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8/22-26)

잠언19: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언18:22-19:22절은 “재물과 지혜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세 부분-(a)18:22-19:7절, (b)19:8-15절, (c)19:16-22절– 으로 나뉘어집니다. 첫 부분(18:22-19:7- ‘가난, 재물 그리고 친구’)을 이미 살펴보았으며, 지금부터 두 번째 부분(19:8-15절)을 다루겠습니다. 주제는 “사회생활에서의 지혜”입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은 형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고 당장은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지만, 잠언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고 장차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잠19:1,8). ‘지혜’로 번역된 원어는 ‘레브’로서 ‘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인들은 마음은 지혜가 거주하는 곳이라고 여겼습니다(욥32:8). 따라서 본문에서 ‘레브’는 지혜를 의미하는 ‘호크마’와 같은 의미이며, 후단에서 ‘명철(=테부나- 분별)’과 짝을 이룹니다. 또 ‘영혼’은 ‘생명, 생물’이란 뜻도 갖는 ‘네페쉬’로서, 이 문맥에서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육체적 생명 보다 영혼의 생명을 지키라는 교훈을 주고자 한 것으로, 이는 지혜야말로 육체적 안전보다 영혼의 건강에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를 얻고..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먼저 생명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복(=토브-좋은 것)’을 곧 얻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는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풍부한 삶을 누리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잠언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그런 생명을 주시러 오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잠언19: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9-12절은 거짓 증인에 대한 형벌에서 시작하여(9), 사회생활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교훈합니다. 9절과 5절은 끝의 동사를 제외하고는 구문이나 내용이 같습니다(‘피하지 못하리라’대신 ‘망할 것이니라’). ‘거짓 증인’은 십계명에서 금지된 행위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 당시 재판은 증언에 거의 의존하였기 때문에, 거짓 증언은 재판상 정의 구현에 심각한 침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재판규범인 십계명은 이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대한 민국 형법에도 ‘위증, 모해위증’(152조)의 규정을 두고 형벌(5년이하 징역 등)로서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재판 극화에서 잘 나오지만, 증인이 되려면 진실만을 말할 것을 ‘법률에 의해 선서’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거짓말을 한다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됩니다. 모세 율법도 그에 대한 형벌을 가하고 있습니다(신19:15-21). 발각되면 당연히 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짓 증인은 아니라도 “거짓말을 뱉는 자’는 진리를 왜곡하여,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의 생명, 재산, 명예에 위해를 가하고,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허물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벌을 받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요행히 피해가도 마지막 날 심판에서는 발각되어 ‘망할 것입니다.’(눅12:2,3) 우리 중 어떤 누구도 거짓말하는 사람과 사귀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이, ‘거짓말을 뱉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잠언19: 10절
“미련한 사람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마땅하지 않은데, 하물며 종이 고관들을 다스리는 것이랴?” (새번역)

자연세계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름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서리가 내린다든지, 가을 추수기에 비가 많이 내린다든지 말입니다. 날씨가 이렇다면 부적절한 것은 물론, 큰 해를 당하게 됩니다. 인간사도 같습니다. 본잠언은 솔로몬이 목격한 가장 부적절한 사회현상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란 ‘케씰’의 번역으로 지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매우 우둔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여기서는 ‘도덕적으로 우둔한 자’라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세상적으로 영악하여 법을 무시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재물을 얻은 바보말입니다. 더 나아가 남의 도움으로 자신의 재물을 보존하고 증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바보도 포함합니다. 이들이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매우 못마땅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온의 부자 나발이 그러해서, 격분한 다윗은 그를 죽일 뻔하였습니다(삼하25장). 다른 한 예는 종이 고관을 다스리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종’은 주인과의 관계라기 보다, 맡은 일의 성격에 초점이 있습니다. 종은 주어진 일만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며,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하는 데는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적절치 않은 자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큰 혼란이 생겨나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에게는 영예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마치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과 같다.”(잠26:1,새번역)

시편110: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본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인용하셨고,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시로서 신학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시의 주제는 이스라엘 통치자 다윗 왕이 주님으로 부르는 위대한 주권자가 계시며, 그분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모든 원수를 정복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는 두 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왕(1-3)과 제사장(4-7)입니다. 각각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하고, 야훼께서는 다윗의 주님을 왕과 제사장으로 선언하시고, 시온에서부터 땅의 왕들을 압도하는 주님의 통치를 약속합니다. 또한 이시는 주님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을 민족들의 전복과 대비시키며, 왕이자 제사장인 그분 자신을 젊음이 넘치는 활력으로 늘 새롭게 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A    정복에 대한 약속 (1)
B   승리 (2–3)
A′   영원한 제사장 약속 (4)
B′  승리 (5–7)
마가복음12장에서 주 예수님은 본 시편이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지은 다윗의 시이며, 자신의 메시아직의 성격과 내용을 드러냈다고 확인해 주셨습니다(36-37). 1절에서 다윗 왕은 자신보다 더 높은 왕권을 가진 한 존재를 주님으로 부릅니다(히1:3,13). 하나님은 그분이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여 발 밑에 굴복시킬 때까지(발판의 의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신약의 기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주 예수께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고 만유를 통치하고 계심을 증거합니다(행2:32-36/히10:12-13/엡1:20-22).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

시편110: 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2,3절은 다윗 왕의 주님, 곧 그리스도께서 현재 통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다윗의 주님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좌정하셨습니다. 그 좌정하심은 속죄의 거룩한 과업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의미하고, 이제 영원한 왕으로 앉으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고 계십니다(히10:12,13).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어보내신다’는 의미는 사도행전1장과 2장에 따른,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사도들이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죄사함과 심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는 물리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을 통한 말씀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400년 뒤 선지자 이사야는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오고”, 그 결과 모든 나라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전쟁을 그치고 평화롭게 살아가게 됨을 말합니다(사2:1-4). 또한,이사야9:6,7절은, 그분은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셔서,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요 평강의 왕”이라 불림을 받으며, 다윗의 왕좌에 앉아 군림하시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실 분임을 선포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부활 없이 영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섬기며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갈 것입니다(시110:3). ‘자발성’ 그 자체가 신약의 성도들의 섬김의 모습입니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너무나도 감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마28:18,새번역)

매일큐티(2022/08/15-19)

잠언19: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거짓 증인’ 이란 재판장 앞에서 ‘거짓 증언’을 한 사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법정은 증언에 의존하였습니다. 만약 증인이 거짓으로 말한다면 판결은 그릇내려지게 되고, 그 해악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나봇의 살해사건). 그러므로 십계명은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본 잠언은 더나아가 거짓 증인에게 확실히 임할 부정적인 운명을 선포합니다. 십계명에도 나와 있는 금지명령을 본 잠언이 다시 한번 교훈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의 일반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여, 사회 규범을 어지럽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웃의 생명, 재산, 명예에 위해를 가하고, 정직과 진실의 가치를 허물어 버립니다. 그 시작은 사탄입니다. 창세기 3장은 사탄이 거짓말을 통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이들 모두가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율법에 규정된 죽음을 선고받았는지  상세히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귀를 거짓말쟁이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서 정죄하셨습니다(요8:44). 성경의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거짓의 위험에 대하여만 설명하지만, 성경은 그 기원을 알려주면서 인간에게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진리이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요14:6).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참된 것을 사랑하시고 거짓말을 미워하시는데, 이것이 성경이 거짓말을 금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잠언19:6절
“너그럽게 주는 사람에게는 은혜 입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고, 선물을 잘 주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친구이다”(새번역)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선물과 같은 적극적인 호의를 베푸는 자는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본 잠언은 솔로몬의 관찰 결과를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솔로몬의 의도를 알기 어렵습니다. 즉, 이 잠언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줄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풍자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나, 잠언 19:4절,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새번역),을 감안하건데, 세태를 풍자하기 위한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 너그럽게 주거나, 뇌물에 가까운 비싼 선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는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진 통치자를 향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임을 감안하면서 관계를 맺어야지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의 모델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너그러우셨으며, 상황에 따라 적합한 가르침을 주셨고,  배반을 당하실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온유하게 대하셨습니다. 체포되시는 중에도 베드로가 베어낸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도층의 외식이나 잘못된 교훈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잡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면 그분의 온전하심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관계의 지혜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19:7절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본 잠언에서 형제와 친구는 약간 다릅니다. 형제들은 운명공동체라 자신이 어려워도 더 어려운 형제를 도와 주지 않을 수 없어 미워합니다만, 친구 관계는 선택이기에 떠나면 그만입니다(17:17). 물론 관포지교, 문경지교 등과 같은 친구관계는 형제보다 친밀할 수 있지만 예외적입니다(잠18:24). 중요한 것은 형제와 친구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도 가난한 사람의 주위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는 현실입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은 극복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을 청하려고 친척과 친구에게 가도 소용없습니다. 놀부와 같이 냉엄하게 대하거나(잠18:23), 자리를 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우려고 해도 여유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전쟁이나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 올 경우 어떻게 할까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에게 가라고 조언합니다만(잠27:10), 이것은 너무나 빈약하여 현대 국가는 여러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안전망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사망 등). 누가 우리를 도울까요? 만유의 주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되십니다(잠18:10). 기도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면 평강이 우리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물론(빌4:6-9), 기도의 응답을 받아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보이지 않지만 늘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다윗의 체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편32:6).

시편109: 4절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50편 중 저주시는 단 세 편(58, 109, 137편)이며, 본시는 가장 길고 강력합니다. 시인은 다윗입니다. 왕 사울이 죽은 뒤, 항복하러 온 사울의 집 군대장관 아브넬을 요압이 암살합니다. 분노한 다윗 왕은 요압을 저주하나 죽이지는 않습니다(삼하3장).  35년 후 다윗은 임종 시에 솔로몬에게 요압의 처형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시의 배경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라는 표현은 물론, 그의 후손까지 생명을 끊어 달라는(10,11) 강한 저주의 문구들을 읽을 때 다윗이 큰 고통과 배신감 속에서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5절) 주님의 행동을 간구함, (6-20절) 주님의 공의를 간구함, (21-29절)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함, (30-31절) 주님의 구원을 감사 드림. 한편, 이 같은 저주의 기도가 정당성이 있을까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곤경에 처한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교훈합니다(잠25:21-22). 다윗 자신도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 온 원수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는데, 원수 사랑에 대한 주님의 뜻을 모를리 없습니다. 다만, 본시는 악에 분노한 성경 기자의 성경적 현실주의를 과감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허용되나 죄와 매우 가깝기 때문에(엡4:26), 이런 저주시들은 우리 삶의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은, 다윗 같은 “거룩한 분노 없이는 그것들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맥켄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시편109: 8절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신약의 기자들, 특히 누가는 본시편의 구절을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게 적용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27:3-10)과 사도행전(1:15-20)의 기사를 종합하여 보면, 은 30 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는 그 돈으로 밭을 샀지만, 예수께서 정죄받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절망한 그는 30 세겔을 성소에 던지고 목매달아 죽는 과정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그 밭을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마태복음은 은 30량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는 선지자의 예언(슥11:12,13)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한편 누가는 주님의 승천 직후, 120명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서,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시편69:25절,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가 성취되었기에, 시편109:8절에 예언된 대로 가룟 유다의 직분을 취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에 회중은 맛디아를 선출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있기 1천년 전 기록된 본 시편을, 베드로는 어떻게 바로 가룟 유다의 배반사건과 사도직분의 선출에 적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사도의 직무 중 하나로서, 우리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이고, 최초로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며,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한 ­­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베드로의 이 해석과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사도 직분의 위대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매일큐티(2022/08/8-12)

 잠언19: 2절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새번역)

사람은 성공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열심’(히브리 원어, ‘네페쉬’- 영혼)을 내서 일할 수 있으나, 만약 그 동기가 경건하고 바른 지식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숙고하고 기도로 주님께 맡긴 다음에 행동해야지, 두려움, 탐욕, 분노, 성급한 성격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울 때, 백성들에게 저녁까지 일체 음식을 먹지 말 것을 저주로 맹세시켰습니다. 맹세를 두려워 한 백성들은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 격렬한 전투를 치뤘고 저녁이 되자 기진맥진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삼상14). 한편, ‘발을 헛디딘다’ 혹은 ‘잘못 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웃 사랑’의 윤리를 무시하는 생활방식을 함축합니다. 생각 없이 삶게 되면 범죄하기 마련이어서 주님을 격노하게 만들 것입니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20:2).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파산한 부자를 피하기 때문에 그 악에 물들지 않고, 결국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본 잠언은 영적인 열심에도 적용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열심이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쫓아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롬10:2).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그릇되이 이해하여 율법 안에서 영생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정작 생명을 주시러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님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주님을 알고 그분과 사귐이 없이는 영생도 없습니다(요17: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잠언19:3절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 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재물이 많은 바보가 거짓말이라는 죄된 행동과(1b), 좀 더 부유하려는 욕망(2b) 때문에  삶을 그릇치고, 그 잘못에 대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자 자신의 도덕적 오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원망한다는 어리석은 인간 존재의 실존(3)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그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인양 높이고 자신의 죄된 삶에 상당한 보응을 내리신 주님(도덕의 통치자)께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적 달성을 못하고 파산하게 된 것을 분노합니다. 실패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술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음을 보아 그의 어리석음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손상을 입혔음은 명백합니다. 그의 교만한 자아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라고 지혜자라고 인생에서 늘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에게도 뜻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전9:11).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기 때문에 신뢰합니다. 그러면 바보의 실패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실패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외양은 똑 같은 실패의 모습이나, 전자는 심판이고, 후자는 훈련입니다. 이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원망하지만, 지혜자는 자신을 되돌아 보고 거기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여 고칠 것은 고치면서 신실하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의 성공 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모든 일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롬8;28,현대인의성경)

잠언19: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18:22-19:7절은 ‘가난, 재물 그리고 친구’를 다루는 단락이며, 19:4-7절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 다시 한 번 친구와 재물이 가지는 도덕적 모호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친구와 재물은 도덕적으로 선악을 뚜렷히 구분짓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자의 친구로 남기 원하지, 가난한 자와 교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가난한 자는 문제들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도움이나 관대한 지원을 필요로 하지만, 부유한 자는 최소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외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친구들이 참된 자들일까요? 만약 그들이 참되다면, 4절은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며, 가난하더라도 친구가 끊어지겠는가?”라고 읽어야 합니다. 어떤 뉘앙스이겠습니까? 전도서가 답을 줍니다 :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   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5:11). 즉 재물은 친구들을 불러들이지만 그들은 거머리들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의심이 많고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실로 각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줄 것인가의 관점이 아니라,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를 말합니다.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재물을 사용하여 친구를 사귀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보답을 받으라는 권고하십니다(눅16:1-9).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친구 사귀는 비결입니다. 받으려는 관점이 아니라, 도움/재물을 줄려는 관점 말입니다.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시편108: 4절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새번역)

다윗은 시편  57:7-11절(1-5)과 시편60:5-12절(6-13)을 합쳐서 새로운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편57편과 60편을 전혀 모르더라도 시편108편은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배경은 다윗이 에돔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닥쳐온 위기 극복을 위한 기도의 관점에서 보면, 3연(1-5, 6-9, 10-13)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연은 주님의 변함없는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주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5). 둘째 연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6). 셋째 연은 ‘에돔’의 위기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받기를 기도합니다(12). 이것은 성서적 기도의 참된 순서로서 이 시에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도움이 절실 할 때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각 연에서 이에 관한 특별한 진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a) 하나님의 ‘인자하심’(4)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진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실체인 구름(궁창)에 이르지만, 그분의 ‘인자하심(= 한결 같은 사랑)’은 하늘들보다 훨씬 높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지 못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떼문입니다(요3:16). 부활의 약속과 주님과의 영원한 교제(영생)를 누리게 하셨는데(영생) 기타 자잘구레한 세상사야 무슨 큰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편108:1)

시편108: 10절
 “누가 나를 견고한 성으로 데리고 가며, 누가 나를 에돔에까지 인도합니까?”(새번역)

본 시는 세 연(3연(1-5, 6-9, 10-13)으로 나누어지고, 각 연마다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강조합니다. 첫째 연(1-5)은 ‘주님의 한결 같은 그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의 모든 상상을 넘는 위대하신 그분의 인자와 진실하심을 노래합니다. 위기 시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진실하심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연(6-9)은 가나안 지역의 통치와 정복에 대한 주님의 이전 약속들을 회상합니다. 세겜과 숙곳(7)은 요단의 동서쪽에 위치하며 팔레스틴 지역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용사이며, 이스라엘(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대로 상징)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8). 당연이 이웃 국가들(모압, 에돔, 블레셋)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합니다(9). 시인은 이런 약속에 근거하여 도우심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Yes”가 됩니다(고후1:20). 그러므로 고난 시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연(10-13)은 에돔 정복을 위한 도움을 간구합니다. 시인은  오직 주님만이 자신들을 인도하여 견고한 에돔 성읍을 점령하게 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12). 그 권능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돌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11-12). 실로 우리가 곤란 속에 있을 때, 그것과 맞서도록 힘을 주시는 분은 부활, 승천하여 대권을 가지신 주님 한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을 것이다.” (시편108:13,새번역)

매일묵상(2022/08/1-5)

시편107: 10,11절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07:10-16절은 두 번째 곤경(감옥에 갇힌 죄수)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들의 불행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의도적으로 파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말씀, 율법)를 거역하였고 자발적으로 그분의 권위를 멸시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받았으나,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계명은 받았으나, 지존자의 뜻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중요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에덴 동산에서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설득하여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고자 선악과를 금지하였다고 믿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 속아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야, 이들은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정의는 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속박과 수고와 저주와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창3:16-19). 세상은 원래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어졌지만 범죄로 감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인간 실존의 장벽조차 하나님의 자비로서 무너지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8:31,32). 그것이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13). 그러면 은혜가 이 기도에 반응하여 죄와 사망의 쇠빗장을 깨뜨리고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다”(시편107:16,새번역).  
  

시편107: 17,18절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새번역)

107:17-22절은 세 번째 곤경(죄로 병든 자)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지존자에게 반역한(11) 모든 자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또 다른 묘사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로서(잠1:7), 잘못된 길을 사랑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죽음에 다다르자 그들이 사랑한 음식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부르짖었을 때 주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들에게 구원을 보내셨습니다. 그 구원은 그들이 거부하여 그들을 정죄한 바로 그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제 정죄의 말씀이 약속과 위로와 회복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그들은 당연히 주님께 감사드려야만 합니다(21). 그 감사는 빈 말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마음이 담겨 하는데, 시인은 그 구체적 표현으로 ‘감사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합니다(22). 우리 본성 가운데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뿌리 깊어,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그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롬8:13).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낮추고 사망(현재는 자기파멸과 미래에는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멸망의 길입니다(17,18).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를 통해 죄에 대한 위대한 해독제인 치유의 말씀이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20).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곤경에 빠지는 것처럼(11), 영적 온전함을 되찾는 방법 역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에 되돌아와야 가능합니다(20).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시편107:20, 새번역)

시편107: 26절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새번역)

107:23-32절은 네 번째 곤경(폭풍을 맞이한 바다의 선원/상인들)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같은 곤경이지만 광야와 바다는 종류가 다릅니다. 부를 찾아 바다를 항해하는 상인들은 그 큰 배를 너무나도 쉽게 뒤 엎어버리는 바다의 위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주님은 쉽게 폭풍을 일으키시기도 하고(25-27) 잔잔하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29-30). 그러므로 고난 중에 선원들은 기도하게 되고 주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사 바다를 잔잔하게 하십니다. 그 기쁨이 너무커서 선원과 상인들은 예배와 장로들의 모임에서 주님의 행사를 선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31,32). 여기서 바다는 적대적인 세상을, 항해는 그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완벽한 상징들입니다. 청명한 하늘에 돈을 벌기 위해 승선하지만 예기치 않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폭풍이 불어닥쳐 위기에 놓이게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폭풍은 기도를 촉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폭풍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탄의 책략이나 우리의 실수와 범죄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 지능입니다. 아무리 바다가 뛰어 노는 것처럼 위기가 닥쳐도 그분에게 의뢰하면 잔잔하게 하실 것이고(시편32:5-7), 기도의 문은 평화로 들어가는 입구임이 증명될 것입니다(29-30).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우리들은 주님의 행사를 교회와 일터에서 감사드리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시편107:31,새번역)

잠언18:24절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친구 선택의 기준은 양이 아니라 질에 있습니다. 본 잠언은 통상의 친구들(복수)과 참된 친구(단수) 사이를 구별하고, 전자는 결국 “해를 당하게” 만들고, 후자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친밀하다”는 분별의 지혜를 제공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적 생존은 쉽지 않았기에, 한 명이라도 진실된 친구는 ‘보험’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좋을 때만 모여드는 통상의 친구들만 있고 진실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는 사람은 역경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자기 일에 열심인 자는 기술을 얻게 마련입니다(22:29). 이와 같이 신실한 사람이 지혜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전2:26). 미련한 르호보암 왕은, 원로들의 지혜로운 충고를 무시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교만한 친구들의 조언을 선택하여 국가 분단이라는 큰 해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혈육을 넘는 친밀함과 신실함을 나누었습니다. 혈육이라도 가난하고 실패한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진실입니다만(19:7),  요나단이 죽은 지 10년이 넘은 후에도 왕 다윗은 비천한 그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돌보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재물을 쫓는 것과 유사 친구나 그런 동료에 속하는 것을 경계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현명한 자들 중 친구를 선택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신실함이 혈육의 연대감을 넘어서는 친구라는 잠언의 이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요15:12-15), 교회는 주님께 힘을 공급받아 사랑 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잠언19: 1절
“거짓말을 하며 미련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해도 흠 없이 사는 사람이 낫다.”

“19:1-3절”의 단락은 친구 없는 가난한 사람에서 거짓말하는 비윤리적인 부자(1), 그의 탐욕(2) 그리고 완고함(3)을 다룹니다. 잠언은 가난한 자는 성공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렵지만(18:23,24), 그렇더라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고, 그것은 비윤리적인 부자보다 더 낫다고 교훈합니다(19:1). ‘낫다 better than’는 말은 반드시 그런 길로 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여 사회적으로 존중받지는 못하지만 주님이나 현자의 가르침 안에서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미련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가난하겠습니까? 주님의 때까지입니다(전3:1). 거짓말하여 남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예금 구좌를 채운 자들은 꿀벌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부지런히 꿀을 모아 벌집에 채우면 양봉업자는 때가 되면 그 꿀을 모두 값을 받고 사람에게 팔아버립니다. 꿀벌은 이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이와 같습니다. 역경 가운데서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생은 물론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은 그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악인이 열심히 모아들인 재물을 주님을 기뻐하여 그분의 가르침에 머무르는 자에게 몰아 주시기 때문입니다(전2:26). 물론 그 의인은 받은 지혜로 주님이 맡기신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를 보고 탐욕을 내어 재물을 모으는 행위가 헛되다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3:22a).

매일묵상(2022/07/25-29)

잠언18:22-19:7절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18:22) 
앞으로 여러 날 동안 묵상할 부분은 잠언18:22-19:22절입니다. 주제는 “재판정과 가정에서 재물과 지혜”에 관한 내용입니다. 3단락(18:22-19:7, 8-15, 16-22)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다룰 첫째 단락은 18:22-19:7절입니다. 서론으로 남편과 아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말한 뒤(22절), 부 혹은 재물이 가지는 애매모호한 도덕적 특성을 교훈합니다 (18:23-19:7). 본론은 다시 셋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 실패한 친구관계(18:23-24) – 가난한 자의 간구(23)와 친구관계의 실패(24). 둘째, 도덕과 재물(19:1-3)- 가난할지라도 성실하게 살아가야지(1), 성급하게 재물을 쫓지 말아라(2). 왜냐하면 주님은 어리석은 자를 벌하시기 때문이다(3). 셋째, “재물과 친구”관계의 도덕적 모호성 –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고(4a,6), 가난하면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4b,7), 거짓된 자들은 벌을 면치 못한다. 이 구절들은, 눈에 보이는 친구관계는 현명하지 못한데,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18:24)는 의미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현명한 사람들 중에 있는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18:24b)입니다. 단락의 마지막 구절 (19:7)은 다시 한번 가난한 자의 측면에서 “가난, 부, 그리고 친구”의 역학관계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하면 친척도 그를 싫어하는데, 하물며 친구가 그를 멀리하지 않겠느냐? 뒤따라가며 말을 붙이려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잠언19:7, 새번역). 

잠언18:22절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솔로몬은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교훈을 시작합니다. 그 첫 주제가 배우자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주목할 것은 ‘아내’ 대신 ‘지혜’를 넣으면 잠언 8:35절의 메시지가 나옵니다:“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8:35).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마치 ‘ 좋은 아내를 찾는 것은 지혜를 찾는 것과 같다’고 주석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 그런 하나님을 본받는 좋은 아내와 함께 주님을 경외하는 남자를 복주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31:10, 30). 좋은 아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처럼(2:1-6), 좋은 아내는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19:14), 당연히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보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 한 명의 여자,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남자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길은 한 명의 아내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복의 좋은 예시가 잠언31:10-31절에 나와 았습니다. 실로 그런 아내의 가치는 진주보다 더 귀합니다. 물론 여자의 경우에도 좋은 남편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역시 같습니다. 잠언의 예외가 신약에 나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에 전력하기 위해 혼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권면을 합니다(고전7장). 이는 남녀의 결혼 자체도 주님과 신자의 영적 결합의 모형이고, 도래 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결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18:23절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사무엘상 25장에는 도망자 다윗이 마온 부자 나발에게 부하 10명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나, 나발은 거만한 말로 못주겠다고 엄히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동안 나발의 재산을 보호해주던 다윗은 격분하여, 나발을 죽이려고 하다가 지혜로운 아비가일 때문에 중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늘 보는 광경입니다. 23절의 중심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와 부자를 배치하고 바깥에는 ‘간절한 말’과 ‘엄한 말’을 대조하는 문학적 기교(교차대구법)가 들어있어 메시지를 명료하게 깨닫습니다. ‘가난하다’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다’는 의미로서 ‘결핍’을 묘사하는 형용사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을 나타내는 원어(루쉬)는 ‘부족함’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간절한 말’의 원어(타샤누님)는 ‘마음이 두려움에 휩사여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는 뜻입니다. 한편, ‘엄한 말’이란 통상 ‘강력한, 힘있는’을 의미하지만 현 잠언의 문맥에서는 “맹렬한, 거만한, 철면피’ 를 뜻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요청에 엄한 말로 거절하는 것은 재물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만약 부자가 자신의 삶의 안전을 주님께 두었다면,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여도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성경 메시지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시34:6),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을 받을 수 있다”(마5:7)고 가르치기에,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부요한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5:3,새번역).

시편107:1절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새번역)

107편은 시편 5권(107-150)의 첫 시입니다. 감사와 지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야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시는 중심부에서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4번이나 반복한(4-32) 뒤,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매듭짓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감사로의 초청 (1–3)
B     감사의 이유들(4–32)
B′     찬양의 이유들(33–42)
A′    지혜를 얻자는 호소( 43)

1-3절에서 시인은 구속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확증하면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한 형식이나 내용없는 고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구속받은 백성”들은 각 지역(바벨론, 앗시리아 등)으로 사로잡혀 가서 많은 고난을 겪는 중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시인은 주께서 다양한 방식과 장소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선포하는데에 이 시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 영적, 정신적, 혹은 물질적이든지 간에 – 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 모두도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량에서 완전한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시편107:4,5절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107편은 중심(4-32절)에 성도들이 겪은 4 종류의 곤경과 각 곤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조 역시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운율을 살려놓았습니다.

A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4–9)
B   감옥에 갇힌 자들(10–16)
B′  병든 자들 (17–22)
A′   바다의 선원들(23–32)
그 첫번 째가 광야로 상징되는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영상입니다. 광야는 영구히 살 곳은 전혀 아닙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거기는 짐승이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성이 없고, 음식과 물은 핍절되기 일쑤입니다(4-5). 그곳의 삶은 무의미함을 거듭 거듭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의 경험이며, 범죄한 유대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 땅에 살아가는 모습 그자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바벨론에서 영적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도 종종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며(4), 주님이 지으신 참된 성에서 정착하고 싶어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그러하였습니다 (히11:9-10). 그러나 실타래 같이 얽혀 있는 삶의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바른 인도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경우, 어느듯 목적지에 도착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5-7). 이것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방법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시편107:8,새번역).

매일묵상(2022/07/18 – 22)

잠언18:19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이 잠언은 형제나 가까운 친구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친밀했던 사이가 갈등 관계로 바뀌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 관계 보다 풀기 어렵습니다. ‘형제’란 피를 나눈 친형제나 혹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서 만약 서로 간에 이해상충, 배신 등으로 신뢰관계에 금이 갈 때 당연히 감정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이 감정과 분노의 문제는 제일 다루기 힘듭니다. 마치 통행을 막기 위해 견고한 성의 문을 닫고 문빗장을 지르는 것과 같이 마음의 문을 닫아 관계를 끝내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적의까지 생겨나기 쉽습니다. 시편55편이 이런 감정을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동거할 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편도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133:1-3).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져 형제를 섬기고자 노력할 때 가능합니다. 이기적인 우리 자아를 우리 힘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받는 삶이며, 그 끝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잠언18:20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열매가 사람의 배를 채워 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로 만족하게 된다.”(새번역)

20절과 21절은, 갈등 상황에서 제자들의 행동과 언어를 다룬 단락(18:13-21절)의 결론입니다. 언어는 좋고 나쁨을 떠나 상대방에게 확실하고도 충분한 효과를 미치는 것은 물론, 부메랑이 되어 말한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솔로몬은 열매, 먹는다, 추수와 같은 농업 시대에 익숙한 비유를 사용하여 교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배’란 ‘그의 존재와 인격’을 나타내는 제유법입니다. 후단에 “(입술에서 나오는 말의) 결과”의 원어는 ‘소득 income’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비유의 원천을 과수원에서 밀밭 농사로 바꾼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만족하게 된다’라고 끝맺음 하여, 전단의 내용을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이는 언어 사용의 결과가 필연적임을 강조합니다. 과수원이나 밀밭에서 과일이나 곡식을 재배하여 그 열매를 따서 먹는 것처럼, 이 잠언은 자기의 입과 입술이 마치 과수원이나 밀밭과 같으며 언어는 씨요, 말하는 것은 파종하며 거름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절망에 빠진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갔습니다. 주님은 거의 모욕에 가까운 말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칭찬과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같습니다.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주님은 섭리 가운데 우리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말을 배워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8).

잠언18: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는 위험한 지체이기에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고 경고하여 신중할 것을 권고합니다. 먼저 우리는 언어의 힘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식축구의 전설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훈련 중 여러 번 실수를 한 어떤 선수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자 빈스 감독은 락커룸으로 가서 머리를 푹 숙이고 좌절하고 있는 그 선수(제리 크래머)를 격려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너는 NFL에서 가장 뛰어난 가드가 될 것이다.” 그 말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제리 크래머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습니다. 이에 반하여 남을 배려하지 않는 언어사용은 자신과 남 모두를 파멸시키고야 맙니다. 율리우스 시저는 뛰어난 로마의 장군이자 문필가였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망과 자신의 재주에 대하여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대화시 자주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주위에 있던 공화파들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인 옥타비아누스는 언어 사용에 주의하면서 모욕을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 날(최후의 심판)에는 그것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고(마12:36), 야고보는 혀를 ‘불fire’이라고 정의하고 그 불이 지옥에서 나온다고 하여(약3:6), ‘죽고 사는 것’에 영원의 의미를 가미하였습니다. ‘혀’의 조종자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선한 말을 하고 그 열매로서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마5:5).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시편106:7절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이 시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모든 권능과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지않고 오히려 반역의 길로 걸어간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출애굽에서 시작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구세주와 심판자로 바라보는 신학적 맥락 내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찬양으로 초대(1–2)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3–5)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구원(6–12) 
D         이스라엘의 불신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13–43) 
C′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절제(44–46) 
B′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기도(47) 
A′         찬양으로 초대(48)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기뻐 노래하였으나, 곧 어려움을 만나고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이같이 그들의 믿음은 냄비입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기 바빴습니다. 레파토리는 늘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나았다. 왜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건 사건이 닥쳐왔을 때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이유를 깨닫고 순종의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요, 중생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시편106:15절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작고하신 조용기목사님은 “영적인 복, 물질적인 복, 건강의 복”(요한삼서 2절)이라는 이른바 3박자 구원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본성 때문에 안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이 함께 오면 교만하여져서 마음의 가난을 의미하는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복을 받아 겸손해지는 것은 좋으나, 물질이나 건강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인격만큼’ 가지면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십니다. 그분은 환경 가운데서 당신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하신 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죠!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실패하였습니다 (시편106:13-14).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하는 삶 역시 인간 본성과 어긋나기에, 성령님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으로 욕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복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건강의 복 추구에 몰입하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 즉 영적인 복을 먼저 얻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중생의 결과). 각기 원하는대로 주십니다. 건강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얻고 그 물질을 우상으로 삼도록 허락하시나(마6:2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축복을 주시되, 물질은 거기에 소용되는 만큼만 주십니다. 험한 세상 주님을 신뢰하며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여야 합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히13:5-6).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매일묵상(2022/07/11 – 15)

잠언18:16절
“선물은 사람이 가는 길을 넓게 열어 주고, 그를 높은 사람 앞으로 이끌어 준다”(새번역)


잠언에서 ‘선물’ 혹은 ‘뇌물’과 관련하여 ‘맛탄’과 ‘쇼하드’가 사용됩니다. 후자는 늘 ‘뇌물’의 의미로 쓰이지만, 전자는 문맥에 따라 ‘선물’ 혹은 ‘뇌물’로 번역하여야 합니다(잠15:27). 16절에 나온 ‘선물’의 원어는 ‘맛탄’입니다만, 좋은 뜻 보다는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잠언은 공의가 뇌물에 의해 뒤틀릴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17:8, 23- ‘쇼하드’), 성경에는 감사 또는 호의를 받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골리앗의 블레셋과 전쟁에 나선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다윗을 통해 열 덩이의 치즈를 천부장에게 보낸 이새입니다. 또 다윗은 사울 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기 직전, 아말렉을 치고 얻은 전리품을 유대 장로들에게 보내어 환심을 샀습니다(삼상30:26). 그러나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선물이어도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세무 공무원은 납세자로부터 촌지를 받았을 때 그 얼굴이 절대로 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L 씨가 판사로 재직 시(1960-70년대), 누군가 케이크를 그분의 가정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L 판사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그 케이크를 화장실(변소)에 버렸습니다. 아이들의 실망감은 말할 수 없었지만, 조그만 선물 하나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안됩니다. L 판사의 행동은 올바른 것으로 회자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세상은 영악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기로 굳게  마음 먹고 기도하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잠언 18:17절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새번역)

본 구절은 송사를 다루는 재판의 경우 경솔하게 한 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해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듣고 그에 따라 객관적이고 적합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입니다. 사건의 진위를 가려야 하는 재판관은 원고나 피고 어느 한쪽의 말만 일방적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도 보는 자의 관점과 이해관계 기타의 사정으로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해관계가 얽힌 재판의 경우는 불리한 사실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골라 주장하기 때문에 한 쪽의 말만 들으면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본 잠언의 취지는 일상사에서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말을 반드시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란 모두의 주장을 듣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살핀 뒤에 공정하게 판단하고, 적합한 조치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솔로몬 왕은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창기의 송사를 해결함으로 지혜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어머니의 일반적 심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날 그렇게 해결하는 재판부는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유전자 분석)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사에서의 다툼은 당사자들 사이에 잘하고 잘못한 것들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은 싸우는 두 여종이 와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너도 옳고, 너도 옳고, 아내도 옳다’는 대답을 하여 다툼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이는 지혜로운 인간관계의 모범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 18:18절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17절이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전부 들은 후에 진위를 가리고, 분쟁을 해결하라고 하였지만, 본절은 인간의 지혜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분쟁에 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여 제비를 뽑은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1)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삿1:3), (2)성전의 직무를 배분할 때 (대상24:1-5), (3)아이 성 전투의 패배 원인자를 가려낼 때(수7:14-26), (4)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선출할 때(삼상10:17-24) 각각 제비뽑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2)는 공정성을 위해, (3),(4)는 이적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즉 제비로 뽑힌 아간의 범죄 물증을 찾아냈고, 사무엘은 전 날 사울이 왕으로 뽑힐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이스라엘의 제비를 뽑는 사건에는 배후에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가슴에 찬 판결흉배 속 우림과 둠밈도 비슷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를 선출할 때(행1:26)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제비뽑기 기록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는 더 이상 이런 제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평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비를 뽑는 것은 지금도 합리적이고, 승복한다면 때로는 강한 자 사이의 분쟁해결을 위한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어 해결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

시편105: 1절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새번역)

105편과 106편은 시편 제4권을 끝맺음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두 개의 흐름 속에서, 105편은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부터 정복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송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음을 만민에게 선포합니다(1,2). 시의 구조입니다.

A    찬양으로 초대 (1–6)
B    언약을 세우심 (7–11)
C    주님의 보호 (12–15)
D    주님의 섭리 (16–23)
C′   주님의 보호 (24–36)
B′   언약의 성취 (37–45b)
A′   찬양으로 마침 (45c)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신 역사를 세 단계로 일괄합니다. 첫째는, 족장시대로서(창12-50장) 언약의 제정, 가나안 땅에서 유목민의 생활, 애굽에서의 요셉 이야기를 포함합니다(7-23). 둘째는, 출애굽의 시기로서 (출1-12장)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고난, 모세와 재앙들, 출애굽하는 백성을 보여줍니다(24-36). 셋째로 광야의 여정을 거쳐 가나안 입성을 언급함으로 언약의 성취를 노래합니다(37-44, 여호수아서). 언약을 이루신 이유는 당신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 위함입니다(45). 약 750년의 역사를 45절로 요약한 본 시편은 때로는 신비롭게 행하시지만 언제나 백성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미리 계획하시며, 필요를 언제나 충족시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의 이런 형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편105:45).  

시편105 : 17절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편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이를 이루시는 섭리의 신비함을 노래합니다(16-23절).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야 절망하였겠지만, 그 사건은 야곱의 집 사람 70 명을 애굽으로 보내 민족을 만드실 계획의 출발이었습니다. 1,000년 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앞서 보내신 신비로운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그와 동시에 요셉의 인격을 도야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몰랐기 때문에, 큰 의문과 고뇌가 야곱과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은 13년 간을 노예와 죄수로서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너는 이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 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서 합격한 요셉은 총리가 되어 다스렸습니다. 8년 후 큰 흉년이 닥쳤습니다. 형제들은 그 흉년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도착한 그곳은 총리 요셉이 있는 곳입니다. 신비롭습니다. 고난이 곧 축복이라는 그 신비말입니다. 우리 역시 고난의 한 가운데서는 요셉이나 야곱, 그리고 그 형제들과 같이 같이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전혀 무관합니다. 요셉을 감옥에서 총리로, 궁핍에서 풍요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기근이라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주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시편105:23절).   

매일묵상(2022/07/04 – 08)

2022/7/4-8
잠언18:13절
“다 들어 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수모를 받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짓이다.”(새번역)

18:13-21절은 새 단락을 형성하면서, 미련한 자 보다도 갈등과 언어에 초점을 맞춥니다. 잠언의 제자는 정의를 세우며, 갈등을 해결하고 언어를 힘있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단락의 구조입니다: 13-15절(서론), 16-19절(법정에서 분쟁해결), 20-21절(언어의 힘). 바보가 보여주는 교만한 태도(12a)는 무례하고 성급하게 말하도록 만들어(13a), 수모를 받게 마련입니다(13b). 이는 명예와 존귀가 겸손한 자를 찾아온다는 교훈(12b)과 대조됩니다. 본 잠언은 현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천박하게도 말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 어리석은 자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18:2참조). 바보의 그런 경솔함을 보는 모든 사람이 ‘어리석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좋은 예가, 시험을 보는 학생입니다. 자신이 다 안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함정이 들어 있는 문제를 끝까지 읽지 않고 성급하게 답을 적는 자는 ‘0’점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급히 결론을 내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교만한 바보 앞에 놓인 특별한 유혹이자, 미성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길에서도 같습니다. 지금은 작고 하신  K 목사님은 독일에서 귀국 비행기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습니다. 너무나도 당황하여 공항에서 서성일 때, 우연히 아는 집사님을 만났고, 이어 그 지역의 부흥회를 인도하여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중간 결산 하지 말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인생은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성급하게 속단하는 신자는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잠언18:14절
“사람이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새번역)

즐거움과 근심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 잠언15:13및 17:22과 같이, 이 잠언도 심리적 상태와 신체의 건강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육체-영혼이란 이원론은 없습니다. 다만, 긍정적인 태도가 개인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상한 마음(우울증이나 불안 등)은 건강을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문제는 열등감이나 우울증을 가진 사람은 역경이 없더라도 패배로 향하는데, 하물며 역경 속에서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견인불발) 힘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최고의 답변은 좋은 소식이나 지혜를 듣고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지혜(좋은 소식)는 병을 이길 수 있는 정신적(영적) 생명을 낳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절망하는 포로들이, 은밀히 숨겨둔 단파방송 수신기로 연합군의 소식을 들었을 경우 절망은 대번에 소망으로 바뀝니다. 사도들이 전한 좋은 소식(복음)은 ‘지혜’의 정수입니다. 복음에는 환란, 역경, 궁핍, 죽음, 죄의 수용소에 있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신 기적,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들이 의미하는 바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만유의 주님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교제 방법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기대감 때문에 모든 우울증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롬8:37,새번역)

잠언18:15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지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를 말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베이컨의 말이 있지만, ‘지식’은 영적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잠언은 지식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서론(13-15절)을 매듭짓습니다. 전단의 ‘마음’ 후단의 ‘귀’는 ‘분별하는 힘’과 관련된 기관으로, 지혜자를 특징지우는 양도불가능한 자산입니다. ‘분별력’은 지식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지혜자가 되고자 하면 지식을 갖추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통상 착한 사람은 지식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물을 얻듯이 지식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10 호의 마을에도 자신 정도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자신 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반면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인품을 갖추지 못하고 교만하기 쉬운데, 이는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8:1). 본 잠언의 ‘명철한 자’’는  양자를 다 갖추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잠언의 제자들은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욥12:13;잠8:14). 즉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주신 목적은 사랑의 수고를 위함입니다. 이런 진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지식도 갖추어야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계시한 성경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7,새번역)

시편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본 시편의 각 구절마다 놀라운 감사의 탄성이 퍼져나와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104편도 같아, 두 시편은 하나님을 구세주와 창조자, 아버지와 보존자, 자비로우시며 권능을 가진 분으로 찬양드립니다. 시편의 은하계 중 이 두 개는 마치 쌍둥이 별과 같은데, 특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지신 우리 주님을 전제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다윗입니다. 이 시편은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1)로 시작해서 주의 천사들(20)과 천군들(21) 그리고 온 우주에 창조된 모든 것들에게 주님을 찬송하라는 외치고, 다시 한 번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22)는 말로 끝맺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개인적인 찬양 (1–2절)
B    각 인에게 베푸신 선하심을 찬양 (3–5절)
B′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의로운 통치를 찬양 ( 6–18절)
A′   우주적이며 개인적인 찬양(19–22절)

다윗은 인생의 영고성쇠를 모두 경험하였습니다. 20살에 군대장관이 되었고, 위대한 왕이자,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또한 인간의 심리를 통찰한 심리학자요, 하나님을 아는 신학자요, 하나님의 계시기관인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충신의 가정을 파탄시켰기에, 다윗의 가정은 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인생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강자인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눅11:28). 마지막 날 평가 기준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는가?”입니다.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9,10).

시편104:24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새번역)

104편의 주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103편이 ‘구속자-왕’의 측면을 노래한다면, 이 시편은 ‘창조주-왕’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광대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시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따라, 그분의 지혜, 능력, 인자하심을 묵상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창세기 1장의 서사시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1–4)
B    피조물의 다양한 존재형식(5–26)
B′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27–30)
A′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31–35)

어떤 목사님은 한려수도를 관광할 때 맑은 바다 속으로 수 많은 물고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수 없이 많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왔을 터인데, 넉넉하게 어부의 요구에 응해 준 바다는 풍요롭구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바다를 늘 채워 놓으시는 하나님의 광대함과 너그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누구를,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하는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예로 들면서 삶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장소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정, 직장, 기타 삶의 현장은 물론 여행도 영적 생활에 필수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 (시편103:33,새번역).

매일묵상(2022/06/27-07/01)

잠언 18:10절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10절과 11절 모두 보호와 안전에 관한 내용이나, 10절은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의인의 안전을, 11절은 재물을 의지하는 부자의 거짓된 안전을 다룹니다. 9절은 ‘패망하는 자’란 단어로 끝나고, 10절의 첫 단어는 ‘견고한 망대’입니다. 이로써 잠언은 어떤 경우에도 패망하지 않고 안전을 누릴 수 있는 견고한 망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제자들이 묵상하도록 합니다. 게으르지 않는 정도 갖고는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확실한 안전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의지하는 미국 달러, 국가(재정파탄 가능), 은행(5천만원만 보호), 부동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기 때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안전 자산, 피난처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여호와)의 이름’은 솔로몬의 잠언이나 주님과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3:5), 출애굽 사건, 십자가와 부활 등을 통해 본질과 속성을 보여주신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의인(그리스도인)은 바로 주님께 달려가서 참된 안전을 누립니다. 10절이 위치한 문맥이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지금 신실하게 살아가는 의인이 불의와 험담 그리고 풍문으로 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는 약속과 노아, 아브라함, 욥, 다윗 등의 구원 사건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견고한 망루 안에 들어가게 되고, 만유의 주님을 믿고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잠4:2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잠언 18:11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11절은 의인의 참된 안전보장책에 대비되는 부자의 거짓된 안전보장책(재물)을 말합니다. 부자는 어리석게도 속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이아말로 ‘견고한 성’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많은 재물을 쌓아둡니다. 고대에는 적이 공격할 때를 대비하여 성벽을 높이 쌓습니다. 헬라의 도시국가들도 모두 아크로폴리스라는 산 위의 요새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서 살다가, 전쟁이 터지면 모두 아크로 폴리스로 들어가서 적과 대치합니다. 실제로 아테네에 가서 본 아크로폴리스는 점령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포의 발명은  그런 방비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부자가 쌓아논 재물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가난한 자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10:15). 그러나 재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크게 당황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지혜보다 못합니다. 재물로는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나, 지혜는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의사의 권고를 따르는 환자가 아무래도 더 빨리 회복하여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없지만,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는 주님의 돌보심을 받다가,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의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이는 재물을 안전책으로 삼는 부자의 생각은 망상입니다만(말기 암 환자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는 의인의 안전은 확실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잠언18: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요사이 전세계는 물가상승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전혀 물가가 오르지 않던 일본에서도 바나나 한 상자가 1,800엔에서 올해 2,700엔으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언제 물가가 잡힐까요? 한 경제 전문가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연준)가 기준금리 인상을 멈춘 시점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1.75%이나, 연말에는 3.5%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물가가 잡히더라도 내년에는 경기침체가 우려됩니다. 우리는 이를 대비하면서 경기 연착륙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여 할 것입니다. 이같이 경기는 금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의 교만 여부입니다. 교만한 사람이나 국가는 반드시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은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고 교훈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눈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좋은 예로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바벨론 제국과 도시 건설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자마자 정신병자가 되어 7년이나 밖에서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그 후 겸손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보자, 주님은 다시 이성을 주셔서 그는 인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와 반대로 존귀가 오기 전에는 반드시 겸손이 먼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요셉입니다. 바로가 해몽을 요청하였을 때, 요셉의 첫 마디는 “해석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하면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만백성의 생명을 구함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11:2).

시편102:3절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있을 때만큼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없습니다. 응답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님의 완전한 지혜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말 없는 ‘대답’은 ‘NO’이며, 이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응답입니다. 물론 ‘아직 아니다’라는 결론도 주시는데, 이는 우리와 주님의 시간표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고(24), 병들고 쇠약한 상태에서 적들로부터 계속된 비방을 받아 너무나도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3-9). 그는 이 모든 일은 자신에 대한 ‘주님의 분노와 진노”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10). 자신의 날은 이미 기울어졌습니다(11). 그래서 시인은 서두부터 부르짖었습니다. 주님께서 귀를 기울여 속히 응답하여 달라고 말입니다(1-2). 그러나 시인은 영원하시며 만유를 창조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는 주님의 위대함과 그분의 목적하신 영광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본 시의 중심축입니다(12-22). 우리가 고난에 처하나 낙담하지 않는 근본적인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에 대한 신뢰가 우리 믿음의 중핵을 이루지 않으면,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편, 본 시편 25-27절에 나오는 영원하신 주님을 히브리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히1:10-12).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시편102:26절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새번역)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큰 채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가가 법으로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만 행사가능합니다. 이에 위반시 국가의 벌이 두렵기 때문에 채권자는 행동을 삼가합니다. 지혜자란 자신의 한계를 잘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겸손이 나오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만유의 주님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온 우주 만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고, 새롭게 변화될 대상일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한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영존하시는 주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살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에 등장하시는 영원하신 주님의 정체를 히브리서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0-12절은 본 시편을 인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온 우주의 옷을 바꾸시는 주님”으로 선포하십니다. 마치 물리학자가 소립자 세계의 놀라운 존재와 법칙을 발견하고 실험하여 확신을 얻은 뒤 학회에 보고하듯이,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3년 6개월 동안 주목하여 자세히 관찰하고 그분이 죽고 부활 승천하신 것과 그 의미를 확인한 후(요2:22), 목숨 걸고 증언한 내용이 복음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시고, 각 사람의 마음에 당신과 복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요15:2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매일큐티(2022/06/20-24)

시편 100: 1절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새번역)

이 감사의 시 짧지만(5절),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 그리고 다시 3중의 초청과 3중의 확언을 되풀이 함으로써, 멋진 내재율을 담아 저절로 찬양과 감사가 터져나오게 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2절) 3중의 초청; ‘환호하라, 섬겨라, 나아가라’
         B1 (3절) 3중의 확언: ‘하나님….우리를 지으신 분….그의 것’
A2 (4절) 3중의 초청: ‘들어가며…감사하며…송축하라’
          B2 (5절) 3중의 확언(하나님의 성품): ‘선하고…인자하고…성실하시다’

(1-2절)은 주님(야훼)을 찬양으로 환호하게 한 후에, 그분의 경내로 들어가 예배드리고, 끝으로 그분의 임재 안에서 안식하도록 이끕니다. 3절은 왜 우리 모두의 찬양과 예배가 합당한지를 말하는데,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주님(야훼)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고, 4절은 터져 나오는 감사의 마음과 환호를 표시하기 위해, 다시 한번 3중의 초청을 발합니다. 5절은 3절을 더욱 발전시켜, 주님의 영원하신 성품을 열거하고 시인의 찬양의 근거를 뚜렷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시인이 아는 주님은 창조주요, 출애굽을 이루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야훼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신 바로 그 하나님인 것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새노래를 만들기 때문에, 찬양의 깊이와 강도는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시100:5, 새번역)

시편101: 6절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이 시는 왕 다윗의 결단을 노래합니다. 특히 1절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전체 시(8절)를 지배합니다. ‘인자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다윗 자신의 통치 이념입니다. 시는 3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4) 왕 자신의 사적인 삶의 표준- 주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 (5-7) 신하들을 등용하는 기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은 배제하고, 충성된 신하는 등용한다/(8) 재판장으로서 정의를 확립하겠다. 유교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통치자의 자리나, 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그 나라는 부패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한 민국은 공무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여 아무나 공무원이 되지못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자신의 시처럼 온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출발선은 눈이었습니다(삼하11:2). 다윗은 눈을 통해 들어온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그의 집은 가장 비극적으로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외친 정의로운 통치 또한 좌절되었고 누적된 백성의 불만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온상이 되었습니다(삼하15장). 더우가 다윗을 이은 솔로몬 왕을 비롯하여, 모든 왕위 계승자가 불완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과 그 후의 모든 왕들이 부적합한 인물임을 폭로하며, 장차 오실 완벽한 다윗(예수 그리스도)을 기다리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사9:6).


잠언18:7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인권을 강조하는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회원국 중 하나인 터어키의 쿠르드족 인권 탄압을 강력히 비판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놀라서 나토 가입 신청을 하였으나, 터어키의 반대로 가입이 보류된 상황입니다. 두 나라에게 이런 상황은 전혀 의외였을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삶도 같습니다. 6절은 미련한 자의 입이 매를 자청한다고 가르칩니다만, 7절은 이를 보다 심화하여 미련한 자의 언어 생활이 그의 멸망의 원인과 영혼의 그물이 된다는 치명적인 결과를 제시합니다. 바보에게는 전혀 의외일 것입니다. ‘멸망이 된다’의 원어는 ‘메힛타’로서, 본래 소멸, 폐허 혹은 경악스러운 파괴 등을 의미합니다. ‘그물이 된다’의 원어는 ‘모케쉬’이며, 사냥꾼이 짐승을 포획하기 위해 매설한 올가미 덫, 갈고리 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미련한자는 입 때문에  숨통을 끊어놓을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 문장은 동사가 없이 명사로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본문의 진리가 영구불변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은 도덕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갈6:6). 이를 생각해 보면 입으로 인한 ‘멸망’과 ‘그물’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자란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무익한 말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2:3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잠언3:7,새번역)


잠언18:8절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새번역)

잠언은 언어의 남용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넘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험담은 마치 들불과 같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시킨다고 경계합니다. 그것은 바보가 오만한 말을 함으로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해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험담이나 풍문을 아무런 주의도 하지 않고 퍼뜨리는 사람은 잠언이 말하는 또 하나의 바보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종종 험담과 풍문을 전하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11:13;17:4; 26:22). 풍문(rumor)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도 없이 세상에 알려진 부정적인 소문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해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험담(gossip)은 궁극적으로 사실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을 무죄방면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험담과 풍문이 그토록 해롭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서 아담의 후예들은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락하였습니다. 8절은 험담을 마치 구하기 힘든 ‘맛있는 음식’에 비유하고, 마음의 깊은 곳까지 미침을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험담이나 풍문이 이런 마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험담을 회피하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그런 말을 반복하지 않고 흘려보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뜻을 음미함으로써 기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예레미야15:16).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잠언18:9절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패망하는 자의 형제이다.”(현대인의성경)

본 구절은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자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8)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서두에 ‘역시(also)’ 혹은 ‘심지어(even)’를 의미하는 ‘깜’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양자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부사 ‘깜’은 앞의 상황을 전제하고 그 상황과 관련된 또 다른 정보를 덧붙이고자 할 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 남의 말을 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한편,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 온갖 이유를 들고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유대 농경 사회에서는 거리나 밭에 사자가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핑계를 대지 말고 자신의 일은 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패망 하는 자의 형제”일 뿐입니다.” ‘패망(패가)’이란 재기 불능의 엄청난 파멸을 가리킵니다. ‘일’은 수고스럽지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느 치과 의사 한 분은 경기도 수원시 남문에서 오랫 동안 개업을 하시면서 빌딩도 구입하는 등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나 7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환자를 맞아 진료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분은(집사님)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할 줄 아는 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전3:22). 하나님은 그가 즐기는 일을 통하여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이 일을 발견하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전9:10). 그래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