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큐티

2016. 9.12-13

그리스도인의 종으로서 부름받은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직업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4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로 그의 말을 맺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직업(직업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적 위치일 수도 있음) 속에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책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의 틀 속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종들아 모든 일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2-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상전을 섬김으로써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이 여기에는 담겨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에 대한 정신입니다.

 

베토벤은 한밤중에 갑자기 누군가 옆집 문을 연이어서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사람은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또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그리고 다시 네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날 밤 베토벤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네 번의 두드림이 그의 풍부한 음악적 재능 속에서 네 박자의 멜로디로 변해서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유명한 5번 교향곡 운명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곡에는 네 박자 멜로디들이, 같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다양성을 띠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소명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소명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매순간 강한 두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항상 동일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우리 삶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과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기꺼이 자족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2016. 9. 5 9

 벤 페터슨은 어느 여름 포틀랜드에서 온 내과 의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의사는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자랐으며 시카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벤 페터슨은 그에게 왜 하필이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틀랜드를 근무지로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서북부 태평양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든지, 그곳의 생활 수준 때문이라든지 또는 그곳이 자기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사가 시카고에 있을 때 어떤 한 젊은 신학생을 만났는데 그 신학생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포틀랜드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애기를 들은 후 그 의사는 자기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고 포틀랜드를 의사로서의 첫 근무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소명이 틀리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또 우리의 경우에 소명이 직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직업이 소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통상 가치를 판단하는 관점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느로서는 실패했지만 소명을 수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속에서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을 위해 결코 가족을 희생하지 않으며, 비도덕적이고 부정직한 일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직업에서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소명을 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 삶 가운데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직업들의 성공과 실패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평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청교도였던 윌리엄 퍼킨즈는 소명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성곻하도록 허락도 하시는데 그 성공은 복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허락하심으로 무엇을 시험하신다는 말일까요? 바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순수성입니다. 소명보다는 직업을 추구하면서 자기 둥지에 더 많은 깃털을 모아들이려는 새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하는가? 우리가 성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면 우리의 소명 의식을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일 속에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 때 많은 번영과 이익, 명예등이 우리에게 주어지곤 합니다. 물론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모든 번영과 이익 그리고 명예등이 다 쓸모없는 것이므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일을 잘한 대가로서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이나 보상을 누리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소명을 성공에 대한 모든 세상적인 척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소명과 관련하여 생각할 중요한 점은 자족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현재 가진 직업 안에서 자족할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쓰셨는데 이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사도는 언제나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형편없다고 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협상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매일큐티 | 2016.8.29 – 9.2

‘소명’은 일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명(vocation)과 직업(occupation)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그 속에서 만족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만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일들도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부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헬라어 명사 ‘클레시스(klesis)’가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우리들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받은 백성이며, 소명을 가진 백성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말합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로서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는 소명을 가진 단체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 의미에서 여러 거지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개인적으로는 석공, 건축사, 심리학자, 자동차 세일즈맨, 관리인, 가정주부등에 종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7장에서 소명과 직업의 관계를 잘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사용하라”(고전7:21). 이 말은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주차장에서 밤 근무하는 일을 하다가 부름받았느냐? 지금 너의 일이 싫으냐? 염려하지 말라! 만약 네게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바꾸도록 하라. 그러나 직업을 바꾸는 데 몰두한 나머지 네게 있는 소명까지 잃어버리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수행할 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나 이사회의 이사장직을 맡은 사람이 모두 동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고전7:22).

 

소명은 하나이지만 직업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직업들은 소명의 권위 아래에 놓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 속한 사회적 위치나 환경들이 소명 때문에 손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도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들은 소명에 비해 아주 미약합니다. 사실, 각각의 직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소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명은 직업을 이끄는 주된 원리이지만 우리가 현재 담당하는 직업은 그런 소명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달성하려는 목적은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출석하던 교회의 주일학교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질문을 받기를 “체신부 일을 하시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에도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을 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비결이라니요? 주일학교야 말로 저의 비즈니스인걸요! 그 외의 모든 일들은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지요. 45년 전에 저는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말씀을 확신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그는 진정으로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큐티

2016. 8.22 – 26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일이 죄와 죽음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실까요? 그분은 제일 먼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타락한 일을 구속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죄로 인한 결과를 가리켜 즐겨 사용하였던 말은 “멀어지다 alienated” 라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서로 멀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골1:21-22)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우리의 일을 타락시킨 원인, 곧 죄악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치유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악으로 단절되었던 관계는 회복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결과로 우리가 일과 씨름해야 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실 것이며 이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원래의 하나님의 의도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쉴까에 대해, 즉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그 모든 것들을 염려해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 고 하신 말씀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우리 삶에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2, 30-31)는 말씀은 “누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먹이고 입힐 책임을 질 것인가?” 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그 책임을 지실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오직 한 가지 책임만을 지고 있는데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벤 패터슨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인 우리들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에 염려해 본 적이 없으며, 집세나 의료보험료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것들을 염려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은 더 없다.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을 것이다.내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직 어린아이다운 것, 그리고 가족들의 말에 잘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유일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치 우리가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할을 부자연스럽게 뒤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등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우리 일이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일이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채워 주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매일큐티

SBC매일큐티 8/8-12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한 대가로 보수나 수익을 바라는 마음이 잘못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타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보수나 수익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잘못되면 그것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보수와 수익은 가치 있는 일을 잘 해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어야 하며, 그 자체가 일을 하는 첫째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며 일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일과 여가

미국에서 회계사무소를 운영하는 어느 회계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고용하는 미국인 직원들은 근무시간에는 사사로운 전화 한 번 받거나 걸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여 업무만을 한 뒤 대신 오후 5시에 업무가 종료되어 종이 울리면 글자를 쓰다가도 볼펜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퇴근한다고 합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일과 여가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가 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님을 진정 믿는다면, 우리는 일을 여가를 위해 서둘러서 끝내 버려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놀이와 휴식은 지친 삶을 재충전해 주는 생활의 속도나 리듬의 변화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과 여가의 이러한 자세, 즉 여가의 목적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태도는 직장에서 은퇴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오랫동안 일해 온 대가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여유롭게 쉬고 즐길 수 있으며, 또 그것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퇴를 그런 식으로 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잠시 여유를 주는 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은퇴는 총력을 기울여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로 보아야 합니다. 벤 패터슨의 장인과 장모님은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하던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으며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의 양과 속도를 알맞게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 우리의 일생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돈이 여유가 있어 일찍 일에서 은퇴하여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내와 함께 전 미국을 침대차를 끌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면 80대의 두 할머니는 간호사와 의사로서 함께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다가 그만 자동차 사고로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값진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이 문제는 분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일의 본질이 원래 의도에서 타락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기 위해 살도록 하셨지, 살기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은 살기 위해 즉, 생계를 잇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에는 여러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고용주 혹은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와 관련되어 말합니다. 이를테면 낮은 봉급, 열악한 작업환경, 한심한 상관들 또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 등을 열거합니다. 이런 대답이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는 일의 본질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입니다.

SBC매일큐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벤 패터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알버트슨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회사가 일련의 광고물들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물들은 알버트 슈펴마켓의 각 체인점에 고용된 지점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 지점에 대해 갖고 있는 긍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신선한 야채 진열대에 둘러싸여 서 있던 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이 슈퍼마켓은 알버트슨의 것이죠 하지만 이 농산물 점포는 저의 것입니다’ 라고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청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 알버트슨 소유의 슈퍼마켓 체인점 중 한 지점을 인수받아 조 알버트슨과 동일한 자격으로 그 점포를 관리할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각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위해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동일한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하고, 가정 주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관리하고, 농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기업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여야 하며, 학생은 주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가진 시간을 관리하여 우리의 인격 전체가 이렇듯 선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존엄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24:1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의 시간과 건강, 능력, 경력 및 그 외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외의 것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적 직분을 가진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못하리니”(딤전6:7)라는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신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엄성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남부 내륙의 한 작은 침례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겨우 40달러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십일조로 한 달에 4달러나 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내질 말 것을 권고하였더니,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여 “목사님, 지금 제 인생을 존엄하고 의미있게 해주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금 그것을 빼앗으려 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만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여 맡기신 작은 부분에서 청지기가 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본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일을 함으로써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매일큐티: 그리스도인과 일

2016. 7. 18 – 22

오늘 부터는 벤 패터슨의 소책자 “그리스도인과 일”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는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를 향하여 줄지어 걸어가며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호-오, 야호-오, 우리 모두 일하러 가세!”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목적 의식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사회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허덕였던 대공황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일하게 되어 정부의 구호품 없이도 가족을 먹이고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였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 패터슨은 위 가사를 변형한 “어휴-우, 어휴-우, 나는 일하러 가네”는 말이 적혀진 스티커가 자동차에 붙여진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의 매우 많은 영역에서, 즐거운 일은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로 바뀌었고, 목적 의식을 가지고 종사했던 일들도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고, 그런 후에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생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두시고 계획하신 대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2:15) 하셨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나님의 낙원에서도 중요한 위치, 곧 중심부를 차지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성경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죄악과 형벌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이자 복이었으며 타락 후에 형벌로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인간됨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을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과 땅, 산과 호수, 숲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 우주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청지기입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달리 없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어떤 한 사람의 모든 부와 재산을 위탁받아, 그 소유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경우 우리가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과 삶에 대한 길을 찾는 [Book Talk]
‘청년, 길을 찾는다’ 시리즈
두 번째 편 : <그리스도인과 일>, 벤 패터슨 저/ivp.

SBC매일큐티

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매일큐티

2016. 7.4 – 8

‘깨어짐’ 이라는 말은 자만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만심이 있는 곳에는 고백도 용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져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항복’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분은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한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무리를 먹이도록 하셨습니다(마 14:19). 신앙부흥회의 한 형제는 이 구절을 읽고 케파 셈팡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깨뜨리시기 전까지는 결코 당신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하나의 떡덩어리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이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신 것은, 훗날 자신을 깨뜨려 제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건을 예시 하신 것입니다(고전11:24 –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없이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기독교 모임에 가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 깨어진 몸입니다. 저의 모든 기술과 능력과 재정을 여러분을 위해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해서 우리의 삶을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때입니다. 이때 비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따르고 있다면 완전한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시는 와중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따라 우리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못한 우리가 갑자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정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으며, 우리의 장래가 있는 감람나무 같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그 다음에 교회까지 그 지경을 넓힐 수 있고 더 나아가 직장과 사회까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너무 무능력해서 공동체 형제자매들을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모험을 감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릴 것은 아이가 가진 몇 조각의 떡, 과부가 가진 소량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이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평범한 목자에 지나지 않음을 아셨지만, 모세를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의 약하고 천한 것들을 사용하시리라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하고 늙은 모세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함께 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요

 

케파 셈팡기는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우간다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미국에 있는 신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이로비에 피신해 있던 동료들이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피난민 가족을 돌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우리를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취하여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눠 주기 시작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쓰기에도 빠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많은 피난민에게 음식과 물품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주님을 모범으로 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SBC매일 큐티

2016.6.20-24

깨어진 관계는 독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손해를 입힌 사람이나 입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이 정말 잘못을 한 게 맞는다면 그를 견책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그가 회개한다면 그를 용서해 줄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필요시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케라 셈팡기씨는 몬도씨를 만날 때마다 세가지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빛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까? 깨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이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970년대 이디 아민이 집권하던 당시 우간다의 어떤 자매는 케파 셈팡기씨에게 비밀리에 모이고 있는 우간다 신앙부흥회에 대해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집회를 하던 중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직한 죄들을 깨닫고 서로 그 죄를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는 독재자 아민의 한 정보요원도 잠입해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보원이며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고백한 후 그는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공부하면서 형제들과 올바른 교제하고 있지 않다면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모임은 또 다른 형태의 소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성경공부나 교회 출석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단편소설 마지막 손님에서 친절을 베푼 주인공 게이꼬의 상사의 입을 통하여 상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라고 외친 작가 구리 로혜리는 상인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그리고 선교단체에서 듣는 명령은 가라는데 있고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은 약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새계명입니다. 즉,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요13: 34-35)고 하셨습니다. 케파 셈팡기는 이 계명을 잘 알지 못하여 자신의 설교의 대상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의 설교를 더 사랑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사명을 수행하려는 열심과 열정 때문에 가장 먼저 주어진 계명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하면 안될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의 말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숨겨진 부분들까지도 형제자매와 나눈다는 뜻임을 나는 몬도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감춰 놓은 것들을 나눌 때 우리는 완전한 일체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상호 결속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모두 빛 가운데 행하기 시작할 때, 험담과 뒷말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미 빛 가운데 드러난 것을 수군거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뒷말은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바뀝니다. 형제 자매의 약점을 끄집어내는 대신,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감싸 주고 강한 부분은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사용하던 램프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램프의 불빛이 비치기 위해서는 램프의 유리가 투명해야 하고 잘 다듬어진 심지와 깨끗한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유리가 더러우면 불빛은 희미하게 비치게 됩니다. 심지가 잘 다듬어져 있지 않으면 불빛은 깜빡거리게 됩니다. 기름이 더러우면 불빛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유리를 깨끗이 닦지도 않고 심지도 다듬지 않은 채 빛을 비추려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기름을 더럽히는 원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음욕을 품는 것, 말다툼하는 것, 원수에게 증오를 품는 것 등입니다. 깨끗한 기름이 없으면 우리는 빛이 될 수 없고 형제 자매들 앞에서 투명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