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0/28-11/1)

특별한 식탁보
룻기2: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1948년 10월 초 젊은 목사 부부가 오래된 교회에 부임하여 건물을 보수하던 중 성탄절 이틀 앞두고 몰아친 폭풍우로 교회 강대상 바로 뒤의 벽에 큰 구멍이 났습니다. 낙심하였으나 그날 오후 중고등부의 자선 경매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아름다운 낡은 식탁보(4.5m)를 발견하고, 구입하여 그 구멍을 가렸습니다. 성탄절 전날은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교회 문을 잠그고 나오던 목사님은 근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한 중년 부인을 보고 교회에 들어와 추위를 피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최소한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개 숙여 기도한 부인은 벽에 걸린 식탁보를 보았고, 달려 나와 “제 거예요. 제 만찬용 식탁보가 틀림없어요!” 외치고는 한쪽 구석에 수놓아진 자신의 이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은 유모 면접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고, 그녀와 남편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살았는데, 2차대전 중 부인만 살아남고 남편은 나찌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부인은 식탁보를 교회에 놓아두고 떠났습니다. 그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 중 그 식탁보는 더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예배 후 한 노신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그 식탁보를 황홀한 듯 바라본 뒤, ”참 이상한 일이에요. 오래 전 제 아내와 저는 똑 같은 식탁보를 갖고 있었어요…비엔나에 살 때였는데”라는 순간 목사님은 그날 오후 교회에 들렀던 부인에 대해 애기 하였고, 두 분은 그렇게 다시 재회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 출처: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17-20쪽)

전도서1: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2절은 해 아래 안생이 피할 수 없는 절대 허무를 선언하고, 3절부터 11절까지는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비추어도 절대 허무임을 확증합니다. 3절은 노동과 허무를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무의미와 고통 속에서 살다가 덧없이 죽는 것이 인간 실존의 비극입니다. 이때, ‘해 아래에서’란 표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합니다. 태양이 무엇인가? 신자들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임을 주장하지만, 불신자들은 태양의 존재를 우연으로 보고 인생에 대해 불가지론을 주장하거나, 어리석게도 태양을 신으로 경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양에 대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노력해야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신자들은 감사하며 수고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전혀 없으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심은 놀라운 은혜입니다(눅6:36). 한편, 모든 사람은 수고한 어떤 것도 갖고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해 아래’로 표현된 이 세상에서, 열심히 땀흘리고 살아간들, 자신이 먹고 마시며 일하는 즐거움을 빼면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허무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므로(전12:14),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악한 친구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히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고전15:33,34).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 시 수고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5)

전도서1: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3절에서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해 아래’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동과 허무를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짧은 인생에 주목하고 대구법을 포함 3중으로 허무를 강조합니다. (1) ‘한 세대’에 해당하는 ‘또르’는 ‘선회하다, 돌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며, 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 있는 기간과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끊임 없이 흐르는 유구한 세월에 비한다면 한 개인의 일생은 극히 짧습니다. 마치 찰나에 불과한데, 그 짧은 시간 속에 인간이 업적을 쌓고자 발버둥을 쳐도 무슨 의미를 남기겠습니까?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그야말로 허무한 존재입니다. (2) 또한, ‘가고’와 ‘오되’의 히브리어는 모두 분사형으로 ‘끊임 없이 가고 오는 현상이 계속됨”을 표현합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역사에서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는 일’이 계속되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더욱 허무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3) 후단은 짧은 인생에 비해 “영원하다”라고 생각될 정도의 긴 세월을 존속하는 땅을 등장시켜, 인생 무상을 강조합니다(반의 대구법). 물론 전도자나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창조된 이후 수십 억년을 존속하였고 앞으로도 오래 존속하겠지만 영원하지는 않으며, 시편기자도 그 점을 지적하여 노래합니다(시편102:26). 영원하신 분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현재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벧후3:10이하). 당연히 경건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90: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상22:39절
“아합의 남은 행적….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베니게(푀니키아) 사람들은 이집트나 인근 지역의 예술을 발전시켰는데, 근엄하게 앉아 있는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날개를 활짝 펴고 날렵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바꾼 것은 그 예입니다. 이들은 석수와 목수를 솔로몬 성전에 보내어 언약궤를 지키려고 날개를 활짝 편 그룹(천사)을 조각하였고, 이와 비슷하게, 그룹 이외에도 지성소와 외실의 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진 “종려나무와 활짝 핀 꽃모양”은 베니게의 상아 조각에서 흔히 보이는 이집트의 로투스 꽃 형상이나 종려와 꽃의 복합적인 모습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사마리아 궁전 발굴에서, 그룹, 종려, 활짝 핀 꽃 형상의 모습을 한 상아 조각 500여개를 얻었고, 베니게의 영향을 보게 됩니다. 오므리 왕은 아들 아합을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시켜 베니게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따라서, 오므리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BC870년경) 이곳에 거대한 궁전을 지을 때 두로와 시돈은 목수와 석수들을 보냈으리라 판단됩니다. 특히 1910년 경 발굴된 ‘아합 왕의 상아궁’은 이들에 의해 주도 되었을 것입니다(임미영, 59쪽). 성도들이 세상과 교류하고, 발달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편리함과 화려함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상아궁’을 건축하고 이름을 남긴 아합 왕은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 보다 주님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열상16:30). 이는 바알숭배 등의 죄 때문으로, 실로 헛된 명성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하나님 없는 인간- 니이체
전도서6:10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니이체(1844-1900)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만의 삶을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투라는 산을 내려오다 한 노인을 만나 후 ‘탄식합니다 :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구나?” 그리고 니이체는 ‘초인사상’을 전개합니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끊임없이 반복하여 발생되는 수 많은 인간의 문제들, 즉, 고통, 죽음, 쾌락, 사랑, 허무함 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은 길은 하나다.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내던 신의 개념을 집어 던지고, 자유로워져라! 너 자신의 힘으로 이런 문제를 극복할 ‘힘’을 추구하고, 초인(자신만이 가치척도, 자신에게 책임과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 되라!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네가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 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라.” 니이체는 자아성찰의 무거운 짐을 지는 낙타의 기질, 새 가치를 위하여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자의 정신, 어린아이처럼 삶을 놀이로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를 되찾는 창조성을 요청합니다. 그러나니이체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치자,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안고 울다가 그 자리에서 미칩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태리 ‘토리노의 말’이며, 10년 뒤 정신병원에서 사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니이체에게 인생은 너무 무거웠고 마음의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자신들이 죄와 연약함에 싸여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죄, 사망, 세상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니이체와 달리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1:2)

매일묵상(2024/10/21-25)

하나님의 유모(humour)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배란이 끊어진 90세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웃었고 모두 웃었습니다. ‘이삭’의 뜻은 ‘웃음’으로. 하나님의 유모 중 하나입니다. 이를 경험하면, 우리의 믿음은 든든하게 되고, 삶은 사랑으로 훈훈합니다. 로빈은 오랜 암 투병 끝에 소천하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까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언니는 아기를 낳았고, 오빠는 갓 결혼한 터라 어머니의 간호는 막내딸(27)인 자신의 몫이 되었으나, 부담 아닌 명예였습니다. “이제 난 어쩌면 좋아요, 주님?” 교회 의자에 앉아 속으로 물었습니다. 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이 끝나고 혼자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한 청년이 들어와 주위를 둘러 보더니 로빈 옆에 앉아 “늦어서 미안합니다”한 뒤 말 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몇 사람의 추모사가 끝나자 그가 로빈에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메리를 마가렛이라고 그러죠?” 알고 보니, 로빈의 어머니 장례식장을 자신의 이모(메리) 장례식장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로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장례식이 마치자, ‘릭’이라고 소개한 그 청년은 이제 이모 장례식에는 참석치 못하니 커피 한잔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만남으로 1년 후 로빈과 릭은 결혼하였습니다. 모친을 돌본 로빈이 외롭게 혼자 남겨진 바로 그때 주님은 릭이란 배우자를 보내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다”(마25:36, 사역)

전도서1: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오늘부터 전도서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졌는데, ‘잠언’이나 ‘아가서’와는 달리 솔로몬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란 문구와 1장과 2장의 내용을 검토하면, 분명히 솔로몬 왕이 맞습니다. ‘전도자’란 히브리어 ‘코헬레트’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스승’ or ‘리더’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풀어 쓰면, ‘스승-왕’ 정도의 어감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많은 염세주의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주전14세기 바벨론 작품인 「염세주의자의 대화」가 그 예로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자살이라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전도서 역시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적시하지만, 기쁨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의 가능성도 담겨 있기 때문에 세속적 염세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주장의 결과에 직면하라고 도전하는 복음주의 소책자이면서, 삶의 ‘허무’, 악의 존재, 인생의 ‘수수께끼’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담아 내어, 피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지하게 삶을 대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하는 일면을 갖고 있습니다. J.S 라이트의 전도서 요약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미지의 것들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시지만,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열쇠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그 문들을 열어 주시도록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전12:13,14, 새번역)

전도서1: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대 허무와 신자의 본분’이란 본서의 주제를 ‘봉투구조’ (inclusion)라는 문학적 장치에 담습니다. 즉, 서론부(1:1-11)의 1:2절과 결론부(12:8-14)를 이끄는 12:8절에 ‘절대 허무’라는 유사한 내용을, 그 사이에 본문(1:12-12:7)을 위치시킨 것입니다. 또한, 원문에서 ‘헛되고 헛되니’는 두 개의 명사로서, ‘전도자가 이르되’ 보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동사가 서두에 위치하는 통상의 히브리 구문 상, 허무의 절대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헛됨’의 원어는 ‘헤벨 = 수증기, ‘호흡’’이며, 여기에서 ‘실체가 없음’ ‘덧없음’ ‘허무함’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좋은 예가, 인생이 덧없으니 자신이 죽도록 놓아달라는 욥의 탄식(욥7:16)과, 우상의 헛됨은 그것이 나무조각과 돌조각 금속조각일 뿐이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신32:31)을 의미할 때입니다. 더 나아가, 본절은 ‘헤벨’이 단수형태로 세 번, 복수형태로 두 번, 도합 다섯 번이나 사용되어 하나님을 떠난 삶의 절대 허무가 더욱 강조됩니다. 전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솔로몬은 우상숭배까지 행하여 이 허무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술, 철학, 우상숭배, 할렘을 통한 쾌락, 사업, 무역, 건축 등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무의미 하였고, 오직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옳은 삶임을 실토합니다. 이 같은 고백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만 경외하고 살도록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역대상22:4절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레바논 남부 지역은 성서시대에는 시돈, 사르밧, 두로과 같은 도시국가들이 존재하였으며, 신약 시대에는 베니게(Phoenicia)로  알려졌습니다(행11:19;15:3). 수공업과 해상무역에 뛰어난 베니게인은 가나안 사람 중 이스라엘과 가장 빈번히 교류하였으나, 가깝고도 먼 이웃이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궁궐이나, 하나님의 성전을 준비하거나 건축할 때, 이들은 백향목과 기술자 등 수많은 물자들을 보내어 도움을 주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다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는 물자가 풍부한 곳에서 없는 곳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종교와 인종이 담이 될 수 없음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그들의 노력에 따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표현입니다(눅6:35,36) 둘째,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그리스도 왕국의 모형으로, 궁궐이나 성전 건축에 베니게인들의 참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성될 것의 예표입니다(엡2장). 문제는 이방 우상의 영향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은 시돈의 여자와 결혼 했고(왕상11:1), 이 민족과 교류를 통한 우상숭배의 영향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이방인의 도움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편, 신약시대에 이르면, 이방인의 땅이라 불리웠던 갈릴리와 데가볼리 지역은 주님의 복음 전도 중심지가 되고, 시돈과 두로 지방 역시 그 영향권에 들었습니다(막7:24-37). 우리는 우상숭배의 교훈을 잊지는 말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눈을 갖고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새번역)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인내
창세기3:17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바이오, 물리학 등의 기술영역 경계가 융합되는 기술혁명입니다. 초연결, 초지능, 융합학에 의해 모든 것이 연결되고 지능화된 사회로 변해 가며, 인공지능과 ICBM(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서비스, 빅데이터, 모바일) 기술의 성숙 및 데이터 중심의 산업구조로 급속히 변혁 중이며, 양자기술의 발전 또한 괄목합니다. 머리 겔만(1929-2019, 노벨물리학상)이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분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뒤 떨어지지 않아야 하지만, 이렇게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분이 만유를 정리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마28:18; 엡1:10). 그러나,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큰 불행입니다! 양자역학을 모르면 금붕어와 다름 없다는데, 하물며 양자역학을 만들어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더 무지하겠습니까? 인간은 그 무지의 대가를 범죄, 전쟁, 질병, 사망, 학대 등으로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물론 신자도 척박한 삶 때문에 고민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도움을 생각하면 염려는 사라집니다(마6:33; 롬8:37).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뜻은 열매를 맺고 그분의 살아계심이 증거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수고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매일묵상(2024/10/14 – 18)


잠언31:28절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일어난다”는 것은 예의를 다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며, 남편의 칭찬은 비교급 형식을 띤 최상급입니다(29). 고희연 빈객들 앞에서처럼 가족은 모두 ‘현숙한 여인’에 대한 최상의 감사와 칭찬 그리고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아내로부터 증거를 받기 전에는 그분에 대한 칭찬을 믿지 않습니다”(조지 화이트필드)는 말이 있듯이,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참된 삶이라고 평가될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자들로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의 행위를 증언을 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좋은 이웃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실되고 의로운 일생을 보냈다 하겠습니다. 4세기 말 교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떠오릅니다. 어거스틴은 “나의 어머니는 남편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인을 대하듯 하였고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섬기는 일을 통해 여인의 덕성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이러한 모습은 어머니를 아름답게, 존경을 받게 하였으며 남편의 칭찬을 듣게 하였습니다”(고백록). 정반대의 여인들도 있습니다. 남편 아합 왕을 충동하여 온갖 악을 저지르게 했던 이세벨(왕상18장 이하), 권력을 위해 남유다 왕국을 피로 물들였던 이세벨의 딸이자 왕후 아달랴(대하22:10-12), 침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헤로디아와 그 딸 살로메 등이 그 장본인 입니다. 한편,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아내입니다. ‘현숙한 여인’처럼 남편되신 그리스도께 칭찬을 듣고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언31:29)

잠언31:30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새번역)

30절과 31절은 10-29절의 요약이며, ‘현숙한 여인’이 칭찬받는 근원을 밝힙니다. 첫째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요(30), 둘째는 그에 대한 주님의 보답입니다(31). 잠언은 이 두 요소를 강조하려고, 먼저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부정합니다. ‘고운 것’이란 ‘매력적인 것’을 뜻하나 ‘거짓되다’고 평가합니다. ‘거짓’은 우상의 헛됨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렘10:14). 이어 등장하는 ‘헛되다’의 원어는 ‘수증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수증기는 처음에는 피어 오르지만 이윽고 사라지는데,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끌지만 세월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 꼭 수증기와 같습니다. 즉, 외형의 아름다움은 매력적이라 사람들이 우선 주목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주의를 당부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이것이 현숙한 여인이 보여준 칭찬 받는 행실의 근원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뿌리를 내린 여인의 삶은 가사 관리, 경제 활동, 고결함과 높은 도덕성으로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여인의 가치는 진주 보다 훨씬 값지다 하겠습니다(10). 따라서, 현숙한 여인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임을 새기고, 자녀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며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잠언31:31절
“아내가 손수 거둔 결실은 아내에게 돌려라.  아내가 이룬 공로가 성문 어귀 광장에서 인정받게 하여라.”(새번역)

현숙한 여인의 성공 비결 두 가지 중, ‘주님에 대한 경외’는 앞에서(30) 논하였고, 본절은 ‘노력에 대한 주님의 보답’을 언급합니다. 전단은 ‘현숙한 여인’은 자신의 노력이 열매를 맺고, 그 결과물을 누리는 축복의 선포입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결실을 맺어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질병, 사망, 수탈-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그 여인을 돌보셔서 수고의 열매를 향유토록 하셨습니다. 시편128:2절의 축복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실로, 성도들의 특권 중 하나는  “우리 손이 수고한 만큼 벌고 이를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착되어진 재산, 지위 등에 만족하면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충만하게 받았고, 주님은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히13:5). 후단은 ‘현숙한 여인’이 받는 존경의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는 자를 높이신 것으로 그 수단은 덕행입니다. ‘성문 어귀 광장’이란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며, 그녀의 덕행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 여성이 이처럼 칭송을 받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당시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마치 남편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 받은 것입니다. 끝으로, “현숙한 여인”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를 뜻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 지혜로운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계22:12,새번역)

요한복음16:28절
“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긍정적입니다. 등산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우리들은 설령 정상이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정상에 오르려 하는 등산가와 같다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을 초월하는 세상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 밖에 계시지만 인간의 삶 전체에 의미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그림 밖에 있지만 그림에 균형을 가져다 주는 ‘구도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구도점은 작품 내에서 시각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점입니다. 비록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도점은 그림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고, 시각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작품의 요소들이 균형을 잡고, 안정감을 갖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구도점은 작품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포인트입니다. 인생을 균형잡고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우리는 “예!”라고 대답하며 힘차게 긍정합니다. 이에 반하여 인생을 오직 인간적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까지 인간의 체험을 갖고 설명하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의 표상은 큰 관계가 없음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을 통해서 보려는 태도는 마땅히 버려야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시편14:1,새번역)

마태복음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삶의 의미는 행동 없이 생각만으로는 찾지 못합니다. 삶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가라! 팔아라! 주어라! 오라! 따르라!” 이 말씀을 실천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믿음의 체계 그 이상입니다. 이는 삶의 양식, 곧 책임 있게 자신을 투신하는 행동 양식이요, 하나님 아래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행동 없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겨 있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마11:25). 주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실 책임은 그분의 고유한 개인적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받아들신 후, 주님은 겟세마네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주어지는 자유를 발견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육신 하신 삶의 의미를 확정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만이 져야 하는 ‘고유한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 사회 등에 대한 책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책임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즉 섬김을 실천할 때 비로소 얻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시겠다고 결심한 순간, 겟세마네의 고뇌로부터 놓여 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자유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같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주어지나, 삶의 의미는 그분의 뜻을 행한 뒤에야 얻게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매일묵상(2024/10/7-11)

잠언31:26절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현숙한 여인이 행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취를 다룬 잠언은, 본절에서 그런 성취를 가져오게 한 영적 도덕적 가치를 언급합니다. ‘입’은 ‘그녀의 입’을, ‘그의 혀’는 ‘그녀의 혀’로서 원문은 시작과 끝에, 그 중간에는 ‘지혜’와 ‘인애의 법’을 배치함으로 내부가 강조된 교차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26절의 중심은 ‘지혜를 베푸는 것과 인애의 법을 말하는 것’에 있습니다. 전단의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는 언어생활의 지혜로움을 뜻합니다. 지혜는 휼륭한 유산과 같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솔로몬은 ‘무엇보다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언어생활도 같습니다. ‘때에 맞는 말은 은 쟁반 위에 아로새긴 금사과’와 같습니다. 바울 역시 ‘오직 덕에 소용되는 대로 필요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사역)고 명령합니다. 신자의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하며, 기도와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이 분야에서 탁월한 명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후단의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한다’는, 자비하고 인자한 태도로 자녀와 종들을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모습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 마다, 동의가 되고 마음은 은혜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한편, ‘법’은 모세오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토라’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인애의 법’이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의 도를 말합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 만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기에, 본절은 참된 제자들의 전형적인 삶을 묘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31:27절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27절의 첫 단어는 ‘보살피다’를 뜻하는 ‘차파’로서, 히브리어 18번째 자음( ‘차데’)로 시작됩니다. 알파벹 시인 ‘현숙한 여인’의 찬가는 18번째(10∼27절) 이르렀고, 이제 4 개의 자음만 더 나오면 끝 날 것입니다. ‘차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낱낱이 둘러보심(15:3), 혹은 파수꾼이 적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함(삼상14:16)을 묘사하기에, 집안 대소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다스리는 여인의 태도가 떠오릅니다. 후단의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를 직역하면 ‘그녀는 게으름의 빵을 결코 먹지 않는다”입니다. ‘게으름의 빵’이란 일하지 않거나, 불의한 소득을 상징하므로, 이 여인은 부지런하고 정당하게 일하고 살아 갔습니다. 실로, ‘현숙한 여인’은 노동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정직과 진실에 기초하여 경제 활동을 수행해 왔으며,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누구도 게으름의 빵을 먹도록 허용치 않는다”(스코트)고 해석한 학자도 있습니다. 이 같이, 27절은 가정과 경제 활동의 특정부분을 다루지 않고, 그런 결과로 나타나게 된 ‘현숙한 여인’의 성품을 요약한 뒤(전단), ‘정직한 삶’의 결정적인 결과물을 적어 강조합니다(후단). 진정한 지혜란 단순히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격에 내재되어 삶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잠언의 교훈이며,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진 자의 삶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서 그는 ‘지혜자’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마가복음5: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빅터 프랭클은 정신분열증 환자(60세)의 사례를 보고합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환청을 들어왔고 바보 취급당했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때도 있었지만, 자기 누이동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았습니다. 프랭클은 누구 때문에 자신을 조절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사랑하는 누이동생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요!”라는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환자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중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랫동안 귀신 들려 고통받은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 당신을 따르고자 하자,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자비의 빛으로 삶을 깊이 돌아보도록 권면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거라사의 광인과 같이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이해도 해결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광인이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를 보고 이유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는 일생 주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심이 인격의 중심에 자리잡는 현상입니다(벧전3:21). 사랑을 받은 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 이후 사라졌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 따슷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재창조된 인간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누가복음3: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심리치료(요법)’란 심리적 문제를 심리치료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면서 자기 이해에도달하나, ‘의미치료(요법)’은 환자의 세계관을 재조정하여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과정입니다. 빅터 프랭클에게 명석하나 선천성 우울증에 자주 빠지는 여교사가 찾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약을 처방하여 신체적 치료를 시도하였지만, 그 우울증은 심리적인 문제에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심리치료를 도입하자 이 환자는 갇혀 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비하감, 삶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빈곤감 등을 모두 내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녀는 운명적인 우울증의 재발로 무력증에 빠져 음울하게 살아 왔었습니다. 프랭클은 “가능한 한 우을감을 무시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녀를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의 치료 영역으로 이끌었습니다. 프랭클은 실존분석(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환자에게 발생하는 운명적인 우울증에 스스로 도전하도록 깨우쳤습니다. 그 여교사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고 훨씬  책임감 있게 살아가게 되자,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써 보냈습니다. 탕자는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제정신이 들었을 때)’(눅15:17, 사역), 자신이 설정한 쾌락 중심적 삶의 문제점을 깨닫고 책임성 있게 그것을 고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돌이켜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을 향해 살겠다는 마음의 결단’은 회개의 본질입니다. “침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벧전3:21,새번역)


시편40:8절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질병과 치유를 함께 생각하면 대답이 좀 더 쉽습니다. (1)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유기체로만 볼 경우, 유기체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약물과 수술로만 고치고자 할 것입니다. (2) 인간 존재를 어떤 심리적 장치로만 파악할 경우, 심리학적 상처(트라우마)를 밝혀내는 일에 기반을 두고 치료할 것입니다. (3) 인간 존재를 단지 영적(or 정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경우, 삶에 대한 의미를 중심에 두기 때문에 환자의 가치 체계 훼손이 질병이라 간주하고 치료할 것입니다. 따라서, 치료는 상기 3가지 차원이 모두 고려되어야 하나,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설명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도 삶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육체적 질병(맹인, 열병, 나병 등), ‘심리적 질병(죄로 신음하는 중풍병자), 영적·정신적 질병(거라사 광인), 그리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고르반 제도를 통한 부모공경 계명을 왜곡한 바리새인의 가르침)를 모두 고치셨습니다. 몸의 질병은 기적적인 치유로, 과거의 죄로 신음하는 심리적 고통은 죄 사함을 주심으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영적·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는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고 교훈하심로 바로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고의 틀 내에서 행동하도록 가르치신 점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요8:31,새번역)

매일묵상(2024/9/30-10/4)


잠언31:24절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31:13-23절에서는 현숙한 아내의 유능하고도 성실한 활동과 그에 따른 복된 결과를, 24절부터 29절까지는 같은 내용을 반복합니다. 그 중 본절은 이 여인의 경제 활동 즉, 생산과 사업의 성과를 알려줍니다. ‘베로 옷을 지어’는 ‘세마포’ 혹은 ‘베로 만든 겉옷’으로 번역되나, ‘고급 속옷’으로 보입니다. ‘띠를 만들며’는 ‘허리띠’를 의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으로 짜여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옷을 고정시키거나 옷맵시를 위해 허리띠가 필수품이었습니다. 통상 가죽으로 만들었으나 보석이나 금으로 장식된 값비싼 것들도 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물건들은 일차적으로 가족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나, 이 여인은 더 많이 생산하여 상인들에게 판매하였습니다. 조선중기(16세기)는 양잠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이황(퇴계, 1501-1570)의 어머니 박씨는 여덟 남매를 혼자서 농사와 양잠으로 키웠습니다. 누에 사육은 여인들의 농가부업이었고, 세심한 주의와 관리를 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퇴계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는 양잠에 관한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만큼 퇴계는 양잠산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8세기가 되면 사대부들도 참여하였다고 하니, 퇴계의 관심은 2백년이나 앞섰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퇴계는 성리학에 전념하였지만, 가정 경제도 소홀하지 않고 균형 잡았습니다. 아담(사람)은 동산관리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손이 주께서 주신 일을 발견하면, 무엇이든지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합니다(전9:10).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잠언31:25절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현숙한 여인은 눈이 와도 염려하지 않았는데(21a), 본절에서는 닥칠 수 있는 어떤 역경도 비웃고있습니다. 본문의 ‘옷을 삼고’에 해당하는 ‘레부솨흐’는 ‘의복’이라는 의미의 ‘레부쉬’와 3인칭 여성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따라서 ‘능력과 존귀는 그녀의 옷이다’로 직역됩니다. 구약에서는 옷을 매개로 사람의 특성과 성품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추위를 대비하여 가족들을 홍색 옷으로 입혔지만(21a), 그녀 자신의 옷은 ‘능력과 존귀’입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오즈’는 ‘힘’ 즉,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를 뜻합니다. ‘존귀’란 ‘아름다움, 화려함, 위엄’ 등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그녀를 동료들 위에 놓게 하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그녀에 대한 칭찬은 이 이상 높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년과 노인 세대가 갖는 장점(예: 20:29절의 ‘능력과 존귀’)을 모두 그녀에게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후단의 ‘후일을 웃는다’는, 적을 조롱하는 승리자와 같이 그녀는 미래에 닥쳐올 역경들을 비웃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새번역)로 해석되지만, 70인역이나 라틴역과 같이 “마지막 날에 기뻐한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숙한 여인은 생존 시에는 모든 과정을 힘차고 고결하게 살아갔고(전단), 죽음이 임박할 때 결코 두려워 하지 않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후단)의 묘사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31:30). 본문은 믿음의 여인의 아름다운 일생을 단지 6개 단어(히브리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누가복음1:10절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새번역)

본문은 BC 5년 경, 제사장 사가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중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단 우편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타나 늙도록 자녀가 없던 사가랴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집니다. 이 ‘좋은 소식’(복음)을 믿고 집으로 돌아간 사가랴는 늙은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 침례 요한을 낳게 됩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난 사건을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영적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셨다는 은혜를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은혜의 체험을 갖게 되면,  놀라운 황홀경, 기쁨, 평강 등을 또 경험하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를 간직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책임을 다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거라사 광인도 같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 자신을 괴롭히던 군대 귀신들로부터 자유함을 받습니다(1-20절). 이 은혜를 받자 그는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고자 함께 머무르도록 요청합니다.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는, 그를 온전하게 하사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이전의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 일상의 임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생활 방식, 삶의 자세는 완전히 바뀌게 되며, 삶이 변화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합니다. 그를 보고 들은 주 변 사람들은 모두 놀랄 것입니다. 이것이 간증이요 복음의 전도입니다.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리하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막5:20,새번역)

누가복음 22:24절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오늘 본문은 최후의 만찬 중 일어난 제자들 사이의 다툼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요13장). 주님의 혁명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위대함은 섬김에서 나온다’는 교훈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선포하시고, 공생애에 임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항상 주는 삶이요,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의 시가 떠오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편37:21). 체포당하기 직전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십자가 상에서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많은 삶의 방식이 있으나, 섬김이란 삶의 방식”이 단연 최고입니다. 섬기면 낮아지고, 손해도 보겠지만, 주님이 높이실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주님을 높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막10:30).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만, 섬김의 분야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섬기고자 하는 일에 적합한 은사, 기술 혹은 경험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롬12:3). 겸손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지혜롭게 되어 있습니다만,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마태복음5: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새번역)

‘기우(杞憂)-기나라 사람의 근심’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입니다. 기우가 지나치면, 신경증으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신경증의 고통은 대부분 잘못된 견해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제멋대로 설정해 버린 그릇된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반되는 요구들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기차만 타고 다니거나(고소공포증),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이란, 안전이 보장된 높은 장소에서도 발작을 일으키는 정신병으로, 직접 창문너머로 밖을 보지 않아도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광장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쉽게 탈출할 수 없거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여 넓게 탁 트인 공간을 무서워합니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특히 과학시대의 교육을 받은 신경증 환자들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결정론의 오류에 쉽게 희생당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깨달아도, 더 이상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운명이나 환경에 내맡긴 채 살아갑니다. 이들의 세계관·인생관은 분명히 교정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들고 오셨을  때 행하신 일이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니다. 부자 청년, 사마리아 여인, 마르다,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주님은 이를 분명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자기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삶의 혁명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새번역)

매일묵상(2024/9/23-27)

잠언31:22절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현숙한 여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불’ ‘세마포와 자색 옷’은고대에  부자들이나 권력자들만 사용하고 입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숙한 여인’에게는 사치품이라기 보다는 품위 유지를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익힌 훌륭한 직조 기술로 침대용 이불과 아름다운 옷을 짜고 사용합니다. ‘이불’은 복수로서, 침대를 부드럽고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7:16참조). 그녀의 옷은 농업과 축산에서 나온 최고급 직물로 만들어졌습니다. 31:13에서 아마(린넨,삼)로 옷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본절로 들어오면 ‘세마포(고급 린넨)’로 발전합니다. 고급 린넨은 통상 이집트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자 입었던 바로 그 옷입니다(창41:42). 또 ‘양털’(13) 대신 ‘붉은 보라색으로 염색된 양털’을 옷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역시 전통적으로 수입품이었습니다. 이 붉은 염료는 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조개 껍질에서 추출하였기에 비쌌고, 따라서 부와 사치품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가 이 염료로 염색한 직물을 판매하였습니다. 누가는 또한 그녀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하셨고, 그녀와 온 가정이 침례를 받습니다(행16:14).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의 첫 번째 교회였고, 루디아는 신약판 ‘현숙한 여인’입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31:23절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당시 성문은 사람들이 모여 공적인 일을 논의하거나 재판하는 장소로 장로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정 이전에는 장로들의 권위 하에 각 공동체의 질서가 세워졌고(룻4:1-12), 또한 장로들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공동체를 대표하였습니다. ‘그 땅’이란 ‘성문’과 병행구절로서, 그들의 영향력이 공동체를 넘어 더 큰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그녀의 남편이 공동체 가운데 인정 받아 명성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이유를 들면, ①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가정은 평안하고 번영하였습니다. ‘가화만사성’이지요. ② ‘인정을 받으며’의 원어는 ‘노다’이며, 이는 개인적 접촉을 통해 경험해 안다는 ‘야다’가 어근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은 그 남편의 명철함을 경험해 알고 있었고, 장로들과 함께 재판석에 앉을 만큼 존경받았습니다. ③ 아내된 ‘현숙한 여인’이 준비하여 입힌 ‘홍색 옷’(21b)과 같은 고귀한 의복도 명성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④ ‘현숙한 여인’은 ‘그 행한 일 때문에 성문에서 칭찬을 받는다’(31)고 한 것 같이, 그녀의 성품과 천재성은 남편의 머리에 씌여진 면류관입니다(잠언12:4). 실로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귀합니다(31:10). 한편, 어떤 의미에서 ‘현숙한 여인’은 성도들을 상징하는데,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올바른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마5:16),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고린도전서13: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빅터 프랭클의 우울증 환자였던 여교사의 글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울증은 “삶의 의미”를 못 찾고, 이에 따른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 하는 병입니다. 삶의 의미는 창조적 가치, 체험적 가치, 자세적 가치의 실현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프랭클). 인간이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 자체가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자세적 가치). 결국 ‘자세적 가치’는 가치괸, 철학, 혹은 신앙으로 불리워지는 정신적·영적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삽질 밖에 없고,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징벌과 굶주림과 추위뿐이었다. 그래도 인간에게 본질적인 자유가 남아 있고 자세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앞에서 인간은 자유롭다…이 자유는 어떤 조건도 부인한다. 그것은 ‘모든 상황 아래서’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되는 자유다”. 프랭클은 전문직에 종사하다 죽을 병에 든 어느 청년의 사례를 언급하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청년의 사례는 내일 묵상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가치와 모범, 그리고 소망을 제시합니다. 복음은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침례를 받아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종들로 살아가라”는 믿음의 자세, 주님의 훌륭한 모범, 그리고 이를 본받은 사도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갖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요한일서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한 청년이 수술이 불가능한 척추종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신이 점차 마비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직업을 그만 두었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창조적 가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예를 들어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으며 다른 환자들을 만나 서로 격려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활동까지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신이 마비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를 자세적 가치에서 찾았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동료 환자들을 상담해 주는 역할을 자임하였고 최선을 다해 귀감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용감하게 참아냈다. 죽음을 하루 앞둔 날, – 그는 그것을 예견하였다 – 그는 당직 의사(빅터 프랭클)가 밤중에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 오후 진료시간에 그 의사가 회진 왔을 때 청년은 저녁에 주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의사가 주사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래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도록 하는 배려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훌륭하게 실천한 대목입니다. 물론, 이 청년이 그리스도인인 여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불신자라도 프랭클의 의미요법, 더 나아가 상기 황금률에 감탄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로써 구원받지는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덕으로 칭찬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주님의 뜻을 실천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권리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마가복음1: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자신의 불치의 병을 우연히 알게 된 저명한 한 젊은 수학자의 편지입니다: ‘나는 나의 도전적 정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었네요. 이 투쟁에서만큼은 애초부터 승리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지요. 차라리 이 투쟁은 남은 기력의 마지막 소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이유 없는 투쟁이라고요? 우리 시대의 철학 서적에서는 이 말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투쟁 그 자체가 중요하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상실될 수 없습니다…..저녁에 우리는 안톤 부르크너의 교향곡 4번 Romantic Symphony를 감상하였지요.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우주적 장엄함이 나를 감쌌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값싼 감상주의에는 틈을 내주지 않을 겁니다”(「의사와 영혼」빅터 프랭클). 이 수학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세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창조적 가치나 경험적 가치들도 멘토의 도움이 요청되지만, 자세적 가치의 경우는 필수적입니다. 그 만큼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의 전환이 어렵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는 38년 간 누워 있었다가 고침 받았으나,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자, 오히려 안식일에 자신의 병을 고친 이가 예수임을 고발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기적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세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세를 바꾸는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천국도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매일묵상(2024/9/19-20)


잠언31:20절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곤고(가난)하고 궁핍한’(9) 이란 문구는, 그 당시 힘 없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가난한 자를 지칭하는 일상적 언어로 보여집니다. 왕은 법정에서 입을 열어 그들의 이익을 옹호해 주지만, ‘용맹한’ 이 여인은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려고 손을 폅니다. ‘현숙한 여인’을 용맹하다고 일컫는 것은 몸은 연약하지만, ‘도덕과 자비의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손을 펴며’그리고 ‘손을 내밀며’ 그녀는 도움을 주려고 손짓합니다. 이 여인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하여 번 것을, 움켜쥐지 않고, 궁핍한 자에게까지 도움을 줌으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실천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목적은 단순히 가족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하려는 마음도 갖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사회보장이 어느 정도 정비되었지만, 흉년이 빈번히 찾아 들었던 고대에는, 가난한 자가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친척이나 부자의 자비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고엘 – 친족구속자’를 통한 구제 제도를 확립하였고, 룻기는 이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는 고엘이 되어, 가난한 나오미와 룻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족 구속자인 ‘고엘’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도입니다. 죄악과 마귀의 수탈에 허덕이던 인류를 고엘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숙한 여인’은 지혜의 화신이고, 이는 주님을 표상한다 하겠습니다. 주님을 통해 아버지께 영원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9:9)

잠언31:21절
“온 식구를 홍색 옷으로 따스하게 입히니, 눈이 와도 식구들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다.”(새번역)

잠언의 ‘현숙한 여인’의 행장에는 그녀가 만든 화려한 옷이 언급됩니다. 다만, 옷을 팔아 돈을 벌고 식탁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눈 내리는 추위에서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걱정하는 일이 없다’는 예상되는 위험을 충분히 대비하였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우기는 겨울이고(11월∼3월), 가장 큰비는 1월, 2월에 내립니다. 이때는 폭우가 쏟아지며, 예루살렘과 같은 높은 산지에는 때때로 눈이 내리고, 비는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따라서, ‘눈’은 식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혹독한 추위에 대한 환유입니다. ‘홍색’은 붉게 물들인 실로서, 아마가 아니라 값비싼 양털을 뜻합니다. 아마는 염색이 쉽지 않습니다. 염료기술이 일천했던 당시에는 물감을 들인 채색 옷은 부자나 귀족만이 입는 비싼 옷이었습니다(창37:3). 따라서 ‘현숙한 여인’이 모든 식구들을 위해 값비싼 양털로 짠 ‘홍색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녀의 재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다만 과시를 위함이 아니라 겨울의 추위 속에서 건강을 배려 한 것입니다. 그녀는 지출의 때와 대상을 알고 있으며, ‘마음도 따뜻합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과 경제생활의 상관관계를 모범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숙한 여인’은 주님이 맡기신 가정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며, 지혜롭고, 마음은 사랑으로 따뜻합니다. 열심히 일만 하면 돈은 벌겠지만, ‘현숙한 여인’처럼 모든 이웃, 특히 가족을 돌보며,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경외하기에 터득한 ‘사랑의 기술’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매일묵상(2024/9/9-13)


잠언31:18절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고,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새번역)

18절은 “현숙한 여인”이 부지런함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았다.” 즉, “현숙한 여인”은 자신이 벌어들인 경제적 이익에 고무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잠언은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음식물을 나누어 주고, 여종들에게 할 일을 맡긴다”는 15절을 고려하면, 도대체 이 여인은 언제 잠을 자고 휴식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는 해석들이 많으나, 부지런한 사업가들의 삶이 실제로 그러합니다. 사업가들은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통상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책임감을 갖고 일합니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본받아,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하였습니다(1968.2.1). 난 공사를 앞두자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호출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지도를 보면서 걱정하는 사이 작업복 차림의 정회장은 졸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현장에서 밤을 새다시피 하며 작업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언짢은 표정 대신, 잠이 깨기를 기다렸다가 죄송해 하는 정회장의 손을 잡고 “정 사장, 내가 미안하구만” 하였다고 합니다. 가난한 대한민국의 발전이란 공동 목표를 놓고 힘을 합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사업가의 덕목은 이익이 되는 분야를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이 ‘현숙한 여인’은 밤새 직물을 짜서 팔아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표현은 그녀의 번영을 단적으로 알려줍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14:24).

잠언31:19절
“한 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탄다.”(새번역)

19절은 “현숙한 여인”의 실 뽑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묘사합니다. 그녀가 하는 가사일의 수행은 가정의 복지와, 소득 증대까지 고려한 생산활동입니다. 그녀는 옷감을 위해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고”(13) 물레질과 실을 만드는 작업으로 발전시킵니다(19). 부지런하고 유익한 그녀의 두 손은 궁핍한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손으로 변모합니다(20). 실로 가정, 공동체, 그리고 주님께도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현숙한 여인”의 중심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놓여 있고(30),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가정과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즐깁니다(시37:3). 따라서, 밤 늦도록 부지런히 옷을 만들고,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는 동시에, 일찍 일어나 각 여종들에게 가정의 일을 나누어 주고, 그 날 할 일들을 위해 준비시키는 행동은 그녀의 즐거움입니다. 가히 가정의 CEO라 하겠습니다. 그 옛날 대갓집(큰 권세와 부를 가진 큰 집) 맏며느리는 약 100명의 식솔을 섬겼으며, 하루 쌀 한 가마니로 밥을 짓고, 계절을 따라 많은 필수품들을 빈틈 없이 준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많은 지혜와 경험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거래하는 시장의 큰 손으로 존중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갓집 맏며느리와 잠언의 “현숙한 여인”는 모두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으며’(25), 그들의 가정은 다 번영하였지만, 특히 “현숙한 여인”은 인애의 법을 논하며 겸손의 덕을 갖추었습니다(26). 그 비결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모든 덕행의 근본입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언31:29)

누가복음10:38절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의 열정은 불만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자신의 일에 성취를 내려고 몰두하는 분들의 공통적 특징이 책임감과 열정입니다. 창조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임무만을 주요 목표로 내세울 때 관여된 사람들의 가치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남이나 인격적 대화 존중 등 체험적 가치의 실현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마리아는 전통적 관습을 따라 언니를 도와 대접하는 일, 즉 여인의 창조적 가치의 실현을 소홀히 한 면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두 섬김은 꼭 필요하며, 모두 주님을 사랑해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한 것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통합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를 가볍게 꾸짖으신 것은 언니부터 이런 부분을 사랑 가운데 통합하기를 원하신 면이 있습니다. 본문의 일화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기에’(요11:5), 창조적 가치와 체험적 가치가 사랑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야 하고, 이어 더 높은 가치 안에서 각각의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은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고 국민의 심판을 통해 사회가 발전해 나갑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사랑 안에서 통합에 이르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의 자기 희생의 사랑 가운데 가치를 통합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마태복음9:27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삶의 의미”의 발견을 위한 3번째 방법은 “자세적 가치의 실현”입니다. A는 공동 도서관에서 자발적 연구 작업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길을 건너는 공포가 있어 다른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주변의 노력들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삶의 의미는 창조적 활동(창조적 가치의 실현)이나 사람 또는 사물을 체험함으로써(체험적 가치의 실현) 발견되나, 만약 이런 길들이 막히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자세적 가치의 실현”의 중요성은 바로 고통에 대한 대처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의미는 창조적 가치나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함으로써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세적 가치들의 실현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고, 자세적 가치의 실현은 고통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행동이나 인내를 통해서 보석으로 만들 수 없는 곤경은 없다”는 괴테의 말을 되새기게 합니다. 프랭클은 괴테의 이 말을 즐겨 인용하면서 환자들에게 “직접적으로는 정신 분석의 방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마음 자세를 바꾸게 하여 모든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심리학, 정신의학 등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입니다. 기독교는 중생(거듭남)의 종교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능력을 줍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30a)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빅터 프랭클에게 박테리아 공포증에 사로잡힌 어느 어머니가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여러 명의 어린 자녀를 두었는데, 많은 염려 끝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외출을 삼가하였고, 어떤 방문자도 집 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손을 씻었고, 남편이 어떤 아이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이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다가 자살을 기도하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그녀의 공포를 과장하여 시연하고 그녀의 염려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 환자를 불러 임상 치료의 청중 앞에서 내가 한 행동을 따라도록 했습니다. 강의실 마룻바닥을 손으로 쓸며 “박테리아가 이보다 더 많아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뒤, 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습니다. 물론 환자도 따라 하였습니다.” 그런 역설적 의도를 깨닫자 환자는 충격과 함께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와 함께 마음 자세도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닷새 동안 같은 치료를 받자, 3년이나 병들게 했던 강박 관념과 피해망상증이 90%이상 사라져 버렸습니다. 징크스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만유의 주님은 그 징크스에서 우리를 자유토록 하시기 위해, 그런 징크스를 통과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징크스가 생기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현상에 대하여 웃어넘기고,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믿고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매일묵상(2024/9/2-6)

잠언31:16절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6절은 ‘현숙한 여인’의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묘사합니다. ‘살펴 보고’에 해당하는 ‘자메마’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획하다’는 의미로써, ‘현숙한 여인’이 구입하려고 밭의 상태와 경제성 등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모든 각도에서 생각해 본 뒤, 대담하게 자금을 집행하여 구입합니다. 자금의 출처는 어디이겠습니까? ‘자기의 손으로 번 것’입니다. 원어는 ‘그녀의 손바닥의 열매’로서, 열심히 손으로 일하여 직물을 생산하고 팔아 얻은 소득을 말합니다(31:13,24). “포도원을 일구며”는 먼저 땅을 갈아 엎고, 돌을 전부 골라내어 울타리와 쓸만한 밭을 만든 후에, 최상의 포도나무를 심고, 원두막과 포도주 틀을 세우는 과정을 지칭합니다. 10년은 노력해야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10년은 파야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표 판매원 등과 같이 노력해도 기술이 늘지 않는 일은 청년들이 택할 직업이 못 됩니다(버트란트 러셀). 노력해서 도달할 장래가 없는 것이죠! 현숙한 여인은 그 반대입니다. 한편, ‘산다’의 주어는 ‘현숙한 여인’입니다(여성 대명사).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땅의 구매와 같은 일은 가정의 중대사이기에 가장이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문서상으로는 가장이 밭의 소유주로 등재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에 여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회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현숙한 여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 하겠으며,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의 경제적 측면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잠언31:30,새번역)

잠언31:17절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토마스 모어의 책「유토피아」(1516년)에서는 모든 주민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생산물은 다 공동체에 귀속되며 개인은 공정한 분배를 받기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모두 부유하다고 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분배를 행할 수 있는지 토마스 모어는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공정한 분배는 오직 정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31장 10절이하에 현숙한 여인을 등장시켜, “사랑의 모범”이 작동하는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연하게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또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에서 ‘팔’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위해 강한 의지를 갖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표현 합니다. 사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종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고, 밭과 포도원에서 일한 뒤, 밤에도 물레질을 합니다. 그런 불굴의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가정 즉,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남녀 하인들을 맡겨주셨음을 알고 책임감을 갖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순히 자신을 치장하고 안일하게 사는 길이 아니라, 맡겨진 가정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삶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고, 경외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 비결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마태복음26: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인간 관계는 개방적이고 정직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임박한 체포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와 보니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반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려 도움을 요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에, 제자들은 감정을 감추지 않고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예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솔직함은 상담에서도 중요합니다. ‘터니어’는 대인 관계에서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나는 진찰실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의 가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타인에게 보다 개인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인간성을 갖도록 도와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마치 신선한 미풍처럼 우리 가운데에서 불어나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의사는 자신이 심하게 화를 낸 다음에 생겼던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는 내 직무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호메로스의 시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분노 때문에 한 인간이 되었고 호메로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그리고 그분이 친밀하게 만나셨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솔직한 대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어떤 행동에도 주님은 언제나 현재의 모습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시는 장면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포용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갖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4,사역)

누가복음10: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체험적 가치의 실현은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또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이 방문하자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동생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주님께 불평하였으나, 주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은 선한 사라미아 사람의 비유 다음에 위치합니다. 거기서 제사장,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동포를 지나치는데, 거룩을 요구하는 제사 직분을 핑계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장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향합니다. 늘 하는 제사 직분(창조적 가치 실현)과 강도당한 이웃의 간호(체험적 가치 실현) 사이에 바른 선택, 즉, ‘삶의 의미의 실현’은 무엇이겠습니까? 후자입니다. 물론 주님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 제사장의 역할, 음식 대접 등-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가치’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닙니다. 어느 가정주부는 세 자녀를 거느린 진부한 가사일을 불평하는데, 바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와 비슷합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올바른 자아실현의 방향을 잡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같이 “체험적 가치의 발견”은 경험이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로마서 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보편적 방법은 자신의 일 – 가사, 공부, 근로, 사업, 학문, 예술 등 -을 통해 ‘창조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만남, 배움, 경험(황혼의 아름다움 등) 따위를 통해 체험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어느 실내장식 화가(61살)와 상담한 내용입니다. 그 화가는 신경질환이 악화되어 자신이 사랑해왔던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체험적인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더 이상 창조적인 가치들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자신의 직업을 통해 거둔 성공, 현재도 활발한 예술적 감수성, 그리고 행복한 부부 생활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현재 추구하는 지적인 탐구- 강의,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에 집중하면서 상담하였다.” 그 결과 손작업으로 더 이상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삶에도 여전히 의미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자 그 화가는 강인해 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체험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마리아가 택하였던 “좋은 편”(눅10:42)이란, 마리아가 추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주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원기회복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셨지만, 그분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필요하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롬14:19절,새번역)

매일묵상(2024/08/26-30)


잠언31:14절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본문은 ‘현숙한 아내’를 무역선에 빗대었습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은 히브리인이 아니라 페니키아 상인들이 주도하였고, 두로와 시돈은 그 때문에 번영하였습니다.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현숙한 아내’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은, 그 만큼 진취적으로 가정 경제를 일구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는 표현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고대에 여자가 무역을 통해 필요한 양식을 들여오는 모습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혜를 가진 모든 여인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였습니다. 1525년 결혼 후, 마르틴 루터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고, 경제적으로도 큰 규모의 살림을 유지하였습니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는 방 40개가 딸린 수도원을 루터에게 결혼 선물로 주면서, 교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결혼 축하금으로 140굴덴이 들어 왔지만- 소 한 마리에 2굴덴 – 살림은 빡빡하였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컸고, 루터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습니다. 수많은 식솔의 식사 준비와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카타리나의 몫으로, 닭과 돼지를 치고 채소를 심은 것은 물론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 기술로 맥주를 빚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재(理財)에도 능해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모아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면,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언31:30)

잠언31:15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4절은 ‘현숙한 아내’가 부족한 물품을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적극적인 노력과 진취적인 자세를 묘사하였지만, 본절과 16절은 가정을 다스리고 경제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14절은 ‘무역선’ 의 이미지로 표현하나, 본절은 ‘먹잇감을 주는 암사자’의 이미지입니다. ‘밤이 새기 전에’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는 아직 밤인데 일어난다’입니다. 암사자는 밤에 사냥을 합니다만, ‘현숙한 아내’는 가족을 사랑하고 재산을 불리고자 모두 자는 밤중에 일어나 하루를 대비합니다. 책임감을 실천하는 근면의 화신으로, 자신의 안락보다 가정의 복지를 염려하는 그녀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근면 성실해야 하는데, 가정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테레프’의 번역으로, ‘테레프’는 ‘먹잇감인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찢어 먹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현숙한 여인’을 포식동물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잇감’을 주듯이, 범접 못하는 위엄을 갖고 전투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맥그리쉬는 말합니다: “최소한 이 단어는 큰 힘과 기량과 독창성을 발휘한 후에만 얻을 수 있는 식량을 나타내며, 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아내의 특별한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법을 심중에 간직하고(30), 또 지혜로워 각 여종들에게 분배할 적합한 일의 종류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생산적이고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잠언을 가르치는 솔로몬과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잠언1:4,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7: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인격적 성숙의 길은 자아실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나 분명한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투신하는 것인데, 올포트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자기 객관화(자기분리)의 길 (2) 관심사를 넓히는 길 (3)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으로 나가는 길. 첫째, 자기 객관화로서, “한국 떠나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겠다…부족한 연구비 따내려 밤낮 제안서만 써내고…” 어느 스위스 공대 교수(한국인)의 체험기가 말해 주듯이, 이는 관심사에서 멀어지거나, 타인(멘토 등)의 개입과 같은 계기가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눅7:36-50). 그의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은 기적은 행하나 배움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인 그 여자는 구제불가능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시몬의 대답을 이끌어 내신 뒤, 시몬의 잘못된 행동을 반추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손님 대접에 관련된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만 죄사함 받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그 여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았고, 이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인 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대화 내용은 쉽지만, 인간의 교만한 본성과 관련되어 있어 실천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함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자아를 극복하고 타인 존중이 가능합니다. 복음과 함께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입니다(롬8:4-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인격성숙은 타인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이를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관심사를 넓히는 것인데, 관심사가 넓어지면 인격적 성숙, 치유,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은 주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눅7:44)라고 하심으로,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은 시몬에게 그녀를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온전하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지만(롬3:23), 화목제물로 세워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갈3:28).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 신분, 남녀의 차별은 없고 한 형제 자매로 존중하기에 주님을 닮은 인격적 성숙에 이릅니다. 또한, 관심사를 넓히면 치유도 일어납니다. 노인들이 은퇴하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 온갖 질병이 찾아 오나, 관심사에 몰두하면 건강한 삶을 영위합니다. 끝으로, 세상은 자아실현에 몰두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즉, 사람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삶을 내줄 때 자신과 타인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짐을 져야 하지만, 타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은 함께 져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해야 합니다(갈6:2). 섬김이 곧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마태복음5: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세 번째 길은 ‘통합의 원리’입니다. 좀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여러 가치들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눅7:36-50)의 기사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자신처럼 종교적 본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 죄인인 한 여인 등-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의 관심분야인 율법규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어 율법의 목표인 사랑과 온전함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여자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단죄한 것은(눅7:39), 그가 늘 품고 있던 불만, “왜 모세율법을 행하지 않는가?”, 을 드러낸 것이지만, 무엇인가 결여되었습니다. 사랑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통합한 주님의 눈에는 시몬의 삶은 율법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하였습니다. 시몬이 보는 삶의 반경이 그리 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심 분야에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철저하였지만, 그 영역을 벗어난 사람들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교제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족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한편, 주님은 회개하는 그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셨으나, 그 말씀 속에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통합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본받는 것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목표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