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12.16 – 20

기다리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신속한 행동가이기를 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벳세다에서 베푸신 예수님은 저녁이 이르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서움에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며 구원을 요청할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들은 신속하고 분별력 있고 단호하였습니다. 그분은 경적을 울릴 찰나도 낭비하지 않스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기다림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 3시가 지나서야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 안에 있었던 것은 전날 해지기 전부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리 오래 지체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폭풍과 동시에 나타나시거나 그보다 조금 전에 나타나시는 것을 원하였을 것입니다. 롤린슨은 핍박의 폭풍을 겪고 있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연약한 마음들은 주님이 그들을 버렸는지 의심하거나, 그리스도의 실제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그들을 보고 계시며….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밤 사경’에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했다.” 우리도 같습니다. 삶에서 여러가지 소원과 간구의 제목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신속하게 해결해주시는 경우도 많지만 때로는 기다림을 배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인내를 온전하게 이루시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믿음의 핵심은 인내이고 인내의 중요한 요소는 기다림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대표적인 예언이 이사야 11장 1-4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고 그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다는 예언으로 예수님께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그리고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또 다음 세기로 계속해서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성경에 집중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시므온 같은 사람들만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라고 묘사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다림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30년간 나사렛에 은둔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고 나서 3년 반이 지난 후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하심을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기다려야 하였고, 오신 뒤에도 주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왜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4)

잘 기다리는 능력은 성숙의 척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만족의 연기(延期)를 감내하는 능력” 이라고 부릅니다. 스코트 펙은 “만족의 연기란, 고통을 먼저 만나서 경험하고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대니얼 골먼이라는 학자는 삶의 성과는 인지 지능보다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서 지능의 핵심에는 만족을 연기할 수 있고 충동에 휘둘려 살지 않는 능력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의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바로 ‘마시멜론 테스트’입니다. 마시멜론이라는 과자를 둔 방 안에 네 살짜리 아이가 있고 실험자는 그 아이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실험자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과자 두 개를 먹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지금 당장 먹기 원한다면 하나만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충동과 억제, 이드와 에고, 욕망과 통제, 만족과 연기 사이의 영원한 전투가 벌어지는 소우주”인 그 어린 아이의 영혼에는 큰 시험이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실험자가 나가자마자 금방 먹었고, 어떤 아이는 한 개를 더 먹으려고 노래 부르기, 혼자 애기하기, 손가락 가지고 놀기 등 온갖 전략을 개발해 내면서 참고 실험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불과 네 살이 표현한 이 성격들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영향은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팀이 이 아이들을 오랫동안 추적 조사함으로 밝혀냈습니다. 그 성격들은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팀은 마시멜론을 가지고 네 살짜리 어린아이들을 테스트한 후 그들을 오랜 기간 추적 조사를 하였습니다. 네 살일 때 기다릴 수 있었던 아이들은 기다릴 수 없었던 아이들보다 더 사교적이고,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고, 압력을 받을 때 덜 포기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참지 못하고 즉시 과자를 집은 아이들은 더 고집이 세고 우유부단하며, 좌절에 더 쉽게 격분하고,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SAT 라는 미국대학학력고사의 성적에서도 과자를 기다린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210점이 높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과자를 먼저 집은 아이들은 여전히 욕구 충족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충동 통제 능력의 부족이 비행, 과소비, 이혼과 연관성이 높다는 것 또한 연구 결과 드러났습니다. 골먼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 잘 기다리는 능력을 ‘가장 중요한 적성’이라고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과자에 대한 테스트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하물며 어릴 때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가르침을 받아 성장한 아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충동에 대한 통제 불능과 인내하며 신뢰하기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속성의 핵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한 입 베어 먹은 이후로 삶은 늘 그래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와 반대되는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그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서 그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만드시고, 그 결과 성령님의 열매가 우리의 삶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1-5절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담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고 가르친 뒤, 우리의 남은 삶은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큰 기쁨에 차서 살아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의 기대가 결코 현재 겪는 환난 때문에 감소되지 않는다고 그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을 의미)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병이나,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나,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나,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되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즉 죄인이며 원수였을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아들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어찌 사랑하시며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의 길을 걷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숙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 그것이 바로 ‘경건’이며, 애초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매일말씀나눔

2019.12. 9 – 13

두 번째는 노출의 법칙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은 가장 많이 노출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가는 것이 곧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결국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사람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노출의 법칙은 중력의 법칙과 같습니다. “아니, 이 값비싼 골동품 크리스털 꽃병을 시멘트 바닥 위에 떨어뜨렸더니 깨져 버렸어. 이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사람들은 노출의 법칙에 대해서는 크게 놀랍니다. 어린이들은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수백 번 나오는 폭력과 살인에 노출됩니다. 비디오 게임에서도, 대중 문화 속에서 조직 폭력의 상징들과 이미지들이 미화되는 것을 계속 보면서 성장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사람들은 축구 경기 도중 관중석에서 일어나는 패싸움이나, 심각한 학교 폭력을 보고 경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자료를 읽고, 이 장면을 보고, 이런 왜곡된 말들을 들을 수 있어요. 그래도 나는 정말로 영향을 받지 않아요. 나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든요.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 버려요.” 그러나 현대 사회 과학자들은 이제 성경이 말하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참석하는 행사, 읽는 자료, 듣는 음악, 보는 이미지, 남과 하는 대화, 즐기는 공상들이 모두 우리 마음을 형성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소망, 인격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노출의 법칙을 숙지하고 각별히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그런 인격을 어떻게 하면 형성할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직접 말하는 성경, 자료, 책, 사람, 예배, 기도 등에 여러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 성장의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5-6).

시편 기자는 경건한 자들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은 음식을 씹듯이 마음 속에서 성경말씀을 찬찬히 소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암송은 마음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맞추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성경 암송의 핵심은 우리가 많은 구절을 암기할 수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경 구절을 반복하여 마음에서 되새길 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과의 관계 세상의 문제 등에 대하여 성서의 생각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어떤 분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고 적힌 카드를 받았습니다. 이 구절을 계속해서 생각하자 그분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소망의 원천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내 몸을 단순한 기쁨과 평강이 아닌,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케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가 단순히 소망을 갖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망이 넘치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 과정은 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원천입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에, 혹은 스포츠 신문을 읽고 났을 때 가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입니다. 영적인 존재들은 생각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무장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무슨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암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깊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 자라나도록 힘을 기우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우리의 마음의 초점을 잡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침례식이나 성찬식 혹은 결혼식과 같은 ‘의식rituals’입니다. 의식은 건강한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의식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결혼 생활에서 의식이 적다는 것은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결혼 기념일을 중히 여기며,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은 역시 부모님의 생신을 항상 마음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이런 일들을 가족과 함께 기념하는 것이 소중함을 모두가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 집중하게 돕는 의식과 상징을 만들어 놓는 것 역시 중요한 영적 성장의 방법입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교회에 가서 주님을 예배하는 날로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일주일을 살아가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이 안정되며, 문제가 있더라도 7일 내에 해소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설교와 찬양 그리고 기도를 통해 주님께 예배드림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동시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사무실에 십자가에 사용되었을 것 같은 크기의 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면서 때로 그것을 붙잡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당하신 고통을 기억하고 마음을 다진다고 합니다. 또 절친한 친구가 어떤 단어가 씌어진 돌을 주면서 그 단어와 같은 특징을 목사님의 삶 속에서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이 보기에는 그런 특징이 자신 안에 별로 없기에 그런 특징이 나타나기를 매우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준 돌에 쓰인 그 단어가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지고, 때때로 목사님은 그 단어를 가지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가톨릭에 특히 이런 유의 상징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 개신교 특히 침례교는 상징들을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에게 주님과 동행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들 – 성경책, 기도문 등 – 을 주변에 두고 주님을 묵상하는 것도 믿음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11:24-25).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5세기 초엽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하였던 성 패트릭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기도문을 받아 액자에 걸었는데, 이것은 로마의 갑옷을 의미하는 ‘로리카’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로리카는 착용하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나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통해 일어납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나를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내 앞을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통해/ 내 말을 들이시는 하나님의 귀를 통해/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통해 일어납니다.

나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신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신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내 밑에 계신 그리스도, 내 위에 계신 그리스도, 나의 오른쪽에 계신 그리스도, 나의 왼쪽에 계신 그리스도, 내가 누울 때 계신 그리스도, 내가 앉을 때 계신 그리스도, 내가 일어날 때 계신 그리스도,

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입 속에 계신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사람의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의 귀 속에 계신 그리스도,

오늘 나는 능하신 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기도문을 읽으며 자신도 그 안에 보호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기도문이나, 성경 구절 등을 걸어놓고 혹은 비치하여 두면서 그 기도문 등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도 영성생활에 여러모로 유익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소망에 초점을 둔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암 진단을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미국의 한 여성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례 예배가 어떻게 드려지길 원하는지 상의하였습니다. 자리를 뜨기 전에 그녀는 “하나 더 있어요”라는 말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오른손에 포크를 든 채로 묻히고 싶어요.”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식사가 포함된 교회 행사에 갈 때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주 요리의 그릇을 치우는 사람이 ‘포크를 들고 계세요’ 라고 속삭여 줄 때였어요. 그 말은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에요. 젤리 같은 게 아니라 케이크나 파이처럼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제가 손에 포크를 들고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이 포크는 뭐예요?’ 라고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목사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포크를 들고 계세요’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 의도는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생전에 그녀가 입은 옷, 읽은 성경 등을 둘러 보고는 모두 똑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포크는 뭐예요?’ 목사님은 이 여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누구에게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날은 축하의 날입니다. 진짜 파티가 이제 막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낙심했거나 시험에 빠진 모든 이에게, 꿈을 상실하고 마음이 하찮은 일들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밑을 내려다보지 말아라. 포크를 들고 있거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매일말씀나눔

2019. 12. 2 – 6

소망은 우리 마음의 원동력입니다. 교통사고나 다이빙 사고가 나면 신체가 마비 되지만 소망이 다치면 마음이 마비됩니다. 소망 때문에 인류는 타락한 이 세상에 자녀를 내 보냅니다. 자녀 때문에 힘들어도 자녀가 자신보다 더 낫고 더 고귀하고 더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거장 화가 헨리 마티스는 늙어서 관절염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손가락을 구부려 붓을 잡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자 마티스는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만 아름다움은 남습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파블로 카잘스는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로 인정받고 난 후에도, 연로한 육신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하루에 5시간씩 연습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연습하는지 질문하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연습을 하면 기량이 향상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을 땅거미가 완전히 덮으면 미켈란젤로는 지치고 쑤신 몸을 이끌고 회의에 차서 사다리를 밟고 발판에서 내려왔습니다. 쓸쓸히 저녁을 먹은 후 고달픈 몸으로 시를지었습니다. 마지막 행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화가도 아니다.” 그러나 해가 다시 떠오르면 미켈란젤로는 침상에서 일어나 다시 발판으로 올라가서 창조주에 대한 장엄한 환상에 하루 종일 또 다시 몰두하였습니다. 그가 다시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소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는 곧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소망이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고 모세를 파라오와 맞서게 하였으며, 선지자들을 권력과 대결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2-4).

사람은 무수히 많은 것을 잃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소망을 잃으면 살 수 없습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능력은 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 보다 폭풍의 압도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됩니다. 예수님은 배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실 때마다 그 각각에게 물 위로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분은 결코 가라앉게 만들려고 사람들을 부르지 않습니다. 때로 가라앉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의 부름은 절대로 실패의 전주곡이 아닙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탐사 하라고 정탐꾼 12명을 보냈습니다. 10명은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거인입니다. 우리는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우리는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2명 모두 똑같은 땅을 보았고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였지만, 완전히 상반된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란 목동은 군 복무 하고 있는 형들에게 보급품을 가져왔습니다. 세계레슬링연맹에서 나오는 인물 같은 적의 대장 거인 골리앗이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군인들은 이것을 보고 겁에 질려 나서지 못하고 낙심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물매를 가지고 그와 맞섰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 타고 있을 때 폭풍이 닥쳐왔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것처럼 무서워서 겁에 질려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은 평화롭게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반응을 보였고 어떤 사람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낙심했고, 어떤 사람은 용기를 냈습니다. 여러분 밑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만 합니다. 모든 힘과 소망이 머리이신 그분으로부터 옵니다.“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냐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썼습니다. 그 진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이제 그만 선교헌금을 보내라고 만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백지수표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호나우도보다 골을 많이 넣고 파바로티 보다 높은음을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맞설 수 있고 결코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인하여 나의 노력이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낙관론과 소망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낙관론은 발전에 대한 믿음, 즉 나의 일들이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소망은 낙관론의 모든 심리학적 장점을 다 포함하는 동시에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내가 소망 한다는 것은 오늘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고 해서 최악을 예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을 가진 자들은 최악을 대비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생명의 소망’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지배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마음은 폭풍 한 가운데서조차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종종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무심하게 취급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평소에 우리가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을 공급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를 가지고 자동차 경주 대회를 참가하려고 한다면, 값싸고 열량이 낮은 무연 휘발류를 차에 넣겠습니까? 또 만약 당신이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당신의 삶에서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경기 때까지 초콜릿만 먹는 다이어트를 하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먹는지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몸, 자녀, 심지어 애완 동물에게까지 무엇을 먹이느냐에 매우 주의합니다. 인간의 신체에 무엇을 집어넣느냐가 수백억 달러의 산업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연료가 궁극적인 성과와 안녕을 결정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종종 삶의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자원인 마음을 무심하게 방치한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무슨 생각들을 주입하느냐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삶과 장래가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파괴적인 생각, 절망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 원망하는 생각, 비상식적인 생각, 낙심하는 생각, 좋지 않는 생각 등을 집어 넣으려고 온갖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의 마음에 공급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폭풍이 치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께 계속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좋은 연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은 마르다는 무덤 속으로 들어간지 나흘이나 된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칙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식의 법칙(law of cognition)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심리학자 아처볼드 하트는 “한 사람이 생각하는 세계가 그의 존재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확신이나 두려움 중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여부는 어떤 종류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점령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태도를,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정서의 틀을, 더 나아가 당신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또한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당신의 면역 체계와 질병에 대한 취약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상태와 외부 행동의 연관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좋은 생각(정확한 인식, 건강한 정서, 건전한 욕구, 고귀한 의도)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고, 나쁜 생각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물과 환경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보고 들을 때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를 매우 세심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똑 같은 환경에 처해도,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어려움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능히 힘주시고 은혜주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해 주신다는 믿음의 생각으로 우리 삶을 견고하게 붙들고 나가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의 인식은 우리 삶을 복된 삶으로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잠28:11).

매일말씀나눔

다윗과 같이 적에게 쫒겨 혹은 세상에서 실패하여 들어간 굴 속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귀한 장소입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을 찾으러 군사 3,0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삼상24:3).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동굴 뒤쪽에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다윗을 설득하였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굴 속에서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칼로 사울을 찌르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꿈이 실현됩니다.” 엄청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있어. 더는 숨을 필요가 없어. 더는 실패도 없어 나는 왕이 될 수 있어.’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왕좌에 앉느니, 차라리 굴 속에서 살겠다는 결단이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다윗의 마지막 목표는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의 동굴은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먼저 담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1)나는 올바른 꿈을 쫓고 있는가? (2)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명과 일치하는가? (3) 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성공과 명예가 주된 목표인가? (4)굴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께 진실한 것이라면 나는 머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7-8).

굴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굴 속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그가 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둘람 굴 속에 들어가 있던 다윗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아는 것은 그 동굴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에게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굴 속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당신을 거기서 꺼내 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동굴이라도 완벽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입니다. 때로는 굴 밖으로 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도 굴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처럼,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은 그 가라앉는 느낌을 다윗보다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도 지위, 신분, 친구, 안전한 삶을 상실하셨습니다. 물론 생명의 위험에 처했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시신을 굴에 넣었습니다.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한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의 몸은 굴에서 사흘 간 머물렀지만, 그러나 굴은 영원히 그분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최고의 역사를 굴 속에서 행하신다는 사실말입니다. 굴은 하나님이 죽은 것들을 부활시키는 장소입니다. 혹 여러분은 지금 굴 속에 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당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믿고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9).

지금까지 우리는 비시 1020년 경 사울의 추격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엔게디로 도망을 간 다윗과 그 용사 600명의 이야기를 전제로 우리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엔게디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사울을 피하여 어느 동굴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굴이라는 상황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직장일 수 있으며, 실패한 결혼일 수 있고 사랑하는 자녀의 실망스러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또는 제대로 꽃 피우기도 전에 접어야만 했던 갈망일 수도 있습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한 학습후기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반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여러분의 부모와 가족은 당신에게 어떤 실패 관리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까? 2. 실패에 대해 당신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1) 수치심 (2) 두려움 (3) 더 확고한 의지 (4) 부인 (5) 타인을 비난함 (6) 기타. 이 항목 중 해당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실패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4. 현재 실패의 두려움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이 질문에 대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중고책에는 “자녀교육” 이라고 파란 볼펜으로 적혀져 있습니다.) 5. 여러분은 “주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는” 일에 얼마나 숙달되었습니까? 또한 이런 믿음을 더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만 할까요? 오늘 하루 이상의 5가지 질문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답을 적고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2-3).

오토버그 목사님은 젊을 때 스위스에서 스키를 탄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에서 리프트는 수백 미터 상공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스키를 잘 탔지만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백 미터나 리프트가 오르자 두 부부는 둘 사이에 있는 금속 막대를 움켜잡고 뱀처럼 거기에 딱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겁이 난 사모님은 목사님에게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이 막대기 보이죠? 이건 내 막대예요. 이 막대를 건드렸다가는, 오늘 당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스키 초보인 목사님은 “아래를 내려다 보지 말아요!”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정상까지 올라가는 T자형 스키리프트로 갈아타 산꼭대기에 거의 도달하였을 때 그만 두 분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은 한동안 멍하니 눈 위에 앉아 구조견이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의 스키인들이 지나가면서 독일어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인 목사님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Dumkopf!”였으며 그 의미는 “바보”였습니다. 얼마 후 다른 한 부부도 같은 지점에 떨어졌으며, 남편 이름은 한스였습니다. 이분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어서 가장 가까운 슬로프까지 엉덩이 높이로 쌓인 눈을 헤쳐 나가며 목사님 부부를 안내하고는 유의사항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밑을 보지 마세요. 경사에 놀라고 거리에 압도될 것입니다. 신참들은 내려다보고는 겁에 질려 버리죠. 이렇게 가파른 슬로프에서 앞을 똑바로 보면 말이죠….” 사실 스키를 타고 내려갈 슬로프는 각도가 90도에 가까웠습니다. 목사님은 오싹해졌습니다. 한스는 이어 말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단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밑을 내려다보지 마세요!” 그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는 목사님 인생의 제 1 수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폭풍을 맞이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득차 오싹할 것입니다만,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밑을 내려다 보지 마십시요” 오직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시18:1-2).

젊은 시절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던 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오토버그 목사님은 스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면서 지그재그 회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앞질러 지나간 후, 리프트를 타고 다시 올라가서 또 한 번 앞지르면서 그를 몇 번이나 앞지를 수 있는지 내기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에 “아! 아마 나는 지금까지 알프스에서 스키를 탔던 사람들 중 가장 흉한 포즈로 스키를 타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제대로 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절대 밑을 내려다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목사님은 산 아래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는 동안, 그는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폭풍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윽고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그를 물 위로 걷도록 지탱한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폭풍이 세차게 불어닥치는 갈릴리 호수에서 크게 출렁이는 파도를 밟고 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이 소망은 베드로를 배 밖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그를 지탱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다가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를 보고 두려움이 몰려오자 베드로는 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베드로가 구세주에게 초점을 맞추었는가, 아니면 폭풍에 초점을 맞추었는가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삶을 살려면 소망, 신뢰, 확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도하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혹은 다른 요소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잃으면 우리도 인생의 항해에서 베드로처럼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밑을 내려다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하3:19).

매일말씀나눔

1957년 인천에서 한국유리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고 최태섭 장로님(1910-1998)의 큰 사위되는 김종덕(전 제일은행 전무) 성도의 말입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유리가 이러저러한 일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최태섭 회장은 무척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화를 내도 모자랄 일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지만 그 힘든 때에도 최장로님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살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힘든 시절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들고 오는 것 중에는 못 들어줄 일도 있었으며, 예의 바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태섭 장로님은 아무리 언짢은 부탁에도 얼굴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일단 성의껏 의견을 들어주셨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이 교회를 짓는다거나 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이라 생각하시고 대부분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장인어른의 모습들을 보면서 큰 사위는 그렇게까지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비결이 무얼까 하는 강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렇게 안으로만 삭여서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조차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그런 자세는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위는 장인어른이 아침 저녁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그 비결의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태섭 장로님의 기도는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최태섭 장로님의 전기를 읽은 결론은 그분은 주님을 사랑하셨고,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없이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런 자세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선지자 엘리야는 어느 날 자신이 호렙 산에 있는 한 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어느모로 보나 매우 성공한 선지자였습니다. 850 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아합 왕 앞에서 모두 이겨 죽였으며, 3년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오도록 기도하여 하나님께 그 응답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그것도 여인의 협박에 그만 낙담하고 도망을 쳐서 호렙 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호렙 산에 있는 한 굴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실패하여 피신한 굴이야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장소 중 하나입니다. 실패의 무게에 눌릴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 돌보심의 손길을 깨달게 됩니다. 사실 실패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은, 우리가 실패의 굴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굴 속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철저히 실패해도 하나님이 나를 똑같이 가치 있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달을 때, 성공이나 실패보다 강한 사랑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사랑의 객관적인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너 나아가 주관적으로도 우리는 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군대와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18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시글락 성에 아말렉 족속들이 침입하여 불태우고, 다윗과 그 부하들의 모든 재물과 가족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다윗과 그 부하 600명은 블레셋 전투집결지인 아벡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시글락에 도착하여 그 사정을 알게된 다윗은 부하들의 동요로 매우 급하였으나 에봇을 입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는 매우 분명한 다윗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공동체를 구조하는 동시에 리더십을 회복하였습니다. 행동은 매우 강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지 못했고, 그 다음에는 변화를 일으킬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주님이 행동하라고 부르시는데도 외부의 도움이나 사람만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아기 곰 푸우>의 친구인 당나귀 ‘이요르’는 언제나 우울합니다. 아예 희망을 갖지 않음으로써 실망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윗도 이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실패는 오히려 엄청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고통을 느끼면서, 주님의 뜻을 찾아나선다면 그것은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파커 팔머가 허리케인이라고 불리우는 섬에서 한 주를 보내는 동안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교관이 지면에서 33미터 높이의 절벽 끝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매우 가느다란 밧줄을 묶고는 절벽을 현수하강(이중 자일로 암벽을 내려가는 방법)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저하면서 그냥 내려갔을 때 1미터도 안 되어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그때 교관은 몸을 절벽과 직각이 되도록 몸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뒤로 눕히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내려가다가 1미터 아래에서 또 바위에 부딪쳤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관의 충고대로 몸을 젖혀 절벽과 직각을 이루고 내려가니 정말 놀랍게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공중에서 뒤로 누워 기도하며 눈으로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발을 조금씩 움직여서 바위 표면을 하강하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절반쯤 내려가니 두 번째 교관이 밑에서 “파커 그만 멈추고 발 밑에 무엇이 있느지 봐요” 천천히 돌려보니 자신이 바위 표면에 깊이 함몰된 구멍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내려가면서 그 구멍을 피해기 위해서는 몸을 그내처럼 흔들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교관은 매우 길게 늦겨지는 시간 동안 그가 혼자 떨며 거기 매달려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외치기를 “거기서 나올 수 없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파커 팔머는 일생 동안 잊지를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실패의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디선가 획 날아와서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갈 헬리콥터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느끼는 영역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합니다. 물 위를 걷다가 실패한 베드로의 경우처럼 주님은 이미 거기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4:31-32). 

영화 《불의 전차》에서 영국의 육상 선수 헤럴드 에이브럼즈는 스코틀랜드의 챔피언 에릭 리들과 경주하여 난생 처음으로 패배하고 맙니다. 해럴드는 실패가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여자 친구 시빌은 말합니다 “해럴드, 말도 안돼요.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니라고요.” 해럴드는 신음합니다. “나는 졌어” “알아요. 나도 거기 있었어요. 정말 놀라운 경기였어요. 최고의 사람이 이겼어요….그가 앞섰고 당신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그는 정정당당하게 이겼어요.” “그래 알아. 그러나 나는 지기 위해 달리지 않아. 나는 이기기 위해 달려! 이길 수 없다면 달리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시빌은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달리지 않는다면 이길 수도 없어요.” 최선의 경주를 하고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 전력투구한 후 얻은 승리는 영광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는 아예 경주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이제껏 실패가 두려워 피해 온 상황에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미루어 온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한 권의 책을 펼쳐야 합니다. 또한 꿈꾸는 직업을 얻기 위한 시작으로 한 통의 지원서를 쓰시고,  삶에 의미 있는 성장을 일으킬 새로운 기술 습득을 위해 강좌를 수강하십시요.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각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엎드려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며, 많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일반적인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 (잠24:16).

매일말씀나눔

2019. 11. 11 – 15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됩니다. 실패로 인해 그들은 더 굳건한 끈기, 더 활발한 헌신, 더 담대한 마음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실패로 인해 철저히 패배합니다. 그들은 절망, 수치심, 다시는 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은밀하면서도 단호한 결의를 다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패로 인하여 배우고, 자신을 인식하고, 다시 시도하려는 의욕을 가다듬는 사람들은 실패 관리의 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예체능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좌절에 직면할 때 보이는 열정과 인내력 같은 특정한 정서적 자질들’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정서적 자질들이 탁월하게 나타난 성경의 인물은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이었을 때 하프를 연주하는 음악가요, 용사였습니다. 시편의 절반은 다윗이 지은 시이며, 이스라엘 중 노래를 잘 하는 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죽이고 나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었고, 이어 왕 사울의 딸 미갈을 맞아들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미움을 받아 부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무려 10년 간 정처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 도시 가드로 망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가드도 안전하지 않아 다시 유대의 한 동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은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실패도 이런 실패는 없습니다. 왕궁에서 바로 어두컴컴한 굴로 떨어졌고, 더구나 사울의 추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왔으며, 전혀 장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견디어 갔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더 나아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들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한때 다윗은 부, 권력, 명성, 친구, 안전, 빛나는 미래를 보장받았지만, 이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며 아둘람 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굴은 우리를 도울 도움, 능력, 지지자들이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곳입니다. 굴은 우리가 꿈꾸던 대로 되지 않을 때 머물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혹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굴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거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꿈꾸던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친구나 배우자, 의지하던 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건강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굴 속에 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놓치신 건가?’라는 의심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을까 나는 여기서 나갈 방도가 없는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굴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빚으실 수 있는 곳입니다. 때로 삶의 모든 버팀목을 빼앗기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때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그 약점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보이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횐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굴 속으로 전전하며 10년을 보내었으며, 요셉은 노예살이를 거쳐 굴 보다 더한 감옥에서 절망과 싸우면서 최소 3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남보다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도를 행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데도 그들이 당신의 뜻을 행하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셔서 시험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사해에 인접한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군사 3천명을 이끌고 엔게디의 들염소 바위로 가던 중 근처 굴에 들어가 뒤를 보고 있는데 바로 그 뒤에 다윗과 그 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의 창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일전에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요, 다윗이 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 역시 사울을 죽이자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의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 그 겉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부하들이 사울을 해치는 것을 금하고 사울이 안전하게 굴에서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역시 굴에서 나가 자신이 사울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옷자락만 베고 사울을 보낸 것과 같이 자신에게는 왕 사울을 죽일 의도가 전혀 없음을 외쳐서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이었고 또 다시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테스트를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와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사울을 맡기고 계속 사울을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이런 태도는 피흘림 없이 전 이스라엘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이처럼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염원하는 삶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6: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길라 산 길 가에서 진치고 잠이 든 왕 사울을 다시 한 번 살려주고는 견디다 못하여 군사 600명과 함께 블레셋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시글락을 거주지로 배정받고 1년 6개월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던 중 블레셋과 사울 왕의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블레셋 방백들의 거절로 다윗과 용사 6백명은 아벡에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글락은 불탔고 처자들과 모든 재물은 약탈당하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의 용사는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 지도자인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여 다윗이 몹시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삼상30:6). 여러분은 울 기력도 없이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까지 10년이나 생사고락을 같이한 부하들의 분노를 받아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처한 아주 위급한 상황에 이른 적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상30:6은 아주 큰 영적 인생의 큰 비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자원이 사라졌을 때, 모든 지지자와 도움이 사라졌을 때, 철저한 실패를 맛보았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약탈한 아말렉 족속을 쫓아가 쳐부수고 처자들과 함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남쪽에서 이런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왕 사울은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그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연스럽게 왕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장래와 자녀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굳게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11:9).

시편에 보면 불안할 때, 횡행하는 악에 대해 분노할 때, 원통할 때 및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탄식하고 부르짖는 구절들이 매우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때 그런 마음을 내면 깊이 묻으려고 합니다. 마치 극기하는 것처럼, 자신을 억지로 추스르지만 내면의 진실한 고통은 경험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실 실패는 종종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이 감정에 직면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셰익스피어 무덤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반적으로 파는 2미터가 아닌 5.5미터의 땅속에 묻혀져 아무도 파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가끔 자신의 실패 의식을 그처럼 파묻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일 때 자신은 반장 선거에 나가고 싶었지만, 떨어질까 무서워서 출마하지 못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대학 때도 무슨 위원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항상 우승하고 싶었던 테니스 결승전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수와 붙었지만 졌습니다. 더나아가 원하는 직장에 원서를 냈었지만 떨어진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실패의 아픔을 너무 예리하게 느꼈기 때문에 마음에 파묻었을 뿐, 거기서 뭔가를 배우지 못하고, 뒷걸음친 것을 후회스러워 하였습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원통하거나 어려움에 닥쳐 낙심될 때,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토하고 애통의 시로 기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 1-3).

매일말씀나눔

우리는 모두 신뢰와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신뢰와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 왔으며, 결국 둘 중 하나가 이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면 우리를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요소가 가장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란 무엇이겠습나까? 두려움은 위험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에 대비해 뭔가 해야 한다는 내면적인 경고입니다. 이것은 행동을 유발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부여할 정도로 충분한 불쾌감을 야기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도망가도록 혹은 싸우도록 준비시킵니다. 그 결과 상황에 따라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 파괴자의 역할을 합니다. 특히 두려움의 특별한 형태는 걱정으로 나타납니다. 걱정은 여장을 풀고 장기 숙박을 하는 두려움입니다. 걱정은 결코 스스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쫓아내야만 합니다. 미국 생리학 협회는 수많은 연구 결과를 모아 요약하다가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하였습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질 만한 수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성취합니다. 재능이 있고, 남에게 호감을 주고,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자존감의 문제와 씨름합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분명히 성공한 사람조차 종종 자기 회의와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의 태도에 따라 자존감이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정면 대응하는가, 아니면 피하고 겁내고 도망가 숨는가의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올 때 정면 대응하는 사람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내가 어려운 일을 했어. 도전을 감당했어.” 하며 밀려오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을 가 숨는 사람은 비록 결과는 좋을지라도 그 내면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겁먹고 꽁무니를 뺐어.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 쉬운 길을 택했어.” 회피는 내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진실한 칭찬을 받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이미 자신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안다면 나를 칭찬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내가 보여 준 모습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신하고 성장합니다. 만약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구는 불한당(?)이 있다면 그 사람과 대면하십시오. 어렵거나 재미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미룬 업무에 손을 대시기 바랍니다. 평소 비위를 맞추거나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기에 급급했을 사람에게 당당히 여러분의 진정한 의견을 말하십시오. 당신이 미뤄 온 어려운 결정의 책임을 떠맡으십시오. 또 당신이 회피해 온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바랍니다. 당신이 숨기려 한 죄나 인격의 흠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인정하면서, 변화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내면은 더 강해 질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만약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잠재성을 결코 실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장은 항상 위기를 수반하고 위기는 항상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에 관해 안타까운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 친구는 분명 재능이 있는 예술가요 탁월한 작가였지만 자신을 소모시키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과는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 또한 전혀 그 일에 애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출퇴근 기록부만 찍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계속 거기에 머무르고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새로운 것을 시도했는데 잘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만큼 돈을 충분히 벌 수 없다면?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면? 알고 보니 그 재능도 별 대수롭지 않다고 변명된다면? 더 나아가 그는 성공마저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될 것이라는 철통 같은 보장을 손에 넣을 때까지,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될 때까지, 그는 있던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마침내 정체될 것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 친구는 결국 그렇게 일하다가 은퇴하여, 여생 동안 최대한 편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일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존재가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가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가로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비싼 값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한편 두려움은 우리의 기쁨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야 환희를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굴복하면 기쁨이 소멸됩니다. 늘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한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서 살면 그 두려움은 지금 나의 삶을 빼앗아 갈 힘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으로 신뢰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이 열 살되었을 때를 적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열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패러세일링에 갔습니다. 보트를 운전하는 사람은 120, 180, 240 미터까지 올려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 위로 얼마나 높이 날고 싶으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가격이 비싸서 목사님은 120미터 높이로 조종해 달라고 하였지만, 아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아들이 두려움에서 자유롭기를 원해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몇 분 동안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습니다. “ 240미터까지 올라가겠어요. 처음에는 무섭겠지만 비행 시간은 몇 분밖에 안될 것이고 그 경험은 영원히 제 것이니까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때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경험은 영원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것을 잘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0-22).

오토버그 목사님의 딸이 어릴 때 별명은 ‘메이메이’였습니다. 그녀가 매우 어릴 적에 툭하면 하는 말은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였다고 합니다. 걸음마를 떼려 하다가 넘어져서 부모가 다가와 도와주려 하면, 그 아이는 손을 흘들며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고, 조금 더 자라서 자기의 작은 자전거를 타다가 부딪쳐 넘어졌을 때, 부모가 도와주려 하면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실패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는 걸으려다가 넘어져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같으니! 나는 너무 어리석고 서툴렀어. 난 걸을 수 없나 봐. 내가 넘어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그런 창피한 경험을 하느니 평생 기어다니겠어.” 아이는 걸을 때까지 불안정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참아 냅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넘어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에서 걷기를 배우느니 차라리 움직이길 거부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사셨다고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분은 122살에 돌아가신 프랑스의 잔 루이즈 칼망(1875-1997) 할머니이십니다. 그러나 이분은 100살이 될 때 펜싱을 비로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그의 믿음만큼 불안하였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는 모험을 하기 위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하였다고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먼저 구해주고 온유하게 문제를 짚어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런 구원과 가벼운 책망은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와,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랑 속에는 진리와 배려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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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요셉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읽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얼굴에 드러냅니다. 친구, 가족, 이웃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지 주목하고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야만 합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자기 몰두는 자기 파괴와 외로움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동료 죄수들에 대한 배려를 질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은 심란한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도움을 줄 순간을 포착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데 내게 고하소서.” 술 맡은 관원이 포도 나무와 포도 송이에 관한 꿈을 이야기 하자 요셉은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할 것을 알려 줍니다. 이에 반해 떡 굽는 관원의 꿈 이야기를 듣자 요셉은 사흘 안에 사형 집행 당해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자신의 석방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 석방이 됬지만 이내 요셉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셉은 실망을 씹으면서 2년을 더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도대체 요셉의 고난은 언제 끝날 것으로 생각됩니까?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 하염없는 인내는 우리의 완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보다 훨씬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나간 뒤 기억함을 받지 못하고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종종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요셉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중요한 대목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은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최고의 날들, 즉 이집트의 국무 총리, 리더로서의 영향력, 아버지와의 재회, 형들과의 화해는 고난의 폭풍 후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그런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통상 신자들이 괴로워 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체 안’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타인이 나의 인격을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기하는 형들도, 어리석은 아버지도,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도, 잘 잊어버리는 술 관원이나 거만한 파라오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누림을 가질 것이고, 현 생애에서는 어느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든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항상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나쁜 소식이 결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과 전혀 다름은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 손에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 하나 풀어가시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일까요? “더 많이 사랑하라”는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핵심일 수 있지만, 가장 자주 하신 명령은 아닙니다. “교만하지 말라”나 “겸손하라”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명령보다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명령, 하나님이 가장 빈번히 반복하시는 지시는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나를 신뢰하라,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사실 두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의 징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른 어떤 말씀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적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이유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항상 필요합니다. 로이드 오길비는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총 366번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1년에 365일에서 윤년까지 위한 개수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범브린트 목사님 역시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꼭 366번 성경에 나오는 것을 투옥 초기에 발견하고 그 힘으로 15년 간의 루마니아 감옥 생활을 견디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만,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시고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을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세 살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합니다. “애야, 펄쩍 뛰어. 겁내지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합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수영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밀려들어 옵니다. 그러나 아빠가 물속에 계십니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하였습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입니다. 신뢰는 말합니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합니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 가에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해야만 합니다. 결정하려면 두려움이나 자신감 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내면에는 작은 의지의 조각이 있고, 그것으로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만일 아이가 뛰어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물이 덜 무서워질 것입니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다음번에도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신뢰가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적혀 있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이야기에서 두려움(무서움)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각 한 번씩 등장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역시 주어집니다. 각 경우를 생각해 보면서 두려움의 본질을 파헤쳐 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두려움은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이 폭풍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오해한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에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데일 브루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기를 내거라! 내가 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을 알리시는 것(It’s me)이 아니다. ‘스스로 계신(I AM)’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계시인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너를 사랑하였은즉,” 또 다른 두려움은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든 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들어 걷기 시작하였을 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인식하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상황의 주관자시라는 확신을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물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걱정과 염려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가장 빨리 침몰시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훼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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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1 – 25

죄는 매우 끈질긴 추격자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요셉처럼 죄에서부터 도망가서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굳게 섰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고용주에게 충실했고 유혹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이겨 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보상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때때로 보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손에 들고 서 있으며, 그것은 요셉을 불리하게 만든 증거로 전환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고소를 듣고 분노했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쁜 소식들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 가운데 익숙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서 감옥행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쪽을 선택하였지, 모든 것을 갖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거기에 없다면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을 400년 뒤 모세가 본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성경을 보면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들은 호렙 산 꼭대기에서 혼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도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나 사도 바울의 경우 같이 어쩌다 바다 한가운데서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험한 폭풍과 사악한 세력의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고양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하고 두려워서 낮아졌을 때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폭풍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워 할 때 오시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우면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폭풍치던 날 밤 갈릴리 호수에서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찾아오신 것과 같이, 감옥이라는 두려움의 장소에 떨어진 요셉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되었고 죄수들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되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요셉이 성실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이 요셉에게 맡긴 모든 일이 제대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감옥에는 많은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간수장은 책임을 져야만 하나, 유독 요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아무런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고 평화롭게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사 우리 모든 일에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그러던 중 요셉이 관리하던 감옥에 떡 굽는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이 죄수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시중들던 요셉이 어느 날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들에게 어떤 이유인지를 물었습니다. 사실 요셉과 이들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왕의 죄수를 다루는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망스러운 사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실망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계가 좁아지고 오직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이 무감각하게 굳어지고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만 이렇게 어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목하고, 안부를 묻고,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가능합니다. 이어령 선생의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7-18)

박효진 장로가 쓴 ‘하나님이 고치질 못할 사람은 없다’에는 사형수들에 관해서도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개화된 오늘날도 교도관들이 교도소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 천년 전 이집트의 감옥에서 간수장의 업무를 위임받은 죄수 요셉은 일이 막중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힌 일이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해서 속을 삭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타인의 안녕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만큼 요셉의 신앙이 성숙해 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넘어지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산꼭대기입니다. 혜택받고 부러움을 사는 위치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 지고, 자신의 그 자리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는 경향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풍을 겪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노예로, 죄수로 산 것은 우연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은 다른 것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거나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공감능력 없이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들고 일어난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의 말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요?”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아요?” 결국 마리 앙트와네뜨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다 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

스코트 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며 문제의 고통도 환영하는 법을 배운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결코 형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역경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채색 옷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엄청난 꿈들과 높은 위상이 형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감옥 안에서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요셉에게 긍휼의 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범죄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의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사정을 배려 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각박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정의와 사랑이 균형잡혀야 하며, 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경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은총 중의 하나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요셉은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와 죄인의 처지에 놓이면서,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총리에 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능력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매일말씀나눔

채색 옷을 입음으로써 형들의 질투를 사고 있던 요셉은 드디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의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꿈들은 놀라운 요셉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고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불러서 두 번이나 자신의 꿈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처음 꿈은 열 두명의 형제들이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이 묶은 곡식 단은 일어서고 다른 모든 곡식 단들은 요셉이 묶은 곡식 단 앞에 절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꿈은 더욱 가관으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형들에게 잡혀 은 20량에 노예로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요셉은 폭풍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돈 한 푼 없으며, 아무 힘도 없으며,  친구도 집도 없고,. 삶은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고 우리의 인격은 단련됩니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할 때에도 배 밖으로 나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평온할 때는 많지 않습니다. 조만간 결혼, 일, 사역, 재정, 건강에 폭풍이 엄습합니다. 폭풍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폭풍을 잘 이겨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질들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5:7-9).”

폭풍을 이기는 사람의 주된 특징은 스트레스가 가득한 환경을 잘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이겨 낸 전쟁 포로나 인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식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행동은 엄청난 제한을 받은 대신, 무엇이든 아직 남아 있는 통제력의 가능성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이제 요셉도 죄수입니다. 집을 멀리 떠나 아버지와 이별하고,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의 채색 옷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의 채색 옷과 그것이 상징하던 삶은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는 그 한가운데서,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자유를 잃었지만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놀랄 만한 주도력과 자율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동적인 자세를 거부한 포로와 인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은 먼저 식단을 통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또한 산헤드린 앞에 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대한 함구령을 석방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되물었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어떻하였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무력한 포로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4-26).

노예의 삶으로 떨어진 요셉의 상황은 결코 그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맡은 일에 부지런히 전념하였습니다.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발전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은, 단지 일꾼으로서 밭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집 안에서 일하도록 승진되었습니다. 실무를 경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요셉은 보디발의 보좌관으로 승진합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리고 나서 보디발은 곧 그를 가정 총무로 명합니다. 요셉은 전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완전히 신임하여 장부 검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고작해야 “오늘 저녁은 된장찌게인가 아니면 김치찌게인가?” 하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써 요셉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일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삶의 자세 때문에 훗날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어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역할, 즉 가족과 세상을 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6-7).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두는 것은 인내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달리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쉽습니다. 그 자리에 머무르며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것보다 쿵쾅거리며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것이 쉽습니다.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차라리 그만두는 방법이 항상 달콤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어. 벗어나고 싶어. 이혼하기도 힘드니 그냥 이렇게 남남처럼 살지 뭐. 더는 노력하지 않을 거야.” 이때 나오는 대표적인 행동이 졸혼 혹은 별거입니다. “이 일은 내가 꿈꿔 왔던 것이 아니야. 더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하려 했다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 떠나겠어.” 한 사람이 앤서니라는 사막의 교부에게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부는 대답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고 당신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말라.” 어려움을 만나 포기하지 않고 통제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도 충성하겠다고 결정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몰아치는 바람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걸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듯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요셉은 이방인이자 노예였지만, 인내하여 드디어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른 종류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제 또 다른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유혹이라는 무서운 힘이었습니다. 요셉은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 보디발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끈질겼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결국 기회를 엿보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 죄악으로 이끌었을 때 요셉은 그 옷을 벗어버린 뒤 도망하여 그 집을 나갔습니다. 죄는 자신이 대상자를 이길 때까지 끈떡지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도망가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친구 중 한 분이 회사의 중역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출장을 갔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력했던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호텔 로비에 앉아 실패를 자책하며 외롭게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보디발의 아내’가 접근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유혹이 갑자기 저항할 수 없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갔어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실패를 겪은 사람은 요셉이 당한 유혹, 삶이 계획한 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 다가오는 유혹을 압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평상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습작전과 같은 죄의 창날은 평소에 기도와 경건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여지없이 가슴이 뚫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