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6:15). 이 구절은 정확히 1절의 질문(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반박하기 위해 도입한 수사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6장은 전반부(1-14)와 후반부(15-23)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믿음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우리 자신을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우리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23). 이를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종이 대조되는데, 사도는 계속하여 그 두 종의 발단(17-18절), 전개(19절) 그리고 결말(20-22절)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며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띠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하에 들어가게 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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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모든 욕심과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앞의 죽음은 법적인 죽음 즉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이 반면 후자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으로 비윤리적인 삶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에 속한 것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한 사건으로 결코 반복될 수 없으며, 후자는 현재에 속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회심할 때).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는 날마다 죽어야만 합니다. 로마서 6장은 이 두 죽음 가운데 첫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의 이전의 자아(옛 사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어떻게 죄 된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7절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NIV).” 개역개정이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번역들은 헬라어 단어 “데디카이오타이 δεδικαίωται”에 없는 “자유롭게 되었다” 의미를 삽입하여 번역하고 있으나, 그 단어 는 ‘의롭다 하심을 얻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진 사람이 사회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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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성령님을 통한 체험과 결부시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 역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성취되고 말 것임을 믿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망은 확실한 근거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흘러넘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와 죄인들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도록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 이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 곧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삼으로십시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넘쳐나도록 쉬지 말고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삼켜버린 바 되도록 하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앞 단락(1-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와 궁극적인 구원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시켰습니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추해 답변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행위로 인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를 입증해줍니다. 로마서 5장 12-19절은 어떻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심)’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는지 이른바 ‘칭의의 중보자’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역사를 짧게 언급합니다. 그 인간의 역사는 아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5: 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12절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역사를 세 단계로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첫째, 죄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으며, 둘째, 그 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으며(사망은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에), 셋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보는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죄의 침투와 사망의 침투, 그리고 인류의 사망이라는 세 단계의 역사이며, 모든 인류의 사망은 한 사람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어 13-14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가 어떻게 모든 사람의 사망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주된 내용은 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사망이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이른 바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들도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최후의 심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모르는 어린 아이는 최후의 심판 대상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왜냐하면)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롬5:13 공동번역). 13절은 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대표성 원리를 뒷받침하는지 논증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 곧 인류의 타락부터 율법이 주어지기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보자면, 이 기간 중에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하나 그들의 죄는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를 죄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14절은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공동번역)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사망한 이유가 아담처럼 고의적으로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가 그들의 머리인 아담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한편,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14절)이기에,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15절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롬5:15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로마서에서 매우 어려운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15절의 핵심 사상은 많은 사람이 한 사람(아담 혹은 그리스도)의 행위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인물 사이의 유일한 유사점입니다. 반면에 이들간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 측면을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롬5:21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15).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에 두 인물 사이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사점은 한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며, 차이점(세 가지)은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동기와 결과 그리고 특성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의 동기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동기와 다르고, 아담의 죄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와도 다르며, 아담의 행위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행위의 특성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두 행위의 동기 : 15절은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범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프토마 transgression.”입니다. 이 단어는 정도에서 이탈한 행위, 탈선한 행위를 뜻합니다. 아담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은사 恩賜: 임금이 은혜로써 신하에게 물건을 내려 주던 일. 또는 그 물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카리스마’로서 은혜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담 자신의 고집과 생각대로 행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위는 자기 희생의 행위, 곧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의 행위 사이의 대조적인 동기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아담의 행위의 동기는 자기 주장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의 동기는 자기 희생이었다.” “(왜냐하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둘째,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 행위의 결과에 있어서 나타난 차이점을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 15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죄가 많은 사람에게 사망의 무서운 형벌을 가져왔지만, 하나님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은사를 충분히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15절은 사망을 생명과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16-17절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 정반대의 결과를 대조합니다.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따라서 아담의 행위는 우리에게 정죄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는 칭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죄로 인해서는 사망이 왕노릇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서는 생명이 왕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정죄와 칭의, 사망과 생명, 이러한 대조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로 이전에는 사망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소속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의 종과 노예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제 사망의 법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을 함께 누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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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 실패자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반역자요, 결국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원수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러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 즉 고결하긴 하지만 동정심이 없어 매력을 주지 못하는 사람과 선인 (good man), 즉 따듯한 마음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그를 대신해 죽는 자는 거의 없는데, 원수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원수요 죄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나 존경받는 선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은 물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 나올 9-11절에 나타난 논증의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9-11절은 한층 더 진전된 논증이며, 가벼운 주제에서 보다 중요한 주제로 나아가는 논증으로, 이런 방법은 옛 진리를 기초로 해서 새로운 진리를 이끌어내는 고전적인 논증 방법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의 두 단계, 즉 칭의(현재 의롭다고 선언하심)와 영화(마지막 심판날에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를 대조시키고 칭의가 어떻게 영화를 보증하는지를 보여주며, 그 결과 지금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해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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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 7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하고, 환난에 처해서도 그것이 산출해 내는 결과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그것은 단지 우리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결국 영광에 이를 것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이런 반론을 사도 바울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 영광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그 소망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새영어성경(NEB)은 이 구절을 “그와 같은 (영광에 대한)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하든지 그건 당신 마음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재차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5절 후반부에서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 그러한 소망이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이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소망은 참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때로는 고통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면 그분이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하실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어려움에 처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의심 걱정을 주님의 손에 맡기시고 겸허하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17:3).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구절의 요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결코 멸망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because God’s love has flooded our inmost heart through the Holy Spirit he has given us.’(NEB) 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데, 그 원인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내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독특한 사역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홍수와 같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내적으로 깊이 깨닫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부어 주시는 이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능력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기뻐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됩니다. 이 같은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8:16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라고 증거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여기서 우리는 5절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란 구절에서의 ‘주신’으로 번역된 원어 ‘도센토스δοθέντος‘는 수동 분사형이며 시제는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사건을 나타내도록 부정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부은 바 됨’이라는 구절에서의 ‘부은 has been poured’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동형 동사 ‘엑케쿠타이 ἐκκέχυται’의 번역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완료형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믿고 회심한 순간에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이미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까지 계속 흘러 넘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단번에 주어진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충만하도록 흘러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병헌이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올 인 (All In)’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70) 씨의 말입니다. 70년대 중반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갔으나, 거기서 사업과 가정 모두 실패하여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과부였지만 부자였던 어머니는 집 안에도 들이지 않고 유복자인 그 아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미국에 다시 돌아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카지노의 포커판을 통해 일어섰고, 지금의 부인을 만나 고아라고 소개한 뒤 재혼하였습니다. 그렇게 냉정하던 어머니의 부탁으로 큰 누나가 미국을 숫소문하여 드디어 자신의 집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차민수 씨는 “아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셨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그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며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1-5). 이상의 다섯 구절을 요약해 볼 때 우리는 칭의의 결과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삼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둘째 우리는 지금 은혜 안에 서 있게 되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이 환난을 통과시킴으로써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인격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무엇보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실해집니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단회적인 판결인 칭의는, 현재의 은혜와 장래의 영광이란 말로 요약되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식 때 정성을 다한 예물을 교환함으로써 서로간의 사랑을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반역한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십자가 위에서 죽게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환난을 연결고리로 삼아 화평과 소망, 칭의와 영화를 결부시켰지만, 이제 6-11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연결고리로 삼아 그것들을 다시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어 나오는 6-11절은 칭의의 결과가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무력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롬5:6 사역).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6-8절에서의 주제는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이 이 구절들의 핵심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이 구절은 우리를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한 ‘연약한’ 자들이라 묘사합니다. 둘째, 우리를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셋째, 우리를 의의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죄인’이라고 묘사합니다. 넷째,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원수’라고 부릅니다.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이 얼마나 두렵고 가공할 만한 묘사입니까! 우리는 실패자요, 반역자요, 원수들이며,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힘이 없는 무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야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에 생존하였던 유대인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한반도의 조선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던질만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12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른바 대표성 원리입니다. 범죄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형벌을 받은 것과 같이, 불의한 자들을 위해 속죄를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2).
매일말씀나눔
2020. 1. 28 – 2.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5:3-4). 여기서 환난은 헬라어로 ‘쓸립시스 θλῖψις ‘입니다. 이 단어는 글자그대로의 뜻은 ‘압력 pressure”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어려움을 일컫는 것입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 단어를 질병이나 괴로움, 슬픔이나 애통이 아니라 불신자들에 의해 받는 박해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를 꼭 그런 것에 국한하는 것보다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신자들에게 부닺치는 일반적 고난 역시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음의 삶에 가해지는 어떤 압력일지라도 환난은 우리를 언제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러셨습니다 (눅24:36). 그리스도에게 진실인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진실입니다. 종이 상전보다 결코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13:16).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로마서8: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장래에 받을 영광과 관련하여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언제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며, 장래의 영광을 생각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을 언제나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즐거워합니다. 만일 우리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면’ 우리는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 또한 ‘즐거워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즐거워하다’라는 헬라어는 “카우카오마이 καυχάομαι ”로 ‘매우 즐거워한다, 기고만장하여 기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하에 유독 그리스도인들만은 왜 그럴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시119:71-72)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5:3-5). 그리스도인들은 장래의 영광을 소망 가운데서 뿐 아니라,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도 매우 기뻐합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워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3-5절이 이러한 역설을 정확히 설명해줍니다. 3-5절은 우리가 고난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유익한 결과를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고통 자체를 즐기는 자학자들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고행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고난이 만들어 내는 열매나 결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룬다”라는 말은 헬라어 “카테르카제타이 κατεργάζεται”를 번역한 말로 그 정확한 의미는 “노동과 작업을 통하여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생산 중이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연단(입증된 성품 proven character)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대가를 치루고 얻은 당신의 백성들이 마땅히 갖추어야만 하는 자질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5:3-5).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것이 낳은 결과와 맺는 열매를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만들어 내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5:3-5은 세 가지 단계로 제시합니다. 1단계 :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 예방접종에 의해 항체가 몸 안에 생기듯이 환난 중에 필요한 참된 인내는 환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고난을 경험해보지 않고서 우리는 결코 인내를 배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난 없이는 인내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2단계 : 인내는 연단 또는 인격을 낳습니다. – 연단이라고 번역된 ‘도키메 δοκιμή ‘라는 헬라어는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과 같이 성숙한 인격이나 검증을 받은 물건의 질을 뜻합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갑옷과 투구가 익숙하지 않아 시험적으로 걸쳐 보다가 입지 않겠노라고 했을 때 의미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 또는 그에 걸맞는 인격을 낳습니다. 3단계 : 연단 또는 인격은 소망을 낳습니다. 이 연단은 궁극적인 영광에 대한 확신을 낳습니다. 환난의 인내를 통해 얻은 성숙한 인격은 장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의미한 것은 분명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처럼 역사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온전히 성장하기까지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임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는 약속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닥친 당면의 문제 역시 잘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환난과 영광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더 나아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다면, 환난은 이러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만일 영광에 대한 소망이 환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서 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목적)을 즐거워할 뿐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환난(방법) 또한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 모두를 즐거워합니다. 어느 날 카프만 부인은 책상 위에 곧 나방이 될 고치들을 놓고, 거기서 나방이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고치의 구멍은 작은데 나방이 구멍보다 커서 나방이 나오는 모습이 무척 힘들고 고생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위로 고치의 구멍을 넓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나온 나방은 좁은 구멍을 뚫고 나온 나방보다 윤이 나고 훨씬 커서 카프만 부인은 신의 창조의 지혜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후 나방이 날기 시작할 무렵 고생스럽게 나온 나방은 훨훨 날아가고, 구멍을 뚫어 준 나방은 날아가지 못하고 날개만 파닥거렸습니다. 그 이유는 나방의 영양분은 모두 어깨에 있는데, 좁은 구멍을 나올 때에 고생스럽게 힘을 쓸 때 어깨에 있는 모든 양분이 점점 날개 밑으로 내려가 날개 끝까지 그 양분이 옮겨지게 되고 나방은 그 힘으로 날게 되기 때문입니다. 카프만 부인은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자신의 한정된 지식과 경솔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인격형성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5-36).
매일말씀나눔
2020. 1. 20 -23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의 저서 『새 사람』을 가지고 아침 묵상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로마서 5장에서 8장까지 주해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받은 위대한 특권 4가지를 – 하나님과의 화평, 그리스도와의 연합, 율법으로부터 자유, 성령 안에서의 자유 –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을 가장 완벽하고 일관되게 설명하는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인간의 죄와 버림받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한 성령님의 사역,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지위, 복음과 윤리와의 관계 등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말합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광대함과 문체의 장엄함, 그리고 함축성에 있어 경탄의 대상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의 논증 방법 또한 모든 세대의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로마서 전 16장 중 저자는 5장-8장을 따로 떼어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5-8 장은 일관성을 가지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구원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위대한 특권들을 묘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새롭게 된 사람들’, 바꿔 말하면 그분이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신 이들이 받은 특별한 권리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로마서 1장-4장은 칭의(justification – 의롭다고 일컬어짐)의 필요성과 칭의의 방법에 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의해서만 그리고 오직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뒤따라 나오는 5장-8장은 칭의의 결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된 양자의 신분과 성령님에 대한 순종의 삶 그리고 도래할 천국에서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으로 특징지워집니다. 그러므로 이를 전제로 오늘 한 번 로마서 1-8장까지 죽 읽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로마서 5장-8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5:1-19) (2) 그리스도와의 연합(5:20-6:23) (3) 율법으로부터 자유(7:1 – 8:4) (4) 성령님 안에서의 삶(8:5- 39). 한편 오늘부터 묵상해 볼 부분은 로마서 5:1-19로 주된 주제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부분 역시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11절까지의 첫 번째 단락은 칭의(稱義- 의롭다고 선언되다)의 열매, 곧 칭의의 결과를 묘사합니다. 12-19절까지의 두 번째 단락은 우리에게 칭의를 주신 칭의의 중보자 곧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 5장 1-2절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구절들은 칭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첫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1절). 둘째,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2절 상).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2절 하). 이 말씀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과 지금 그 안에 서 있게 하는 은혜, 그리고 장차 받을 영광을 열매로 맺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시제 혹은 세 가지 국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칭의의 직접적 효과인 ‘하나님과의 화평’ (2) 칭의의 지속적 효과인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 (3) 칭의의 궁극적 효과인 ‘하나님의 영광’ 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 같은 죄인들은 절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속죄가 효력을 나타내는 첫 관문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이런 칭의의 세 가지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가 율법의 행위들에 의하여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 죄에 대한 지식이 오기 때문입니다.” (롬3:19, 사역)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이 본문에서 나오는 칭의는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시제 혹은 세 가지 국면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를 자세히 볼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평’은 칭의의 직접적인 효과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칭의의 직접적인 효과는 그러한 불화 상태를 평화의 상태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은 칭의의 지속적인 효과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은혜 안에 계속 들어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새영어성경(NEB)은 이 구절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라고 번역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이미 들어가 있고, 지금도 그 안에 서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천국’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은 자신을 천국에서 완전하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그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3:2). ‘바란다’는 말은 소망을 뜻하고, 여기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참되고, 확실한 신뢰 혹은 기대를 말합니다. JB 필립스가 ‘행복한 확신’이라고 번역한 이 소망은 ,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광의 소망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확실히 믿으며 기대하며) 즐거워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각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된 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조화로운 삶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여기에 이웃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화평,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 하나님의 영광, 이 세 가지 요소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요약임이 분명합니다. ‘화평’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불화 상태를 떠올리게 됩니다. ‘은혜’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신 자비의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광’이란 말에서 장차 나타날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삶에 대한 이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마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후, 신자의 길이 대로와 같이 평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자갈만이 아니라, 가시덩굴로 뒤덮여 있는 좁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3절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화평, 은혜, 영광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난도 동반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복음 10장 29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위하여 집과 전토 그리고 심지어 가족까지 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축복하시는 방법에 관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축복을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속에 함몰되어 멸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항상 감사하시고 즐거우면 찬송을, 어려우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매일말씀나눔
20.1.6 – 10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들처럼 하게 도우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들처럼 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닥칠 것입니다. 큰 일이 닥칠 때에도 두려워 하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 담담하게 처리하며, 작은 일을 하게 될 경우에도 경시하지 않고 주님의 자녀답게 최선을 다해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올 한 해에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자녀들이 자라서 말을 할 수 있을 때, 부모가 제일 자주 하는 질문은 “얼마나 컸지?”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똑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만큼 커요!” 보통 아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키를 부풀려서 “나는 커요.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클지 아무도 몰라요” 하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물론 과학적인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을 작고, 약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크십니까? 데일 브루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움의 폭풍 속에서 괴로워할 때, 그 폭풍을 잠재울 능력을 가진 말씀이 바로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내라! 나니(I AM) 두려워 말라!”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로서 한글은 “나니” 즉 “나다”로 번역하나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영어로는 “ I AM”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고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야훼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위대한 말씀 속에 바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쉽게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당신 손안에 바로 이 우주가 들어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6-27)
존 오토버그 목사는 “나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의 문제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면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지배될 것입니다. 그 결과 만약 전도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거절당하거나 알맞은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지?”하고 움츠러들게 되고말게 됩니다. 전도가 궁극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 안정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직면하거나 강한 권면의 말을 해야 할 때도 슬쩍 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므로 그분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면 십중팔구 그 유혹에 넘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의 삶을 은밀하게 보시고 어느 날 상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축소시키면 믿음 없는 기도를 드리고, 열정 없이 일하고, 기쁨 없이 봉사하고, 소망 없이 고통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신 지혜로우며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뉴포트 해변을 걸으면서 술집 안에서 일어난 싸움이 바깥까지 번져 나온 곳을 지나갔습니다. 마치 옛날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남자 세 명이 외로운 한 사람을 구타하고 있었는데 피해자는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별로 경험이 없었지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에 목사님 일행은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갑자기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놀라서 그들을 불러 세우고 왜 도망가느냐고 물어볼 뻔하였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곳에는 엄청난 거인이 서 있었습니다. 술집 경비원이 분명하였고, 대략 2미터의 키에 몸무게 110킬로그램 정도였으며, 마치 헤라클레스의 아들 같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몽고(3미터 크기의 전사 상)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의 면전에서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몽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청난 근육을 과시하며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로 싸움을 해결하는 것은 그의 ‘영적 은사’였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의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용기와 자신감이 가득하였으며,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일행에게는 강하고 큰 몽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몽고보다 크신 분과 항상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폭풍 속에 있는 우리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조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의 삶에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며, 그런 믿음으로 직면해야 할 때 우리는 움추러들고, 기도할 수 있을 때 걱정하고, 후히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움켜잡고, 물 위로 걸을 수 있을 때 배 안에서 머물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반드시 두려움이 닥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의 시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2020.1.13 – 17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우리 주님을 통하여 지으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신뢰하고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인간이 하나님의 광대함, 존귀함, 힘을 인식하고 선언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장려하지 않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로 평가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배는 생산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예배로 무엇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배를 드립니까?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여질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땅은 이미 그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세상에는 두려운 일이 가득하며 결국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사망으로 귀결되도록 운명지워졌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벌판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처럼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경험이 없다면, 세상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들(경력, 실력, 돈, 명예, 인맥, 권력, 체력 등)을 경배하고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4개월만 교회에 나오지 않고 기도와 찬양이 없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사람과 다를 것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인 예배의 감동과 기억이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4-5).
우리는 때로 베드로처럼 배 밖으로 나갈 때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가 아직 공산주의 치하에 있을 때,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친구와 함께 2주간 설교하러 그곳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초청한 지하 교회들은 50권의 주석 성경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 밀수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염려가 되었지만 목사님은 시도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러 미국 교회들이 필요한 성경을 기증하였고, 떠나기 직전에 한 여성이 다가오더니 목사님의 손에 한 권을 더 쥐어줘서 목사님의 선교 일행은 총 51권을 가져갔습니다. 당연히 세관 직원이 이 선교팀의 옷 가방 중 하나를 열더니 성경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오토버그 목사님은 세관의 수장인 관리가 교회 리더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최악의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습니다. 에디오피아의 교회 리더들은 감옥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감옥을 ‘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은 하나님이 그의 리더들이 성장하기를 원하실 때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처럼 그들 중 일부는 간수들이 쉬러 갈 때 감옥을 책임지기도 하였습니다. 간수들은 라이플 총에서 총알을 빼어 그리스도인 죄수들에게 건네주고 돌아올 때까지 경비를 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여러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관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도 한 권 갖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1권을 기증받은 것 역시 이 관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깨달은 목사님은 회고합니다. “그날 내 하나님은 좀 더 커지셨습니다. 주님이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크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 능력의 배 밖으로 나갈 때마다 그의 하나님은 좀 더 커진다는 진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3-4).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려 할 때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방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주목합니다. 방심상태에서 나의 몸은 현장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어느 곳을 자동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때때로 이런 방심상태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몇몇은 아예 생활의 한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방심은 우리를 예배하지 못하게 막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되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에 주목하지 못하고 방심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미스터리를 제거해 버리는 시대에 살면서 미스터리가 없어서 아쉬워합니다. 발신자 추적을 하고,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에 성별을 알고, 출구 조사를 하여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누가 선출되었는지 알고, 텔레비전 마술사들이 항상 숨겨 왔던 비밀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경이를 파괴해 놓고서 그것을 몹시 갈망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너무 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접할 때 우리는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명령하지 않아도 폐는 계속 공기를 흡수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 매일 잠이라는 작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부활시키는 기적을 잠시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들려올 때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율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귀를 울리는 공기 분자의 진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기 분자의 진동의 의미를 알아듣고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외치는 작은 신현(神顯)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예배가 때로는 지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예배의 방식이나, 찬양의 종류 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배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산과 폭풍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미지는 더 작아지고 더 편해지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천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존재에서 편한한 개인의 수호 천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성경에서 천사의 등장은 항상 두렵고 무서운 사건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천사를 만나는 모든 경우 “두려워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1965년 감옥에 들어가 12년간 옥고를 치루고 1976년 풀려 나온 고 이인수 장로님이 1985년 장교들이 모인 앞에서 한 간증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감옥에서 낙망과 절망에 잡혀서 나날을 보내던 중 병까지 들었습니다. 몸무게가 38킬로 그램 정도로 내려갔고 의사도 이제는 끝났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병상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잡고 펴니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한다는 내용이 적힌 로마서 5장 3-4이 나왔습니다. 마음에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어”하고 부정하자마자, 옆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 까짓 정도 가지고 낙망하냐!” 고 책망하셨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아쉽게도 1985년 출간한 그분의 간증집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에는 누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 체험 등으로 감옥에서 12년 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석방되어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항상 하나님과 천상의 존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0-11)
C.S. 루이스의 책 『캐스피언 왕자』에서 한 아이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과 우연히 만납니다. “아슬란, 당신은 더 커졌어요.” “그건 네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지, 애야” 아슬란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요?” “나는 나이가 들지 않아. 그러나 매년 네가 자랄 때마다 내가 더 커진 것을 보게 될 거야.” 우리와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이야기가 예배로 끝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예배는 전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순환시킵니다. 예배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배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제자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크시지?” 베드로는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어올리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큼 크셔!” 예수님이 배 안으로 들어가시자 바람이 잠잠해졌고 폭풍도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배 안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한결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누군가 배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그렇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결코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결과가 무엇이든, 그들이 빠지든 헤엄치든 무언가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명을 분별하여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하나님은 더 커지실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예배와 믿음은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강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 그분을 신뢰하고 나설 사람들을 아직도 찾고 계십니다.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에 대하여 우리들도 믿음으로 응답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히11:1-2, 공동번역)
매일말씀나눔
2019년도 어느덧 마지막 날들이 다가왔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할 때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미해결 과제, 응답받아야 할 기도제목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한 후에 남은 미해결 과제들은 하나님의 손에 남겨두어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0:38을 보면 주님께서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착한 일들을” 하셨지 모든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조자 인간의 몸으로 모든 마을을 다닐 수는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을 치료할 수도 없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바로 그 일을 완성시키셨을 뿐이고 미해결의 과제들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한편, 존 맥스웰은 우리가 사는 동안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안되며, 성공의 지름길은 이런 중요한 결정들이 잘 내려질 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의사결정이라도 우리가 작성한 매일의 계획표 상에서 처리되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이어 맥스웰은 “우리가 만약 우리 인생 가운데 무엇인가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오늘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오늘에서 승자가 될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갖는 매일 매일의 의제에 달려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 주님께서 우리가 할 일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때 성공은 결과나 업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님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일을 성심껏 한다는 사실 자체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맞이할 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출발점입니다. 경자년 2020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이미 작정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1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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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3 – 27
이번 주는 성탄절 주간입니다. 23일과 24일 이틀간은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 따르면 가이사 아구스도 즉 아우구스트 황제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칙령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재임한 중에 첫 번째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었기에 호적하러 유다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다윗이 태어나서 자란 동네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함께 갔으며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이미 700년 전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를 예언한 미가서 5장 2절의 성취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마태복음 2:6; 미가5:2). 그리고 선지자 미가는 태어날 메시야를 통하여 전 인류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5:3-4)..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호적하라고 명령할 때에 만삭이 된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서 아이를 낳아서 성경을 성취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것을 작정하고 계셨지만 그것을 그 어떤 누구도 알 수 없는 섭리가운데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실한 믿음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3-4).
예수님이 약 1,350년 전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가족은 기근을 피하여 베들레헴에서 사해 동편에 위치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들레헴 성문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나오미를 보고 “이가 나오미냐?” 하니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 말라 마라라 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혔고 여호와께서 나를 징책하셨거늘 어찌 나를 나오미라 하느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전능자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라고 대답할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자부와 함께 며칠 집에 있었는데 이때는 보리추수를 할 즈음이었습니다. 자부 룻이 이삭줍기를 허락받고 들에 나아가 이삭을 주울 때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기 시작하였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추수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룻을 보게되고 그녀를 선대하였습니다. 룻은 저녁에 보리 한 에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를 본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알게 되고 드디어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켰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이며 오늘 본문의 베들레헴이 다윗의 동네로 일컫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각기 아들과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겼으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런 나오미와 룻을 통하여 약 1300년 후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들어오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 가운데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짐승의 구유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유의 주님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서슴없이 비우시고 낮추신 그 겸손을 성탄절을 맞이한 우리는 꼭 본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우리는 “기다림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다”라는 교훈을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기다림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를 문제에서 건져줄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하염없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것,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것,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로 “나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기다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동적 소비, 저축 거부 등의 심각한 재정 관리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재정 혼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공급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된 기다림의 예입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을 위배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선한 청지기의 자세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산안 세우기, 십일조, 충분한 돈이 있을 때까지 구매를 미루는 것 등의 새로운 재정 습관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적 기다림은 수동적이 아닌 동시에 불유쾌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 또한 아닌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확신과 자제력과 기대를 가지고 행동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저는 당신을 신뢰할 것이고, 당신께 순종할 것입니다. 제 삶의 환경들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제가 선택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대안입니다.”라고 매일 다짐하겠다는 결정입니다. 따라서 성서적 기다림은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신뢰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편4:5).
주님을 기다리려면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성경에 말씀하신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사물을 보아도 어린 아이가 사과를 보는 것과 물리학자가 사과를 보는 것은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만을 보는 인간과 영원한 관점에서 보시는 주님과는 같은 사물과 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른 관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후서는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우리의 백만 달러가 당신께는 한 푼에 불과하겠군요” “그래” “주님, 제게 한 푼만 주시겠어요?” “좋아, 여기서 일 분만 기다려라.” 사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은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시간은 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푼은 원하지만 하나님의 일 분은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하나님이 우리 안과 밖에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릴 때 하나님이 제대로 일하신다는 점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