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4.8 – 1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섬김은 일생의 직업을 포함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일생의 직업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섬김의 핵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직업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인 이상, 이 점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장차 갖고자 하는 직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섬김이라는 관점에서 평생의 직업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직업을 유감스러운 것으로, 불가피한 숙명으로, 때론 노골적으로 귀찮은 것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계비를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 가족들을 부양해야 합니다.이런 관점에서는 직업이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개인적 야망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 지위, 권력, 안정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와 같은 표준에 의해 일생의 직업을 결정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이에 반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복음 전도를 위한 유용한 영역으로, 다른 방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나 이것은 직업을 택하는 이유가 되기에는 전적으로 부적합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섬김 그 자체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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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말씀을 두 번째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분의 노예와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노예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야 하고, 더 나아가 신약성경에 의하면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또 같은 장 13절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 중심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자기 중심성’을 말콤 머거리지는 “내 자아의 어둡고 작은 토굴 감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죽음심을 통하여 받은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는 일은 없도록 특히 주의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웃 사랑을 가지고 서로 섬겨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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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반역적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를 갈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왜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고뇌하신 후에 군병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고 베드로가 방어하려 했을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의지이며, 그분의 의지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복종하실 만큼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으며 그의 경외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그럴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이며 사랑에 찬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 하늘 아버지의 의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반역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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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일 오전 일찍 그리스의 네압볼리를 떠나 터어키로 건너왔습니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트로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시가 넘었으므로 결국 트로이 목마를 보지 못하고 드로아 항구로 내려왔습니다. 드로아 항구는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을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마게도냐 지역으로 전도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 지역이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흑해지역으로 나가던 바울의 일행을 그리스쪽으로 돌리신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하여주신 것이었습니다(AD 51년경). 또한 이 항구는 제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바울의 일행이 집결하여 드로아지역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장). 그리고 예배를 드리다가 3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를 살린 기적도 발생한 곳입니다 (AD58년경).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선교를 위한 항구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기록만 남긴 채 오늘날은 터어키의 땅으로 모슬렘 사원만이 가득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1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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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아버지를 거슬러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도 않으셨고, 반면에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여 아버지께 흡수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계속 지닌 채 아버지께 복종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이 주인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의지의 반역이나 소멸이 아니라 의지의 자발적인 복종 가운데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지는 모든 권위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적의지에 흡수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림으로써 자신에게 속박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서 참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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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25 – 3.1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은 무엇이 선하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길잡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은 우리의 지성에 의하여 검열을 받아야만 합니다. 좋은 예가 분노와 사랑과 관련된 것입니다. 분노에는 의로운 분노가 있고 불의한 분노가 있습니다. 의로운 분노에 대한 가장 좋은 본보기는 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는 경우입니다. 예수님도 완악한 바리새인들의 행태에 분노하셨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불의한 분노가 역시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에서는 “사람이 분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의 경우 우리는 분노를 발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분노의 대부분의 경우는 불의한 분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 때,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 이것이 ‘의로운 분노인가 불의한 분노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하기 전에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지성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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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18 – 22

복음 전도를 순전히 감정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복음 전도의 평판이 나빠진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음 전도에 충실하려면, 사람들의 감정에는 물론 지성을 통하여 그들의 양심과 의지에도 호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지성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거듭해서, 사도들이 전도 집회를 가진 후에 많은 사람들이 “설득되었다”(개역개정은 “권함”, “권면”으로 번역됨. 행17:4; 18:4 등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 끝 무렵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만일 대학교에서 전도 집회를 연다면, 100명이 회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지, 100명이 설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논하였으며, 구약 성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추론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성경적 논증을 활용하는 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증과 성령님을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됨을 명심하고, 지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 3:15).

성령님은 성경적 논법을 사용하시며,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때때로 한 장소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습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에베소에서 생긴 일입니다(사도행전 19장). 에베소에 도착한 지 석 달 후에 바울은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짐작컨대 그곳은 세상의 일반적인 회관이었을 것임)을 빌려 거기서 2년 동안 매일 강의하였습니다. 어떤 사본에 따르면, 바울이 제5시부터 제10시까지, 즉 오전 11시부터 오후4시까지, 매일 5시간 강의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강의는 매일 5시간씩 2년에 걸쳐 행해진 것으로, 만약 바울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다면 복음을 논하는 데 3,120시간을 투자한 셈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장날에 각기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에베소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을 보러, 어떤 사람은 정치가와 면담하러, 또 어떤 사람은 친척을 만나러 그곳에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울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바울은 매일 5시간씩 강의를 했고, 사람들은 두란노 서원에 들러 회심했으며, 거듭나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여기서 아시아는 터키 북쪽에 있는 로마의 아시아 주를 말하지 현재의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님).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8-10).

지성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우리의 증거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의 세 가지 논거는 우리의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지성의 영역에서도 주님이십니까? 이를 위해 우리의 영적 순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과 주는 단순히 그들이 현실 세계에 증거해야 하는 어떤 호칭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들의 선생이며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다. 나는 너희들의 주이며 너희는 나의 종들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생이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불복종할 자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켰습니까? 여러분 여전히 그분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지성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권위로 구약을 인준하셨고, 또 사도들을 지명함으로써 신약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복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우리가 지적으로 회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지적으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감정에 관해서도 같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통합된 그리스도인은 반지성적이지도, 반감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고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으며,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깊은 감정도 주셨습니다. 지성의 올바른 활용을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메마르고 무미건조하며 냉랭한, 비인간적인 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추호도 그러한 지성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남자답게 처신하라는 철학을 가진 영국 공립학교에서 자라나 감정을 억제하도록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다닐 동안 회심하였고 그 뒤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님이 두 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 속에 순전한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감상주의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닌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성경적 신앙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즉 우리의 인간성 양쪽 부분을 모두 충족시키는 신앙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과 마찬가지로 감정 역시 타락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전적 부패 교리를 믿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전적 부패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모든 죄인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사람 그 누구도 이렇게 배운 적이 없으며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악할 대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 부패가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부패의 전체성은 부패성의 정도를 언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패성의 범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박사는 이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그는“전적 부패란 모든 사람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해야 할 만큼 선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타락이 우리의 모든 부분,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양심, 우리의 성,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모든 부분은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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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1 – 15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 – 1630)는 우주를 연구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이에게는 더욱 합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을 쫓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은 바로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의사소통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읽는 것입니다. 과학적 조사와 성경 연구 모두에서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 우리의 합리성의 중요한 일부인 인간성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지성의 적절한 활용이야말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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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7-8

예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주의 기독교계에 생겨난 심상치 않은 동향들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도 심상치 않은 조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호주 멜버른 대학 출신의 한 학생이 스웨덴에서 개최된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수련회장에서 그는 조국에 학생 소요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학생은 당황하여 손을 쥐어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주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걸까?” 이 학생은 지식 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조국에 돌아가 소요에 가담해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에 소요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야만 합니다. 성찰 없이 행동에 헌신하는 것은 광신주의이며, 헌신 없는 성찰은 모든 행동을 마비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찰과 헌신 둘 다이지, 성찰 없는 헌신이나 헌신 없는 성찰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20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잘 묵상해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같은 구절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금하는 동시에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입니다. 악, 사악함 등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처럼 무지하고 순결하고 미숙해야만 하나, 지성과 사고의 영역에서는 어른이 되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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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28 – 2.1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가지고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1980년 영국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인 의대생을 위한 국제대회에서 저자가 강의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목차는 1장 온전한 인격(인격), 2장 직업과 소명(소명), 3장 사회적 책임(참여), 4장 세상과 구별된 삶(윤리) 그리고 5장 세상을 품은 그리스도인(선교)의 다석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제1장 온전한 인격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 아래 복종시키는 것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헌신은 부분적이지 않고 전체적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평일에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직장에서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나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온통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12:1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제단에 바쳐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여러 부분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말 안에 통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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