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홀의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 여성을 의사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1890년 조선에 온 로제타는 김점동이란 아이, 후에는 박에스더라 불렸던 한 여성을 자기의 통역겸 간호사로 키웠습니다. 원래 김정동은 이화학당 근처에서 태어난(1876년생) 가난한 집 딸로서 정신여학교의 초대 교사였던 신마리아의 동생입니다. 김점동은 1887년 겨울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턴 부인을 만나고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녀는 특히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보구여관에서 일하고 있던 여의사 로제타 홀의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보구여관(保救女館, 여성을 보호하고 구한다)은 병에 걸려도 아픈 부위를 의사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하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이화학당 구내에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었습니다. 로제타 홀은 남편과 함께 1895년 평양으로 갈 때에도 김점동을 데리고 갔으며, 남편이 죽은 뒤 1895년 미국으로 갈 때도 데리고 가서 의과 대학에 입학시켜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 여성의 본명이 김점동인데도 불구하고 박에스더라 부르게 된 것은 그녀의 남편 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의 민족을 위한 희생봉사와 남편 박유산의 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분 모두 남을 위해 애를 쓰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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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6-10
오늘부터는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평양 지역의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홀은 의사이자 목사였습니다 1860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34살의 아까운 나이였으며, 1891년 12월 한국에 파송된지 불과 2년 11개월만이었고 다음날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감화를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안하고 살기 좋은 서울을 떠나 멀리 평양에 가서 선교하기를 무척 원했고 청일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평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자를 돌보고 신자들을 심방하고 밤 예배를 인도하는 등 평양시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장티푸스에 감염이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홀이 죽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부인과 아들은 수십년 간에 걸쳐 병과 가난으로 버려진 한국민들을 섬김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한국 땅에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양적인 면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평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선교사 마펫은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기꺼이 한국에 왔고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날 생명의 부활로 무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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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30-11.3
소다 옹이 1867년 10월에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같은 해 12월에 미국에서는 레이놀즈 선교사가 태어났습니다. 레이놀즈는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남장로교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라틴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희랍어 등 성서 원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얻은 원어 실력으로 우리 나라 성서번역(특히 구약성서)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대학 시절 만난 부인 팻시 볼링은 버지니아 주 개척자 가문의 출신으로(1868년생) 교사였고, 음악 애호가이며 선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이 두 분은 1893년 한국으로 선교오기 약 6개월 전 결혼하였습니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경위는 1891년 안식년 차 미국에 잠시 귀국한 언더우드의 보고 연설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즉, 1891년 10월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외지선교 신학교연맹 대회가 열렸고, 언더우드는 보고연설을, 당시 밴더빌트 대학에 재학 중이던 윤치호는 조선에 관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조선 선교에의 초청에 레이놀즈, 데이트, 전킨에게 큰 감화를 주었고 3분은 조선 선교를 위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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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27
중일 전쟁이 한창인 때, 하루는 아침 일찍이 일본 헌병대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다 옹은 깜짝 놀라 헌병대에 갔더니 다짜고짜 죄상을 추구했습니다. “영감이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가 항일 교육을 시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제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소, 영감이 보육원 출신 중에서 불령선인(일본의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 나왔단 말이야! 이것은 영감 책임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헌병대가 체포하여 불령선인으로 몰아치는 한국 청년은 가마쿠라 보육원 출신이 분명했으며, 보육원을 나온 뒤 평양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애국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성장하여 독립운동 지하조직의 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다 옹은 그 사실을 알고 놀라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절도범이나 살인범이 아니고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잡힌 애국 투사임을 알고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소다 옹은 그런 내색없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의 불찰이니 용서하고 그 청년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한편, 소다 옹은 원산 감리교회를 목회하러 원산에 가서 8.15 해방을 맞이했고 진군한 소련군을 피해 교회로 도망온 일본인 교인들을 숨겨두고 교회 현관을 지킴으로 소련군을 막아 이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선한 목자로 어려움에 처한 주님의 양떼를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요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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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 20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사람, 무조건 일본이라면 적대시하던 일제 시대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존경받던 일본인 한 사람이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이름은 소다 가이찌입니다. 소다 옹은 1905년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 40년간, 그리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1년간 모두 합해서 41년간 한국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동안 그는 오로지 한국 고아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소다 가이찌는 1867년 10월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훗날 한시를 잘 지은 것을 보면 한학을 본격적으로 배운 듯합니다. 21세부터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했고, 고학을 해서 초등학교교원도 한 경험이 있습니다. 1893년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으로 갔으며 거기서 영어를 열심히 배웠고, 1896년 28세 때에는 대만으로 가서 독일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하면서 독일어를 공부하여 독일어 서적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방랑생활을 하다가 1899년 노상에서 술 취하여 쓰러져 의식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으나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한국인이 한 명 지나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주고 밥값도 대신 치러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소다는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6년이 지나 그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에 가서 은혜를 보답하리라 결심했기 때문이었으니 1905년 6월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땅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복음전도자까지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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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9-13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1904년 곤당골 교회가 인사동 승동교회로 옮겨 갈 때까지 줄곧 이 교회를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도 구역은 멀리 황해도 배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무어 와 그의 한국인 동역자들은 한강 유역에서 전도를 계속했다 어떤 때는 기쁜소식이란 이름의 자가용 배 한 척을 타고 다니며 전도를 하기도 했다”라고 로데스는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전도시작 후 3년 안에 25개 처에 신자가 생겼고 그중 황해도 배천에는 신자들이 자력으로 큰 기와집을 사서 훌륭한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교인 수는 날로 왕성하여 850명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무어는 평양에 있던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1학년 학생들에게는 창세기를 2학년 학생들에게는 민수기와 열왕기를 3학년 학생들에게는 영국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무어는 영국 의회 정치제도를 강의하면서 한국 학생들에게 자유 사상을 고취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자유 사상을 고취하도록 했으며 해마다 이런 강의를 계속 하면 장차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 때문에 그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몹시 고독했습니다. 아울러 한국인 양반들에게서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묵묵히, 그리고 뚜벅뚜벅 자기의 사명을 위해 걸어갔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병들고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을 섬기다가 결국 장티푸스에 걸려 1906년12월22일 제중원에서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향년 48세였습니다. 비문에 기록된대로 그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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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18 – 22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 대통령에게 헐버트를 보내 친서를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미국과 밀약(1905.7)을 맺어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를 보장받고 있었기에 친서 전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헐버트는 “전환기의 한국”이라는 그의 수기에서 비통한 어조로 미국 정부의 불의를 규탄하였습니다. 이어 1907년 헐버트는 이준등 헤이그 밀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고자 가족과 함께 한국을 출발하여 일부러 일본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 결과 이준등 3인의 밀사는 성공적으로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1948년 정부 수립시 이승만 대통령이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하여 한국을 방문한 헐버트는 그만 고령의 나이( 84세) 때문에 한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헐버트는 명문 기독교 가정의 후예로서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 목사, 미들버리 대학 학장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다트마운트 대학 창설자의 후예로서 인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의 딸이었습니다. 헐버트의 가족은 철저한 칼빈 교리의 신봉자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개척자로서 “한국사”, “한국망국사”의 저서 두 권을 남겼으며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리글자”라고 극찬하신 분이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편 8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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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7.8.27~9.1
1894년 한 겨울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명성황후의 부름을 받은 시의 언더우드 부인 홀튼 여사는 궁으로 갔습니다.황후는 궁 안의 연못이 잘 얼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와 스케이팅을 하며 재미있게 보내라고 제안 했습니다.홀튼 여사는 좋은 기회라 여겨 온 가족과 함께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고, 고종과 황후도 왕세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홀튼 여사는 연못가 소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하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명성황후는 홀튼의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듣고 맛있는 약과와 귀한 선물을 한 아름 하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서너달 뒤인 1895년 봄 어느 날, 황후의 명을 받들어 영의정 김홍집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귀족 자제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 달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명성황후는 건축비조로 3만달러를, 1년 경상비로 2만-3만달러를 세워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뜻밖의 제안에 기뻐하며 “이제는 귀족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겼구나’ 하면서 대번 건축설계와 건축비 예산을 세워 재가를 올렸으나 그때에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이 터졌습니다. 만약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지 않았다면 귀족 학교가 설립되었을 것이며, 귀족 학교가 설립되었다면 왕실은 아마도 기독교화 되었을 것입니다. 황실 복음화는 이렇게 아쉽게도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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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21 – 25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에는 직접 전도하기보다는 병원사업, 고아 사업, 교육 사업에 치중하다가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세웠는데,이것이 곧 새문안교회입니다. 입국한 지 3년째 되던 1887년 9월27일에 14명의 교인들이 언더우드의 집 사랑방에 모여 시작되었고 두 사람의 장로를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언더우드는 노도사라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사람은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헤론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다가 성경책을 훔쳐 갔던 사람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론인과 편집자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한국성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를 조직할 때에도 언더우드는 거액의 원조를 받아 왔고, 별세할 때까지 회장으로 지냈습니다. 또한 1897년에는 “그리스도신문”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였는데,이 신문이 우리 교계에 새로운 지식과 영적 양식을 제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당시 정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수를 사들여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역사에서도 선구자였습니다. 1893년 이전까지는 찬송가가 있더라도 몇 장씩 낱개로 돌아다니던 것을 언더우드는 혼자 150장을 번역하여 책으로 엮어 1893년 간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언더우드는 힘을 다하여 복음의 씨를 한국에 심었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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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14 – 18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1883년 민영익은 조선통신사의 대표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던 중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가우처 박사는 이 요청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조선선교헌금을 하면서 1884년 1월 당시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조선의 답사를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멕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조선에 입국하여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던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에게 조선에서 선교회가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조선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고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안수하고 파송에 들어갔습니다. 이 와중에 알렌 선교사는 1884년 9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먼저 의사의 자격으로 입국해 있었습니다. 1884년 12월 1일 조선에 갑신정변이 터졌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민영익은 서재필의 칼을 맞아 온 몸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한의사들이 고칠 수가 없자 미국 공사의 추천으로 알렌이 수술하고 명주실로 꿰매어 완치시킴으로 서양 의술의 탁월성을 보여줌으로 선교사들이 왕실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알렌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연대의대의 전신)을 세워 조선인들을 치료하기 시작함으로 조선 선교의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조선 선교는 병원, 학교, 교회의 삼각편대로 이루어져 병원과 학교를 통하여 복음의 밭을 기경하고 교회는 추수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눅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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