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10. 1-5

‘그리스도와 함께’ 이 말은 즉시 장례식과 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이 비문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때로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로 줄여서 쓰기 때문입니다. 2세기전 사셨다가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시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 주님, 제가 죽은지 사는지는 제가 걱정할 바 아니옵니다.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만 은혜로 저에게 허락하소서./ 제가 지날 죽음의 어두운 방 주님도 친히 지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나아오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 생을 잘 모르고 제 믿음의 눈이 침침하여도, 주께서 다 아시니 족하오며 주와 함께 있으리니 족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류를 가리킵니다. 사실 그때 누릴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비하면 지금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는 차라리 부재에 가깝습니다. 그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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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7-28

진정한 자유와 만족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그분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내 신념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통제가 가해지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믿을 바를 일러주신다면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행동방식을 지시하신다면 우리의 의지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자신의 자유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란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진리의 권위입니다. 생각이 거짓을 믿는다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망상과 오류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사고란 진리를 믿을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문제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이든 성경 진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깨닫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서 우주 여행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둘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만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생각이 진리의 권위 하에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것처럼 비슷하게 의지(뜻)도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의의 권위입니다. 의지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아집과 정욕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기준에 순종할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누군가 왜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재의 순리라고 답할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와 선이시며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분의 진리를 탐색하고 믿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또 우리를 도덕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덕법은 이질적인 기준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꼭 맞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과 성경에 ‘기록하신’ 도덕법은 그분 자신의 속성인 영원한 의와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는 그분의 진리를 믿어 자유를 얻고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법에 순종하여 자유를 얻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꼭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는 데 있지 않고 달게 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아래’ 우리는 가장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1-32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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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7 -21

순종과 관련하여 현대인들은 별로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또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인데 순종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므로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순종에서 나옴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예, 갈5:18)는 바울의 표어를 가져다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세계는 폐기되었으며,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제외한 모든 절대 기준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라고 결론을 비약합니다. 전혀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의를 이루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법을 기록하려고 성령을 주셨다는 것 역시 말한 바 있습니다(롬8:3-4; 고후3:3, 6). 구약성경의 선지서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 즉 자신의 백성 안에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과 그들 안에 법을 두신다는 약속(참고, 겔36:27; 렘31:33) 사이에 사실상 전혀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수용되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거룩함을 이루는 면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참고, 롬6:14; 갈5:18). 그러나 도덕적 기준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면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고전9:21)라는 것을 고백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도덕적 순종이라는 요건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주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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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10 – 14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실천적인 목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군대의 병사들처럼 종종 반항적이고 때로 불온한 우리 마음의 무수한 생각을 사로잡아 그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께 순종하여 참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시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에 복종시킨다는 이 개념은 오늘날 교회에서 다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마리아는 시간을 내어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 말씀을 들었건만 우리는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삶은 너무 바쁩니다. 마르다처럼 우리도 활동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낯설어하며, 침묵보다 소음, 고요한 묵상보다 분주한 활동이 더 성미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몸부림이 잦아들기까지/ 주의 고요한 정적의 이슬을 내리소서/ 우리의 영의 염려와 근심을 제하시고/ 안온한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주의 아름다운 평안을, ……”(J.G. 위티어).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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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3 – 7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 삶을 향하신 뜻은 진리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뜻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여기서 ‘멍에’란 소의 목에 수평으로 메우는 나무틀입니다. 지금은 쉽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시골에 가면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면서 밭이나 논을 갈아엎는 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권위, 특히 압제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자연히 멍에를 활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항복하는 것은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는” 것이었고(렘 27:1-15), 도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도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딤전6:1) 것은 곧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한다는 뜻이었습니다(사58:6). 그러나 멍에로 상징되는 권위가 언제나 폭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복종하여야 할 권위가 없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하에 놓여있는 자들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이 주님의 확언입니다. 왜 그렇까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신 그림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농부에 우리를 그분을 섬기는 소에 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위에 자신의 멍에를 두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분의 멍에를 메도록 다시 말해 그분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짐이 가벼우며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덕법을 자력으로 지켜내려고 하거나 순종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우리는 결코 타인을 배려하도록 규정한 도덕법을 지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내려오셔서 우리 죄책을 지고 십자가 위에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뒤로는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의 완전한 모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인도하시고 힘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원받은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기를 즐거워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즉 그분의 쉬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두 가지 영역이 포함됩니다. 하나는 우리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의지입니다. 먼저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는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랍비들은 늘 ‘토라의 멍에’, ‘율법의 멍에’를 말하였으며, 그것은 지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도덕법 자체가 압제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롬7:12),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요일5:3). 그러나 자력으로 지키려 하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무거운 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되라고 주신 것(시119:105)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소소한 규칙들과 계율들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압제적인 “장로들의 전통”(쇠 멍에가 있었다면 바로 그것임)이 있던 자리에 자신이 가르치는 쉬운 멍에를 내놓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분부하심으로 주님은 은유를 바꾸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소를 거느린 농부가 제자들을 거느린 스승으로 바뀐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학교를 세우신 셈입니다. 이 초청은 더 유명한 다른 초청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데, 다른 초청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와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와서 쉬라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고 죄책을 제하며, 그리하여 그들의 멍에를 쉽게 하고 짐을 가볍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다른 역할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짐을 벗기는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짐을 지우는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그 둘의 차이는 우리의 짐은 무겁고 우리의 멍에는 불편한 반면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에게 이 점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 혹은 종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리고 겸손하고 기쁘게 그분의 가르침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당연히 유대교 랍비들 아래에서 배우고 자란 그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 아래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의 사고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성경의 생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7-8).

제자들이 주님의 인도와 가르침하에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즈음까지도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들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 교육을 그분은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4:25; 16:12-14). 하나님과 인간, 역사와 영원, 죄와 구원, 창조와 구속, 믿음, 사랑, 의와 소망, 성경과 성령, 삶과 죽음과 최후의 심판 및 영광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이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자라갔습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과 함께 여러 교리와 관련하여 당대의 유대교나 세상적인 견해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이 서로 상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이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멋진 비전입니다.“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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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27 – 31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remain in’ 우리가 그분께 그것을 허용해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책임은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께 날마다 새롭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봄날 나무에 진액이 차오르듯 그분의 생명과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면’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취해야 할 몇 가지 조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라일 주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내게 붙어 있으라. 내게 꼭 달라 붙어 있으라. 나와 가깝고 친밀하게 연합된 삶을 살라. 내게 점점 더 가까이 오라. 모든 짐을 내게 내려놓으라. 네 모든 무게를 내게 실으라.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붙든 손을 놓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혹은 ‘거하라’는 명령은 지칠 줄 모르고 집요하게 그분을 좇는 추구를 뜻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씨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소리친 야곱의 정신입니다. 특히 우리는 ‘은혜의 통로들’을 사용하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구하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등의 훈련에 숙달되어 있을수록 나머지 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그분의 생명과 능력에 의존하여 살기가 더욱 쉬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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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0 -2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참고 갈 3: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인 치심’이란 가축이나 노예들에 대하여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불 인두로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어 구별하시는 표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잎이 흔들림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성령님 역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Cor. 12:3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가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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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신령한(영적인, spiritual)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친밀한 인격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실 복을 모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들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 주된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새로운 신분의 복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사회에서 ‘신분’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대부분 우리 자아상은 사회적 신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함과 감투와 큰 집과 좋은 차와 배지 그리고 정복을 좋아합니다. 또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을 좋아하여 대화 중에 은근히 그들의 이름을 ‘흘리곤’ 합니다. 그것들이 다 신분의 상징물이며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신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이 아닌 영적인 신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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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예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참된 의미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이 연합의 의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연합을 지각하고 체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연합 자체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의 파장과 책임을 두고 논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놓고 갑론을박한다는 것은 기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천주교와 그리스정교회의 전통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개신교는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교파는 성령의 권능을 중시하며, 자유주의 전통은 예수님을 본질상 “남을 위한 인간”으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구제 사역과 사회 정의의 추구를 참 제자의 특징으로 여깁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대한 신약성경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이며, 세례와 신조와 행동은 그 결과로 자연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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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30 – 8. 3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집을 짓는 자로되 다만 각자 현장에 이를 때 건축의 단계가 다를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기초)를 닦아 두는”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닦아 둔 기초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 이후에 아볼로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가 닦은 기초 위에 집을 세웠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재료를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 즉 온갖 거짓된 가르침은 타버릴 것이요, 오직 “금이나 은이나 보석” 즉 그리스도의 바른 가르침만이 심판 날에 마지막 불의 연단을 견딜 것입니다.(참고 고전3:10-15). 바울은 “다른 터는 없다”고 했고, 베드로는 “다른 이름은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우리는 그 이름 위에서 쉬고 그 기초 위에 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도 유다의 말씀을 가지고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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