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7. 6. 12 -16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의 개념에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을 포함시켜야만 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세대의 중요하고도 긴급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질병, 무지, 노예 제도의 해악 그리고 다른 형태의 잔인무도함과 착취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부, 고아, 난민, 죄수, 정신이상자, 굶주린 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빈곤을 역사 속으로 보내자’는 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면서, 또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면서 그분의 소유인 이 땅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들은 이 땅이 오용되는 현실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낭비와 소비의 생활 방식으로 이 땅의 오용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창조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반영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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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7. 6. 5 – 9

우리는 제자도를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만 제한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더 넓은 시각으로 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창조된 환경을 돌보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관계를 세우셨다고 증언합니다. 첫째, 인간과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형상으로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들 서로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복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선한 땅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 관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졌습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그들 상호간에 쫓겨난 책임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였고,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선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속 즉, 회복 계획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 때문에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신음하는 창조 세계를 해방시키는 일 역시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들로서 회복을 위한 일꾼이 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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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종종 실패로 점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몇 다른 이유들이 있지만, 그리고 지나친 단순화의 문제도 있겠지마,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 모습이 우리가 선포하는 그리스도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 풀톤의 저서 오늘날의 복음 전도에서 다음과 같은 통찰력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선포는 자신이 말한 바를 그대로 구현해 내는 사람들의 선포다. 그들은 곧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 그리스도인들은.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소통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지 말이나 개념이 아니다. . 진정성은.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전달된다. 잠깐의 불성실로 인해 지금까지 소통을 위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통은 진실한 인격으로 가능하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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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나눔

2017. 5. 15 – 19

우리는 섬김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도중 주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일을 마치신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4-15). 이 당시 문화로는 종들도 등급이 있어 발을 씻기는 종이 가장 천하였습니다. 심지어 랍비의 학생들은 랍비를 위하여 종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였어도 발만을 씻기지 않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일일이 씻기셨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은 30량을 받고 당신을 넘길 기회를 찾고 있는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당시 문화에서 종의 역할도 마다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 역시 우리 문화에서 어떤 하찮고 굴욕적인 일도 마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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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 놓인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주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입니까? 그렇다면 교회는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하면서 편집하고 조작할 자유가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6:46)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삶을 모래 위에 세우는 일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문화와 두 가치 체계와 두 기준과 두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우리 주변 세상의 방식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분별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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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우리가 명백히 주장하고 확립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입니다. 그 분의 성육신이 유일하며(그는 한 분이자 유일하신 신(God-man)이심), 그 분의 속죄가 유일하며 (그분만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음), 그분의 부활이 유일하기(그분만이 죽음을 정복하셨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외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탄생),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죽음), 죽음을 이기신(부활) 이가 없으므로 오직 그분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한 이순신 장군으로 부를 수 있지만 위대한 예수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 그분은 위대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the Only)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같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니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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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7. 4. 17-21
어제 4월 16일 주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은 단연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4개의 복음서 전부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은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4흘만에 주님의 권능에 의해 다시 살아났지만 그것은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주님의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이런 불멸의 몸을 가지시고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불멸의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당신 발 아래 복종시킬 때까지 주님은 반드시 왕으로 통치하셔야만 합니다. 맨 마지막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이 없어질 때는 모든 신자가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입니다. 그때까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뒤 주님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도 복종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유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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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나눔

2017.3.6 – 10
고통은 인내를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낳으며, 그러한 인격은 소망을 낳게 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롬5:2)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넘어선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바로 지금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 가실 것을 소망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이 소망은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면 살수록 우리가 변화되며, 또 스스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닮아 갑니다. 자신이 점점 더 사려 깊어지고, 인정이 많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도 더 많아지고, 더 강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순전해지며, 더 오래 참게 됩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하나님이 약속대로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더 읽기

SBC매일말씀나눔

17/2/20
오늘 부터는 레이 스테드먼이 지은
고통이 주는 교훈(IVP 소책자)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소책자는 약40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 당시에 그가 들은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부모의 침실에 들어와 총을 쏘아 겨우 피한 뒤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그 소년을 정신병원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 호된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필두로 암과 싸우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난에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아니 인류 역사의 어느 순간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란 무척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당할 때 먼저 보아야 할 성경은 로마서 51-5입니다. 오늘은 로마서의 이 부분을 읽고 묵상하면서 믿음과 시련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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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차를 몰고 가다가 수렁에 빠지면,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가라앉는 차를 바라보며 무력하게 서 있어야 한다면,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리 위안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차는 손상되었으며,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놓쳐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일까요? 손상된 부분은 회복 불가능한 것입니까? 이제 인생 행로를 포기해야 합니까?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우리의 실수와 어리석은 행동을 우리를 위한 그분의 계획 가운데 녹아들게 하시며, 그것에서 선을 가져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권에서 나오는 경이로움의 일부입니다. 내가.메뚜기.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25-26).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여 절망에 빠진 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베드로를 찾아가셨으며(고전15:4-5),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서 함께 조반을 드신 후 그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21). 그 이후에도 베드로를 인도하시고 그의 행로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10, 2:11-14).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바로 같은 예수님이 오늘날에도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진노를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바꾸어 놓으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불행 역시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제임스 패커 박사는 어느 목회자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와 교파를 떠나야 한다고 느낀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분임을 노래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을 인용했는데 이 찬양시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장이시며/ 위의 것을 추구하는 모든 자의 인도자시여,

우리는 당신의 그늘 아래 거하나이다./ 당신의 보호하시는 구름,

당신의 은혜는 우리의 힘,/ 당신의 말씀은 우리의 통치자,

여호와의 영광은 우리의 목적이 되었나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03:1-2).

 

인도는 은혜의 언약 아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주권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는 우리가 갈 길을 보여 준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든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보장한다는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발을 헛디디기도 하고 딴 길로 빗나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팔이 우리를 받치고 있습니다.그분은 우리를 붙드시고 구조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선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인도를 논하는 올바른 맥락은 우리 영혼을 망치도록 놓아 두지 않으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맥락일 것입니다. 이 논의의 관심사는 우리의 안전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안전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6:10).

 

조셉 하트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님/ 그분의 영이 우리를 안전하게 집으로 인도하시도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인하여 예수님을 찬양하며/ 앞으로 올 모든 것을 인하여 예수님을 신뢰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면이 있지만, 그것이 보호자 되시는 주님,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쁨을 희미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 위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죄의 담을 헐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이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지극히 선하시며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담대하게 하루 하루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