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 2. 18 – 22

복음 전도를 순전히 감정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복음 전도의 평판이 나빠진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음 전도에 충실하려면, 사람들의 감정에는 물론 지성을 통하여 그들의 양심과 의지에도 호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지성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거듭해서, 사도들이 전도 집회를 가진 후에 많은 사람들이 “설득되었다”(개역개정은 “권함”, “권면”으로 번역됨. 행17:4; 18:4 등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 끝 무렵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만일 대학교에서 전도 집회를 연다면, 100명이 회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지, 100명이 설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논하였으며, 구약 성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추론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성경적 논증을 활용하는 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증과 성령님을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됨을 명심하고, 지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 3:15).

성령님은 성경적 논법을 사용하시며,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때때로 한 장소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습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에베소에서 생긴 일입니다(사도행전 19장). 에베소에 도착한 지 석 달 후에 바울은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짐작컨대 그곳은 세상의 일반적인 회관이었을 것임)을 빌려 거기서 2년 동안 매일 강의하였습니다. 어떤 사본에 따르면, 바울이 제5시부터 제10시까지, 즉 오전 11시부터 오후4시까지, 매일 5시간 강의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강의는 매일 5시간씩 2년에 걸쳐 행해진 것으로, 만약 바울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다면 복음을 논하는 데 3,120시간을 투자한 셈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장날에 각기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에베소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을 보러, 어떤 사람은 정치가와 면담하러, 또 어떤 사람은 친척을 만나러 그곳에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울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바울은 매일 5시간씩 강의를 했고, 사람들은 두란노 서원에 들러 회심했으며, 거듭나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여기서 아시아는 터키 북쪽에 있는 로마의 아시아 주를 말하지 현재의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님).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8-10).

지성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우리의 증거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의 세 가지 논거는 우리의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지성의 영역에서도 주님이십니까? 이를 위해 우리의 영적 순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과 주는 단순히 그들이 현실 세계에 증거해야 하는 어떤 호칭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들의 선생이며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다. 나는 너희들의 주이며 너희는 나의 종들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생이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불복종할 자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켰습니까? 여러분 여전히 그분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지성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권위로 구약을 인준하셨고, 또 사도들을 지명함으로써 신약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복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우리가 지적으로 회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지적으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감정에 관해서도 같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통합된 그리스도인은 반지성적이지도, 반감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고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으며,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깊은 감정도 주셨습니다. 지성의 올바른 활용을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메마르고 무미건조하며 냉랭한, 비인간적인 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추호도 그러한 지성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남자답게 처신하라는 철학을 가진 영국 공립학교에서 자라나 감정을 억제하도록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다닐 동안 회심하였고 그 뒤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님이 두 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 속에 순전한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감상주의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닌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성경적 신앙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즉 우리의 인간성 양쪽 부분을 모두 충족시키는 신앙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과 마찬가지로 감정 역시 타락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전적 부패 교리를 믿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전적 부패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모든 죄인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사람 그 누구도 이렇게 배운 적이 없으며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악할 대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 부패가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부패의 전체성은 부패성의 정도를 언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패성의 범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박사는 이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그는“전적 부패란 모든 사람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해야 할 만큼 선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타락이 우리의 모든 부분,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양심, 우리의 성,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모든 부분은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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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1 – 15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 – 1630)는 우주를 연구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이에게는 더욱 합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을 쫓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은 바로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의사소통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읽는 것입니다. 과학적 조사와 성경 연구 모두에서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 우리의 합리성의 중요한 일부인 인간성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지성의 적절한 활용이야말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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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2. 7-8

예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주의 기독교계에 생겨난 심상치 않은 동향들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도 심상치 않은 조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호주 멜버른 대학 출신의 한 학생이 스웨덴에서 개최된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수련회장에서 그는 조국에 학생 소요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학생은 당황하여 손을 쥐어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주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걸까?” 이 학생은 지식 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조국에 돌아가 소요에 가담해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에 소요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야만 합니다. 성찰 없이 행동에 헌신하는 것은 광신주의이며, 헌신 없는 성찰은 모든 행동을 마비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찰과 헌신 둘 다이지, 성찰 없는 헌신이나 헌신 없는 성찰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20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잘 묵상해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같은 구절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금하는 동시에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입니다. 악, 사악함 등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처럼 무지하고 순결하고 미숙해야만 하나, 지성과 사고의 영역에서는 어른이 되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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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28 – 2.1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가지고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1980년 영국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인 의대생을 위한 국제대회에서 저자가 강의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목차는 1장 온전한 인격(인격), 2장 직업과 소명(소명), 3장 사회적 책임(참여), 4장 세상과 구별된 삶(윤리) 그리고 5장 세상을 품은 그리스도인(선교)의 다석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제1장 온전한 인격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 아래 복종시키는 것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헌신은 부분적이지 않고 전체적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평일에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직장에서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나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온통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12:1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제단에 바쳐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여러 부분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말 안에 통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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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21 – 25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네 번째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신 모습입니다. 그분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고”(히5: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복수하시는 대신 그분은 자신과 자신의 사정을 온 인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맡기셨고(벧전2:23),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불순종하라는 마귀의 무모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참고 마4:1-11). 이렇듯 그분의 삶과 사역은 시종일관 신뢰와 순종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신약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고, 원수를 사랑하셨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셨습니다. 겸손, 희생적인 섬김, 보복 없는 용서, 믿음과 순종,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나사렛 예수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니 이제 그것을 반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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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4 – 18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분과 닮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예로서 이번 주일 설교에 언급한 크리스웰 목사님의 목회 경험담을 들 수 있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달라스 first Baptist church(제일침례교회) 에서 오랜 동안 목회를 하셨습니다. 어느날 이 분이 궁궐같이 호화로운 집을 가진 집사님의 집을 방문 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의 집 서재에서 어떤 그림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집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분은 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께서 내 아주 어린 시절 돌아가셔서 나는 결코 그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주님을 먼저 뵈옵고 나서 제일 먼저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기를 원합니다.” 이때 크리스웰 목사님은 회고하기를, “저것이 당신의 어머니입니까? 저것은 단지 종이와 잉크로 그려진 그림일 뿐입니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그림은 그 집사님의 어머니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날인가는 천국에 갔을 때  그 어머니의 얼굴을 직접보고 함께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꿈꾸며 고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집사님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고 감사하듯이 정확히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것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하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과의 교제를 실제로 나누면서, 언젠가는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표상을 우리는 마음에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야만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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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최초의 회심과 지속적인 성화와 최후의 영화 가운데 무엇을 생각하든 부각되는 주제는 동일합니다. 각 단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혹은 그분의 ‘형상’이 언급됩니다. 완성된 구원이란 바로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들려올 때가 많은데 , 이 내용도 아이들의 노래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요. 사랑하는 나의 예수님 나 날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라고 싶어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중요한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또한 이를 지켜보는 세상이 보기 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말하고 그분을 노래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증거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그토록 우리의 입을 떠나지 않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볼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장과 행위 사이의 괴리, 우리가 말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행동으로 보이는 그리스도 사이의 널따란 간격만큼 기독교의 증언을 방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보다 먼저 우리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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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도르프 백작은 열아홉 살 때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였습니다. 18세기의 모든 귀족들이 그랬듯이 대학을 갓 졸업한 그도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뒤셀도르프에 있는 어느 화랑에 갔다가 17세기 초의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에 무리 앞에 도로 내놓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자주색 옷을 걸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선이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의 위아래에 라틴어로 쓰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꼭 그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이렇게 했거늘 너 나를 위하여 무엇하고 있느냐?” A.J. 루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날 거기서 젊은 백작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자신도 ‘그 고난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평생 그분을 섬기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표는 결국 예수님을 증거하고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진젠도르프 그리고 지난 세월 수많은 예배자들이 그러했듯이 2019년을 맞이하는 우리 역시 이 그림 앞에 서서, 주님이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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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4 – 28

이제 내일이면 2018년도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그 날에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그리고 자신들이 늘 경배하던 그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 겸손과 신비를 하늘의 존재들은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날 밤에 한 천사가 베들레헴의 인접 지역에 있는 들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목자들이 밤에 양을 치고 있었는데 그 들에 있는 양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장소에서 기르는 양들과는 달리 그 양들은 성전 제사를 위한 양들로서, 만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자 홀연히 천군들이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오셨던 것입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예수님 때문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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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17 – 21

선교사 헨리 마틴은 1805년에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으나 후에 이란으로 옮겨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훌륭한 학자였던 그는 힌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는데, 그 두 언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헌신은 어찌나 강렬하고 뜨거웠던지 예수님을 욕하는 말을 들으면 자신을 찌르는 비수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1년 전쯤에 시라즈에서 누군가 그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세자가 전투에서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을 하도 많이 죽여서 그리스도가 무함마드의 옷자락을 붙들고 중단을 애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함마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니 그것은 어이없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 헨리 마틴은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그 말이 내 영혼을 쩔렀다. 예수님이 영광을받지 못하신다면 나는 견딜 수 없다. 그분이 늘 그렇게 욕을 입는다면 그것은 내게 지옥과 같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이 느낀 부끄러움과 놀람이 살아 생전에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정도로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에 동화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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