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0/4-6)

잠언26: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본절은 개의 더러운 행동을 들어 미련한 자의 특성을 밝힙니다. ‘개’는 히브리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으로, 아무 것이나 먹고 매우 사나우며 더러웠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그 후 주어지는 비판을 무시하면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바른 말과 교정을 싫어하기에,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를 관찰하고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를 떠올렸습니다. 개가 토하는 이유는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서이나, 개는 그것을 잊어 버리고 또 먹습니다. 어리석은 자 역시 저지른 죄를 혐오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일한 죄악을 거듭함으로써 심판을 자초합니다. 본 잠언은 신약에 인용되어(벧후2:22)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 거짓 교사들은 “올바른 삶의 길; 의의 도”(벧후2:21)를 알지만 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반하는 이전 생활 방식으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개 이외에 돼지를 언급하는데, 돼지는 더러운 구덩이에서 나오면  그곳을 멀리하는 양과 달리 도로 그 구덩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본절이 적용된 성경의 대표적 예는 가룟 유다로서, 그는 맡은 헌금궤에서 돈을 훔치곤 하였습니다. 이를 유심히 본 마귀는 탐욕으로 가룟 유다를 사로잡아 예수님을 파는 도구로 사용하였음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줍니다.“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단12:10)

잠언26: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12절)은 “미련한 자들을 위한 거울”(1-12절)과 “게으른 자들을 위한 거울”(13-16절) 사이에서 야누스 역할을 합니다. 한편은 ‘미련한 자’라는 주제어를 반복하지만, 또 한편은 1-11절까지 미련한 자의 비유로 눈, 비, 동물, 물매, 가시나무, 나귀, 개 등 창조질서의 소재를 뽑아 사용해 온 흐름을 떠나, 16절처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란 구조를 도입하여 미련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비교의 기준으로 내세운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가 최고의 바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사용된 비교의 방법은 미련한 자를 밝히는 동시에 그들의 어리석음에서 구원할 방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매가 합당하다는 교훈은 동시에 미련을 탈피할 방법을 알려 주며(3),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기 전에” 반박하라는 훈계는 지혜의 문을 열어줍니다(5). 비록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지만(11), 이같은 시의 적절한 신체적, 언어적 교정을 통하여 구해줄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바보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만에 빠지지 않은 어리석은 자(1-11)보다 자만에 빠진 게으른 자(16)는 더 나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므로” 자신의 교정 가능성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의 전형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세상 지식인, 부자, 권력자들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8).

잠언26:13절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26:13-16절은 게으른 자들의 말도 안 되는 변명(13), 경직성(14), 나태함(15), 엄청난 자기기만(16)을 각 묘사합니다. 본절(잠언22:13과 같은 내용임)은 게으른 자의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게으른 자는 일하기 싫어는 자입니다만, 현실은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일하지 않을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합니다. 이때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자’라는 ‘놀라운 핑계’가 떠올랐습니다. 사자는 무서운 동물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 삼림에는 많은 사자가 있어 밭이나 들에서는 종종 만나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에 야생의 사자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거리’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사자’이기에, ‘게으른 자’의 말에는 거짓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밭에 나가 사자를 만나는 것이 싫으면, 장사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집을 세워야만 합니다(창3:17-19). 사람의 모든 수고에는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위험이 클수록 보답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핑계를 대고 일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수고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합니다. 당연히 그는 사자뿐만 아니라 전쟁, 전염병, 질병 등 일하지 않을 ‘환상적인 구실’을 계속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가 인도하는 인생(독신)이나 공동체(지도자) 그리고 가정(결혼)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우리들은 게으름이외에도, 불신앙과 두려움 때문에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매일묵상(2023/9/25-27)

잠언26:8절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8절은 사리 분별 못하는 미련한 자에게 영예(높은 지위)를 부여할 때 나타날 위험성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먼저 ‘물매’란 돌을 던지기 위한 기구로서, 물매에 돌을 묶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돌을 올려놓고 빙빙 돌리다가 날려 상대를 맞추는 투석기의 일종입니다. 따라서, 물매에 돌을 맨다는 것은 물매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자의 행동입니다. 싸움 전에 이미 그 결과는 명약관화합니다. 물매에 맨 돌은 아무리 돌려도 날라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를 믿고 맹수나 적을 맞상대하러 나간다면 재앙 그 자체입니다. 미련한 자가 중요하고 높은 자리를 맡을 때도 같습니다. “한나라의 경제를 바보한테 맡기면 그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작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영국 채권시장 폭락사태를 보며 한 말입니다. 2022년 9월 리즈 트러스는 영국 총리에 취임하고 450억 파운드(약72조원)의 감세안을 발표하자, 영국 국채시장에서는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72조원의 감세공백 보전을 위해 국채 발행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운드화는 폭락하고 국채금리는 치솟는 등 영국의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습니다. 결국 감세안은 철회되었고 트러스 총리는 불과 44일만에 물러났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도 엄청난 세수부족(59조원)에 직면하고 있고 정부는 ‘외국환평형기금’과 ‘세계잉여금’ 에서 그 부족분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많은 비평이 뒤따르고 있기에, 현 경제팀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6:9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언’이란 타인을 지도하기 위한 교훈을 의미합니다. 7절은 미련한 자의 잠언(교훈)의 무익성을, 9절은 그 해악성을 언급합니다. 지혜 없는 자는 잠언을 배울 수 있으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적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교훈은 부적절하며, 만약 그가 도덕적 바보(사악한 자)이면 의도적인 조언으로 해를 끼칩니다. 본잠언은 후자에 무게를 두어 그들의 잠언을 ‘가시나무’에 비유합니다. 가시나무는 위험합니다. 더구나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는 더더욱 위험한데,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모습은 분별력 없는 자가 상황과 처지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교훈을 주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 이용준(서예가)이 소장한 훈민정음(해례본)을 전형필에게 소개한 김태준(1905-1949)은 한국문학사를 정립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이현상의 소개로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가 2년간(1941-43) 옥고를 치뤘고, 그 사이 노모, 아내, 아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된 남로당 활동으로 잡혀 1949년 사형 당하였습니다. 한편 김태준의 제자 이용준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되었는데, 이용준은 남로당 사건 후 북으로 도주하여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김태준은 이현상이라는 사회주의자의 인도 때문에, 이용준은 스승인 김태준의 지도로 인해 결국 큰 해를 당하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잘못된 교훈(사상)은 그 만큼 해악이 크므로 주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잠언26:10절
“미련한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궁수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쏘아대는 것과 같다.(새번역)

개정개역의 번역은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이나, 여타 한글번역은 모두 ‘궁수가 …쏘아대는 것 같다’라는 취지를 따르고 있습니다. 원문은 불확실하여, ‘장인’의 원어는 ‘활 쏘는 자(궁수)’로, ‘만들다’의 원어는 ‘상처 입다, 근심하다’ 등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본잠언은 미련한 자를 고용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라는 교훈이기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쏘아대는 궁수의 무책임한 짓에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물건을 만들 때 ‘숙련된 기술자’(장인)가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관심도 없고 기술도 없는 문외한(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면, 불량품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일과 고객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그와 같기에 잠언은 이 둘을 병렬하여 놓았습니다. 사람을 쓸 때는 신중해야만 합니다. 적절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 최태섭 회장의 젊은 시절. 만주에서 비누 공장을 설립할 때입니다. 소개로 온 비누기술자 (조선동포)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 고용하였다가 불량품만 나와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동포는 미련한 사람은 아니어서 함께 연구하여 좋은 비누를 만들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이 잠언은 교회에서 직분을 세울 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 직분을 위해 15개, 집사 직분을 위해 13개 조건을  열거하고, 합당하지 않으면 감독과 집사로 세우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딤전3:1-12).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매일묵상(2023/9/18-22)

잠언26:3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본절은 1, 2절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 2절이 앞부분에서 명백한 비유(여름의 눈, 추수시 비/ 참새와 제비의 날아감)를 주고 뒷부분에서 교훈을 주듯이,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또 주제면에서는 3-5절이 같은데, 도덕적 바보에게 어떻게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가르칩니다. 3절은 어떤 말도 효과가 없어 매질만이 이해받는 유일한 언어임을, 4, 5절은 대답하지 않을 때와 대답할 때를 분별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에서 말과 나귀는 인간의 언어를 모르기에, 주인의 뜻을 이해시키려면, 말에게는 채찍을, 나귀에게는 재갈이 필수적입니다. 솔로몬은 바른 말을 듣기 거부하는 미련한 자를 이들 짐승에 비유하면서, 막대기로 표상되는 물리적 힘만이 깨우칠 수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물리적 수단을 통해 짐승들은 주인의 뜻을 행하나, 바보들은 깨우치지 못하고 결국 지혜와 선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교만, 탐욕, 비방,악한행동,게으름)으로 마음과 삶의 행동양식이 돌이킬 수 없이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잠언의 관찰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해받지 못한 사람들은 듣고 믿는 것이 중요하나, 이미 복음을 들어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우리는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삽은 시편 73편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이 가득한 자신을 ‘주님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만약 징계가 없다면 고침받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징계는 필수적입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잠17:10).

잠언26:4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대화를 나누는 본인도 그처럼 미련한 자가 되지 않게 하고, 더 나아가 미련한 자의 교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2절의 문맥을 통해 읽으면 지혜자의 대답 자체가 도덕적 바보에게 합당하지 않은 영예를 주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것’이란 악의적인 말, 무식함, 불경건한 삶의 자세, 예의 없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대화와 교제를 통해서 영향을 주고받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와 교제를 갖게 되면 미련한 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마음가짐, 태도, 삶의 방식과 언어 등 모든 방면에서 미련한 자를 닳아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일단 상대방을 인격적인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에, 본 잠언은 미련한 자와의 교제 자체를 금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 2300년 전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갔다는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는 이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교육열에 있어 대한민국의 어머니보다 더 뛰어난 민족은 많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교육에서는 반드시 신앙적 요소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먼저 규칙적인 예배 참석 등 부모의 믿음의 본이 중요하고, 이어 아이의 친구들의 신앙적 면모도 살펴서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기도하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육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 하라는 지혜의 정수를 갖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언17:12)

잠언26:5절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5절은 4절과 배치되는 말씀이나,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구절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줌으로, 잠언의 제자를 보호하며 미련한 자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는 언행을 논어에서는 시중(時中)이라 하고 그 이상을 공자로 봅니다. 진정한 중용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상황 속에서 적절함을 추구합니다. 공자는 ‘집기양단(執其兩端)’- 양쪽 끝을 잡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을 그 방법으로, 순임금을 그 모델로 제시합니다(중용). 지금 솔로몬은 4,5절에서 그 비책을 말합니다. 4절은 미련한 자가 이성 대신 감정을 앞세워, 분노, 조롱, 욕설이나 저주 등을 퍼불 때 적용됩니다. 이 경우에는 온유하게 인내하거나, 잠잠히 그 자리를 떠나야 하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5절은 미련한 자가 논리를 갖고 공격할 때입니다. 이 경우에 침묵한다면 동의를 의미하기에, 신자들은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련한 자들의 논리 속에는 항상 궤변과 함정이 숨어 있어, 함정을 피하고 상대 논리의 모순을 논파하여 참된 진리를 들어냄으로써, 어리석은 자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각 상황에 맞는 중용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약1:5). 다만, 믿음의 문제로 박해 당할 경우에는 염려 없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눅12:11,12).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26:6절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26:6-10절은 교차대구의 구조로서, 그 중심에 8절을 놓아,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사자, 지배인, 선생의 지위 등)를 주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아래는 그 구조입니다.

  A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경우(6)
    B      미련한 자의 잠언(7)
      C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8)
    B′      미련한 자의 잠언(9)
  A′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경우(10).

6절은 통신수단을 은유한 ‘발’이 언급됩니다. 전화나 이메일을 사용하는 현대와 달리, 고대에는 인편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기에, 소식 특히 중요한 소식을 위해서는 신뢰받는 사람을 보내야 하였습니다. 만약 미련한 자가 그 책임을 맡는다면, 그 해악은 치명적입니다. 이는 마치 자신의 두 발(복수형)을 베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임무의 경우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권한과 함께 파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신 아름다운 화해와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 복음의 전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에 주님은 약속과 심판 두 가지를 남기셨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면 모두 응답주시겠다(마7:7-11; 요일5:14,15)는 약속과, 만약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마7:19).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잠언26:7절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본문은 저는 자의 다리가 몸무게를 결코 지탱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미련한 자의 잠언 역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함을 교훈합니다. 첫째, 그들의 말은 시의적절하지 않습니다. 모든 충고나 잠언은 상황, 사람, 시기 이 세 가지가 모두 고려되어야 효과적이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직 잠언만 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26:4절은 ‘미련한 자를 만날 경우 잠잠하라’, 5절은 ‘미련한 자의 말을 효과적으로 반박하라’는 상반된 교훈이기에,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바보의 유형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잠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도덕적으로 너무 둔감하여 언행의 불일치가 드러나는 자들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가르치지만 자신은 도둑질을 하고, 우상은 가증한 것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신사의 물건이 탐나서 훔친다면 누가 그 사람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듣겠습니까?(참조 롬2:21-22). 이같이 인격에 결함이 있는 자들이 훌륭한 잠언을 말한들, 자신의 얼굴에 침뱉기이며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한편, 가장 미련한 자는 종교적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마23:24)로서, 이들의 교훈을 실행하면 도움은커녕 오히려 심판당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전형적인 위선자들입니다(마7:21). 그렇다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면, 무섭게 화를 내며 대들 것이기에, 잠잠히 그 자리를 떠나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4절).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잠언10:14)

매일묵상(2013/9/11-15)

잠언25: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 고된 여행길을 마치고 마침내 나홀성에 도착하여 우물가로 갔는데, 만약 그 우물이 흙탕물로 더러워졌다면 그의 실망감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물과 샘은 가나안 지역의 생명줄입니다. 이같이 의인은 그 공동체의 생명샘이며, 그 사회로 하여금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요 어두움을 밝히는 빛입니다. 요사이 샌프란시스코는 범죄자로 들끓어 홀푸드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속속 그 도시를 떠나고 있다 합니다. 이같이 의인이 없는 도시나 국가는 버림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의인이 악인의 유혹이나 협박에 의해 굴복한다면 생명샘은 더러워지고 그 사회는 부패하여 온통 어두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그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목적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모세율법을 받음으로 제사장 국가로 부름을 받았으나, 이방국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하여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길 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마5:13). 그 반면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청년 4 명은 그 이방 땅에서도 모세율법을 지키고,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 주님은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7).

잠언25: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을 다루는 16-27절은 ‘봉투구조’라는 수사법을 사용합니다.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권면의 핵심은 절제입니다. 꿀은 완전식품으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합니다(16). 영예도 같습니다. 잠언은 “많은 재물 보다 명예를 택하라”(22:1)고 하여 명예를 갖도록 권면합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명예롭게 여겨 이를 얻으려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칭찬하는데, 경건과 선한 일을 사모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3:1이하).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 믿음에 큰 담력을 얻고, 자녀의 본이 되어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세상의 명예나 부 등에 신경을 쏟으면서 이런 귀한 믿음을 등한히 여기면 마지막 날은 물론, 인생 후반부에 후회하게 됩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격과 능력에 합당한 영예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됨은, 꿀을 많이 먹어 토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16).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영조 때 수장가 상고당 김광수(1699-1770)는 모든 재산을 기울여 수 많은 서화, 골동품을 모았으나, 말년에 생활이 어려워지자 “평생 눈에 갖다바쳤던 것을 이제는 입에다 갖다바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며 팔았다고 합니다. 절제는 주님을 두려워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본절은 하나님과 왕이라는 우주의 통치질서 내에서(25:2) 지혜롭게 살게 하는 적절한 결론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

잠언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25:28-26:28절은 7가지 유형의 ‘도덕적 바보들’을 보여줍니다: 무절제한 사람(25:28), 어리석은 자(26:1-12), 게으른 자(13-16),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17), 불선한 자(18-19), 비방하는 자(20-22), 그리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23-28). 솔로몬은 ‘봉투구조 Inclusio’(시작25:28-무너짐, 결론 26:28-패망)를 사용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의 파멸을 강조합니다. 신약에 이르면, 그것은 죽은 뒤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에 처함을 의미합니다(요5:29). 오늘 본문은 절제력을 갖지 못한 사람을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에 비유합니다. 고대 성읍의 큰 특징은 도시를 두른 성벽입니다. 만약 성벽이 허물어져 있다면, 그 도시는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고, 적은 물론 짐승의 위협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욕, 교만, 그리고 악한 마음이 그를 지배하여, 죄를 짓게 되며, 그 행위의 사회적 유해성이 크면 사회는 벌을 내릴 것입니다. 또한 무절제한 자는 악한 자(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더 큰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주님을 경외는 마음과 그분의 지혜(가르침)를 재료로 하여 성령님에 의해 생산됩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노력하여 끊는 방법도 있으나, 기도응답의 결과 담배를 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하시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신자의 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26:1절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미련한 자’가 지위와 명예를 탐하는 것을 ‘여름의 눈’과 ‘추수 때의 비’에 비견하면서 경계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수확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때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내리거나 추수 때 비가 내린다면 농작물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같이 영예를 가진 미련한 자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칠 우려가 있습니다. 통상 높은 지위나 명예를 얻었다면, 그에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어야 조직과 사회 공동체에 유익합니다. 만약,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지 못한 미련한 자가 지위를 얻는다면,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닥치는 폐해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잠언과 시편에서 ‘미련한 자’ ‘바보’ 혹은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할 때 그 원어는 ‘케씰’이며, 대개의 문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지칭합니다(시14:1).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등을 생각하면 본절이 얼마나 예리하게 그 모순과 재앙적 수준을 표현하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유럽은 전쟁이란 날벼락을 맞았고, 유대인들은 6백만명이나 처형되었습니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책을 펼쳐서 1억 명 이상을 굶어죽게 만들었습니다. 김일성 때문에 한반도는 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엄청난 폐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잠언26:2절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까닭 없는 저주”란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말의 효력을 믿는 관습과 두려움이 그 배경입니다. 솔로몬은 분명히 말합니다: 근거 없는 저주의 말은 ‘참새가 떠돌고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저주의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새나 제비 같은 새는 단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 뿐 분명한 목표나 지향점이 없습니다.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 역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어떤 해악도 미치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 흩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근거가 있는 저주(악인에 대한 백성의 저주 등)는 두려워 하도록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든지 일어나 이 성을 재건하면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고 맹세시켰습니다(수6:26). 550년 뒤 아합 왕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의 기초를 놓을 때 장자를,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을 각각 잃어 여호수아의 말이 응하였습니다(왕상16:34). 주님의 경고를 무시한 히엘의 행동에 대한 심판은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같이 심판을 실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아무의 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저주를 받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창12:1-3).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후손들에게 미치므로, 우리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된 우리는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눅6:28).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매일묵상(2023/9/4-8)

잠언25:22절(1)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22절은 21절의 이유나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는데, “그리 하는 것은”이라는 번역은 결과의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즉, 원수 갚는 대신 선행을 하면, 그 결과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것과 같고, 주님의 상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4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1)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시켜, 지혜자가 선행을 베풀지만 결국 악인은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된다. (2) 선대를 받고 회개한 악인의 행태를 말한다. 고대 애굽에서는 회개한 자가 숯불을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고통을 느끼며 회개하였음을 알렸습니다. (3) 악인의 고통과 관련시켜 관대한 조치를 받을 때 더 크게 느끼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4)고대 애굽에서 불씨를 빌려오는 풍습과 관련하여, 불씨가 꺼진 집에 잘 핀 숯불을 빌려주는 것과 같은 대단한 호의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가르치려는 예의 하나로 제시된 것입니다. 한편, 후반절은 원수에 대한 선행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상으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상을 주시는 주체의 이름을 하나님 대신 ‘여호와/야훼’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또 ‘상을 주시리라’는 ‘갚다’의 미완료형 ‘예솰렘’으로 신실하신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상을 주고 계심을 각각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선행의 동기는 원수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으로써, 대인관계의 궁극적 초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일은 이와 관련한 두 명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잠언25:22절(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본 잠언과 관련한 성경 이야기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17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고, 이어 주인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기약 없이 감옥에 갇히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여전히 신실하였습니다. 총리로 발탁된 후에도, 요셉은 보디발과 그 아내에게 보복하지 않았고, 양식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온 형제67, 들을 미워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요셉이 행한 용서는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형제들은 비로서 무서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납니다. 또 한 명은 다윗입니다. 엔게디의 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자신을 치러온 사울이 들어왔습니다. 원수를 네 손에 붙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신탁과, 부하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몰래 베고 살려줍니다. 사울은 울면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는 고백을 하지만, 여전히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후에 사울과 그 군대가 다윗을 치려고 하길라 산에 진치고 깊은 잠이 들었을 때,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내려와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갖고 그냥 돌아갑니다. 잠이 깨자 사울은 다시 다윗에게 복을 빌고 철군하나,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습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신실하고, 다윗처럼 지혜로워야 하지만,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보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요셉과 다윗 이야기는 모두 복음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잠언25: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팔레스틴은 지중해로 인해 서풍이 불면 비가 내리고(눅12:54), 북풍은 오히려 하늘을 맑게 합니다. 만약 북풍이 불 때 비가 내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기치 못한 현상으로 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참소하는 혀(말)’는 피해자에게 숨겨져서 예기치 못한 타격을 입히기에, 피해자가 그것을 들었다면 당연히 분노하여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풍이 비를 숨겼어도 마침내 쏟아져 내려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처럼, 중상모략하는 행위도 만인에게 드러날 것이므로, 자신의 참소의 은밀성을 믿는 자는 바보입니다. 이렇게 나쁜 참소의 영적 아비는 마귀(디아볼로-참소하다)입니다(계20:10).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을 비방하고 범죄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창3:1-7). 이들이 유혹에 넘어가자, 인류 위에는 모든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우리 주님은, 타협하자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마4:1-11), 대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셔서, 인류와 하나님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인한 구속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마귀의 권세는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손으로 작성한 법조문으로 된 빚문서(범죄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무효화시키고, 십자가에 못박아 완전히 찢어 제해버리셨기 때문입니다(골2:14-15). 할렐루야!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용서와 화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어, 마음에 간직한다면, 우리 마음은 늘 감사와 평화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6)

잠언25:24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는 아내에 관해 교훈하는 본잠언은 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의 반복입니다. 다만 각 잠언이 놓여진 문맥과 강조점이 다릅니다. 21:3-29절은 악한 마음과 행위가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니 경계하라는 교훈을 주며, 21:9절은 그 한 예로 부부 사이를 말합니다. 25: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다루며, 본절은 그 한 예로 예기치 못한 결혼생활의 갈등을 말합니다. 북풍으로 내리는 비나, 교활한 혀에서 나오는 말(25:23) 같이, 적의가 담긴 아내의 언어는 혼인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북풍과 움막은 비유적 연결이 있습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잠언은 “아내에게서 보호받지 못한 채 큰 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비를 피할 수 없는 지붕의 ‘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함으로 슬기로운 아내를 얻으라는 권고를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잠언25: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고(구)려는 예전에 당태종도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구나.”(<고려사절요>). 1259년 고려 고종이 세자를 쿠빌라이(훗날 원 세조·재위 1260~1294)에게 보내 항복의 뜻을 전하자, 먼 고려 땅에서 온 좋은 기별을 들은 쿠빌라이는 몹씨 기뻐하며 한 말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였겠습니까?  당시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와 대칸을 놓고 경쟁 중이었으며, 정통성에서 약간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간 몽골에 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를 택하여 항복했다는 것은 고려는 쿠빌라이 쪽이 이길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고려 사절단을 매우 환영하며 대접하는 중에 고종이 죽자 세자를 왕으로 삼아(원종) 고려로 되돌려 보내면서, 고려의 제도와 풍습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이 소위 세조구제(世祖舊制)이며, 고려가 원의 직할통치를 받지 않게 하는 장치로 역할하게 합니다. 그 만큼 고려의 외교력과 판단력은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쿠빌라이에게 전달된 고려 항복 소식은, 죄인들인 우리에게 전달된 사면과 화해의 편지인 복음의 한 모형입니다. 복음이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반역과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시켜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으로 열두 제자 등 복음의 증인들에 의해 전달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며, 이 보다 더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는 기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의 소식은 얼음을 띠운 냉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매일말씀(2023/08/28-9/1)

잠언25:18절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열왕기하21장은 왕비 이세벨의 지시를 받아 성읍 장로들은 거짓 증언자들을 고용하여 나봇을 처형하고 그 포도원을 빼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집안의 멸망을 선포하셨고, 아합이 죽은 뒤 심판을 집행하였습니다. 18-20절은 이웃에 대한 3가지 악의 유형이 등장하고, ‘거짓증거’는 그 첫 번째입니다. 배경은 법정이며, 사건의 증인으로 잠언의 제자가 섰을 때, 만약 그가 위증을 한다면, 피고는 엄청난 재판상 불이익을 얻게 되고 심지어 사형을 당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유로 제시된 3 가지 전쟁무기는 용사들의 필수적 무기로서 전쟁터에서 용사의 부하가 휴대하면서 골프장의 캐디와 같이, 전투의 각 단계 마다 적합한 무기를 제공합니다. ‘방망이= 해머’는 가장 근접전을 위해, ‘칼’은 약간 떨어진 근접전을 위해, 그리고 ‘화살’은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할 때 사용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오펜하이머 청문회’(1954)가 나옵니다. 에드워드 텔러(수소폭탄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와 그의 사상적 전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좋지 않은 증언을 하여 큰 타격을 줍니다. 후에 텔러는 페르미 상을 받고(1962년), 이어 오펜하이머를 수상자로 추천하면서(1963년) 화해의 제스처를 보냅니다. 만찬석상에서 둘은 화해의 악수를 하나, 그의 부인은 악수를 거절하는데,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복을 자제하고 주님 손에 맡기면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마지막날 주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5:39)

잠언25:19절
“환난을 당할 때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믿는 것은, 마치 썩은 이와 뼈가 부러진 다리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새번역)

18절은 적극적인 위증자를 다루었다면, 19절은 평소에는 친구이나 위기 시에는 진실하지 못하여 파괴적인 타격을 입히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갖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본절에서 ‘썩은 이’와 ‘부러진 다리’가 진실하지 못한 사람의 생생한 비유로 등장합니다. ‘이’와 ‘다리’는 먹을 때와 걸을 때 꼭 필요하지만, 썩었거나 부러졌다면 도움은커녕 고통만 줄 뿐입니다. 환난이 덮칠 때 진실하지 못한 친구는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우리와 교제하는 친구나 지인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따질수록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은 분별력을 뛰어넘어,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제자들 모두 주님이 걸어가고 계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몰라 결정적인 순간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부활하시자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찾아가셔서 사도로 다시 부르시고 파송하셨습니다(요21장). 바울의 마지막은 아시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었고, 그 중 특히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언급됩니다. 아마 열심으로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 같습니다(딤후1:15).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릅니다 (딤후4:16,17). 잠언의 이상이 여기에 있으며, 주님이 먼저 성취하셨고, 이어 사도들이 갔으며, 지금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25:21).

잠언25:20절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새번역)

잠언은 치명적인 거짓말쟁이(18)와 침묵의 배반자(19)로부터 상황판단을 못하고 부적절하게 말하는 자(20)로 대상을 옮겨 교훈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엘가나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는 자식들은 가졌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브닌나는 질투하였고 드디어 실로의 매년 제사 때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이를 보고 엘가나는 “내가 그대에게 열 명의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위로하였으나, 한나는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런 한나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면 더욱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솔로몬은 두 가지 비유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 같다”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배경에는 과부의 옷을 전당잡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율법이 있습니다(신24:17). 의도 여부에 불구하고 그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금지된 행위입니다. 두번째 비유는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다”입니다. 부드러운 기름으로 고통을 완화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초를 부어 더 아프게 하는 모습이야말로 미련의 극치이지만, 위로에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주님에게는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경건한 한나는 그 괴로움을 주님 앞에 토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고, 한나는 서원한대로 젖을 떼자 수소 세 마리를 데리고 실로의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와 주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의 행위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잠언25:21절(1)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21-22절은 16-22절에 언급된 인간관계의 갈등을 풀어주는 잠언의 해법으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의 한 적용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은 롬12:7-21에서 본구절을 인용하나,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이미 교회 내에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잠언은 “보복을 버리고 주님 손에 맡기라”(20:22),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24:17-18), “노하기를 천천히 하고 허물을 용서하라”(19:11) 등, 이 교훈을 가르친 바 있습니다. 21-22절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곤경에 빠진 원수를 동정하여 먹이라”고 명령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레19:18)는 계명의 범주에 원수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개인 차원의 선행이란 의미를 넘어,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익의 침해가 있을 때, 사적인 강제나 보복은 마땅히 공동체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모세율법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이 종료될 때까지 무시되어, 사사시대에는 개인의 소견대로, 왕정시대에는 왕의 자의적 통치만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었고 모세율법의 언약대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바벨론 포수에서 돌아온 이래 모세율법이 중시되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모세율법이 들어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끔직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모세율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지지 않아 헌법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은 본절의 구체적 내용을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5:21절(2)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보복의 본능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어, 모세율법에도 친족구속자(고엘)제도를 두었으며 친족구속자의 책무 중 하나가 ‘피의 보복’입니다. 그러나 고대 부족 사회에서는 보복이 극단적으로 확대되는 경향 때문에, 모세율법에는 ‘도피성’(수20장)제도나, ‘눈은 눈으로’라는 동해보복의 원리(출21:23-24)를 규정하여 과도한 보복을 제한시켰습니다. 본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원수가 곤경에 있을 때 해악 대신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행동은 실질적으로 보복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음으로 화가 잔뜩 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 잠언을 인용한 후,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박해 받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합니다. D. 제레마이어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햄버거를 사러 갔을 때 뒤에서 기다리는 차를 못보고 껴들게 되었습니다. 뒷차의 운전자는 화가 나서 여러 번 크락션을 울려댔으나, 목사님은 오히려 그녀의 햄버거와 음료수 값을 치루고 나갔습니다. 백밀러에는 그 운전자의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는 등 사울에게 베풀었던 여러 선행은 베냐민 지파의 충성을 이끌어 내었고 다윗은 피 없이 통일합니다. 이 같이 하나님은 선행을 근거로 섭리를 진행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잠언은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내일 이에 관해 보겠습니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26:17)

매일묵상(2023/8/21-25)

잠언25:13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새번역)

‘무더운 추수 때’란 팔레스틴 지역에서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4월 중순부터 밀 추수가 시작되는 6월 초 이후의 기간을 가리키며 매우 더운 계절입니다. ‘시원한 냉수’란 북쪽 헐몬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눈이 녹은 물을 가르킵니다. 무더운 계절에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한 후에 숨이 차고 목이 마른 그 때, 눈이 녹은 차가운 물을 마신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사자가 어려운 일을 마치고 돌아와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라는 보고를 들은 왕이나 주인의 기쁨은 어떻하겠습니까? 본절은 그것을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에 비유하고 있는데, 저자인 솔로몬이 왕으로서 수 많은 사자들을 파견해 본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그는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오라고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하란으로 보냄을 받았을 때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여 리브가라는 훌륭한 신부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이렇게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과업을 이루시고 부활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역시 성부께 그런 기쁨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믿음직한 심부름꾼’의 역할을 다하여, 주님께 ‘얼음 냉수’를 드려 속을 시원하게 해 드린다면,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약1:12).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1:10)

잠언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3절은 ‘충성스러운 사자’를 묘사하고,  14절은 ‘책임감 없는 사람’을 언급함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극대화 합니다. 강우량이 부족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구름과 바람이 일면 사람들은 비가 내릴 것으로 기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름 가운데 간혹 비를 머금지 않는 구름도 있어서, 비를 내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의 실망감을 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자를 ‘비 없는 구름과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물’이란 대목입니다. ‘선물’은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물건 등으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선물한다’고 큰 소리로 자랑하는 모습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사기꾼은 선물을 주는 대신 오히려 귀한 재물이나 생명을 빼앗기에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은 은연 중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더구나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것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비 없는 구름과 바람’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잠언25:15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5절은 1-14절의 결론적 구절로서, 궁중 관리에게 ‘온유함’이란 미덕을 교훈합니다. ‘관원’은 재판관이나 왕궁에 있는 고위 관료를 의미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권력자들은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의도한 대로의 선한 결과를 얻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온유한 모습으로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많은 갈등이 내재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솔로몬  왕의 잠언임을 감안 하건데, 본절은 단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이 우러나온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잠언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 사례가 성경에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차갑고 모욕적인 말을 듣자, 오히려 인내와 겸손, 온유함을 잃지 않아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마15:21-28).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5:5)고 하신 뒤, 검을 들고 싸우지 않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우주를 상속받으셨습니다. 한편, 온유함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롬5:5).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 노력하고, 그 결과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품성 중 하나로 자리잡습니다(갈5:21,22).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온유할 있는 능력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15:1)

잠언25:16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6-27절은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 소재로 한 단락을 이룹니다 봉투의 윗면과 밑면을 접고 편지를 그 안에 집어 넣는 것 같이,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그 중 16-17절은 좋은 것이라도 과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는 교훈으로, 16절은 꿀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17절은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꿀’은 신이 내린 완전식품이라 할 정도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므로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토하는 이유는 꿀의 짙은 단맛과 함께 고도로 농축된 영양성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절에 등장하는 ‘꿀’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꿀’과 같이 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면 해가 되기에 절제의 미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이 그러하고 권력이 그러하며 명예 또한 그러합니다.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말처럼, 인격만큼 소유하고, 권력과 명예를 갖는 것이 실패를 방지하는 묘책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설정해 두신 한계를 넘어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 탐욕이 삶의 본질을 이루고 있고, 우리의 힘으로 이 탐욕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라!”(갈5:16). 그러면, 성령께서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마지막이 절제라는 열매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람을 살리는 과즙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잠언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7절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나, 교훈의 의도는 16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꿀’이 몸에 좋아 적당히 먹는 것은 좋지만, 과식하면 해가 되듯이, 이웃집을 왕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나치면 나타나는 부정적인 결과를 주의해야 합니다. 본절의 ‘이웃’에 해당하는 원어 ‘레에카’는 ‘친구’ ‘형제’라는 뜻도 들어 있어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포괄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 얼마나 지혜롭고 합당하게 처신하느냐는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때, 우정은 그 한 요소로서,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두는 분별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우정은 소원해지고 더 나아가 미움의 관계로 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잠언은 ‘지나치지 말아라’는 절제를 가르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우정, 사랑, 우애 등은 지속되고, 갈등과 반목은 제거되는 삶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익숙함은 경멸을 키우고, 사흘이 지나면 썩는 생선같이 손님도 그렇다”는 말이 알려주듯이, 경험을 통해 ‘이웃의 허용 한계’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단순히 이웃의 감정만을 살피며 수동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고 주님께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는 합당한 말과 처신을 하면서, 이웃을 도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는 충성스러운 섬김이 필요합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매일묵상(2023/8/14-18)

잠언25:9
이웃과 다툴 일이 있으면 그와 직접 변론만 하고, 그의 비밀을 퍼뜨리지 말아라.”(새번역).

8절의 ‘철저한 준비’에 대한 권면에 이어 9-10절은 ‘비밀유지’의 품격을 교훈합니다. 고귀한 인격은 승소보다 중요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이웃과 어떤 문제가 있어 다투거나 소송 사건 등으로 변론할 때 문제가 되는 사안을 벗어나,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 비밀 등을 들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사사건을 넘어 형사사건으로 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가까울 때는 좋게 행동하다가, 무엇인가 뒤틀려 버리면 해를 끼려는 완악한 마음을 갖습니다. 본인은 그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도리어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며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격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툼이 있을 시 먼저 주님 손에 그 사건을 맡기고, 비밀을 누설하면서까지 보복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면 절제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 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16:32).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의 영께서 계십니다. 얼마 전 억울하게 기독교 계통 조직의 대표의 직위에서 해제된 분이 있었습니다. 일단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고, 이사진들을 검찰에 고발하여 형사사건화 하자고 권고받았습니다. 물론 이사진들은 여러 문제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심히 갈등하고 있을 때 전화를 통해 함께 대화를 나눈 뒤, 형사적 고발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잠11:9)

잠언25:10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10절은 9절에서 준 경계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반부는 소송의 내용을 듣고 비밀을 누설한 자를 신실하지 못하며, 험담을 퍼뜨린다고 정죄하는 자로 재판관이 대표적이며, 후반부는 누설한 순간부터 누설자에게 돌아오는 수치스러운 평가(악평)에 관해 말합니다. 소송 중에,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사건의 논증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이해될 수 있지만, 인신 공격과 같이 소송과 상관 없는 상대방의 비밀을 폭로한다면 그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법정의 공의를 흐리려는 부당한 행동으로 비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듣는 자 중의 하나인 재판관과 배심원은 물론, 공의로운 판결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이 이 같은 비열한 행태에 대해 격분하고 비난할 것은 자명합니다. 그 결과 재판까지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 나오는 이유는, 그의 언행이 지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 지식은 재판 결과도 공의로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판상 소송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리 긴박한 경우에도 논지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삼가고, 쟁점되는 문제의 핵심만을 짚어감으로써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또한, 일상의 경우에도 이웃의 허물에 대해서는 입을 무겁게 가져가면서, 오히려 듣고 보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덕스럽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바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잠언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쟁반에 사과니라

11,12절은 ‘적절한 말과 책망의 수용’에 관한 잠언이며, ‘은 쟁반과 금 사과’라는 비유를 갖고 효과적으로 교훈합니다. 성경학자 키드너는 이를 “멋지게 말하면, 멋지게 받아들인다”고 요약하였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상황에 알맞게 잘 표현된 말”을 의미합니다.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의 원문은 ‘은쟁반에 금사과를 새겨 놓았다”는 말인지, “은쟁반에 금사과가 담겨 있다”는 말인지 불분명합니다. 더구나 ‘사과’에 해당하는 원어 ‘탐푸헤’는 오렌지, 석류, 모과, 살구 등으로 해석되기도 하여 문장 자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는 의견이 나뉘지만, 합당한 말은 이처럼 아름답고 귀하다란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쉽지 않아서, 분별력과 인격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성경의 예는 사사 기드온입니다. 그는 경우에 합당한 말을 통해 다툼을 종식시켰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족속으로 300명의 용사만을 이끌고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뒤, 도망가는 미디안 족속을 섬멸하기 위해 에브라임지파에게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뒤늦게 전쟁에 참여한 에브라임지파는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기드온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먼저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투었습니다. 이때, 기드온은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은 너희만 못하다”(삿8:103)고 말하여 그들의 화를 가라앉혔습니다.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온유하며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 (잠15:1,새번역)

잠언25:12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은, 들을 아는 사람의 귀에는, 금귀고리요, 순금 목걸이이다”(새번역)

본절은 11절과 함께, 바른 행동을 위한 지혜자의 책망을 ‘금귀고리와 순금 목걸이’에, 듣고 행동을 고치는 자를 금으로 장식한 귀에 비유합니다. 슬기로운 책망을 선하게 듣고 순종할 수만 있다면, 미인이 보석으로 꾸민 것처럼 아름다고 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금고리와 금사슬’처럼 희귀합니다. 양약고구 충언역이 (良藥苦口 忠言逆耳)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로써 이런 진리를 웅변합니다. 유대 선지자의 책망과 기적을 보고도 황금송아지 예배를 그만두지 못한 북왕국 여로보암 왕은 그가 죽자 그 가문 전체가 죽임을 당하였고,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에 불순종하였던 아합의 가문도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치려고 선지자 엘리야에게 온 아람 장군 나아만은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는 선지자의 말에 분노하였으나, 그 종들의 충고를 듣고, 마음을 고쳐잡은 뒤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씻고 완전히 치유를 받았습니다. 한편, 도피 중인 다윗이 갈멜의 부자 나발의 교만하고 무지한 행동으로 격분하여 나발의 가문을 죽이고자 하였을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을 맞아 적절한 말로 진정시킴으로 가족도 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살인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의 교훈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맺히는 이슬이요 채소 위의 단비’(신32:2)가 됩니다. 성경은 이 보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책망과 교훈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전7:5,새번역)

매일묵상(2023/8/7-11)

잠언25:3절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하늘…땅’이란 표현은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암시합니다. 어떤 왕이나 현자도 하늘에 올라가거나 땅 속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우주의 가장 미묘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궤뚫어 본 적이 없고, 우주의 신비 중 오직 일부분만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국가를 통치하는 왕의 마음을 신하들과 백성이 헤아릴 수 없어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비유입니다. ‘헤아릴 수 없다’의 원어 ‘엔 헤케르’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었지만, 본구절은 그 단어를 ‘왕의 마음’에 적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잠언은 왕의 통치를 묘사하고 있기 보다, 통치의 방법을 처방하려는 의도가 더 크게 담겨 있습니다. 왕은 마땅히 그렇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 왕(지도자)의 마음이 쉽게 읽혀 예측가능하다거나, 상상력의 부족이 드러난다면 그의 통치와 권력에는 치명적입니다. 신하와 백성들은 더 이상 그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지도자)은 각 분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탁월한 통찰력을 갖추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의 통치에 구현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뛰어난 왕(지도자)의 마음이지만, 그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영적인 사람들 보다는 못합니다.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고전2:15-16).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이 행하시는 섭리를 통찰하고, 왕에게조차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11:2)

잠언25:4,5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4,5절은 왕이 신하들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이  두 구절의 히브리 원문은 모두 ‘제하라’를 뜻하는 ‘하고’로 시작하여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4절은 은에서 찌기를 제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은이 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은에서 찌끼를 제거하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5절을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왕의 통치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왕의 앞에 있는 악한 자들(간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왕의 위는 의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의는 국가 번영의 필수적인 길로서, 의로운 왕은 백성의 신뢰를 받게 되고, 그 왕위는 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간신이 자신의 유익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왕을 이용한다면, 그 나라는 멸망으로 직행하고 오히려 왕이 권좌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본잠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먼저, 우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들로서(행9:15)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찌끼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해야 할 ‘짜끼와 불순물’은 옛사람에 속한 성품 즉, 탐심, 교만, 질투, 음란한 마음 등을 일컫는 것입니다(갈5:19-21). 또한, 우리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 행하신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할 책무가 있습니다(벧전2:9). 신실하게 살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 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잠언25:6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25:6-15절은 궁중관리(신하)를 위한 잠언의 10계명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경계(6-10)와 교훈(11-15). 이를 통해 솔로몬은 겸손(6-7), 철저한 준비(8), 비밀유자(9-10), 적절한 말과 책망의 수용(11-12), 책임성(13-14) 그리고 온유함의 지혜(15)를 가르칩니다. 신하가 왕 앞에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은 ‘겸손’으로, 6절은 두 가지 명령을 내리고, 7절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왕을 알현하는 신하들의 모임(조회, 잔치)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왕의 뜻에 합당한 질서를 유지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과시의 욕망을 어리석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왕 앞에서 드러내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는 왕궁에서 자기 보다 높은 사람이 서야할 자리에 섰다가 뒤로 물러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하로서 마땅히 능력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나, 이를 갖추었다고 교만하게 행동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행할 때 특히 하나님이 인사권이나 기타의 권한을 부여한 지도자의 앞에서 겸손하면,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아도,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지 않아도 왕과 다른 신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7절은 6절의 명령을 간직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부끄러운 결과의 하나를 보여줌으로써, 궁중관리들이 올바른 신하의 태도를 갖추도록 교훈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한 주님을 섬기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만유의 왕과 주님의 신하입니다. 여기에 본잠언의 영적 측면이 담겨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잠언25: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본절은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고 경계한 6절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솔로몬은 ‘..보다 낫다’는 비교구문을 사용하면서, 두 가지 경우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경우이며, 둘째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켜 낮은 데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당연히 전자가 낫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왕이 그 능력과 자질을 파악하고 그를 직접 높은 위치로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겸손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벧전5:6,7). 본절의 교훈은 예수께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자, 혼인잔치를 상정하여 가르치신 유사한 형태의 교훈에서 반복됩니다(눅14:7-11).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고 한 마디로 요약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당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 다시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자 성부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분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뜻과 상관 없이 권세와 재물을 쌓아 스스로 높아지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려는 욕망을 미워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길입니다. 후자의 길이 지혜요 영생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잠언25:8
너는 급하게 소송하지 말아라. 훗날에 너의 이웃이 너를 이겨 부끄럽게 만들 때에, 네가 어떻게 할지가 염려된다”(새번역).

본절은 송사에서 피해야 할 태도를 교훈합니다. 여기서 ‘다투다’는 말다툼 보다도 ‘변론하다’ (사3:13)와 같이 법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기에 새번역은 ‘소송’으로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남을 성급하게 고발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충분한 준비를 거쳐 신중하게 소송하지 않으면 패배할 뿐 아니라 명예까지 실추되기에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는 것이 지혜로우며(17:14), 설혹 법정에 가더라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신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판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법관은 오직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여 공정한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상의 재판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재판규범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며, 재판장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증거에 입각하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신중히 살펴보고 심판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죄 사함 받고 심판을 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주어 행동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완악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까지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5:25,26)

매일묵상(2023/7/31-8/4)

잠언24:28
너는 까닭 없이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8절은 위증과 거짓말에 대해 경계하는데 재판정이 그 배경입니다. ‘까닭없이’의 원어 ‘힌남’은 ‘무고히, 정당성 없이’란 의미로 아무 근거없이 무죄한 자를 해치는 그릇된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짓된 증언, 정당성 없는 증언을 금지하는 말로써, 26절(적당한 말로 대답하라)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긍정문으로 권면하였다면, 본절은 부정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위증과 관련하여 모세율법은 분명히 규정합니다: 정직한 증언 의무는 레위기5:1절, 위증 금지는 출애굽기20:16(십계명 중 9번째 계명)에서 규정하고,  신명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으로 모함’할 경우 모해목적을 따라  처벌하도록 규 정합니다 (신19:18,19). 본 잠언은 단순 위증이 아니라 상대방을 해할 목적으로 사적인 이해 관계나 원한 때문에 재판석상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을 말하기에 신명기의 규정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해위증죄). 대한민국의 형법 역시 위증죄를 단순위증죄, 모해위증죄, 허위감정·통역·번역죄 등 범죄로 규정 하여 처벌합니다(형법152-154조). 다만, 형법상 위증죄는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에 한하여 성립하는 일종의 신분범이므로, 수사단계에서 선서하지 않은 증인이나 참고인은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편, “네 입술로 속이지 말라”는 후단의 규정은 비단 우리가 공적인 증언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웃에 대한 무고한 험담이나 풍설을 퍼뜨리지 말고(출23:1) 사랑 가운데 참된 것들만 말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사랑은)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13:5).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이솝 우화의 하나입니다. 학에게 초대받은 여우는 자신의 음식이 길다란 유리병에 담겨 있어 먹지 못하고 그만 굶고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여우는 학을 초대하고, 맛 있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학에게 주었습니다. 학은 먹지 못하고 여우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 하였습니다. 손해나 모욕을 당한 경우 되갚아주려는 인간의 욕망을 잘 묘사하는 우화입니다. 본 잠언은 이 같은  분노 본능을 참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그 뿌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평생 법원을 출입하며 수많은 소송 사건을 지켜 본 변호사는 “인간의 내부에는 뿌리깊은 증오심이 숨어  있어 우리들 대부분은 누군가로부터 피해나 상처를 입을 경우 거의 무의식적으로 분노와 함께 복수의 마음을 품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와 복수의 심리는 자기가 당한 몇 배를 갚아주어야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레24:20)라는 재판상 동해보복법을 규정하여 국가 형벌권을 제한하면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레19:18)고 규정하였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라” (롬12:19;신32:35) “네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는 가르침은 여기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우주의 통치자요 재판장이신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금생과 내생에 천부께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내일은 본 잠언의 성경적 예를 보겠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통상 사람들은 노력이나 지혜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을 믿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남방 땅으로 내려갔을 때, 큰 기근이 닥쳐왔고, 이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나 이삭의 때에 또 다시 대 기근이 덮쳤습니다. 이삭은 필사적으로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자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고, 원주민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였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이삭에게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을 파서 얻었습니다. 건조하여 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 우물은 매우 귀하였기 때문에 그랄 목자들은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우물을 팔 때마다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다투지 않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고 또 다시 물을 얻습니다. 주님은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이삭의 삶을 본 것은 주님만이 아닙니다. 블레셋 족속 역시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뒤,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자고 먼저 제의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잠언24:30-34
게으른 사람의 밭과 지각이 없는 사람의 포도원을 내가 지나가면서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널려 있고, 엉겅퀴가 지면을 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생각하고, 교훈을 얻었다.”조금만 자야지,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하면,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새번역)

이 구절은 게으론 자에 대한 풍자로서, 6:10-11절의 반복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 중 하나가 게으른 사람입니다. 밭 일은 고되기에, 게으른 자는 일하지 않으려고  ‘거리에 사자가 있다’는 등 많은 핑계거리를 댑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방치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모두 가난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 잠언이 상징하는 게으른 자는 농부입니다. 현자가 지나가다 보니 그 농부는 게을러 밭을 돌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혀  농작물은 자라나지 못하였고, 둘러싼 돌담 역시 무너졌습니다. 교훈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자신의 일에 게으른 사람은 수확할 것이 없어 가난해질 것입니다.현자는 이를 예기치 않게  쳐들어 오는 강도나 군대에 수탈당한 것에 비유하여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한편, 본잠언의 농부는 나태로 인해 열매맺지 못한 모든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우리 역시 역시 물려 받은 유산이나 선택한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등 일하지 않을 여러 핑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여 감사와 겸손의 태도를 갖추고  자기 일과 위치에 충실하면 이삭처럼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25:1,2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25:1절은 잠언의 5번째 표제(1:1;10:1;22:17-21;24:23)로서, 이하 29:27절까지  솔로몬의 잠언을 유다 왕 히스기야(BC 715-687) 시대에 편집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약 250년의 차이가 있고, 히스기야는 경건한 왕으로서 후손들을 위해 편집한 것 같습니다.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왕과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숨겨 놓으시고(섭리), 왕들은 그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헤아리기 힘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수수께끼를 내주시고,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를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마침내 답을 찾았는데 그것은 감옥에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란 수수께끼의 답을 얻지 못하였다면 애굽은 기근으로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왕(지도자)은 하나님의 섭리를 연구해서 알아내야만 할 책무가 있습니다. 성경학자 클립포드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넘는 수수께끼와 퍼즐로 가득차 있지만, 왕은 그것들을 풀고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야 한다.” 왕이 그 섭리를 깨닫게 되면- 오늘날로 말하면 바른 정책을 수립하면 –  백성들이 잘 살고 하나님과 왕(지도자)은 높이 존경받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지도자들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딤전2:2,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