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5/22-26)

잠언 22:26,27절
“이웃의 손을 잡고 서약하거나,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아라. 너에게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네가 누운 침대까지도 빼앗기지 않겠느냐?”(새번역)

잠언은 보증을 서서, 타인의 빚에 얽혀들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고대의 보증은, 보증인이 채무자의 손을 잡고 채권자 앞에서 서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자는 경고합니다. 만약 자기가 보증을 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야 하는데, 그때 재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침상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신은 맨 땅이나 마루에서 자게 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자신과 가족의 몸을 노예로 팔아 보증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이는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참고 6:1–5; 11:15; 17:18; 20:16).  한편,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권고하며,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선언하나(19:17), 보증은 예외입니다. ‘관대하다’는 말은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나, 보증인은 거저 주는 관대함 대신에 채무자가 변제를 하여 자신을 보증채무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보증인은 늘 불안합니다. 특히 잘모르는 낯선 사람을 위해 서는 보증이 그렇습니다(20:16). 그러나 사회에는 대출에 대한 수요와 함께 보증에 대한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신용과 위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이런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돈을 버는 은행업, 보증업 등은 법제화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 비상한 발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업의 영역에서는 본잠언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의 보증을 선 사람은 자기의 옷을 잡혀야 하고, 모르는 사람의 보증을 선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잡혀야 한다” (잠언20:16,새번역).

잠언 22:28절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지계석은 토지의 경계와 그 소유주를 알려주는 경계선 돌입니다. 고대 근동은 토지가 기반이된 농업 사회로서 지계석은 중요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래 제비를 뽑아 각 지파별로 토지를 분배받았고, 영원히 팔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나봇의 포도원).  만약 가난  등의 이유로 타인에게 귀속된다면, 모세 율법은 친족이 되사올 수 있게 하는 고엘제도와 더 나아가 희년이 되면 반드시 원 소유주에게 그대로 귀속되게 규정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토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백성들은 균일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하나님만 섬기며 상호간에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래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받은 땅은 그대로 후손에게 대물림되어 갔습니다. ‘지계석’은 이런 토지 소유권을 확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증표로서, 지계석을 옮기는 행동은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신27:17). 그러나, 악인은 지계석을 한 번에 조금씩 이동시켜 마침내 약자의 밭을 상당부분 잠식하는 묘수(?)를 발견합니다. 원한에 사로잡힌 고아와 과부를 누가 돌보아줄 것입니까? 잠언은 이런 악인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경계선을 지켜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15:25). 물론, 대행자는 왕이지만, 주님 자신도 섭리 가운데 도우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주님은 과부처럼 불의를 당하여 기도할 때 신속하게 응답하실 것을 믿고 인내하라고 가르치시셨음을 유념해야 합니다(눅18: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8).

잠언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앞에 것이요 천한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본절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맡은 일을 능숙하게 해 내어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라는 권면입니다. ‘보았느냐’는 능숙한 사람을 간파할 정도로 예리한 분별력을 지녔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능숙한’ 이란 신속하면서도 숙련된 일꾼이 지닌 뛰어난 재능을 의미하며, 그는 왕 앞에 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천한 자’앞에 선다는 말은 그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여 무시당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잠언의 이 교훈은 인간이 사는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나 참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노력하여야 합니다. 벤자민 프랭크린의 어머니는 본절을 벤자민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서  행하게 하였고, 벤자민은 그 당시 최첨단인 인쇄술에서 탁월한 기술을 갖추고  늘 이를 자랑하였지만, 그는 이신론자이지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한편, 어떤 회사의 인사팀장은 가능하면 기독교인을 신입사원으로 뽑지 않았는데, 열심인 신자일수록 회사에 대한 애정도 책임감도 없어 촌각을 다투는 일에도 교회를 핑계로 퇴근해 버리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예배도 좋고 일도 좋습니다. 이 모든 일에 균형을 잡을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이 이방 사회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총리가 된 것은 신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일에 능숙하고 민첩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왕앞에’ 서도록 노력해야만 하며, 또 성경은 우리를 위해 좋은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 23:1-3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목에 칼을 것이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

본절은 관원의 식사 초청 시 긴장하여  의도를 파악하라는 현자의  7번째 교훈입니다. ‘관원’이란 ‘다스리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평민이나 하급관리가 아닌 통치자를 보좌하는 궁정의 고위직을 말합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대단한 권세와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에는 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으므로, 제자들은 잔치에 초청받은 속내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화려한 대접에 마음이 팔려 경솔히 행동한다면,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자나 권세 있는 자들은 결코 공짜로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제자는 마땅히 숙고하면서 초청에 응해야 하고, 식사 시에도 ‘목에 칼을 두라’는 현자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관원의 면전에서 식탐을 부리면 관원의 속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어 올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식탐 때문에 리브가와 야곱에게 이용당하였고 결국 에서를 축복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따라서, 현자의 권고에는 음식에 대한 하찮은 식탐 때문에 정의를 그릇치기 보다는 네 목을 긋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를 상기시킵니다. (1) 탐내지 말라는 계명과, (2) 범죄하게 이끈다면 몸의 일부라도 잘라내겠다는 결의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30).

잠언 23:4,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본절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권면합니다. ‘애쓰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힘써 일하다’ ‘곤비하다’라는 뜻으로, 본문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지칠정도로 과도하게 노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가난이 나쁜 것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부자와 행복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와 기회라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재물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안되고(전9:11), 하나님이 재물얻을 능력을 주셔야만 가능함을 깨닫는 것입니다(신8:18). 또한, 부자가 재물을 맡은 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 재물은 독수리처럼 날아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를 목표로 산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돈에서 안전과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 본성이기에 인간은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주인 삼은 뒤에, 비로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안전을 추구할 것입니다 (마6:24,25). 그러므로, 부가 현명한 노력, 즉 부지런히(10:4), 절제하며(21:17),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획득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축복입니다(3:16).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마음으로 획득된다면, 부는 저주가 됩니다(10:2;11:4). 우리는 늘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매일묵상(2023/5/15-19)

잠언22:21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73년의 인생을 살며 3000명의 제자를 둔 공자의 입학금은 “한 다발의 건육”이었고, 교과목은 ‘육례(六禮)’라는 현실교육이었습니다: 예절, 음악, 활쏘기, 말 타기, 글쓰기, 셈하기 등 6가지 전문 과목으로, 평민들도 배워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논어는 동양의 리더들을 키워냈습니다. 물론 <논어>에는 신에 대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아, 성경과는 그 출발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같은 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근원에서 어떤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22절부터 나올 ‘서른 가지 교훈’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둘째는 고결한 인격입니다. 부에 대한 갈망, 부자의 호의를 받으려는 자세, 술취함, 부모에 대한 불순종, 성적인 부도덕, 기타 이 같은 행동들은 확실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서른 가지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추가적으로, 본절은 그들을 보낸 자들( 부모나 후견인)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부합된 삶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잡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갈대아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왕을 섬기도록 훈련받았습니다(단1:3-4).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은 모세율법을 아는 오직 이 네 사람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기도하며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잠언22:22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22절과 23절은 한 쌍의 교훈으로, 22절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금지하고, 23절은  그릇 행동한 자는 재판장이신 주님께 목숨을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먼저 22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자를’에 해당하는 원어는 ‘딸’이며,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하반절의 ‘곤고한 자’란 히브리어 ‘아니’의 번역으로, 누군가에 의해 부당하게 압제와 고통 당함을 뜻합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된 출입구로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현자는 경제적 측면이나 사법적 측면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약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도리어 보호하고 변호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당연하나,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경제적 불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여 거래과정에서의 불공정성을 막으려고 노력하며, 재판과정에서의  불의를 막기 위해 헌법에서조차 약자 보호규정을 두고 있지만, 현실은 힘있는 자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혹시 기준이 되는 법률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고려할 때,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의 문제까지도 처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법률과 제도만으로는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담겨야만 비로서 온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들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잠언22:23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새번역)

23절은 약자를 탈취하고, 압제하는 자를 처단하시는 우주의 재판장을 밝힙니다.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 지식은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만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을 통해 이방민족들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심판 집행은 섭리 가운데 숨겨져 있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섭리라는 도구 전에, 국가라는 질서를 세우시고 범죄를 인간이 다루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 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롬13:1)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권력집단의 범죄는 매우 심각하나 국가 자체에서 다루기 쉽지 않아서, 심판의 섭리가 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섭리적 심판을 통해 이들을 몰락시키시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는다는 것이 본잠언의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 통치자 아합 왕이 범죄하자, 주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범죄한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켰습니다 (왕하9장,10장). 한편, 하나님의 정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주님을 재판장으로 정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행18:31). 성도에게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약5:8,새번역).

잠언22:24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아라.”(새번역)

좋은 보금자리를 놓고 싸우다 진 바닷가재에게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을 주입하면, 다시 힘을 내어 승자에게 무모한 도전을 한다고 합니다.  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지만, 바닷가재는 호르몬의 작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그런 행태가 습관화 인격화 되어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현자는 제자들에게 이를 경계합니다. 현자가 보기에, ‘성급한 사람’과의 교제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이라, 강도짓(22,23)을 하여 파멸당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은 약자를 압제하는 자를 심판하여 생명까지 몰수하시는 반면, 성을 잘내는 사람의 길에는 자기파괴의 함정을 설치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급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주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교만하며 경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1:20).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분냄’이란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하나로,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며(갈5:21), 이웃에게도 회피 대상이고, 경멸을 받습니다. 문제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래의 심판이 뻔히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친구나 배우자 등을 선택할 때 신앙의 요소만큼이나 인격의 요소도 이처럼 중요합니다. 24절의 교훈은 당연하나, 25절은 좀 더 큰 이유를 알려줍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29:1)

잠언22:25
네가  행위를 본받아서 올무에 걸려 들까 염려된다.”(새번역)

‘성을 잘내는 사람’이란 ‘히브리어에서 ‘분노의 사람’이란 뜻으로, 현자는 제자들이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제자들 역시 쉽게 화를 내는 사람과 동행하면 그와 유사한 성격으로 발전해 나갈 우려와 자신을 지킨다고 하여도 타인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연류되어, 뜻하지 않는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좋지 못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악(惡)에 물들게 된다(근묵자흑)’는 교훈이나, 공자가 말한 ‘지란지교’도 같은 내용입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향기 그윽한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향기는 맡을 수 없게 되지만, 자연히 그에게 동화되어 착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치 악취가 풍기는 절인 어물을 파는 가게에 들어간 것과도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악취는 맡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에게 동화되어 악한 사람이 된다.” 성경의 사례입니다. 여호사밧은 경건한 유다 왕이지만 북왕국의 악한 왕 아합 과 연혼하여 큰 위기들을 겪습니다.먼저, 아합 왕의 요청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 왕과 전쟁을 할 때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은 화살에 맞아 죽었으나,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후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경책을 받았습니다. 더 문제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그 아들 여호람은 아주 악한 왕이 되었으며, 악한 여자 아달랴의 구데타에 의해 유다 왕국은 멸망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못된 사람은 입술을 잘못 놀려 올가미에 걸리지만 착한 사람은 곤경에서 벗어난다.”(잠언12:13,공동번역)

매일묵상(2023/5/8-12)

잠언22:18
“(
왜냐하면)이것을 속에 보존하며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원문은 ‘키-왜냐하면’로 시작하여, ‘지혜자의 말씀을 들어라’는 권면(17절)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약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두 가지 유익한 결과를 낳습니다: (1)자신의 아름다운 인격, (2) 지혜를 전하는 원천. 이어 비유로 소화기관이 사용됩니다. ‘네 속’의 문자적 의미는 ‘네 창자’이며, ‘이것을 네 속(창자)에  보존한다’는 표현은, 교훈들을 잘 소화하여 인격을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또, ‘네 입술 위에 함께 있다”는 의미는 인격으로 통합된 지혜의 말씀을 표현할 능력을 힘써 갖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후단에서 ‘아름다우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17, 18절은 인격을 가꾸는 방법과 그 효과를 말합니다. 먼저, 지혜의 말씀을 귀로 잘 듣고,  마음으로 묵상하며, 더 나아가 간절히 사모하고 열망함으로써 인격화(내재화)시킨 후, 자신만의 지혜의 표현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인격이 형성되고, 타인에게 교훈을 전하는 지혜의 또 다른 원천(지혜자)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힘써 아름다운 말을 연구하여 잠언 3천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 중 으뜸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보배를 담기 위해 택함 받은 거룩한 질그릇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의 향기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그릇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잠언22:19,20절
“이는 네가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건전한 충고가 담긴 서른 가지 교훈을 써 주지 않았느냐?”(새번역)

19절은 제자들이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는 것”을 교훈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스승은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자신의 비법을 ‘특별히 알려 준다’고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그분 앞에서 신실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이자 영생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그러면, 현자의 가르침이 하는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핵심은 교훈의 궁극적 저자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마음을 다하여 의뢰하게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입니다. 현자의  교훈들, 즉 22절부터 등장하는 ‘건전한 충고가 담긴 서른 가지 교훈’은 이미 현자의 삶에서 그 가치가 검증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마음에 간직하여 행한다면 역시 큰 유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은 필수적입니다. 19절은 ‘오늘’이라고 이 사실을 힘주어 말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간직한 바로 지금 실천해야 하며, 이는 고대의 교훈을 현재와 미래 세대에 연결시켜주는 고리입니다. 잠언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주님을 능동적으로 신뢰하는 삶은 고대 근동의 현자들과 솔로몬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이란 놀라운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은 현자의 가르침을 포괄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애게 온전한 삶의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유대인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시키는 표지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시편148편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새번역)

본시는 개인과(146편) 공동체(147편)의 찬양을 넘어, 모든 창조물로부터 드려지는 창조주에 합당한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할렐루야(1a)
    B 하늘에서 찬양(1b-6)
    C 땅에서 찬양(7-14b)
 D 할렐루야(14c)
 “주님을 찬양하여라”는 동일한 명령이 하늘(1)과 땅(7)에 내려지며, 찬양의 요청마다 시인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5-6,13-14). 하늘의 찬양이 합당한 것은 주님(야훼)은 만물을 창조, 유지, 통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5-6). 또 그분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님으로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온땅이 찬양을 드리는 것 역시 마땅합니다. 실로, 시인이 믿음의 눈을 뜨자 광풍조차도 그분의 말씀(명령)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8). 선지자 요나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1:9)는 고백과 함께 던져졌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되어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 한 바 있습니다. 자연과 언약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인입니다(9-13). 이것이 신자가 갖고 있는 지혜와 특권으로서, 세상은 두려워 하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내하고, 그 영광스러운 섭리를 경험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따라서, 시인은 끝 절에서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은혜와 영광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시편148:14).

시편149편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새번역)

본시편은 하나님의 새 일, 즉 장래에 도래할 그분의 왕국과 성도들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쁨에 가득차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할렐루야(1a)
        B 주님의 새 일 찬양-구원(1b-4)
        C 주님의 새 일 찬양-승리(5-9b)
    D 할렐루야(9c)
시인은 주님이 행하실 새 일로 인해 ‘춤,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합니다. 그것은 구원(1-4)과 승리(5-9)로 현실화 될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1)은 성전에 모이는 ‘시온의 주민’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들(2)의 상징입니다. 신약에 오면,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고 성령께서 중생시킨 자들이며, 구원에 대한 감사함을 갖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4;요1:12,13). 그들은 그들의 ‘왕’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 역사를 보면 야곱의 육신의 후손들이 세운 다윗 왕국은 이미 멸망하였으나, 그 왕국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통치 때문입니다(사9:6,7). 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시대인 현재는 복음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면서 확장됩니다. 성도들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모두 다 응답받는 특권(요15:16)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시킬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6; 눅10:19).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은 물론 악한 천사들도 심판하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마19:28). 본시는 이를 믿음으로 증거하고(6-9), 이 또한 우리 소망 중의 하나입니다..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시편149:9).

시편150편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절)

마지막 시편입니다. 세상을 이긴 성도들(149:5-9)이 ‘구속받은 자’의 찬송을 부르는 장면으로, 소리,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약, 퉁소, 제금 등이 총 동원되었습니다. 150편은 노래하며,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0) 예언하고, 요한계시록은 그 완전한 성취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계19:3; 5:8–14; 7:9–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도성인신하셨고, 죽고 부활·승천하사 지금 불복종하는 모든 것을 복종시킴으로써 구속사를 완성하고 계십니다 (사45:23;빌2:11). 그러므로, 예배 시 우리의 찬양은 이런 만유의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어야 마땅하며, 이것이 복음이 간직한 영광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과 축복에 비한다면, 애굽에서의 구원, 가나안 땅을 주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그 사랑은 상징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두 돌판(십계명), 성막, 성전 등의 파괴, 범죄로 인해 영원히 약속된 가나안 땅에서의 추방, 또 영원한 약속을 가진 다윗 왕조의 멸망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 복음이 계시하는 여러 진리들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부활, 마음의 할례 등 -은 이것들의 실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본시편의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찬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불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150:6).

매일묵상(2023/5/1-5)

잠언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본절은 이른바 ‘사랑의 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얽히다’는  ‘줄로 단단히 매다’라는 의미로,  아이의 마음에 단단히 매어진 ‘미련한 것’을 채찍으로 쳐서 제거하도록 교훈합니다. 물론, 그 전에 타이르고, 모범도 보이는 등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가르쳐야 하나, 미성숙한 아이의 몸에 가해진 충격은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징계의 채찍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징계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의 인격을 다듬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울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하지 않아 아이가 잘못되는 것과,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자녀라는 은사를 지혜롭게 교육하여 많은 의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가정에서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 나라의 본질은 그분의 계명이 실천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한편, 본절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성인이나, 정신적,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비추어 볼 때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격에 견고하게 묶여져 있는 영적 우둔함, 징크스에 대한 두려움, 죄의 성향들을 제거하기 위해 강한 채찍이나 회초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징계 후에는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어질 것이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7:14).

잠언22:16
이익을 탐해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과,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22:1-16절의 주제는 ‘부와 도덕’에 관한 교훈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재물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신8:17,18). 따라서 겸손히 그분의 뜻(도덕)을 행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15-16절은 이 단락의 결론이며, 아이들에 대한 바른 교육(15)과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주님의 주권(16)을 교훈합니다 . 만약,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많은 재물 보다’는 ‘좋은 이름’을 추구해야 합니다(22:1). 사람이 부를 증식시키고, 세력을 확대하는 두 가지 방법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그 반대의 결과를 말합니다: “가난해질 뿐이다.” 왜 이런 역설이 성립할까요? 부자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부자의 호의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아주 냉정하게 차 버립니다. 따라서,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한 그는 가난해지기 마련입니다. 또, 가난한 자를 학대하여 그들의  삶에 긴요한 재산을  빼앗는 자는 선물이 필요 없는 부자에게 주는 사람과 같은 바보입니다. 그는 주님의 심판의 칼을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31). 주님은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가난한 자를 보호하시는 ‘도덕적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입니다. 따라서 권력, 명예, 재물을 가질수록 주님을 경외해야만 한다는 교훈이,  22:1-16 단락의 결론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잠언22:17절
“17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0:1-22:16은 솔로몬  잠언의 모음집이지만, 22:17- 24:34은 익명의 현자들의  교훈집으로, 주님(야훼)을 경외하는 실천적 지혜의 삶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2:17-21), 30개의 교훈(22:22-24:22), 그리고 6개의 추가적인 교훈(24:23-34)으로 되어 있습니다. 17절의  ‘지혜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문구는, 전통적으로 전해진 익명의 현자들의 가르침이며, 이집트를 비롯한 근동의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 기원이 외국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은 주님 중심의 이스라엘의 지혜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한편, ‘지혜자의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은 바로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은 어느 현자가 전통의 교훈들을 묵상하고 실천하여 자기 것(지식)으로 만들고 제자들에게 전달하면서 순종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둘지어다.’ 우리는 지혜의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그 가르침에 몰두하여야 합니다(1:8). 그러나 모든 지혜의 말씀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116). 실로,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죄인을 구원시키고 믿음으로 신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삶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본절을 포함한 모든 현자의 가르침의 목적이 여기(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시편146편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1절, 새번역)

146편에서 150편까지 다섯 편의 시는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과 끝을 맺으면서, 오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찬양(146편)이 공동체로(147편), 그리고 하늘과 땅으로 확대 되고(148편), 진정한 찬양의 주체인 영광을 얻을 성도들의 찬양(149편)에 이어, 호흡이 있는 모든 것들의 찬양(150편)의 촉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46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초대(1–4)
      B      창조주 하나님(5–6)
         C      보존하시는 하나님(7–9)
      B′      왕이신 하나님(10a)
    A′      찬양의 초대(10b)

‘할렐루야- 너희들은 야훼를 찬양하라’는 외침은 복수형이지만, 곧 단수로 바뀌어 시인의 개인적 찬양의 이유가 열거됩니다. 죽을 인간은 의지할 가치가 없으나(3-4),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변치않는 분이기에 신뢰해야 합니다(6). 주님은 긍휼과 정의를 베푸시며, 갇힌 자를 해방시키며, 맹인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7-9). 끝으로, 시인은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대대로 통치” 하시기에 참으로 그분을 찬양하자고 초대합니다(10). 아직 현실은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지만, 마지막 부활의 새창조 때에는 이 시편의 찬양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승천하셨고,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심’(눅1:33)으로 이 찬양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편146:5,새번역).

시편147편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합니다. 먼저, 주목할 표현은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입니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마땅한 일이란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들게합니다. 시편기자가 창조, 보존, 구속의 사건들을 묵상해 보니,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분이시며, 그분에 대한 찬양과 찬송은 ‘마땅한 일’이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7, 12절에는 각각 찬양의 선포가 나오며, 시는 이를 중심으로 3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6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세실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위대하신 분인 동시에, 도덕적 분별력을 가진 백성을 돌보시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7-11절에서, 시인은 그분이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도 먹이를 공급하시는 넉넉한 분이므로, 당신의 백성들은 군대(기병과 보병)나 힘이 아니라,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인자를 바라고 살기 원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12-20절은, 창조세계를 통제하는 핵심적 요소는 그분의 말씀임을 묵상한 뒤, 이방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분의 ‘법도(말씀)’를 간직하는가의 여부임을 밝히면서, ‘할렐루야’로 끝맺습니다. 본시에서 흐르는 주제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적 재물, 명예, 권력, 지혜를 가진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자들입니다 (중생).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시편147:19,새번역)

매일묵상(2023/04/24-28)

잠언22:12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새번역)

본문에서 ‘지식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다아트’는 ‘지식’ 혹은 ‘지혜’를 의미하는 추상 명사로서, ‘지식’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을 보호하사,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거짓된 말로 지식을 왜곡하려 시도할 때, 오히려 그의 말을 무너뜨리고 지식을 견고히 세우십니다. 한편, ‘신의가 없는 사람’의 원어 ‘보게드’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신실하지 못한 부부 관계를 의미하며 (말2:14), 이는 주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본절의 ‘보게드’ 역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의가 없는 악인을 가리킵니다. 그런 자는 어떤 말을 하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그는 패망할 것입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믿고, 30Km 떨어진 요단 강으로 가서 7번 몸을 담그자 그의 나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냥 시리아로 가지 않고 선지자에게 와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흙을 싣고 떠났습니다. 이를 분하게 여긴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가 선지자가 요청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집에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엘리사 앞에서 여전히 거짓말을 하자, 그는 엘리사의 저주를 받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잠언의 경고가 늘 성취되지는 않지만,  최후의 심판 시에는 확연히 성취될 것을 믿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잠언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13절(게으른 자)과 14절(음녀)은,  ‘신의가 없는 사람’(12절)의 예입니다. 게으름 자체가 죄이지만,  쉽게 돈을 벌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죄에 빠질 우려가 큽니다. 그러나 그 게으른 자는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깁니다”(16:16). 그는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을 수  많은 핑계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13절은 그 중 하나로서,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자라는 ‘놀라운 핑계’를 밝힙니다. 물론, 그 당시 삼림에는 많은 사자가 있어, 밭이나 들에서 종종 사자를 만나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 한복판에 야생의 사자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거리’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사자’이기에, 지금 잠언은 ‘게으른 자’의 말에 담긴 거짓을 폭로합니다. 만약 밭에 나가 사자를 만나는 것이 싫으면, 장사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집을 세워야만 합니다(창3:17-19). 사람의 모든 수고에는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위험이 클수록 보답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핑계에 안주하고 일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수고에 의지해 살아야 하기에, 사자뿐만 아니라 전쟁, 전염병, 질병 등 일하지 않을 ‘환상적인 구실’을 계속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런 게으른 생활 방식 때문에, 그의 인생(독신)이나 공동체(지도자) 그리고 가정(결혼)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게으름은 물론, 불신앙과 두려움으로 핑계거리를 찾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언26:14)

잠언22:14절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23:27절에서는 “음녀는 깊은 구덩이다” 하여,  음녀 자신이 ‘깊은 함정’으로 묘사되나, 13절은 “음녀의 입”이 깊은 함정이라 말합니다. 이 치명적인 여자는 이미 2장, 5장, 6장,7장, 9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었으며, 본절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여사냥꾼으로 등장시키는바, ‘깊은 함정’은 바로 그녀의 입에 있습니다. 달콤한 ‘말’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은, 불길한 위험과 회복할 수 없는 파멸을 숨긴 덫입니다. 잠언 2장에서 밝힌 그녀의 정체는, 거리 거리를 다니며 청년을 유혹하는 존재였습니다. 그 음녀가 사람을 해친다는 사자보다 위험한 것은, 야생의 사자가 다닐 수 없는 성곽 내의 거리를 활보하는 매우 위험한 맹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규정을 두셨지만(출20:14), 본잠언은 간음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즉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란 표현 자체가, 주님의 명백한 심판의 색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간음자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음녀의 깊은 함정에 빠졌을 때입니다. 한편, 23:28절에 가면 그녀의 이미지는 사냥꾼에서 ‘강도’로 변합니다. 이 두 개의 묘사를 통해, 그녀의 손아귀에 잡힌 자는 모든 재산과 심지어 귀한 생명까지 빼았긴다는 경고를 듣게됩니다. 대표적인 성경의 예는 삼손과 들릴라입니다. 삼손은 음녀 들릴라의 함정에 빠져 원수에게 잡혔고, 두 눈을 잃은 것은 물론, 명예와 생명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특히 조심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딤후2:22).

시편144편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13)

144편은 140-143편의 칠흙같은 밤을 지나 오래 기다렸던 여명을 노래합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1-4)과거의 구원, (5-11)현재의 건지심, (12-15) 미래의 번영. 먼저, 1-4절에서 다윗은 과거의 구원을 회상하며 찬양드립니다. 다윗은 드디어 왕좌에 올랐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잘 것 없는 자신에게 베푸신 그 선하심에 놀라워 합니다. ‘반석’은 불변성을, ‘피난처’는 보호하심을, ‘요새’는 둘러싸는 힘을, ‘산성’은 접근 불가의 안전을, ‘방패’는 공격의 순간에 보호하심을 각 의미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구원자라는 진리를 외치고 있습니다(참고18:2). 둘째로, 5-11절에서 다윗은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건져달라고 간구합니다. 5-6절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18:9-17절과 유사합니다. 과거에 구원을 받아 찬양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만, 현재 위험은 계속되고 있으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였습니다. ‘반석과 방패’라는 믿음의 고백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은 다윗은,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서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한편, 오른 손은 맹세를 할 때 사용되었기에, ‘거짓의 오른 손’이란 원수들의 신의 없음을 표현합니다. 끝으로, 12-`15절에서 다윗은 미래의 번영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 새롭게 왕이 된 다윗은 가정, 경제, 그리고 국가의 축복을 구하면서 주님의 백성임을 생각하고 번영을 확신합니다. 이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하는 모델이자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백성이 이리 되니, 아, 복스러워라. 야훼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백성, 참으로 복스러워라.” (시편144:15 공동번역)

시편145편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절)

본시편은 마지막 알파벹시로서(21절),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도입부(1-2),, 주님의 위대하심(3-7), 은혜로우심(8-16), 의로우심(17-20)을 노래하는 본문,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자는 결론(21)의 구조입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3-7)과 은혜로우심(8-16)을 함께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이 두 속성은 그분의 창조물에 모두 공존되어 있습니다. 태양은 매우 거대하지만, 자그마한 지구 역시 만드시고 그 태양의 빛과 열기로 생물이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16). 구속사를 보면, 홍해를 가르시는 등 위대한 능력으로  야곱의 후손들을 구속하여 내신 그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십니다(8; 출34:6-7).  백성들의 황금송아지 예배를 참으시고, 다시 두 돌판에 십계명을 적어 주셨습니다. 다윗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신 동시에 위대하십니다(17). 그러므로,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두  보호하시지만, 악인은 다 멸하실 것입니다(18-20). 그분의 이 속성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과거). 한편, 왕으로 등극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불순종하는 모든 것들을 복종시키고 계시며(현재), 마지막 날 사망을 멸하시고 우리를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미래).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다서25절)

매일묵상(2023/4/17-21)

잠언22: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랍비들의 격언 모음집’은 관대함, 겸손,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3대 특질이라고 말하는 바, 본 잠언에서 ‘선한 눈’이라 함은 ‘관대한 사람’을 말합니다. 관대한 사람은 8절에 언급된 악을 뿌리는 사람과 대조됩니다. 전자는 자신의 소유조차 남에게 주는데, 후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9절 후단은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준다’는 말로 관대한 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실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자신의 고기와 곡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푸는 모습이야말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은 축복의 성격과 축복을 주시는 분에 대하여 상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의 장본인이시고, 겸손하며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 영광,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22:4)생명 속에는 그분과의 교제가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분이었기에 ‘주의 벗’으로 불렸습니다(사41:8).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가자, 가신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승리하고 일체의 재물을 되찾아 예루살렘 근처 왕곡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살렘 왕 멜기세덱이 영접하자, 그는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지만, 악한 소돔 왕에게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려주었습니다. 악인의 소유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14-15장). 이런 행동은 아브라함이 관대함을 넘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재물, 영광, 생명(장수)도 누렸지만, 실로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삶이 지향할 목표를 보여줍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29:7).

잠언22: 10
거만한 사람을 쫓아내면 다툼이 없어지고, 싸움과 욕설이 그친다.”(새번역)

‘다툼’이란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면 잘 나타나는 현상으로, 10절에서 말하는 ‘거만한 사람’이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거만한 사람’의 원어는 ‘레츠’이며 조롱을 뜻합니다. ‘거만한 사람’은 죄(잠 14:9)와 심판(잠 19:28)을 비웃으며, 자신을 위한 길을 고집하는데,  그의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중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의 특징적 악은 ‘교만’입니다. 그는 미련한 자임에 틀림 없지만 고칠 수가 없는 것은, 어떤 책망이나 지혜로운 말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조롱하시고 쫓아내십니다(잠3:34).  반 루엔이 말합니다: “한 공동체의 가입과 탈퇴 기준은 중요하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한 어떤 단체도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때때로  구성원을 추방시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거만한 백성을 심판하여 추방시키거나 멸절시킨 예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첫 번째 예로, 그들을 추방시킴으로 에덴 동산은 비로소 평화를 찾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일곱 족속들은 그들의 범죄로 거의 멸절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역시 거만하게 모세 율법을 도외시 하다가,  1천년 동안 살던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이는 또한 최후의 심판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많은 무리에게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 자신의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섬길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잠언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개정개역)

오래 전 미국 여행 시 차량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미국 사정에 밝은 처남 가족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아니라, 권력자인  왕과 친분관계가 있다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런 관계에 호소하여 국법질서가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왕은 친구가 없고, 혹 있어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을 친구로 삼을 것입니다. 왕의 친구는 통상 고결한 지혜자로서, 그의  입에서는 왕이 감탄할 만한 덕스러운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로 번역되나, 정결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연히 품위 있게 말한다는 취지의 개정개역이 타당합니다.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기에,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는 말도 품위 있게 하기 마련입니다(16:23). 다윗 왕의 친구로 아렉 사람 후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반역 시에도  충성스럽게 예루살렘 성 내에 머물면서 당대의 모사 아히도벨의 급습 전략을 막아 다윗을 돕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도,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주저 없이 모리아 산으로 향한 것은  불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요15:13-16). 그리고 그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고 이어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친구되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마지막 날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행하십시오! 그러면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시편143편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6절)

이 시의 저자는 다윗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시는 주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 온 시인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요청으로 시작됩니다(1). 시인은 이 고난이 혹시 내 죄로 인한 심판은 아닌가 고민합니다(2). 이는 고난 당하는 모든 사람이 갖는 갈등이며, 우리를 좀 더 경건하게 합니다. 한편, 시인은 원수의 추격을 받아 언제 발각되어 죽을지 모르기에 낙담합니다(3-4). 그러나, 시인은 믿음을 갖고 주님의 과거 구원의 행적들을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키다가(5), 드디어 6절의 기도에 이르러 비상할 준비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주님의 은총과 구원이 절실합니다. 따라서 7절부터 시인은 11개의 탄원을 쏟아내며 더욱 열정적인 기도를 드립니다(7-12).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우리의 기도가 활화산과 같이 나오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푸른 풀밭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막11:22-2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 시편의 구성입니다.

   A1 (1–2) 관계- 주님의 성품
    B1 (3–4) 위험- 낙담하기 쉬운 인간
      C1 (5–6) 신뢰- 주님의 행적들
         D (7) 절박감 – 오직 주님뿐!
      C2 (8) 신뢰- 주님이 주시는 사랑
    B2 (9–10) 위험-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
  A2 (11–12) 관계- 주님의 성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편143:10).

시편143편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2절)

“감옥은 의인들로 붐비고, 교회는 죄인들로 넘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범죄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대며 억울해 하는 반면, 훌륭한 시민들은 교회에 가서 오히려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 앞에 서면 의가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을 갖게 마련입니다(롬3:20).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 만군의 주님을 보자 자신의 입술이 부정함에 절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자, ‘주여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눅5:8). 본 시편 2절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여실히 느낀 다윗이 긍휼을 탄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 내용이 “(언약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에게 이르렀을 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는 선포가 나왔고, 갈라디아서2:16과 로마서 3:9, 20에서는 죄의 보편성을 단언하는 구약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나면, 복음의 소망을 간직하고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20대에 살인범으로 몰려 25년 간 복역하다가 DNA 감식으로 무죄가 입증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복수심으로 불타 10여년을 복역하는 중 어릴 때의 기독교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 무죄로 석방되는 날 “이제 남을 미워할 시간이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쓰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매일묵상(2023/4/10-14)

잠언22: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클립보드의 역설적 해설입니다: “아이들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양육하라, 그러면 결코 탕자의 길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잘못된 길이 많기 때문에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일한 길을 가르치며,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로 구체화됩니다. 우리는  이 지혜의 길을 걷도록 자녀를 양육하여야만 합니다.  한편, 본문 후단의 내용이 약속이냐, 아니면  일반적 진술이냐에 관한 다툼이 있지만, 아이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된다면,  성품으로 화하여 일생 바른 길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를 해야 비로서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성경과 계명을 해석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나, 그 중요성은 시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기도, 기도와 가르침은 두 손과 같이 늘 함께 가야만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훌륭한 도구들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17살된 아들의 잘못된 행동과 무례한 언어 사용,나쁜 친구들, 심지어는 마약 등에 대하여 걱정이 되어 시카고 데일리 신문 맵레이에게 조언을 요청하였더니, 그는 “17개월로 돌이켜서 훈육을 다시하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만유의 주님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손에 맡기고 바르게 가르치시기 바랍니다(빌4:6,7). 야곱의 10아들은 형제를 종으로 팔 정도로 문제가 많았지만, 주님의 손에 의해 결국 올바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 (잠언22:15,새번역)

잠언22:7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새번역)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책에서 저자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휘두르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본 잠언도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모세율법은 고대 근동의 관습을 따라  채무로 인한 종의 규정을 두고 있어서, 잠언 당시 이스라엘에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면 채권자의 종이 되어 빚을 갚아야 하였습니다. 성경의 예입니다. BC 800년경 선지자 엘리사의 한 제자가 빚을 지고 죽자 채권자가  미망인에게 그의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알렸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기에, 선지자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기름 한 병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녀는 기적으로 생산된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였습니다(왕하4:1-7). 신실한 믿음의 축복으로, 우리가 사방에 기댈 곳이 없어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계십니다(빌4:6,7). 잠언은 전체적으로 부자를 경고하고 책망 하지만, 본 잠언은 빚지는 것보다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채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채무자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벌로 규정합니다 (신28:44). 구약의 율법은 순종과 불순종을 물질적인 효과로 규정하여, 아직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한 그들로 순종을 배우게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유의 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엡1:22). 세상 것을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1).

잠언22:8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둘 것이며 그의 분노의 기세도 꺾일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콩심은 데서 콩나고, 팥심은 데서 팥난다.” 따라서 악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위의 쓰디쓴 열매를 거둘 것이며, 불의에 수반되는 폭력을 지칭하는 ‘ 분노의 기세’도 결국 헛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심판과 연관이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7,8)고 경고한 뒤, 기회를 갖는대로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기 힘쓰라고 권고합니다(갈6:9-10).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둘째와 셋째는 시므온과 레위이고 딸은 디나였습니다. 야곱이 세겜에 있을 때 디나가 세겜에게 욕보임을 당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세겜과 그 동네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처자들은 종으로 삼았으며, 그 나이 불과 17,8세였습니다. 약 40년 후 야곱은 임종 시 이들을 저주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흩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시므온의 자손은 번성하지도 못하고, 유명한 인물도 없었고,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레위 지파 역시 전 이스라엘 가운데로 흩어졌으나, 광야의 황금 송아지 사건 때 우상숭배를 한 3천명을 죽이고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화도 복으로 변합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새번역).

시편141편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2)

본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외로부터 오는 심각한 악의 유혹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부르짖습니다(1-2). 그 내용은 악의 유혹들에서, 자신, 즉 자신의 마음, 입 그리고 행동을 지켜달라는 간구이며(3-6), 또한 하나님께 피신하니 악인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7-1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살게 됩니다. 서로가 돕고 의지하는 관계가 되면 때론 타인의 죄에 연류되거나,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못해 함께 불법을 저지를 유혹도 받게 됩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 비행을 저질렀고, 그 후에는 명예와 결혼과 돈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욕망의 힘을 끊어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구하였고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 간증은 고백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시인인 다윗은 주님의 많은 사랑을 입었지만, 잠깐 방심하자 치명적인 도덕적 실패에 이르렀습니다. 그 만큼 인간은 연약합니다. 주기도문이 떠오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 우리는 주님께 신실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은 물론,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랑과 진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갈5:22-23).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11:8)

시편142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5)


시편 57편과 142편은 모두 다윗이 원수를 피하여 굴에 숨었을 때 지은 시이나 내용은 대조적입니다. 57편은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믿음이 지배합니다. 그 반면 지금(142편) 시인은 두려워 하고 절망과 비탄에 젖어 부르짖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적뿐이며 피난처는 없고, 오히려 원수의 올무만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4). 그러나 시인의 믿음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서 “주는 나의 피난처….나의 분깃”이라는 고백과 함께 시인의 믿음은 날개짓을 시작하였고, 주님께 구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그 믿음의 날개를 충만하게 펼칩니다(6). 끝 절에서 그의 믿음이 구원의 소망과 결부되자, 격동하는 마음은 평온을 되찾습니다 (7). 믿음은 소망과 결부되어야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시인은 주님을 ‘나의 분깃’리고 부릅니다. 원래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땅 대신 당신 자신을 그들의 분깃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기반은 땅을 분배 받은 각 지파가 주님께 드리는 제물과 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분배받은 지파들 역시 궁극적 삶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므로, 같은 믿음에 도달하였고, 시편 도처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믿음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73:26). 이는 신약에 이어져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징합니다. 신자에게는 주님이 피난처요 분깃으로, 직업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잊지 말고 늘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매일묵상(2023/4/3-7)-고난주간

2023년의 부활절은 4월 9일입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2023.3. 21일 후  첫 만월은 4/5일(음력2/15)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이 4/9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4/2-4/8).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1)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4.2),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서쪽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만나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고(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3) 아침 성전을 향하던 중 시장하시자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로 가셨습니다.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버림받을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이 날 여러 논쟁과 교훈이 있었습니다.먼저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힐문하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 와서 가이사에 대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고, 모세율법은 한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두개인들은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경우 부활하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크게 오해 하였다고 책망하신 뒤,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12:13-2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8-34). 너무나도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35-37). 이어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성전의 웅장함을 감탄하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철저히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요한복음13-20장은 영광의 책으로 불리웁니다. 큰 다락방에서 12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도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을 축약하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려고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은 경고하시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뒤(요14:16,17,26;15:26;16:7-15), 후에 믿을 자를 포함하여 모든 제자들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7장). 이어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는 1시간 동안 큰 통곡과 함께 피 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서 곤욕을 당하셨고,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잠잠하시다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7-68). 그 동안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은 700년 전 이사야에 의해(사53: 7-8) 기록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사이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다는 것과 당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실 것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3/3/27-31)

잠언22:3절
“슬기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숨고 피하지만, 어수룩한 사람은 고집을 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입는다.” (새번역).

본 잠언은 “슬기로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여기서는 미성숙을 의미)과  구분짓게 하는 삶의 기본 원칙을  관찰한 내용입니다. 전자는 재앙과 그 가능성을 보면 숨거나 피하지만, 후자는 고집부리고 나아가다가 재앙에 연루되어 화를 당합니다. 잠언은 이미 7장에서 어리석은 젊은이가 문란한 여자를 만나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따라 가는 모습을 보고,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7:22)고 선언하였습니다. 결과는 범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의 종류도 다양해서 일일이 전부 열거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그 위험의 징조를 감지하고 피하거나 미리 대비책을 세웁니다. 좋은 예가 한국계 빌 황의 헤지펀드 아키고스는 고수익을 주었지만 매우 위험한 금융상품에 투자하였습니다. 결국 2021년 내재한 위험이 드러나 빌황은 파산하고 빌 황의 펀드에 투자한 많은 금융기관들이 엄청난 손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을 감지한 골드만삭스 은행만은 재빠르게 철수하여 큰 손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본 잠언이 경고하는 가장 큰 위험은 도덕의 위험이고, 더 나아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한 위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잠언22: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새번역)

본 구절의 원문은 동사 없이 7 개의 명사만 있어서 번역이 갈립니다. 번역 중 하나는 “겸손의 보상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재산과 명예와 생명들이  함께 한다”로, 다른 것은 “겸손과 주님을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다”(통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기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잠언의 겸손은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담겨있어서 세상의 겸손과 다릅니다. 이들의 삶의 초점은 탐욕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요 원죄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행하는 이들을 기뻐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 하는 재산, 명예, 생명들(장수, 영생 등)을 주시는 것입니다(전2:26). 왕 솔로몬이 좋은 예입니다. 그가 왕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재판할 지혜를 구하자, 이를 기뻐하신 주님은 구하지 않은 재산과 명예도 주셨으나, 생명(장수)만은 순종을 조건으로 하셨습니다.불순종한 솔로몬은 장수의 축복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세상에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더러 있지만,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잠언의 겸손(종교적 겸손)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자각’이 담겨 있고 유대인들도 여기까지는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율법(구약성경)을 통해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

잠언22:5절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으나, 자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은 그런 길을 멀리한다.”(새번역)

모든 사람들은 부, 명예, 장수를 추구합니다. 고집부리며 살아가는 어수룩한 사람(3), 주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사람(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5)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와 명예, 장수는 주님의 선물이요 품삯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에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4). 5절은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 향하여 교훈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의 길은 온갖 종류의 도덕적 장애물(‘가시들’와 ‘ 올무들’이란 복수형로 상징)로 뒤덮혀 있습니다. 여기서 ‘비뚤어진’의 원어는 ‘익케쉬- 꼬다’로서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치장한다는 의미를 지닌 아람어 ‘아카싸’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는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꼬고 뒤틀어 치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길을 비틀어 타락과 범죄의 길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어리숙한 사람처럼 비뚤어진 사람도 어리석은 자들의 한 유형입니다. 이들의 방법으로는 주님과 이웃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부와 명예와 장수를 얻지는 못합니다. 허나, 슬기로운 자는 가시와 올무가 널려 있는 길을 멀리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한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길로 달려갑니다. 그는 주님이 주시는 품삯-재산, 명예, 장수-을 받게 되며 이웃들과 함께 행복해 합니다. 중심 키는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곤경과 위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의인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욥).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는 같아 보이나, 악인에게는 파멸시키는 올무요, 의인에게는 영광을 위한 시련일 뿐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4,15)

시편 139편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

본시의 저자는 다윗으로, 주님의 전지 전능과 편재를 노래한 후(1-18절), 고난 당하지만, 악인과 달리 주님의 뜻을 따른 인도를 기도합니다(19-24절). 확실히 이 시는 주님의 전지(1-6), 편재(7-12), 창조의 전능(13-18)을 찬양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시인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주님은 시인 자신은 물론, 시인의 앉고 일어섬, 생각, 걸어가는 모든 길과 눕는 것, 행위, 그리고 말을 시인을 창조하기 전에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어디나 계셔서 시인이 하늘로, 스올로, 바다 끝으로 가도 거기에서도 그를 인도하십니다. 그 주님은 모태에서 그를 지으셨고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삶을 계획하셨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묵상합니다(13-16절). 동시에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으로 시인의 복지를 위해 심혈을 쏟고 계심을 생각하고 시인은 감격해 하면서, 악을 미워하시는 그분과 같이 거룩하려는 간절한 열망을 품게 됩니다. 이 열망은 곧 자신을 감찰하사 악을 제거해 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간구로 변하는데(24), 이는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기도는 곧 우리의 기도입니다. 동일한 신학이 주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는 문맥에서 나옵니다. 심판 날에는 밝혀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으니 제자들은 주의하여야 하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시니 아무도 두려워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눅12:1-7). 따라서 우리는 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의를 행해야 합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139:24).

시편 140편
“주님, 악인에게서 나를 건져 주시고,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1절, 새번역)

시편140-143편은 모두 기도입니다. 다양한 모습의 고난-비방, 분노, 외로움, 절망- 가운데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시는 두 개의 기도로 구성되어 있으며(1-5, 8-11) 각 기도는 확신이 따라옵니다(6-7, 12-13). 첫번째 기도(1-5)는 악인으로부터 보호를 기도하며, 주님과 다윗의 개인적 관계(6)와 과거의 경험(7)을 근거로 구원을 확신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악인에 대한 재앙을 기도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베푸시는 주님을 근거로 구원의 소망을 갖습니다(12-13). 한편, 8-11절에 나온 악인에 대한 연속적인 재앙의 표현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9),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10), “악담하는 자는…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11). 또한 우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말로 성령님을 거역한 자는 영원한 죄에 처한다는 말씀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마12:31,32). 어떤 분은 그 악인들이 정직한 시인은 물론, 하나님까지 대적한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억지로 풀지 말고 대립되는 성경말씀은 그대로 가지고 함께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기도하게 되고 적절한 해석과 행동이 가능합니다(롬8:13).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분은 무한히 지혜로우신 분이기에, 기도 없이 일반이론을 만들어 살 수는 없습니다.“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편140:13)

매일묵상(2023/3/20-24)

잠언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31절은 30절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마병’은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절대병기였습니다. 창이 뚫을 수 없는 철갑을 두른 마병은 하루에 100km를 주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왕들은 철병거와 마병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31a), 이를 잘 아는 솔로몬 왕은 이집트의 말을 힛타이트와 아람민족에게 중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왕상10:29). 그러나 솔로몬은 전쟁의 승리는 인간의 준비에 있지 않고 주님께 달려있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싸울 날을 위한 인간의 준비와 전략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정권자는 주님이시기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사사 에훗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겨 20년 간 심한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여선지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명령하여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다볼 산에 집결시켰고,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00대와 보병을 이끌고 기손 강에 집결하였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려가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락은 평야전투가 불리함을 잘 알았지만 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기손 강 상류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그 비가 모여 홍수로 변하였고, 시스라의 철병거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진흙에 바퀴기 빠져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락의 1만군대가 도착하여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홍수는 경험칙 상 생각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1-16절은 ‘부와 도덕’을 주제로 한 교훈입니다. 이미 21:30-31절에서 국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다룬 솔로몬 왕은, 주님은 재물에도 주권을 갖고 계심을 가르칩니다. 통상 금은보화 혹은 좋은 집과 차 등으로 상징되는 재물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만,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훌륭한 명성(좋은 이름)입니다. 후단은 이 명예를 갖게 되는 이유를 ‘은총=은혜로움’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여기서 ‘은총’의 히브리어 ‘헨’은 궁핍한 자를 보고 긍휼히 여겨 필요한 것을 주는 은혜로운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평판을 갖게 마련입니다. 실상 좋은 이름은 지혜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는 재물은 미덕과 상관없이 획득될 수 있지만, 명예는 미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지혜는 재물과 명예 모두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그(지혜)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3:14). 얼마 전 서울 남산 도서관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인,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조선이 망하자 수 백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급히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1911년)를 세우는 등 독립투쟁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영 선생을 제외하고 다른 5형제는 광복이전에,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습니다.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부 재산의 환급을 제안했으나 선생은 재산을 찾겠다고 독립운동한게 아니라며 거절하였습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전7:1,새번역)

잠언22:2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인류의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얽혀 살아온 역사로서, 세상 끝 날까지 가난한 자는 늘 존재할 것입니다(신15:11;막14:7). 가장 부자이신 주님은 일생을 가난한 자와 어울리시면서 가난하게 사심으로 두 계층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 가운데 서로 배려하려는 사회입니다.  부자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가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모두 피조된 인간으로서 동일한 가치와 고귀함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질투를  버려야 합니다(전10:20).  부자라고 더 행복한 것이 아니기에, 잠언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고 밝힙니다. 문제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사회구조의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이지 창조주 때문은 아닙니다. 따라서 2절 전단은  이들의 공동의 삶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문제점들을 전제하고, 후단은 그 해결 방법으로 주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자연히 상호존중,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되는데, 이는 모두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세상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재물과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겠습니까?(27:24)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주님께서 당신의 뜻과 도덕 질서에  따라 부를 재분배하고 계심을 생각하고 그분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자족이라는 경건의 미덕은 여기서 나오는 것으로 주님을 아는 자는 인생 항해의 중심키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6:6,새번역)

시편137: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과 축복과 저주의 언약(모세율법)을 체결하고도 아담과 같이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벌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였습니다(BC 586년). 이 시편을 소재로 자마이카의 레게음악 그룹 멜로디언즈는 “Rivers of Babylon(1967)”라는 히트곡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4/4박자의 리듬과 가사의 내용이 불의에 저항하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나 신학적 전제가 없다면, 본 시편은 이방 땅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정복자를 증오하는 힘 없는 약자의 노래입니다. 특히 시의 8-9절은 바벨론을 향한 무자비한 복수심을 보이는데, 30년 후 페르샤가 바벨론을 정복할 때도 시인이 염원한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9)-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선지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바벨론에 대한 복수를 주님 손에 의탁한 것 뿐이라고 말하나, 시인의 증오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후세의 교훈을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말, 생각, 그리고 행동도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당연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범죄한 이들을 흩으셔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회당을 세우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이어가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죽고 부활 승천하여 복음을 완성하시자, 사도들에게 회당이야말로 복음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볼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시편138편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45편까지8개의 시들은 모두 다윗이 그 저자입니다. 13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경험하자, 비록 고난 중에 있었지만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품(1-3), 세상의 미래(4-6)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아직도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기도로 호소합니다(7-8). 사무엘하5:17-25절이 시의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자 모든 블레셋 민족이 모여 르바임 계곡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위세를 본 다윗은 “블레세인들을 치러 올라갈까요? 주께서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까?”하고 묻자, 주님은 “올라가라 내가 확실히 네 손에 넘겨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확답을 받은 다윗은 용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도망갔고, 전쟁터는 ‘신들’의 쓰레기 더미로 변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기도의 장소는 새롭게 주님의 계시를 깨닫는 자리이며(2), 갱신의 장소이고(2-3), 세상과 그 왕들을 포용하는 비전의 자리요(4),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로 그 장소(7-8)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같습니다. 신실한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면, 주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 후에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공급하심을 신뢰하게 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심을 힘있게 선포하게 됩니다.“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편1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