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4
위에 있는 사진은 홀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세상의 빛” 혹은 “문을 두드리는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서 찬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색채가 훌륭하다고 말하고, 한 사람은 예수님 얼굴 표정에 대해 말하고, 또 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은 안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에 문 바깥쪽에 손잡이가 없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예수님의 발이 문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분은 사람들에게 거절 당한 경험이 너무 많아서 지금도 떠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헌트는 “나는 단순히 좋은 주제가 아니라, 비록 내가 합당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렸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특이할 것은 그림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문은 오직 안에서만 열려질 수 있습니다. 헌트는 자신이 이렇게 그린 것은 “완벽하게 닫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50년 뒤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밖에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어린이는 그림을 그린 화가 보다도 더욱 중요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빠, 그래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으로 들어 오시게 했나요?” 그것은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그림의 주제입니다. 그 외의 다른 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믿음의 문을 열었는지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것은 지혜, 용기, 정의, 온유와 같은 아름다운 덕들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들 위에 복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정립하여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립된 지식 위에는 절제를 공급하여 그 지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채워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할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더욱 힘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선택해 주셨다는 데 대한 확실한 경험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벧후1:10-11, 현대인의 성경).


2020/9/3
어떤 과학자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지요?” 주님의 존재 이외에 우주에 절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상대성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입니다. 만약 우주에 이 이론과 배치되는 현상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당장 상대성 이론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가지고 노벨상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주장에 대해 건설적인 의심을 품어 보아야 합니다. 한 추기경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만일 모든 과학자들이 성경에 있는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추기경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잠깐 동안 기다리겠습니다.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던 것을 그리 오래 주장하지 않더군요.” 타당한 대답입니다. 카톨릭 사제로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는 벨기에의 천문학자인 조르주 르메트르(1894~1966)입니다. 이분은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하여 우주가 팽창한다는 논문을 쓰고, 이른바 우주상수로 고민하던 아인슈타인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 우주상수를 집어넣은 것은 잘한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또 어느 순간 작은 점에서 발생한 대폭발로부터 우주가 시작됐다는 가설을 발표하자 당시 천문학자였던 프레드 호일은 “그러면 빅뱅이라도 있었던 것이냐”고 비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후 빅뱅이론이 힘을 얻자, “빅뱅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의미한다”라고 교황이 공식적으로 선포하려 하자, 조르주 사제는 “성경은 물리학을 모르고, 물리학은 성경을 모릅니다.”라고 설득하여 말렸습니다. 이렇게 과학과 성경을 서로 연결시켜 성경의 진위를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혹은 성경을 근거로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과학은 존재목적이나 진리를 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나 문학작품 그리고 신문의 보도기사가 엄밀한 과학적 지식을 결여하였다고 비판받지 말아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인류 역사에서 행하신 것을 보도한 책으로 이해하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 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2-3).


2020/9/2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히브리어로 이것을 읽으면 그 첫 단어는 ‘베레슈트’이며, 그 첫 음절 ‘베’의 자음 ‘ㅂ’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음은 ‘ב’‎ (베트라고 읽는다)로 표기합니다. 결국 성경의 시작은 ‘ב‘(베트)라는 자음입니다. 이 문자는 4면이 아니라 앞이 터진 삼면을 가진 상자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때문에 상자의 열린 부분이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왜 이 글자로 시작하는가에 대하여 랍비들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위와 뒤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으리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쪽만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시려고 하는 방향입니다. 이런 설명이 빛을 발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어린 아멜리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으리라는 걸 틀림없이 알고 계셨을 거에요. 왜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죄가 있고, 우리는 그것과 맞서 꾸준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때 쓸데없이 ‘왜’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금방 방울뱀에게 불린 사람이 치료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왜 방울뱀에게 물렸는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설명도 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그대로 경건하게 삶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들에는 ‘왜’라는 질문보다는 현실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즉 “나로서는 이만큼은 알지만,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29:29, 새번역).


2020/9/1
뉴톤은 어느 날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왜 사과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연구에 들어가 자연계에 작용하는 중력(만유인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시절 이후 품은 질문 “우리가 만약 빛의 속도로 달리면 빛은 어떻게 보일까?”라는 문제를 풀다가 상대성 이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문학의 모든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에 대한 답은 성서가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주님은 무려 287개의 질문을 던지시면서 삶의 핵심주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최초의 선언이라고 기록된 것도 사실은 질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유월절에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그때 12살된 어린 예수님은 선생들 가운데 앉아 질문을 주고받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는 부모에게 “왜 당신들이 나를 찾았습니까?”(눅2:49)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 어린아이 같은 점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도 그분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 후에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 사울을 만나서도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행9:4). 범브란트 목사님은 유대인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였고, 그에 대하여 성경에서 발견한 답도 두 가지 질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얼굴, 햇볕처럼 맑고 별떨기처럼 눈부신 이분은 누구인가?”(아가서 6:10)라는 대답입니다. 둘째로, 누가 진정으로 따를 수 있는 믿을 만한 목자인가? 에 대한 질문은,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눅12:42)는 대답을 발견하였습니다. 질문이 ‘누구?’인데, 대답도 ‘누구?’입니다. 질문은 참된 신앙과 신학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2020/8/31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다섯 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오후 목사님이 집에 오니 미하이가 벌을 받아야 할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번에는 좀 다른 방법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미하이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다음날 미하이를 부른 목사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것과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묻기를 “너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예”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너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도 다시 대답하였습니다. “예.” 목사님이 세 번째 미하이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 그는 자기가 전 날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아빠가 자기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세 번째 대답하였습니다. “예,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 아이가 단순히 베드로의 대답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은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어린 미하이는 사려깊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건 묻지 않으셨어요. 그분은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으로 만족하셨어요” 사실 사랑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일화입니다만, 잘 알려진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당수(가라데)를 연마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가는데 소 한 마리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 당수로 치니 그만 소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 주인은 그분의 부친에게 와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저녁에 그 부친은 아들을 불렀습니다. “네가 소를 죽였니?” “네” “왜 죽였니?” “소가 저를 째려보기에 화가나서 당수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소 주인에게 소 값을 물어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그 아들은 부친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여기까지 저를 사랑하시니 제가 이제 올바른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결심을 말씀드리고는 바른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13:4-7,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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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4 – 28

당근과 콩 속에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으니 당근과 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탕과 아이스크림 속엔 비타민을 넣지 않으셨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기 같으면 이런 대답을 하였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이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기 싫어하는 것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어 쓰기를, “우리는 좋은 일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일에서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좋지 않은 일도 환영해야 합니다. 하니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데,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도 그 ‘모든 일’ 속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섭리(攝-다스릴 섭; 理- 다스릴 리)는 “자연계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라는 사전적인 정의가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일컫습니다. 영어는 Providence 라고 번역합니다. 어떤 블로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섭리 (providence)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Deus povidet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이다. 창 22장에 등장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이삭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사건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번 코로나 19의 재발로 우리 모두 걱정과 혼란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의 행태는 많은 부끄러움을 가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발발로 대한민국이 방역 강국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 2차 확산 역시 예상되었던 것이고 저는 훌륭하게 극복하리라고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교회들이 예배를 포함한 제반 모임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이번 코로나 19는 한국 교회의 병폐를 많이 드러냈습니다. 섭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 사태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각종 사건을 만날 때,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분이 무엇을 예비하셨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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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죄를 고백했을 때, 어머니가 아이를 이런 말로 안심시켰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너를 깨끗하게 씻어 주었단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엄마는 저번에 내가 죄를 지었을 때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땐 예수님의 피는 어디 있지요? 그땐 무얼 하고 있어요?” 이 어린 아이는 엄청난 주님의 피가 항상 탱크 속에 준비되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이 퍼 가지고 씻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피는 5리터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짓는 죄만해도 상당한데, 어떻게 전 인류의 죄를 그분의 피로 다 씻으실 수 있을까요? 신약 특히 바울 서신에 나오는 ‘속량(贖良)하다’ 혹은 ‘구속(救贖)하다’ 는 말은 헬라어 ‘엑사고라조(시장에서 값을 치루고 노예를 사다)’ 또는 ‘루트로오마이(값을 치루고 노예를 구출하여 풀어주다)’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단어의 연원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안전히 구원받았을 때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13)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서 ‘구속’은 히브리어 ‘갈’을 번역한 것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마치 노예살이로 고난을 당하는 친족을 구원하여 풀어준 ‘고엘’ 즉 ‘친족 구속자’에 비유된 것입니다. 고대의 헬라어 번역성경은 이를 ‘루트로오마이’라는 헬라어로 표현하였고,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적용하였습니다. 즉, 주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셨고, 왕이자 상속자로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피값을 하나님께 드리고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길의 소유권은 주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경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 천국의 소유자이신 주님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굳게 맹세하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온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새언약(계약)’ 때문에 형벌을 받지 않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이를 피로 씻는다는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하여질 책임이 있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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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룰로라는 전도자가 하이티의 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예수님을 아니?” “그게 미국에서 새로 나온 음료수인가요? 난 코크밖엔 물라요.”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선전하는 사람들보다 코카콜라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더 효과적인 선전을 한 셈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예수’라는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갖지 못한 이로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것은 그들의 일이지만,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가 소개하는 분은 한 번 마신 사람이 다시는 목마름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는 생명의 물을 가진 분이십니다. AD28년 5월 경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남서쪽으로 약 800미터 지점에 이스라엘 조상 야곱이 4,000년 전에 팠다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도 존재하는데 깊이가 30미터나 하고 가장 밑바닥에서는 샘물이 흘러가며 그 중 일부가 우물에 고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행로에 피곤하셔서 이 우물 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저녁 6시 경 마실 물을 긷기 위해 혼자 이 우물로 왔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남편을 5섯명이나 두었으나 전부 사별하거나 헤어졌고, 지금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사랑하거나 돌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독한 이 여인은 우연히, 아니 하나님이 정한 그 때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직접 그 여인을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알고보니 이 여인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자신이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그녀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얻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도 그녀가 지고 있는 세상의 불행과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녀는 매일 우물가로 물을 길러 와야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이분을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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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님이 아침에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드리고 나오니  어린 아들이 묻기를 “아빠 무엇하셨어요?” 하였습니다. “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지” “아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안 이를께. 내가 몰래 보니 하나님은 안 보이고 아빠 혼자 중얼거리고 나왔지?”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아들에게 설명하기를 “너 생각 보았니?” “아니요” “그러나 생각이 있지” “네” “하나님도 생각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어느 정도 이해를 하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어요?”라는 것입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너 만화경의 상(像)은 어떻게 생겼느냐?”라고 물으면서 대화를 시작하라고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화경의 상은 계속 바뀌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의 언어와 생각으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은 사랑, 모든 것을 사르는 불, 사자, 바위, 전사(戰士), 태초부터 계신 이 등 많은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습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분이 아니라 열렬히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일 뿐, 우리가 이러리라고 상상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습과 형체가 없으며, 보여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삶 그리고 행동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이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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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보다도 신앙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힘써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주님과 바른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경건한 삶” 혹은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인간들이 세상에서 경험하여 터득한 지혜를 배우고, 일을 할 때 오는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릎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22:16) 혹은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22:13)는 격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주인이 계십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22:12)라고 선언함으로써, 주님을 성공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눈밖에 나면 주님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부수어버리시곤 합니다(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하여도 현실적이어야만 합니다.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잠22:7). 당연히 부자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빚쟁이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너의 양 떼의 형편을 잘 알아 두며, 너의 가축 떼에게 정성을 기울여라. 재물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며, 왕관도 대대로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잠27:23-24) 라거나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잠12:12)과 같은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잠22:2)는 말을 마음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지혜롭게 돌볼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부와 빈곤의 문제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균형추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제대로 다룰 지혜의 원천은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 어떠한 지혜도, 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잠21:30-31).2020. 7. 27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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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알렉스가 부모와 같이 휴가에서 돌아오자, 그 아이는 “이게 우리집이야”라는 소리를 연발하며 현관문과 자기 베개와 여러 가지 물건에 입을 맞추며 돌아나녔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아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집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어린 알렉스가 행동한 것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고 있는 신자들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순례자이며 이방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사십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탔습니다. 그 배에는 아프리카로 코끼리 사냥을 갔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도 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자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지만, 선교사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처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대통령은 집에 돌아왔지만, 너는 아직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늘에 있는 우리 집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천만천사의 환영을 받는 것은 물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기 위해 알현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린 알렉스와 같이 우리의 진짜 집의 현관과 문턱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히12:22-24,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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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공산치하 루마니아에서 신앙 때문에 무려 15년 간이나 감옥에 갇혀 온갖 고난을 당하신 범브란트 목사님(1909-2001)의 책 “어린이 신학”을 중심으로 현실에서의 영성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어떤 신학보다도 어린아이들의 신학을 틀림없이 더 좋아하셨을 것이며, 실로 그것을 장려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18:3).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어떤 다른 면에서보다 신학 문제에 있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내 손자 알렉스가(여섯 살에 이미 성경을 꽤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이들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아이들(Children of Israel)만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해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뒤에 그냥 남아 있었단 말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이들(Children of God)만이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은 어른이 하나도 없는 나라가 될 거예요.”’ 어린 알렉스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진리에 가까운가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은 정확히 무엇이겠습니까? 성서에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11:6)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혼한 부모를 가진 어떤 어린아이가 이 구절을 읽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왜 우리 어린이들이 자기들을 인도하도록 맡기지 않지? 우리 같으면 절대로 술집이나 도박장이나 핵전쟁 같은 것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텐데. 우리가 인도자라면 때리는 일이나 이혼 같은 것은 없을텐데” 주님이 우리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우리가 어린 시절의 순진함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일 이 문제를 조금 더 논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1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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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여기서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닥치는 각종 역경으로 사도는 35절에서 일곱 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헬라어 ‘휘페르니코멘’으로 그 뜻은 ‘정복자 이상이다 more than conquerors’이며, 현재형으로 사도의 확신과 경험을 집약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쓸 당시 이미 사도는 많은 위협과 전도 여행에 따른 위험 굶주림 파선 등을 당하는 가운데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야말로 넉넉하게 이겨가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의 비밀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는 짧은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두 번째 언급은 매우 중요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 상의 고난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입증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우리를 그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끊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도의 진술은 38, 39절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확신하노니’라는 말씀은 ‘나는 확신했고, 지금도 계속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망의 위기나 생명의 재난, 선하든 악하든 우주의 모든 초인간적인 힘(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시간(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공간(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곧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명시되었고,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사도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확신을 따라 살고 죽을 수 있게 되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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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죽임’과 ‘열망’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비결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 없이는 참된 삶이 없으며, 갈망이라는 훈련 없이도 참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몸의 행실을 죽이는 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 왜냐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기 때문이다”(롬8:13, 사역)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때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8:6, 사역)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을 억제하고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고 이른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한국기독교총연맹회(한기총) 대표회장으로 각종 기행을 낳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전광훈 목사에 대하여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정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 법률적인 쟁점이 있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법원이 전 목사의 자격을 거론한 대목입니다. 서울신문은 “한기총은 규정상 `성직자로서의 영성과 도덕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된 자´로 대표회장 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전 목사는 이 조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대표회장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교회법의 자격 조건을 사회 실정법이 재단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전 목사는 …. 배임수재와 기부금품법 위반, 불법시위 주도 등 10여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똑같이 정치 활동을 하였지만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았던 미국의 마르틴 루터킹 목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삶을 돌려야만 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며, 그 사랑의 길은 생명과 평안을 이루게 하는 길입니다. 당연히 육신의 죄 죽임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이 끊임없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야만 합니다.”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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