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7. 23-27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48년 믿음 때문에 루마니아의 어느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심한 고문과 심문, 어쩌면 수년 동안의 감옥생활과 죽음까지도 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견딜 만큼 자신의 믿음이 강한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성경에 하루 하루를 위해서 366번이나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적혀 있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365번이 아니고 윤년까지 생각해서 366번이나!’ 그리고 바로 그 날이 2월29일이었는데, 이 사실이 더 위안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목사님은 14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고 출감하였고 2001년 92세의 일기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언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신 이 언약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보장됩니다. 이런 믿음의 기초가 있기에 우리에게는 믿지 않을 핑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488장)라는 찬양은 19세기 중엽에 26년간 영국 서섹스 호셤에서 사역한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시로 이런 진리를 명확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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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16-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28:16). 이사야가 믿음을 촉구한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을 언급한 이사야의 다른 구절들과 연결하여 믿음의 도를 설명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15). 그래서 이사야 28장과 8장의 말씀을 함께 놓고 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기촛돌이거나 아니면 걸림돌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반석이시며, 우리는 그분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거나 아니면 그분한테 부딪쳐 정강이가 깨지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시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는 구원 사이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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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9  13

존 스토트 목사님은 신약 성경에서 위에 upon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왜냐하면 그 단어가 쓰일 때마다 그분은 터와 기둥과 기초로 그려지고우리는 그 위에 서고 그 위에 기대고 그 위에 짓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주님은 우리 믿음의 삶의 견고한 기초가 되심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도적으로 은혜를 베푸셨으며위에 라는 단어는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셨고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 위에서 안식을 누리며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고우리는 그 독특한 계시 위에 우리의 삶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7-8세기경 불린 라틴어 찬송을 하나 보겠습니다그리스도는 견고한 기초하나님이 택하신 보배로운 머리이자 또한 모퉁잇돌온 교회를 하나로 묶는 거룩한 시온의 영원한 도움오직 하나뿐인 의지할 분.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5).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온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한 풍족하고 완전하고 충분한 제물을 드리신 뒤에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속죄의 사역은 완수되었고 그분은 이미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우리는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일을 다 이루시고 쉬신다면 우리도 그 완성된 일 안에서 혹은 그 위에서 쉬어야 합니다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히브리서는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안식할 것을 또한 강조합니다(3-4). 여기서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는데 하나는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이며다른 하나는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95:11)는 엄중한 경고입니다이 둘을 근거로 저자는 하나님은 지금도 그 백성에게 약속하시는 안식이 있으며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정확히 추론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4:3 사역). 여기서의 안식은 구원받음을 의미하며구원받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오래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그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2:10 사역)

 히브리서 저자는 안실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라고 말한 뒤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4:10)고 덧붙입니다이것은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일과 쉼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입니다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우리는 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 안에서 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려고 애쓰던 일들을 그치고 쉬고 있는 것입니다구원의 믿음은 곧 안식의 믿음이며 전적으로 구주를 의지하는 신뢰입니다선교사 존 페이턴(John Paton 1824-1907)은 남태평양의 아니와 섬에서 그들의 언어로 요한복음 1장 12절을 번역하다가 이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그 섬 주민들은 식인종이었고 사람을 믿지 않았으며그들의 언어에는믿는다는 말이 없었습니다마침 원주민 일꾼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에 발을 바닥에서 떼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요?하고 물었습니다일꾼은 몸의 무게를 몽땅 기대라라는 동사를 써서 대답했습니다그래서 페이턴은 요한복음 전체에 나오는 믿는다는 말을 바로 그 단어를 써서 번역했습니다아주 적합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믿는 것은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우리가 믿는다에 관한 원어를 가지고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은 신봉하다 believe into라는 의미의pisteuo eis를 사용한 반면사도행전은 의지하다 believe on 라는 의미의 pisteuo epi로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는 빌립보 간수의 불안한 질문에 바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답했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의지하라), 그리하면.구원을 받으리라(16:31; 참고9:42; 11:17)). 현대 교회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영적으로 불안하고 초조하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이 품는 그런 확신을 무리한 억측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참된 확신은 억측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입니다그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고요하고 겸손한 확신입니다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믿음의 능력의 참 비밀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마르틴 루터는 그의 탁월한 갈라디아서 주해에서 믿음은……고귀한 보석이신 그리스도 예수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위협으로 유다가 흔들릴 때 유다는 누군가를 의뢰해야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이들은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뢰하면 안되었습니다그러면 누구를 의지하여야 할까요여기 이사야의 답변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하나님의 백성은 이 기촛돌을 의지해야 합니다이사야가 말한 기초돌은 다윗 왕조를 가리키는데그 왕조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는 선한 왕 히스기야로 대변되지만 미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도록 되어 있습니다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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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4 – 6. 8

1662년 성공회 기도서 개정판의 중심 원리를 설명하는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공예배서가 최초로 편집된 이래로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즉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는 극단과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영국 성공회의 지혜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지헤를 주시며 이를 교회의 사역뿐 아니라 사회, 윤리, 정치 영역에도 적용하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기독교적인 잔소리꾼들도 필요하고, 우리가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꾸짖는 기독교적 감독관들도 필요합니다. 잔소리꾼과 감독관이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소리꾼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쪽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여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가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24:3-4).

우리는 과거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만큼 현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결됨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성경은 진리 없는 연합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합 없는 진리 추구 또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립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 안에서의 교제 또한 정당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극단으로 치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구조와 비구조 형식과 비형식, 권위와 자발성, 독립성과 교제가 모두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건전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순절 직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떡을 뗐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행2:46). 초대교회 성도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복음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집회로 성전의 형식적인 예배를 보완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는 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와 가정에서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교제를 함께 시행했습니다. 이 둘의 결합은 매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을 좋아하는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교인들은 가정 예배의 자유스러움을 경험할 필요가 있고, 활기차고 자발적인 참여를 좋아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을 중시하는 예배의 장엄함과 경외감을 체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라는 책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회심 후에 기독교의 순회 전도자가 된 분입니다. 한번은 힌두교 대학에서 비교 종교학을 가르치는 어느 불가지론자 교수가 그에게 시크교에서 얻지 못한 것 중 기독교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선다 싱이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교수는 “그거야 나도 압니다. 이전에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원리나 교리를 찾았느냐 말입니다.” 라고 답답하듯이 말했습니다. 이에 선다 싱은 “내가 찾은 특별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 초점이 예수 당신께 맞추어져야만 비로서 진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믿음과 삶은 어떤 것이지 그 본연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가꾸어갈 것인가를, 어떻게 하면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시도록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기도의 틀에 놀라게 됩니다. 거의 모든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께 바쳐지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이 보편화된 기도 공식은 우리를 ‘중보’라는 개념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활동들을 직접 취하시지 않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하시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활동하셔야만 하고,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온 한 가지 근본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우리 구주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나님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놓는 다리들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와 무한한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생각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는 차이보다는 유사성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사고력을 통해 그분의 합리성을,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양심에 새겨진 도덕을 통해 그분의 거룩함을 조금이나마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간격은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모습도 없으시고 처음부터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그분의 상상력의 발현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그분을 담기는 고사하고 그분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하며,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시작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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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2 –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고 행하신 구속의 일을 하나님은 ‘단번에hapax’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관련해 히브리서 저자가 즐겨 쓴 단어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유다서에도 같은 표현을 써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를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드리신 것도 단번에 된 일이고,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단번에 된 일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정도나 그분과의 관계 수준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이해나 관계를 가능케 하고자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예수님을 통한 그분의 계시와 구속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하신 것 이외에 더 계시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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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18 – 22

히브리서 1장 1절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자신을 알려주신 그 계시는 형태가 다양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부분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진적인 계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즉 하나님은 단계별로 조금씩 자신을 계시해 오셨고, 각각의 새로운 단계는 그 이전의 단계들을 기초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런 드라마의 대단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계시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은 이런 완성을 가져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들과 수식이 그분께 주어지는데, 우주와 관련해서는 ‘만유의 상속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2절) 지금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3절) 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가 처음부터 대행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어느 날 정당한 유업으로 그분께 귀속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하나님과 관련해서 그분은 우선 ‘아들’로 불리웁니다. 그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높은 이름이요 그들 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입니다(히1:4).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3절)이십니다. 둘 다 강력한 수사적인 표현으로, 한편으로는 햇빛이라는 외부 세상에서 또 한편으로는 문서와 밀랍과 도장이라는 내부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단어와 이미지로 표현 가능한 한도 내에서, 두 가지 모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태양에서 계속 비추는 햇빛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니케아 신경에는 이것이 ‘빛에서 난 빛’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밀랍에 찍힌 도장처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이 두가지 표현은 서로 합해져 의미를 보완해줍니다. 즉 햇빛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을 강조하는 반면, 밀랍에 찍힌 도장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1장 3절에서는 아들이 그 존재에서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동시에 그 인격에서는 아버지와 구별된 자(‘그 본체의 형상’)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취하시고(히2:14) 우리처럼 고난과 유혹을 경험하시고(2:10,18)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히2:9,14) 분이시지만, 바로 이분이 영광스럽고 유일무이하신 분, 곧 아들, 광채, 아버지의 형상, 창조주, 만물을 붙드시는 분,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친숙한 인간의 정황 안에서 그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도 되시기에 우리는 동시에 그분의 인성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본체와 목적을 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그분은 우리에게도 같은 권한을 주시며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그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직접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최고 목표로 ‘구하고’ 그 나라의 성장을 최고선으로 삼아 거기에 우리의 삶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을 봅니다. 구약의 권위에 겸손히 복종하시고, 구약의 근본 원리들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시며 구약과 모순되거나 그것을 혼잡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전통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또 우리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존중하시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우리는 죽음의 실체 앞에 분개하여 ‘호령’하시고, 귀신들을 명하여 쫓아내시고, 위선자들에게 분노와 경고를 발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자신에 대해 기록된 고난의 길을 비껴가지 않으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를 맛보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즉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천하의 권세를 주장하시며 제자들을 향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명하시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분이 행하신 더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알아보게 되는데, 이는 그분의 태도와 행동 가르침 그리고 표적들이 하늘 아버지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님은 가르치기 위해서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구속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죄와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두 가지 일에서 모두 대행자이며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히1:3)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빌려왔습니다. 사실 히브리서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신 그분은 아론보다 크십니다. 그 제물은 황소도 아니고 염소도 아니고 어린 양도 아니고 바로 그분 자신이었습니다.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올 실체, 즉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리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희생양이라는 상징을 담대하게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히9:28)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히10:4),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매일말씀나눔

2018. 6. 11 – 15

희열이나 고통,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 선이나 사랑의 순간에 곁으로 지나가시는 그분을 잠깐 보기만 해도 우리는 충만한 초월적 실체에 전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일종의 중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영광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솜씨를 통해, 고결함과 타락성이 공존하는 인간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갖가지 반응을 통해 하나님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보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가리켜 보이는 높이와 깊이는 우리가 오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동시에 좀 더 인간적인 중보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짐작한 실체가 아무리 깊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무한한 타자이신 까닭입니다. 이 타자가 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 한 번 오신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을 때였습니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은 인간의 형체를 입은 참된 ‘영광’, 인격적 존재 본연의 광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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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주님은 유대교의 기성 체제를 주저하지 않고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순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들(장로들의 유전)을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 (막 7:1-13). 또한 주님은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 데도 거침없으셨으며,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던 계층들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허용되지 않던 여인들과의 공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이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였고, 제자들 역시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 어린아이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을 던진 나병환자를 만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관습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마음과 양심을 매어 두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비평하는 데 있어서는 급진적으로 되심으로 보수와 진보를 독특하게 결합시키셨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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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읽기

2018. 5. 21 -25

지성과 사랑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성과 감정 모두 본래적 인간의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도 아니며 메마른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따듯하고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우리에게 열리게 되면 우리는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분노하거나 사랑하거나 경배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부활절 오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를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자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그 두 제자는 그날 오후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느낌을 마음이 뜨거워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뜨겁게 만들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시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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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예배

2018. 5. 14-18

리처드 닉슨이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 자신이 1960년 존 F. 케네디와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배한 것이 케네디가 텔레비전에서 훨씬 좋은 이미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샬 맥루한을 불러 자문을 구했더니 그는 “선거란 이슈가 아니라 이미지 싸움”이라고 강조하여 칙칙한 변호사 이미지를 따뜻하고 활력있는 이미지로 바꾸도록 하였고 그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책임을 포기한 채 주요 정책에 대한 토론보다 자신의 느낌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고 투표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지성주의는 교회 안에서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합리적인 계시를 주신 하나님은 이성적인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행동하지 말고 지혜에 있어서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시32:9). 사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늘 지혜와 모든 총명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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