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12. 10 – 14

우리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있고,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명하시는 분의 독특성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어부 시절의 시몬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뿌옇게 먼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호수에서 어부로동업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밤새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호반에서 맥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빌려 띄우고 그것을 강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시몬은 밤새 노력했지만 잡지 못하였다고 항변하였는데 이는 어부로서 아버지에게 배우고 고된 경험으로 다져온 전문 지식으로 그분의 제안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하신 분은 다른 동료가 아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다른 배를 불러야 했고, 결국 두 배 모두 고기의 무게로 가라앉기 직전이 되었습니다(눅5:1-11).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다른 모든 순종과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2. 3 – 7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말을 옮긴 것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말 그대로 그분을 위해 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일한 열망은 우리의 기도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조지 허버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이든 ‘그리스도를 위해’ 하면 그 행동의 색조가 선명해지고 밝아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 의도입니다. 사실 행동의 선하고 악함, 친절하고 잔인함, 아름답고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배후의 의도 즉 동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렇게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넘어 이면에 숨은 생각과 동기를 보신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고,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1. 26 – 3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섬긴 삶이라면 고 테레사 수녀보다 더 확실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191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열두 살 때 수녀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얻고 열일곱 살에 인도로 떠났습니다.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교장이 되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너머에는 지저분한 모티질 빈민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마음 깊이 걸려서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948년에 빈자 중의 빈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인도인으로 귀화한 그녀는 1950년에 ‘자비의 선교사들’이라는 수도원을 따로 세웠습니다. “흰 사리를 걸친 가냘픈 단신의 여인”, “상시 가동 중인 이 뜨거운 발전기”는 그때부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 옷가지를, 병든 자에게 약을, 나환자들과 난민들에게 정성 어린 간호를,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과 교육을 죽어가는 이들에게 품위와 위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25년도 채 못 되어 1,000명 가까운 수녀들과 185명의 수사들이 그녀의 수도회에 들어가 베트남, 예멘, 예루살렘, 호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물론 막대한 기부금의 사용이 지혜롭지 못한 점, 독재자와 금융사기자를 옹호한 적이 있고, 성모 마리아를 예수님과 공동 구원자로 세우려고 시도하는 등 테레사 수녀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테레사 수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캘커타 모원 (母院)의 거실에 걸린 액자에 그녀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수녀는 가난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일이나 사람이 혐오감을 줄수록 수녀는 그렇게 흉하게 위장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더 큰 믿음과 사랑과 즐거운 헌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데스몬드 도이그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첫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죽어가는 빈자들을 섬기는 집인 카리가트의 니르말 호리데이는 칼리 사원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고, 그녀는 방금 데려온 한 죽어가는 남자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더기를 벗기자 그는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섬뜩한 산송장이었다.” 그때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했던가? 그녀는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벵골 말로 그에게 다정히 말하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조용히 그를 씻기기 시작했다.” 크리스토 다스라는 젊은 인도인이 그녀를 거들다가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다 씻긴 후에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씻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씻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것을 테레사 수녀에게 배운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내 손이 닿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이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집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빵 한 조각을 건넬 때마다 나는 그분을 대접한다.” 테레사 수녀와 달리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셨으나 세상에 계셨을 때 집없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오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8)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실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놀라운 원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바른 관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족 안에서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우리도 그들이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고용주이든 피고용인이든 양심적으로 처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하늘의 상전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 부르셨기에 우리는 그분께 드리고 싶은 똑 같은 관심을 그들에게 베풀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서 최대 관건은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Lord of all )이십니다(행10:3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석에 밀쳐두거나 벽장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일요일이나 교회나 성경이나 삶의 종교적인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매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 그분을 영접해야 하며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실체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요16:14) 것이 성령님의 본연의 사역인 까닭입니다. 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 내 삶과 일을 그분께 가져가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임재가 서서히 우리 삶 전체에 배어들고, 우리는 아무 때나 그분께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또한 배후에서 그분을 보며 그렇게 그분을 보면서, 그들을 그분을 대하듯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늦게 하나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셋째 아들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다하여 전심으로 사랑하여야만 하고 이웃은 우리 자신과 같은 정도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매일말씀나눔

2018. 11.19 – 23

새뮤얼 채드윅이 구두를 닦는 일을 시작으로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듯 하는 버릇이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방을 치울 때도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집에 오실 것처럼, 그분께 깔끔한 방을 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에 관한 실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는 정식 교인이 되려고 신청하면 그 교회 목사를 비롯한 모든 집사 및 장로와 인터뷰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때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녀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할 때도 우리는 마치 내가 부엌의 마르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17세기 초의 시인이자 목사인 조지 허버트는 아주 멋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모든 것을 하라는 뜻을 찬송가로 나타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 범사에 주를 보게 하시고, 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해 하게 하소서/ 유리를 보는 자의 눈 유리에 머물 수도 있으나 원한다면 그 너머로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종에게 허드렛일도 신성해지고 주 말씀을 위해서라면 청소도 즐거워집니다./ 무엇이든 금으로 바꾸는 신기한 돌이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것마다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이 찬송시를 묵상하시면서 오늘 하루 주님을 섬기듯이 모든 것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편 1-2).

가정과 직장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과 일터보다 더 넓은 책임을 주십니다. 우리 중에 사회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아가 어려움에 처한 바깥세상에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섬김이며, 지금까지 살펴본 동일한 원리가 우리 섬김의 길잡이가 되고 그 품위를 높여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양과 염소를 가르는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이 묘사한 최후의 심판을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느날 ‘인자가’ 친히 천사들을 대동하고 영광 중에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왕과 심판자로 앉으실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그분 앞에 모일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모든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집결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활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가정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마치 목자가 뒤섞인 가축 떼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서로 갈라 의인들은 자신의 오른 편에 두고 불의한 자들은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을 향해서는 ‘나아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라고 부르시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떠나’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제대로된 교리를 고백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4).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본문이 근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심판자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근거로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또는 가장 비천한) 자”를 향한 그들의 행동(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의인들은 그분이 배고플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원이나 옥에 있을 때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분이 설명하신 대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모습을 보았으나 어려움에 처한 그분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장 비천한 형제 하나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한 일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 즉 태만과 괘씸한 무관심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어려움 속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에 대해 그것은 너무나 좁은 범위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인간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건 그 판단은 주님 손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고(이신칭의:엡2:8-9))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 어째서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보고 의인 여부를 판단하신 뒤 영벌과 영생의 근거를 삼으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얻는 ‘칭의 – 의롭다고 칭하심을 받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나 ‘심판’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냐를 가늠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내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공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선행을 통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약2:18,20)이라고 말했습니다. 심판 날은 공적인 사건이므로 반드시 공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긍휼의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누차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컨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행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믿음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23-24).

매일말씀나눔

2018. 11.12 – 16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음식과 날자의 문제에서 바울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채식가가 아니었고 우상의 고기를 먹지 못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교의 제사가 고기를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리낌 없이 오히려 감사하며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장 후반부(13-23절)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 앞에서 일부러 고기를 삼가는 것이 옳습니다. 행여 연약한 형제를 양심에 거리끼는 일로 유도하여 죄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성경이 성결한 양심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양심이란 무오하지 않으며 교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양심에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설령 다른 사람의 양심이 잘못되어 있을 때라도 마찬가지입니다(물론 우상 앞에 드린 고기를 먹는다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일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19-21)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가장 흥미진진한 전기와 자서전은 단순히 주인공의 사연만 들려주는 책이 아니라 그의 비밀을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책의 주인공이 실은 악당이나 은근한 술꾼이었다는 식으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과 동력, 헌신의 대상과 동기가 밝히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정말 흥미로운 점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입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물론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찾다가 실패하여 실존적인 비관론에 빠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질적으로 방랑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이라는 바다에서 플랑크톤처럼 그저 바람과 물결에 휩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마치 사나운 귀신에 쫓기듯 뭔가에 쫓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채울 수 없는 욕심 특히 재물욕, 권력욕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진정 인간다운 인간의 한 표지는 고결한 목표를 이타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업체나 기업에서 ‘관리’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은 그 동일한 원리를 사생활에도 적용하여 각자 자기만의 목표를 수립하도록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 건강의 한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삶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삶의 목표는 무엇으로 설정했으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0.29 – 11.2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고 마이클 램지는 서품식에서 ‘슬픔과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권면하면서 ‘주 안에서 기뻐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나라이고 환경이며 숨쉬는 대기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 아우그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 사는 우리는 현재의 슬픈 상황에서 달아나지 않고(오히려 그런 슬픔에 더 민감해질 수 있겠지요) 하나님과 천국을 보는 영원의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현재 우리들의 교회가 회의와 불안과 소극적인 태도와 무기력에 빠져 있는 것은 다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의 나라인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엄연히 문제에 부딪히지만 또한 성도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업적과 그분이 돌보신다는 약속을 믿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꾼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그러나 그 자세는 부득이함이 아니요 기쁨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우리 공간에 있는지 여부는 손을 들어 휘들러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는 지의 여부는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충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0. 22 – 26

다시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로 돌아와서 ‘그리스도의 연합’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첫 번째는 이미 기술한 바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옛 생활에 죽었을 뿐 아니라 새 생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죄와 죄책과 속박이라는 옛 생활이 끝났을 뿐 아니라 용서와 능력과 자유라는 새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닌 큰 열망은 갈수록 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일은 자연적인 부패의 과정을 묶어버렸을 뿐 아니라 초월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분의 부활을 역사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표출된 정점으로 그립니다. 부활은 우주의 창조에 비견됩니다. 사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엡1:19이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표출된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우리를 소외와 속박의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표출되었고, 악을 우리의 발아래 두심으로 오늘 우리의 삶에도 표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엡1:19 – 2:10).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더 읽기

매일말씀읽기

2018. 10. 15 – 19

전도자 선다 싱의 책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의 대목 가운데 ‘그리스도 없는 비그리스도인들”에 등장하는 전도 일화를 보겠습니다. 선다 싱은 로프에 발을 묶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좌우로 움직이면서 고행하는 어느 분을 만났습니다. 선다 싱은 그 고행자가 묶은 발을 풀고 쉴 때에 그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무슨 동기로 그런 고행을 하며, 무슨 유익을 얻었습니까?” 그러자 그 고행자는 “지금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사드후(고행자의 뜻임) 형제이기 때문에 몇마디 설명해주겠소. 창조주가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 머리를 밑으로 하도록 만들었소. 바로 이것이 내 자신의 경배와 고행을 하는 방식이요. 세상의 눈에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과 모든 사람이 기억하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가 죄에 얽매여 있을 때, 세상이 보기에는 바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창조주가 보기에 우리는 머리를 거꾸로 돌린 것이요.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는 만족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안팎으로 내 자신을 개혁하기를 원하고 있소!” 그러자 선다 싱은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도 맞고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채택하지 말아야만 하나, 어떻게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능력을 넘어가는 일이어서 사랑의 주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고 그 결과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하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고행자는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원하지 않는다는 표식을 보였고 선다 싱은 일어나 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가혹한 고행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고행자는 자신이 만족하고 평안을 얻을 정도로 자신을 개혁할 수 있는 어떤 진보도 없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4-36).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0. 8 – 12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집안에 태어나 열다섯 살 때 환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고, 그 사실을 즉시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후에 “가족 중 일부는 내가 미쳤다고 했고 일부는 내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내가 겪었던 비참한 불안에 비하면 박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환난과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 후 선다 싱은 집을 떠나 순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 취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과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삶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그리스도 없는 불신자들” 2장은 “그리스도 있는 불신자들”은 침례는 받지 않았으나 ‘비밀리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말하고, 3장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체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그들은 속 빈 강정이요 영혼없는 몸과 같다”고 쓰고 있습니다. 4장은 “그리스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적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