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6/13-17)

시편98:1절
“새 노래로 야훼를 찬양하여라.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셨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승리하셨다.(공동번역)

“칸타테 도니노”(오, 주님을 찬양하라!)로 알려진 이 시편은 ‘공동기도서’(성공회)에 삽입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저녁 구약성서 읽기와 그것의 성취를 증언하는 신약성서 사이입니다. 시는 하나님의 승리(구원)(1-3)에 대하여 인간(4-6)과 피조물(7-9)의 찬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연(1-3)을 지배하는 ‘승리’의 주된 의미는 ‘구원’입니다. ‘예수(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헬라어 발음이고, 의미는 ‘야훼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어디로부터 구원입니까? 죄로부터 구원입니다(마1:21). 시의 첫째 연에서 노래하는 이 구원/승리는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오직 주님의 팔로만 이루신 업적(놀라운 기적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한 심판과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형에 불과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미래에 있을  ‘주(야훼)의 팔’(사53:1)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실 것을 노래하는데, 그 ‘주(야훼)의 팔’은 다름 아닌 ‘주의 종’입니다(사53장). 신약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1:12-14), 예언된 주의 종임을 밝혀줍니다(행2:29-36; 4:30).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고 부활하셨고(히10:14),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사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히9:28). 본 시편에서 부르는 ‘새노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14:3).

시편99:4절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새번역)

시편 99편은 찬양과 예배를 명령하며, 100편은 이에 화답하여 ‘온 땅’이 찬양합니다. 99편의 주제는 ‘예배로의 초청’이고, 3번의 ‘거룩’이라는 후렴구가 등장합니다: (1-3) 거룩하신 분의 은혜, (4-5)거룩하신 분의 율법, (6-9) 거룩하신 분과의 교제. 첫 단락은 거룩하신 왕의 위대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만민이 떨고, 땅이 흔들릴 것’이지만, 그분은 ‘시온에’ 그리고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십니다. 이 장소들은 백성에게 말씀하시고(출29:42-46), 죄를 속하시는 곳(출25:17-22)으로, 그분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정의와 동시에 은혜도 잊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십니다. 이어 시인은 ‘야곱’을 등장시켜 공의를 행하라는 율법을 받았지만, 여전히 옛 야곱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우리를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시는 완전한 ‘율법’에 직면하면, 늘 은혜를 갈구하게 되는데, 이는 비틀거리며 걷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 언약궤 위의 ‘시은좌’에 앉아 계시는 분의 발등상에 경배하도록 만듭니다(5). 마지막으로 시인은 ‘모세’ ‘아론’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증거와 율례’를 지키면서 주님과 동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명령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구약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결함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 주님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잠언18:4절
슬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는다.” (새번역)

현자의 말은 심오하며 때로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지혜를 담고 있어서, 심사숙고를 해야만 합니다(깊은 물). 잠언은 지혜자의 이 특성을. ‘물’이라는 소재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건조하여 생수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땅속 깊이 흐르고 있어 건져올리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기(겨울철)에는 비가 내리고, 말라 있던 강(와디)에 격류가 흐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스라의 철병거 900승이 말라 있던 ‘와디’인 기손 강을 통해 진격하고 있을 때, 상류인 다볼산에 비가 내렸고 이는 순식간에 기손 강을 격류로 변화시켰습니다. 철병거 900승은 물 속에서 전멸당하였습니다(사사기). 한편, 현자에게서 나오는 지혜는 “세차게 흐르는 강”처럼 솟아나 끊임없이 생수를 공급하기 때문에, 그 지혜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줍니다. 잠언 3천 개를 말한 솔로몬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샘”에 비유될 수 있는 지혜자로서, 우리 주님을 상징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전 인류에게 주신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 모두의 깊은 갈증과 절망을 한 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 속에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요3:13-21). 아들을 보내주신 이 사랑을 깨달아야 비로서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잠언18:5절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권력 남용을 경계합니다. 특히 정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재판에서 사악한 것들, 즉 뇌물 수수, 위증, 차별적 대우, 편견, 압력, 연줄 등으로 인하여 그릇된 판결이 날 경우 개인의 삶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창조주가 정하신 “의의 열매”를 산출해 내야 인간들 사이에 화평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재판정에서 이 문제는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부족하고, 재판관의 재량이 많이 작용하던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경우에도 약자 편에 서서 올바르게 내려지는 재판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으로 의역된 원문은 “악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 즉 외모, 재산, 권세, 가문 등 재판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외적인 것들을 보고 일방적으로 편들어 주는 행위(24:23; 신10:17)를 보여줍니다. 후단에 “억울하게 하는 것”의 원어는 ‘기울이다, 치우치다’입니다. 이 또한 뇌물과 위증, 권모 술수, 사회적 신분 등 외적인 것 때문에 정의가 굽어져 의인을 억울하게 만드는 재판을 묘사합니다(출23:2).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인데(고전6:3), 하물며 세상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주님만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판단할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약1:5).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지혜, 건강)을 공급받는 삶,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9).


잠언18:6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바보는 언어를 남용하기 때문에 다툼(소송)을 일으키지만, 해를 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교훈입니다. 전단을 보면, 그 바보는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열어 마구쏘아 대고는,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듣는 자는 그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말투나 인격모독적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다툼이 시작됩니다. 다툼의 결과는 미련한 자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데, 후단은,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한다”, 고 말하여 역설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이 타인을 배려하고,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샬롬이 만들어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보가 열변(?)을 토한다면,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동정심 대신 적개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매를 자청하다”는 표현은 재판관의 명령에 의해 불법을 행한(명예 훼손, 모욕 등) 벌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19:29). 타락한 관리를 부추켜 죄 없는 자를 매질하려고 시도하다가 자신이 매질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10:11, 18). 이에 반하여, 현명한 사람은 갈등을 피하거나(17:1, 14),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15:18). 그러므로 잠언은 다툼을 멀리하면 영광이 된다(가정과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의미)고 합니다(20:3). 우리로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먼저 사건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시37:5-7). 그 후에야, 악한 자를 감정으로 대적하지 않고, 정의의 길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양보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마5:40,새번역)   

매일묵상(2022/06/06 – 10)

잠언 18:1절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잠언 18:1-21절의 구성입니다.
(1)미련한 자의 반사회적 언어습관(18:1-11)
   (가)어리석은 자의 반사회적 성격, 행동과 결과(1-9)
          서론(1-3) 어리석은 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본론(4-8) 미련한 자의 왜곡된 언어습관
          결론(9) 바보는 사회를 약탈한다.
   (나)주님 안에서 의인이 가지는 방패(10-11)
(2)지혜자의 화목하게 하는 언어습관(18:12-21)

바보는 ‘사람을 싫어하며 고집불통’의 특성이 있습니다(1,2). 그래서 공동번역은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은 외톨이가 된다”로 의역하였습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란 비사교적인 사람을 묘사하는데, 문맥 상 그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바보입니다 . 그 바보는 자신의 갈망- 돈, 명예, 권력 등 -을 성취하려고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자신의 목표와 상관없다면 다툼(소송)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에게 냉담하고, 경건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합리성까지 결여되었습니다. 창세기(13장)에서 롯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요단 동편을 선택하여 모든 소유를 이끌고 소돔 성을 향해 갔습니다. 소돔 땅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돌라오멜 왕에게 다른 소돔 사람들과 함께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이 구출해 주었고, 소돔 성이 멸망할 때 역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 (잠언18:2,공동번역).

잠언 18:2절
“미련한 자는 깨우쳐주는 말을 싫어하고 제 생각만 내세우려 한다”(공동번역)

2절은 닫힌 마음과 열린 입을 가진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려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1절)와 동일시 됩니다. 그 바보는 ‘깨우쳐주는 말(명철)’은 싫어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하기는 좋아합니다. ‘깨우쳐주는 말’ 혹은 ‘명철’의 원어는 ‘테부나’이며 ‘분별’을 의미하는 ‘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호크마)와 심히 많은 총명(테부나)’(열상5:9), 히람이 놋을 다루는 ‘총명(테부나)’이 이것을 말합니다 (왕상7:14). ‘기술’로도 번역되기에, 미련한 자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의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사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크게 총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제의 기술은 어설프기만 한데 도제가 도공의 지혜를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굽는다면 좋은 도자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만약 미련한 자가 현자의 깨우치는 말을 싫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마구 말을 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입니다(10:8; 14:3). 그러나 그 바보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낼 경우 자신의 미련함이 알려져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12:23; 13:16).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깨우치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행위를 논하다가 심판 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물론 욥의 중보기도로 벌을 면하였지만, 그들의 말을 읽어 보면 욥과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도 단순하게 판단한 잘못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벌과 모욕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잠언18:3,새번역)    

잠언 18:3절
“악한 사람이 오면 멸시가 뒤따르고, 부끄러운 일 뒤에는 모욕이 따른다.” (새번역)

본 잠언의 ‘악한 사람’은 1절의 반사회적인 분리주의자, 2절의 미련한 자가 발전된 형태입니다. 그에 대한 벌로서, ‘멸시’와 ‘모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보는 스스로를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깨우쳐 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결과 그 악인은 주님 앞에 죄를 범하여 벌 받고 공동체에 의해 멸시당합니다. 전단에서 ‘….이 오면…뒤따르고’란 원인(악인)과 결과(멸시)의 필연적 관계를 말합니다. 여리고 성 전투 시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페르샤 산 외투 한 벌과, 금 한 덩이를 숨겼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아이 성 주민에게 패배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드러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였습니다.  그의 수치는 씻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할 경우 ‘모욕, 망신’은 당연히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후단은 악인의 부끄러운 일이 심판을 받고. 사회의 치욕거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예24:9). 그러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교만, 탐욕,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비시 600년 경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 왕과 백성이 그러하였습니다(예29:18-21).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계속 전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는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지혜와 생명이었지만, 어리석게도 왕 시드기야와 백성은 불순종하였습니다. 얼마 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왕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감과 동시에, 다윗 왕국은 영원히 막을 내렸습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언18:4).

시편96: 2절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이 시는 야훼께서 왕이 되심을 노래하는 시편들(93-100)에 속하고, 배경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장막에 안치시킬 때(다윗 시대)로 보입니다(역상16장). 주제는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주님(야훼)입니다.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찬양의 선포(1–3)
B    주님의 위엄(4–6)
A′   찬양의 선포 (7–9)
B′   주님의 통치 (10–13)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매일 ‘찬양’하는데 능동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위엄과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그분을 또 찬송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야훼의 구원(2), 기이한 행적(2), 의로운 통치(10), 만물의 창조주(5), 만유의 회복(11,12),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13)을 묵상한 뒤, 경외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같이 노래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거나, 성취될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 사건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만 이전하였지 여전히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주인은 바로에서 야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되신 야훼(하나님의 아들)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세와 같이 우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나라(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구원하고 있는 과정이 신약의 구원 사건입니다. 그 동인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요3:16).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님의 순종과 희생이 새노래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확실한 심판이 전제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3).    

시편97: 1절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뛸 듯이 기뻐하여라.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새번역)

이 시의 초점은 의롭게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님(야훼)입니다. 그분은 두렵고 엄위하시며(3-5), 공의롭게 다스리십니다(2). 주님의 심판으로 세상은 자유함 받아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1).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나(6-9), 주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와 헛된 것을 추구한 모든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7). 시인의 이 같은 선포는 하나님 아들에 의한 최후의 심판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요5:27-30).  멸망당한 다윗 왕국은 하나님 나라를, 왕 다윗은 그 나라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윗 왕은 죽었지만, 그분의 후손인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승천하여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재림하셔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행17:31).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으로 부릅니다(8,12).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10). 왜냐하면 그분이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 주님의 통치는 먼저 신자의 삶 속에서 ‘의의 통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본 시편은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는” 주님(야훼)이라는 신학적 대답을 줍니다(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주님을 기뻐하여라…감사를 드려라”고 말합니다(10-12). 세상은 험악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약속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1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매일묵상(2022/5/30 – 6/3)

시편 95: 1절
“오너라,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새번역)

본 시편의 주제는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 사건들을 돌이켜 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홍해를 건넌 후 2개월 즈음에 시내 산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광야의 길을 걸은 백성과 짐승 떼는 목이 말랐습니다. 모세는 위급하여 주님께 부르짖으니 호렙 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곳을 ‘맛사(시험)와 므리바(다툼)’라 이름하였습니다. 이는 백성이 자신은 물론 주님과 다투고, 주님의 임재 여부를 시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출17장). 같은 사건이 38년 후 신광야에서 또 한 번 일어났습니다. 물이 없어 목마른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자, 물을 줄 능력이 없는 모세와 아론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은 회중을 모아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를 내면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쳐서 물이 나왔지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신 광야 지역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지팡이로 때리면 간혹 고여 있던 물이 나오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도록 순종해야만 하였습니다(민20장 므리바 사건). 이 사건의 핵심은 위기가 닥치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고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순종’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회고하여 경고하고,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본 시편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을 격려합니다. “내가 화가 나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95:11;히4:5).

시편95: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까지  2개월 동안, 주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 광야에 이르자 물이 없어 다투는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출17:1-7), 시내 산에서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을 불신하고, 시험하고, 불순종하여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9-11). 그들의 후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1), 목자(6-7), 율법의 수여자(7-11)로 규정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런 경고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표적들을 의심하고 믿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내 안식’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과 관련하여는 가나안 땅이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3:7-4:13절은 이를 상론합니다. 히브리서는95편의 의미를 이스라엘에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오늘’(95:7)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이며, 거기에서 명령한 ‘너희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며, 약속된 ‘안식’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임을 말합니다. 이런 권면을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되돌아 가려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본 시편과 히브리서의 경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히4:14새번역)

잠언17: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은 선하지 못하니라”

본 잠언은 17:23절(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보다 한층 안 좋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법제도 자체를 뒤집어 엎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하다’의 원어는 ‘아나쉬’로 ‘벌금을 매기다’를, ‘의인’은 문맥 상 ‘죄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넘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귀족을 매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자 자신을 위함입니다. 이 잠언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설립된 이래 1987년 민주화를 위한 평화시위가 성공할 때까지, 본 잠언이 글자 그대로 실현된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비시850년 경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시대에,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던 나봇이 그렇습니다. 이세벨의 지시에 의하여 나봇과 그 가족은 불의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침묵할 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린’ 전형적인 사건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시인하자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넘겨졌고, 총독 빌라도에게 쇠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사 그분의 주장이 맞다고 옹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시 때때로 주님을 의지하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17:27)

잠언17:27절
“배운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은 언제나 침착하다.”(현대인의 성경)

27절에서 ‘지혜자’란 말을 가려서 하고 감정표현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이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식입니다. ‘배운 자’는 참되게 지식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호크마)’란 ‘지식(다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공기역학법칙을 먼저 숙달하였기 때문에 최초로 비행기를 날렸습니다. 자동차 기술자는 자동차의 구조와 기능을 알기 때문에 능숙하게 차를 수선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의 삶의 태도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요, 목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어떤 상황 하에서도 피할 길을 주님이 마련해 놓으셨다는 믿음이 있으며(고전10:13), 경험을 통해 증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침착합니다. ‘침착, 냉철함’ 이것이 두 번째 요소입니다. 성품이 냉철하지 못한 자는 지혜자(명철한 자 혹은 분별력 있는 사람)가 아닙니다. ‘침착’과 ‘지식’은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침착할 수 있고(숙달된 군인), 침착하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으나  침묵하셨습니다(사53:7).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고난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침묵하셨고, 침착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속죄권을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 이 진리를 묵상하고 잠잠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17:28)

잠언17: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아브라함 링컨의 말입니다: “입을 열어 모든 의심을 제거시키는 것보다 입을 다물어 너를 바보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28절에서 솔로몬은 어리석음을 감추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발을 받았을 때 입을 다물고 마음을 다스리도록 교훈합니다. 지혜로운 자라도 말을 많이 하면 허물을 면키 어렵기에, 잠언은 입을 다물고 잠잠한 사람을 슬기롭다고 칭찬합니다(10:19). 하물며 어리석은 자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어리석습니까?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26:12). 전문가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말을 조심합니다. 약 1년 전 네이버와 카카오 라는 회사의 주식이 올랐을 때, 어느 유명 애널리스트는 무조건 두 회사의 주식을 사서 5년 보유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투브 영상을 올렸습니다. 얼마 후 시장은 두 회사의 세계시장에서의 성장가능성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주식은 반토막 났고, 그는 유투브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보가 현자로 여겨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28절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분노를 즉시 드러내고 매를 자청하는 바보도 한 번 참으면 이렇게 지혜로워 보이는데, 슬기로운 사람의 경우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자는 분노할 때 자신을 방어하려고 경솔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충분히 조절한 후, 신중히 처신함으로써 상대방의 실수를 우정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런 잠언의 문맥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매일묵상(2022/5/16 – 20)

시편93:1절
‘주님, 주님의 왕위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었으며,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새번역)


93-100편까지, 7개 시편은 주님(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는 주제를 강조합니다. 93,94편은 모든 땅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5,96편은 모든 신 위에 통치하시는 왕을, 97,98편은 주의 백성의 마음속에 계시는 왕을, 99,100편은 성품 속에서 보여지는 왕을 각각 노래합니다. 본 시편은 짧고( 5구절), 한 장면만(물과 바다의 일렁거림) 묘사하지만,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적 실재를 힘차게 선포합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1-2절에서 능력의 옷과 띠, 즉 왕복을 입으신 주님과 그분의 왕위(보좌)를 확언한 시인은 3-4절에서 혼란스러운 이 세상의 세력들의 요동침을 물과 바다의 일렁거림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주님이 행하신 많은 통치의 증거들을 묵상하면서, 시인은 영원한 평온을 갖습니다.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이유는 바로 통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1절). 세상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역사적 사실(롬1:3-4)을 믿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학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사와 그를 신뢰하는 환자의 관계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왕 같은 제사장 지위에 있습니다(벧전2:9). 당연히 시편 기자처럼 본 시편의 메시지를 경험하여 확실한 증거들을 가져야 합니다(마14:23-34). 그런 증거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온을 주는 것은 물론,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증거는 견고하게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시편93:5,새번역).

잠언17:19절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
”(현대인의성경)

17절이 선한 이웃(친구와 혈육)을, 18절이 어리석은 이웃(보증을 서는 친구)을, 그리고 19절은 싸움을 좋아하는 이웃을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의 구조입니다.
     a1 “죄를 사랑하는 자(원인)
         b1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결과)
         b2“대문을 높이는 사람”(원인)
     a2“패망을 불러들이는 자”(결과)
주부는 ‘다툼’이라는 결과로부터 ‘교만’이라는 원인으로, 술부는 “죄(죄과)’의 원인에서 ‘패망’이라는 결과로 이전합니다. 말싸움을 포함하여 다툼의 원인은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잠언은 ‘대문을 높인다’는 말로 교만한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교만한 자는 사람(친척이 장관이다)이나 물건(많은 재물)을 근거로 자신을 높입니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둥지를 튼 독수리와 같이, 위험은 접근이 불가능하니 이제 자기는 안전하다고 믿습니다.(오바댜4절). 당연히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그 소유자의 교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잠언은 거만한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자신의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국고를 맡은 대신 셉나(사22:15-19),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왕 여호야김(예13-19장) 그리고 페르샤의 대신 하만(에스더)이 그런 자들로서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멸망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죄인의 마음은 먼저 하나님께 비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잠언17:20)

잠언17:20절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말은 성품을 반영합니다. 악인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졌다(굽은)는 것과 거짓말(패역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혀”를 비교하는 것은 통상적인 잠언의 방법입니다. ‘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재앙을 경험한다는 말로서, 후단은 ‘재앙에 빠진다”는 직설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악인은 확실히 멸망합니다. 한편, ‘얻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므차’는 ‘마차(발견하다)’의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행위가 진행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거기에 ‘로’라는 절대부정을 나타내는 부사를 붙여, 잠언 기자는 마음이 왜곡되고 심술궂은 사람은 복이라고 부르는 좋은 것을 찾아 헤메지만 얻는 것은 고사하고, 절대로 발견조차 하지 못한다고 교훈합니다. ‘패역(히브리어 ‘하파크’)’은, ‘어떤 것을 뒤집어 엎다, 전복시키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말로서 어떤 일의 진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는 자, 즉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빠지느니라’는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팔’의 미완료형으로, 악인에게는 재앙이라는 무서운 결과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시고 당신의 뜻에 거슬려 살아가는 악인의 집에 계속하여 재앙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과의 교제를 피하여야만 합니다. 어떻게 악인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언어 생활과 삶의 결과를 주의하여 보십시요. 결국 마음의 상태와 언어의 생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잠언17: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1-25절까지는  미련한 자와 관련된 잠언입니다. 특히 21절과  25절은 어리석은 자녀 때문에 겪게 되는 부모의 불행을 말합니다. 전단의 ‘미련한 자’의 원어는 ‘케실’이며, 영적, 지적, 혹은 도덕적 일들을 어리석게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후단의 ‘미련한 자’란 ‘나발’이며, 무엇보다 신앙적인 일과 관련하여 미련한 자입니다. 그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로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좋은 예가 갈멜사람 나발입니다. 그는 사업수완이 있는 대단한 부자였지만 교만하여 다윗을 조롱하다가 공포에 질려 죽었습니다. 한편, 전단의 ‘미련한 자(케실)’는 기초적인 가족적 유대조차 무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를 근심시킵니다(10:1). 후단의 미련한 자(나발)는  불경건한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좋은 예입니다.  실로 미련한 자의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낙이 없고 근심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가산을 탕진하여 아버지에게 커다란 부끄러움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맏아들 암논의 비도덕적인 행동, 둘째 아들 압살롬의 복수와 반역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미련한 아들을 두지 않는 좋은 방법은 늘 기도하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목적은 만유의 주님을 두려워 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교육을 자녀들에게 한 적이 없어 이스라엘 국가를 통일하고도, 말년에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17:22).

잠언17: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본문에서 ‘양약’의 원어는, ‘예티브- 좋게 만들다’와 ‘께하- 약, 치유’로 된 복합어 ‘예티브 께하”입니다.  그러므로 전단은 기쁨을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후단은 ‘마음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뼈는  피를 생성해 내는 기관이기에, 잠언은 사람이 근심 때문에 육체적,정신적, 그리고 영적  생명이 마비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근심이나 스트레스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이 위치한 단락(21-25절)의 주제(미련한 자들의 삶)에 비추어 잠언은 전단은 지혜로운 자, 후단은 미련한 자의 삶를 지칭합니다. 21절이 말하듯이, 미련한 자(‘케실’과 ‘나발’)는 영적, 지적, 혹은 도적적으로 어리석게 처리하는 자들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실질적 무신론자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얻어지는 마음의 즐거움이 얼마나 크며, 다른 어떤 것보다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보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 물질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성공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주권 안에서 안식하나, 미련한 자는 자기가 안고 온갖 근심 걱정 분노에 시달립니다. 이른바 뼈가 마르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당할 때, 마음을 굳게 하고 주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던져버리십시요. 이는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5:7,사역).

매일묵상(2022/05/09 – 13)

시편92: 5절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 주님의 생각이 어찌 이다지도 깊습니까?”(새번역)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적절합니다. 안식일은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의존해 사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일 동안 힘껏 일한 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권자이신 주님께 예배드리며 안식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라는 제4계명이 주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주의할 점은, 진정한 안식을 가져온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일요일)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행20:7).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안에서 안식할 줄 아는 신자들은 복이 있습니다(마11:28).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I.      지존자를 찬양 (1–3)
    II.     감사의 노래 ( 4–14)
      A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 4–5)
         B      심판과 존귀 (주님)(6–8)
         B′      심판과 존귀(시인) ( 9–11)
      A′      의인의 번영 (12–14)
    III.      주님을 찬양 (15)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보다 크고, 깊으시며(5), 심판은 아주 공의로우시기에 악인은 멸망당하고, 의인은 높이들릴 것입니다(7-11). 따라서,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신자야말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편92:12).

시편92: 12절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새번역)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목격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나를 엿보던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보며, 나를 거슬러서 일어서는 자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새번역). 그리고 의인의 삶을 생각하자(12), 시편1편의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92편과 1편 모두, 의인의 삶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다만, 1편에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늘 푸르른 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92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심긴 종려나무와 백향목,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른 거목입니다. 1편은 의인의 일상을, 92편은 성전 예배를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살면서, 아름답게 노년을 맞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늙어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에 차며,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노후가 영광스러운 진정한 이유는 그가 보다 뜻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살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노년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당신의 말씀에 정직하시고, 우리가 의지할 바위가 되시는지 그의 삶 자체가 선포합니다(15). 실로 의인의 삶은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인생의 최종평가는 우리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낸 주님의 영광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1:21, 새번역).

잠언 17:16절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새번역)

16절 이하 20절까지 5개의 구절은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친구)과 분쟁을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바보를 대비시키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관점에서 교훈을 줍니다. 16절은 ‘왜’ 혹은 ‘어째서’의 뜻을 갖는 히브리어 ‘람마’로 시작되는 수사의문문의 형태입니다. 솔로몬은 기괴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손에 돈을 들고 현자에게로 가서, 지혜를 사고자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왜’에 대한 답은 불필요합니다. 현자는 무척 화를 낼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바보란 자신을 위해서라면, 도덕적 질서를 무시하고, 현자의 바른 질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완고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바보가 돈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고 온다면, 현자가 질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명기에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주님이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받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신23:18). 지혜나 참된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실로, 지혜는 돈을 지불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들음, 신중함, 겸손 등 바른 인격의 축적을 통해서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과목은 만유의 주님을 경외하는 법 배우기입니다(1:8). 자기중심적인 바보는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줄 모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는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에, 타인은 물론 친구나 혈육의 가치, 그리고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바보는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습니까?(15:32).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잠언17:17, 새번역).

잠언 17:17절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인 친구와 형제의 가치를 교훈합니다.  친구와 형제는 늘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찾아오는 고난의 시기를 감안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악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친구나 혈육을 돌보지 않습니다. 친구는 좋은 시절이건 아니건 언제나 사랑하며 위해주는 관계입니다.  고난의 시기는 참된 친구를 분별하도록 합니다. 역경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의 유배 생활 중  역관 이상적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고, 세한도를 그려 주었습니다 (1844년). 한편, 본 잠언은 형제는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운명지워졌다고 말합니다. 친구와 형제의 차이를 구분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고난의 시기에는 친구들은 떠나고(19:4), 혈육을 나눈 형제만이 도움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친구가 역경에 처할 때나,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힘든데, 어느 정도까지 도와 주어야 할까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3년 정도의 적금을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 사례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지혜롭게 접근하였습니다. 20년 전 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이들의 변화를 확인할 팰요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 테스트 후 변화를 확인한 요셉은 전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구나 형제가 곤궁해도 남의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처할 지혜가 부족하면 주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약1:5).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17:18).  

잠언17: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현대인의성경)

40년 전만 하여도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여야 입사가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역시 신원보증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수 년이 흘렀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분은 신원보증을 한 친지에게 손해 배상이 청구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사라지고, ‘보증’이 사업의 한 부문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개인 간의 보증의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보증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였습니다. 17절이 선한 이웃(친구/형제)을 다룬다면, 18절은 어리석은 이웃(친구)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빚 때문에 매우 곤란에 처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어리석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신을 모르고 정에 못이겨 선뜻 보증이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쉽게 타인의 빚에 보증을 서는 사람은 지혜 없는 자라는 잠언의 말씀은 주의해야 합니다. 한편, 17절에는 역경에 처한 친구를 돌보라고 하고, 18절에는 보증 서지 말라고 합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역경에 처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아무런 계산 없이 채무, 특히 고리로 차입한 빚의 보증을 서지는 말라는 훈계입니다. 타인의 빚에 대한 보증을 섰다가 곤경에 빠진 사람을 묘사한 잠언6:1-5은 특히 청년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리석은 이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기를 좋아 하는 이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죄를 사랑하는 자이며 부를 자랑하듯 대문을 높이는 사람은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자이다.”(잠언17:19, 현대인의성경)

매일묵상(2022/05/01 – 06)

시편91: 2절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새번역)

시인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할 때, 실로 많은 위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험은 숨어서 기다리며(3), 때로는 음험하게 다가오기도 하며(3,6), 위험이 예상되어 두려워 하게도 됩니다. 더구나 위험의 연속일 때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피난처, 그것도 절대적인 피난처를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확실한 피난처임을 발견하고, 자신의 피난처로 삼았음을 거듭거듭 말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시의 주제 – 확실한 보호
     B1 (2) 개인적 증언
         C1 (3–8) 시인의 확신
    B2 (9a) 개인적 증언
         C2 (9b–13) 시인의 확신
  A2 (14–16) 확증된 주제: 하나님의 보호

시를 읽어내려가면, 하나님을 우리의 요새요, 피난처로 삼았을 때 늘 안전하다는 시인의 확신에 저절로 동의하게 됩니다(9,10). 시의 저자는 알지못하나, 전쟁을 누비는 다윗이 떠오릅니다. 다윗 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또 경험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90편, 91편, 92편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90편에서 모세는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호소합니다. 91편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92편에서, 경건한 시인은 찬양을 드립니다. 신약의 두 곳에서 본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마귀가, 또 하나는 주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15절, 새번역)

시편91: 11,12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1,12절에서, 주님은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명령하사 시편 기자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피난처와 반석으로 삼은 시편 기자에게 주신 약속들의 절정입니다. 천사들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영적 존재입니다(히1:14). 더 이상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와 같은 구원 얻을 상속자들은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사자나 독사와 같은 무서운 원수들을 짓밟는 정복자들입니다(13). 정복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귀는 이와 반대입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시는 주님을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는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면서, 본문 11,12절을 안전에 대한 근거로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마4:6,7).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읽는 방식은 마귀의 특질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써보지만 너무나도 힘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40일 금식 후로 지쳤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의 주님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천사의 도움을 보내셨습니다(마4:11; 눅22:43). 요청도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특질입니다 (마26:53,54).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신약에서 인용된 또 하나는 13절입니다. 내일 보내드리겠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시편91:13절)

시편91: 13절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사자와 독사’는 각기 힘과 교활함을 상징하며, 빈번하게 악한 사람이나 능력들의 존재를 표현합니다. 13절은  양자를 함께 등장시켜 ‘그 악한 존재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한 구체적 성취는 본 시편이 아니라, 신약 성서에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악한 존재는 사람 보다는 마귀나 귀신 등 영적인 존재를 지칭합니다. 좋은 예는  70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한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주님께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시편 91:13절에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능력이나 존재도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은 이 진리를 잘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늘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물론, 어디까지 구원하시는지 알려고 주님을 시험하는 따위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경험한 뒤 빠지기 쉬운 교만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때문에, 주님은 승리를 기뻐하는 70 명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교훈하셨습니다. “정녕, 주님은 너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너를 건져 주실 것이다.” (시편91:3,새번역)

잠언 17:14절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으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두어라.”(새번역)

14절은 12절에서 경고한 성난 바보를 만났을 때, 그의 억눌린 오만과 분노를 자극하면 싸움(소송)이 일어나니 주의하라고 권고합니다. 분노를 품은 어리석은 자와 다툼이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둑이 터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싸움의 시작을 둑(땜)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은유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둑이 터지는 과정은 물이 새어나오면서 시작됩니다. 물은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이윽고 둑이 터지게 되면 그 손해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은 한 번 시작 되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싸움은 일어나기 전에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만 두다’의 원어의 뜻은 “단념하다”입니다. 만약 다툼이 조금이라도 시작된다면, 부드러운 대답으로 분노를 쉬게 하는 등  화목으로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상호 간의 손해를 극소화하는 것은 물론, 평정을 되찾게 되어, 이성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선을 악으로 되갚은 자들 앞에서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현명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 대신 다윗은 기도하면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시편38:12-20). 이와 대조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사람은 말썽꾸러기(6:12~19), 비뚤어짐(16:28), 성냄(15:28), 분노(29:22), 오만(28:25), 증오(10:12)와 같은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 모두 피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 (잠언16:32,새번역).

잠언 17:15절
“악인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주님께서 싫어하신다.”(새번역)

15절은 10절부터 시작된 “어리석은 자와 벌”이라는 주제를 끝맺음하며, ‘바보와의 싸움을 그치라’는14절의 교훈에 균형 추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정의의 확보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악인을 의롭다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 할 정도로 정의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율법은 시비를 맡은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라”(신25:1)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 규정과 반대로 판결한다면, 큰 재판장이신 주님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싫어하신다”의 원어 “ 토에바”는 구역질나는 것, 혐오, 우상과 같이 가증한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토해 내치고 싶을 정도의 역겨워하고 극도로 혐오스러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불의한 판결을 내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가증한 우상과 같이 파멸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를 알면서도 그릇되이 판결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타락한 재판관들은 죄 있는 자를 무죄방면하고, 죄 없는 자는 아예 재판정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상당히 빈번하였습니다. 속담에 한 명의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보다, 10명의 죄인을 놓아 주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잠언은 이와 관련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있습니다. 판결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악한 천사임)들을 판단할 것입니다(고전6:3). 당연히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 중 하나는 사랑은 정의(=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우선임을 아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잠언 17:16, 새번역).

매일묵상(2022/04/25 – 29)

시편 89: 49절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다윗과 더불어 맹세하신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새번역)

이 탄원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4절) 인자와 진실의 하나님/ (15-37절)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들/ (38-51절) 약속과 다른 현실 그리고 기도입니다. 서두부터 시인은 인자와 진실이 많은 주님이심을 노래합니다(1-14). 이어 시인은 주님의 약속 즉, 다윗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를 후손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기억합니다 (15-37).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다윗의 왕가는 멸망당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은 가나안 땅에서 뽑혀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시인은 외칩니다. 비시586년 베벨론에 멸망당한 후, 이스라엘 상황이 그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후, 다윗 가문에서 결코 통치자인 왕은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탄식하며 심한 좌절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합니다. 약 550년 후,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롬1:3).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열망하는 시인에게,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고백한 시인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나도 확실한 응답을 주셨습니다(48절).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죄와 사망과 싸워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깨진 것처럼 보일 때, 시인처럼 우리도 약속을 주님 앞에 노래하고, 현실의 실망을 기도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고후1:20, 새번역)

시편90: 12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새번역)

시편 제1권(1-41)은 개인적 차원을, 제2권과 제3권(42-89)는 국가적인 차원을, 그리고 제4권과 제5권(90-150)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의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4권은  총17편(90-106)으로 대부분 익명입니다. 과거에 이 시(모세의 기도)는 고린도전서15장과 함께 장례식에서 늘 낭독되었습니다. 그때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시는 4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2)영원하신 하나님/(3-6)덧없는 인생/(7-12)진노 하의 인생/(13-17)은혜의 하나님. 배경은 40년 동안의 광야를 방황하던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구출되어, 시내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1년 동안 머무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또 성막과 각종 제사제도를 완비하였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거하셨습니다. 그후, 광야를 가로질러 가데스바네아에 이르자, 정탐 12명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40일 후 그들로부터 장대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 하여 밤새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주님 역시 그들을 버렸습니다(민14:34). 38년 동안 60만명의 장정이 죽었습니다. 모세도 이 세대와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엄정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의 테스트를 거칩니다. 주님은 성적을 매기십니다.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든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하게 됩니다. 3번 부인한 베드로와 같이 말입니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시편90:13,새번역).


잠언 17:11절
“반역만을 꾀하는 악한 사람은 마침내 잔인한 사신의 방문을 받는다.”(새번역)

본 구절은 배신을 잘한다는 악한 사람의 특성과, 그들에게 임할 엄중한 벌을 경고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받아도 교정받지 못합니다(10a). 더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이나 통치자에 대하여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이르게 됩니다(11a). 당연히 잔인한 사자(messenger)가 보내지고, 결국 그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귀결될 것입니다(11b). 잠언은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자를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악인과 동일시합니다. 한편, 잠언에서 왕은 하나님의 통지 대리자입니다. 따라서 왕을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왕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 왕이 그 전형입니다. 그는 사무엘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보다는 백성을 더 두려웠습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말렉과 그들의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은 멸망시켰으나, 짐승의 떼 중 좋은 것들은 살려두어 자신과 백성의 소유물로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가서,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상15:23)고 책망한 뒤, 그의 불순종 때문에 주님께 버림받았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불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다가, 말년에 블레셋 군대에 의하여 세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5,6).

잠언 17:12절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새번역)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이란, 미련한 일 행하기를 극도로 힘쓰는 바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사람이란 단순히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잔인한 폭력성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새끼 빼앗긴 암곰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명백합니다. 곰은 위험한 동물이지만, 새끼 빼앗긴 암곰은 특히 더 위험합니다. 그러나 난폭하고 맹렬한 암곰과 직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바보가 내리는 결정들은 어리석어 커다란 해를 가져오기에 마땅히 피해야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과장섞인 유모를 사용하여 미련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왕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최고의 군대장관이자 사위인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희대의 명장인 다윗을 쫓아낸 사울 왕은 원수 블레셋 군대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매장하려 했던 고관들(렘18:20), 메시야를 제거하기 위해 유아 학살도 불사한 헤롯 대왕(마2:16), 왕이 되려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압살롬 등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미련할 뿐만 아니라 분별 없는 분노를 품고, 짐승보다 더욱 포악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중국 고사입니다. 범려는 왕 구천을 도와 월나라가 패권을 잡게 한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대업을 달성하여 득의양양한 구천을 보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은거하였습니다. 성공한 왕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잠언17:13,새번역).

잠언 17:13절
“악으로 선을 갚으면, 그의 집에서 재앙이 떠나지 않는다.”(새번역)

11절에 언급된 반역을 일삼는 바보는 이윽고 ‘악으로 선을 갚는’ 배은망덕한 행위로 나아가게 됩니다( 13a). 반역만 꾀하는 바보에게는  잔인한 죽음의 사자가 보내졌지만(11a), 배은망덕한 바보의 집에는 재앙이라는 악한 손님이 찾아와 떠나지 않습니다(13b). ‘악으로 선을 갚는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배은망덕은 인류의 보편적 성품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선물을 차 버리곤 합니다. 창조주의 과수원인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고난 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내가 주인이야!”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주인처럼 행동하여 환경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힙니다. 인간의 그런 무지한 행동 때문에, 인간에게 재앙은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실천해야 합니다.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인간의 길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벗어난 다윗은 충성스러운 헷 사람 우리야까지 죽였습니다. 주님은 악한 손님을 보내셨고, 그 재앙은 다윗 가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근친상간, 살인, 반역적 행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주님께 십자가의 선고를 내리고 자신은 죄가 없다면서 손을 씻었을 때, 유대인들은 외쳤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모든 선한 일을 무시하고 악으로 갚았습니다.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져서 2천년 동안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야만 합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마3:8,새번역).

매일묵상(2022/04/18 – 22)

시편87: 4절
“내가 라합과 바빌로니아를 나를 아는 나라로 기록하겠다. 블레셋과 두로와 에티오피아도 시온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새번역)

총 7절이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증거하는 시입니다. 주제는 ‘도성’, ‘탄생’, ‘책’의 세 가지입니다. 1-3절은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도성을, 4-5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생’을, 마지막으로 6절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명부(책)’입니다(6). 본질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적대적인 이방 국가들(4)로 확장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계20:12). 이 시는 주님께서 생명책에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6; 눅10:20). 하나님의 도성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의 길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35:8)라고 노래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1 (1) 주님의 터→ B1 (2) 주님의 사랑→ C1 (3) 하나님의 도성→ D (4) 우주적 도성→ C2 (5) 지존자의 도성→ B2 (6) 주님의 명부→ A2 (7) 나의 터들. 로마 백부장은 병든 종을 고치러 오시는 주님께 “들어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사 낫게 하십시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의 믿음에 놀라신 주님은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8:11,새번역)고 하셨습니다. 본 시편의 성취를 말하신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시편88: 3
“아,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새번역).


시인은 닥쳐온 심한 고난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는 세 단락(1-9a, 9b-12, 13-18)으로 나누어집니다. 각 단락은 간절한 인내의 기도(2,9,13절), 흑암의 경험(6,12,18절),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두려움(5,10,15절)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정말 기도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받지 못하고 고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들, 멀어진 친구들, 병약한 몸, 그리고 자신을 보아도 공포만 보이고(16), 장래를 바라보아도 어두움은 줄어들지 않습니다(18절). 우리 역시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흑암의 시기를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복음과 확신, 하늘과 보상 등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고난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인과 같이 우리들은 신음하는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8:1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기도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께 대한 경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13,14). 인생이 늘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고난은 찾아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분의 주권을 베게 삼아 안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잠언17:8절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잠언 8절은 뇌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뇌물’의 히브리어는 ‘쏘하드’이며, 선물을 뜻하나,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로운 판결이나 공정한 집행에 나쁜 영향을 미치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뇌물로 번역한 것입니다. 뇌물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강도짓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미가3:11). 그러나 뇌물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요술방망이처럼 보인다’로 번역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원어는 ‘에벤-헨’으로 단 한 번만 구약에 등장합니다. ‘헨’은 ‘호의’ 혹은 ‘매력’을, ‘에벤’은 ‘돌’을 의미합니다. 이는 ‘매력 혹은 호의를 만들어 내는 돌’을 뜻합니다. 실로 마법의 돌입니다. 뇌물은 마법처럼 사람의 판단력을 둔화시킵니다. 공의는 굽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도 재판장이 되었을 때 뇌물의 매력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AD60년 경 유대 로마 총독 펠릭스는 뇌물을 받고자 연금된 바울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뇌물 대신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는 두려워 하였지만,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고자 하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등을 초청하여야 합니다(눅14:12-14). 왜냐하면 그들은 뇌물은 물론 그 대접조차 결코 되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숨겨져 있던 우리의 의를 주께서 모든 자들에게 드러낼 때 칭찬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잠언17:9절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랑을 받고, 허물을 거듭 말하면 친구를 갈라놓는다.”(새번역)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모욕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을 때, 신자는 현명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본 잠언의 교훈 방식은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비교하는 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관용적인 태도입니다.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은 잘못을 용인하거나 못본 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고 마음으로 긍휼히 여겨 용서주는 것입니다. ‘덮다’의 원어는 ‘메캇쎄’으로서 ‘가리다, 숨기다’의 뜻입니다. 남의 잘못을 실제적으로 용서하고 아예 잊어버림을 말합니다. 관용적인 태도는 사랑을 싹트게 합니다. 하반절은 험담이 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 도구가 됨을 언급합니다.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험담을 여러 번 들으면, 마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이웃관계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혜자는 남의 험담을 포함하여 복수를 꾀하지 않습니다. 복수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를 금지하는 명령도 그는 숙지하고 있습니다(신32:35). 하나님께서 만민의 재판장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루실 권한과 책임을 다 가지셨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이 계신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참고 사항이요 고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수를 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를 실험과 방정식으로 검증하여 아는 물리학자처럼 신자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며, 기쁨과 두려움으로 보석과 같이 말씀을 간직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잠언17:10절
“미련한 사람을 백 번 매질하는 것보다 슬기로운 사람을 한 번 징계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 (새번역)

미련한 자는 완고하여 고치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교훈을 잘 받아들입니다.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이 둘을 대비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히브리어는 ‘베메빈’입니다. 빈(discerning)은 ‘분별’을 뜻합니다. 단지 두뇌의 명석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바른 판단력을 갖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 민첩하게 수행합니다. ‘미련한 사람’의 원어는 ‘케씰’입니다. ‘케씰’은  ‘살진, 어리석은, 바보스러운’ 등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는 단지 지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판단력이나 의지, 행동 면에서 슬기로운 사람과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한편 ‘백 번 매질’은 과장법입니다. 율법에는 40대 이상의 매를 금하기 때문입니다(신25:2,3). 지금, 솔로몬은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내릴지라도 미련한 자를 교정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다 죽은 부자와 그의 형제들이 좋은 예입니다. 죽어 멀리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회개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지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할 수 있는냐에 귀착이 됩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할 수 있냐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 특히 어른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야 합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라.” (잠언17:12,새번역)  

매일묵상(고난주간 4/10 – 16)

2022년의 부활절은 4월17일입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2022.3. 21일 후  첫 만월은4/15일경(음력3/15)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17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4/10-4/16).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4.9)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낭비가 아니라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4.10), 주님은 감람산 동쪽 산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서쪽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만나 타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나사로를 살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4.11)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 있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로 가셨습니다.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버림받을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셨고 이어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이 날 여러 논쟁과 교훈이 있었습니다.먼저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여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힐문하자, 주님은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막11:27-30). 이어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 대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상의 예를 들어 질문하였습니다. 모세율법은 한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경우 부활하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였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막12:1-27).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 계명의 순서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너무나도 훌륭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성전의 웅장함을 감탄하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은 철지히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요한복음의 영광의 책 부분(13-21장)의 시작입니다. 큰 다락방에서 12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도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것을 축약해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 하려고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였고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요 13장).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후에 믿어 제자가 될 사람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4장-17장). 이어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유다가 로마군인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다리시면서,1시간 동안 큰 통곡과 함께 피 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서 곤욕을 당하셨고, 드디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잠잠하시다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바로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8-69).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사이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당신 세상에 온 이유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다고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다는 것과 당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실 것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