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7.12.18 – 22

오늘부터는 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모음 “예수 믿는 가정 무엇이 다른가?”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정이라면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사회조직입니다. 그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요람인 동시에 사랑의 학교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정은 항상 문제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현대에는 가정의 형태마저 위태롭게 변모하고 있으며 많은 갈등을 내재한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의 가지가 복잡하게 뻗어 있다 할지라도 그 뿌리는 한곳으로 모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거역하는 사람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있습니다. 남녀를 창조하시고 제일 처음 결혼 주례를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영구불변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대의 신화처럼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서구 사회의 가정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었고 심지어 동성혼까지 합법화를 시킨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그 영향이 심대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 모든 가정 구성원들이 그 말씀에 순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목회 경험을 통하여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가정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이 치유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의 가정들은 병들어 썩어가는 현대 가정의 방부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주님의 빛을 환히 비추는 램프가 되어야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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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7.12.11-15

한국 구세군은 1907년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1829-1912)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국 유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부스는 한국원정 즉 선교를 결심하고 먼저 수행원을 한국에 보냈다가, 1908년에 이르러 호가드 대령 부부를 한국 원정 사령관으로 파송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호가드 사령관은 도착 즉시 선교를 개시 하였습니다. 그후 1909년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구세군 본영 사무실을 차리고 “구세공보”를 창간했으며, 그 이듬해에 구세군사관학교와 서울 교회당을 개설하였습니다. 1924년부터는 빈민 숙박 사업을 개시하고 1928년부터 자선냄비를 시작했습니다. 양화진에는 4-5명의 구세군 장교와 어린이들이 묻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국 구세군 중 헌신적인 두 분의 삶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도식(리처드 윌리엄) 부령입니다. 그는 1878년 영국 런던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런던 거리에서 가두 전도에 참석했고 12세부터는 ‘꼬마 음악단’ 단원으로 활약하였을 정도로 구세군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럽 각국과 남아프리카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지를 두루다니며 구세군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1918년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세군 육아원에 천연두가 퍼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전염되어 1920년 별세하였고 그의 기념비가 북아현동에 세워져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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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4 -8

이상재, 윤치호, 유성준, 김정식등을 비롯하여 여러 지식인들을 YMCA로 끌어들인 데는 형인 플레쳐 브로크만의 공헌이 컸습니다. 플레쳐 브로크만은 가끔 초빙을 받아 우리나라에 와서 YMCA 지도자 훈련에 공헌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당시 YMCA의 총무 신흥우가 농촌 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흥우는 동생 브로크만과 함께 국제 YMCA를 방문 하고 그 지도자들과 협의회를 가졌는데 거기에는국제 YMCA의 총무를 비롯하여 백화점 경영자 J.C. 페니와 형 브로크만이 참석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레이크플래시드 5인회담’이라는 것인데, 이 회담에서 국제 YMCA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 명의 농촌운동 전문가를 파송하는 동시에 기술 및 재정 원조를 해 주는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형 브로크만의 제일 큰 공헌이라 할 점은 그의 동생 브로크만을 우리나라 YMCA 간사로 선정 파송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생 프랭크 브로크만(1878-1929)이 중국에서 자기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것을 거절하고 한국으로 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02년 대학을 졸업하고 네브라스카 오마하의 학생부 간사로 취임하여 유명한 F.I 윌리스의 총무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05년 한국 YMCA의 공동 총무로 파송되어 내한한 뒤로, 1929년에 죽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힐 때까지 24년간 한국 YMCA를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가 끼친 공헌은 실로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행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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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7 – 12.1
베어드의 교육 사업이 큰 열매를 맺은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교지 자립 정책인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우리 나라 실정에 맞도록 적당히 수정하여 적용시킨 점입니다. 즉, 네비우스의 세 가지 자주 정신 즉, 자력 유지, 자주 치리, 자진 전도의 정신을 평안도 사람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개화, 독립, 하나님 숭배 정신에 접목시켜 발전 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 평양 숭실학교는 학생들이 학자금을 자급하도록 하여 자립 정신을 확립시켰습니다. 사실 베어드의 숭실학교 경영 이상은 미국 미주리 주의 장로교계 학교인 파크 대학과 포이넷트 아카데미였습니다. 이 학교들은 학생 전원이 학생지도관에서 일주일 동안 일정한 시간을 작업하도록 한 뒤 그 수입으로 학생들이 자력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졸업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 정책을 한국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하였습니다만,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글 읽는 것만 자랑으로 생각하던 조선 사람들의 뿌리 깊은 병폐를 개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내에 소위 자조 사업부를 두었고 학생들에게 근로와 자조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제1의 교육목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비었다는 의미임)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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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0 -24

오늘부터는 한국의 성공회 토착화의 주역인 토너 주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터너(Arther B. Tuener)는 영국 출신 성공회 신부로 1862년 8월 영국에서 출생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과 커데스돈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사제에 서품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96년 12월 2일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보다 먼저 1890년 한국에 개척선교사로 파송된 성공회 소속 신부로 코프라는 분이 계셨으며 코프 신부에 의해 한국에 성공회 성당이 정동에 1892년 세워졌고 현재 그 자리에 서울성공회성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도는 터너 신부가 한국에 파송될 무렵인1896년 12월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너는 전도에 열중하는 것 외에 스포츠 보급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관립 영어학교가 1894년 설립되었는데, 터너는 유명한 축구 선수출신으로 이 학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끼리만 공을 차게 하다가 차츰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 되었을 때 영국 공사관 팀과 시합을 하게 됐고 터너는 언제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는 매우 공을 잘찼던 분으로 한쪽 골대에서 공을 차면 저쪽 골대까지 공이 가 닿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터너 신부는 비단 기독교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에 축구를 도입, 발전시킨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이며 공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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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의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 여성을 의사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1890년 조선에 온 로제타는 김점동이란 아이, 후에는 박에스더라 불렸던 한 여성을 자기의 통역겸 간호사로 키웠습니다. 원래 김정동은 이화학당 근처에서 태어난(1876년생) 가난한 집 딸로서 정신여학교의 초대 교사였던 신마리아의 동생입니다. 김점동은 1887년 겨울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턴 부인을 만나고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녀는 특히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보구여관에서 일하고 있던 여의사 로제타 홀의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보구여관(保救女館, 여성을 보호하고 구한다)은 병에 걸려도 아픈 부위를 의사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하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이화학당 구내에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었습니다. 로제타 홀은 남편과 함께 1895년 평양으로 갈 때에도 김점동을 데리고 갔으며, 남편이 죽은 뒤 1895년 미국으로 갈 때도 데리고 가서 의과 대학에 입학시켜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 여성의 본명이 김점동인데도 불구하고 박에스더라 부르게 된 것은 그녀의 남편 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의 민족을 위한 희생봉사와 남편 박유산의 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분 모두 남을 위해 애를 쓰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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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6-10

오늘부터는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평양 지역의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홀은 의사이자 목사였습니다 1860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34살의 아까운 나이였으며, 1891년 12월 한국에 파송된지 불과 2년 11개월만이었고 다음날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감화를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평안하고 살기 좋은 서울을 떠나 멀리 평양에 가서 선교하기를 무척 원했고 청일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 평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자를 돌보고 신자들을 심방하고 밤 예배를 인도하는 등 평양시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장티푸스에 감염이 되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홀이 죽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부인과 아들은 수십년 간에 걸쳐 병과 가난으로 버려진 한국민들을 섬김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한국 땅에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양적인 면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평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선교사 마펫은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기꺼이 한국에 왔고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날 생명의 부활로 무덤 속에서 나올 것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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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30-11.3

소다 옹이 1867년 10월에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같은 해 12월에 미국에서는 레이놀즈 선교사가 태어났습니다. 레이놀즈는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남장로교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라틴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희랍어 등 성서 원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얻은 원어 실력으로 우리 나라 성서번역(특히 구약성서)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대학 시절 만난 부인 팻시 볼링은 버지니아 주 개척자 가문의 출신으로(1868년생) 교사였고, 음악 애호가이며 선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이 두 분은 1893년 한국으로 선교오기 약 6개월 전 결혼하였습니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경위는 1891년 안식년 차 미국에 잠시 귀국한 언더우드의 보고 연설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즉, 1891년 10월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외지선교 신학교연맹 대회가 열렸고, 언더우드는 보고연설을, 당시 밴더빌트 대학에 재학 중이던 윤치호는 조선에 관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조선 선교에의 초청에 레이놀즈, 데이트, 전킨에게 큰 감화를 주었고 3분은 조선 선교를 위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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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27

중일 전쟁이 한창인 때, 하루는 아침 일찍이 일본 헌병대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다 옹은 깜짝 놀라 헌병대에 갔더니 다짜고짜 죄상을 추구했습니다. “영감이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가 항일 교육을 시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제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소, 영감이 보육원 출신 중에서 불령선인(일본의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 나왔단 말이야! 이것은 영감 책임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헌병대가 체포하여 불령선인으로 몰아치는 한국 청년은 가마쿠라 보육원 출신이 분명했으며, 보육원을 나온 뒤 평양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애국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성장하여 독립운동 지하조직의 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다 옹은 그 사실을 알고 놀라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절도범이나 살인범이 아니고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잡힌 애국 투사임을 알고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소다 옹은 그런 내색없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의 불찰이니 용서하고 그 청년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한편, 소다 옹은 원산 감리교회를 목회하러 원산에 가서 8.15 해방을 맞이했고 진군한 소련군을 피해 교회로 도망온 일본인 교인들을 숨겨두고 교회 현관을 지킴으로 소련군을 막아 이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선한 목자로 어려움에 처한 주님의 양떼를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요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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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 20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사람, 무조건 일본이라면 적대시하던 일제 시대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존경받던 일본인 한 사람이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이름은 소다 가이찌입니다. 소다 옹은 1905년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 40년간, 그리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1년간 모두 합해서 41년간 한국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동안 그는 오로지 한국 고아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소다 가이찌는 1867년 10월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훗날 한시를 잘 지은 것을 보면 한학을 본격적으로 배운 듯합니다. 21세부터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했고, 고학을 해서 초등학교교원도 한 경험이 있습니다. 1893년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으로 갔으며 거기서 영어를 열심히 배웠고, 1896년 28세 때에는 대만으로 가서 독일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하면서 독일어를 공부하여 독일어 서적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방랑생활을 하다가 1899년 노상에서 술 취하여 쓰러져 의식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으나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한국인이 한 명 지나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주고 밥값도 대신 치러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소다는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6년이 지나 그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에 가서 은혜를 보답하리라 결심했기 때문이었으니 1905년 6월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땅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복음전도자까지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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