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 1. 21 – 25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네 번째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신 모습입니다. 그분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고”(히5: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복수하시는 대신 그분은 자신과 자신의 사정을 온 인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맡기셨고(벧전2:23),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불순종하라는 마귀의 무모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참고 마4:1-11). 이렇듯 그분의 삶과 사역은 시종일관 신뢰와 순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신약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고, 원수를 사랑하셨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셨습니다. 겸손, 희생적인 섬김, 보복 없는 용서, 믿음과 순종,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나사렛 예수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니 이제 그것을 반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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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4 – 18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분과 닮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예로서 이번 주일 설교에 언급한 크리스웰 목사님의 목회 경험담을 들 수 있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달라스 first Baptist church(제일침례교회) 에서 오랜 동안 목회를 하셨습니다. 어느날 이 분이 궁궐같이 호화로운 집을 가진 집사님의 집을 방문 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의 집 서재에서 어떤 그림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집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분은 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께서 내 아주 어린 시절 돌아가셔서 나는 결코 그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주님을 먼저 뵈옵고 나서 제일 먼저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기를 원합니다.” 이때 크리스웰 목사님은 회고하기를, “저것이 당신의 어머니입니까? 저것은 단지 종이와 잉크로 그려진 그림일 뿐입니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그림은 그 집사님의 어머니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날인가는 천국에 갔을 때  그 어머니의 얼굴을 직접보고 함께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꿈꾸며 고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집사님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고 감사하듯이 정확히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것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하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과의 교제를 실제로 나누면서, 언젠가는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표상을 우리는 마음에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야만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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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최초의 회심과 지속적인 성화와 최후의 영화 가운데 무엇을 생각하든 부각되는 주제는 동일합니다. 각 단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혹은 그분의 ‘형상’이 언급됩니다. 완성된 구원이란 바로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들려올 때가 많은데 , 이 내용도 아이들의 노래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요. 사랑하는 나의 예수님 나 날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라고 싶어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중요한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또한 이를 지켜보는 세상이 보기 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말하고 그분을 노래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그토록 우리의 입을 떠나지 않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볼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장과 행위 사이의 괴리, 우리가 말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행동으로 보이는 그리스도 사이의 널따란 간격만큼 기독교의 증언을 방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보다 먼저 우리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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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도르프 백작은 열아홉 살 때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였습니다. 18세기의 모든 귀족들이 그랬듯이 대학을 갓 졸업한 그도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뒤셀도르프에 있는 어느 화랑에 갔다가 17세기 초의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에 무리 앞에 도로 내놓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자주색 옷을 걸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선이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의 위아래에 라틴어로 쓰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꼭 그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이렇게 했거늘 너 나를 위하여 무엇하고 있느냐?” A.J. 루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날 거기서 젊은 백작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자신도 ‘그 고난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평생 그분을 섬기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표는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고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진젠도르프 그리고 지난 세월 수많은 예배자들이 그러했듯이 2019년을 맞이하는 우리 역시 이 그림 앞에 서서, 주님이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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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4 – 28

이제 내일이면 2018년도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그 날에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그리고 자신들이 늘 경배하던 그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 겸손과 신비를 하늘의 존재들은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날 밤에 한 천사가 베들레헴의 인접 지역에 있는 들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목자들이 밤에 양을 치고 있었는데 그 들에 있는 양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장소에서 기르는 양들과는 달리 그 양들은 성전 제사를 위한 양들로서, 만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자 홀연히 천군들이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오셨던 것입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예수님 때문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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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7 – 21

선교사 헨리 마틴은 1805년에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으나 후에 이란으로 옮겨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훌륭한 학자였던 그는 힌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는데, 그 두 언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헌신은 어찌나 강렬하고 뜨거웠던지 예수님을 욕하는 말을 들으면 자신을 찌르는 비수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1년 전쯤에 시라즈에서 누군가 그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세자가 전투에서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을 하도 많이 죽여서 그리스도가 무함마드의 옷자락을 붙들고 중단을 애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함마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니 그것은 어이없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 헨리 마틴은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그 말이 내 영혼을 쩔렀다. 예수님이 영광을받지 못하신다면 나는 견딜 수 없다. 그분이 늘 그렇게 욕을 입는다면 그것은 내게 지옥과 같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이 느낀 부끄러움과 놀람이 살아 생전에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정도로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에 동화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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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0 – 14

우리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있고,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명하시는 분의 독특성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어부 시절의 시몬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뿌옇게 먼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호수에서 어부로동업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밤새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호반에서 맥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빌려 띄우고 그것을 강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시몬은 밤새 노력했지만 잡지 못하였다고 항변하였는데 이는 어부로서 아버지에게 배우고 고된 경험으로 다져온 전문 지식으로 그분의 제안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하신 분은 다른 동료가 아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다른 배를 불러야 했고, 결국 두 배 모두 고기의 무게로 가라앉기 직전이 되었습니다(눅5:1-11).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다른 모든 순종과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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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3 – 7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말을 옮긴 것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말 그대로 그분을 위해 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일한 열망은 우리의 기도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조지 허버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이든 ‘그리스도를 위해’ 하면 그 행동의 색조가 선명해지고 밝아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 의도입니다. 사실 행동의 선하고 악함, 친절하고 잔인함, 아름답고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배후의 의도 즉 동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렇게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넘어 이면에 숨은 생각과 동기를 보신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고,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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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6 – 3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섬긴 삶이라면 고 테레사 수녀보다 더 확실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191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열두 살 때 수녀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얻고 열일곱 살에 인도로 떠났습니다.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교장이 되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너머에는 지저분한 모티질 빈민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마음 깊이 걸려서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948년에 빈자 중의 빈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인도인으로 귀화한 그녀는 1950년에 ‘자비의 선교사들’이라는 수도원을 따로 세웠습니다. “흰 사리를 걸친 가냘픈 단신의 여인”, “상시 가동 중인 이 뜨거운 발전기”는 그때부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 옷가지를, 병든 자에게 약을, 나환자들과 난민들에게 정성 어린 간호를,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과 교육을 죽어가는 이들에게 품위와 위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25년도 채 못 되어 1,000명 가까운 수녀들과 185명의 수사들이 그녀의 수도회에 들어가 베트남, 예멘, 예루살렘, 호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물론 막대한 기부금의 사용이 지혜롭지 못한 점, 독재자와 금융사기자를 옹호한 적이 있고, 성모 마리아를 예수님과 공동 구원자로 세우려고 시도하는 등 테레사 수녀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테레사 수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캘커타 모원 (母院)의 거실에 걸린 액자에 그녀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수녀는 가난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일이나 사람이 혐오감을 줄수록 수녀는 그렇게 흉하게 위장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더 큰 믿음과 사랑과 즐거운 헌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데스몬드 도이그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첫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죽어가는 빈자들을 섬기는 집인 카리가트의 니르말 호리데이는 칼리 사원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고, 그녀는 방금 데려온 한 죽어가는 남자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더기를 벗기자 그는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섬뜩한 산송장이었다.” 그때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했던가? 그녀는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벵골 말로 그에게 다정히 말하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조용히 그를 씻기기 시작했다.” 크리스토 다스라는 젊은 인도인이 그녀를 거들다가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다 씻긴 후에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씻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씻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것을 테레사 수녀에게 배운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내 손이 닿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이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집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빵 한 조각을 건넬 때마다 나는 그분을 대접한다.” 테레사 수녀와 달리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셨으나 세상에 계셨을 때 집없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오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8)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실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놀라운 원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바른 관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족 안에서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우리도 그들이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고용주이든 피고용인이든 양심적으로 처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하늘의 상전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 부르셨기에 우리는 그분께 드리고 싶은 똑 같은 관심을 그들에게 베풀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서 최대 관건은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Lord of all )이십니다(행10:3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석에 밀쳐두거나 벽장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일요일이나 교회나 성경이나 삶의 종교적인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매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 그분을 영접해야 하며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실체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요16:14) 것이 성령님의 본연의 사역인 까닭입니다. 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 내 삶과 일을 그분께 가져가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임재가 서서히 우리 삶 전체에 배어들고, 우리는 아무 때나 그분께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또한 배후에서 그분을 보며 그렇게 그분을 보면서, 그들을 그분을 대하듯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늦게 하나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셋째 아들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다하여 전심으로 사랑하여야만 하고 이웃은 우리 자신과 같은 정도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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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19 – 23

새뮤얼 채드윅이 구두를 닦는 일을 시작으로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듯 하는 버릇이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방을 치울 때도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집에 오실 것처럼, 그분께 깔끔한 방을 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에 관한 실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는 정식 교인이 되려고 신청하면 그 교회 목사를 비롯한 모든 집사 및 장로와 인터뷰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때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녀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할 때도 우리는 마치 내가 부엌의 마르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17세기 초의 시인이자 목사인 조지 허버트는 아주 멋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모든 것을 하라는 뜻을 찬송가로 나타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 범사에 주를 보게 하시고, 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해 하게 하소서/ 유리를 보는 자의 눈 유리에 머물 수도 있으나 원한다면 그 너머로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종에게 허드렛일도 신성해지고 주 말씀을 위해서라면 청소도 즐거워집니다./ 무엇이든 금으로 바꾸는 신기한 돌이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것마다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이 찬송시를 묵상하시면서 오늘 하루 주님을 섬기듯이 모든 것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편 1-2).

가정과 직장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과 일터보다 더 넓은 책임을 주십니다. 우리 중에 사회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아가 어려움에 처한 바깥세상에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섬김이며, 지금까지 살펴본 동일한 원리가 우리 섬김의 길잡이가 되고 그 품위를 높여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양과 염소를 가르는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이 묘사한 최후의 심판을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느날 ‘인자가’ 친히 천사들을 대동하고 영광 중에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왕과 심판자로 앉으실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그분 앞에 모일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모든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집결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활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가정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마치 목자가 뒤섞인 가축 떼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서로 갈라 의인들은 자신의 오른 편에 두고 불의한 자들은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을 향해서는 ‘나아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라고 부르시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떠나’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제대로된 교리를 고백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4).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본문이 근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심판자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근거로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또는 가장 비천한) 자”를 향한 그들의 행동(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의인들은 그분이 배고플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원이나 옥에 있을 때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분이 설명하신 대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모습을 보았으나 어려움에 처한 그분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장 비천한 형제 하나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한 일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 즉 태만과 괘씸한 무관심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어려움 속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에 대해 그것은 너무나 좁은 범위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인간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건 그 판단은 주님 손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고(이신칭의:엡2:8-9))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 어째서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보고 의인 여부를 판단하신 뒤 영벌과 영생의 근거를 삼으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얻는 ‘칭의 – 의롭다고 칭하심을 받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나 ‘심판’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냐를 가늠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내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공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선행을 통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약2:18,20)이라고 말했습니다. 심판 날은 공적인 사건이므로 반드시 공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긍휼의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누차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컨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행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믿음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