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2/18-22)


잠언27:25절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23-27절은 자신의 산업을 부지런히 돌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날씨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듯이, 경제상황은 위기와 기회를 산출하며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만약 위기 시 우리가 잠깐 방심하면 재물과 면류관은 날개를 달아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추수시기에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 와서 일꾼들을 감독하였고, 그러는 중 믿음과 효성의 여인 룻을 만나 가정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중요 산업인 양떼를 먹이는 ‘풀’은 어느 때 그리고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에서 들풀은 늦가을의 비가 내린 후에 산에서 자라나며, 베고 나도 우기에는 계속 새롭게 싹이 돋아 나옵니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10월 중순 경 이른 비가 내려야 곡식을 파종하고 풀도 자라는데, 매 년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누가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깨우치며 그분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후단은, 새로 난 들풀이 팔레스틴의 고원지대(산)를 덮은 모습을 전제하는데, 이는 번영과 풍부의 상징입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지혜로운 농부는 산이나 광야로 가축떼를 데리고 떠납니다. 여인들은 집에서 보리 농사를 짓고 풀을 거두어 말려 여름철 가축의 먹이를 준비합니다. 본 잠언은 주님이 창조한 질서와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살아가는 인간 지혜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밝힙니다. 우리는 기도에도 열심을 내야 하지만, 이런 농부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은 짐승의 먹이인 꼴은 산에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잠언27:26,27절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26, 27절에서, ‘양의 털’은 옷감 재료이며, 양가죽은 물주머니, 천막, 그리고 종이의 역할을 하였고, ‘염소의 젖’도 유용한데, 모두 다 농부의 일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만 하면 생활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부는 갖기 어렵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책에서 저자는 부자 아빠인 친구 아버지가 건물과 건물을 맞바꾸면서 부를 축적하는 기술을 터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후단에서 ‘염소’를 팔아 밭을 사라는 솔로몬의 권면과 일맥상통합니다. 염소들을 주고 밭을 사면 귀중한 작물을 재배하여 부의 원천을 만들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수품을 얻으려고(노력하면 누구나 충분함), 혹은 재물과 명예를 가지려고(세상 것들임) 성전에 와서 기도하지 말고, 가축과 같은 평범한 네 산업을 근면성실히 돌보데서 시작하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그러면,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물론, 다른 재산(밭 등)을 소유하여 부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권고입니다. 훌륭한 인생전략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과정에서 정직한 보상으로 갚아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배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재물을 얻게 되었을 때 내 능력이라고 교만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재물얻을 능력을 주셨음을 인정하라고 명령합니다 (신8:16,17).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들은 양 구절을 조화시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000년 전 성탄절,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아기로 세상에 들어 오셨습니다(사9:6). 이 당시 베들레헴의 집들은 석굴 위에 두 개의 방을 가졌습니다. 큰 방은 부엌과 침실을 위해, 작은 방은(헬라어로 ‘카탈루마’) 창고와 손님방을 겸하였고 가축들은 집 밑 석굴에 가두어 길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황제의 명을 따라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해산 할 곳을 찾지 못하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도 호적하러 왔서 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관’ 이란 번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행객들을 위한 여관은 ‘판도케이온’(눅10:34)을, 손님방을 위해서는 ‘카달루마’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눅2:7), 베들레헴은 유대 산지 마을로서 여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상기 구절은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친척이나 촌장의 집에 갔지만 손님방을 구할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레위기에 따르면, 산모는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하고 (레12장), 산모가 만지는 것마다 부정하기에 집 전체가 부정하게 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손님방도 없고, 부정이 온 집에 전가되지도 않도록, 그들은 가축이 있는 석굴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해산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아기로 탄생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들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 약속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뒤 이은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고, 마침내 주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누가복음2: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장면을 포착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BC 700년 당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으로, 처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아직 동침하기 전에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잉태하여 출산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인간이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시자 천사들도 이 감격을 인간들에게 전하려고, 한 밤에 베들레헴의 들에서 양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목자들의 들”로 불리우는 장소가 있습니다. 여기는 성전 제사를 위한 양을 기르는 들로서, 이 양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특히 이곳을 택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자,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이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마태복음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만물을 창조하시자 하나님은 “심히 좋으셨습니다”(창1:31). 그러나 아담의 반역과 그 죄의 심판으로 사망이 온 피조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선언하시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메시야의 일은 죄, 사망 그리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아담의 불순종으로 좌절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 중요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순종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화목’은 당신의 몸을 속건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인간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섬김이란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신 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당연히 원수 마귀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포로들을 빼앗기지 않게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양자의 가치관은 확연히 틀려, 우리 마음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누구의 가치관을 따를 것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표현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용서와 이를 뒤따른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우리 모두 아기의 모습으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

매일묵상(2023/12/11-15)

(두 가지 길)
역경이 닥쳐올 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평하며 좌절하는 길, 또 하나는 주님의 섭리를 믿고 인내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중,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이삭 대신 숫양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볼 수 있었습니다(창세기22:13-14). 따라서, 미래가 닫혀 있다 생각될 때도 주님은 이미 해결책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957년 한국유리공업㈜를 창업하신 고 최태섭 회장은 13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세계적 수준의 판유리를 생산하였지만, 약속을 어긴 동성판유리㈜와 사활을 걸고 3년이나 덤핑 경쟁을 하였습니다. 기도하시던 최장로님은 결국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 직원에게 현실을 솔직히 알렸습니다. 이에 직원과 경영진은 혼연일체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였고, 상대 회사도 인수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건설붐이 일어나 회사는 기사회생하였다고 합니다. 최장로님의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여건과 상황에 따라 일희 일비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여건과 상황에 감추어진 뜻을 읽고 그 어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뜻을 쫓으면 이익도 얻을 수 있지만, 이익만 쫓는 사람은 뜻도 이루지 못하고 이익도 얻기 힘들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무언가를 포기하면 그보다 훨씬 큰 보답이 머지 않아 뒤따른다는 믿음, 그것은 바로 나의 인생체험에서 나온 것이다”(최태섭 사랑에 빚진자 99-105).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시편37:3)

(아담과 아브라함)
하나님은 지으신 천지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으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란 플랫폼을 통해 인간이 각종 선을 생산할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을 이주시키셨습니다. 에덴 동산은 생명 나무를 가진 아름다운 정원이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 나무의 열매에 관한 특별 금지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때 아담은 순종이라는 특별한 선을 창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으나, 오히려 불순종하여 세상에는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나무’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늘 존재하며, 대표적인 것이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고 아브라함의 삶에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특별히 명령하시자, 그는 순종하여 다음날 일찍 일어나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을 통해 그 자손(그리스도)이 오신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삭이 불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답안이자, 주님의 믿음과 순종의 예표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라는 성육신의 명령을 받아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그 세대에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사53:8). 그러나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십자가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들로 정의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37:31)

잠언27: 21절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본 잠언은 실 생활에서 많이 보는 은과 금을 제련하는 도가니와 풀무에 빗대어 칭찬을 통해 사람을 시험하고 단련함을 일깨웁니다. 전단은 17:3절과 동일하나, 후단의 작업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칭찬이라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장인은 은과 금에 열을 가하여 불순물을 제거함으로, 마침내 순금과 순은을 만들어 냅니다. 솔로몬은 칭찬과 사람의 인품도 그런 관계이기에, 칭찬이 주어졌을 때, 칭찬을 받는 그 사람은 인격적 온전함을 갖출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칭찬이 주어질 때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잠언은 명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칭찬의 말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랑이나 교만이란 엄청난 유혹과 싸우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그런 충동을 이겨낸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명되어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의 칭찬과 비판에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지혜자이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아니라 타인의 칭찬을 추구하고 흐뭇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타락의 전형적 증세입니다. ‘사도행전’과 요세푸스의 책 ‘유대 고대사’에는 모두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신의 소리’라는 아부를 듣고 내심 즐기다 주님께 죽임을 당한 왕 헤롯 안티파스를 증언합니다(행12장).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을 어리석음에서 구하거나 타락에서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몸에 아픈 가시를 두심으로, 어떤 칭찬이나 영광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늘 자신을 경계하고 겸손하도록 장치하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3)

잠언27: 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시험하고 단련한다’(21)는 메시지가 계속됩니다. 타인의 ‘칭찬’은 양날의 검이라, 칭찬을 통해 현명하게도 되고, 혹은 ‘교만’이나 ‘자기속임’이라는 부정적 효과도 낳게 됩니다(21). 그러나, 22절은 그런 ‘시험과 단련’조차도 미련한 자를 개선시킬 수 없음을 밝혀, 그들의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교훈으로 무장하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여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탐욕, 두려움, 또는 자기중심성이란 교만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참된 지혜를 거부하거나 무시합니다(12:15;18:2;26:11). 가룟 유다가 그렇습니다. 돈 궤를 맡은 것을 주님과 동료들을 섬기는 기회로 삼지 않고 재산축적의 수단으로 보아 헌금을 계속 훔쳐갔습니다. 마귀는 그 탐욕을 이용하여 주님을 은 30량에 팔게 하였습니다. 한편, 전단의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다”는 표현은 신체에 가하는 벌을 비유하여, 바보에게는 채찍과 고난도 효과가 없음을 말하나, 청년들처럼 개선 가능한 경우도 있기에 주의하여야 합니다(22:15; 23:13,14; 29:15,17). 또한, “사람이 선하게 바뀌려면 고난은 필수적이라는 믿음은 치명적으로 큰 착각이다”(브리지)는 말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의 회개치 않고 더 굳어지는 마음을 볼 때 좋은 통찰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이 미련한 자를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마19:26;막14:3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잠언27: 23,24절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23-27절은 이스라엘 주업 중 하나인 목축을 소재로, 근면 성실을 통해 번영을 성취하라는 교훈입니다. 23절에서 ‘형편’의 원어는 ‘얼굴,용모, 상태’를 뜻하는 ‘페네’로서 양떼 하나하나의 얼굴을 기억하듯이 각각의 상태를 주의깊게 살필 것을 명령합니다. 또 ‘마음을 두며’의 원어는 ‘너의 마음을 두라’는 의미로, 고용한 목동과 같은 타인만 믿지말고 자신이 직접 짐승떼를 돌보라는 가르침입니다(23). 부자라 해도 재물 관리를 소홀히 하면 삼대 가기 어렵고, 강력한 왕조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또 백성을 늘 마음에 두어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면류관’을 빼앗아 타인에게 주어버리십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불복종하자,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다윗에게 주셨고,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자 그 나라를 나누어 북쪽 10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신 것은 그 좋은 예입니다. 마음은 자신이 보물로 여기는 곳에 머무릅니다(눅12:34). 따라서, 효자는 언제나 부모님을 생각하고, 애국자는 항상 나라의 안위에 마음을 두지만, 부자는 재물을, 권력자는 권세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부지런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5,6).

매일묵상(2023/12/4-8)

(부케팔로스 사건과 성경의 필요성)
기원전 344년 어느 날 마케도냐의 왕 필립2세에게 한 상인이 끌고 온 명마(부케팔로스)를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였으나, 어린 알렉산더(12살)가 나서서 쉽게 제어하였습니다. 그는 말이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서 사납게 뛴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을 태양 쪽으로 돌려세운 뒤 올라타서 성공적으로 제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나운 명마 보다 훨씬 위험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고,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지구가 끈도 엔진도 없이 허공에서 정해진 궤도를 계속 도는 등 수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경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창세기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나, 요한복음은 더 자세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유를 지으셨음을 선포합니다(요1:1-4). 이를 믿는 순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올라타서 길을 제시하는 순간 그의 말이 되어 달리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만약 마귀가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올라타면 공산주의자가 되어 자본가와 지주를 죽이는 것을 선행이라고 치하하고, 마귀가 탐욕을 갖고 올라타면, 마귀가 원하는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약 성령께서 올라타시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당연히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거부하고 성령께 순종해야만 하나 중생하지 않으면 그분의 말씀(=성경)을 간직하여 의의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책 “노예 의지”는 이 문제를 잘 논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십자가의 말씀’을 갖고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행복과 계명)
인간들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동물은 음식과 안전만 제공받는다면 행복한 것 같습니다만, 인간은 다릅니다. 관계, 존경, 자아 실현 등까지 충족되어야만 행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는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충족 행동은 여러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계명의 존재가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을 웅변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원리가 빌트인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절도죄나 강도죄를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좋습니다만, 다른 사람을 방패로 내세우면 안 됩니다. 관계의 욕구 좋습니다만, 가정을 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귀면 안 됩니다. 존경의 욕구 좋습니다만, 표절하여 논문을 작성하면 안 됩니다.  자아실현욕구 좋습니다만 시인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시의 세계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이 계명은 인간이 가야만 하는 길이요, 행복의 첩경입니다. 청록파 시인이자 기독교인 박목월(1916-1978)은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교수직을 버리고 제주도에서 동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1954). 그러나 4개월 후 부인 유익순 집사님이 찾아와 추운 겨울 잘 보내라며 두 사람의 겨울옷과 돈봉투를 건네주고 서울로 돌아가자, 둘은 감격하여 관계를 끝냈습니다. 박목월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라는 이별의 시를 보내 그 아픔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라’ (엡5:33)는 말씀을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편119:105,106).

잠언27:19절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캄마임 합파님 랍파님 켄 레브 하아담 라아담”으로 읽혀지며, 히브리시의 대표적 운율인 3+3을 유지하려고 압축된 문장이어서 작은 소리로 읍조리는 묵상에 적합합니다. 직역하면, “그 물에서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것처럼, 그 사람의 마음 도 그 사람에게 그러하다”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새번역이 취합니다 :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 또 하나는, 수면 위에 내 모습이 투영되듯이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이 투영된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이 취합니다: “내 얼굴은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치고, 내 마음도 남의 마음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본절이 인간 사이의 영향력을 다루는 17-19절 단락의 일부라는 점에서 후자가 좀 더 적합합니다(개정개역). 그렇다면, 본절은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투영해 줄 수 있는 타인이 필요하며, 또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하겠습니다. 황금률과 은률이 모두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근본적으로 동일한 본성과 심성, 나아가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천 년 전 성경의 사건들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교훈을 받는 것이며(고전10:1-11), 잠언의 필요성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헤아림으로써 개인적으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고 교회적으로도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7: 20절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본잠언은 문맥상 ‘사람(=아담)’이란 주제어로 19절과 연결되어 있고, 내용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동의어이며,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무덤’과 ‘죽음’이 원래 목적한 의미입니다. 우가릭 문헌은 ‘못’(죽음)이란 탐욕의 괴물은 크게 벌린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희생자(죽은 자)를 집어삼킨다’고 합니다. 전단은 모두 잘 아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제시하고, 후단은 이를 비유로 하여 ‘사람의 눈’이란 어구를 동원 탐욕이란 인간 본능을 밝힙니다. 인간이 탐욕을 쫓는한 결코 참된 행복은 없고, 오직 허망과 파멸만이 남게 됩니다. 영국의 부유한 귀족의 집에 한 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하녀는 일을 하다가 한숨을 쉬며, “5파운드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마침 그 곁을 지나던 귀족이 그 말을 듣고 5파운드를 주면서 힘 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는 “이럴 줄 알았더면 10파운드라고 할 것을…”이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탐욕을 쫓아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궁핍에 처할 때는, 긍훌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기복적 기도에 자주 응답을 주시곤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맛들인 신자들은 이제 좀 살 만 하다 싶어도 기복신앙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응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아니라 더 많은 물질, 성공,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족’이란 덕목은 성숙한 신앙의 중심으로 기복신앙의 해독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매일묵상(2023/11/27-12/1)

(믿음과 은총의 삶)
잠언22:1절,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새번역)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만유의 주님을 알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이나 기업, 민족, 국가 등의 영광 또는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수고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총의 삶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삶의 방법은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는 약속을 간직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늘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도 않고, 악인의 재물로 치부할 생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수를 알고 있으며, 또 노력한 만큼 살아가지 그 이상을 탐내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지 우리의 영원한 삶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는 불멸의 삶, 즉 영생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장래는 알지 못하나 염려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총의 삶으로 내 이익과 주님의 이익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시편37:5,새번역).
 
(세상 – 주님과 교제의 장)
하나님의 뜻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갈5:14)는 말씀에 담겨 있고, 이를 고린도교회의 사정에 맞게 해석한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입니다. 또한, 이웃 사랑의 실천적 지침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7:12)는 황금률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선행이 물질의 축복, 명예의 축복 건강의 축복… 각종 축복을 보장하냐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빛 바랜 양복 같아, 사탄이 참소할 틈을 갖게 만듭니다. 여기에 욥의 시험의 단초가 있었지만, 욥은 그 시험을 훌륭히 통과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욥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랑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아담은 이 사랑이 없어 실패하였습니다. 세상이란 시험하는 장소로서,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양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 만유의 상속자와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밝히 보게 하고(마28:18), 참된 신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믿음의 삶의 핵심은 주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 승진, 결혼, 사업, 공부, 교우관계도 말입니다. 최근 아는 지인은 증권거래소를 은퇴하였으나 오히려 코스닥상장을 위한 회사들의 고문은 물론 부사장으로까지 영입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에 아픈 가시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런 사건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오직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불신자와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사귐은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 행실이 온전하고 주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119:1,새번역)

잠언27: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언의 제자들은 이웃에게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데, 본절은 이를 위하여 ‘이른 아침’과 ‘큰 소리’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교훈합니다. 상황은 ‘이른 아침’이어서, 그의 이웃은 잠자리에서 막 일어났거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크고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나 축복을 하면 당황스럽기도 하며, 진의를 몰라 의아해 할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이 오히려 저주 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참된 우정은 행함과 진실 그리고 공통분모인 상식 가운데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른 아침과 같은 상례를 넘어선 경우에는 축복의 인사를 포함한 경건한 말조차 예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상식을 잘 아는 본절의 행위자가 왜 이렇게 행동 하겠습니까? ‘진정성이 결여된 아첨의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큰 소리로 축복한다는데 그런 해석의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이른 아침에 특히 전할 축복의 소식이 있다면, 그 이웃에게 가서 조용히 말하면 되지, 모든 이웃이 들으라는 외침에는 다분히 자기 과시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본 잠언의 교훈 역시 이웃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이웃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만약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내가 축복의 언어나 천사의 아름다운 말을 할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이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 (고전13:1, 의역)는 놀라운 도덕법칙이 작동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그런 말은 진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참된 말을 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배워가야만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잠언27:15,16절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가정에서 아내의 도리와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투는 여자”란 매사에 흠을 잡고 잔소리하면서 남편과 기싸움을 하는 아내를 말하며, 본절에서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로 비유됩니다.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란 내린 비가 지붕에 고여 떨어지는 낙숫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가옥은 지붕이 평평하므로 비가 내릴 때 물이 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면 방안은 엉망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다투는 여자를 둔 집안도 그와 같습니다. 16절은 그런 여인을 제어하여 순종하게 하는 노력의 헛됨을 바람과 기름을 동원해 묘사하는 바, 제 주변을 보아도 진실입니다. 가정이 늘 소란하면 그 어떤 일도 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는 것이며, ‘다투는 아내’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성격과 환경을 모두 고려해야 하지만, 대체로 한 고집하고 남편 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본성 때문입니다(창3:16). 조선 시대 어느 양반 가문에 결코 지지 않으려는 품성의 딸을, 시댁 어른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 딸은 정말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남편과 시댁을 섬겨, 정경부인이라는 칭호도 받았으나, 사건의 전말을 알자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먼저 좋은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얻고, 아내는 주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19:14)

잠언27: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어린 염소가 어미와 형제들에게 구박받자, 할머니가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염소는 염소들과 살아야만 한다면서, 다시 염소들 사이로 되돌아 가도록 훈련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같습니다. 사람 역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훈련될 때만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독처가 선하지 않다 보시고, 하와를 만들어 가정을 형성하게 하셨듯이, 인간은 태초부터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펫이라는 성경학자는 “인간은 결코 혼자로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의 동료가 와서 언어로나 모범을 통해서 자극을 주고 각성시키면 혼자 살아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성장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경우 ‘경쟁과 협력’ 두 가지가 작용합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협력은 우리가 잘 아는 개념이고 또 올바른 행동이지만, 경쟁은 선의의 경쟁을 말합니다. 즉, 선한 목표를 두고 선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 효율을 최고로 올리는 경쟁을 지칭합니다. 마라톤 선수 선수들이 여럿이 경쟁하면서 뛸 때 좋은 기록이 달성되는 것은 그 예이며, 심지어 친구의 마음에 열등감의 불을 지펴올려 잠재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함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루게도 합니다(격장지법).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기회로 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모델의 최상단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매일묵상(2023/11/13-17)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할 때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벧엘에 이르러 잠을 청합니다. 꿈에 야곱은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와 그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창28장). 이 사건은 75세의 야곱이 참된 신앙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전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수년 전 최윤지 자매가 한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수원 광교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아는 언니를 만났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언니 아버지의 믿음이 강건해 지게 되는 계기를 들었습니다. 언니의 친정은 여의도 침례교회를 나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약사로서 이대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였습니다. 2010년 전후로 이대 앞에 재개발이 시작되자 언니의 부친은 대형병원과 그와 관련된 약국이 입점하면 자신의 약국이 설 자리를 잃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작은 의원이 들어오게 해 주세요!” 막상 재개발이 끝나자 자신의 건물에 작은 의원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학교앞작은의원” 이었으며 현재도 운영 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아버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달은 분(A. M. Toplady)의 시가 있습니다.

내 손에는 드릴 아무 것도 없어요
다만 당신의 십자가를 붙뜰뿐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당신에게 가오니 입혀옵소서
힘 없어 당신을 앙망하오니 은혜주옵소서
범죄한 나, 보혈의 샘으로 날라가오니
씻어주옵소서,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창28:16,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황선우는 자유형 200미터에서 2022항조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주인공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수영법을 터득한 뒤 이렇게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5살부터 수영을 하던 그는 고등학생시절 , 왼 팔에 30%, 오른 팔에 70%의 힘을 배분하여 리듬을 타면서 수영하는 자신만의 영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이는 미국 대표 선수들이 주로 하는 ‘로핑 영법(loping stroke – 엇박자 수영)’으로, 한쪽에 힘을 더 싣는 비대칭 스트로크입니다. 그는 수영을 너무 좋아해서, 취미조차 유투브로 다른 선수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6일을 훈련하며 – 오전에 2-3시간, 오후에 2-3시간 수영 – 저녁 후에는 2시간 정도 체력단력을 위해 운동합니다. 확실히 수영은 그의 인생이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바다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믿음의 비밀을 터득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여야 합니다.  훈련 방법은 ‘은혜의 수단’이며, 훈련 장소는 세상입니다. 은혜의 수단인 성경읽기, 기도, 예배, 교제, 성만찬 참여, 침례, 봉사와 섬김을 통해 힘과 지혜를 받고, 각팍한 현실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실현해 나가는 삶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창조의 목적과 삶의 문법을 깨닫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고, 우리 삶의 문법은‘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잠언27:8절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히브리 원문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처럼”이 문두에 나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의 불안정한 처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어미새는 둥지를 지키며 알을 품고 부화시켜 새끼를 잘 길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절의 어미새는 둥지를 떠나 홀로 애처롭게 떠돌고 있습니다. 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떠나 헤매이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비유입니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가나안 정복 후 각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받은 땅을 의미합니다.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각 개인이 임의로 사고 팔 수가 없었습니다. 혹 빚으로 넘어가면, 가까운 친족이 대신 사주어야 하였고(고엘제도), 그렇지 못할 경우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기하여 원소유주에게 돌아가도록 규정되었습니다(희년제도). 이렇게 하나님이 주셔서, 양도할 수 없는 땅을 떠나 유리한다는 것은 큰 저주입니다. 비록 지금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가 정착하였으나 성경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세속국가 중 하나입니다. 복음의 시대에는 물리적 고향 보다도 영적 고향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대신 모세율법을 고수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방황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이며, 신명기는 그런 상황을 이미 예견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본절의 문맥상, 참된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 가운데 머무르지 못하고, 둥지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이 영적으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3:7,새번역).

잠언27:9절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본절은 친구의 충고가 주는 즐거움을 ‘기름과 향’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기름’은 식용으로 쓰이는 기름이 아니라 감람유에 여러 향을 섞은 것으로 머리에 붓거나 피부에 바르는 화장용 기름을 의미합니다(룻3:3). 또한 ‘향’이란 침양이나 계피 등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는 물질을 가리킵니다. 당시 근동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러한 향으로 집안을 단장하고 향유를 손님에게 붓는 관습이 있었습니다(눅7:46). 한편, ‘충성된 권고’의 직역은 ‘생명의 권고’로서,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의 권면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친구의 이런 충성스러운 권고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하는 향과 기름과 같이 아름답다고 평가합니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재상 인상여가 조나라 환관 무현의 식객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무현은 보배 ‘화씨지벽’을 우연히 손에 넣자, 보고 싶어하는 조왕에게 거짓으로 도난당하였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 탄로나자, 무현은 연나라로 망명하려 하였고, 인상여는 그에게 충성된 권고를 합니다: “연나라는 조나라보다 약해 대인이 망명하면 곧 잡아 조왕에게 압송할 것입니다. 차라리 어깨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려 죄를 청하면 요행히 벌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무현은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화씨지벽을 바치며 사죄하니 용서받았다는 고사입니다. 주님은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눅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제하신 권고로써, 우리의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잠언27:10절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본절은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전단은 자신의 친구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친구도 버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아버지의 친구에 대한 봉양의 명령은 일견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솔로몬은 친구 관계가 가족 관계만큼이나 의미 있고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친구로 맺어진 관계가 중요하며, 서로에게 특별한 책임이 수반됨을 함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중단(中段)은 환난의 때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즉 재난을 피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형제를 찾지 말라는 의미로써,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해 태어났다”(17:17)는 잠언과 상반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각 잠언은 각각의 상황에 따른 권면이며, 본절은 형제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라도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위급할 때 좋은 친구가 혈육 이상으로 도움을 준 사례는 고금에 많이 있습니다. 후단은 중단과 같은 권고를 한 이유로써,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이나 형제 보다, 이웃에 있는 가깝고 친근하게 지내는 친구에게서 오히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 잠언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신앙의 박해 시기에는 친척들이 오히려 박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1795-1839) 역시 친척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순교당하였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매일묵상(2023/11/6-10)

회심에는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성경의 회심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 결과 모든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방을 치우는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섬기려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한 후, 면담을 위해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주님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주님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주님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식사를 준비할 때도 주님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과 권고를 천진난만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 있지 못하면 그분의 믿음은 부인 당하게 됩니다. “마음의 의”(벧전3:15-17)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남을 비웃는 자들은 천국 밖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삶은 사랑의 지혜가 수반되어 있습니다(고전14: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10:15)

전도서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오래 전 영화 “오염된 자식들”이 떠오릅니다. 줄거리는 병구(안성기 역)는 평범한 여자 형자와 사귀다가, 출세를 위해 배신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딸(명희- 장애인)과 결혼합니다. 병구는 결혼 후 장애인 명희를 섬기며 매우 고생하나, 어떤 계기로 명희는 수술을 받아 장애인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자, 병구는 명희에게 이혼 당하고 비참한 꼴로 몰락한 뒤, 받은 위자료 3억원 모두를 고아원에 기부한다는 내용입니다. 위 영화는 유익서의 소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극화한 것으로 물론 허구이나, 현실의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동과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구부러지고 모자란 인간의 본성은 고치지 못합니다.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그 전형입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 중 그 한 사람만 선택하여 고쳐주셨으나, 그는 안식일을 위반하였다고 추궁받자 오히려 주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고 배신한 아담과 같습니다. 복음의 역사에서 장애인이 기적의 치유를 받거나, 절박한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행하지 못한다면 “명희”나 “38년된 병자”처럼 더 악화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시어 속죄권을 확보하신 뒤,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려고 당신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사, 먼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뒤,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살게하시는 작업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4:8)

잠언27:5절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새번역)

5,6절의 주제어는 사랑인데 사랑의 표현은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책망이 참된 사랑의 표현일 수 있고, 오히려 입맞춤은 배신을 숨기는 도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자는 드러내어 꾸짖기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면책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 제자, 혹 친구가 개선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만약 책망이 없다면,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 될 것이므로 책망은 드러내 놓고 해야됩니다. 표현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한편, ‘숨은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꾸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책망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가 최선의 유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도, 비겁하고, 소심하며, 심지어 게을러서, 모험을 감수하기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숨은 사랑은 어두운 밤에 청년이 처녀에게 윙크를 보내는 것과 같아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꾸지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러나 어른의 경우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바로잡는 행동(징계)은 함께 갑니다. 구약성경에도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레19:17)에 뒤이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19:18)는 명령이 주어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책망” 혹은 “징계”가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이것들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히12:11). 우리는 올바른 “책망”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꾸지람은 낙심하지 말고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11).

잠언27:6절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본절은 5절과 동일한 내용이나 좀더 구체적입니다. 즉 친구의 ‘아픈 책망’은 ‘면책-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과 ‘잦은 입맞춤’은 ‘숨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5절은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 자체의 가치를 말하지만, 본절은 친구가 하는 ‘아픈 책망’의 출처가 미움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숨은 의도는 친구의 권고를 받아들여 잘못된 행동을 고치라는 요청입니다. ‘아픈 책망’으로 의역된 원어는 ‘피츠에’로서 ‘외적인 상처’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상당히 강한 어투로 꾸짖는 친구의 책망이 주는 아픔을 빗대었습니다.이른바 ‘마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사랑의 동기에서 나왔고, 또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에 선한 행동입니다. 그 반면,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악한 의도를 숨기고 외적으로는 친근한 척 한다는 의미로써 후단 말미의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란 표현이 잘 말해줍니다. 그 원수는 잠언의 제자가 내심 밉지만 이용하려는 속셈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뱀과 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그 사람의 인품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 지혜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고자 하면, 우리의 분별력은 모든 사람들 보다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시편119:98-100).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27: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인간관계에서 상황과 때가 중요함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꿀은 ‘좋은 것’의 상징으로 본절이 위치한 문맥에서는 ‘좋은 충고’를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싫어한다’의 원어는 ‘타부쓰’로 ‘발로 밟다’는 의미인데, 강한 혐오와 멸시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교만해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충고라도 멸시한다는 뜻을, 후단은 배고픈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먹어도 단 것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충고라도 겸손하게 수용할 수 있음을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주님의 면박을 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절박한 그녀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냉담한 모습을 보이셨으나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마음이 좌우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다루지만, 좀 더 관찰하면 비록 풍요할지라도 거슬리는 충고에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의 예는 다윗 왕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통한 뒤, 남편 우리아를 제거하고, 밧세바를 취해들였습니다. 다윗은 아이를 낳기까지 무려 1년이나 외식하고 살았습니다. 회개를 기다리신 주님은 드디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범죄를 추궁하였고, 이에 다윗은 큰 소리로 회개하며 애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시가 시편51편입니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살인죄와 간음죄는 제사를 통해 용서받지 못하고, 오직 사형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다윗은 왕이라 집행할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집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언17:10)

매일묵상(2023/10/30-11/3)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p144-146)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면 힘든 일도 기쁘고, 의와 공평도 베풀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비밀입니다. 더비셔의 클리프 대학 학장을 역임한 사무엘 채드윅은 이 원리를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어느 주일에 콜리 목사가 아이들에게 존 뉴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만일 뉴턴이 구두닦이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구두를 닦아 동네 최고의 구두닦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요지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아버지의 신발을 모두 닦는 것이 집에서 자신이 맡은 일이었던 터라 바짝 다가앉아 귀담아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구두 닦는 일이 싫었고 아버지의 부츠는 특히 싫었다. 마침 그 기념 주일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에 구두를 닦는 일은 최악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부츠부터 먼저 닦아 내려 놓으며 한시름 놓았는데, 부츠를 보는 순간 마치 예수님이 신으실 것처럼 구두를 닦아야 한다던 목사님의 말씀이 내게 도전으로 다가왔다….이 부츠를 예수 그리스도깨서 신으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부츠를 들고 다시 닦았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것이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장 단순한 일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께 하듯 하는 버릇이 들었다.” 고(故) 김창엽 목사/교수님은 70대 후반에, 사모님이 뇌출혈을 당하셨습니다. 돌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 주님께 기도드렸더니 “내게 하듯 하라”는 깨달음을 받아 힘이 났다고 하신 경험과 같은 취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잠언27: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7장은 이웃 간의 우정을 다루는 1-22절과 지혜로운 경제적 활동을 촉구하는 23-2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1,2절은 자랑, 칭찬을 뜻하는 ‘할랄’이란 단어가 나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살아갈 것을 교훈합니다. 사람이란 권력, 재물, 건강, 명예 등을 가졌거나, 형통하면 자랑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한 대목입니다. 자라는 학에게 부탁하여 막대기를 물고 하늘을 나르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때 땅에서 여러 동물들이 칭찬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자, 자라는 학의 경고도 무시한 채 입을 열고 자랑하려는 순간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동일한 속담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갑옷 입은 자가 벗은 자처럼 자랑하지 말라’(왕상20:11) – 비시 8세기 중엽 아합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아람 왕 벤하닷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분노한 벤하닷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당하고 아람 왕 벤하닷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또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그 해에 소출이 풍성하자 심중에 창고를 더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부요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한 자임이 드러났습니다(예컨데,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부자). 하나님은 그 날 밤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12:16-21). 우리는 스스로 든든히 섰다고 생각할 때조차 진실로 허사이므로, 항상 주님을 경외하며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잠언27:2절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본절 역시 부적절한 자랑에 관한 경고이지만, 그 대상이 ‘미래의 확실성’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입니다. ‘타인’의 원어는 ‘자르’로서 ‘낯선 사람’을 의미하나, 본절의 문맥에서는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실상 이해 관계 없는 타인의 판단은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후단은 전단의 취지를 또 한 번 반복하는데, ‘타인’ 대신 ‘외인-outsider’을, ‘입’ 대신 ‘입술’로 대체함으로 문장의 아름다움을 갖추려 하였습니다. 사회에서도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경멸을 받는데, 주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할 바가 아닙니다. ‘칭찬’이란 냄새와 같아서 자신이 하면 악취가 나고 타인이 하면 향기가 나는 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독일속담). 한편, 누군가로부터 ‘칭찬=영광’을 받으려 하는 태도는 인간의 본성이며 양면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 본성이 교만으로 가면 심판을 받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하는 중, 백성들이 큰 소리로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창자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행12:23). 그 반면, 건강한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 안에 자랑(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자랑’은 ‘겸손’과 결부된 자랑이어야 하고, 그 방법은 어떤 자랑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그 방향을 돌리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고후10:17).“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잠언27:3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본절에서 ‘돌’이란 나르기 힘든 무거운 바위를, ‘모래’는 해변의 모래를 의미하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움이 함축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사 현장에서 이들의 일부인 모래와 자갈을 지고 힘들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고통은 미련한 자가 야기 하는 ‘분노의 짐’ 보다 가볍다는 것이 잠언의 평가입니다. 잠언은 ‘분노의 짐’을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 미련한 자의 불쾌한 행동이나 미숙한 업무처리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미련한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로서, 이들의 행위 대부분은 범죄를 구성합니다. 연예인 박수홍 씨는 친형 부부가 30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100억원 이상 횡령한 사실에 분노하여 소송 중입니다. 심지어 그의 형수 이씨(200억 대 부동산 보유)는 박씨의 돈으로 상가를 취득하고 자신들과 어머니 이름으로 등기하였으며, 박씨는 16년 후에야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데일리안, 2023/8/16). 박씨의 변호사는 “피해자가 바라는 건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나 이들은 재판장에게만 반성하고 있다”고 개탄하였습니다. 횡령으로 상대방을 분노하게 하면 세상에서는 횡령죄이지만 성경에서는 살인죄로서(마5:22), 이의 해결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 형과 형수가 잘못을 시인하고, 동생의 재산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나 이것이 어려우며,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잠17:12).

잠언27:4절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본절에서 질투(투기)는 ‘분’이나 ‘노’보다 다루기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먼저 분과 노가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적어 놓아 경고합니다. 하마스로 인해 분노한 이스라엘에게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사건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분노에 삼켜서 실수 하지 말라고 충고 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좋은 조언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분노의 힘을 넘어서서, 질투를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뼈가 썩음과 같은 고통 속에 있게 합니다(잠14:30). 또한,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나, 질투는 대부분 숨겨져 있으며, 결과를 볼 때까지 여전히 음흉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 시발점은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가인에게 이를 경고 하였으나 질투는 그를 삼켜버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같습니다. 사울 왕이 골리앗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승전해 돌아오자, 마중나온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라고 노래하여 사울 왕을 격분시켰습니다. 이후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여 평생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의 사위이자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이 죽기까지 10년을 광야로 도피하였다가 결국 블레셋에 망명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윗은 사울에게 선행을 베풀어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을의 왕됨을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막지 못하는 질투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4,5). 독생자를 우리에게 아낌 없이 주심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복음의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매일묵상(2023/10/23-27)

마태복음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본절에 감동을 받은 3세기 로마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황금으로 써서 벽에 붙였습니다 (황금률). 그러나 많은 교회가 항상 사랑의 공동체는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원한을 품고, 마음에는 악의와 질투가 자라며,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조차 생각합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란 칼과 총을 들고 당신을 쫓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제거하고, 당신의 평판을 나쁘게 하려 합니다. 실로 당신을 미워하고 삼키고 짓누르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허나, 원수 사랑은 친구에 대한 사랑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친구와는 따뜻한 교류가 넘치지만, 원수에 대한 사랑은 서로 간에 주고 받는 따뜻함은 없습니다. 다만, 원수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주릴 때 먹을 것을 주는 것과 같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유익을 위해 일하는 수준입니다(롬12:20). 그리스도인은 원수의 불의에 대한 심판은 이미 주님 손에 맡겨 놓았습니다. 만약 이런 순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우리의 소금은 그 짠 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마5:13), 우리의 빛은 환하게 비추일 것입니다(마5:16). 마귀의 방법은 선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은 선일 경우에만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법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며, 이때 황금률이 내포한 의미를 진정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111-113).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

잠언26:24-25절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23절의 “온유한 입술”이란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가장한 말’이고, ‘악한 마음’은 ‘속임을 품은 마음’임을 설명하고(24절), 이어 ‘매력적으로 보이는 말’은 ‘듣기에 좋은 말’을 의미하나, 원수의 경우 마음은 미움만 가득하니 유의하라(25절)는 교훈입니다. 먼저, 솔로몬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감정과 진의를 숨기면서 잠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자의 특징을 서술합니다(24). 그들은 표리부동하여 입술로는 멋진 계획과 장래를 말하나, 그들의 속은 맹렬한 증오나 속임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친구,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늑대였다!’ 는 신파극과 같습니다. 25절이 지혜를 말합니다: 순진하게 믿지 말라! 우리에게 돈이 된다는 타인의 말에는 늘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심을 감추고 부정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표식을 잡아내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범죄가 ‘사기죄’입니다. 그 만큼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범죄가 성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사업이나 투자를 요청하는 경우에, 성공만 아니라, 실패의 경우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투자란 징조입니다. 한편, ‘일곱’이란 완전수이기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란 모든 가증함(왜곡, 속임, 위선, 험당, 탐욕, 음행, 악함, 교만 등)을 의미합니다. 매사에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고,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며 노력한 만큼 받겠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55:21)

잠언26:26절
“미운 생각을 교활하게 감추고 있다 하여도, 그 악의는 회중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새번역)

본절은 사람이 잠시 동안은 본심을 숨길 수 있어도 마침내 드러나고 만다는 교훈입니다. 23-25절은 ‘악한 원수’가 미움과 악을 감추고 있음을 묘사하고,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하되, 그 중 26절은 그들이 교활하게 감추고 있던 ‘미운 생각’이 드디어 회중 앞에 드러나서 파멸됨을 지적합니다. 설혹, 이 세상에서는 모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도 남김 없이 밝혀질 것입니다(눅12:2;마10:26).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나, 심판은 우리의 행위를 대상으로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벌거벗은 듯이 드러날 그 날을 생각하면 자연히 경건하게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이지요! 한편, ‘교활’이라고 번역된 ‘맛솨온’은 친절한 언어로 사람을 속이는 자를 지칭합니다(위선자). ‘회중’의 원어 ‘카할’은 일반적인 모임이나, 또는 재판을 위한 모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라면, 조만간 그의 악함이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나고 그 어리석은 자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임을, 후자라면 재판석에서 그의 악함이 밝혀지고 그에 합당한 벌이 내려짐을 말합니다. 본절의 좋은 예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마7:15)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경계해야 됩니다.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맺는 열매, 즉 가르침과 삶의 방식, 그들의 제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6:3).

잠언26:27절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본절은 구약성경 도처에 나오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무릇 타인을 해하려고 덫을 놓은 자들은 자신이 만든 그 덫에 걸릴 것이므로 아예 악한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합니다(시편7:15; 전10:8). 다만, 여기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인과응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돌을 굴리는 자가 도리어 그것에 치인다’는 말은 악인이 의인을 해하려고 큰 돌을 힘껏 밀어 올렸으나, 오히려 그 돌이 뒤로 굴러 악인 자신을 치는 경우입니다. 성경의 예로는 하만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차할 때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모르드개는 물론 유다 민족을 전부 몰살시키고자 하되, 특히 모르드개는 그냥 죽이는 것이 경하다고 생각하여, 높은 장대를 준비하고 거기에 매달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된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시켜 모르드개를 높이게 하고, 이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에스더7:10). 세속 역사의 예는 로비에스삐에르입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처형하였으나 마침내 자신도 잡혀 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베푼 선행이 오히려 큰 축복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갈6:7), 행한 대로 받으며 (마16:27), 헤아린 그대로 헤아림을 받는 것은(마7:2) 하나님의 법칙으로, 어떤 신학자는 ‘거울의 법칙’ 혹은 ‘부메랑의 법칙’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잠언26:28절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본절의 전단은 상대방을 미워하여 끝까지 해치려는 자를 말하며, 그의 수단은 거짓말입니다. 후단은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고 있는데, 잠언의 제자들은 그런 자들에게 속지말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마7:15-223). ‘아첨하는’의 원어는 ‘할라크’로 ‘매끄러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첨하는 입’이란 진실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종말은 패망입니다. 그러면 거짓말하고 아첨하는 자와 그 상대방 중 패망하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양쪽 다 해당됩니다. 본문의 목적은 거짓말 하고 아첨하는 자를 경고하며, 또한 어리석게도 그 매끄러운 말에 속아 파멸로 들어서는 자도 경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 국무부 과장은 미국의 맹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고 사직하면서, “끔찍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면 어느 쪽이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민주주의의 체제 역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만, 다른 정치체제 보다 낫다고 보입니다. 기타의 정치체제와 달리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권력에 대하여 소신 있게 비판할 수 있고, 자신이 행한 그 비판을 책임지는 정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명예훼손, 손해배상 등의 책임).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 역시 하나님을 떠난 세상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당연히 거짓말, 아부 등이 횡행하게 되지만, 다른 편에서는 그런 환경을 통해 주님을 중히 여기는 자를 알게 합니다. 실로 그들은 주님의 자랑거리입니다(욥1: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매일묵상(2023/10/16-20)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 중 ‘그리스도인의 좀 더 넓은 사랑’(11-113)에 관한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도 사랑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한 소녀를, 한 소녀가 한 소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또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있으며, 친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 즉 상호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상대방에게 잘해 준다. 상대방이 내게 친절을 베풀면, 나도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푼다. 이 상호적 사랑을 근거한 세상의 최고의 가르침은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은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배법칙은 황금률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사랑을 ‘원수와 핍박하는 자’(마5:44)까지 넗히라고 하신 주님의 요구는 바로 여기에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물론,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사랑은 품위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개나 돼지 같이 거룩한 것과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마7:6), 우리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거짓된 자들(마7:15-20)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잠언26: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본절에서 ‘말쟁이’란 ‘뒤에서 흠 잡고 원망, 불평한다’는 뜻의 ‘라간’의 파생어로, 나쁜 말을 옮기고 다니며 원망과 불평을 조장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는 다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불을 끄기 위해 더 이상 나무를 공급하지 않듯이, 말쟁이를 제거해야 다툼이 그칩니다.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은 첩자를 통해 정보를 얻고, 내부를 이간시켜 분열하도록 전략을 펴라고 합니다. 이의 대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헬라어는 ‘디아볼로- 참소하는 자’로서, ‘사이’를 뜻하는 ‘디아’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입니다. 즉 마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생각과 말을 던져 이간시키는 영적존재입니다. 좋은 예가 에덴 동산의 타락 사건이며, 마귀는 하나님을 참소하여 하와를 넘어뜨렸습니다. 성도들의 부르심 중 하나는 이 영적 존재들과의 전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영적 존재가 있음조차 알지 못하여, 마귀의 공격은 성도들과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전적 방법이 교회 내 ‘말쟁이’를 통해 오해, 시비, 원망, 불평을 조장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다툼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게을러지고 ‘말쟁이’가 될 우려가 있는 60이 안된 과부를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올리지 말고, 오히려 결혼하도록 하여 아이를 낳으며 집을 다스리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딤전5:11-15). 우리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하여,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고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잠언26: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본절은 20절과 같은 교훈을 다른 측면에 말합니다. 20절은 타는 불도 태울 나무가 없으면 꺼지듯이 험담하는 사람(말쟁이)이 없어지면 다툼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21절은 이미 타고 있는 불에 숯이나 나무를 더하면 더욱 타오르는 것 같이,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다툼을 좋아하는 자가 끼어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우려가 있음을 주의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잠언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모임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추방되어야 합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의 범죄적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아가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커어튼’입니다. 이미 5건의 살인을 부추킨 스티븐 노튼은 토비 러트렐 저택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토비가 부인 데이지의 잔소리와 히스테리에 늘상 시달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부인에 대한 토비의 열등감을 자극하였습니다. 아내에게 화가 난 토비는 술김에 토끼를 노리는 척 하면서 들판에 잠깐 나타났던 데이지를 라이플로 쏘나, 다행히 빗나가 부상만 입힙니다. 토비는 바로 후회하고 두 부부는 손을 잡고 울며 화해합니다. 결국 작가인 크리스티는 탐정 포와르를 통해 살인 교사자 스티븐 노튼을 죽이고 맙니다. 스티븐 노튼과 같은 존재가 마귀입니다. 이 적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화를 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엡5:26,27).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잠언26:22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험담(gossips)을 경계하는 본절은 18:8절과 동일합니다만, 18:8절은 어리석은 자를 다루는 문맥에 놓여 있고, 본절은 다툼에 관한 교훈(26:20-22절)의 결론입니다.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킵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아무런 배려도 없이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추방되어야 할 악인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본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별식 –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피하여야 합니다. 만약 그것에 귀 기울인다면, 그의 인격은 타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26:23절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6:17-28까지 언급되는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 중, 23-28절은 그 절정인 ‘악한 원수’를 다룹니다. 그 중 23-25절은 ‘악한 원수’의 속임을,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거짓된 말은 결국 이웃에게 해를 입힌다는 의미에서 앞 단락(속임, 험담, 다툼)과 내용이 연결되나, 본절의 초점은 위선자입니다. 솔로몬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말을 저급한 은으로 도금한 토기에 비유합니다. 이 토기는 마치 표면은 은빛 그릇 같은 착각을 갖게 하지만 실제로는 모조품(짝뚱)으로 이를 모르고 사면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매끄러운 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특히 도덕적 혹은 종교적으로 경건을 가장하면서 속에는 악한 마음을 품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면, 악한 의도를 알게 됩니다. 한편, “온유한”에 해당하는 ‘똘레킴’은 ‘불타다’ ‘열렬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입술’은 ‘불타는 입술’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의 해석적 다툼이 있으나, 실제로는 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양 온유한 입술로 그 의도를 꾸민다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잡으러 많은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친구인양 붙잡고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는 말과 함께 입맞춤으로 주님을 성전 경찰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본 잠언은 악인들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면 분별력을 갖출 수 았습니다.“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매일묵상(2023/10/9-13)

잠언26:14절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은 오직 ‘게으름’ 뿐이기에,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런 게으른 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있는 곳은 침상입니다! 문짝은 벽이나 기둥에 고정되어 돌쩌귀(경첩)를 따라 계속 회전하지만 절대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게으른 자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구르는 모습이 마치 이와 같아 보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문짝은 돌쩌귀를 따라서 회전하여 바람과 소리를 막아주는 등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게으른 자는 움직일 수 있지만 땀흘리기 싫어하여 아무데도 가지 않으며,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개선이나 진보도 없습니다. 그들의 밭은 잡풀과 가시덤불로 뒤덮혀 있고, 그들의 포도원의 돌담은 무너져, 동물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고, 그들의 옷은 헤어져 있으나 꿰매지도 않아 너덜거립니다. 곳간에는 전혀 양식이 없어 가족은 굶주리고, 겨울을 보낼 땔감을 준비하지 못하여 추위에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아무런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하러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지혜가 없는 자로서, 이를 보는 이웃은 그들을 게으른 자, 바보들이라 비웃고 그들의 장래는 절망입니다. 실상 이들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이고 악한 자들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이들을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심판을 내리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실 것입니다(마25:30).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언21:25).

잠언26: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 구절은 게으른 자에 대한 세 번째 묘사로서, 잠언 19:24절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와 같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는 어떤 형태의 일도 싫어하며 심지어 음식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에도 지쳐서 괴로워 한다고 또 한 번 비웃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로워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것 같은 아주 간단한 일조차 힘들어 하기 때문에, 배고품도 일할 동기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기회가 있음에도 그들은 게을러서 굶을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잠언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말합니다. 실로, 게으른 자는 게을러서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잠언26:16절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본 구절은 네 번째 ‘게으른 자의 거울’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게으른 자는 ‘게으르면서도 자신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생존하는 자들이나 그들도 그렇게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다룬 12 개 구절(1-12)에서 그 극치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임과 같이(12), 게으른 자도 자신의 이유를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지혜의 결정체로 여기기 때문에 게으르고 교만한 자야말로 구제 불가능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게으른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개선가능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지혜롭게 여기고 있는 그 게으른 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침상입니다! 그는 침상에서 문짝처럼 돌고 있습니다. 그는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조차 두려워하므로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4). 지금까지 살핀 어리석은 자들(26:1-11), 즉 미련한 짓을 거듭하는 미련한 자라 할지라도 매질(26:3)이나 계속된 바른 대답(26:5)을 통해 그 어리석음에서 구원받을 희망이 보이지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16)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12)는 구원의 희망조차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편,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이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신구약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본절의 ‘게으르나 교만한 자’의 삶은 파국으로 결말지어질 것이며, 이는 영원한 심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너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나, 그런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다.”(잠언26:12,새번역)

잠언26:17절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26:17-28까지 12구절은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나 그 강도는 점점  올라갑니다. 즉, 히스기야는 ‘남의 일에 참견하여 스스로를 해치는 자’(17), ‘이웃을 해하는 자’(18-19), ‘비방하는 자’(20-22)로 단계를 높여가다가 ‘악한 원수’ (23-28)에서 그 절정에 이르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단락의 시작인 본절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개의 귀를 잡는 것에 비유합니다. ‘길로 지나가다’란 아무 상관도 없음을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도미한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길을 가다가 인삼장사를 하는 두 동포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뜯어 말린 것은 민족의 관점에서 너무나도 자신과 상관이 있는 일입니다. 후단에 나타난 ‘개’는 광야를 떠도는 사나운 들개로 해석됩니다. 팔레스틴에는 사나운 들개가 많아(왕하9:30-37), 들판을 헤매는 하얀 들개 무리는 공포의 대상일 정도입니다. 이 들개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사납기 짝이 없고 무리를 지어 다니기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기 충분합니다. 그런 개가 옆으로 오는 것만 해도 위험한 일인데, 그 개의 귀를 잡는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짓입니다. 최근에 하마스의 반인륜적인 공격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관하여 큰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 중국 등은 전쟁은 좋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는 선에서 논평하고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하물며 잠언의 제자들인 우리는 불필요한 분쟁에 끼어들어 시간을 낭비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골4:5,공동번역)

잠언26:18-19절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18-19절은 이웃을 속이고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비행을 경계합니다. 18절의 ‘미친 사람’은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횃불’이란 막대기나 화살에 기름먹인 천을 감아 불을 붙인 것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무기입니다. 미친 자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그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큰 혼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다’고 하는 자도 이 미친 자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속이다’는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중대한 거짓말이며, 외삼촌 라반이 약속된 라헬 대신 레아를 신부를 주어 야곱을 속였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29:25). 야곱은 원치 않는 레아를 얻게 되었고 외삼촌의 속임은 야곱 인생의 불행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은 장난삼아 농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는 농담과 잔인함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본 잠언이 장난끼 있는 악인을 무기를 갖고 미쳐날뛰는 광인에 비교한 것은 압권입니다. 둘 다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으며 둘 다 사회에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이 나가 악한 음모를 꾸밀 수 없는 반면, 장난스러운 악인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의 문제점은 이웃의 불행을 쾌락의 근거로 삼는 점이고, 그 본질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웃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