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7. 2 –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행하신 구속의 일을 하나님은 ‘단번에hapax’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해 히브리서 저자가 즐겨 쓴 단어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유다서에도 같은 표현을 써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를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리신 것도 단번에 된 일이고,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단번에 된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정도나 그분과의 관계 수준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이해나 관계를 가능케 하고자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예수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와 구속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하신 것 이외에 더 계시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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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18 – 22

히브리서 1장 1절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자신을 알려주신 그 계시는 형태가 다양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부분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진적인 계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즉 하나님은 단계별로 조금씩 자신을 계시해 오셨고, 각각의 새로운 단계는 그 이전의 단계들을 기초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런 드라마의 대단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계시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은 이런 완성을 가져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들과 수식이 그분께 주어지는데, 우주와 관련해서는 ‘만유의 상속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2절) 지금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3절) 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가 처음부터 대행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어느 날 정당한 유업으로 그분께 귀속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하나님과 관련해서 그분은 우선 ‘아들’로 불리웁니다. 그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높은 이름이요 그들 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입니다(히1:4).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3절)이십니다. 둘 다 강력한 수사적인 표현으로, 한편으로는 햇빛이라는 외부 세상에서 또 한편으로는 문서와 밀랍과 도장이라는 내부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단어와 이미지로 표현 가능한 한도 내에서, 두 가지 모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태양에서 계속 비추는 햇빛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니케아 신경에는 이것이 ‘빛에서 난 빛’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밀랍에 찍힌 도장처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이 두가지 표현은 서로 합해져 의미를 보완해줍니다. 즉 햇빛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을 강조하는 반면, 밀랍에 찍힌 도장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1장 3절에서는 아들이 그 존재에서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동시에 그 인격에서는 아버지와 구별된 자(‘그 본체의 형상’)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취하시고(히2:14) 우리처럼 고난과 유혹을 경험하시고(2:10,18)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히2:9,14) 분이시지만, 바로 이분이 영광스럽고 유일무이하신 분, 곧 아들, 광채, 아버지의 형상, 창조주, 만물을 붙드시는 분,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친숙한 인간의 정황 안에서 그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도 되시기에 우리는 동시에 그분의 인성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본체와 목적을 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그분은 우리에게도 같은 권한을 주시며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그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직접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최고 목표로 ‘구하고’ 그 나라의 성장을 최고선으로 삼아 거기에 우리의 삶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을 봅니다. 구약의 권위에 겸손히 복종하시고, 구약의 근본 원리들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시며 구약과 모순되거나 그것을 혼잡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전통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또 우리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존중하시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우리는 죽음의 실체 앞에 분개하여 ‘호령’하시고, 귀신들을 명하여 쫓아내시고, 위선자들에게 분노와 경고를 발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자신에 대해 기록된 고난의 길을 비껴가지 않으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를 맛보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즉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천하의 권세를 주장하시며 제자들을 향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명하시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분이 행하신 더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알아보게 되는데, 이는 그분의 태도와 행동 가르침 그리고 표적들이 하늘 아버지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님은 가르치기 위해서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구속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죄와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두 가지 일에서 모두 대행자이며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히1:3)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빌려왔습니다. 사실 히브리서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신 그분은 아론보다 크십니다. 그 제물은 황소도 아니고 염소도 아니고 어린 양도 아니고 바로 그분 자신이었습니다.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올 실체, 즉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리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희생양이라는 상징을 담대하게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히9:28)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히10:4),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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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1 – 15

희열이나 고통,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 선이나 사랑의 순간에 곁으로 지나가시는 그분을 잠깐 보기만 해도 우리는 충만한 초월적 실체에 전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일종의 중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영광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솜씨를 통해, 고결함과 타락성이 공존하는 인간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갖가지 반응을 통해 하나님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보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가리켜 보이는 높이와 깊이는 우리가 오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동시에 좀 더 인간적인 중보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짐작한 실체가 아무리 깊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무한한 타자이신 까닭입니다. 이 타자가 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 한 번 오신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을 때였습니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은 인간의 형체를 입은 참된 ‘영광’, 인격적 존재 본연의 광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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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유대교의 기성 체제를 주저하지 않고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순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들(장로들의 유전)을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 (막 7:1-13). 또한 주님은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 데도 거침없으셨으며,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던 계층들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허용되지 않던 여인들과의 공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이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였고, 제자들 역시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 어린아이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을 던진 나병환자를 만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관습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마음과 양심을 매어 두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비평하는 데 있어서는 급진적으로 되심으로 보수와 진보를 독특하게 결합시키셨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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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읽기

2018. 5. 21 -25

지성과 사랑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성과 감정 모두 본래적 인간의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도 아니며 메마른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따듯하고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우리에게 열리게 되면 우리는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분노하거나 사랑하거나 경배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부활절 오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를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자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그 두 제자는 그날 오후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느낌을 마음이 뜨거워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뜨겁게 만들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시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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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예배

2018. 5. 14-18

리처드 닉슨이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 자신이 1960년 존 F. 케네디와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배한 것이 케네디가 텔레비전에서 훨씬 좋은 이미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샬 맥루한을 불러 자문을 구했더니 그는 “선거란 이슈가 아니라 이미지 싸움”이라고 강조하여 칙칙한 변호사 이미지를 따뜻하고 활력있는 이미지로 바꾸도록 하였고 그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책임을 포기한 채 주요 정책에 대한 토론보다 자신의 느낌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고 투표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지성주의는 교회 안에서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합리적인 계시를 주신 하나님은 이성적인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행동하지 말고 지혜에 있어서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시32:9). 사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늘 지혜와 모든 총명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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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7 -11

오늘부터는 “균형잡힌 기독교 Balanced Christianity”(존 스토트)를 가지고 묵상해 보는 기회들을 갖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권위 있는 가르침과 대속적 죽음, 부활의 역사성과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믿으며, 성경이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으로 기록된 것과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로 거듭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세상을 섬기도록 보냄 받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리와 다른 위대한 성경적 교리들 위에 견고히 굳게 그리고 함께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목회 사역, 침례의 자격, 교회와 국가의 관계, 은사의 수용 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경건하면서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문제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디아포라, 즉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 성경에서 얻은 확신을 관철시키고 싶겠지만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각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리처드 박스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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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30 -5.4

어떤 잘 알려진 목사님은 젊었을 때 큰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자주 야단치고 때로는 때렸다고 합니다. 한 번은 화가 나서 큰 아이의 따귀를 때렸는데 얼굴에 손자국이 난 상태로 아파트를 나가다가 여러 교회분들을 만나게 되어 그분들이 “네 얼굴에 왜 손자국이 난 것이냐? 누가 때렸니?” 하면 “아버지가 때렸어요!” 하고 다님으로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변했다고 한 말이 30년 전인데 그 후 그 큰 아들은 장성함에 따라 큰 사고를 치고 가정과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가정 예배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모두 잘 키워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 부부가 자녀들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지만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등한히 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 상태에서 야단치며 매질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대입니다. 징계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훈계가 따라야 합니다. 훈계가 있을 때 징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아니할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는데, 당연히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먼저 서 있어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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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22 – 26

오늘부터 부부 사이의 문제를 정리하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 오륜이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오륜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붕우유신, 장유유서이며 그 중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친애는 본능적이고 천성적인 사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일반계시에 터잡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녀에 대하여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 하셨고, 부모에 대하여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기준인 임금이나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유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기준이 됨으로 보다 분명하고 차원높은 실천 강령을 주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실현되려면 먼저 부모는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는 남편에게 하기를 주께 하듯 하는 어머니이며,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셔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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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16-20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솔로몬은 여기서 자신의 아내를 두가지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잠근 동산’이고 또 하나는 ‘봉한 샘’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남편에게 아내의 즐거움들을 열어 채워주라는 호소입니다. 성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여인을 우물 또는 샘으로 표현한 고전이 더러 있습니다. 우물은 샘과 함께 근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기쁨의 근원이요, 행복의 근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뿌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내를 샘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샘이 없다면 갈증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갈증이 극도에 달하면 죽게 됩니다. 가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마땅히 시원한 생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아내가 제대로 구실을 못하면 그 가정은 삭막한 사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가 서로에게 있어서 항상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부부의 행복을 지키는 열쇠, 곧 부부의 황금률은 무엇이겠습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그것을 3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1) 마음을 지키라 (2) 서로 헌신하라 (3) 서로 만족하라. 이런 말씀을 실천하기 쉽지 않아 보이며, 어느 가정에서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은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우리는 배우고 깨달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인간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기를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혹은 남편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난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옥목사님이 말씀하신 부부의 황금률 3가지 중 첫 번째는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서 항상 마음을 곧게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결혼식의 서약 시간에 주례자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서약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한 부부는 서로가 완전히 내맡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향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배우자에게만 쏟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 의식입니다. 그런즉 남녀가 결혼을 하면 운명공동체가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관계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믿을 수 있는 관계 또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부 관계는 감정에 근거를 둔 사랑일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이 일생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특히 남자들의 마음이 해이하여지기 쉽습니다. 자녀들을 다 키운 부부의 경우 늘상 똑 같은 상황에 결혼 생활을 권태롭게 여길 수 있습니다. 50이 넘은 부부의 경우 심지어 자녀들을 키우는 공동의 책임이 끝났다고 느껴 남편의 그늘에서 혹은 아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여 이혼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것이 요사이 현실입니다. 이때 “나는 내 아내(혹은 남편)에게만 마음을 주기로 서약했다. 그런데 혹시나 마음이 흐트러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을 포함하여 우리 각 자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옥목사님의 황금률 두 번째는 서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결혼 생활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과 결혼을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는 희생이 따르니까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려면 서로를 위해 도와주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인격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을 볼 때 인격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바로 이때 남편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인격을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 한 그 아내의 인격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들을 생각할 때 다른 남편들에 비해 어딘가 뒤떨어지고 마음에 존경이 가지 않는 약점이 눈에 보일지 모릅니다. 바로 이때가 아내들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 희생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됩니다. 부부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모난 성격이 아내의 덕을 통하여 깎여야 하며, 아내의 비뚤어진 성격이 남편의 건전한 성격을 통하여 점차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가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부가 서로의 인격성숙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해 주지 못한다면 그 부부는 노년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존 포웰이라는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만들어가는 것이며 이런 것이 부부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옥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세 번째 부부의 황금률은 서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완전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성숙하고 훈련될 때 비로소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 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그만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요, 훈련받는 것이요, 질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 투성이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부부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가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주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검토 받을 때 주님이 부부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정에 모시고 사는 한 그 가정의 행복은 유지될 수 있지만, 가정의 주인이 주님이 되지 아나히는 부부는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에 언제든지 서로를 비난하고, 보이는 흠을 기회로 삼아 불만족하려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된 부부나 가정은 항상 가정의 주인되신 주님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서로 받아 주는 삶을 영위함으로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우리 가운데 아직도 이기주의적 신앙, 이기주의적 결혼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그것을 발견하여 도와주십시오.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아내가 밑거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부부는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가 있으며 서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아내 혹은 남편을 위해 도와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런 가운데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이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