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1.22-26

진정한 부부애 진정한 가족애는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아내의 소원을 다 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인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 영적인 갈등이 계속되는 이상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꽃 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는 부인을 통해서 남편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인이 남편에게 삶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서 평화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야말로 남편이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인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남편이 부인을 따라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를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막내 며느리 되시는 어느 권사님은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면서 밤낮 생각하는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시어머니를 내 집에 모시자”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두려워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신주단지를 없애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화를 당해도 제가 당할 터이니 주십시오” 하고는 담대하게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 뒤 시어머니는 예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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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요 네가 남편을 구원 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남편된 자요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고전7:15-16). 15절의 앞 부분의 뜻은 안 믿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신앙 문제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만 보고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 중인 믿지 아니하는 남편과 이혼하고 교회다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적용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15절 후반부와 16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나눠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행할 때 그 가정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예의 주시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이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는 역사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아무리 고통과 갈등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가정을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가족 모두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6).

우리는 믿지 아니하는 가족들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대립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건전하고 더 아름다운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정을 파괴 하는 독소가 될 수 없고 부부간의 애정을 깨뜨리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가족으로 인한 그 눈물 그 고통 그 한숨은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고전 7:14)라고 쓰고 있는데, 예수 믿는 아내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거룩해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헬라어 구문을 보면 “거룩하게 되고”라는 말은 완료형 수동태이자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는 문장 앞에 둡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이어 “아내로 말미암아”는 말이 따라오는데 헬라어를 직역하자면 “아내 안에서 in the wife”가 됩니다. 이 뜻은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에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뜻은 아내가 믿는다고 혹은 남편이 믿는다고 믿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아니고, 믿음에 무슨 마법적인 힘이 있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는 믿는 아내나 남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 전서 6:15-17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5-6).

예수 믿는 사람의 거룩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나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되심과 동시에 그 마음에 성령님이 와서 거하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 예수 믿는 부인 때문에 거룩해진다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거룩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전서 7:14의 말씀에서는 안 믿는 자가 믿는 자 안에서 거룩해 진다고 쓰고 있을까요? 이 거룩은 의식적인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거룩한 존재였고 그 제사장의 손길이 닿는 것마다 거룩해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고 사도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은 깨끗하여 버릴 것이 없는데 특별히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기도함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거룩해지는 의식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한 가정의 중보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가 기도해 주는 남편과 자녀는 거룩해져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가 예수 믿고 남편은 안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내에게만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시고 남편에게는 멀리하시지않습니다. 부부를 똑같이 은혜로 감싸 주시고 포근한 날개로 덮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내의 기도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으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찬송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집안에서 기도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기도 소리가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집안에서 성경 읽는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성경 읽는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구 한말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 최초로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우신 사무엘 마펫 목사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의자 옆이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짧은 성경 구절을 읽은 후에 기도하시곤 하였는데 이를 들은 그의 셋째 아들 사무엘 휴 마펫은 고백하기를 “아버지의 기도는 단순하고 심오했다.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듯이 아버지는 기도했다. 그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던가!” 라면서 기도는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일부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은 가족 전부를 하나님 앞에 구분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식탁 옆에서 어린아이가 밥 먹기 전에 “아빠는 왜 식하실 때 기도 안 해요?”라고 물으면 아빠는 은근히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 대답을 잘 못합니다. 이렇게 아이의 기도하는 모습을 아빠가 볼 수 있는 집안 분위기, 그것이 벌써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구 중에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는 자기 식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우리는 흔히 믿는 부인과 안 믿는 남편이 같이 살 때 부인이 안 믿는 남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 유혹의 물결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가 믿는 식구를 영적으로 이기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아내를 통해서 그 남편이 거룩해진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진리가 이깁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가정에서는 믿는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남편을 또는 아내를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살아있는 한 여러분은 이깁니다. 이런 긍정적인 믿음의 시각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어야 올바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상황을 탓 할 필요가 없이 주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이렇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여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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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8 – 12

사랑의 대화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잠언은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말’은 ‘즐거운 말’ 혹은 ‘친절한 말’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로 ‘주어진 상황과 때에 맞는 적합한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다툼이 있어 대화가 단절된 그런 상황과 때에 적합한 말은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한 상대방이 찾아와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말이나, 다투던 남편과 아내가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주님 안에서 용서하며 위로하는 말을 나눈다던지, 남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덮어 주기 위해서 눈물로 대화를 나누는 그 말이 선한 말입니다. 그런 선한 말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꿀송이 같다고 했습니다.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말을 듣는 그 순간, 그 뼈의 모든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이만큼 사랑의 대화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부모 형제 사이를 한번 검토해 보길 바랍니다. 부부 사이도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사랑이 넘치는 대화 대신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오해가 쌓이고, 마음속에 원통함이 있다면 이 말씀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가정에 대화의 꽃을 활짝 피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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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2 – 5

가정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 가장 어려운 사람은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할 줄 모르고 동시에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부 간의 갈등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이렇게 고부 사이에 갈등이 밖으로까지 나타내질 때 많은 사람들은 나이 많으신 어머니보다는 젊은이를 나무라게 됩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가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잘못을 용서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관, 자기 고집을 가지고 자녀를 원망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쳐져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그와 같은 태도를 끝까지 고수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자식들을 동정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말로는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먼저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식들, 며느리들과 자신들 사이에 막혀 있는 현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모든 사태 해결의 첫 걸음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면 자녀 앞에서 잘못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면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만약 자식의 잘못이라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격이 급하신 분들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유순한 말로 타이를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이해력을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정에 열매를 맺게 되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발견될 것입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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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6 – 29

사람사이나 가족 사이에서도 대화가 단절되면 따라오는 것은 고독입니다. 자기 마음의 텅 빈 공간을 다른 사람과의 대화로 채우지 못할 때 고독이 찾아옵니다. 한 침실에서 자는 부부 사이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모 자식과 형제들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진 바르도 교수는 “고독만큼 무서운 살인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유신정권을 반대하여 잡혀서 독방에 갇혀 지낼 때 옆 독방에 지내던 죄수는 너무나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못하고 혼자 지내게 되자 반쯤 정신이 나가서 가끔 자신이 왕이 된 착각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 중에 큰 소리로 “이리 오너라” 라고 부르면 간수가 “네에” 하면서 가서 보았다고 할 정도로 고독은 사람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대화의 단절이 심하게 되면 여러가지 잘못된 일들이 생기는데 가장 무서운 것은 오해라는 감정입니다. 먼저 상대방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섭섭한 감정은 오해를 낳습니다. 그 섭섭한 감정을 계속 풀지 않고 있으면 오해가 계속 쌓여서 마음의 벽이 점점 높아지고 결국 인간관계를 송두리째 마비시키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어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며 원망하고 불평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을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비로서 다른 사람과의 오해도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며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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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 22

오늘부터는 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모음 “예수 믿는 가정 무엇이 다른가?”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정이라면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사회조직입니다. 그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요람인 동시에 사랑의 학교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정은 항상 문제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현대에는 가정의 형태마저 위태롭게 변모하고 있으며 많은 갈등을 내재한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의 가지가 복잡하게 뻗어 있다 할지라도 그 뿌리는 한곳으로 모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거역하는 사람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있습니다. 남녀를 창조하시고 제일 처음 결혼 주례를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영구불변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대의 신화처럼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서구 사회의 가정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었고 심지어 동성혼까지 합법화를 시킨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그 영향이 심대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 모든 가정 구성원들이 그 말씀에 순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 경험을 통하여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가정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이 치유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의 가정들은 병들어 썩어가는 현대 가정의 방부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주님의 빛을 환히 비추는 램프가 되어야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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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15

한국 구세군은 1907년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1829-1912)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국 유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부스는 한국원정 즉 선교를 결심하고 먼저 수행원을 한국에 보냈다가, 1908년에 이르러 호가드 대령 부부를 한국 원정 사령관으로 파송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호가드 사령관은 도착 즉시 선교를 개시 하였습니다. 그후 1909년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구세군 본영 사무실을 차리고 “구세공보”를 창간했으며, 그 이듬해에 구세군사관학교와 서울 교회당을 개설하였습니다. 1924년부터는 빈민 숙박 사업을 개시하고 1928년부터 자선냄비를 시작했습니다. 양화진에는 4-5명의 구세군 장교와 어린이들이 묻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국 구세군 중 헌신적인 두 분의 삶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도식(리처드 윌리엄) 부령입니다. 그는 1878년 영국 런던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런던 거리에서 가두 전도에 참석했고 12세부터는 ‘꼬마 음악단’ 단원으로 활약하였을 정도로 구세군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럽 각국과 남아프리카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지를 두루다니며 구세군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1918년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세군 육아원에 천연두가 퍼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전염되어 1920년 별세하였고 그의 기념비가 북아현동에 세워져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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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4 -8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 김정식등을 비롯하여 여러 지식인들을 YMCA로 끌어들인 데는 형인 플레쳐 브로크만의 공헌이 컸습니다. 플레쳐 브로크만은 가끔 초빙을 받아 우리나라에 와서 YMCA 지도자 훈련에 공헌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당시 YMCA의 총무 신흥우가 농촌 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흥우는 동생 브로크만과 함께 국제 YMCA를 방문 하고 그 지도자들과 협의회를 가졌는데 거기에는국제 YMCA의 총무를 비롯하여 백화점 경영자 J.C. 페니와 형 브로크만이 참석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레이크플래시드 5인회담’이라는 것인데, 이 회담에서 국제 YMCA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 명의 농촌운동 전문가를 파송하는 동시에 기술 및 재정 원조를 해 주는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형 브로크만의 제일 큰 공헌이라 할 점은 그의 동생 브로크만을 우리나라 YMCA 간사로 선정 파송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생 프랭크 브로크만(1878-1929)이 중국에서 자기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것을 거절하고 한국으로 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02년 대학을 졸업하고 네브라스카 오마하의 학생부 간사로 취임하여 유명한 F.I 윌리스의 총무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05년 한국 YMCA의 공동 총무로 파송되어 내한한 뒤로, 1929년에 죽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힐 때까지 24년간 한국 YMCA를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가 끼친 공헌은 실로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행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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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7 – 12.1
베어드의 교육 사업이 큰 열매를 맺은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교지 자립 정책인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우리 나라 실정에 맞도록 적당히 수정하여 적용시킨 점입니다. 즉, 네비우스의 세 가지 자주 정신 즉, 자력 유지, 자주 치리, 자진 전도의 정신을 평안도 사람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개화, 독립, 하나님 숭배 정신에 접목시켜 발전 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 평양 숭실학교는 학생들이 학자금을 자급하도록 하여 자립 정신을 확립시켰습니다. 사실 베어드의 숭실학교 경영 이상은 미국 미주리 주의 장로교계 학교인 파크 대학과 포이넷트 아카데미였습니다. 이 학교들은 학생 전원이 학생지도관에서 일주일 동안 일정한 시간을 작업하도록 한 뒤 그 수입으로 학생들이 자력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졸업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 정책을 한국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하였습니다만,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글 읽는 것만 자랑으로 생각하던 조선 사람들의 뿌리 깊은 병폐를 개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내에 소위 자조 사업부를 두었고 학생들에게 근로와 자조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제1의 교육목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비었다는 의미임)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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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0 -24

오늘부터는 한국의 성공회 토착화의 주역인 토너 주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터너(Arther B. Tuener)는 영국 출신 성공회 신부로 1862년 8월 영국에서 출생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과 커데스돈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사제에 서품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96년 12월 2일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보다 먼저 1890년 한국에 개척선교사로 파송된 성공회 소속 신부로 코프라는 분이 계셨으며 코프 신부에 의해 한국에 성공회 성당이 정동에 1892년 세워졌고 현재 그 자리에 서울성공회성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도는 터너 신부가 한국에 파송될 무렵인1896년 12월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너는 전도에 열중하는 것 외에 스포츠 보급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관립 영어학교가 1894년 설립되었는데, 터너는 유명한 축구 선수출신으로 이 학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끼리만 공을 차게 하다가 차츰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 되었을 때 영국 공사관 팀과 시합을 하게 됐고 터너는 언제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는 매우 공을 잘찼던 분으로 한쪽 골대에서 공을 차면 저쪽 골대까지 공이 가 닿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터너 신부는 비단 기독교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에 축구를 도입, 발전시킨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이며 공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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