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2-3)


누가복음13:13절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본문은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보시자 그를 앞으로 불러내 고치신 장면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회당장은 안식일을 강조하여 주님의 행위가 제 4계명을 깨뜨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관점과 생각도 다채롭습니다. 인생이란 어떤 관점을 갖고,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형형색색의 철학이 등장하나, “만유의 주님이 통치하시므로, 너는 잔꾀를 부리지 말아라”는 잠언의 핵심적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섭리 가운데 다스리면서, 사람들, 특히 하나님 백성의 대화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선지자 말라기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말3:16,새번역)고 밝힙니다. 말이란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터져 나온 결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첫걸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우리 각자의 개인적 경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의 삶이 다시 세상을 비취어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해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고린도후서2: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요셉 시주(Joseph R. Sizoo)는 그의 책 「우리는 아직 소망할 수 있다, Still We Can Hope 에서 “우리는 원자의 신비를 파악했지만 산상수훈을 거절했다. 우리는 지혜없이 놀라운 일을 그리고 양심없이 힘을 얻었다. 우리는 핵에 관한한 거인이 되었으나 도덕에 관한한 어린아이들이다.” 고 한탄합니다. 인류는 양자역학을 알자 곧 바로 멸망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지식의 나무가 아담의 마음을 드러낸 것처럼, 원자에 대한 지식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이 악한 마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마치 향수와 같습니다. 방안에 향수병을 놓으면 필연적으로 향기가 나지만,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싫어합니다만, 누구도 향수 냄새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망시키자, 그 소식은 가나안 땅 전역으로 퍼져갔습니다. 그러나 아모리 족속 다섯 왕은 연합하여 대적하였고, 기브온과 그 인근 3도시는 항복하였습니다. 전자는 멸망당하였고 후자는 생명을 살렸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취할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담당하겠습니까? 복음의 제사장들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 받을 유일한 방법은 마음에 악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매일묵상(2024/12/30)

(2024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시편23:5절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새번역)


벌써 2024년이 저물고, 2025년이 다가왔습니다. ‘매일묵상’은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출발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2024년을 되새겨 보고 우리가 연초에 계획한 것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감사한 것들과 회개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고 믿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나 계획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국가에 대하여도 같습니다. 연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혼란이 대한민국의 정치를 강타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잘 정리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제 무안공항의 대참사로 무려 179명의 탑승객이 사망하였습니다. 재발방지와 유가족 위로를 위해 주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끝맺음은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입니다. 2025년은 나만의 좋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도록 마음에 다짐하고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언3:6,새번역).

매일묵상(2024/12/23-27)


마태복음1: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나는 평생 낡은 트럭만 가지고 있어서 항상 새 트럭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소원을 이루자 이런 일이 있다니…” 해튼 씨는  빨간 색의 새 트럭을 샀지만, 바로 병원에 가서 결장암 수술을 받았고, 간호사인 로버타 메스너는 한 주에도 몇 번씩 방문하며 돌보았습니다. 둘은 자주 트럭에 앉아 그들의 믿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해튼 부인이 혼자 남게 되는 것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대화 후 로버타는 부엌으로 가서 해튼 씨의 상황을 알리면서, 해튼 부인이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해튼 씨는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점점 더 평안을 얻었습니다. 해튼 씨의 병세가 악화되어 로버타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몸을 기울이자,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면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세요. 나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거예요” 속삭였습니다. 그날 저녁 해튼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호사 로버타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방부제 가득한 병실에서 해튼 씨를 만났다면, 그의 진정한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 이것은 주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21-27쪽, 참조)

「빈 구유」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성탄절이 끝난 직후, 앨리스는 남편과 세 자녀와 함께 성탄절 장식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남편 잭은 큰아들 네이트의 도움을 받아 트리를 치웠고, 사라는 다섯 살 된 둘째 아이 나탈리의 도움을 받아 예수 탄생 장면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사라와 나탈리가 부서지기 쉬운 인형을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동안, 나탈리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구유 속 아기 예수님을 훔쳐 갔어요!” 생각해 보니 이 번 성탄절은 주인공되신 예수님은 도난 당하여 사라졌고 빈 구유만 축하하였던 것입니다. 범인이 누군지 대략 추측이 갔지만, 남편 잭은 맏딸 사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음, 아기 예수님이 올해는 상자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 봐.” 라는 말을 하며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 앨리스의 집에서 일어난 ‘빈 구유 사건’은 우리 믿음 생활을 되새겨 보도록 합니다.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 합니다. 성탄절 음악, 맛 있는 음식들, 포장지로 싼 선물, 그리고 캐롤을 즐깁니다만, 정작 중요한 성탄절의 의미는 잃어버립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마음에 간직한다면, 성탄절의 메시지는 연중 내내 생생한 현실이 되어, 좀 더 화평의 삶을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위로와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날로서, 먼저 천군과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누가복음 2: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의 성탄절 이야기는, 여행 중 짐승의 우리에서 해산하고,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이어 헤롯이 죽이려고 찾았고, 애굽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스럽고 심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성탄절 메시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행복과 심오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 볼 것이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눅2:26,27). 그것이 소망입니다. 시므온과 같은 소망은 자기의 문제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단합니다. 따라서, 소망의 기초는 믿음이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주님의 백성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입니다. 그들은 밤낮 기도하였지만 늙기까지 자녀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체험과 함께 아들 요한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둘째,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을 겪을 때, 이 두 분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낳고 기르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셋째, 여선지 안나는 60년을 청상과부로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경건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이루심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도착할 때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사람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전도서 2: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12-18절이 인간이 높이 평가하는 지혜 추구조차 허무함을 역설한 것이나, 2:1-11절은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 성공의 헛됨을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은, 사변적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움직이는 현실에 바탕을 둔 실제적 교훈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 전도자는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을 포함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을 경험해 본 결과,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쾌락조차 무의미함을 선포합니다. 전도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의 쾌락 추구는 참된 만족 여부의 발견을 위해 절제하면서 시도한 것이지 결코 방탕이 아닙니다. 한편, “너는 낙을 누리라”에서 ‘낙’은 ‘토브=선, 좋음, 희락’의 번역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주장됩니다. ① ‘선한 것을 발견해 내라’ ② ‘쾌락을 즐겨라’ 전자는, 쾌락 탐구를 통해 의미 있는 삶의 발견을 시도하였음을, 후자는, 쾌락의 추구를 심도 있게 시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웃음’ 혹은 ‘술’ 등과 같은 구체적 쾌락 추구 수단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후자가 타당합니다. 결론은, ‘이것도(쾌락 추구) 헛되도다!’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이미 내린 결론을 또 다시 검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쾌락’을 추구할 경우 지혜자 솔로몬과 달리 방탕으로 치닫게 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절제 없는 쾌락은 사망의 길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

매일묵상(2024/12/16-20)


갈라디아서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는 선행이며,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 선행을 재료 삼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레이실라 비치의 글입니다. “교직에 몸담은 첫해의 선생님은 젋고 열정적이었다. 제일 처음 부임한 학교는 쿠바 하바나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로 갈색머리에 표정으로 가득찬 눈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단정했으나 신발은 매우 낡아 2학기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넝마 조각 같았다. 선생님은 가죽으로 리본이 달린 새 신발을 한 켤레 사 주셨다. 너무 예뻤다. 학년 말 선생은 하바나 시의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고, 30년을 가르치신 후 은퇴하여 글을 쓰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폐렴이 심하게 걸려 작은 개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병원에 종사하는 분들의 탁월한 서비스에 놀랐다. 그래서, 다른 환자에게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 하자, 그 환자도 동의하면서, “특히 부인께서 입원하신 후에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하였다. 결론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병원 원장이신 멘데스 박사님이 특별 돌봄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원장에게 가서 초면인데 이렇게 특별한 돌봄을 감사드린다고 하니, 멘데스 박사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께서 30여년 전에 새 신발을 받은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저예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그 가죽 신발 말이에요!” 주님은 보상받지 못한 선행은 오히려 복이 되어,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 14) 하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73-75쪽, 참조)

전도서1:17절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자는 이미 긍정적인 측면(13,16)에서 지혜를 살펴보았고 본절에서는 지혜와 정반대인 ‘어리석음’을 탐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연구했음을 밝히지만, 둘 다 연구한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 중 하나에서 의미나 즐거움이 있는지 찾아본 뒤,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를 명확히 하고자 어리석음까지도 연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혹은, 지혜와 어리석음은 동전의 양면이므로 전체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 양 측면을 모두 살펴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실패하였음을 자인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여도 잡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섭렵하였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 더 나쁜 것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지식을 추구할수록 괴로움은 더욱 많아진다는 역설입니다(18).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잠1:8)를 전제로 하나, 본절의 지혜는 하나님이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데 전도자는 믿음의 길에서 방황 한 뒤 얻은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탄소 5개로 된 ‘리보스’의 2번 탄소에 ‘산소’가 있으면 RNA(리보스 핵산)을 구성하고, ‘산소’가 없으면 DNA(디옥시리보스 핵산)가 되어 전혀 다른 기능을 갖게 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은총이나, 세상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합니다. 결과는 삶의 무의미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전도서1: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본절은 지혜를 얻게 되면 근심 역시 수반된다는 점을 지적하여, 지혜도 허무하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1-11절은 세상에 사는 인간의 삶이 무의미함을, 12-18절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인 지혜와 그런 지혜의 추구조차 허무함을 선언하여, 해 아래 사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함을 가르칩니다. 전도자의 선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낸 것이지, 신자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불신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자신을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 밝히는데, 솔로몬은 성경의 전통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의 탐험 여정은 믿음 깊은 신자의 여정이므로, 성숙한 신자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면 방황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그 방황이 전도자와 같은 지적 방황이냐, 아니면 욥과 같은 고난의 방황인가의 차이 뿐입니다. 고난 중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변호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 괴로워 합니다. 시인 아삽은 악인은 잘 살고 건강하나, 매일 고난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보듯이 아무런 삶의 고난이 없고 풍족 하여도 방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의미나, 자아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 방황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 입니다. 전도자에 따르면, 이 철학적, 신학적 주제는 해 아래 인간에게는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라고 토로합니다(13).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창세기 10:22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아르박삿, 아람 족속은 아람의 후손으로 모두 셈의 자손입니다만, 고대에 두 민족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지금 아사드 대통령이 물러난 시리아를 이스라엘은 맹폭하는데 시리아는 성경 시대의 아람 제국과 동일한 지역입니다. 갈등은 3천년이나 됐습니다. 전쟁은 아람 임금 하사엘 시대(BC842-796)에 심하였습니다. 주님은 북왕국을 징계하시려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히는 장면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한편,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하다드 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이다. 여기에는 성경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이 나온다’「아람 임금 하사엘,76쪽」. 주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자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셨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공격하고, 가드를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자(왕하12:17), 유다 왕(요아스)은 성전의 성물과 왕궁의 금을 모두 바쳐 공격을 면합니다. 하사엘이 쳐서 점령한 가드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하사엘의 공격진영과 파괴된 여러 흔적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며 유일하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한 신앙 교훈의 보고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시편73: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예전에 본 드라마입니다. 매우 곤궁한 어느 가장이 정신 이상이 되어 방 한구석에서 종이에 백 만원, 천 만원 등의 숫자를 쓰고 돈이라고 하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치료를 받는 중 의사가 정신을 차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침을 놓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퇴원하였으나 어려운 경제 현실에 직면하자 마음은 다시 무너졌고 이전과 같이 종이 돈을 만들어 공중에 뿌리는 장면과 함께 드라마는 끝납니다. 무너진 마음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는 아삽(다윗의 성가대장)으로, 자신은 경건하나 매일 고통 중에 살고 있는데, 악인들의 형통과 교만을 보자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아삽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고, 아삽은 늘 교훈하사 지혜롭고 바른 삶을 살게 하시면서,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계획이셨던 것이죠! 아삽은 하나님이 ‘마음의 반석’이요, ‘삶의 힘’이 되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몫은 재산, 명예, 권력 등이지만, 아삽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임을 깨닫습니다. 실로 그분의 인자(신실한 사랑)는 생명 보다 낫습니다!(시편63:3). 믿음 생활은 즐겁게 주님의 뜻을 행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드린 기도가 응답받는 삶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몫(재산, 유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은 단순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가 결합되어 선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73:28)

매일묵상(2024/12/9 – 13)


「참 기특한 실수」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켄디 챈드의 성탄절이야기입니다. “그 해 아들 니콜라스는 여섯 살 유치원생이었고 성탄절 학예발표회 최종 연습을 구경하러 갔다. 이윽고 담임 선생님들의 인솔에 따라 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식당 바닥에 앉아 청중이 되었다가, 발표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올라갔다. 예상 대로 아기 예수, 구유, 그리스도의 귀중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니콜라스 반은 ‘크리스마스의 사랑, Christmas Love’이란 노래를 불렀다. 맨 앞줄에 서 있는 아이들은 각각 큰 글자를 갖고 있었고, 하나씩 들어서 노래 제목을 만들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C는 크리스마스의 C”라고 노래하면 한 아이가 글자 C를 들었고, 또 “H는 해피의 H”라고 노래하면 다른 아이가 글자 H를 들었다. 이렇게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노래 제목인 “Christmas Love”라는 메시지가 연출되는 것이었다. 발표는 매끄럽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한 여학생이 글자 M을 거꾸로 들어 ‘W’자가 되었다. 실수였다. 게다가 그 학생은 조금씩 움직여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옆으로 서는 통에 글자 간격이 이상하게 벌어졌다. 청중석의 아이들은 그 실수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지만, 순진한 아이는 당당하게 ‘W’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글자가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다함께 보았고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전체 글자와 메시지는 “Christ was Love”(그리스도는 사랑이셨습니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270-73쪽, 참조)

전도서 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본절은 속담체로, 인간의 무능력을 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구부러진 것’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고쳐지기 바라는 모든 잘못된 상태이나, 문맥상 도덕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특히, 유사한 구절인 7:13절(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과 비교할 때 자명합니다. ‘구부러진 것’의 예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요9:1)으로, 그는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인간은 마음대로 세상을 다룰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또 ‘모자란 것’이란, ‘필요하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단은 ‘인간이 원하고 필요하지만 없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해석됩니다. 예로서, 모든 병을 치료하고, 죽지 않게 하는 ‘생명나무 열매’ 혹은 ‘생명의 떡’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이런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복음의 전제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이제 만유를 회복하사, 사망을 철폐하실 것입니다(롬8:17-25). 그러므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즉 맹인, 귀먹은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절름발이, 중풍병자,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새 창조의 예표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생명나무’(요일5:13)와 ‘생명의 떡’(요6:35)이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전도서 1:16절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2-15절은 세상 모든 일의 허무함을 밝히나, 16,17절은 그런 지혜 추구 과정 자체도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기술합니다. 본절은 두 번째 성찰의 문구로서, 전도자는 자신의 신임장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전대미문의 탁월한 지혜자’로 자칭하는 것 같아 다소 주제넘게 들리지만, 그것이 본절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런 지혜를 갖고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와 역대서를 보면,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 위에 등극하자 정적- 아도니야, 요압, 시므이-을 지혜롭고 과감하게 처단합니다. 나라가 자신의 손에 굳게 세워지자, 비로소 기브온에 갔고, 직접 일천번제를 드려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감동하신 주님이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맡은 왕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재판의 지혜(‘듣는 마음’)를 구합니다. 주님은 기뻐하사, 판결의 지혜는 물론, 지식과 재물까지 주십니다. 솔로몬은 정말 현명한 왕이 되었고, 그 지혜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우상숭배로 전락하였고,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모든 씨앗을 뿌립니다. 그는 단명은 아니지만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지혜가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솔로몬 같이, 사람은 주님에 대한 순종을 떠나면 행복도 또한 떠나버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만이 가지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시편84:1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람 사람들”
사도행전 17: 26절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온 인류의 조상은 노아이며,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그중 한 명이 ‘아람(=고지대)’으로, 적어도 BC1200년경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펼쳐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이나, 신명기는 야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신26:5)이라 하였는데, 리브가나 레아와 라헬이 아람 사람이고, 야곱 역시 20년을 아람에서 지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람 왕국은 다윗 시대 이후 적대적이 되었고, 특히 벤하닷과 하사엘 왕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왕상20:26;왕하6:24). 그러나 두 나라는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말을 이집트에서 사서 아람 임금들에게 되팔았고(왕상10:29),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나병 치료를 위해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 것이 그 예입니다(왕하5장). 아람이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앗수르 왕 디슬랏 빌레셀1세(BC1114)의 연대기이며,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람은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BC720). 또한, 1966년 텔 단에서 출토된 석비는 다윗 가문과 하사엘 아람 왕에 관해 기록하여 성경을 뒷받침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특히 유다 왕국은 약소국이었습니다. 이들은 강대국의 침략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간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지금 비상계엄사태로 어지럽습니다. 적법절차를 따라 조속한 정국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잠언3:5절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새번역)

즐겁게, 그리고 고된 노동 후에는 그 결과는 하나님 손에 맡겨야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수고는 여기까지이며,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후, 잠을 자야 합니다. 온갖 감정이 요동칠 수 있으나, 주님이 맡으셨음을 생각하고 근심을 몰아내는 연습은 경건의 훈련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모순어법 같지만, 온갖 염려·불안으로 마음은 무거우나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정직하게 살고 염려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면 이렇게 해결되는구나!”는 삶의 경험은 우리에게 믿음의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롬8:32)이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을 본받아 안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하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로 가득찼으나, 주님은 고물에서 깊히 주무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신 날 저녁이라 피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맡깁니다” 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죽음 이후의 일을 맡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눅23:46). 그 결과는 부활이었고, 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

매일묵상(2024/12/2-6)


요한복음 11:5,6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본문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의 배경으로, 주님은 2틀을 지체하심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드셨습니다. 낸시에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5살 딸 사라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7월의 아침, 부러진 선풍기의 날개 소리에 잠을 깨자, 자신의 삶 중 부러진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사라의 심장 수술 등으로, 엄청난 병원 빚과 함께, 얼마 후면 남펀의 일자리도, 집도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학교에 갈 시간이 이르자 사라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채워진 가방을 메고 “짜잔”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사라를 성경 학교에 데려다 주고 여러 가지 용무를 보았습니다. 낸시는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지?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자 생각이 멈췄습니다. 이윽고 낸시는 교회에 다시 도착하였고, 사라가 있는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사라는 배낭을 메고 모자도 반바지도 윗도리도 모두 거꾸로 입고 있었습니다. “사라를 정말 사랑한다”는 마음이 스쳐 지나간 바로 그때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는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도 마치 사라의 거꾸로 입은 옷처럼 부조화에 엉망일 것입니다. ‘왜 너는 걱정과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쓸모없는 배낭을 메고 있니? 내가 그 배낭을 대신 메 주마”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낸시는 그날 밤 사라를 양육하는 특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11-14쪽, 참조)

전도서1:13절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3-15절까지는 전도자 자신의 지혜 추구의 결과의 허무를 선언힙니다. ‘지혜를 써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는 고백은 솔로몬의 최고의 지혜가 결집된 책이 전도서로서(참조 왕하4:29-34), 그가 살핀 인생은 한 마디로 “괴롭다”로 정의되는데, 고통을 수반하지만 아무런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스러운 노역”이라 직역됩니다. 불교에 “인생은 고해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나, 전도서는 인간의 모든 일이 무의미를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였기 때문임을 밝혔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철학자들은 지혜 탐구의 삶의 고귀성을 주장하나, 본절은 오히려 ‘괴로운 일’(혹은 ‘지저분한 일’)로 묘사합니다. 인간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사 수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3:17-19). 마치 하데스에게 벌 받아 영원히 돌을 굴려올리는 시지푸스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절은 이런 ‘괴로운 일들’이 왜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할까요? 지식과 지혜를 포함한 모든 삶이 주권자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타락한 인간은 이를 무시하고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작업을 어리석게 하십니다. 대표자가 니이체입니다. 그는 평생 가족을 의심하며 초인을 부르짖고 혼자 살려고 하였지만, 정신병에 걸린 말년의 10년은 어머니와 누이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절대 강자가 정한 구조를 인간은 넘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지혜자입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20).

전도서 1: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모든 일이 시간과 죽음 앞에서 사라질 운명이라, ‘지적 노동’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절대 잡을 수 없고, 설령 잡는다 해도 아무것도 없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13)를 ‘해 아래’로 바꾸었지만, 둘 다 인간 세상을 의미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과 삶을 성찰하면서 얻은 깊은 지혜를 주려 합니다. 먼저, 13절은 세상사를 ‘괴로운 것’이라 결론 짓고, 14절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토로하여 괴로움을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선풍기 앞에서 바람을 쐬다가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지 못한 것에 비유됩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는 시도하다 안 되면 화를 내고 결국 절망하여 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삶의 의미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바람은 표식이나 경고없이 진로를 변경하고, 이리저리 불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현상이,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과 매우 흡사합니다. 1920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 명, 그 후 100년이 지난 2020년의 코로나 19로 7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돌연 사망이 닥치매 악인· 의인· 지혜자· 우매자 모두 동일하게 죽어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돌보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편37:24,새번역)

「라기스」
역대하 32:19절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본절은 앗수르 왕 산헤립(BC705-681)이 라기스를 공격하는 중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보내 수행한 심리전을 묘사합니다. 산헤립의 일대기는 그가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 의 히스기야의 조공 기록과 부합합니다. 라기스 전쟁은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 벽 부조에도 새겨졌습니다. 라기스 주변은 대추야자나무와 포도나무로 둘러싸였고, 이중 성벽이며,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도 보입니다. 또한, 그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앗수르 군사들과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라기스 성벽을 향한 공성퇴를 매단 병거가 보여,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하였는 산헤립의 일대기 내용과 일치합니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 개의 무기들, 즉 물맷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벽 부조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무너진 라기스는 80년 뒤 재건돼 요새로 쓰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믿고 앗수르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앗수르 제국과 유다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왕하18: 7,8). 전쟁을 대비한 히스기야 같이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뱀 같은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히스기야 왕조차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교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시편20:7)

시편128: 2절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경건한 삶의 두 번째는 ‘고된 노동’입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후 인류에게 선고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면서 즐겁게 노동을 하던 아담이 범죄하자 쫓아내시면서 고된 노동을 명령하셨는데, 여섯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① 징계의 의미 : 땅은 저주를 받아 계속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 생존과 가족 부양을 위해 남자는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9). ② 지혜의 수단: 일을 통해 하나님이 숨겨둔 지혜를 체득하며, 고된 수고를 통해 그 열매의 가치를 깨닫게 하십니다.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 수고를 통해 양식과 재물을 얻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곡식이 영글지 못함을, 상인 역시 노력만 한다고 재물을 얻지 못하고 때와 기회가 와야 함을 깨닫는 것처럼, 일에 착수하여 성과를 얻기까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여러 변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교만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④ 성례전적 시각: 그리스도인은 일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에, 고된 노동 가운데 즐거움을 찾습니다. ⑤ 왕 같은 제사장: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수고를 해야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와 줄 수 있습니다. ⑥주님의 심판 : 최후의 심판 시 주님은 우리의 수고가 들어가 있지 않는 열매들은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와 탐욕을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16:1).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매일묵상(2024/11/25-29)

디모데후서3:15절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제 책장에는 한자가 섞인 선친의 성경이 있습니다. 한자는 뜻이 명료하고, 깨달으셨던 글귀들도 적혀 있어 은혜가 되었습니다. 겉표지는 낡아 가죽으로 바꾸어서 틈틈히 읽고 있습니다. 짐 킴스탁은 240km 떨어진 딸의 대학을 다녀온 그날 밤 자신의 대학 때가 떠올랐습니다. 짐을 데려주신 후, 아버지는 오랫동안 침묵하시다가, “나도 네 형들도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단다. 대학에서는 모든 것이 다를 테고 어떤 일이 생길지 나로선 알 수 없으니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마라는 말은 못하겠다. 돈도 넉넉하게 보내 줄 수 없지만 모든 일이 다 잘되리라고 믿는다. 아주 힘들 때 이 수표를 사용하거라. 그런 후 내게 편지로 얼마를 썼는지 알려다오” 이어 아버지는 낡은 당신의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너만 원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너를 도와줄 거다.” 짐은 대학 내내 고학 하였지만, 졸업 후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딸 생각이 났습니다. 이틑날 짐은 딸에게 다시 갔고, “너만 원한다면 이 성경 말씀이 너를 도와줄 거야”라는 편지와 함께 아버지의 성경책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눅11:28). “하나님의 말씀”이란 보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다만, 읽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94-97쪽, 참조)

전도서1:11절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헤롯 대왕은 유대인의 환심도 살겸, 자신의 치적을 남기고자 호화스러운 유대성전을 지었으나 주님의 말씀과 같이 AD66년 경 완성되자 마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또, 기부자 세브란스를 기념하여 ‘세브란스 병원’이라 명명되었지만, 인간의 선행이나 업적 등의 기념이 하나님 없는 삶의 무의미를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인생은 “바다를 가는 것 같다”는 어떤 작가의 말 대로 자취조차 남지 않습니다. 따라서, 11절은 “업적을 남기려는 노력의 무의미”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의 반복이나, 오래된 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잊었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본질은 미래에도 동일하여, 현 세대 역시 장래 세대에 기억받지 못할 것입니다. 좀 우울하지만, 3천년 전 전도자의 말은 사실입니다. 본절은 서론을 매듭지으면서, 과거나 미래 보다, 현재가 중요함을 교훈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인간의 역사 보다도, 영원하신 하나님께 기억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창조된 세상이 애써 부인하고 무시하는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분입니다(전12:14). 따라서, 무의미한 인생 가운데 의미있고, 참으로 기억되는 삶이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2: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전도서1:12절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12절은 본론(1:12-12:8)의 시작이며, 전도자의 충고는 12:8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에서 서술 방식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됩니다. ‘나 전도자’와 같은 자전적 도입은 이집트, 시리아,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형식을 따른 표현이나, ‘되어’로 번역된 동사 ‘하이티’가 완료형이기 때문에 세 가지 견해가 주장 되었습니다. (1) ‘되어’의 완료형은 “전에는 왕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본문의 전도자는 솔로몬이 아니다. 솔로몬은 죽기까지 왕으로 통치하였다. (2)솔로몬이 저자이나, 이를 통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솔로몬의 생애를 추측케 한다. 죄를 지은 솔로몬은 회개하고 다시 왕 위에 오를 때까지 왕이 아니었던 기간이 있었다. (3) 솔로몬이 저자이나, 솔로몬은 삶의 마지막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회한에 잠긴 솔로몬이 남긴 글이라는 탈무드의 전승을 따른다. 그러나 히브리 동사의 완료시제는 과거에 행동이 완료되어서 그 효과가 현재까지 미치는 모습을 묘사하므로, 저자는 솔로몬이고, 죽을 때까지 왕 위에 있으면서 이 글을 남겼다는 전통적 견해가 옳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으로, 솔로몬만이 가능합니다. 그 아들 르호보암 이후 왕국은 분열 되었습니다(BC930). 권력, 부, 지혜를 극한까지 누린 왕 솔로몬은 인생이 그토록 원하는 부, 권력, 명예, 지식 추구의 허무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해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이 비결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18).

「라기스」
열왕기하18:17절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라기스 골짜기는 평지에 위치한 다섯 개 골짜기 중 가장 남쪽에 있습니다. 드넓은 남방지역과 해안 평야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 골짜기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며 해발 천 미터 산지에 자리잡은 헤브론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텔 라기스’는 이미 여호수아의 정복 이전에 가나안 족속들의 요새였고, 왕 르호보암에 이르면 이중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으로 세워져 유다 왕국의 남방 지역을 통제하는 요새가 됩니다(대하11:5-12; 23). 따라서, 라기스 성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보루여서, 열왕기, 역대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등의 전쟁 기록에 적혀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유물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습니다. 산헤립 연대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주전 701년 경 유다 왕국과 앗시리아 사이에 일어난 라기스 전투는 열왕기18장, 19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 천리 떨어진 앗시리아 수도 니느웨 성의 산헤립 궁전에서 같은 내용이 적힌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이것이 ‘라삼 실린더’로 불리워지는 원통형 돌인 산헤립 연대기로서, 높이 약 38cm, 직경 약 15cm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치열하였던 전투는 27미터의 부조에 상세히 조각되어 있습니다. 근동 최 강대국 앗시리아와 충돌한 왕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국운을 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천사 한 명을 보내어 앗시리아 군대 185,000 명을 죽여 구원하십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새번역).

시편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리스도인은 성례전적 시각- ‘주어진 모든 일과 사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해리 블레마이어). 그런 삶은, 삶의 즐거움, 고된 노동, 그리고 근심 없는 휴식이란 3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삶의 즐거움’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을 때, 둘째 딸 라헬을 보자 사랑에 빠집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이나 고된 노동을 하였지만, 수 일(a few days)처럼 여겼습니다(창29:20). 라헬을 아내로 얻어 가정을 세울 기쁨과 소망 때문에 즐거웠던 것이죠! 우리의 계획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이를 믿고 기뻐하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걷되, ‘하나님의 뜻’ 행함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시편119:16).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여러 번 결혼하고 이혼하여 사생활은 좋지 않습니다만, 그의 재담이나 지성은 놀랍습니다.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할 때 유명세가 싫어 거부하려고 하자, 그러면 더 유명하게 된다는 말에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에 BBC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미 상을 받았으며 그것은 “발견하는 즐거움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물리학 연구의 즐거움이 예상치 못한 노벨상까지 이끈 것입니다. 파인만은 “저도 공부를 열심히 한 평범한 사람이에요. 기적은 없어요, 여러분.”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물리학은 없어질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그 안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편119:14)

매일묵상(2024/11/18-22)

전도서1:9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5-8절에서, 전도자는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는 자연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허무성을 지적합니다. 특히 8절은 기계적 순환을 거듭하는 해 아래에서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고통과 무의미를 탄식하나, 9-11절은 새로운 것이 없는 무의미한 세상에, 인간은 왔다가는 사라져 기억조차 없는 허무한 존재임을 밝힙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과거에 있었던 바로 그것이 (장래에) 있을 그것이다”, 중단은, “그리고 (과거에) 행해진 바로 그것이 (장래에) 행해질 바로 그것이다”로 직역됩니다. 미래는 과거의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그러므로 해 아래에서는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없다”라고 직역됩니다. ‘새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욕망은 삶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습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냉장고, 에어콘 등이 그 좋은 예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탄생, 결혼, 직업, 사망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기본구조는 물론, 명예, 권력, 돈,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역시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것’은 없습니다. 고대 아카디아인도 “과거의 삶은 곧 모든 날들의 삶과 같다”는 격언을 남긴 바 있지만, 전도서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긍정적 명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무의미성’을 직시케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복음은 선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전도서1:10절
“”보라, 이것은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새번역)

9-11절은 “해 아래 인간의 삶의 무의미’가 주제입니다. 9절은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10절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합니다. 먼저, 자연계에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태양은 계속 떴다 지고, 강물은 계속 흘러 왔고, 바람도 쉬지 않고 이리 불고 저리 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늙은 뒤 죽는 반복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왜 태어나서, 왜 살고, 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가 던지는 이 질문은, 이전의 세대도 가졌고, 장래 세대도 같은 질문을 가질 것이나 아무도 해답을 갖지 못했고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한편, 자연 현상의 반복과 인간 역사의 반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다”고 믿지만, “내가 내일 살아서 그것을 볼 것이다”고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우연히 내던져진 자신의 삶 또한 무의미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예수의 복음은 이 양자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합니다. 삶에는 의미를 부여하고(영생), 죽음과 심판과 관해서는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새 것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버려진 포도밭」
이사야5:3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엘라 골짜기에서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라기스 골짜기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평지의 나지막한 산들과 들녘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상목 작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포도밭’을 찾곤 합니다: “그 포도밭은 울타리가 무너지고 잡초가 무성하며 가지가 부러지고 헝클어진 머리 같아 보기에도 흉측하다.” 김작가의 경험담입니다. 작가가 오래 전 이스라엘에 유학할 당시 이 지역을 답사하던 교수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이사야서 5장을 읽도록 부탁했습니다. 이윽고 교수는 ‘버려진 포도밭’을 손으로 가리키며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라 말하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포도밭’은 두려움이고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서 이스라엘 평지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드렸고, 이 후 그 현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뜻인, 도덕법을 빌트인시키셨습니다(마5:17,18). 동물 중 오직 인간만이 만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예입니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와 가깝다”며 물을 도(道)에 비유하였지만, 이 도를 성취하신 분은 도성인신하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걱정은 주님께 맡기시고, 들포도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를 맺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잠언12: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행위가 옳은 줄로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듣는다”(현대인의성경)

스티브는 정기검진을 받은 지 며칠 후 전화가 옵니다. “오늘 오후에 병원에 오셔야 하겠습니다.” 스티브는 다소 당황해서 의사에게 갑니다. “앉아주세요, 스티브.”라고 말한 뒤, 의사는 말합니다: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는데요, 췌장암 초기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혈압도 낮고 콜레스테롤도 낮은 데요!” 놀란 스티브의 말에, 의사는 대답합니다. “아직 초기이지만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합시다.” 스티브는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철학으로 암치료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찰스 다윈(1809-1882)이 “생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다”는 내용의 「종의 기원」을 냈고, 불가지론과 믿음 사이를 고민하다 말년에 성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립니다. 진화론은 그것이 전제하는 태양, 공간. 시간의 존재를 설명 못하며, 과학임을 자인한다면 종교는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위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론자 다윈은 성경의 충고를 듣고,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어야 합니다. 유전학을 모르는 다윈의 진화론은 형체의 비교를 통한 추측에 근거하여 이론을 전개하였고, 진화 방향의 예측이나, 검증 방법도 없어 진화 철학에 가깝습니다. 다만, 자연선택, 생명나무의 개념을 남겨 유전학을 근거한 후세의 신다윈주의자들의 출현에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반면, 성경은 발생한 사실에 관한 증언이 기록된 문서들의 집합으로 그 역사적 신빙성과 영감을 담은 가르침은 유일무이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3:16)

매일묵상(2024/11/11-15)


에스더6:1절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왕궁 바깥뜰에 이른 때, 왕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메리와 남편 로렌은 둘째 아들 마이클을 낳은 뒤(1991년) 정기 검진에서 아기의 머리가 문제되어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정상이었습니다. 한 달 후 메리는 두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평소와는 다르게 뒤쪽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때 한 낯선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라고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습니다. 예배 후 그 남자는 와서 마이클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면서 “제가 보기에 아드님은 선천성 골유합증인 것 같습니다. 두개골이 너무 일찍 붙어 버리는 증세이니 즉시 소아 신경 전문의를 찾아가 보세요.” “어떻게 아세요?” “저는 오하이오에서 방문차 들른 소아 신경 외과 전문의입니다. 부인의 아들은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메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주치의를 통해 덴버 시의 전문의를 소개받았으나, 빠른 시일 내 진료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병원에 전화를 하자 접수원은 방금 예약을 취소한 분이 있어 그 시간이 비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덴버 시의 그 전문의는 같은 진단을 내리고 “아이의 두개골이 이미 닫혀 뇌가 더 이상 자랄 공간이 없습니다. 수술해야만 합니다. 다행히 아기가 어려 수술하면 충분히 성공할 가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제때 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두개골을 벌려 뇌가 자랄 공간을 마련하는 8시간의 대수술 후 마이클은 정상으로 자랐습니다. 이 사건 이후 메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3:11a)

전도서1:7절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도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며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 다시 바다로 흐른다.”(현대인의성경)

갈릴리 호수(해저 200미터)로부터 남쪽 사해(해저400미터)로 흘러내리는 강은 요단으로, 그 강물은 급하게 흐르나 사해의 수위를 결코 높이지 못합니다. 뜨거운 햇빛 때문입니다. 이 같이 끊임없이 움직여 변화를 일으키나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마지막 예는 강물입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를 향해 쉴 새 없이 흘러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강물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물론, 과학적 견지에서는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는 중에 많은 유익을 인간과 생물 그리고 식물에게 주지만, 전도자는 바다를 채우려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겉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삶의 무의미를 논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강물의 흐름처럼, 인간이 목표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음박질 하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만족이나 삶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란 번역은 다툼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흐르나 효과 없이 바다로 계속 들어간다는 의미(개정개역) 임을, 다른 하나는 물이 다시 한 번 흐르기 위해 강의 발원지로 계속 되돌아가는 의미(새번역)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도 무방한 것은, 강물의 계속 혹은 반복된 흐름은 인간의 헛된 노력을, ‘채워지지 않는 바다’란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란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롬2:6)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전도서1:8절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자는 6-7절에서, 해, 바람, 강물의 비유를 들어 해 아래 허탄한 인생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나, 본절은 만물로 확장합니다. 먼저, 3절을 문법에 따라 다시 번역하면, “모든 일이 피곤하다. ①사람이 그것들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으며, ②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③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가 됩니다. 솔로몬은 자연계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움직이며, 다만 괴롭고 피곤할 뿐이라는 명제를 먼저 선언한 뒤, 강조를 위해 3개의 부정문이 뒤따릅니다: 첫째,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로 모든 만물을 꿰뚫는 이론은 수립 불가능합니다. 수 많은 논쟁, 이론이 명멸하니 이 또한 헛되고 피곤합니다. 둘째, 눈은 많은 것을 보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고, 셋째, 귀는 끊임없이 들을 수 있지만 들을 것은 더 많습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삶 자체가 해, 강물, 바람의 움직임 같이 무의미하고 피곤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이에 반해,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고 만물을 보면, 피곤함이 아니라 경이와 소망이 차오릅니다. 하나님은 언어 없이도 당신의 영광과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데(시편19:1),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깨닫는 자의 마음은 평안과 쉼을 얻습니다(마11:28).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고백록).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시편23:1,2, 새번역).

「엘라골짜기」
사무엘상17:1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본문의 지리적 배경은 엘라 골짜기입니다. 엘라 골짜기는 블레셋 평야에서 이스라엘 산지로 올라가는 세 번째 통로이며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통과하여 산 능선 길을 따라 해발 700-1,000m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면 곧바로 베들레헴에 도착하며, 북으로 예루살렘, 남으로 헤브론을 공략할 수 있기에,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것입니다. 한편, 골리앗의 고향 ‘가드’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 산악지역을 향해 걸어가면 우편에 우뚝 솟은 텔(언덕 요새)이 ‘아세가’이며 이스라엘의 1차 방어성입니다. 이어 엘라 골짜기는 양쪽에 서 있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폭으로 좁아지고, 산지를 향해  3km를 들어가면 이스라엘 2차 방어성 ‘소고’가 있습니다. 계속 올라가면 골짜기는 마치 입을 벌리듯 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이 평지의 우편 산기슭에 ‘아둘람’(삼상22:1), 그 위로 ‘그일라’(삼상23:1)가 있습니다. 다윗은 승리의 함성이 가시기도 전에 도망자가 되어 블레셋 성 ‘가드’로 피신하였지만,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척 하여 탈출한 뒤, 아둘람 굴에 600명과 함께 은거하는 중에도,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나 배신을 알고 떠납니다. 이 같이 엘라 골짜기는 명암이 교차했던 다윗의 일생의 예고편입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합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시는 것과 같습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시편127: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와 신뢰하는 자의 삶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본절이 노래하는 ‘쉼’입니다. 전자는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도 마음이 불안하여 안절부절하지 못하지만, 후자는 똑같이 고된 일과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나 주님 안에서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신자 역시 똑같은 걱정, 근심 그리고 일의 결과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손에 그 모두를 맡기고(벧전5:7),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신자가 서 있는 믿음의 토대는 확고합니다: “내가 경영하고 노력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시편37:3-6).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은 수술하고 약을 발라 싸맬 뿐이나, 그것을 낫게 하시는 분은 주님인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가정, 삶, 하루의 일과, 사물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해리 블레마이어의 “성례전적 시각”의 취지입니다. 삶을 성례전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감사와 함께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합니다(히13:5).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은 똑같지만 시각이 달라지니 삶은 풍요로워지고 마음은 쉼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멍에를 지고 그분을 배우니,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매일묵상(2024/11/4 – 8)

완벽한 실수
요한복음12:14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종려주일에 주님은 감람산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시나, 제자들은 성경(스가랴9:9)을 성취하시는 사건임을 후에 깨닫습니다(요12:16). 대릴 윌터만 스튜어트의 외할아버지의 일화입니다. 대공황 시절 시카고의 추운 어느 토요일 목수인 할아버지는 아침에 20달러나 주고 안경을 사신 후 교회에 가서 중국의 한 고아원에 보낼 옷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윗 주머니에 넣은 안경이 부지중 떨어졌고 옷 상자는 중국으로 보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안경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인데 이게 뭐예요?” 라고 불평하였습니다. 몇 달 후 그 중국의 고아원 원장이 휴가차 미국에 와서 여러 교회를 방문하였고, 할아버지 교회에도 와서 설교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께서 작년에 보내주신 안경에 감사 드립니다. 공산당이 휩쓸고 지난간 후 제 안경을 포함해 고아원의 모든 것이 망가졌고 저는 정말 절망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제 도수의 안경의 구입은 불가능했어요. 잘 볼 수도 없는데다가 두통이 저를 괴롭혀서 동료들과 함께 매일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 주신 옷 상자가 도착했고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제일 위에 바로 이 안경이 놓여 있었고 도수가 꼭 맞았습니다. 안경을 보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 과정은 오직 할아버지만 아셨기에 뒷좌석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실수를 완벽하게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55-57쪽」. 기도를 쉬지 마시고 주님의 일을 하다가 손해를 보아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전도서1:5절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5-8절은 계속 반복되나 인간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는 그 허무성을 해, 바람, 강물의 끝없는 순환을 통해 표현합니다. ‘해의 순환’을 다루는 본절에서, ‘뜨고..지되’란 계속되는 태양의 출몰을 말합니다. 태양은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고, 오직 무의미한 반복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태양 밑에서 사는 인간의 일상과 노동의 무의미성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논리적 필연입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태양을 포함하여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선포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통제 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분명한 실체입니다(시19:1). 물론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으로 솔로몬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질서 아래 풍요로운 소산물이 나고, 인간과 동식물의 생존 기반이 됨은 변함이 없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나, 무신론자들은 우연으로 치부합니다. 만약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연 그 자체만을 떼어 놓고 본다면 태양의 움직임은 의미가 없고, 인간의 삶 역시 허무하며 매일이 지친 일상입니다. 후단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란, 태양이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지만 순환과 무의미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밑에 사는 인생의 온갖 노력에도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짙은 허무를 재차 강조합니다. 태양은 고대에 가장 신성시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는 인생의 허무가 이 보다 강렬하게 기술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전도서1:6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6절은 ‘바람’의 무의미한 움직임을 관찰한 뒤 인생 무상을 토로합니다. (1)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킨다’는 구절은 ‘바람은 남쪽으로 불며 또한 반대로 북쪽을 향해 분다’는 뜻이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2) ‘이리 돌며 저리 돌아’는 ‘돌이켜 불며, 돌이켜 불며, 계속 분다’는 뜻이며, 역시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모르고, 오직 바람의 무의미한 반복적 활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3) 후단은 내키는 대로 움직이던 그 바람이 결국 ‘그 불던 곳으로 되돌아 갑니다.’ 심히 요동치던 바람이었지만 종래는 시작하였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태어나서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이리 저리 살아보려고 노력하나, 결국은 모두 다 무덤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1985년 경 제가 공군에서 복무할 때 동작동 국립묘지에 단체로 참배를 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중년 여성이 한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아들이 공군 전투 조종사로서 훈련 중 순직하였습니다. 그때 함께 있던 조종사가 인사드리며 아들과 동급생이라고 하니, 그분은 “이렇게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그때, 당신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믿음을 갖고 세상을 바라 본다면, 세상은 의미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허무는 물론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상11:5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과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왕위에 오르자 재판이란 왕의 직무를 위해 ‘듣는 마음’, 즉 분별력을 구하였지만,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넘는 ‘지혜와 지식’(대하1:10)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동식물을 포함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고 부국강병을 이룩합니다. 그는 다윗 같은 믿음이 아니라, 세상 지혜로 주변국가와 정략적 결혼을 통해 평화를 구축하였고, 이에 따라 여인들과 함께 이방 신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고 솔로몬까지 굴복시킵니다. 시돈 여인과 여신 아스다롯이 그 예입니다(왕상11:1). 베니게의 신화에 따르면, 아스다롯은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난 여신으로 아세라, 바알랏 게발과 함께 엘의 부인이 되었고, 7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스다롯은 풍요와 다산, 전쟁의 여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주요 성지는 키프로스, 시돈, 두로, 그리고 비블로스 등 베니게 사람들의 도시이지만, 이스라엘 라기스에서도 금판(BC1600-1200)에 새겨진 아스다롯이 발굴되었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허무한 이야기이나,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은 쉽게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벌과 축복을 부기하셨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에 이르는 복을, 당신을 미워하는 자(예, 우상숭배자)에게는 자손 3∼ 4대에 걸친 벌을 주십니다(출20:4-6). 오늘날은 황금이라는 우상, 즉 탐욕이 더 문제로, 세상 지혜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만유의 주님되심을 믿는 자만이 이길 수 있는 것은(요일5:5), 주님은 금생과 내생의 복의 저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하나님 없는 인간- 장폴 사르트르
시편14: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네가 네 자신의 주인이 되라
”고 주장하였던 니이체를,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가 이어받습니다. 그의 작품 「구토」의 내용입니다: “어느 날 연금생활자 로강탱은 바다에서 돌을 줍다가 구토를 느낀다. 그렇게 시작된 구토는 나무뿌리를 보고도, 카페에서도, 파이프나 포크를 보고도 일어난다. 목적 없이 던져진 존재의 본질, 그것이 구토를 일으키는 원인이었다.” 사르트르는 “종이를 자르는 가위는 용도가 있지만, 인간은 용도가 없다. 가위의 창조자는 제작자이지만, 인간에게는 창조주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던져진 너 자신을 받아들여라(실존), 그리고 자유를 가지고 목적이나 용도를 스스로 창출해 가라(본질).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이 되라!” 고 주장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인본주의적 삶을 세워가자는 주장입니다. 그는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근거하여 공산국가 소련에 후한 평가, 알제리독립전쟁무기지원, 월남전 반대를 외쳤으며, 시몬 보부아르와 51년 동안의 계약결혼, 많은 여성편력으로 비판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실로 하나님 없는 자유를 구가하였습니다. 문제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반항하는 사르트르를 데려가심으로 그의 철학에 철퇴를 내렸습니다. 시간, 공간, 엄청난 우주, 양자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며(요1:1), 세상은 그분의 뜻에 따라 지음받았습니다. 성경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당신을 계시하셨고,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토록 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