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성경

2016. 9. 26 30

예수님은 먼저 보았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늘 주위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눈은 결코 도움이 필요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실로 보셨습니다. 그는 추한 실재 가운데 있는 인간의 궁핍함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반드시 그를 움직여 마음에 동정심을 일으켰고 그는 동정 어린 섬김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은 말로만 그친 적은 결코 없었고, 행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보셨으며, 느끼셨으며, 행동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는다면 이웃 사랑의 핵심적인 부분을 실천하게 되고 이 경우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이 그렇게도 많이 주장하는 인(仁) 사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동정심에 비롯한 섬김은 요한 일서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저술한 요한 일서를 보면 사도는 예수님의 교훈을 잘 배워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직접 듣고 보아 온 사도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오늘은 그가 배운 놀라운 구절을 먼저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 18).

 

어제 본 요한 일서 3:16-18은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자기 희생 때문이었다는 놀라운 주장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결코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모두가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같은 것은 필요없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한 비난 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좋고 고상한 것이지만,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다른 속셈으로 얼룩져 있으며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오직 한 행동만이 더없이 순수한 사랑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주신 사건입니다. 그는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모든 것 즉,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행동입니다.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사도 요한은 골고다에서 비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미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만 그분의 섬김의 절정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바로 골고다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의 목숨을 버리라는 부르심은 결코 영웅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이런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은 당연히 평범한 섬김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없고 섬기는 것도 없는 곳에는 우리가 아무리 크게 나팔을 불어도 결코 사랑이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르치시기를 주님과 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도 이것 보다도 못한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핌합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력한 논조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재물을 가졌으며 그리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필요를 보는 한편, 또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보는 한편, 약과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를 보는 한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굶주림을 보는 한편, 식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을 보는 한편,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이 가진 것과 본 것을 연결할 것인지, 아니면 둘을 명확히 구분할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는 병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병든 자를 보시자 고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온 군중들이 주린 것을 알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먹이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오늘부터는 존 스타트 목사님의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으며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가 역사상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종교적 사기꾼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등 형편없는 말을 하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를 좌절한 슈퍼스타나 서커스의 어릿광대 등으로 묘사하는 풍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거침없이 네 주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심판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랑의 그리스도만을 따르고, 위로의 그리스도이지만 결코 도전을 주는 그리스도는 부인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화에 대한 명령에는 무척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그리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사역을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라는 말로 집약시켰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습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 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복음 전파와 섬김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조화가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섬김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으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심지어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등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봉사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이런 물질적인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복음 전도에만 집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말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가 선포하고 묘사한 천국의 모습을 나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복음 전파에 큰 진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하신 선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탄의 지배가 몰락하는 증거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동기는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동정이 예수님의 속성이라고 기술합니다. 동정은 예수님의 섬김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행동하셨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신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 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육체적인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주변에서 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병든 어머니를 둔 딸로 하여금 어머니의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데는 눈을 감기우고 오직 어머니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만들어라는 계책을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주는 대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이 처한 육체적, 환경적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고치신 개인과 무리에 대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자 그 문둥병자는 즉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인 성 근처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인 한 젊은이의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도 그들을 깊이 위로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3-14) 하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서 말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실 때도 그 동기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우리는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신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2016. 9.12-13

그리스도인의 종으로서 부름받은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직업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4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로 그의 말을 맺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직업(직업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적 위치일 수도 있음) 속에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책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의 틀 속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종들아 모든 일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2-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상전을 섬김으로써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이 여기에는 담겨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에 대한 정신입니다.

 

베토벤은 한밤중에 갑자기 누군가 옆집 문을 연이어서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사람은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또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그리고 다시 네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날 밤 베토벤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네 번의 두드림이 그의 풍부한 음악적 재능 속에서 네 박자의 멜로디로 변해서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유명한 5번 교향곡 운명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곡에는 네 박자 멜로디들이, 같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다양성을 띠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소명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소명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매순간 강한 두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항상 동일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우리 삶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과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기꺼이 자족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2016. 9. 5 9

 벤 페터슨은 어느 여름 포틀랜드에서 온 내과 의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의사는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자랐으며 시카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벤 페터슨은 그에게 왜 하필이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틀랜드를 근무지로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서북부 태평양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든지, 그곳의 생활 수준 때문이라든지 또는 그곳이 자기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사가 시카고에 있을 때 어떤 한 젊은 신학생을 만났는데 그 신학생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포틀랜드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애기를 들은 후 그 의사는 자기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고 포틀랜드를 의사로서의 첫 근무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소명이 틀리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또 우리의 경우에 소명이 직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직업이 소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통상 가치를 판단하는 관점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느로서는 실패했지만 소명을 수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속에서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을 위해 결코 가족을 희생하지 않으며, 비도덕적이고 부정직한 일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직업에서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소명을 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 삶 가운데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직업들의 성공과 실패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평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청교도였던 윌리엄 퍼킨즈는 소명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성곻하도록 허락도 하시는데 그 성공은 복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허락하심으로 무엇을 시험하신다는 말일까요? 바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순수성입니다. 소명보다는 직업을 추구하면서 자기 둥지에 더 많은 깃털을 모아들이려는 새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하는가? 우리가 성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면 우리의 소명 의식을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일 속에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 때 많은 번영과 이익, 명예등이 우리에게 주어지곤 합니다. 물론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모든 번영과 이익 그리고 명예등이 다 쓸모없는 것이므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일을 잘한 대가로서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이나 보상을 누리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소명을 성공에 대한 모든 세상적인 척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소명과 관련하여 생각할 중요한 점은 자족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현재 가진 직업 안에서 자족할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쓰셨는데 이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사도는 언제나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형편없다고 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협상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매일큐티 | 2016.8.29 – 9.2

‘소명’은 일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명(vocation)과 직업(occupation)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그 속에서 만족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만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일들도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헬라어 명사 ‘클레시스(klesis)’가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은 백성이며, 소명을 가진 백성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로서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는 소명을 가진 단체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 의미에서 여러 거지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개인적으로는 석공, 건축사, 심리학자, 자동차 세일즈맨, 관리인, 가정주부등에 종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잘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사용하라”(고전7:21). 이 말은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주차장에서 밤 근무하는 일을 하다가 부름받았느냐? 지금 너의 일이 싫으냐? 염려하지 말라! 만약 네게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바꾸도록 하라. 그러나 직업을 바꾸는 데 몰두한 나머지 네게 있는 소명까지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수행할 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나 이사회의 이사장직을 맡은 사람이 모두 동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고전7:22).

 

소명은 하나이지만 직업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들은 소명의 권위 아래에 놓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 속한 사회적 위치나 환경들이 소명 때문에 손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도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들은 소명에 비해 아주 미약합니다. 사실, 각각의 직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명은 직업을 이끄는 주된 원리이지만 우리가 현재 담당하는 직업은 그런 소명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달성하려는 목적은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출석하던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질문을 받기를 “체신부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에도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비결이라니요? 주일학교야 말로 저의 비즈니스인걸요! 그 외의 모든 일들은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지요. 45년 전에 저는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말씀을 확신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그는 진정으로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큐티

2016. 8.22 – 26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일이 죄와 죽음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실까요? 그분은 제일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타락한 일을 구속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죄로 인한 결과를 가리켜 즐겨 사용하였던 말은 “멀어지다 alienated”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서로 멀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골1:21-22)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의 일을 타락시킨 원인, 곧 죄악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치유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악으로 단절되었던 관계는 회복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결과로 우리가 일과 씨름해야 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실 것이며 이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원래의 하나님의 의도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쉴까에 대해, 즉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것들을 염려해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 고 하신 말씀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우리 삶에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는 말씀은 “누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먹이고 입힐 책임을 질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그 책임을 지실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오직 한 가지 책임만을 지고 있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벤 패터슨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인 우리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염려해 본 적이 없으며, 집세나 의료보험료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은 더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을 것이다.내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직 어린아이다운 것, 그리고 가족들의 말에 잘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유일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치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할을 부자연스럽게 뒤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등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일이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일이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채워 주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매일큐티

SBC매일큐티 8/8-12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한 대가로 보수나 수익을 바라는 마음이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타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보수나 수익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잘못되면 그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와 수익은 가치 있는 일을 잘 해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일을 하는 첫째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며 일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일과 여가

미국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어느 회계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고용하는 미국인 직원들은 근무시간에는 사사로운 전화 한 번 받거나 걸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업무만을 한 뒤 대신 오후 5시에 업무가 종료되어 종이 울리면 글자를 쓰다가도 볼펜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퇴근한다고 합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일과 여가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가 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님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는 일을 여가를 위해 서둘러서 끝내 버려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놀이와 휴식은 지친 삶을 재충전해 주는 생활의 속도나 리듬의 변화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과 여가의 이러한 자세, 즉 여가의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태도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오랫동안 일해 온 대가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여유롭게 쉬고 즐길 수 있으며, 또 그것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퇴를 그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잠시 여유를 주는 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은퇴는 총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벤 패터슨의 장인과 장모님은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던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의 양과 속도를 알맞게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 우리의 일생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돈이 여유가 있어 일찍 일에서 은퇴하여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내와 함께 전 미국을 침대차를 끌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면 80대의 두 할머니는 간호사와 의사로서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다가 그만 자동차 사고로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값진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이 문제는 분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일의 본질이 원래 의도에서 타락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기 위해 살도록 하셨지, 살기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은 살기 위해 즉, 생계를 잇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고용주 혹은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되어 말합니다. 이를테면 낮은 봉급, 열악한 작업환경, 한심한 상관들 또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 등을 열거합니다. 이런 대답이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는 일의 본질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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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벤 패터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알버트슨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회사가 일련의 광고물들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물들은 알버트 슈펴마켓의 각 체인점에 고용된 지점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 지점에 대해 갖고 있는 긍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신선한 야채 진열대에 둘러싸여 서 있던 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이 슈퍼마켓은 알버트슨의 것이죠 하지만 이 농산물 점포는 저의 것입니다’ 라고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청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 알버트슨 소유의 슈퍼마켓 체인점 중 한 지점을 인수받아 조 알버트슨과 동일한 자격으로 그 점포를 관리할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각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위해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동일한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하고, 가정 주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관리하고, 농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기업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여야 하며, 학생은 주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가진 시간을 관리하여 우리의 인격 전체가 이렇듯 선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존엄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24:1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의 시간과 건강, 능력, 경력 및 그 외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외의 것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적 직분을 가진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못하리니”(딤전6:7)라는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신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엄성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남부 내륙의 한 작은 침례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겨우 40달러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십일조로 한 달에 4달러나 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내질 말 것을 권고하였더니,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여 “목사님, 지금 제 인생을 존엄하고 의미있게 해주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금 그것을 빼앗으려 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만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여 맡기신 작은 부분에서 청지기가 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본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일을 함으로써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그리스도인과 일

2016. 7. 18 – 22

오늘 부터는 벤 패터슨의 소책자 “그리스도인과 일”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는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를 향하여 줄지어 걸어가며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호-오, 야호-오, 우리 모두 일하러 가세!”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목적 의식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사회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허덕였던 대공황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일하게 되어 정부의 구호품 없이도 가족을 먹이고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였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 패터슨은 위 가사를 변형한 “어휴-우, 어휴-우, 나는 일하러 가네”는 말이 적혀진 스티커가 자동차에 붙여진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의 매우 많은 영역에서, 즐거운 일은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로 바뀌었고, 목적 의식을 가지고 종사했던 일들도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고, 그런 후에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생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두시고 계획하신 대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2:15) 하셨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나님의 낙원에서도 중요한 위치, 곧 중심부를 차지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성경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죄악과 형벌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이자 복이었으며 타락 후에 형벌로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인간됨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을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과 땅, 산과 호수, 숲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 우주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청지기입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달리 없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어떤 한 사람의 모든 부와 재산을 위탁받아, 그 소유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경우 우리가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과 삶에 대한 길을 찾는 [Book Talk]
‘청년, 길을 찾는다’ 시리즈
두 번째 편 : <그리스도인과 일>, 벤 패터슨 저/ivp.

SBC매일큐티

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