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3/20-24)

잠언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31절은 30절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마병’은 고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절대병기였습니다. 창이 뚫을 수 없는 철갑을 두른 마병은 하루에 100km를 주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왕들은 철병거와 마병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31a), 이를 잘 아는 솔로몬 왕은 이집트의 말을 힛타이트와 아람민족에게 중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왕상10:29). 그러나 솔로몬은 전쟁의 승리는 인간의 준비에 있지 않고 주님께 달려있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싸울 날을 위한 인간의 준비와 전략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정권자는 주님이시기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사사 에훗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겨 20년 간 심한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여선지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명령하여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다볼 산에 집결시켰고,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00대와 보병을 이끌고 기손 강에 집결하였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내려가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락은 평야전투가 불리함을 잘 알았지만 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기손 강 상류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그 비가 모여 홍수로 변하였고, 시스라의 철병거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진흙에 바퀴기 빠져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락의 1만군대가 도착하여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홍수는 경험칙 상 생각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1-16절은 ‘부와 도덕’을 주제로 한 교훈입니다. 이미 21:30-31절에서 국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다룬 솔로몬 왕은, 주님은 재물에도 주권을 갖고 계심을 가르칩니다. 통상 금은보화 혹은 좋은 집과 차 등으로 상징되는 재물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만,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훌륭한 명성(좋은 이름)입니다. 후단은 이 명예를 갖게 되는 이유를 ‘은총=은혜로움’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여기서 ‘은총’의 히브리어 ‘헨’은 궁핍한 자를 보고 긍휼히 여겨 필요한 것을 주는 은혜로운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평판을 갖게 마련입니다. 실상 좋은 이름은 지혜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는 재물은 미덕과 상관없이 획득될 수 있지만, 명예는 미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지혜는 재물과 명예 모두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그(지혜)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3:14). 얼마 전 서울 남산 도서관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인,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조선이 망하자 수 백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급히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1911년)를 세우는 등 독립투쟁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영 선생을 제외하고 다른 5형제는 광복이전에,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습니다. 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부 재산의 환급을 제안했으나 선생은 재산을 찾겠다고 독립운동한게 아니라며 거절하였습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전7:1,새번역)

잠언22:2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인류의 역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얽혀 살아온 역사로서, 세상 끝 날까지 가난한 자는 늘 존재할 것입니다(신15:11;막14:7). 가장 부자이신 주님은 일생을 가난한 자와 어울리시면서 가난하게 사심으로 두 계층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 가운데 서로 배려하려는 사회입니다.  부자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가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모두 피조된 인간으로서 동일한 가치와 고귀함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질투를  버려야 합니다(전10:20).  부자라고 더 행복한 것이 아니기에, 잠언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17:1)고 밝힙니다. 문제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사회구조의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이지 창조주 때문은 아닙니다. 따라서 2절 전단은  이들의 공동의 삶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문제점들을 전제하고, 후단은 그 해결 방법으로 주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자연히 상호존중, 배려의 태도를 갖게 되는데, 이는 모두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세상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재물과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겠습니까?(27:24) 그러므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주님께서 당신의 뜻과 도덕 질서에  따라 부를 재분배하고 계심을 생각하고 그분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자족이라는 경건의 미덕은 여기서 나오는 것으로 주님을 아는 자는 인생 항해의 중심키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6:6,새번역)

시편137: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과 축복과 저주의 언약(모세율법)을 체결하고도 아담과 같이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벌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였습니다(BC 586년). 이 시편을 소재로 자마이카의 레게음악 그룹 멜로디언즈는 “Rivers of Babylon(1967)”라는 히트곡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유행하였습니다. 4/4박자의 리듬과 가사의 내용이 불의에 저항하도록 힘을 줍니다. 그러나 신학적 전제가 없다면, 본 시편은 이방 땅에서 고향을 그리면서 정복자를 증오하는 힘 없는 약자의 노래입니다. 특히 시의 8-9절은 바벨론을 향한 무자비한 복수심을 보이는데, 30년 후 페르샤가 바벨론을 정복할 때도 시인이 염원한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9)-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선지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바벨론에 대한 복수를 주님 손에 의탁한 것 뿐이라고 말하나, 시인의 증오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후세의 교훈을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말, 생각, 그리고 행동도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당연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범죄한 이들을 흩으셔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회당을 세우고 “말씀과 기도”의 삶을 이어가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죽고 부활 승천하여 복음을 완성하시자, 사도들에게 회당이야말로 복음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볼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시편138편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45편까지8개의 시들은 모두 다윗이 그 저자입니다. 138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감사와 신뢰를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경험하자, 비록 고난 중에 있었지만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품(1-3), 세상의 미래(4-6)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아직도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기도로 호소합니다(7-8). 사무엘하5:17-25절이 시의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자 모든 블레셋 민족이 모여 르바임 계곡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위세를 본 다윗은 “블레세인들을 치러 올라갈까요? 주께서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까?”하고 묻자, 주님은 “올라가라 내가 확실히 네 손에 넘겨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확답을 받은 다윗은 용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도망갔고, 전쟁터는 ‘신들’의 쓰레기 더미로 변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기도의 장소는 새롭게 주님의 계시를 깨닫는 자리이며(2), 갱신의 장소이고(2-3), 세상과 그 왕들을 포용하는 비전의 자리요(4),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로 그 장소(7-8)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같습니다. 신실한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면, 주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 후에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공급하심을 신뢰하게 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심을 힘있게 선포하게 됩니다.“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편138:7)    

매일묵상(2023/3/13-17)

잠언21:28
거짓 증언하는 사람은 망하지만 진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다.”(공동번역)

본잠언은 거짓 증인과 진실한 증인을 대조시켜, 바른 증언의 중요성을 교훈합니다. ‘증인’이란 특정의 사실에 대하여 증명하는 사람이며, ‘증언’이란 그가 경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단의 ‘진실한 증인’의 원문은 ‘들은 자’로서, 어떤 상황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를 가르킵니다. 목격자의 증언은 확실하기 때문에,  ‘확실히 들은 사람의 말’(개정개역)로도,   ‘진실한 증인의 말’(공동번역)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한, ‘힘이 있다’는 말은 히브리어 ‘라네차흐’를 번역한 것이며, 이 단어는 ‘탁월하게’와 ‘영원히’의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문맥상 후자가 어울립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진실한 증인의 말은, 거짓 증인의 말이 탄로나고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운명과 달리 영원토록 효력이 지속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법정은 증언에 의존하였습니다. 만약 증인이 거짓으로 말한다면 판결이 그릇될 것이고, 그 해악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나봇의 살해사건).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헌법에 해당하는 십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출애굽기(23:1,2), 레위기, 신명기에도 반복하여 경계합니다. 특히 레위기24장에는 아버지는 애굽인이요, 어머니는 이스라엘 여성(슬로밋)인 어떤 자가 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자 그를 들은 증인들의 말에 근거하여, 재판하고 이스라엘 회중은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레24:10-23). 한편, 대한민국도 형법에 위증죄(152조)를 두고 처벌할 정도로, 법정에 선 증인의 말은 진실하여야 합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언19:5).

잠언21:29
악인은 자기의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자기의 행위를 삼가느니라

본절은 24절 이후 등장하는 악인의 유형들, 즉 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 중 그 마지막입니다. ‘굳게 한다’에 해당하는 원어 ‘헤에즈’는 ‘강하게 하다’입니다. 만약, 이 단어가 ‘얼굴’과 함께 사용되면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으로, 악인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강하게(굳게)한다’는 표현은 상대방을 속이려고 얼굴을 꾸미는 모습이나, 다른 사람의 현명한 충고를 무시하는 완고함을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후단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후단의 ‘삼간다’의 원어는  사본에 따라 다릅니다. 하나는 ‘케티브- 확립하다’와, 다른 하나는  ‘케레- 분별하다’입니다. ‘케티브’를 따르면, 겉과 속이 다른  악인과 달리, 의인은 신실하게 정도를 걷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경우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신실하게 살아간다”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케레’를 따르면, 의인은 자신의 길을 분별하기 위해 타인의 충고도 살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경우, ‘얼굴을 굳게 한다’는 의미는 완고함이며, 본절은 ‘악한 사람은 완고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잘 살핀다”로 번역됩니다. 악인은 완고하여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24). 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악인의 완고함과 의인의 사려깊음을 대비시키는 것이 본절의 취지라 볼 때, ‘케레’를 따른 후자가 좀 더 낫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려깊음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므로 주님의 뜻을 먼저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귀를 기울여서 지혜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의 가르침을 너의 마음에 새겨라.”(잠언22:17,새번역)

잠언21:30
어떠한 지혜도명철도, 계략도, 주님을 대항하지 못한다.”(새번역)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이며, 30-31절은 “주님의 절대 주권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30절은 주님을 무시한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는 일반적 선언이며, 31절은 전쟁에서의 구체화입니다. 잠언에서 통상 지혜를 말할 때, 거기에는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잠1:7). 따라서, 주님을 대항하는 지혜는 타락한 인간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30절은 29절 전단에 언급된 악인의 길, 즉 뻔뻔하게 하나님과 그분의 교훈을 무시하는 악인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고, 29절 후단의 지혜자라 할지라도 주님과 독립하여 자신의 지혜로 행한다면 실패함을 선포합니다. 북왕국과  황금송아지 예배를 동시에 창시한 여로보암 왕이 앞부분의 예이며,  반역한 압살롬에게로 돌아선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뒷부분의 예입니다. 두 명 모두 실패하여 몰락하였습니다. 한편,  ‘지혜-호크마’는 제사장의 옷이나 금속공예 기술 등 ‘전문적 기술’을, ‘명철-테부나’는 ‘분별’을 본질로 하는 ‘실용적 통찰력’을, ‘계획(모략)-에차’는 ‘지혜로운 계획’(출18:19)을 말하나, 이는 강조를 위한 문학적 기교일 뿐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부리려면 승마 기술이 필요하듯이, 본 잠언은 인간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다만, 제대로 된 시각을 갖고 모든 것을 생각하라는 경고입니다. 즉 전지전능 하신 주님 앞에 인간의 능력은 하찮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고전3:19,새번역)   

시편135: 1절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새번역)

120-134편까지 ‘순례자의 노래’가 끝나고, 이어지는 두 편의 시-135편과 136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안전하게 성전에 도착한 순례자들의 마음에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으로. 시편은 적절하게 배열되었습니다. 135편의 구성입니다.
A1 (1–4) 선택하시는 주님(야훼) 찬양
B1 (5–7) 창조주 주님(야훼)
C (8–14) 주님(야훼)의 행적
B2 (15–18) 우상숭배의 어리석음
A1 (19–21) 함계 계시는 주님(야훼) 찬양

135편은 먼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1-4). 그런데 그 주님은 위대한 창조주이시며(5-7), 야곱의 자손들을 큰 권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사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8-14). 이 같이 언약에 신실하신 권능의 주님에 비하여 이방의 우상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헛된 것들이며, 따라서,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짓입니다(15-18).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마칩니다(19-21). 본시에는 주님을 찬양하는 분명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고, 이를 근거로 찬양과 순종의 메시지가 울려퍼집니다.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 주권자, 구속주되시기에 찬양을 받으셔야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헛된 우상들 믿고 불순종한 모든 왕과 이방은 멸망 당하였습니다. 이런 결론 하에,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배로 초청하고, 또 예배로 마치면서 일관된 찬양의 구조를 우리 삶에 구축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시편136:1절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새번역)

본시(26절)는 매 절마다 창조, 이스라엘의 구속, 그리고 온 인류의 보존에 깊이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하고, 이는 그분의 영원한 인자하심 때문임을 반복하는 일종의 돌림노래입니다. ‘인자’의 히브리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후렴을 통해, 시인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애굽에서 구속,광야의 여정, 가나안 정복 등)가 형성되는 순간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임을 깨닫고 ‘인자하심’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인류에게도 적용되기에, 시인은 양식을 주사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만(25),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요3:16). 시의 구성입니다.
A (1-3)도입 찬송-신들의 하나님
B (4-9)창조를 찬송
C (10-24) 이스라엘의 구속을 찬송
B′ (25)창조를 찬송
A′ (26)맺음 찬송- 하늘의 하나님

시에서 강조되는 ‘인자=사랑’이 주님 속에 없다면, ‘신들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지위나, 창조의 경이로움, 구속의 능력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능력과 많은 지식을 갖고, 구제를 심히 많이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전13:1-3).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은사를 과시하려는 고린도교인들을 경계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의 연단을 받을 때 고난 역시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의 한 대목임을 잊지 말고,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5:3-5).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

매일묵상(2023/3/6-10)

잠언21:25절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 속에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일하지 않는 그가 소득과 식량이 있을리 만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러므로 일하기 싫어하는 욕망이 게으른 자를 죽인다는 잠언의 교훈은 타당합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신체적 죽음은 물론, 영원한 심판까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게으름이란 잠언은 물론 성경 전체를 통해 큰 죄악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게으름은 많은 죄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게으른 자도 음식과 거처에 대한 필요와 욕망은 크지만, 소득이 없어 이웃의 소유를 탐내게 되고, 그에 따른 범죄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게으름 때문에 자녀 교육 시기를 놓치게 되면,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도둑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어느 유대 랍비의 말처럼, 교육과 기술 없이 자란 자녀의 장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게으름(나태)’이 고대의 7가지 치명적인 죄들의 목록에 들어 있고, 이를 경계하는 잠언도 20-30 구절이나 됩니다. 문제는, 게으른 자는 많은 핑계를 가지고 있으며(22:13), 지혜롭게 판단하여 부지런히 살아가는 자들보다 자신을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26:16). 심히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이 같이 큰 죄악이라, 게으른 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잠언12:24새번역).

잠언21:26절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

본 잠언에 나오는 ‘어떤 자’는 후단의 의인에 비추어 악인이고, 25절과 연관하여 보면 그 악인은 ‘게으른 자’의 원초적 모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악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어 원문을 ‘종일토록’이란 단어로 시작하고,  ‘욕망하다’는 동사 ‘아바’에 이어 ‘욕망’이란 명사를 또 써서 그 악인의 탐욕을  강조합니다. 이로써, 악인은 게으름에서 더 나아가 탐욕이라 본성을, ‘의인’은 부지런함은 물론 아낌 없이 베푸는 본성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날까요? 주님을 경외하느냐 여부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좀 더 나은 집, 음식, 명예, 건강, 지식 등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분의 계명을 따라 그 욕구를 재조정시켜, 자신과 이웃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할 줄 아는 덕목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의인은 지혜자입니다. 그는 빈부가 섞여 살도록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잠언22:2), 주저하지 않고 합당한 자에게 베풀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와 달리, 탐하는 자는 어리석어,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배를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의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건이 일어나 밝힙니다. 고아와 과부처럼 힘 없는 자의 법적 권리가 문제가 될 때입니다(29:7). 악인은 그들의 권리를 수탈하여 불법적 이익을 도모하지만, 의인은 자신의 사적 이익에 반하더라도,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줌으로써, 가정, 교회, 사회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잠언21:27
악인의 제물이 역겨운 것이라면, 악한 의도로 바치는 것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새번역)

이 잠언의 ‘악인’은 문맥 상 ‘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 탐하는 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성취하려고 살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제물을 역겨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악인이기에  제물조차,  남을 속이거나, 약자를 수탈하거나, 음란하고 더러운 방법 등을 통해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은 너무나도 싫어하셔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모세를 통해 못박으셨습니다 (신23:18). 하물며, 그 악인이 악한 의도로 바치는 제물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악한 의도라 함은 공동체를 해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한 계획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제사가 가능하겠습니까? 먼저 이방세계의 신 관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신’이란 인간과 같은 욕망을 가진 힘센 존재일 뿐입니다. 신은 인간으로부터 제물을 받고 싶어하니, 제물을 바치고 그 대신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달라는 일종의 거래요 뇌물입니다.  이 같은 이방의 제사 관념은 성경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헌금, 찬송 등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 드리는 자의 삶과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야 기도와 제사가 열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거부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창4:5).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전5:1,새번역).

시편133: 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3행으로 이루어진 본시는 다윗의 작품으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형제들이 동거하며 화목한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제사장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과 옷깃에 흘러내리는 모습과,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 헐몬(2814m)에서 생성된 이슬이 바람을 타고, 240km를 날아와 시온 산(754m)에 내리는 모습에 비유합니다(2). ‘거기서’ 다윗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발견합니다(3). 본시에 나오는 ‘형제’를 좀 더 범위를 넓힌다면, 이스라엘 12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 40년은 물론 가나안 정복 후에도 이들 사이에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였지만, 다윗 왕에 이르러 질서가 잡히고 화평이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민족은 서로 반목하다가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이스라엘 민족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상징임을 아는 것입니다. 둘의 차이는 ‘마음의 할례’여부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령님과 보조를 같이 하며 ‘의의 열매’(빌1:11), 혹은 ‘성령의 9가지 열매’(갈5:22-23)를 맺고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조선인, 헬라인, 중국인, 종, 상전, 남자, 여자 모두가 모여들어 한 주님을 섬기고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요10: 28;11:25,26). 이것이 본시에서 말한 영생의 이상이 성취된 모습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시편134: 1절
“밤에 주님의 집에 서 있는 주님의 모든 종들아, 주님을 송축하여라.(새번역)

본시는 120편에서 시작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마지막 편이며, 모두 3행입니다. 순례자들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여, 밤낮으로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1). 순례자들은 그들에게 주님을 송축하라고 요청합니다(2). 그러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라고 화답합니다(3). 각 절마다 ‘축복을 받으라’는 단어 히브리어 ‘바락’이 등장하며, 개정개역과 새번역은 ‘송축하라’(1,2), ‘복을 내려 주시기를’(3)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말은 본시의 주제어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송축하라’고 말하나, 3절에 이르면 인간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성경학자 키드너는 ‘하나님을 축복(송축)하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심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려면, 그를 제대로 된 존재로 만드신 후, 그에게 없는 것을 주셔야만 한다”고 말하여, 유한한 인간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한량 없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잘 대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길과 판단을 측량할 수 없지만 축복의 발원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시온입니다.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 수 있는 특정 장소 예루살렘으로서, 참된 시온 산인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히12:22-24). 시온 신학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계명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입술에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축복은 심히 가깝습니다. 시편133편의 축복이 떠 오릅니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시편133:3b,새번역)

매일묵상(2023/02/27-3/3)

잠언21:22절
“지혜로운 사람은 용사들이 지키는 성에 올라가서, 그들이 든든히 믿는 요새도 무너뜨린다.”(새번역)

지혜는 힘보다 낫습니다. 용사들과 요새를 소유한 성주는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나,역사는 그렇지 않은 실례들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갈공명이나 사마중달과 같은 지략가의 탁월한 전략 앞에서는 험준한 요새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가, 바벨론의 함락입니다. 수 많은 용사들이 지키고, 유부라데스 강이 해자를 두르고, 길이 27.2Km, 높이 12미터의 이중의 벽으로 둘러싸인 바벨론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 벨사살은 포위하고 있는 페르샤 군대를 무시하고, 술잔치를 베풀며 우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를 새겼습니다. 직역하면, “세었다 세었다 무게를 달았다 그리고 나누었다”이며, 의미는 “네 시대가 끝났고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나타났으니 네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주었다”였습니다.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단5장). 헤로도터스와 크세노폰에 따르면, 메대와 바사(페르샤)군대가 강의 흐름을 바꾼 뒤 성을 점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이후 대포와 총이 발명되자, 용사니 성이니 하는 것은 전쟁에서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기술패권 전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중국은 인구와 시장을 믿지만, 기술력이 월등한 미국의 승리가 예상됩니다. 그러나 기술과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지혜이며,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기도하고 노력할 사명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잠언3:21).

잠언21:23절
“입과 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새번역)

만일 누가 “막대기와 돌로는 내 뼈를 꺾을 수 있으나, 말로는 결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을 것이다”고 장담한다면,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말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의 힘을 깨닫고 매우 조심하며, 듣는 자에게 덕을 세우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몇 가지 격언이 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이 주인이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간 말은 당신의 주인이 된다”(스코틀랜드), “아이의 손과 바보의 입은 늘 열려 있다”(스위스), “황소는 뿔로 묶이고 사람은 혀로 묶인다”(불가리아). 야고보서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고 경고합니다. 걷는 법을 배웠듯이, 바르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른답게 말하기”(강원국)라는 책은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정신이상자(바벨론 왕)가 되거나 목숨을 잃은 왕(헤롯 아그립바1세)을 언급합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궁 위에 올라 자신이 이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자랑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상자가 되어 7년을 짐승과 함께 살았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왕복을 입고 연설할 때, ‘신의 소리’라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침묵하여 벌레가 창자를 먹어 죽었습니다 (행12:21-23). 사람의 말은 마지막 날 그 자신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므로(마12:36,37), 말하기 전에 준비하고 지혜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141:3).

잠언21:24절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을 오만한 자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한다.”(새번역)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자(20-23절)는 지혜자(의인)의 성공과 안전을 다루고, 후자( 24-29절)는 악인의 4 유형-교만한 자, 게으른 자, 거짓말하는 자, 뻔뻔한 자-과 운명을 교훈합니다. 24절은 악인의 첫째 유형인 ‘오만한 자’를 등장시킵니다. ‘오만한 자’의 원어는 ‘레츠’로서 ‘입을 삐죽거리다’ ‘업신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을 업신여기며 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오만한 자’가 우쭐대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중요감’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지혜자, 계시된 진리를 무시하는데, 하나님 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며, 자신의 판단은 지혜자나  진리 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육신에 속한 사람’의 전형으로, 그의 종말은 ‘사망’입니다(롬8:5-8). 이에 반해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 인자, 사랑, 겸손, 근면과 같은 덕을 쌓아가고, 이웃과 화목합니다. 이솝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닭장에 있는 두 마리 수탉이 암탉들을 놓고 서로 싸워 한 놈이 승리하였습니다. 승리한 수탉은 기쁨에 젖어 ‘꼬끼오’를 외치며 고개를 쳐들었을 때, 마침 공중에 배회하던 독수리가 내려와 채어갔습니다. 이제 암탉들은 패배한 수탉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 베푸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벧전5:5).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잠언15:33,새번역)

시편131:2절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새번역)

시인 다윗은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어린아이에 비유하였습니다. 특히 ‘젖뗀 아이’를 두 번 반복하여 그 평온에는 만족이 들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먹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시인 역시 같았습니다. 다윗이 이런 만족의 경지에 이른 것은 왕이었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범죄하여 왕국과 가정에는 많은 풍파가 있었습니다. 압살롬에게 쫓겨 그는 울며 맨 발로 걸어 길르앗으로 도망쳤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전쟁의 지혜, 그리고 용감한 부하들을 통해 반란을 진압한 쓰라린 경험도 있습니다. 인생의 영욕을 모두 다 겪은 다윗은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1절이 그 비결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라는 이기적인 잔소리나, 초조와 두려움이 주는 기만적 속박으로부터 자유이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때 나오는 능력입니다(3).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런 은혜를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2:3절은 “이기심이나 자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고 명령하며, 4:11절은 “내가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빌4:13). 부, 지식, 권력, 지위, 명예, 건강 등을 자랑하는 이 세상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약4:14). 따라서 우리는 주신 은혜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편131:3,새번역).

시편132:12절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본시는 그 옛날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옮겨 안치한 역사적 사건(1-9)과 주님이 다윗에게 한 영원한 왕위의 언약이 배경입니다(10-18). 먼저 100년 이상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시온에 안치한 왕 다윗과 이스라엘은 매우 기뻤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삼하6:13-15). 다윗 왕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전 건축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선지자 나단을 보내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다윗의 언약이며(삼하7:11-14), 본시의11,12절에 요약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온은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이며, 예루살렘의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를 맺습니다(13-18). 다윗이 죽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습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 자손은 “다윗의 언약”과 “시온 신학”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성전을 우상화하다가 성전과 함께 멸망 당하였습니다. 성전은 메시야를 상징하는 건물일 뿐이며(요2:19-22), ‘다윗 언약’의 요건은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하며, ‘시온 신학’의 참 뜻은 다윗이 상징하는 참된 왕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시편110:1-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갈4:4). 할렐루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2)

매일묵상(2023/2/20-24)

잠언21:19절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9절과 19절은 동일한 내용이나, 표현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두 구절은 모두 ‘보다 낫다’란 구문, 남편과 다투는 아내의 행동, 그리고 단락 분할의 기능은 같습니다. 그러나 19절의 여인은 성까지 내며, 남편을 위해 ‘움막’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가 등장합니다. 이는 본 구절의 남편의 처지가 9절에 묘사된 남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합니다. 광야는 황량하며 고독하며 위험하고, 삶의 수단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욥은 학대받는 가난한 자를 거친 광야의 들나귀에 비유합니다(욥24:5). 그 가난한 자는 ‘소나기에 젖고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입니다(욥24:8). 따라서, 솔로몬은 잔소리하는 아내를 둔 남편의 처지를 그 학대받는 가난한 자와 유사하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은 남편을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 여인은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지혜를 모색해야 합니다.  ‘우르사’의 광고 모델로 잘 알려진 백일섭(1944년생) 씨는 아내와 오랫동안 대화가 단절되었고, 아들에 따르면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는 배우 아버지로서 집안에서 대우를 받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던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017년에 졸혼을 선언하고 오피스텔을 얻어 별거하였습니다. 그는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생활이 자유롭고 마음이 편하다고 토로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을 주님과 교회 간의 비유임을 밝히며, 좋은 부부관계를 위한 지침을 제시하기에 유념해서 간직해야 합니다(엡5:22-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33).

잠언21:20절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20-23절은 지혜자(의인)의 성공, 승리, 그리고 안전을 다루며, 그 중 오늘 본문(20)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비교합니다. 전단에서 ‘귀한’의 원어는 ‘네흐마드’로서 ‘기뻐하다, 열망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귀한 보배’는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보물을 뜻합니다. ‘기름’이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슬기로운 경제 활동을 하여야 이런 ‘귀한 보배와 기름’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반면, 미련한 자는 규모 없이 살고 당장의 쾌락과 허영에 몰두하기에, 본래 소유한 재산마저도 탕진합니다. 본문의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잘 표현해 주듯이, 미련한 자는 마치 음식을 한 입에 털어넣듯이, 순식간에 재산을 없애버립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올리며, 통상 5만달러를 친척들로부터 받습니다. 따라서 13살부터 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기에, 유대인들 가운데 부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부자는 부라는 수단을 통해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운동,여행, 일과 같이 경제활동 역시 일찍 시키면서, 주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이다.”(잠언3:9,10, 새번역)

잠언21:21절
“정의와 신의를 좇아서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새번역)

21절은 20절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자’의 경제적 축복의 원인을 밝힙니다. 전단은 지혜자의 집이 보배와 기름으로 끝없이 채워지는 이유는 그가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살기 때문이며, 후단은 그런 자는 단순한 경제적 보상을 넘어 생명, 번영 및 사회적 명예까지 얻게 됨을 가르칩니다. 이는 지혜자(의인)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재물은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주어진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22:4절은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새번역)라고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물론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정의’의 원어는 ‘체다카’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바른 삶을 말하며, ‘신의’는 ‘헷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듯이, 인내와 관용으로 이웃을 선대하는 삶을 말합니다. 또한 ‘쫓아서’의 원어는 ‘라다프’로서 ‘뒤따르다, 추적하다’를 뜻합니다. 이 동사는 흔히 전쟁이나 침략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뒤쫓을 때 사용되어, 아주 강력한 결의와 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산다’는 말의 함의는 돈을 벌듯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듯이, 그런 덕목을 실천하려고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써, 그리스도 제자들의 삶의 기본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앞에 두고, 우리의 이익과  세상 필요는 그 다음으로 두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3). 본 잠언에 대한 훌륭한 주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시편130:1,4절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1)…..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4).”(새번역)

시편 중 참회시는 7개이며, 본시는 6번째입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시인은 구원을 부르짖고, 용서와 구원(속량)의 확신을 향해 착실히 나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참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1). 이제 남은 소망은 오직 하나,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부르짖습니다.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도달할 때까지 이 시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시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누구든지 깊은 고난에 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 대신 눈에 보이는 다른 피조물(권력자, 부자, 재물 등)을 의지하기 쉬우나, 구원은커녕 그들에게 이용당할 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시인은 이를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를 구합니다(3,4). 죄악을 지켜보시는 주님 앞에서 누가 감히 결백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천 마디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4). 시인은 구원하실 주님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리면서(6), 이스라엘 전체로 시선을 돌려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시는’ 주님을 소망합니다(8). 시인이 고대하는 주님은 어느 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의 바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시편131:1절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새번역)

본시는 다윗의 시로, 모두 3절이며, 오늘은 1절만 묵상하겠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다윗 왕은 흔히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죄를 버렸습니다. 하나는 교만이요, 또 하나는 주제넘는 오만입니다. 교만은 타인을 과소평가하지만, 오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둘 다 패망의 길입니다. ‘교만’에 대한 해답은 빌립보서2:5-8절의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사 종의 형체(사람)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이렇게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합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타인을 내려다보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기실 부자만은 아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합니다(마19:26). 한편, ‘오만’에 대한 대답은 빌립보서 3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적 의, 즉 모세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자신의 의를 버렸습니다. 그 의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의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할례, 안식일, 음식규정이 대표적입니다. 이때문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였습니다(갈3:2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 달려갔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매일묵상(2023/02/13-17)

잠언21:16절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명철(明哲)’이란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원어는 ‘분별력 또는 뛰어난 식견’’을 지칭하는 ‘세켈’로서, 지혜(호크마)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남편 나발을 죽이려고 올라올 때 급히 떡과 포도주를 마련하여 영접을 나간 아비가일의 모습에서 ‘세켈’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명철)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9:10)이라고 교훈합니다. 그렇다면, ‘명철의 길을 떠난다’는 것은 만유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며 모든 도덕과 윤리의 원천이신 주님과 상관없이 살겠다는 의도이고, 타락한 아담의 원죄의 발현입니다. 당연히 악(자기존중)으로 치닫게 되고, 그 귀결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생명이시기에, 빛을 떠나는 순간 어둠 속을 다니게 되고, 생명을 버리는 순간 사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망의 회중에’ 살게 됩니다. 본 잠언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고 교훈한 이유입니다. 여기 역설이 있습니다. 이탈자는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 떠났지만, 그의 마지막 도착지는 죽음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죽지만, 여기서의 죽음은 때 이른 죽음이나, 죽은 뒤 찾아 오는 영원한 죽음(심판)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이것을 밝히 선포합니다. 사망의 핵심은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삶이고, 생명의 핵심은 주님을 알아가는 명철(지혜)의 삶입니다(요17:3). 그러므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것은, 명철의 길을 떠난 신약의 예입니다(딤후4:10).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

잠언21:17절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
(새번역)

잠언은 가난하게 되는 여러 원인을 알려 줍니다.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게으름’이지만, 17절은 과도한 지출을 또 다른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전단은, 쾌락에 사로잡혀 사치와 향락을 쫓으면, 결국 빈곤하게 된다는 일반적인 진술이며, 후단은, 그 일례로서 오늘날 우리가 ‘파티’라 부르는 여러 축하 행사를 적어 놓았습니다. ‘술과 기름’은 이 당시 사치스러운 향연을 위해 이용되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술이야 지금도 파티에 늘 등장하는 요소이지만, ‘기름’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은 술을 반대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적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의인 노아도 술에 취해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왕 르무엘의 어머니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 것을 아들에게 훈계합니다. 왕의 지위에 앉아 술 때문에 법을 잊어버리고 송사를 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31:4,5). 한편, 잠언은 정당하게 모은 재산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밝혀줍니다(10:22). 다만, 그 부로 인해 교만해져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그 자세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향락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은 한 번 떠나면 다시 모으기 어렵습니다. 본 잠언은 전도서9:7-9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솔로몬은 향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시고,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며 열심히 일하도록 권고합니다. 성경적 삶은 고행도 방탕도 아닌 감사와 경건의 삶입니다“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5:6).

잠언21:18절
“악인은 의인의 속전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계획과 행동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단의 ‘악인’은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며, 공동체에 적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자를 지칭하고, 후단의 ‘사악한 자’라 함은 악인의 한 유형으로 인간관계에서 신실치 못한 사람(배신, 속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거짓의 함정에 빠뜨려 멸망시키려는 악인의 계획을 돌려서, 의인은 구하시고 그 대신 그 악인이 자신의 덫에 걸려 멸망케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 섭리의 집행자는 왕 같은 지도자들로서,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가 그 좋은 예입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의 고관으로서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몹씨 미워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한 바 있지만, 자신의 질녀가 황후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건 진행 중에 하나님의 섭리로 모르드개의 선행이 밝혀지고, 뒤 이은 황후 에스더의 고발로 하만은 결정타를 맞습니다. 격분한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장대에 하만 자신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 기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첫째, 모르드개의 선행입니다. 그는 왕의 암살을 막았으나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에스더가 가진 왕비라는 합법적 신분입니다. 이 두 요소는 하나님의 섭리의 테이블이 돌아가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하시면서 의인을 보호하고 계심을 믿고, 우리 사회에 인정되는 합법적인 신분을 갖도록 성실히 일하면서, 묵묵히 선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4:43)    

시편128:1절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새번역)

경건한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 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확립합니다. 그의 삶에 보이는 참된 행복의 요소를 시인은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경외(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계,1a)와 순종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습관들,1b), 그리고 수고한 만큼 받는 번영입니다(2). 뱀은 “너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창3:5)라며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키자, 인간은 “각기 제 길로 갔고”(사53:6),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경건한 자의 삶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어 시인은 그의 가정으로 가 보았습니다. 가정의 중심에는 신실한 아내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장래이며(3), 경건한 가정은 공동체의 견고한 구성원입니다(127:4-5). 진실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4). 만약, 경건을 한 사람이나, 한 가정에만 맞추면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시인은 신실한 자들의 모임인 시온, 즉 이스라엘로 그 눈을 돌립니다. 그곳의 평안, 번영, 축복은 경건한 자와 그 가족의 행복 조건이기에(5), 시인은 이스라엘의 평강을 구하며 시를 맺습니다(6). 신약에 이르면, 주님을 믿는 신실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고, 영적 이스라엘로 불리웁니다 (갈6: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간에 장벽을 쌓지않고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영적 예루살렘의 참된 시민임을 보여줍니다 (히12:22이하). 그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한 소망과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엡4:2-6).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편128:3).  

시편129:1절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129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4)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 (5-8)하나님의 심판을 기도. 1-4절에서 시인은 고난과 구원을 회상하고, 5-8절에서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침략을 많이 겪었으며, 매우 위협인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의로운신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몰아내신 구원을 여러 번 체험하였습니다 (4). 주님은 결코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은 이집트 왕국, 늘 괴롭혀온 블레셋, 무섭게 압박한 앗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시킨 바벨론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은 보존되었습니다. 지금 시인은 원수들의 심판을 위해 기도합니다(5-8).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일시적이며(6), 성공하지 못하며(7), 이웃의 호의조차 받지 못하고, 축복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될 것입니다(8). 물론, 여기서 시온이란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지만, 그 옛 언약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함께 모이는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이미 끊어진 옛 언약에 충실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시인이 드린 심판의 기도는 그들 위에도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 해석을 통해 영생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매일묵상(2023/2/6-10)

잠언21:13절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13절은 10절에 언급한 악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귀를 막고”라는 표현은 무자비한 자의 악한 성품을 은유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런 행동을 통해 악한 자란 의로움이 결여되어 있고, 정의와 자비에 무감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생생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악한 사람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해보복법이 작동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후단은 이 교훈을 위해 ‘부르짖다’와 ‘듣다’의 동사 둘을 사용하면서, 악인이 곤경에 빠졌을 때 이웃과 하나님에게서 모두 무시당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본 잠언의 배경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이 제일 타당합니다. 성경의 예는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마태복음18:23-35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비유입니다. 한 임금이 종들과 결산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갚을 재산이 없어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절망한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간청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의 간청에 귀를 막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자, 그를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야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교훈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잠언21:14절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품 속에 넣어 주는 뇌물은 격한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절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외부에 과시하지 않고 조용히 건네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은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데, 심지어 뇌물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효과가 있기에, 잠언은 지혜로운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견해입니다. 성경의 예로, 야곱이 20년만에 돌아올 때  격분한 형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예물을 보냈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격분하자, 신하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화목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성공하여 헤롯과 화해하였으나, 헤롯은 백성 앞에 연설 후 재앙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이 ‘신의 소리’라고 크게 부르짖었을 때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유였습니다(행12장;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다음으로, 부정적인 해석입니다. 잠언은 정의를 굽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뇌물공여를, ‘품 속에 넣어 준다’는 표현을 써서, 뇌물(선물)을 건네는  은밀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통상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선물은 분명, 뇌물로서 정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13절과 함께 생각한다면, 평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악인이, 위기의 상황을 맞아 뇌물을 써서 권력자의 분노를 잠재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견해 모두 타당하여, 주고 받는 사람들의 의도, 때와 장소 등을 고려하여 선악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는 가장 좋은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 새번역)

잠언21:15절
“정의가 실현될 때에, 의인은 기뻐하고, 악인은 절망한다
.(새번역)

본 잠언은 정의의 실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교훈합니다: 의인에게는 기쁨이요, 악인에게는 절망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악인에 대한 의인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분으로, 재판장과 같이, 정의가 집행되도록 모든 과정을 거치게 하신 뒤 마침내 승자의 기쁨을 의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섭리의 과정에는 주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인식 여하에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주님이 사용하시는 종(도구)들이며, 이를 위해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십니다(21:1).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9:26,새번역)는 잠언도 같은 취지입니다. 이 반면, 정의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집행될 때,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속여서 재물을 취득한 악인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른 판결을 받으려면, 주님께 그 사건을 의뢰하고 주님이 정하신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길’은 우리가 머물러야만 하는 강력한 산성이며, 정의를 베푸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늘 와서 호소하자, 이에 괴로워하는 불의한 재판장조차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하셨습니다 (눅18:1-8).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훼의 길을 따라 곧게 살면 친히 힘이 되어주시지만 나쁜 짓을 하면 망하게 하신다.” (잠언10:29,공동번역)

시편 126: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역사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것을 생각하며 감개무량해 합니다(1-3). 그러나 영토는 이전과 같지만 지배자는 페르샤 제국이고, 여러 이민족들의 비방과 공격, 그리고 자연재해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였습니다(스1-6장).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1,000년 전 출애굽 당시도 그러하였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고, 큰 기쁨에 차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광야의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이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하니,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절실합니다. 기쁨은 과거의 사건이고, 눈물이 현재를 점령하면서, 미래가 걱정이 됩니다. 주님께서 과거와 같이 지금 행동하신다면! 그런 열망에 사로잡혀, 시인은 네게브의 와디(건천)에 물이 흐르도록 기도합니다(4). 만약 주님이 비를 내리시면 메마른 시내는 갑자기 많은 물이 흐를 것이고, 그을린 땅은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자,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추수의 비유로 그것을 풀어내립니다. 일전에 큰 능력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씨 뿌리는 힘든 노동과 이 노동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서 곡식을 수확할 수 있으며, 그 때에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5-6).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 때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126:6,새번역)

시편 127: 1절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새번역)

127편은 일의 3 분야, 즉 집, 도시(1), 그리고 가정(3-5)을 들어,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단언합니다. 전문가들은 여러 문제를 토론하며 해법을 제시하나,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빼놓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집, 도시, 그리고 가정에 대한 바른 이해도, 바른 세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1-2절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하고 너는 가서 휴식 있는 삶을 즐기라”고 제안합니다. 성경에서 휴식의 반대는 일(work)이 아니라, 근심 걱정 등으로 제대로 쉬지 못함을 말합니다. 3-5절이 이런 잘못된 태도를 교정합니다. 주님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간의 활동을 정하셨기에, ‘태를 여는 것과 닫는 것’ 역시 주님이시며 (창29:31;30:2), 인간은 그분의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우리의 성취물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입니다(3). 집(가정)을 세우는 것과 성을 지키는 것도 같습니다(1-2). 모든 삶은 충만히 살아야 합니다. 즉, 삶이 주는 모든 기쁨을 누리며, 성공여부에 대한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책임과 의무를 다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각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인(파수하는 일), 건축가(집짓는 일), 주부(살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즐거움, 고된 일, 그리고 근심없는 휴식으로 특징짓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매일묵상(2023/1/30-2/3)

잠언21:10절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새번역)

본 잠언의 악인은 습관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의 원어는 “네페쉬’이며, 생물이나 사람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잠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악인은 오직 악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생물과 같다는 색조를 전달합니다. 만약 이를 ‘욕망’이나 ‘의도’라고 표현하더라도, 악행에 몰두하는 악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개정개역은 ‘영혼’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가까운 이웃’은 그들의 악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웃 사랑의 결여는 악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악인은 가족이나 친척,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악한 목적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무자비하게 대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비(햇빛, 공기, 비 등)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를 배우지 못하니, 타인은 다만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타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경우, 큰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 전형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반성하여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대신,  아벨만 없으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 반대가 의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그 유익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상’은 오직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는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편1:6, 새번역).       

잠언21:11절
“오만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어수룩한 사람이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지식을 더 얻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오만한 자의 벌과 지혜자의 번영을 전제하면서, 이런 결과는 쉽게 흔들리는 어수룩한 사람의 교훈에 효과적임을 밝힙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11절의 취지는 어수룩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특성을 대조한다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어리숙한 사람은 교훈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체험(예- 벌을 받는 오만한 자를 목격함)을 해야 비로서 배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 바로 지식을 얻는 자라고 생각합니다(잠언19:25). 다른 견해는, “어수룩한 사람은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깨달아 지혜자가 되고, 그 후에는 책망만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고 읽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수룩한 사람은 이중의 교육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범죄와 형벌 사이의 인과관계를 배웁니다. 둘째, 그 배움은 분별력으로 이어지고, 미덕과 보상의 관계를 배우는 데까지 갑니다. 그땐 지혜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편, 잠언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를 만드는 것이며(1:8), 이는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고전1:24). 복음을 깨달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죄인은 의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은혜에 감격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이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는 것은, “이 복음은….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언3:15).

잠언 21:12절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2절은 오만한 자는 물론, 모든 악인을 다루시는 주님께 눈을 돌립니다.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이는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압제하는 악인을 뽑아 내시려고 최선을 다 하실 것입니다. 세속 역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활동을 포착하지 못합니다만, 성경기자들은 그것을 보고 기록하여 우리로 교훈을 얻게 합니다(고전10:1-12). 창세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폭력이 충만하고 어릴 때부터 악한 자들로 가득차자,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어 모두 죽이셨습니다. 오직 의를 행하는 노아와 그 여덟식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어 아브라함 시대의 죄인들 소돔과 고모라 성읍 위에 불과 유황을 비오듯이 퍼부어 멸망시켰습니다. 오직 의로운 롯과 그 가족만 구원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빌립보 간수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전도와 연결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한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재앙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사사기부터는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어 살게 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감찰하시고, 그들이 반역의 길을 걸어 갈 때마다 이방민족을 통해 징계하시지만, 회개하면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도 다 그런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지혜의 길입니다.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잘 살핀다.”(잠언21:29,새번역)

시편 124: 1절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새번역)

다윗의 구원의 위대함을 4가지 큰 위험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먼저, 지진입니다. 지진은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3). 둘째는, 홍수입니다. 홍수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습니다(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사나운 맹수를 만나면 산 채로 잡혀 죽습니다(6). 넷째, ‘새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도 같은 운명입니다(7).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다치지 않고 원수의 그물에서 벗어났으며, 위협 그 자체도 파괴되었습니다(7). “주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 이는 다윗의 고백이자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무엘하5장은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분노한 모든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여 두 번 공격하였습니다. 그 위협을 본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처음에는 승리의 확신만을, 다음에는 구체적인 전략을 주심으로 모두 승리합니다(삼하5:17-25). 그 다윗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이르면 다윗이 드린 이 땅에서의 구원의 노래는 영원한 구원의 주제로 발전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 주님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 하늘에 간직한 영원한 유업, 그리고 보호하심을 찬양합니다(벧전1:3-9). 구약과 신약의 구원이란 메시지는 동일하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124:8,새번역).  

시편 125: 1절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새번역)

본 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전을 찾는 신앙 공동체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1,2). 시인이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선과 악이 섞여 분열되었고, 악인들의 득세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3). 시인은 주님이 악한 통치를 종식시키실 때를 소망하면서(4), 평화를 기원합니다(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페르샤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잘 이해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안전의 근거 (1)
B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2)
C    악에 대한 승리의 신뢰(3)
B′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4–5a)
A′   평화의 기원 ( 5b)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은 움직일 수 없는 주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어떤 인생의 폭풍에도 안전하게 됩니다. 둘째, 신뢰는 섭리로 통치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악한 자가 득세할 때 신자는 주님의 심판을 믿고 악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인내합니다. 셋째, 신뢰가 환경에 의해 도전받을 때는 기도의 때입니다. 다만, 그 기도는 악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을 향합니다. 즉 악인은 주님 손(섭리)에 맡기고 주님의 백성들이 악한 통치에 대항하다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환경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합니다. 요약하면, 시인은 “두려움에 솔직하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편125:4,새번역).

매일큐티(2023/1/25-27)

잠언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기심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사이도 파괴시킵니다. 집안의 경제적 주도권을 갖고 다투는 모습이 그 예입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대비된 ‘큰 집에서 산다’는 문구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저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자는 비도 이슬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후자는 윤택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보다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상식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낫지만, 솔로몬은 ‘다투는 여인’ 때문에 전자가 낫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돕고 살면, 초가삼간도 천국같으나, 늘 분쟁하고 다투면 아무리 유복한 환경이더라도 남편은 오히려 떨어져 혼자 지내고자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본 잠언은 먼저 아내를 향해 교훈하고자 합니다. 즉, 가정 화목의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남편의 권위를 존중해 주면서 가정을 세우는 것이지,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면 다툼만 일어나니 삼가야 한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시편 122: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본 시편은 긴 순례의 여정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 내에 들어온 감회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2). 시인은 메섹과 게달과 같은 ‘먼 나라’(120:5)의 ‘이방민족’들 틈에서 긴장하며 살다가, ‘형제와 친구’들(8)이 사는 ‘집’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는 감격에 찼습니다. 그는 잘 계획되고 건설된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 각 지파가 몰려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다윗 가문을 통한 통치의 모습을(3-5) 보자 저절로 ‘평안과 복’을 위해 기도합니다(6-9). 예루살렘 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통일성’입니다. 성의 구조 자체도 그렇고(3), 각기 다른 지파들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한 분이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아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4).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임명한 왕을 통해 사건 사건이 바로 잡혀지는 장소에 와 있습니다((5).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에, 시인은 ‘화평과 번영 그리고 복’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온 세상에서 아주 다양한 주의 백성이 교회로 몰려들어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갖고, 한 성령님 안에서 한 주님과 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엡4:1-16). 따라서, ‘기쁨과 일치를 위한 기도’의 부르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시편 123: 1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본 시편은 고난에 처한 시인의 심정과 믿음의 고백을 노래합니다. 121편의 순례자는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산보다 더 높은 분을 생각하고 이기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 조롱과 멸시에 둘러싸인 시인 역시 눈을 위로 돌려 같은 승리를 얻습니다. 실로, 시인의 언어와 기도는 암울한 환경을 뚫고 치솟아 올라, 오히려 그런 고난들을 충분히 포함하는 믿음의 넓이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15:3). 동일한 믿음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이어지기에,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3중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종과 여종이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으로부터 필요한 양식, 휴식, 그리고 도움을 기대하는 간절한 눈길입니다. 신자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괴로움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한 자에게 붙어 ‘조롱과 멸시’(4)를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신자의 길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끝으로,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43:3). 욕은 물론 조롱과 멸시의 말은 살인과 다름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5:22).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말에는 은혜의 소금을 쳐서 맛을 내야 할 것입니다.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멸시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 (시편123:4, 새번역).

매일묵상(2023/1/16-20)

잠언21:6절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새번역)

악함이란 교만을 등불로 삼고(4), 폭력과 구부러진 말로 표현하며(7-8), 은혜가 없고 타인의 파멸을 갈망합니다(10). 그들은 거만하며(24), 종교적이나 위선되고(27), 뻔뻔하나 반성하지 않습니다(29). 5절의 ‘성급한 사람’은 6절에서 ‘속여서 재산을 모든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가난, 결핍’은 ‘죽음과 안개’로 귀결됩니다. 본 절은, ‘속여서 모은 재산’ 자체가 ‘속여 취한 자’를 속인다는 역설을 교훈합니다. 불의한 재물은 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기에, “계획하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5절로 돌아가야 하며, 그 길은 교만을 버리고, 정의과 공평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경외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기에, 악인의 형통을 미워하시고(4), 악인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구약은,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 것 같은 섭리(6), 혹은 대리자인 왕(지도자)을 통해 집행하시거나(1), 직접 하늘에서 집행하시는 경우 등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범죄자 아간을 찾아낼 때 여호수아가 사용한 방법이고, 둘째는 페르샤 왕으로 하만을 처단하게 하신 경우이며,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멸망시킨 경우입니다. 물론, 악인이 회개하면 주님은 긍휼히 여기사 용서하시지만,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그 반면 주님이 미워하는 자는 잠시 그 형통을 더 누리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끝장입니다 (시편73:18,19). 근심은 탐욕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근심을 주님 손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공급을 신뢰한 뒤, 삶을 계획하고 부지런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12:29).  

잠언21:7 절
“악인의 폭력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가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은 ‘속이는 자’(6)와 ‘폭력을 행하는 자’(7)로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멸망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그들이 알지만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여, 정의와 공의의 주님과 원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니’는, 히브리어 동사 ‘가라르’의 번역으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역사를 보면, 주님은 악인이 재물과 권력을 위해 펼쳐놓은 그물에 악인 자신이 걸려들어 멸망당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세운 그 장대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처형된 사례나, 또, 페르샤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도록 정한 그 날에 칙령이 바뀌어, 오히려 유대인의 대적들이 집단 처형된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인도 회개하여 바르게 살면 생명을 얻습니다. 잠언은 이점을 긍정하지만, 어떻게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야합니다.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가 오자,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칼을 가진 모든 자들은 칼로 망한다” 하신 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마26:52). 기적적 치유와 선함을 경험한 말고는 회개할 기회가 왔습니다. 다만, 선택은 말고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격한 갈등의 세상에 남겨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4,45)

잠언21:8 절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새번역)

8절은 3-7절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거만한 자(4), 성급한 자(5), 속이는 자(6), 폭력을 행하는 자(7)에 대하여 ‘죄인’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길은 이중성 때문에 ‘구부러졌습니다.’ 실로,’올바른 길’ ‘곧은 길’은 그들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누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냐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걷는 길(삶의 방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행실은 올바르고, 곧은 길을 걸어갑니다. 솔로몬은, ‘길’이란 은유 대신 ‘행실’이라고 적어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는 동시에, 그런 행실은 올바른 길을 걸어간 뒤에야 얻어지는 인격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죄인의 길’로 행한 전형이 아담이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길이었고, 그것은 다시 전 인류가 걸어간 길로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길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삶이기에 당연히 구부러질 수밖에 없고, 죄인이란 심판과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사망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로잡혀 전 세계로 흩어졌고, 모든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에 반하여, ‘깨끗한 사람’이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실한 양심의 소유자로서 바른 길,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길, 도덕의 길로 곧장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가운데 주의깊게 보시는 하나님의 칭찬은 그들의 참된 보물이며,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은 그들의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시편120: 1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34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시의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시의 의미입니다. 15편의 시들은, 세 편씩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각 그룹마다 다음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고통의 상황(첫째), 주님의 권능(둘째), 주님 안에서 안전(셋째). 첫 번째 그룹의 시작인 120편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서 시인을 향한 중상모략을 언급합니다.  그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었고, 응답받았습니다(1,2). 시인은 이 경험을 통해 “환난을 당하면 기도하고 주님의 돌보심 속에 머물러라!”고 교훈합니다. 한편, 4절(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은 악인의 본질이나, 혹은 악인에 대한 확실한 보응을 의미할 수 있지만, ‘보복하지 말고 주님 손에 넘겨라’( 잠언20:22; 롬12:19)는 말씀에 귀착하는 면은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잘못, 거짓말, 속임 등으로 피해를 당하였을 경우, 사적인 복수 대신, 그 사안을 주님 손에 맡기고 거기서 떠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화를 가질 수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5-7) 시인에게서 인내의 모습을 보게됩니다(5). ‘메섹’은 이스라엘 북방 한계 밖에, 게셀은 아라비아 광야 남동부에 있기 때문에, 거치른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지금 시인은 평화를 원하나, 세상은 독을 머금고 싸우려 합니다(7).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심판자이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시편121: 1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순례자의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요단 동쪽이나 팔레스틴 평야쪽에서 오르고 있다면, 가파른 산 길이 보이면서 큰 산들이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저 산들 속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무사히 성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혹은 인생의 큰 산들이 가로막을 때 나를 지켜주실 분은 누구인가?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 이때 시인은 믿음의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어떤 것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위협이 일어나도, 삶의 여정이 어려워도 그분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2). 심지어 하늘에 늘 떠 있는 해와 달 역시 그분의 섭리 하에 있기에 안전하게 순례의 여정, 인생의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6). 시인의 마음에는 큰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합니다(3-8).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안전만은 확실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창조주에서 시인을 돌보시고 구출하시는 구속주로 역할이 바뀌어서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영혼을 지키시는 것 뿐만 아니라, 시인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실 ‘동반자’이십니다(8). 시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성부), 구속주이시고(성자), 우리와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분(성령)임을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이렇게 안전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시인은 기쁨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