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11/13-17)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할 때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벧엘에 이르러 잠을 청합니다. 꿈에 야곱은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와 그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창28장). 이 사건은 75세의 야곱이 참된 신앙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전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수년 전 최윤지 자매가 한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수원 광교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아는 언니를 만났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언니 아버지의 믿음이 강건해 지게 되는 계기를 들었습니다. 언니의 친정은 여의도 침례교회를 나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약사로서 이대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였습니다. 2010년 전후로 이대 앞에 재개발이 시작되자 언니의 부친은 대형병원과 그와 관련된 약국이 입점하면 자신의 약국이 설 자리를 잃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작은 의원이 들어오게 해 주세요!” 막상 재개발이 끝나자 자신의 건물에 작은 의원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학교앞작은의원” 이었으며 현재도 운영 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아버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달은 분(A. M. Toplady)의 시가 있습니다.

내 손에는 드릴 아무 것도 없어요
다만 당신의 십자가를 붙뜰뿐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당신에게 가오니 입혀옵소서
힘 없어 당신을 앙망하오니 은혜주옵소서
범죄한 나, 보혈의 샘으로 날라가오니
씻어주옵소서,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창28:16,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황선우는 자유형 200미터에서 2022항조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주인공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수영법을 터득한 뒤 이렇게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5살부터 수영을 하던 그는 고등학생시절 , 왼 팔에 30%, 오른 팔에 70%의 힘을 배분하여 리듬을 타면서 수영하는 자신만의 영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이는 미국 대표 선수들이 주로 하는 ‘로핑 영법(loping stroke – 엇박자 수영)’으로, 한쪽에 힘을 더 싣는 비대칭 스트로크입니다. 그는 수영을 너무 좋아해서, 취미조차 유투브로 다른 선수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6일을 훈련하며 – 오전에 2-3시간, 오후에 2-3시간 수영 – 저녁 후에는 2시간 정도 체력단력을 위해 운동합니다. 확실히 수영은 그의 인생이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 역시 같습니다. 우리가 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바다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믿음의 비밀을 터득하고,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여야 합니다.  훈련 방법은 ‘은혜의 수단’이며, 훈련 장소는 세상입니다. 은혜의 수단인 성경읽기, 기도, 예배, 교제, 성만찬 참여, 침례, 봉사와 섬김을 통해 힘과 지혜를 받고, 각팍한 현실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실현해 나가는 삶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창조의 목적과 삶의 문법을 깨닫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고, 우리 삶의 문법은‘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잠언27:8절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히브리 원문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처럼”이 문두에 나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의 불안정한 처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어미새는 둥지를 지키며 알을 품고 부화시켜 새끼를 잘 길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절의 어미새는 둥지를 떠나 홀로 애처롭게 떠돌고 있습니다. 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떠나 헤매이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비유입니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고향은 가나안 정복 후 각 지파별 가족별로 분배받은 땅을 의미합니다.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각 개인이 임의로 사고 팔 수가 없었습니다. 혹 빚으로 넘어가면, 가까운 친족이 대신 사주어야 하였고(고엘제도), 그렇지 못할 경우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기하여 원소유주에게 돌아가도록 규정되었습니다(희년제도). 이렇게 하나님이 주셔서, 양도할 수 없는 땅을 떠나 유리한다는 것은 큰 저주입니다. 비록 지금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가 정착하였으나 성경의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세속국가 중 하나입니다. 복음의 시대에는 물리적 고향 보다도 영적 고향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내세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대신 모세율법을 고수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방황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이며, 신명기는 그런 상황을 이미 예견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본절의 문맥상, 참된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 가운데 머무르지 못하고, 둥지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이 영적으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3:7,새번역).

잠언27:9절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본절은 친구의 충고가 주는 즐거움을 ‘기름과 향’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기름’은 식용으로 쓰이는 기름이 아니라 감람유에 여러 향을 섞은 것으로 머리에 붓거나 피부에 바르는 화장용 기름을 의미합니다(룻3:3). 또한 ‘향’이란 침양이나 계피 등 향기로운 냄새를 발하는 물질을 가리킵니다. 당시 근동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러한 향으로 집안을 단장하고 향유를 손님에게 붓는 관습이 있었습니다(눅7:46). 한편, ‘충성된 권고’의 직역은 ‘생명의 권고’로서,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의 권면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친구의 이런 충성스러운 권고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하는 향과 기름과 같이 아름답다고 평가합니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재상 인상여가 조나라 환관 무현의 식객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무현은 보배 ‘화씨지벽’을 우연히 손에 넣자, 보고 싶어하는 조왕에게 거짓으로 도난당하였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 탄로나자, 무현은 연나라로 망명하려 하였고, 인상여는 그에게 충성된 권고를 합니다: “연나라는 조나라보다 약해 대인이 망명하면 곧 잡아 조왕에게 압송할 것입니다. 차라리 어깨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려 죄를 청하면 요행히 벌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무현은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화씨지벽을 바치며 사죄하니 용서받았다는 고사입니다. 주님은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눅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제하신 권고로써, 우리의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잠언27:10절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본절은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전단은 자신의 친구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친구도 버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아버지의 친구에 대한 봉양의 명령은 일견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솔로몬은 친구 관계가 가족 관계만큼이나 의미 있고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친구로 맺어진 관계가 중요하며, 서로에게 특별한 책임이 수반됨을 함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중단(中段)은 환난의 때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즉 재난을 피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형제를 찾지 말라는 의미로써,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해 태어났다”(17:17)는 잠언과 상반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각 잠언은 각각의 상황에 따른 권면이며, 본절은 형제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라도 친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위급할 때 좋은 친구가 혈육 이상으로 도움을 준 사례는 고금에 많이 있습니다. 후단은 중단과 같은 권고를 한 이유로써,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이나 형제 보다, 이웃에 있는 가깝고 친근하게 지내는 친구에게서 오히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 잠언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신앙의 박해 시기에는 친척들이 오히려 박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1795-1839) 역시 친척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순교당하였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매일묵상(2023/11/6-10)

회심에는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성경의 회심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 결과 모든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방을 치우는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섬기려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의 실화입니다.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한 후, 면담을 위해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주님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주님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주님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식사를 준비할 때도 주님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과 권고를 천진난만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서 있지 못하면 그분의 믿음은 부인 당하게 됩니다. “마음의 의”(벧전3:15-17)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남을 비웃는 자들은 천국 밖에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삶은 사랑의 지혜가 수반되어 있습니다(고전14: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10:15)

전도서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오래 전 영화 “오염된 자식들”이 떠오릅니다. 줄거리는 병구(안성기 역)는 평범한 여자 형자와 사귀다가, 출세를 위해 배신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딸(명희- 장애인)과 결혼합니다. 병구는 결혼 후 장애인 명희를 섬기며 매우 고생하나, 어떤 계기로 명희는 수술을 받아 장애인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자, 병구는 명희에게 이혼 당하고 비참한 꼴로 몰락한 뒤, 받은 위자료 3억원 모두를 고아원에 기부한다는 내용입니다. 위 영화는 유익서의 소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극화한 것으로 물론 허구이나, 현실의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동과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구부러지고 모자란 인간의 본성은 고치지 못합니다.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의 모습이 그 전형입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 중 그 한 사람만 선택하여 고쳐주셨으나, 그는 안식일을 위반하였다고 추궁받자 오히려 주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고 배신한 아담과 같습니다. 복음의 역사에서 장애인이 기적의 치유를 받거나, 절박한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행하지 못한다면 “명희”나 “38년된 병자”처럼 더 악화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시어 속죄권을 확보하신 뒤,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려고 당신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사, 먼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뒤,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살게하시는 작업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4:8)

잠언27:5절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새번역)

5,6절의 주제어는 사랑인데 사랑의 표현은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책망이 참된 사랑의 표현일 수 있고, 오히려 입맞춤은 배신을 숨기는 도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자는 드러내어 꾸짖기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면책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 제자, 혹 친구가 개선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만약 책망이 없다면, 과거의 잘못이 되풀이 될 것이므로 책망은 드러내 놓고 해야됩니다. 표현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한편, ‘숨은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꾸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책망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가 최선의 유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도, 비겁하고, 소심하며, 심지어 게을러서, 모험을 감수하기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숨은 사랑은 어두운 밤에 청년이 처녀에게 윙크를 보내는 것과 같아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꾸지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러나 어른의 경우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바로잡는 행동(징계)은 함께 갑니다. 구약성경에도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레19:17)에 뒤이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19:18)는 명령이 주어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로 “책망” 혹은 “징계”가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이것들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히12:11). 우리는 올바른 “책망”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꾸지람은 낙심하지 말고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11).

잠언27:6절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본절은 5절과 동일한 내용이나 좀더 구체적입니다. 즉 친구의 ‘아픈 책망’은 ‘면책-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과 ‘잦은 입맞춤’은 ‘숨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5절은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 자체의 가치를 말하지만, 본절은 친구가 하는 ‘아픈 책망’의 출처가 미움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숨은 의도는 친구의 권고를 받아들여 잘못된 행동을 고치라는 요청입니다. ‘아픈 책망’으로 의역된 원어는 ‘피츠에’로서 ‘외적인 상처’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상당히 강한 어투로 꾸짖는 친구의 책망이 주는 아픔을 빗대었습니다.이른바 ‘마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사랑의 동기에서 나왔고, 또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에 선한 행동입니다. 그 반면,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악한 의도를 숨기고 외적으로는 친근한 척 한다는 의미로써 후단 말미의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란 표현이 잘 말해줍니다. 그 원수는 잠언의 제자가 내심 밉지만 이용하려는 속셈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선적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뱀과 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그 사람의 인품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 지혜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주님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고자 하면, 우리의 분별력은 모든 사람들 보다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시편119:98-100).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119:104)

잠언27: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인간관계에서 상황과 때가 중요함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꿀은 ‘좋은 것’의 상징으로 본절이 위치한 문맥에서는 ‘좋은 충고’를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싫어한다’의 원어는 ‘타부쓰’로 ‘발로 밟다’는 의미인데, 강한 혐오와 멸시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교만해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충고라도 멸시한다는 뜻을, 후단은 배고픈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먹어도 단 것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충고라도 겸손하게 수용할 수 있음을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주님의 면박을 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절박한 그녀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냉담한 모습을 보이셨으나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본절은 환경과 형편에 따라 마음이 좌우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다루지만, 좀 더 관찰하면 비록 풍요할지라도 거슬리는 충고에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의 예는 다윗 왕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통한 뒤, 남편 우리아를 제거하고, 밧세바를 취해들였습니다. 다윗은 아이를 낳기까지 무려 1년이나 외식하고 살았습니다. 회개를 기다리신 주님은 드디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범죄를 추궁하였고, 이에 다윗은 큰 소리로 회개하며 애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시가 시편51편입니다. 모세율법에 따르면 살인죄와 간음죄는 제사를 통해 용서받지 못하고, 오직 사형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다윗은 왕이라 집행할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집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언17:10)

매일묵상(2023/10/30-11/3)

(내 삶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p144-146)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면 힘든 일도 기쁘고, 의와 공평도 베풀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비밀입니다. 더비셔의 클리프 대학 학장을 역임한 사무엘 채드윅은 이 원리를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어느 주일에 콜리 목사가 아이들에게 존 뉴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만일 뉴턴이 구두닦이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구두를 닦아 동네 최고의 구두닦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요지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아버지의 신발을 모두 닦는 것이 집에서 자신이 맡은 일이었던 터라 바짝 다가앉아 귀담아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구두 닦는 일이 싫었고 아버지의 부츠는 특히 싫었다. 마침 그 기념 주일에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에 구두를 닦는 일은 최악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부츠부터 먼저 닦아 내려 놓으며 한시름 놓았는데, 부츠를 보는 순간 마치 예수님이 신으실 것처럼 구두를 닦아야 한다던 목사님의 말씀이 내게 도전으로 다가왔다….이 부츠를 예수 그리스도깨서 신으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부츠를 들고 다시 닦았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것이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가장 단순한 일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분께 하듯 하는 버릇이 들었다.” 고(故) 김창엽 목사/교수님은 70대 후반에, 사모님이 뇌출혈을 당하셨습니다. 돌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 주님께 기도드렸더니 “내게 하듯 하라”는 깨달음을 받아 힘이 났다고 하신 경험과 같은 취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잠언27: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27장은 이웃 간의 우정을 다루는 1-22절과 지혜로운 경제적 활동을 촉구하는 23-2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1,2절은 자랑, 칭찬을 뜻하는 ‘할랄’이란 단어가 나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손’히 살아갈 것을 교훈합니다. 사람이란 권력, 재물, 건강, 명예 등을 가졌거나, 형통하면 자랑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한 대목입니다. 자라는 학에게 부탁하여 막대기를 물고 하늘을 나르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때 땅에서 여러 동물들이 칭찬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자, 자라는 학의 경고도 무시한 채 입을 열고 자랑하려는 순간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동일한 속담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갑옷 입은 자가 벗은 자처럼 자랑하지 말라’(왕상20:11) – 비시 8세기 중엽 아합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아람 왕 벤하닷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분노한 벤하닷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당하고 아람 왕 벤하닷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또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그 해에 소출이 풍성하자 심중에 창고를 더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는 부요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한 자임이 드러났습니다(예컨데,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부자). 하나님은 그 날 밤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12:16-21). 우리는 스스로 든든히 섰다고 생각할 때조차 진실로 허사이므로, 항상 주님을 경외하며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잠언27:2절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본절 역시 부적절한 자랑에 관한 경고이지만, 그 대상이 ‘미래의 확실성’이 아니라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입니다. ‘타인’의 원어는 ‘자르’로서 ‘낯선 사람’을 의미하나, 본절의 문맥에서는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실상 이해 관계 없는 타인의 판단은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후단은 전단의 취지를 또 한 번 반복하는데, ‘타인’ 대신 ‘외인-outsider’을, ‘입’ 대신 ‘입술’로 대체함으로 문장의 아름다움을 갖추려 하였습니다. 사회에서도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경멸을 받는데, 주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할 바가 아닙니다. ‘칭찬’이란 냄새와 같아서 자신이 하면 악취가 나고 타인이 하면 향기가 나는 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독일속담). 한편, 누군가로부터 ‘칭찬=영광’을 받으려 하는 태도는 인간의 본성이며 양면성이 있습니다. 만약, 그 본성이 교만으로 가면 심판을 받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하는 중, 백성들이 큰 소리로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창자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행12:23). 그 반면, 건강한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 안에 자랑(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자랑’은 ‘겸손’과 결부된 자랑이어야 하고, 그 방법은 어떤 자랑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그 방향을 돌리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고후10:17).“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잠언27:3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본절에서 ‘돌’이란 나르기 힘든 무거운 바위를, ‘모래’는 해변의 모래를 의미하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움이 함축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사 현장에서 이들의 일부인 모래와 자갈을 지고 힘들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인 고통은 미련한 자가 야기 하는 ‘분노의 짐’ 보다 가볍다는 것이 잠언의 평가입니다. 잠언은 ‘분노의 짐’을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 미련한 자의 불쾌한 행동이나 미숙한 업무처리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미련한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로서, 이들의 행위 대부분은 범죄를 구성합니다. 연예인 박수홍 씨는 친형 부부가 30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100억원 이상 횡령한 사실에 분노하여 소송 중입니다. 심지어 그의 형수 이씨(200억 대 부동산 보유)는 박씨의 돈으로 상가를 취득하고 자신들과 어머니 이름으로 등기하였으며, 박씨는 16년 후에야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데일리안, 2023/8/16). 박씨의 변호사는 “피해자가 바라는 건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나 이들은 재판장에게만 반성하고 있다”고 개탄하였습니다. 횡령으로 상대방을 분노하게 하면 세상에서는 횡령죄이지만 성경에서는 살인죄로서(마5:22), 이의 해결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 형과 형수가 잘못을 시인하고, 동생의 재산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나 이것이 어려우며,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잠17:12).

잠언27:4절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본절에서 질투(투기)는 ‘분’이나 ‘노’보다 다루기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먼저 분과 노가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적어 놓아 경고합니다. 하마스로 인해 분노한 이스라엘에게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사건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분노에 삼켜서 실수 하지 말라고 충고 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좋은 조언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분노의 힘을 넘어서서, 질투를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뼈가 썩음과 같은 고통 속에 있게 합니다(잠14:30). 또한,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나, 질투는 대부분 숨겨져 있으며, 결과를 볼 때까지 여전히 음흉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그 시발점은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가인에게 이를 경고 하였으나 질투는 그를 삼켜버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같습니다. 사울 왕이 골리앗과 블레셋의 전투에서 승전해 돌아오자, 마중나온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라고 노래하여 사울 왕을 격분시켰습니다. 이후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여 평생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의 사위이자 군대장관이었지만, 사울이 죽기까지 10년을 광야로 도피하였다가 결국 블레셋에 망명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윗은 사울에게 선행을 베풀어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사을의 왕됨을 존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막지 못하는 질투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3:4,5). 독생자를 우리에게 아낌 없이 주심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복음의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매일묵상(2023/10/23-27)

마태복음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본절에 감동을 받은 3세기 로마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황금으로 써서 벽에 붙였습니다 (황금률). 그러나 많은 교회가 항상 사랑의 공동체는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원한을 품고, 마음에는 악의와 질투가 자라며,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조차 생각합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란 칼과 총을 들고 당신을 쫓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제거하고, 당신의 평판을 나쁘게 하려 합니다. 실로 당신을 미워하고 삼키고 짓누르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허나, 원수 사랑은 친구에 대한 사랑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친구와는 따뜻한 교류가 넘치지만, 원수에 대한 사랑은 서로 간에 주고 받는 따뜻함은 없습니다. 다만, 원수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주릴 때 먹을 것을 주는 것과 같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유익을 위해 일하는 수준입니다(롬12:20). 그리스도인은 원수의 불의에 대한 심판은 이미 주님 손에 맡겨 놓았습니다. 만약 이런 순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우리의 소금은 그 짠 맛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고(마5:13), 우리의 빛은 환하게 비추일 것입니다(마5:16). 마귀의 방법은 선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은 선일 경우에만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법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며, 이때 황금률이 내포한 의미를 진정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111-113).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

잠언26:24-25절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23절의 “온유한 입술”이란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가장한 말’이고, ‘악한 마음’은 ‘속임을 품은 마음’임을 설명하고(24절), 이어 ‘매력적으로 보이는 말’은 ‘듣기에 좋은 말’을 의미하나, 원수의 경우 마음은 미움만 가득하니 유의하라(25절)는 교훈입니다. 먼저, 솔로몬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감정과 진의를 숨기면서 잠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자의 특징을 서술합니다(24). 그들은 표리부동하여 입술로는 멋진 계획과 장래를 말하나, 그들의 속은 맹렬한 증오나 속임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친구,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늑대였다!’ 는 신파극과 같습니다. 25절이 지혜를 말합니다: 순진하게 믿지 말라! 우리에게 돈이 된다는 타인의 말에는 늘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심을 감추고 부정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표식을 잡아내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범죄가 ‘사기죄’입니다. 그 만큼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범죄가 성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사업이나 투자를 요청하는 경우에, 성공만 아니라, 실패의 경우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투자란 징조입니다. 한편, ‘일곱’이란 완전수이기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란 모든 가증함(왜곡, 속임, 위선, 험당, 탐욕, 음행, 악함, 교만 등)을 의미합니다. 매사에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고,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며 노력한 만큼 받겠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55:21)

잠언26:26절
“미운 생각을 교활하게 감추고 있다 하여도, 그 악의는 회중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새번역)

본절은 사람이 잠시 동안은 본심을 숨길 수 있어도 마침내 드러나고 만다는 교훈입니다. 23-25절은 ‘악한 원수’가 미움과 악을 감추고 있음을 묘사하고,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하되, 그 중 26절은 그들이 교활하게 감추고 있던 ‘미운 생각’이 드디어 회중 앞에 드러나서 파멸됨을 지적합니다. 설혹, 이 세상에서는 모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도 남김 없이 밝혀질 것입니다(눅12:2;마10:26).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나, 심판은 우리의 행위를 대상으로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벌거벗은 듯이 드러날 그 날을 생각하면 자연히 경건하게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지혜이지요! 한편, ‘교활’이라고 번역된 ‘맛솨온’은 친절한 언어로 사람을 속이는 자를 지칭합니다(위선자). ‘회중’의 원어 ‘카할’은 일반적인 모임이나, 또는 재판을 위한 모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라면, 조만간 그의 악함이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나고 그 어리석은 자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임을, 후자라면 재판석에서 그의 악함이 밝혀지고 그에 합당한 벌이 내려짐을 말합니다. 본절의 좋은 예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마7:15)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경계해야 됩니다.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맺는 열매, 즉 가르침과 삶의 방식, 그들의 제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6:3).

잠언26:27절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본절은 구약성경 도처에 나오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무릇 타인을 해하려고 덫을 놓은 자들은 자신이 만든 그 덫에 걸릴 것이므로 아예 악한 일을 꾀하지 말아야 합니다(시편7:15; 전10:8). 다만, 여기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인과응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돌을 굴리는 자가 도리어 그것에 치인다’는 말은 악인이 의인을 해하려고 큰 돌을 힘껏 밀어 올렸으나, 오히려 그 돌이 뒤로 굴러 악인 자신을 치는 경우입니다. 성경의 예로는 하만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차할 때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모르드개는 물론 유다 민족을 전부 몰살시키고자 하되, 특히 모르드개는 그냥 죽이는 것이 경하다고 생각하여, 높은 장대를 준비하고 거기에 매달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된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시켜 모르드개를 높이게 하고, 이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에스더7:10). 세속 역사의 예는 로비에스삐에르입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처형하였으나 마침내 자신도 잡혀 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베푼 선행이 오히려 큰 축복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갈6:7), 행한 대로 받으며 (마16:27), 헤아린 그대로 헤아림을 받는 것은(마7:2) 하나님의 법칙으로, 어떤 신학자는 ‘거울의 법칙’ 혹은 ‘부메랑의 법칙’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잠언26:28절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본절의 전단은 상대방을 미워하여 끝까지 해치려는 자를 말하며, 그의 수단은 거짓말입니다. 후단은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고 있는데, 잠언의 제자들은 그런 자들에게 속지말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마7:15-223). ‘아첨하는’의 원어는 ‘할라크’로 ‘매끄러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첨하는 입’이란 진실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종말은 패망입니다. 그러면 거짓말하고 아첨하는 자와 그 상대방 중 패망하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양쪽 다 해당됩니다. 본문의 목적은 거짓말 하고 아첨하는 자를 경고하며, 또한 어리석게도 그 매끄러운 말에 속아 파멸로 들어서는 자도 경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 국무부 과장은 미국의 맹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고 사직하면서, “끔찍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면 어느 쪽이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민주주의의 체제 역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만, 다른 정치체제 보다 낫다고 보입니다. 기타의 정치체제와 달리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권력에 대하여 소신 있게 비판할 수 있고, 자신이 행한 그 비판을 책임지는 정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명예훼손, 손해배상 등의 책임).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 역시 하나님을 떠난 세상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당연히 거짓말, 아부 등이 횡행하게 되지만, 다른 편에서는 그런 환경을 통해 주님을 중히 여기는 자를 알게 합니다. 실로 그들은 주님의 자랑거리입니다(욥1: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매일묵상(2023/10/16-20)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 “온전한 그리스도인” 중 ‘그리스도인의 좀 더 넓은 사랑’(11-113)에 관한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도 사랑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한 소녀를, 한 소녀가 한 소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또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수 있으며, 친구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 즉 상호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상대방에게 잘해 준다. 상대방이 내게 친절을 베풀면, 나도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푼다. 이 상호적 사랑을 근거한 세상의 최고의 가르침은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은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배법칙은 황금률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사랑을 ‘원수와 핍박하는 자’(마5:44)까지 넗히라고 하신 주님의 요구는 바로 여기에 근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물론,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사랑은 품위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개나 돼지 같이 거룩한 것과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마7:6), 우리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거짓된 자들(마7:15-20)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잠언26: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본절에서 ‘말쟁이’란 ‘뒤에서 흠 잡고 원망, 불평한다’는 뜻의 ‘라간’의 파생어로, 나쁜 말을 옮기고 다니며 원망과 불평을 조장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는 다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불을 끄기 위해 더 이상 나무를 공급하지 않듯이, 말쟁이를 제거해야 다툼이 그칩니다.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은 첩자를 통해 정보를 얻고, 내부를 이간시켜 분열하도록 전략을 펴라고 합니다. 이의 대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헬라어는 ‘디아볼로- 참소하는 자’로서, ‘사이’를 뜻하는 ‘디아’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입니다. 즉 마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생각과 말을 던져 이간시키는 영적존재입니다. 좋은 예가 에덴 동산의 타락 사건이며, 마귀는 하나님을 참소하여 하와를 넘어뜨렸습니다. 성도들의 부르심 중 하나는 이 영적 존재들과의 전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영적 존재가 있음조차 알지 못하여, 마귀의 공격은 성도들과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고전적 방법이 교회 내 ‘말쟁이’를 통해 오해, 시비, 원망, 불평을 조장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다툼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게을러지고 ‘말쟁이’가 될 우려가 있는 60이 안된 과부를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올리지 말고, 오히려 결혼하도록 하여 아이를 낳으며 집을 다스리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딤전5:11-15). 우리는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말하여,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고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잠언26: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본절은 20절과 같은 교훈을 다른 측면에 말합니다. 20절은 타는 불도 태울 나무가 없으면 꺼지듯이 험담하는 사람(말쟁이)이 없어지면 다툼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21절은 이미 타고 있는 불에 숯이나 나무를 더하면 더욱 타오르는 것 같이,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다툼을 좋아하는 자가 끼어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우려가 있음을 주의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잠언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모임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추방되어야 합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의 범죄적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아가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커어튼’입니다. 이미 5건의 살인을 부추킨 스티븐 노튼은 토비 러트렐 저택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토비가 부인 데이지의 잔소리와 히스테리에 늘상 시달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부인에 대한 토비의 열등감을 자극하였습니다. 아내에게 화가 난 토비는 술김에 토끼를 노리는 척 하면서 들판에 잠깐 나타났던 데이지를 라이플로 쏘나, 다행히 빗나가 부상만 입힙니다. 토비는 바로 후회하고 두 부부는 손을 잡고 울며 화해합니다. 결국 작가인 크리스티는 탐정 포와르를 통해 살인 교사자 스티븐 노튼을 죽이고 맙니다. 스티븐 노튼과 같은 존재가 마귀입니다. 이 적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화를 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엡5:26,27).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잠언26:22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험담(gossips)을 경계하는 본절은 18:8절과 동일합니다만, 18:8절은 어리석은 자를 다루는 문맥에 놓여 있고, 본절은 다툼에 관한 교훈(26:20-22절)의 결론입니다.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킵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아무런 배려도 없이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추방되어야 할 악인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본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별식 –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피하여야 합니다. 만약 그것에 귀 기울인다면, 그의 인격은 타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26:23절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6:17-28까지 언급되는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 중, 23-28절은 그 절정인 ‘악한 원수’를 다룹니다. 그 중 23-25절은 ‘악한 원수’의 속임을, 26-28절은 그들의 파멸을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거짓된 말은 결국 이웃에게 해를 입힌다는 의미에서 앞 단락(속임, 험담, 다툼)과 내용이 연결되나, 본절의 초점은 위선자입니다. 솔로몬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말을 저급한 은으로 도금한 토기에 비유합니다. 이 토기는 마치 표면은 은빛 그릇 같은 착각을 갖게 하지만 실제로는 모조품(짝뚱)으로 이를 모르고 사면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매끄러운 말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특히 도덕적 혹은 종교적으로 경건을 가장하면서 속에는 악한 마음을 품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면, 악한 의도를 알게 됩니다. 한편, “온유한”에 해당하는 ‘똘레킴’은 ‘불타다’ ‘열렬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입술’은 ‘불타는 입술’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의 해석적 다툼이 있으나, 실제로는 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양 온유한 입술로 그 의도를 꾸민다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의 좋은 예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잡으러 많은 무리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친구인양 붙잡고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는 말과 함께 입맞춤으로 주님을 성전 경찰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본 잠언은 악인들의 모습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면 분별력을 갖출 수 았습니다.“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매일묵상(2023/10/9-13)

잠언26:14절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솔로몬은 게으른 자의 밭을 지나가다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로 덮힌 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그 게으른 자의 ‘열망’은 오직 ‘게으름’ 뿐이기에, 그 밭의 소유자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24:30-34). 그런 게으른 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있는 곳은 침상입니다! 문짝은 벽이나 기둥에 고정되어 돌쩌귀(경첩)를 따라 계속 회전하지만 절대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게으른 자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구르는 모습이 마치 이와 같아 보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문짝은 돌쩌귀를 따라서 회전하여 바람과 소리를 막아주는 등 사람에게 많은 유익을 주지만, 게으른 자는 움직일 수 있지만 땀흘리기 싫어하여 아무데도 가지 않으며,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개선이나 진보도 없습니다. 그들의 밭은 잡풀과 가시덤불로 뒤덮혀 있고, 그들의 포도원의 돌담은 무너져, 동물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고, 그들의 옷은 헤어져 있으나 꿰매지도 않아 너덜거립니다. 곳간에는 전혀 양식이 없어 가족은 굶주리고, 겨울을 보낼 땔감을 준비하지 못하여 추위에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아무런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하러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지혜가 없는 자로서, 이를 보는 이웃은 그들을 게으른 자, 바보들이라 비웃고 그들의 장래는 절망입니다. 실상 이들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이고 악한 자들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이들을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심판을 내리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실 것입니다(마25:30).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언21:25).

잠언26: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 구절은 게으른 자에 대한 세 번째 묘사로서, 잠언 19:24절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와 같습니다. 솔로몬은 게으른 자는 어떤 형태의 일도 싫어하며 심지어 음식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에도 지쳐서 괴로워 한다고 또 한 번 비웃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로워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을 입으로 들어 올려 먹는 것 같은 아주 간단한 일조차 힘들어 하기 때문에, 배고품도 일할 동기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기회가 있음에도 그들은 게을러서 굶을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잠언13: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역시 본 잠언과 유사한 교훈을 말합니다. 실로, 게으른 자는 게을러서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브리지가 한 적용입니다: “희생 없는 믿음, 근면 없는 믿음은 결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할 것이다!” 타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온갖 구실을 대고 이웃을 섬기는 귀찮은 일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개미는 어떤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아 추운 겨울을 대비합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은 개미에게 가서 배우고 그 미물의 지혜를 내면화 해야 합니다(잠6:6-8).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언6:10-11)

잠언26:16절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본 구절은 네 번째 ‘게으른 자의 거울’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게으른 자는 ‘게으르면서도 자신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생존하는 자들이나 그들도 그렇게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다룬 12 개 구절(1-12)에서 그 극치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자임과 같이(12), 게으른 자도 자신의 이유를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지혜의 결정체로 여기기 때문에 게으르고 교만한 자야말로 구제 불가능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게으른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개선가능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지혜롭게 여기고 있는 그 게으른 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침상입니다! 그는 침상에서 문짝처럼 돌고 있습니다. 그는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조차 두려워하므로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4). 지금까지 살핀 어리석은 자들(26:1-11), 즉 미련한 짓을 거듭하는 미련한 자라 할지라도 매질(26:3)이나 계속된 바른 대답(26:5)을 통해 그 어리석음에서 구원받을 희망이 보이지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16)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12)는 구원의 희망조차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편,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이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신구약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본절의 ‘게으르나 교만한 자’의 삶은 파국으로 결말지어질 것이며, 이는 영원한 심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너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나, 그런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다.”(잠언26:12,새번역)

잠언26:17절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26:17-28까지 12구절은 4 종류의 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나 그 강도는 점점  올라갑니다. 즉, 히스기야는 ‘남의 일에 참견하여 스스로를 해치는 자’(17), ‘이웃을 해하는 자’(18-19), ‘비방하는 자’(20-22)로 단계를 높여가다가 ‘악한 원수’ (23-28)에서 그 절정에 이르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단락의 시작인 본절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개의 귀를 잡는 것에 비유합니다. ‘길로 지나가다’란 아무 상관도 없음을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도미한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길을 가다가 인삼장사를 하는 두 동포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뜯어 말린 것은 민족의 관점에서 너무나도 자신과 상관이 있는 일입니다. 후단에 나타난 ‘개’는 광야를 떠도는 사나운 들개로 해석됩니다. 팔레스틴에는 사나운 들개가 많아(왕하9:30-37), 들판을 헤매는 하얀 들개 무리는 공포의 대상일 정도입니다. 이 들개들은 제멋대로 자라나서 사납기 짝이 없고 무리를 지어 다니기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기 충분합니다. 그런 개가 옆으로 오는 것만 해도 위험한 일인데, 그 개의 귀를 잡는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짓입니다. 최근에 하마스의 반인륜적인 공격으로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관하여 큰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 중국 등은 전쟁은 좋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는 선에서 논평하고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하물며 잠언의 제자들인 우리는 불필요한 분쟁에 끼어들어 시간을 낭비하고 어려움을 겪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골4:5,공동번역)

잠언26:18-19절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18-19절은 이웃을 속이고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비행을 경계합니다. 18절의 ‘미친 사람’은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횃불’이란 막대기나 화살에 기름먹인 천을 감아 불을 붙인 것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무기입니다. 미친 자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그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큰 혼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다’고 하는 자도 이 미친 자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속이다’는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중대한 거짓말이며, 외삼촌 라반이 약속된 라헬 대신 레아를 신부를 주어 야곱을 속였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29:25). 야곱은 원치 않는 레아를 얻게 되었고 외삼촌의 속임은 야곱 인생의 불행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은 장난삼아 농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는 농담과 잔인함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본 잠언이 장난끼 있는 악인을 무기를 갖고 미쳐날뛰는 광인에 비교한 것은 압권입니다. 둘 다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으며 둘 다 사회에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친 사람은 제 정신이 나가 악한 음모를 꾸밀 수 없는 반면, 장난스러운 악인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의 문제점은 이웃의 불행을 쾌락의 근거로 삼는 점이고, 그 본질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웃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

매일묵상(2023/10/4-6)

잠언26: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본절은 개의 더러운 행동을 들어 미련한 자의 특성을 밝힙니다. ‘개’는 히브리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으로, 아무 것이나 먹고 매우 사나우며 더러웠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그 후 주어지는 비판을 무시하면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바른 말과 교정을 싫어하기에,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를 관찰하고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를 떠올렸습니다. 개가 토하는 이유는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서이나, 개는 그것을 잊어 버리고 또 먹습니다. 어리석은 자 역시 저지른 죄를 혐오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일한 죄악을 거듭함으로써 심판을 자초합니다. 본 잠언은 신약에 인용되어(벧후2:22)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 거짓 교사들은 “올바른 삶의 길; 의의 도”(벧후2:21)를 알지만 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반하는 이전 생활 방식으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개 이외에 돼지를 언급하는데, 돼지는 더러운 구덩이에서 나오면  그곳을 멀리하는 양과 달리 도로 그 구덩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본절이 적용된 성경의 대표적 예는 가룟 유다로서, 그는 맡은 헌금궤에서 돈을 훔치곤 하였습니다. 이를 유심히 본 마귀는 탐욕으로 가룟 유다를 사로잡아 예수님을 파는 도구로 사용하였음은 우리에게 큰 경고를 줍니다.“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단12:10)

잠언26: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본절(12절)은 “미련한 자들을 위한 거울”(1-12절)과 “게으른 자들을 위한 거울”(13-16절) 사이에서 야누스 역할을 합니다. 한편은 ‘미련한 자’라는 주제어를 반복하지만, 또 한편은 1-11절까지 미련한 자의 비유로 눈, 비, 동물, 물매, 가시나무, 나귀, 개 등 창조질서의 소재를 뽑아 사용해 온 흐름을 떠나, 16절처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란 구조를 도입하여 미련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비교의 기준으로 내세운 ‘미련한 자’와 ‘게으른 자’가 최고의 바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사용된 비교의 방법은 미련한 자를 밝히는 동시에 그들의 어리석음에서 구원할 방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는 매가 합당하다는 교훈은 동시에 미련을 탈피할 방법을 알려 주며(3),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기 전에” 반박하라는 훈계는 지혜의 문을 열어줍니다(5). 비록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지만(11), 이같은 시의 적절한 신체적, 언어적 교정을 통하여 구해줄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바보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만에 빠지지 않은 어리석은 자(1-11)보다 자만에 빠진 게으른 자(16)는 더 나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므로” 자신의 교정 가능성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의 전형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세상 지식인, 부자, 권력자들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3:18).

잠언26:13절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26:13-16절은 게으른 자들의 말도 안 되는 변명(13), 경직성(14), 나태함(15), 엄청난 자기기만(16)을 각 묘사합니다. 본절(잠언22:13과 같은 내용임)은 게으른 자의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게으른 자는 일하기 싫어는 자입니다만, 현실은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일하지 않을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합니다. 이때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자’라는 ‘놀라운 핑계’가 떠올랐습니다. 사자는 무서운 동물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 삼림에는 많은 사자가 있어 밭이나 들에서는 종종 만나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에 야생의 사자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거리’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사자’이기에, ‘게으른 자’의 말에는 거짓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밭에 나가 사자를 만나는 것이 싫으면, 장사나 기술을 익혀 자신의 집을 세워야만 합니다(창3:17-19). 사람의 모든 수고에는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위험이 클수록 보답도 큰 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핑계를 대고 일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수고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합니다. 당연히 그는 사자뿐만 아니라 전쟁, 전염병, 질병 등 일하지 않을 ‘환상적인 구실’을 계속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가 인도하는 인생(독신)이나 공동체(지도자) 그리고 가정(결혼)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우리들은 게으름이외에도, 불신앙과 두려움 때문에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눈으로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매일묵상(2023/9/25-27)

잠언26:8절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8절은 사리 분별 못하는 미련한 자에게 영예(높은 지위)를 부여할 때 나타날 위험성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먼저 ‘물매’란 돌을 던지기 위한 기구로서, 물매에 돌을 묶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돌을 올려놓고 빙빙 돌리다가 날려 상대를 맞추는 투석기의 일종입니다. 따라서, 물매에 돌을 맨다는 것은 물매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자의 행동입니다. 싸움 전에 이미 그 결과는 명약관화합니다. 물매에 맨 돌은 아무리 돌려도 날라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를 믿고 맹수나 적을 맞상대하러 나간다면 재앙 그 자체입니다. 미련한 자가 중요하고 높은 자리를 맡을 때도 같습니다. “한나라의 경제를 바보한테 맡기면 그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작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영국 채권시장 폭락사태를 보며 한 말입니다. 2022년 9월 리즈 트러스는 영국 총리에 취임하고 450억 파운드(약72조원)의 감세안을 발표하자, 영국 국채시장에서는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72조원의 감세공백 보전을 위해 국채 발행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운드화는 폭락하고 국채금리는 치솟는 등 영국의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습니다. 결국 감세안은 철회되었고 트러스 총리는 불과 44일만에 물러났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도 엄청난 세수부족(59조원)에 직면하고 있고 정부는 ‘외국환평형기금’과 ‘세계잉여금’ 에서 그 부족분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많은 비평이 뒤따르고 있기에, 현 경제팀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6:9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언’이란 타인을 지도하기 위한 교훈을 의미합니다. 7절은 미련한 자의 잠언(교훈)의 무익성을, 9절은 그 해악성을 언급합니다. 지혜 없는 자는 잠언을 배울 수 있으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적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교훈은 부적절하며, 만약 그가 도덕적 바보(사악한 자)이면 의도적인 조언으로 해를 끼칩니다. 본잠언은 후자에 무게를 두어 그들의 잠언을 ‘가시나무’에 비유합니다. 가시나무는 위험합니다. 더구나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는 더더욱 위험한데,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모습은 분별력 없는 자가 상황과 처지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교훈을 주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 이용준(서예가)이 소장한 훈민정음(해례본)을 전형필에게 소개한 김태준(1905-1949)은 한국문학사를 정립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이현상의 소개로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가 2년간(1941-43) 옥고를 치뤘고, 그 사이 노모, 아내, 아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된 남로당 활동으로 잡혀 1949년 사형 당하였습니다. 한편 김태준의 제자 이용준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되었는데, 이용준은 남로당 사건 후 북으로 도주하여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김태준은 이현상이라는 사회주의자의 인도 때문에, 이용준은 스승인 김태준의 지도로 인해 결국 큰 해를 당하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잘못된 교훈(사상)은 그 만큼 해악이 크므로 주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잠언26:10절
“미련한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궁수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쏘아대는 것과 같다.(새번역)

개정개역의 번역은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이나, 여타 한글번역은 모두 ‘궁수가 …쏘아대는 것 같다’라는 취지를 따르고 있습니다. 원문은 불확실하여, ‘장인’의 원어는 ‘활 쏘는 자(궁수)’로, ‘만들다’의 원어는 ‘상처 입다, 근심하다’ 등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본잠언은 미련한 자를 고용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라는 교훈이기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쏘아대는 궁수의 무책임한 짓에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물건을 만들 때 ‘숙련된 기술자’(장인)가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관심도 없고 기술도 없는 문외한(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면, 불량품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일과 고객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그와 같기에 잠언은 이 둘을 병렬하여 놓았습니다. 사람을 쓸 때는 신중해야만 합니다. 적절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 최태섭 회장의 젊은 시절. 만주에서 비누 공장을 설립할 때입니다. 소개로 온 비누기술자 (조선동포)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 고용하였다가 불량품만 나와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동포는 미련한 사람은 아니어서 함께 연구하여 좋은 비누를 만들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이 잠언은 교회에서 직분을 세울 때도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 직분을 위해 15개, 집사 직분을 위해 13개 조건을  열거하고, 합당하지 않으면 감독과 집사로 세우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딤전3:1-12).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매일묵상(2023/9/18-22)

잠언26:3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본절은 1, 2절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 2절이 앞부분에서 명백한 비유(여름의 눈, 추수시 비/ 참새와 제비의 날아감)를 주고 뒷부분에서 교훈을 주듯이,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또 주제면에서는 3-5절이 같은데, 도덕적 바보에게 어떻게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가르칩니다. 3절은 어떤 말도 효과가 없어 매질만이 이해받는 유일한 언어임을, 4, 5절은 대답하지 않을 때와 대답할 때를 분별하라고 교훈합니다. 본절에서 말과 나귀는 인간의 언어를 모르기에, 주인의 뜻을 이해시키려면, 말에게는 채찍을, 나귀에게는 재갈이 필수적입니다. 솔로몬은 바른 말을 듣기 거부하는 미련한 자를 이들 짐승에 비유하면서, 막대기로 표상되는 물리적 힘만이 깨우칠 수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물리적 수단을 통해 짐승들은 주인의 뜻을 행하나, 바보들은 깨우치지 못하고 결국 지혜와 선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교만, 탐욕, 비방,악한행동,게으름)으로 마음과 삶의 행동양식이 돌이킬 수 없이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잠언의 관찰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해받지 못한 사람들은 듣고 믿는 것이 중요하나, 이미 복음을 들어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우리는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삽은 시편 73편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이 가득한 자신을 ‘주님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만약 징계가 없다면 고침받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징계는 필수적입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잠17:10).

잠언26:4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4절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대화를 나누는 본인도 그처럼 미련한 자가 되지 않게 하고, 더 나아가 미련한 자의 교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2절의 문맥을 통해 읽으면 지혜자의 대답 자체가 도덕적 바보에게 합당하지 않은 영예를 주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것’이란 악의적인 말, 무식함, 불경건한 삶의 자세, 예의 없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대화와 교제를 통해서 영향을 주고받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미련한 자와 교제를 갖게 되면 미련한 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마음가짐, 태도, 삶의 방식과 언어 등 모든 방면에서 미련한 자를 닳아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일단 상대방을 인격적인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에, 본 잠언은 미련한 자와의 교제 자체를 금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 2300년 전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갔다는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는 이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교육열에 있어 대한민국의 어머니보다 더 뛰어난 민족은 많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교육에서는 반드시 신앙적 요소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먼저 규칙적인 예배 참석 등 부모의 믿음의 본이 중요하고, 이어 아이의 친구들의 신앙적 면모도 살펴서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기도하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육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 하라는 지혜의 정수를 갖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언17:12)

잠언26:5절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5절은 4절과 배치되는 말씀이나,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구절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줌으로, 잠언의 제자를 보호하며 미련한 자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는 언행을 논어에서는 시중(時中)이라 하고 그 이상을 공자로 봅니다. 진정한 중용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상황 속에서 적절함을 추구합니다. 공자는 ‘집기양단(執其兩端)’- 양쪽 끝을 잡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을 그 방법으로, 순임금을 그 모델로 제시합니다(중용). 지금 솔로몬은 4,5절에서 그 비책을 말합니다. 4절은 미련한 자가 이성 대신 감정을 앞세워, 분노, 조롱, 욕설이나 저주 등을 퍼불 때 적용됩니다. 이 경우에는 온유하게 인내하거나, 잠잠히 그 자리를 떠나야 하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5절은 미련한 자가 논리를 갖고 공격할 때입니다. 이 경우에 침묵한다면 동의를 의미하기에, 신자들은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련한 자들의 논리 속에는 항상 궤변과 함정이 숨어 있어, 함정을 피하고 상대 논리의 모순을 논파하여 참된 진리를 들어냄으로써, 어리석은 자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각 상황에 맞는 중용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약1:5). 다만, 믿음의 문제로 박해 당할 경우에는 염려 없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눅12:11,12).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26:6절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26:6-10절은 교차대구의 구조로서, 그 중심에 8절을 놓아,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사자, 지배인, 선생의 지위 등)를 주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아래는 그 구조입니다.

  A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경우(6)
    B      미련한 자의 잠언(7)
      C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8)
    B′      미련한 자의 잠언(9)
  A′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경우(10).

6절은 통신수단을 은유한 ‘발’이 언급됩니다. 전화나 이메일을 사용하는 현대와 달리, 고대에는 인편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기에, 소식 특히 중요한 소식을 위해서는 신뢰받는 사람을 보내야 하였습니다. 만약 미련한 자가 그 책임을 맡는다면, 그 해악은 치명적입니다. 이는 마치 자신의 두 발(복수형)을 베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임무의 경우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권한과 함께 파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신 아름다운 화해와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 복음의 전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에 주님은 약속과 심판 두 가지를 남기셨습니다. 즉,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면 모두 응답주시겠다(마7:7-11; 요일5:14,15)는 약속과, 만약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마7:19).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잠언26:7절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본문은 저는 자의 다리가 몸무게를 결코 지탱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미련한 자의 잠언 역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함을 교훈합니다. 첫째, 그들의 말은 시의적절하지 않습니다. 모든 충고나 잠언은 상황, 사람, 시기 이 세 가지가 모두 고려되어야 효과적이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직 잠언만 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26:4절은 ‘미련한 자를 만날 경우 잠잠하라’, 5절은 ‘미련한 자의 말을 효과적으로 반박하라’는 상반된 교훈이기에,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바보의 유형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잠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도덕적으로 너무 둔감하여 언행의 불일치가 드러나는 자들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가르치지만 자신은 도둑질을 하고, 우상은 가증한 것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신사의 물건이 탐나서 훔친다면 누가 그 사람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듣겠습니까?(참조 롬2:21-22). 이같이 인격에 결함이 있는 자들이 훌륭한 잠언을 말한들, 자신의 얼굴에 침뱉기이며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한편, 가장 미련한 자는 종교적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마23:24)로서, 이들의 교훈을 실행하면 도움은커녕 오히려 심판당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전형적인 위선자들입니다(마7:21). 그렇다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면, 무섭게 화를 내며 대들 것이기에, 잠잠히 그 자리를 떠나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4절).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잠언10:14)

매일묵상(2013/9/11-15)

잠언25: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아 고된 여행길을 마치고 마침내 나홀성에 도착하여 우물가로 갔는데, 만약 그 우물이 흙탕물로 더러워졌다면 그의 실망감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물과 샘은 가나안 지역의 생명줄입니다. 이같이 의인은 그 공동체의 생명샘이며, 그 사회로 하여금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요 어두움을 밝히는 빛입니다. 요사이 샌프란시스코는 범죄자로 들끓어 홀푸드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속속 그 도시를 떠나고 있다 합니다. 이같이 의인이 없는 도시나 국가는 버림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의인이 악인의 유혹이나 협박에 의해 굴복한다면 생명샘은 더러워지고 그 사회는 부패하여 온통 어두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그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목적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모세율법을 받음으로 제사장 국가로 부름을 받았으나, 이방국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하여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온 세상에 흩어졌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길 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마5:13). 그 반면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청년 4 명은 그 이방 땅에서도 모세율법을 지키고,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 주님은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7).

잠언25: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일상의 인간관계의 갈등을 다루는 16-27절은 ‘봉투구조’라는 수사법을 사용합니다. ‘꿀’을 소재로 하여 16절(윗면)은 시작하고, 27절(밑면)은 마감하여 편지(16-27절)를 완성합니다. 권면의 핵심은 절제입니다. 꿀은 완전식품으로 몸에 좋지만, 과식하면 토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합니다(16). 영예도 같습니다. 잠언은 “많은 재물 보다 명예를 택하라”(22:1)고 하여 명예를 갖도록 권면합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명예롭게 여겨 이를 얻으려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칭찬하는데, 경건과 선한 일을 사모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3:1이하).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 믿음에 큰 담력을 얻고, 자녀의 본이 되어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세상의 명예나 부 등에 신경을 쏟으면서 이런 귀한 믿음을 등한히 여기면 마지막 날은 물론, 인생 후반부에 후회하게 됩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격과 능력에 합당한 영예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됨은, 꿀을 많이 먹어 토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16).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영조 때 수장가 상고당 김광수(1699-1770)는 모든 재산을 기울여 수 많은 서화, 골동품을 모았으나, 말년에 생활이 어려워지자 “평생 눈에 갖다바쳤던 것을 이제는 입에다 갖다바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며 팔았다고 합니다. 절제는 주님을 두려워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본절은 하나님과 왕이라는 우주의 통치질서 내에서(25:2) 지혜롭게 살게 하는 적절한 결론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언25:2)

잠언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25:28-26:28절은 7가지 유형의 ‘도덕적 바보들’을 보여줍니다: 무절제한 사람(25:28), 어리석은 자(26:1-12), 게으른 자(13-16),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17), 불선한 자(18-19), 비방하는 자(20-22), 그리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23-28). 솔로몬은 ‘봉투구조 Inclusio’(시작25:28-무너짐, 결론 26:28-패망)를 사용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의 파멸을 강조합니다. 신약에 이르면, 그것은 죽은 뒤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에 처함을 의미합니다(요5:29). 오늘 본문은 절제력을 갖지 못한 사람을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에 비유합니다. 고대 성읍의 큰 특징은 도시를 두른 성벽입니다. 만약 성벽이 허물어져 있다면, 그 도시는 무방비 상태로 남게 되고, 적은 물론 짐승의 위협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욕, 교만, 그리고 악한 마음이 그를 지배하여, 죄를 짓게 되며, 그 행위의 사회적 유해성이 크면 사회는 벌을 내릴 것입니다. 또한 무절제한 자는 악한 자(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더 큰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는 주님을 경외는 마음과 그분의 지혜(가르침)를 재료로 하여 성령님에 의해 생산됩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노력하여 끊는 방법도 있으나, 기도응답의 결과 담배를 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하시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신자의 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26:1절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본절은 ‘미련한 자’가 지위와 명예를 탐하는 것을 ‘여름의 눈’과 ‘추수 때의 비’에 비견하면서 경계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수확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때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내리거나 추수 때 비가 내린다면 농작물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같이 영예를 가진 미련한 자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칠 우려가 있습니다. 통상 높은 지위나 명예를 얻었다면, 그에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어야 조직과 사회 공동체에 유익합니다. 만약, 합당한 실력과 인품을 갖추지 못한 미련한 자가 지위를 얻는다면,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닥치는 폐해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잠언과 시편에서 ‘미련한 자’ ‘바보’ 혹은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할 때 그 원어는 ‘케씰’이며, 대개의 문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지칭합니다(시14:1).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등을 생각하면 본절이 얼마나 예리하게 그 모순과 재앙적 수준을 표현하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유럽은 전쟁이란 날벼락을 맞았고, 유대인들은 6백만명이나 처형되었습니다. 모택동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책을 펼쳐서 1억 명 이상을 굶어죽게 만들었습니다. 김일성 때문에 한반도는 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엄청난 폐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잠언26:2절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까닭 없는 저주”란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말의 효력을 믿는 관습과 두려움이 그 배경입니다. 솔로몬은 분명히 말합니다: 근거 없는 저주의 말은 ‘참새가 떠돌고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저주의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새나 제비 같은 새는 단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 뿐 분명한 목표나 지향점이 없습니다.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저주 역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어떤 해악도 미치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 흩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근거가 있는 저주(악인에 대한 백성의 저주 등)는 두려워 하도록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구든지 일어나 이 성을 재건하면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고 맹세시켰습니다(수6:26). 550년 뒤 아합 왕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의 기초를 놓을 때 장자를,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을 각각 잃어 여호수아의 말이 응하였습니다(왕상16:34). 주님의 경고를 무시한 히엘의 행동에 대한 심판은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같이 심판을 실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아무의 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저주를 받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창12:1-3).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후손들에게 미치므로, 우리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된 우리는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눅6:28).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