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죽임’과 ‘열망’은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비결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 없이는 참된 삶이 없으며, 갈망이라는 훈련 없이도 참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몸의 행실을 죽이는 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 왜냐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기 때문이다”(롬8:13, 사역)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때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8:6, 사역)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을 억제하고 우리의 마음을 영의 일에 둘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고 이른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한국기독교총연맹회(한기총) 대표회장으로 각종 기행을 낳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전광훈 목사에 대하여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 한기총 대표회장 직무정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 법률적인 쟁점이 있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법원이 전 목사의 자격을 거론한 대목입니다. 서울신문은 “한기총은 규정상 `성직자로서의 영성과 도덕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된 자´로 대표회장 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전 목사는 이 조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대표회장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교회법의 자격 조건을 사회 실정법이 재단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전 목사는 …. 배임수재와 기부금품법 위반, 불법시위 주도 등 10여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똑같이 정치 활동을 하였지만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았던 미국의 마르틴 루터킹 목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삶을 돌려야만 할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며, 그 사랑의 길은 생명과 평안을 이루게 하는 길입니다. 당연히 육신의 죄 죽임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이 끊임없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야만 합니다.”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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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와 연결되어 생각하게 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짝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었으나, 오직 열매를 맺는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뿐이었습니다.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좋은 땅이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합니다(눅8:11,15).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결실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삶 가운데 풍성하게 맺는다는 말이며,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님의 9가지 열매가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풍성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냐 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믿는 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는 바로 우리 가운데서 인간이 되어 사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입니다. 그분은 참된 가르침을 주심과 동시에 어떤 누구도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통하여 많은 선한 일을 행하시다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화평을 확보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천하에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만지고 함께 살았던 사도들의 증언을 우리가 신약성경의 형태로 가지고 있고, 그들은 비록 2천년 전에 죽어 마지막 날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께서 지금도 그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눈을 여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그 형상대로 만드시고자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결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물론 선만 행하고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는 자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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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안에서의 삶의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신을 정복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앞서 설명한 로마서 8장 4절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한다고 구속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들이 성령님의 지도를 받고 그분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면 ‘율법의 정당한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5절부터 사도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육신에 속한 일들을 생각하고 있고, 영을 따라 삶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은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8:5, 사역).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잠23:7)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5절에서 갈파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라 행할 때에라야 율법이 성취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육신’ 혹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누신’은 몰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심, 곧 우리의 열망과 우리의 관심을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일은 자기 중심성이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있는 일들입니다. 영의 일들은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 자신이나, 자녀들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중 어디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면, ‘지금 당신의 시간과 돈, 힘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으며, 자신을 어디에 헌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을 쏟고 있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관심이 있는 곳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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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분의 육신 안에서 죄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리시고 죽음이라는 벌을 집행하신 목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뜻인 율법(도덕법)이 실천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칭의(의롭다고 선언하심)는 성화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즉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막중하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결단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를 받아야만 비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화 즉 거룩한 삶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성육신), 그 아들의 육신 안에서 죄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속죄).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성화가 우리 안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죄의 삯을 치루신 것입니다. (2) 거룩이라는 것은 율법의 의, 곧 율법이 우리에게 주장하는 의로운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4절은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율법(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3) 거룩은 성령님의 사역이기에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해야만 육신(자기 중심성)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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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을 끝낸 우리는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로마서 8장에 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사랑받는 장들 중 하나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율법의 위치에 대하여 주목하였다면, 여기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이 역설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대조는 율법의 연약함과 성령님의 능력 사이에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정당한 뜻을 보여주고 명령하나 자기중심성에 물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율법은 우리의 부패성을 자극하게 되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낳게 만들고, 그 결과 사망(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촉진하는 원리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사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여시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시는 것은 물론, 그런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인도하심으로 죄 대신 의를, 사망 대신 생명(영생)을 낳도록 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사과나 딸기가 맛있다고 설명을 해도 그 맛을 깨닫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이, 이런 진리는 설명으로는 안되고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만약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을 부정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참된 제자도는 생각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느냐 아니면 탐심을 따르느냐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사역을 적은 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구원은 확실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장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님의 사역(1-27) (2)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28-39).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살피고 맛보십시오. 그분께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시34:8,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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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7장 14-8:4은 율법은 정당하고 의로우나 타락한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신자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도덕법)을 준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처하나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사도는 7장 14-17절과 18-25절에서 동일한 내용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합니다. 먼저 두 단락은 우리의 상태,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솔직한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14절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아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당한 하나님의 뜻인 율법(도덕법)을 지킬 수가 없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는 자신이 “죄의 노예로 팔린 자가 되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에 상응되는 18절 역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아야 할 문제의 본질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경험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처해 있는 엄중한 현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을 얻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더라도 심한 갈등속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육신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두 단락(14-17절; 18-25절)에서 반복하여 그로 인해 생긴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처절한 갈등에서 당신의 영을 보내사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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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절) 라고 사도는 탄식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한편으로는 생명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을 초래할 수 있을까요?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망이 율법의 허물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은 단호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죄악 된 우리의 본성은 나쁜 목적을 위해 선한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율법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되고 죄악 자체를 비난해야 합니다.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죄를 범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형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그가 자신의 범법행위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감옥에 가둔 법을 비난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정죄한 것은 법이지만 법을 어긴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유발시키며, 그것을 정죄할 뿐입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에 대한 책임을 율법에 돌려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패성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율법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독립성, 즉 죄된 마음이 내주하고 있기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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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종된 것은 ‘영의 새로운 것’을 위한 것이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 7장 6절에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는 메시지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메시지를 고린도 후서 3:6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사이의 철저한 대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 공동번역). 옛 언약은 문자, 곧 우리 밖에 있는 돌판에 새긴 외적인 계약입니다. 새로운 계약 즉 새 언약은 복음, 곧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의 할례요,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방법이요, 현재 우리의 새로운 종의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율법은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충족시키심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 반면, 우리의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종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시며, 우리 또한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지위에서 나오는 감사가 율법에 대한 복종의 원인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복음은 “살아났으니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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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20년의 부활절은 4월12일입니다. 부활절을 이렇게 결정하게 된 계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서 결정된 것이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2020년 3월 21일이 지나고 첫 만월은 4월 7일경(음력3월15일)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월12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0년의 경우 4월 5일(일요일)부터 4월 11일(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으로 부릅니다. 금년의 고난주간도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요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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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로마서 제7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권은 율법(모세율법을 의미- 다수학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의로 구원의 방법으로서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말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규범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이를 지키도록 허용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도 제사법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적 규정의 모세 율법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법에 충돌된다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십계명(안식일 규정 제외)으로 대변되는 도덕법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나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소위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함하여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만이 받은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롬9: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모세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되어 심히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14, 15절). 바울이 이러한 주장이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율법(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7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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