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2.26  3.2

젊은이들이 서로 결혼을 할 때는 서로 낭만적인 사랑을 가짐으로 맺어집니다이 사랑은 아릅답고 풍요롭우며 황홀하기까지 합니다그 사랑은 인생의 갖가지 추한 것들과 고통스러운 것들을 보지 못하게 가려 주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래서 상대방의 약점을 보지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약점까지도 매력으로 느끼게 하는 희한한 마술을 부리기도 합니다참 신비합니다그러나 우리가 명심해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그것은 무엇이 인간에게서 이 아름다운 낭만의 사랑을 빼앗아 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얻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대답을 통해서 또 한걸음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고 그저 눈이 어두운 채 낭만적인 사랑에만 매달려 감정적인 부부 생활을 하려고 하는 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사랑의 낭만에 취해서 신혼 생활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잠깐뿐이었습니다무엇이 그들의 행복한 순간들을 빼앗아 갔습니까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입니다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무서운 죄를 범하는 순간부터 행복한 사랑의 보금자리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우리는 성경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이러한 진리를 마음 깊이 명심해야만 합니다이 진리는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중요한 교훈입니다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11:27-28).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2. 19 – 23

성경에 욕심이 지나치면 죄를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빙자한 이기심을 자제하지 못하면 결국 죄를 범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가정이 파괴되어 부부가 나누어지고 자녀가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더러워지거나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기도가 쉽게 막힙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이기주의자가 될 때 더러워집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더러운 마음이 가득할 때 당연히 하나님 앞에 기도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려는 사람은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기주의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이 침침하고 더러워져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술에 취한 사람처럼 자기 통제가 곤란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지,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가족 간의 사랑이 혹시나 힘을 잃고 쓰러져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2. 12 -14

말세가 되어 사랑이 식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때 사랑에 대해서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곳은 가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가정은 사랑이라는 토양에댜가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정은 가족들의 사랑으로 구성된 유기체입니다. 진부한 표현 같지만 가정은 사랑의 샘이 솟는 우물이요, 그 사랑을 마시며 해갈할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오아시스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가 되면 가정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무엇보다 가정의 붕괴라는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가족 관계가 변질되는 사회 현상을 앞에 두고 우리가 어떤 낙관적인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이 사회에서 사랑의 수준을 측정해 볼 수 있는 온도계와 같습니다. 온도계는 기온에 매우 민감하고 가정은 사랑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느 정도 식어가고 있는가’ 혹은 “사랑이 있어 훈훈한가?” 하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얻으려면,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차례로 짚어 보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서로 비난하고 다투고,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여 자녀의 얼굴이 항상 어두우며,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대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부 사이에 서로 위해주고, 부모는 자녀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고 인도하며,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를 존경하고 감사해 하고 있는지 등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삶의 태도들을 생각해 보고 가정의 사랑의 온도를 한 번 체크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가장 비참한 가정은 아버지가 폭군으로 절대 권위를 휘두르고 사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가정은 그 분위기가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정의 가장은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정의 주인이심을 고백한 뒤 스스로 무릎을 꿇고 그분의 종이요 청지기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정은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고귀한 선물로 취급되고 그 가정의 구성원 하나 하나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역할을 할 것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하는 좋은 가장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서 존경하며 받들고 살아가고, 자녀들은 부모님을 공경하게 되는 것 역시 자신들의 주님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시십시오. 가정에 이런 주님의 가르침이 제일 우선시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주님으로 존중받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오늘부터라도 전 가족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의 가장 근본되는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면 그 가정은 질서가 잡히고 평안한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 29 -2.2

골로새서 4장 15 16절 말씀은 지나치기 쉽습니다. 특히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값진 보화가 숨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로서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라오디게아 지방에도 교회가 생겨나게 했으나, 라오디게아 지역의 성도는 불과 몇십 가정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볼 때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는 자연히 개인 집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눔바와 같이 “우리 가정에도 교회가 있어요”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 하시기 바랍니다. 그 귀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분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을 계기로 자신들의 가정에, 또 신앙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시면서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내에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할 만큼의 영적인 변화는 기도부터 시작된 순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마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7-18)

우리는 모두 가정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가정이 없었다면 우리가 태어날수도 없었을 것이고 직장일을 끝마치면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며 죽을 때에도 가정에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든지 그 존재 자체가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정과 신앙생활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용어들을 살펴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정의 분위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분위기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고 또 가정의 용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바로 가정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이 각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가정에서 경험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를 않아서 대학을 다닐 때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노동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친이 연세가 드시자 자신이 봉양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고백하기를 ‘아버지’라는 호칭이 자신에게는 좋은 의미로 다가오지를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정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 가족 구성원 사이에 서로 위로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있으면 서로 짊어지고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교훈은 성경은 물론 동서고금에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가정의 도리를 교회에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인식해야 합니다. 가정을 모르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 가정을 바탕으로 할 때 신앙생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너희 집에 교회가 있느냐?”라고 묻는 말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가정에 교회가 없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그런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 자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문제점으로 남아 있는 면입니다. 즉, 빌딩 교회가 가정 교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주일을 맞으면 우리 성도들은 교회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깊이 체험합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말씀 들으며 또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서로가 한 몸인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빌딩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이 지나면 이 빌딩 교회는 흩어집니다. 이 무리가 흩어져서 각자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전부 가정 교회로 분산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마디로 가정 교회의 부재 현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고통하고 있는 큰 원인은 가정 교회가 든든하게 서 있지 못한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눔바 그 여인의 집에 있는 교회’ 라는 말처럼 ‘— 성도, 그분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무엇보다도 두가지 면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절대 권위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그분은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교회가 있으면 그 가정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가정에 가장 존귀한 분이요 제일먼저 경배를 받으실 분이요 권위 중의 권위가 되시는 것입니다. 실로 가족 모두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그 가족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가정안에 절대 권위가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권위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현대 가정은 붕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빌딩 교회를 공격하는것보다 가정 교회를 더욱 공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빌딩 교회에 아무리 많은 성도들이 모여도 마귀는 겁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주일이면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가 돌아가는 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확장해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으나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아무런 힘이 없는 군중으로 평가 절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겁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무엇을 겁내고 있을까요?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 특히 가정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요즈음 서구 사회에는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통계에 의하면 크리스천 부부의 경우에는 40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을 한다 합니다. 신자 부부와 불신자 부부를 비교하면 이혼하는 빈도 차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 가정 중에서도 가정에 교회가 있는 부부 즉, 집안에서 자주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리고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는 이혼율이 400쌍 가운데서 불과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연구 보고서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붕괴하는 현대 가정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열 가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각 가정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수립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바르고 건전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가정의 머리가 되셔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서로 간에도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님이시기에 주님을 경외함으로 서로 간에 복종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매일말씀나눔

2018.1.22-26

진정한 부부애 진정한 가족애는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아내의 소원을 다 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인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 영적인 갈등이 계속되는 이상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꽃 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는 부인을 통해서 남편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인이 남편에게 삶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서 평화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야말로 남편이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인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남편이 부인을 따라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를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막내 며느리 되시는 어느 권사님은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면서 밤낮 생각하는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시어머니를 내 집에 모시자”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두려워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신주단지를 없애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화를 당해도 제가 당할 터이니 주십시오” 하고는 담대하게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 뒤 시어머니는 예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1).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요 네가 남편을 구원 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남편된 자요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고전7:15-16). 15절의 앞 부분의 뜻은 안 믿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신앙 문제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만 보고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 중인 믿지 아니하는 남편과 이혼하고 교회다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적용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15절 후반부와 16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나눠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행할 때 그 가정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예의 주시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이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는 역사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아무리 고통과 갈등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가정을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가족 모두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6).

우리는 믿지 아니하는 가족들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대립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건전하고 더 아름다운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정을 파괴 하는 독소가 될 수 없고 부부간의 애정을 깨뜨리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가족으로 인한 그 눈물 그 고통 그 한숨은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고전 7:14)라고 쓰고 있는데, 예수 믿는 아내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거룩해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헬라어 구문을 보면 “거룩하게 되고”라는 말은 완료형 수동태이자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는 문장 앞에 둡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이어 “아내로 말미암아”는 말이 따라오는데 헬라어를 직역하자면 “아내 안에서 in the wife”가 됩니다. 이 뜻은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에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뜻은 아내가 믿는다고 혹은 남편이 믿는다고 믿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아니고, 믿음에 무슨 마법적인 힘이 있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는 믿는 아내나 남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 전서 6:15-17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5-6).

예수 믿는 사람의 거룩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나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되심과 동시에 그 마음에 성령님이 와서 거하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 예수 믿는 부인 때문에 거룩해진다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거룩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전서 7:14의 말씀에서는 안 믿는 자가 믿는 자 안에서 거룩해 진다고 쓰고 있을까요? 이 거룩은 의식적인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거룩한 존재였고 그 제사장의 손길이 닿는 것마다 거룩해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고 사도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은 깨끗하여 버릴 것이 없는데 특별히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기도함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거룩해지는 의식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한 가정의 중보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가 기도해 주는 남편과 자녀는 거룩해져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가 예수 믿고 남편은 안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내에게만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시고 남편에게는 멀리하시지않습니다. 부부를 똑같이 은혜로 감싸 주시고 포근한 날개로 덮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내의 기도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으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찬송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집안에서 기도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기도 소리가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집안에서 성경 읽는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성경 읽는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구 한말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 최초로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우신 사무엘 마펫 목사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의자 옆이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짧은 성경 구절을 읽은 후에 기도하시곤 하였는데 이를 들은 그의 셋째 아들 사무엘 휴 마펫은 고백하기를 “아버지의 기도는 단순하고 심오했다.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듯이 아버지는 기도했다. 그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던가!” 라면서 기도는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일부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은 가족 전부를 하나님 앞에 구분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식탁 옆에서 어린아이가 밥 먹기 전에 “아빠는 왜 식하실 때 기도 안 해요?”라고 물으면 아빠는 은근히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 대답을 잘 못합니다. 이렇게 아이의 기도하는 모습을 아빠가 볼 수 있는 집안 분위기, 그것이 벌써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구 중에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는 자기 식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우리는 흔히 믿는 부인과 안 믿는 남편이 같이 살 때 부인이 안 믿는 남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 유혹의 물결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가 믿는 식구를 영적으로 이기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아내를 통해서 그 남편이 거룩해진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진리가 이깁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가정에서는 믿는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남편을 또는 아내를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살아있는 한 여러분은 이깁니다. 이런 긍정적인 믿음의 시각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어야 올바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상황을 탓 할 필요가 없이 주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이렇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여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매일말씀읽기

2018.1.8 – 12

사랑의 대화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잠언은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말’은 ‘즐거운 말’ 혹은 ‘친절한 말’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로 ‘주어진 상황과 때에 맞는 적합한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다툼이 있어 대화가 단절된 그런 상황과 때에 적합한 말은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한 상대방이 찾아와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말이나, 다투던 남편과 아내가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주님 안에서 용서하며 위로하는 말을 나눈다던지, 남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덮어 주기 위해서 눈물로 대화를 나누는 그 말이 선한 말입니다. 그런 선한 말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꿀송이 같다고 했습니다.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말을 듣는 그 순간, 그 뼈의 모든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이만큼 사랑의 대화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부모 형제 사이를 한번 검토해 보길 바랍니다. 부부 사이도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사랑이 넘치는 대화 대신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오해가 쌓이고, 마음속에 원통함이 있다면 이 말씀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가정에 대화의 꽃을 활짝 피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16:20).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 2 – 5

가정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 가장 어려운 사람은 자기 잘못을 전혀 시인할 줄 모르고 동시에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부 간의 갈등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이렇게 고부 사이에 갈등이 밖으로까지 나타내질 때 많은 사람들은 나이 많으신 어머니보다는 젊은이를 나무라게 됩니다. 그런데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가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잘못을 용서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관, 자기 고집을 가지고 자녀를 원망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쳐져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그와 같은 태도를 끝까지 고수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자식들을 동정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말로는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먼저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식들, 며느리들과 자신들 사이에 막혀 있는 현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모든 사태 해결의 첫 걸음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면 자녀 앞에서 잘못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면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만약 자식의 잘못이라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격이 급하신 분들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유순한 말로 타이를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이해력을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정에 열매를 맺게 되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발견될 것입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15:7-8)
더 읽기

매일말씀나눔

2018. 12. 26 – 29

사람사이나 가족 사이에서도 대화가 단절되면 따라오는 것은 고독입니다. 자기 마음의 텅 빈 공간을 다른 사람과의 대화로 채우지 못할 때 고독이 찾아옵니다. 한 침실에서 자는 부부 사이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모 자식과 형제들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진 바르도 교수는 “고독만큼 무서운 살인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유신정권을 반대하여 잡혀서 독방에 갇혀 지낼 때 옆 독방에 지내던 죄수는 너무나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못하고 혼자 지내게 되자 반쯤 정신이 나가서 가끔 자신이 왕이 된 착각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 중에 큰 소리로 “이리 오너라” 라고 부르면 간수가 “네에” 하면서 가서 보았다고 할 정도로 고독은 사람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대화의 단절이 심하게 되면 여러가지 잘못된 일들이 생기는데 가장 무서운 것은 오해라는 감정입니다. 먼저 상대방에 대하여 섭섭한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섭섭한 감정은 오해를 낳습니다. 그 섭섭한 감정을 계속 풀지 않고 있으면 오해가 계속 쌓여서 마음의 벽이 점점 높아지고 결국 인간관계를 송두리째 마비시키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어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며 원망하고 불평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을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비로서 다른 사람과의 오해도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며 가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