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읽기

2018. 5. 21 -25

지성과 사랑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성과 감정 모두 본래적 인간의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도 아니며 메마른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따듯하고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우리에게 열리게 되면 우리는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분노하거나 사랑하거나 경배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부활절 오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를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자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그 두 제자는 그날 오후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느낌을 마음이 뜨거워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뜨겁게 만들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시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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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예배

2018. 5. 14-18

리처드 닉슨이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 자신이 1960년 존 F. 케네디와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배한 것이 케네디가 텔레비전에서 훨씬 좋은 이미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샬 맥루한을 불러 자문을 구했더니 그는 “선거란 이슈가 아니라 이미지 싸움”이라고 강조하여 칙칙한 변호사 이미지를 따뜻하고 활력있는 이미지로 바꾸도록 하였고 그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적 책임을 포기한 채 주요 정책에 대한 토론보다 자신의 느낌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고 투표하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지성주의는 교회 안에서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합리적인 계시를 주신 하나님은 이성적인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행동하지 말고 지혜에 있어서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시32:9). 사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늘 지혜와 모든 총명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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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5 7 -11

오늘부터는 “균형잡힌 기독교 Balanced Christianity”(존 스토트)를 가지고 묵상해 보는 기회들을 갖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권위 있는 가르침과 대속적 죽음, 부활의 역사성과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을 믿으며, 성경이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으로 기록된 것과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로 거듭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세상을 섬기도록 보냄 받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교리와 다른 위대한 성경적 교리들 위에 견고히 굳게 그리고 함께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목회 사역, 침례의 자격, 교회와 국가의 관계, 은사의 수용 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경건하면서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문제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아디아포라, 즉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 성경에서 얻은 확신을 관철시키고 싶겠지만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각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리처드 박스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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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4.30 -5.4

어떤 잘 알려진 목사님은 젊었을 때 큰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자주 야단치고 때로는 때렸다고 합니다. 한 번은 화가 나서 큰 아이의 따귀를 때렸는데 얼굴에 손자국이 난 상태로 아파트를 나가다가 여러 교회분들을 만나게 되어 그분들이 “네 얼굴에 왜 손자국이 난 것이냐? 누가 때렸니?” 하면 “아버지가 때렸어요!” 하고 다님으로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던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변했다고 한 말이 30년 전인데 그 후 그 큰 아들은 장성함에 따라 큰 사고를 치고 가정과 교회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가정 예배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모두 잘 키워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 부부가 자녀들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지만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등한히 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 상태에서 야단치며 매질만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대입니다. 징계가 바로 되기 위해서는 훈계가 따라야 합니다. 훈계가 있을 때 징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아니할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는데, 당연히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먼저 서 있어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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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4. 22 – 26

오늘부터 부부 사이의 문제를 정리하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 오륜이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오륜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붕우유신, 장유유서이며 그 중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친애는 본능적이고 천성적인 사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일반계시에 터잡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녀에 대하여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 하셨고, 부모에 대하여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기준인 임금이나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유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기준이 됨으로 보다 분명하고 차원높은 실천 강령을 주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실현되려면 먼저 부모는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는 남편에게 하기를 주께 하듯 하는 어머니이며,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셔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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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4.16-20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솔로몬은 여기서 자신의 아내를 두가지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잠근 동산’이고 또 하나는 ‘봉한 샘’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남편에게 아내의 즐거움들을 열어 채워주라는 호소입니다. 성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여인을 우물 또는 샘으로 표현한 고전이 더러 있습니다. 우물은 샘과 함께 근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기쁨의 근원이요, 행복의 근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뿌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내를 샘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샘이 없다면 갈증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갈증이 극도에 달하면 죽게 됩니다. 가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마땅히 시원한 생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아내가 제대로 구실을 못하면 그 가정은 삭막한 사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가 서로에게 있어서 항상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부부의 행복을 지키는 열쇠, 곧 부부의 황금률은 무엇이겠습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그것을 3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1) 마음을 지키라 (2) 서로 헌신하라 (3) 서로 만족하라. 이런 말씀을 실천하기 쉽지 않아 보이며, 어느 가정에서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은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우리는 배우고 깨달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인간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기를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혹은 남편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난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옥목사님이 말씀하신 부부의 황금률 3가지 중 첫 번째는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서 항상 마음을 곧게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결혼식의 서약 시간에 주례자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서약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한 부부는 서로가 완전히 내맡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향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배우자에게만 쏟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 의식입니다. 그런즉 남녀가 결혼을 하면 운명공동체가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관계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믿을 수 있는 관계 또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부 관계는 감정에 근거를 둔 사랑일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이 일생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특히 남자들의 마음이 해이하여지기 쉽습니다. 자녀들을 다 키운 부부의 경우 늘상 똑 같은 상황에 결혼 생활을 권태롭게 여길 수 있습니다. 50이 넘은 부부의 경우 심지어 자녀들을 키우는 공동의 책임이 끝났다고 느껴 남편의 그늘에서 혹은 아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여 이혼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것이 요사이 현실입니다. 이때 “나는 내 아내(혹은 남편)에게만 마음을 주기로 서약했다. 그런데 혹시나 마음이 흐트러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을 포함하여 우리 각 자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옥목사님의 황금률 두 번째는 서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결혼 생활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과 결혼을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는 희생이 따르니까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려면 서로를 위해 도와주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인격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을 볼 때 인격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바로 이때 남편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인격을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 한 그 아내의 인격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들을 생각할 때 다른 남편들에 비해 어딘가 뒤떨어지고 마음에 존경이 가지 않는 약점이 눈에 보일지 모릅니다. 바로 이때가 아내들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 희생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됩니다. 부부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모난 성격이 아내의 덕을 통하여 깎여야 하며, 아내의 비뚤어진 성격이 남편의 건전한 성격을 통하여 점차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가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부가 서로의 인격성숙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해 주지 못한다면 그 부부는 노년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존 포웰이라는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만들어가는 것이며 이런 것이 부부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옥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세 번째 부부의 황금률은 서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완전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성숙하고 훈련될 때 비로소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 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그만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요, 훈련받는 것이요, 질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 투성이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부부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가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주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검토 받을 때 주님이 부부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정에 모시고 사는 한 그 가정의 행복은 유지될 수 있지만, 가정의 주인이 주님이 되지 아나히는 부부는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에 언제든지 서로를 비난하고, 보이는 흠을 기회로 삼아 불만족하려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된 부부나 가정은 항상 가정의 주인되신 주님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서로 받아 주는 삶을 영위함으로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우리 가운데 아직도 이기주의적 신앙, 이기주의적 결혼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그것을 발견하여 도와주십시오.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아내가 밑거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부부는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가 있으며 서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아내 혹은 남편을 위해 도와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런 가운데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이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4-6).

매일말씀나눔

2018. 4. 9 -13

아내는 남편이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만큼은 자상하게 배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질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크리스천 작가의 고백입니다. “나는 해외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인데 비행기 화장실에 가면 거울 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다음 손님을 위해 물기를 닦아주세요’ 나는 세면을 한 후에 정말 열심히 물기를 닦는다. 어떨 때는 내 앞사람이 어질러놓고 간 휴지 조각이나 거울에 낀 때와 바닥의 물기까지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럼 남을 배려해야지’ 하며 아무리 피곤해도 그 일을 거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처럼 깨끗이 정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뭐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 있어? 기본이 안 된 사람들이구먼’ 그런데 막상 집에 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아내와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지만 아내를 의식해서 배려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세면대 위의 물이며 거울에 튄 비누 거품, 제대로 닫지 않은 치약 뚜껑, 흩어진 머리카락 등등 신경쓰여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나오기 일쑤였다.’ 사실 남편들은 ‘전혀 모르는 남보다 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내’ 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시선을 돌려서 내 아내도 나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방법은 바로 이런 것이고, 주님이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실천은 역시 자신의 아내에게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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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4. 2  6

대학교 교수가 된 어느 부인은 고백하기를 남편이 자신의 공부 자세를 보고  내가 당신의 공부를 밀어주겠다 한 뒤 자신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일체의 뒷바라지를 하여 드디어 자신을 교수로 성공(?)시켰다고 한뒤학생들에게 이렇게 남편이 자신을 도와주었기에 나는 남편을 버릴 수 없어요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그러나 문제는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아내를 사랑하는가?’ 입니다성경은 결혼을 했으니까 마땅히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의무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은 남편들을 향하여 내가 교회를 사랑하듯 너도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고 계십니다이 질문 앞에서 가책을 받지 않을 남편은 없을 것입니다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믿음이 약한 사람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은 죄책감을 느낄 것입니다사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사랑이었습니다가장 완전한 희생을 담은 사랑이었습니다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도 이처럼 철저한 희생을 수반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쳐주십니다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의 순종은 여기부터 시작되는 것이며동시에 가정의 행복 역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남편되신 분들은 오늘 이 내용을 숙지하시고 아래 성경구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기시면서 아내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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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3.26 -30

고난주간

일요일(3.25)부터 금요일(3.30)까지는 이른바 고난주간입니다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유월절 엿새전 토요일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 도중 주님께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습니다(12:1-8). 이틑날 일요일 아침에 감람산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베다니를 떠나 주님은 감람산 벳바게까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고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셔서 이를 타고 약 1킬로를 내려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21:1-11/ 9:9성취).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으니 이는 나사로를 살린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2:17-19).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세계각지에서 오므로 그 무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그것은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19:41-44).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11:11).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고 가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시자 그만 저주하셨습니다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쫒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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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3. 19 – 23

아내에게는 남편을 사랑하라는 대신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도 주님께 복종하듯이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상하게도 아내들에 대한 교훈은 전부 복종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복종도 사랑을 포함한 복종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강조점을 다르게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오늘날 교회에 몸담고 있는 하나님의 딸들에게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과제가 복종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들에게는 왜 남편을 사랑하라는 말씀대신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도록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을 준 로마사회에는 일부다처제의 사회요, 여자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전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좋든 싫든 속으로 모든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야만 하였습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아내가 어떻게 남편을 마음에서부터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던 당시 예수 믿고 교회에 들어온 여자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가슴 속에 응어리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과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확정하고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존경받을만한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남편을 머리로 삼고 복종하면서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가정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가 정착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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