만 하는 걸까?” 밥은 어떻게 그의 ‘명료화 위원회’(물론 그의 책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를 소집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과 논의 끝에 밥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전략적 사고와 조직 리더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회사를 파는 대신 이 분야에서 섬기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퀘이커 교도의 전통인 ‘명료화 위원회’가 모이는 목적은 조언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그룹은 그저 질문하고, 사려 깊게 듣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소명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밥 버포드는 그의 책 《하프타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소집한 ‘명료화 위원회’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전에 오랫동안 조언을 받은 사람의 생각대로 회사를 팔았다면 엄청난 유익을 낳을 발판을 잃게된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밥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리더쉽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1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까지 주요 교회들의 리더십 개발을 돕는 사역을 매우 즐겁게 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성급하게 행동해서 첫 번째 조언자의 말을 따라 사업을 매각하고 돈을 나누어 주기만 했다면, 그가 수행하였던 성과와 성취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가 밥에게 한 조언 역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에서 의미를 찾는 제 2의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45세까지는 두 번째 혹은 이에 상응하는 섬길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55세까지는 그 일에 왕성하게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퇴 후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발휘할 큰 장점은 이미 상실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은퇴 후로 미루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찾고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좋은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2-13).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아서 밀러라는 분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그 일을 받아들이거나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죄악이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디자인이나 목적에 맞지 않는 노동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것은 – 아무리 월급이 많더라도 –  당신이 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아니다.” 소명을 분별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뚝딱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결단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밥 버포드는 “저비용 조사”를 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소명을 테스트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것 같은 분야에서 당신의 성과가 어떠한지 연구해 보십시요. 밥의 경우 저비용 조사의 시작은 CEO위치를 유지하면서 대형 교회 목회자들을 모아 조직에 관한 자신의 전문 지식이 도움이 될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의 인생 후반부의 우선적 소명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게다가 조사 비용도 매우 낮았기 때문에, 조사 결과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쉽게 다른 분야로 조사 방향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충동적으로 일을 그만두고 어느 교회나 비영리 기구의 임직원으로 일했다면, 소명도 찾지 못하고 계속 탐구할 기회마저 잃었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예언 사역을 하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목자의 위치를 유지하였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교회 개척을 하면서도 장막 만드는 생업을 유지하였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때로 사람들은 천직의 개념을 매우 로맨틱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꿈에 그리던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지상의 최강자인 파라오에게 가거라. 그런 후에 노예된 나의 백성을 아무댓가도 받지 말고 놓아주라고 말하라.소심하고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험한 광야로 가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고 말하고 이끌고 나와라. 그것이 너의 소명이다.” 모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론을 보내소서.”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폭력적인 도시 니느웨로 가거라. 네가 누군지 모르고 나를 인정하지 않을 그 거만한 자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거라.” 요나는 말했습니다. “반대편으로 가는 다음 고래가 언제 떠나죠?”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불러 귀를 기울이지 않을 백성에게 설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힘들어서 예레미야는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그런 별명을 원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그 일에 매우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를 이끌라고 기드온을 부루셨을 때, 왕을 거역하라고 에스더를 부르셨을 때,메시아를 낳으라고 마리아를 부르셨을 때, 그들의 첫 반응은 “예, 하겠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다”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헨리 블랙커비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임무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임무를 수행하게 하심으로 당신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원재료”를 상관하지 않고 우리를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실 때 은사도 같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연적 재능만으로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려면, 나 자신의 자원을 능가하는 아이디어, 힘,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한 성경 속 인물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아도 많은 시간을 기울이고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겠습니까? 또한 그 소명은 여러분이 항상 바랐던 부와 명예, 안정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때로는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일에 헌신해도 결과는 좋지 않으며, 사람들이 여러분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소리치고, 여러분이 하려는 일을 막을 것입니다. 그래도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소명을 분별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시행 착오와 잘못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사무엘과 같은 특별한 소명이 오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평범한 일상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영위해 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명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할 것입니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인데 이것도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22:37-40 쉬운성경)

매일말씀나눔

소명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천직(vocation)’ 이라는 단어는 ‘음성(voice)’이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려면 매우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소명을 선택’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순입니다. 소명이란 개념은 성경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거듭 사람들을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소명에는 부르는 사람과 부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는 쪽이고 하나님은 부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꾼들을 무장시키고 일을 위임하십니다. 마이클 노박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격, 재능, 갈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만물의 창조주는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철저히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것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 설령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운이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가장 높은 소명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직업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이런 가운데서 소명은 어떻게 발견되어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18:22).

예술을 하려면 재료의 속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정을 대기 전에 대리석의 성질을 연구합니다. 그들은 대리석을 쪼아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잠재성과 한계를 가진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이란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이 세상의 깊은 필요와 만나는 곳”입니다. 세상의 깊은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것은 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갈망과 열정을 품고 있습니까? 그것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육상 선수들은 3,000미터 5,000미터를 뛰는 것은 물론 42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뛰는 경주를 좋아하고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상으로 받는 트로피와 메달도 중요하지만 이들은 경기 자체를 좋아하여 경쟁하는 것입니다. 회의적인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 들어가, 그들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 주려는 선생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조직을 바라보며,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 내고 싶어 안달하는 리더가 그런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좋아하는 정원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소명을 따르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힘든 일을 당할 때에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술과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자체가 그것을 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Let your life speak).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19:5-6).

파커 팔머의 얇은 책 《네 삶이 말하도록 하라 Let your life speaks》에는 천직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파커는 교육계에서 이름이 높아져 한 교육 기관의 총장 제의를 받았습니다. 수락하기만 하면 월급, 지위, 영향력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소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 사람의 친구 여섯 명으로 구성된 ‘명료화 위원회’를 소집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위원회는 하나님의 소명을 더 분명히 분별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동안 위원회는 그 학교에 품고 있는 파커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 학교가 사회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등의 쉬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매우 간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총장이 되는 것이 왜 좋은가?” 파커는 한참 동안 대답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나는 경영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기금을 모금하는 것도 싫고….”파커, 내 질문은 자네가 무엇을 좋아하냐는 거야” 질문자는 문제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생각하고 있다구.” 파커는 약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싫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러자 세번 째 같은 질문이 날라왔습니다. 파커는 자신의 중심에서 나오는 정직한 단 하나의 답변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총장이라고 쓰인 명패가 밑에 달린 내 사진이 벽에 걸린다는 거야”라는 파커의 답변에 함께 앉아 있는 친구들은 그 말은 우습지만 매우 위험한 문제라는 것을 알자 심각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그 질문자가 침묵을 깨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자네 사진을 벽에 거는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지 않겠나?” 파커의 정신이 깨어났고 그를 각성시켰습니다. 그것은 “나는 내 자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나의 삶이 말하고 있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파커 팔머는 “당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의 삶이 말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소명은 선택이 아니라 경청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초창기부터 우리는 어떤 활동이나 존재, 행동 방식에 이끌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내가 되려면 신중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학습하고 그것으로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는지 모릅니다. 독서와 묵상과 저술과 가르침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목표는 사업에서 크게 성공하는 거야!”라고 스스로 강변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인생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팀을 이끌며 고지를 점령하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뒤에 머물러 있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신이 받은 은사를 묻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자신의 원재료를 존중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소명도 아닌, 내 은사도 아닌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대항해 귀를 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으면 막대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으면 그 한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가장 큰 한계는 주님이며 그분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5-7).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저명한 작가이기도 한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는 직선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거나, 공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내 한계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견디기 힘든 한계들도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죽을 것만큼 힘든 것이 있다. 그런 한계들에 직면하면, 가끔은 내 소명이 정말 참된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심오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진리와 지식을 탐구하는 그들은 깊은 학습 경험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일정 수준의 학습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런 정신은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그런 대화 자리에 끼지도 못할 것이다. 또 나는 엄청난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을 개발시키고 일을 성취해 내는 리더들을 본다. 나도 정말 그런 은사를 원했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면 고통스럽기만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교회에 대해 품었던 꿈을 생각해 보면, 나는 교회 개척을 열심히 도왔지만 그 교회는 내가 바라고 기도했던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나의 한계에 책임이 있었다.” 파커 팔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내가 한계에 부딪히자 특히 실패라는 한계에 맞닥뜨리기 시작하자 문제는 시작되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들을 여러 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우리 자신을 현실에 직시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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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면서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위해 예수님의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예수님의 주권하에 있었기에, 베드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배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해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충동적인 행동 그 이상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 재정, 언행에서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서는, 그것을 영적인 언어로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랭크 파알리는 30년 간 T타입, 즉 ‘스릴 추구 성격(Thrill-seeking personality)’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위험도가 높은 상황과 행동에 매력을 느끼며,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 새로움, 다양성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쉽게 지루해 하며 끊임없는 자극을 열망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소위 ‘위험 감수 유전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유전자는 D4DR이라고 불리웁니다. 흥분을 잘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내성적이고 느긋한 사람들보다 이 유전자가 더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극한 스포츠인 암벽 등반, 페러글라이딩, 행글라이더 등을 즐깁니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큰일을 할 수도 있지만, 물질 남용, 잘못된 성적 행동, 도박 등의 파괴적 행동을 할 잠재성 역시 큽니다. 이 경우 우리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무모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타입에 속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가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숙고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와 “어리석지 말지니라”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어렵습니다. 언제 배 밖으로 나가서 모험을 해야 하는지 알려면 용기뿐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지혜, 주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분별력, 명령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충동에 휘둘리는 T타입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W 타입 즉 물(Water) 위를 걷는 성격을 찾으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과의 모험을 갈망하는 ‘하나님 유전자’가 필요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 제기됩니다. 배 밖으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과 나 자신의 무모한 충동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W 타입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명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서 분별되었고 실현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하나님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실까? 성경은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리랜드 라이켄은 이런 면에서 기독교가 매우 독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신은 일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번개를 던지는 일 외에, 제우스와 그 일동은 언제나 놀고 쉬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에게서 나누시고, 하늘과 천체를 만드시고, 물을 모으시고, 흙에서 인간을 만드시는 등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러고도 여섯 날 후, 하나님은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주가 기계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하나님이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편104편).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과 활발히 동역하십니다. 예수님 역시 일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목수로 일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조하고, 인도하고, 공부하고, 조직하고, 고치고, 개발하고, 가르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아서 밀러는 이것이 주7일 신앙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받은 재능을 사용하여 세상을 탁월하게 섬기고,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을 온전히 활용하는 소명은 거룩한 과업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소명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으나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부른 줄 알고 일어나 두 번이나 엘리에게 간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렉 르보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종종 이름을 두 번씩 부르신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야곱아 야곱아, 모세야 모세야”처럼 말입니다. 한 번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언급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조립이 필요함”이라고 쓰여진 물건을 사 주는 것을 두려워 했다. 나는 조립에 소질이 없다. 수많은 부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땅바닥에 널려 있기 일쑤다. 그 부품들은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확실한 목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특정한 은사, 갈망, 재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선물들을 잘 파악하고, 기술적으로 개발하고, 기쁨으로 겸손함으로 사용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근원적이고 높은 소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표현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도 있고,우리 후에 올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바로 지금 나타나려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자리를 맡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대 신비주의의 일파인 하싯즘의 옛 이야기를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두 개의 주머니가 있는 코트를 입어야 하였습니다. 한 호주머니에는 “너는 우주의 수억, 수백만 모래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쓰여 있고, 다른 호주머니에는 “내가 이 우주를 너를 위해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경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염려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나의 구원과 가치는 나의 직책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일은 우리가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 부을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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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아울러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요소는 편안함입니다. 버클리 대학의 연구진은 아메바를 완벽한 환경 속에 집어넣고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상적인 온도, 최적의 습도, 지속적인 식량 공급, 어떤 것에도 굳이 적응할 필요가 없는 최상의 환경이었고, 질병을 초래할 요소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아메바는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심지어 아메바까지도 도전을 필요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함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음식과 공기만큼, 변화와 적응과 도전도 필요합니다. 편안하기만 하고 아무런 도전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의의도 찾을 수 없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편안함은 우리가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편안함은 자주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학생을 성장시키려는 선생님은 답이 아닌 문제를 제시해 줍니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만,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강화되고 인내심이 강해지며 자신감이 견고해집니다.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 주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지는 몰라도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노력하고 도전해야만 강해지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개봉하지 않은 선물의 비극을 무마할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3-25).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세 번째 원칙은 “그분은 상 주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선물을 주고 회계를 결산하기도 하지만 상도 주십니다. 그분의 보물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칭찬을 하나님께 받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주인은 종들을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초청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주인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하여 오히려 더 큰 일을 맡긴 것을 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즉 주인의 의도는 “이제 네가 진짜 일을 맡을 때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엄청난 부를 주었으면서도“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작은 일에 불과하다니! 그렇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록펠러나 빌 게이츠의 재산이나 진시황의 권력이나 마이클 조던의 명성 등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주님 보시기에 ‘작은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실버 타운 같은 곳은 절대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가 지음받은 목적인 모험, 창조성, 풍성한 열매를 드디어 온전하게 경험하며 우리의 잠재성이 실현되는 궁극적인 곳입니다. 그곳에 개봉되지 않은 선물이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여러분은 풍성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정, 인간관계, 능력으로 은사의 주님께 막대한 것을 되돌려 드릴 수도 있는데,혹시 그것들을 그냥 깔고 있지는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나의 가장 깊은 꿈은 무엇인가? (2) 나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열정을 느끼는가? (3)나의 묘비에 무엇이라고 기록되기를 원하는가? (4)요즘 나는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5)나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한 모험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6)어떤 일을 하도록 내가 태어났다면, 그 ‘일’은 무엇이라고 믿는가? (7)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은사의 주님께 받아 그분의 왕국에 투자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시간이나 재능 분야에서 아직 여러분의 잠재력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은퇴하고 죽는 삶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매순간을 소중하게 취하여 “하나님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온전히 연마하고 개발하고 인내하고 부단히 힘써서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게임에 뛰어들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은사와 관련하여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특별한 재주도 없고, 뛰어난 지혜나 기술, 그리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니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여러분은 훌륭한 은사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각각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분여하였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오병이어를 취하여 많은 무리를 먹이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말더듬이 도망자인 모세를 사용하셔서 세계 권력을 쥔 독재자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전부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피 묻은 십자가에서 빈 무덤을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엉성하고 실수가 많은 열한 명의 제자로, 쇠할 줄 모르는 꿈을 가진 공동체를 창조하셔서 전 세계로 퍼뜨리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지략이 풍부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 주인 되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러분이 바치는 보잘 것이 없는 것을 취하여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잠재력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투자하면 은사의 주님이 돌아오실 때 그 진가가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물 위를 걸으려면 모험을 감수할 용기뿐 아니라 소명을 분별할 지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어리석음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문지기 베드로는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가 생각납니다. 폭주족들이 아가씨를 위협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지요. 저는 즉시 아가씨를 놓아주라고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가장 덩치가 크고 문신을 많이 새긴 놈에게 가서 그의 뒤통수를 갈기고 오토바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그의 코걸이를 낚아채어 땅바닥에 던지고는 ‘지금 당장 이 아가씨를 놔 주지 않으려면 나랑 붙자!”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언제 그랬습니까?” “바로 몇 분 전이죠.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이 사람은 즉시 맞자 죽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배밖으로 즉시 뛰어나가지 않고 먼저 주님의 허락을 구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어리석은 충동이 아닙니다. 이런 어리석은 충동을 요구한 장본인은 바로 사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이 나타나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다”라는 되지도 않는 성경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충동하였습니다. 믿음과 어리석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예전에 삼각산 부흥회에 참석하러 가다가 급류를 만난 세 처녀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실을 생각해 내고 기도한 뒤 믿음으로 급류 위에 발을 내딛다가 모두 물에 휩싸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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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위험을 무릎쓰고 배 밖으로 나와 걸으려고 하였을 때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약속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일 브루너 박사의 관찰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구했습니다. 베드로는 보장이 아닌 기회를 요청한 것입니다. 배 안에 머문 제자들은 선물로 받은 훌륭한 식기 그릇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벽장 속에 넣어둔 오토버그의 할머니처럼 배 안에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여 깨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성장보다 안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지나가기를” 즉 모험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셨기에 그들을 피해 빙 돌아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인 믿음의 모험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폭풍이 치는 밤에 갈릴리 바다에서 배 밖으로 나간다는 것의 위험과 고통을 이들은 잘 알았지만, 배 안에 머물었을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현재의 성장과 번영에 만족하여 거기에만 머물고, 새로운 혁신을 등한히 하여 파산한 기업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코닥이라는 회사입니다. 코닥은 전 세계 필름 산업을 장악한 엄청나게 수익성 좋은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아날로그 시대에 맞는 필름 산업에 만족하고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디지털 카메라는 코닥에서 제일 먼저 발명하였으나, 코닥의 임직원들은 그것이 자신의 필름 산업을 대체할 것을 두려워 하여 사장시키고 개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려워 하고, 혁신하기를 거절할 경우 결국은 개인이나 기업을 실패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험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우리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18:22).

배 붙박이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간단히 말한다면 ‘성장 불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도록 지음받았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원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며 성장의 기적을 기뻐합니다. 아기를 키우는 사람은 성장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점점 아기의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에 흐뭇해 하고, 처음 “엄마”라고 말할 때 감격하게 됩니다. 성장의 기적을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체보다 슬픈 것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시작한 결혼 생활이 권태기로 접어들면서 애정은 식고 친밀감은 희미해진 부부를 보십시오. 문제를 짚어 내고, 고통에 직면하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그저 지루한 삶에 안주하여 익숙한 남남으로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정체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과 채워지지 않은 갈망, 이렇게 살면서 “나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야”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국 지루함, 즉 일면 영혼의 냉담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배에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 명의 종을 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토버그 할머니처럼, 베드로처럼, 우리들처럼, 세 종은 후한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에 대한)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이 원칙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이 원칙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지난 달 연합뉴스를 보면 강도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던 A씨는 20대 중반이었던 2006년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습니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먼저 이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벌금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진 후에 나머지 돈을 1년도 안되어 도박과 유흥에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그후에도 계속 로또를 샀지만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돈이 곤궁한 그는 절도범으로 전락했고 13년 동안 계속 감옥을 들락거리며 다니다가 올해 또 영세 업주를 갈취한 죄명으로 구속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로또 당첨은 결코 생의 전환점으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 중 첫번 째는 “그분은 은사의 주인이시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은 자기 소유 중 첫째 종에게는 5 달란트, 둘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셋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15년치 월급과 맞먹는 돈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돈은 엄첨난 부를 의미했습니다. 이 주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갑부였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재력가는 세 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종을 부렸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세 사람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종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생일대의 기회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세 종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오토버그 목사님은 기회에 관하여 좋은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학원에 다닐 때 사모님 낸시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당시 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기 때문에 돈이 없었습니다. 신혼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해 떠오른 아이디어는 TV퀴즈 쇼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식은 커다란 빙고 판마다 무작위로 선택된 분야의 질문이 있고, 참가자가 답을 말하면 X나 O로 표시되었습니다. 물론 항목은 매번 바뀌었습니다. 첫 게임은 무승부로 끝났고 이어지는 서너 게임도 무승부였기 때문에 돈이 불어나서 수천 달러가 상금으로 걸렸습니다. 상대는 변호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그 퀴즈에서 아주 많은 승리를 거두어 보너스로 자동차까지 걸려 있는 행운의 사나이였으나, 오토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가난한 교회 목사인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 변호사가 한 가지 질문을 틀렸습니다.이제 목사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이긴다면 만져본 적도 없는 큰돈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에게 주어진 분야는 ‘혼합 주류’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칸을 선택하여 다음 질문에서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이기고 싶어서 그냥 그 칸을 택했습니다. 그러자 “두 잔의 스카치와 스위트 베르무스 반 잔 등으로 만든 술은 무엇입니까?” 술을 모르는 목사로서 알 수 있는 답이 아닙니다.오토버그 목사님은 진행자에게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오답도 정답도 말하기 곤란하군요.” 라고 대답을 하였고, 결과는 뻔했습니다. 결국 목사님 부부는 근처로 신혼여행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토버그 목사님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났지만 그만 놓쳐 버린 기억을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사 뿐만 아니라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하고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인이 종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종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들의 운명을 단 한 번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세 종을 불러 놓고 어마어마한 은사를 준 것입니다. 첫 번째 종은 그의 행운을 깨닫고 ‘즉시’ 기회를 움켜잡았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절대 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움켜잡는 사람이 이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그분의 소유를 당신과 내게 맡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주인이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은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선택하십니다. 달란트라는 말 대신 우리의 인생을 넣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능력, 우리의 영적 은사들, 우리의 몸, 우리의 돈, 우리의 의지.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기회는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종은 그렇게 한 데 반하여, 세 번째 종은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받지 못할 최고의 선물을 받아서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친 것일까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25: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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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뒤 갈릴리 바다 위로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여간 곤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폭풍은 예수님이 새벽 3시경 격랑을 치는 물결을 밟고 오셔서 배에 오른 뒤에야 비로서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기 전에 바람을 잔잔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림을 배워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으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폭풍을 사라지게 하실 때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믿음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노출시키며 맡기는 것입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매우 설교와 강의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명이었고 기쁨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던 35년 전 어느 주일 아침에 설교를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설교 도중 기절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후 1년이 지나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했을 때 10분이 지나 또 다시 기절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풀라고 조언을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는 것이 두려워졌기에, 그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이사야40:30-31을 기억하고 그 주일에 다시 설교를 하였고 끝까지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후 목사님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약간 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기절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이따금 섬광처럼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그런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이런 태도는 적어도 목사님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연습이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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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위기 관리를 연구한 철학자 래리 로던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들은 위기 정체 상태에 빠져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위기 관리에 대한 그의 글을 열아홉 가지 원칙으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 원칙은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안전은 없습니다. 집에만 머무르면서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면 안전할 것 같습니까? 미국에서만 해도 50만명이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실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년 전에 연세드신 제 이모께서 밤에 침대에서 떨어지신 적이 있습니다. 이모부께서 오래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살고 계셨기 때문에 간신히 외지에 살고 있던 아들와 연락이 닿아 응급실에 가보니 다리의 뼈가 세 동강이 나셨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랫 동안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도 그 휴유증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다. 또 열심히 창문을 가리다가, 실수로 자기 집 창문의 블라인드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습니다(미국에서만 매년 10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타석에 선다면 삼진 아웃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타자도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타석에 서지 않는다면 홈런을 치는 영광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배 밖으로 나오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배 안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밖이 두렵다고 계속 배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배가 무엇이든지 당신은 죽을만큼 지루함과 지겨움을 맛볼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냄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막상 목표로 하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시니 그만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 역시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칭찬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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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건넸습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태는 왜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했으며, 베드로는 왜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 후에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배에서 곧장 뛰어내려 약 90미터를 헤엄쳐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순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오는 진정한 소명과 자신의 어리석은 충동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혜와 분별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자체에 찬사를 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번지 점프를 하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재미로 물 위를 걷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극한적 스포츠가 아닌, 극한적 제자 훈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이 그것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시는지 확인했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분명한 응답을 요청한 것입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우리는 바른 믿음과 맹목적인 신앙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른 믿음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분별한 뒤, 비록 두려움과 위험이 놓여져 있지만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 가운데 순종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전형적인 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대로 고향 하란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고 순종하여 떠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노련한 뱃사람들이었습니다. 폭풍이 얼마나 거셌으면 경험많은 이들이 배의 전복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을까요?  집채만한 파도, 거센 바람, 칠흑 같은 어둠…. 물결이 잔잔하고 태양이 밝게 빛나며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도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파도와 바람이 휘몰아치는 새벽 3시라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잠시 베드로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지나가고 계십니다. 일생일대의 모험으로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하지만 너무나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물입니까 배입니까? 배는 안전하고 여러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안락합니다. 반면 물은 무섭습니다. 배 밖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으며, 파도는 높고 바람은 거셉니다. 만일 배 밖으로 나간다면 물에 빠져 죽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100여년 전에 아펜젤라 선교사 역시 수영선수 출신이었지만 파도치는 목포 앞바다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한국 여학생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학생만 구하고 자신은 물에 빠져 순직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제자 이승만은 감옥에서 땅을 치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자연의 법칙입니다.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믿음의 삶이며, 믿음의 삶은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면 반드시 배 밖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안전과 안락을 약속하는 모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배는 우리가 유혹받을 때, 인생에 폭풍이 일 때 의지하고 싶은 모든 것입니다. 타고 있으면 너무 편해서, 물 위에 계신 예수님께 가지 못한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배는 극한적인 제자 훈련의 모험으로 가려는 우리를 붙잡는 모든 것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의 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두려움을 느낄 때 그 두려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가장 버리기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철수에게 그것은 직업입니다. 35년 동안 건축 일을 했던 그는 지금 50대 후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사역자로 부르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헌금과 봉사로 내면의 부름을 잠재우려 했지만 소명을 놓쳐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린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영희에게 배는 관계입니다. 그녀가 몇 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는 별로 좋은 연인이 아닙니다. 그는 절대로 먼저 애정 표현을 하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하기 꺼려하며 가능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두렵습니다.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녀의 배는 매우 불안정하지만 그녀는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현철의 배는 은밀한 사생활입니다. 그는 포르노 중독자이지만 그다지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출장 가서 성인 영화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고 가끔은 인터넷을 즐깁니다. 아직은 누구도 자신이 그러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인정하기 두렵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를 죽이고 있는 은밀한 사생활이 바로 그의 배입니다.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여러분의 배는 성공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젊은 부자 관원이 그랬습니다. 부자 관원이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여야만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먼저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부자 관원은 그런 정도는 어릴 때부터 항상 지켜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이라는 배 밖으로 나오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배는 너무나 좋고 사치스러운 요트였습니다. 그는 그 배를 잘 조종할 수 있었고 좋아했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삶에서 무엇이 여러분의 발목을 붙들고, 온전하게 하나님만 신뢰하고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까? 두려움은 여러분의 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 배를 떠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여러 가지 즐거운 유희가 기다리기도 하고, 수익성 있는 돈벌이가 생기기도 하며, 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학원의 강의가 개설될 수도 있으며, 좋은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기도 하며, 여행을 가는데 걸리적 거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미 주님이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청년은 올해 노무사 2차 시험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학원 강의가 주일에 개설되었지만 교회에서 청년부의 리더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도록 선택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올해 주님의 도움을 받아 합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경험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전에 미리 테스트를 하시는 경우가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5).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뱃전으로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뱃전을 꼭 붙잡고 한 발을 조심스럽게 물 위로 내밀었습니다. 그 다음 다른 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앙심을 발휘하여 뱃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그러자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물 위를 걸었습니다! 한동안 오직 베드로와 예수님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환희의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현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폭풍은 아까부터 불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달라진 것은 주님에게서 바람으로 옮겨간 베드로의 눈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으로 가득 차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해 보려고 할 때, 처음에는 믿음으로 충만하나, 곧 현실이 닥쳐옵니다. 실패, 역경, 예기치 못한 장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은 사나운 폭풍이 부는 곳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건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바람이 무서워 배 안에 있다고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진실과 믿음의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