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4/03 – 07)

시편86:8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새번역)

이 시에서 주님은 35 번 언급되어,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가난과 궁핍으로 도움이 절실 할 때(1), 환난의 날에(7), 그리고 오만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 대적할 때(14), 주님이야말로 다윗 자신이 머리를 놓을 수 있는 베개입니다. 주님은 그가 부르짖는 기도를 듣고(3-4) 구출하여(12-13) 원수들을 수치스럽게 하실(17)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을 당할 때 능력으로 구원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8). 시를 좀 더 깊이 성찰해 보면, 다윗의 기도는 다윗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기 보다,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초점은 주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방식으로 (느헤9:5~31, 32~37), 우리 기도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보다 믿음을 유지시키고 굳건하게 하는 방식은 없습니다. 주님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3). 바닷속 물고기나, 공중의 새도 그분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경외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 온 고난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허락을 받고 닥친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고백하고 구원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을 믿고 말입니다. 이것이 좀 어렵습니다만(히5:11-14), 이 시기야말로 주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 줄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시편86:11,새번역)

시편86:10절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기도의 자세에 관한 이 시의 3가지 교훈입니다. 먼저는 (1) 우리의 신분입니다: 주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합니다. 그는 전하, 폐하로 불리는 왕이나, 주님 앞에서는 그저 ‘주의 종’이고 ‘주의 여종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16).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다윗이나, 늘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노예)’로 자칭한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2 )우리의 현실입니다.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시편에서 ‘가난한 사람’은 ‘억압받는 사람’과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고난이 올 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태도는 교만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온갖 경건치 못한 행태와 절망으로 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에 반하여, 신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주인이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근거입니다. 다윗처럼 신자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 속에 늘 기뻐합니다. 결국은 영생입니다. (3) 우리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증거합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과 주님의 도우심, 그리고 왕의 권력을 남용할 때 주어진 심판이 아주 잘 기록하였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지는 신자들이 주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편86:15).

잠언 17: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의 이유는 복합적이나, 주로 개인의 귀책사유(게으름 등)로 돌리게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불의한 사회구조 등)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언도 같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10:4) 전자의 경우이며, “가난한 사람이 경작한 밭에서는 많은 소출이 날 수도 있으나, 불의가 판을 치면 그에게 돌아갈 몫이 없다.”(13:23,새번역)는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난이 그들을 비난할 수 없는 사회적 요소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급격한 기술혁명으로 산업구조가 매우 빠르게 전환되고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국가의 재정정책과 재교육정책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본 잠언은 더 중요한 차원을 언급합니다. 가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를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조롱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인격 모독은 이래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비판이 정당한 한계를 넘어갔을 때 단순히 인간에게 미치는 문제 뿐만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영향을 받습니다. 모독이 아닌 비판 역시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삼가해야만 합니다. 가난 뿐만 아니라 재앙을 당한 사람이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는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를 지으신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 것입니다.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가 진짜 지혜자입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13:9).

잠언17: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본 잠언은 16:31절,“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을 가족의 측면에서 반복하면서, 백발이라는 영화로운 면류관에 이르는 공의로운 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가족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입니다. 본 잠언은 가족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 관찰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가문의 수치가 되지 않도록 현명하게 행동할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회라도 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은 당연히 다른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든 수치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자, 손녀를 두었다는 것은 어쨌건 오래 살았고, 다산의 축복을 받았으며, 경건한 삶이 보답(면류관)되었음을 증거합니다. 한편, ‘부모는 자식의 반팔자다’ 는 말도 있듯이, 부모는 자녀의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경건한 부모의 경우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들이 늙었을 때 역시 백발이라는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교훈하고 모범을 보여준 부모는 자식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으로 부모가 자식의 수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주님을 경외하도록 배우지 못하였을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의 한 사형수의 고백입니다. 어릴 때 이웃집의 물건을 훔쳐다 어머니를 가져다 주면 아무 말도 안하고 요리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점점 더 큰 범죄에 빠졌는데, 만약 그때 어머니께서 따끔하게 야단을 치셨다면 자신이 이런 자리에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후회하였습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16:17,새번역).

잠언17:7절
“거만한 말이 미련한 사람에게는 안 어울린다. 하물며 거짓말이 통치자에게 어울리겠느냐?”
(새번역)

17:7-28절은 바보들의 종합세트입니다. 솔로몬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분별력을 가져 어리석지 말고, 그들이 야기하는 분노를 다스려라!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7-9절) 도입부(거짓말, 뇌물, 험담)/ (10-15절) 바보들에 대한 벌/(16-20절) 바보와 친구/(21-28절) 바보들과 지혜자. 본 구절(7)은 두 개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먼저, 미련한 자가 하는 ‘거만한 말’(원어-예더)입니다. ‘예더’는 ‘웅변’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폄하하는 거만한 말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그런 바보가 가르친다고 웅변하는 모습은 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존귀한 자 혹은 통치자로 묘사된 지혜자에게 거짓말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친히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 생축처럼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신 분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표적을 요청 받으시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에서 토해져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이, 부활하시어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11:32).

매일묵상(2022/03/28 – 04/01)

시편84:10절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새번역)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노래입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로서 성전과 제사 업무를 맡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직무에 너무나도 만족하여, 성전의 하루가 다른 날보다 1천배 값지다고 고백합니다. 직업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면서 거듭거듭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살펴보니 동료들도 같은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4). 이 시는 ‘복이 있다’는 구절이 3번 등장합니다: (1-4절) 주님을 갈망하여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 받는 축복/ (5-8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따라 순례의 길에 오른 자들이 받는 축복/(9-12절) 주님을 신뢰하여 그분 안에서 쉬는 자들의 축복입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갈망이 없이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런 갈망 때문에 영원한 순례의 길에 접어들지만, 그 순례의 길은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목적지인 하나님 앞에 이르기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순례의 길은 ‘눈물골짜기’로 번역된 ‘바카 골짜기’를 거치게 되는데, 그곳은 물이 없어 매우 메마른 곳입니다. 어려움이 이만 저만 아닙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주님께서 샘을 준비해 놓으실 것을 믿고 나아가며 기도합니다(6). 그 결과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마침내 각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은총을 받습니다(7). 시인은 돌보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늘 신뢰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갑니다(11). 결국 시인은 축복 받아 주님 안에 안식하게 됩니다(12). 시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시편85:7절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새번역)

인생에서 맞닥드리는 고난이 항상 하나님의 징벌이나 진노의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언제나 혹시라도 고백되지 않은 죄나, 바로 잡지 못한 잘못의 여부를 스스로 성찰하여야만 합니다.  이 시편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시의 흐름입니다: 기억(1-3), 간구(4-7), 경청(8), 소망(9-13).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단지 기억 속에만 있을 정도로 아련한 과거였습니다(1-3). 현재의 삶은 그분의 진노로 충만하였습니다(4-7).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시인은 고난으로 가득찬 현실을 보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고뇌 하던 선지자 하박국은 악한 바벨론 때문에 격는 불의한 상황을 불평하며, 하나님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합2:1). 시인 역시 같습니다(8).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영적, 도덕적, 물질적인 조화가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고 있습니다(9-13). 성경에서는 고난이 오면 소망도 함께 주어져 인내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야의 약속을 주셔서 소망의 인내를 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낯선 가나안 땅에서 200년을 이방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소망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경험함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소망의 인내를 하십시요.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잠언17:2절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일을 하는 주인집 아들을 다스리고, 그 집 자녀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받는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16:32b)와 짝을 이루는 이 잠언은 슬기로운 종이 수치스러운 아들을 다스리는 경우를 언급하여, 가족의 리더쉽은 타고난 혈통보다는 성품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수치스러운 아들은 추수 때에 잠을 자는 아들입니다(10:5). 어리석습니다. 추수 때 부지런히 거두는 것은, 농경 사회에서 슬기로운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주인집 아들이 게으르고 집을 관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슬기로운 종의 지시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종은 그 집의 보배와 같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유산을 함께 나누어 받는 지위까지 갖게됩니다. 이는 그 당시 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갖지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종이, 법과 관습을 넘어 그의 미덕 때문에 성공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역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자면,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 의하여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렸지만,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섭리로 가정총무가 됩니다.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스렸습니다. 그 출세의 순간에 유혹이 왔으나 뿌리칩니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이때 역시 근면과 지혜 그리고 주님의 돌보심으로 감옥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수년 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신 지혜에 의하여 애굽의 총리로 발탁됩니다. 총리로서 아버지 가정은 물론 만 백성의 생명을 기근으로부터 건져냅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새번역).

잠언17: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hearts)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은 은과 금의 순도를 시험하는 도가니와 풀무의 두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가식을 벗기시고, 마음의 진실함과 순결함을 판단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구분하시는 방법은 외모나 말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입니다. 도가니나 풀무는 테스트 뿐만 아니라, 순은과 정금을 만들어 내는 도구입니다. 주님 역시 시련의 과정을 통해 입증된 참된 인격을 갖추게 합니다. 우리는 평안한 삶을 원하지, 시련과 역경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은 온전한 신앙 인격을 갖춘 신자를 원하십니다. 테스트 없이는 온전한 인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테스트, 특히 도덕 테스트는 주님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또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모든 시험-도덕, 고통, 빈곤 등 -을 다 거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순전하게 살아도  타인과 동일한 시련을 받는 것은, 제사장의 역할은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 기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와 같이 천상의 존재들에게 자랑하시려는 것도 주님이 가지신 즐거움이십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인내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십시요!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욥2:3,새번역)

잠언17:4절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17:4,5절은 두 종류의 악인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거짓말 하는 자로서(4), 그는 말로 공동체에 불행을 초래합니다. 또 한 명은 가난한 자를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입니다(5). 전능하신 주님은 이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인 백발은 이들을 피할 것입니다. 특히 4절은 사악한 말을 듣는 자는 바로 악인이고,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그 사람이 바로 거짓말쟁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전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이치입니다. 혀와 입술 그리고 귀는 모두 한 인격에 속한 기능들입니다. 인격이 거짓되고 악한 데 어떻게 이 기관들이 다르게 사용되겠습니까? 거짓말하는 자와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자는 모두, 진실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악한 말은 환영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어 없어지나, 환영하게 되면 우리가 사라진다”는 경구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이적으로 고치시자, 둘러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지 아니하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AD70년 로마에게 크게 패배한 바 있었습니다. 그 후 60년이 흘러 바르코흐바가 나타나 유대인들을 선동하자 그를 메시야로 따랐고, 이어 로마와 전쟁하다 민족은 전멸당하고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9,20).


매일묵상(2022/3/21 – 25)

시편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이 시에서 하나님은 천상의 회의를 주재하고 계십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엘로힘) 앞에 그를 모시는 존재들인 엘로힘이 도열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 때문에 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2)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며, 형태는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엘로힘’을 직역하면 ‘신들’입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 유일하신 하나님을, 때로는 천사들을 지칭합니다. 또한, 복수의 형태이지만 단수로 사용되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으로 여겨져왔습니다. 문맥이 중요합니다. 이 시에서는 하나님(엘로힘)께서 그 엘로힘을 ‘신들이며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사람처럼 죽는다’(7)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다른 신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당연히 여러 해석(악한 천사 혹은 재판장 등)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수전절에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증하셨습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요10:34-36). 예수님은 ‘신들’을 하나님의 말씀들을 받은 인간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이 구절 역시 당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속죄권과 심판권을 아버지로부터 받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요5:27).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시편82:8,새번역).  

시편83:1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이 시는 적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역대하 20장은 이 시의 좋은 예입니다. 비씨840년 경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에돔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치러 올라 왔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다 왕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고 성전 뜰에서 백성들과 함께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레위 사람 아삽 자손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인데, 너희들은 싸울 것이 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가대에 예복을 입혀 군대 앞 서서 찬송하면서 행진시켰습니다. 찬송이 시작될 때 적군들은 서로 싸워 멸망당하였습니다. 전리품을 거두는데만 3흘이 걸릴 정도의 대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에돔, 이스마엘인, 모압, 하갈인,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그리고 앗수르(6-8)는 주님과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인 세상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시로부터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싸워 가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싫어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요15:18) 믿음과 기도로 맞서 싸워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결론에서 중요한 가르침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 개인이나 공동체의 구원이 아니라, 대적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며, 온 세상에서 주님만이 홀로 가장 높은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시편83:18,새번역)  

잠언16:32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새번역)

‘의’의 토대는 도발을 받았을 때, 야생마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훈련 없이 자신을 통제한다거나, 외부 세상을 다룬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된 행동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무력으로 적을 정복하여 성을 빼앗는 영웅보다도 자신과 사회에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용사는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지만, 인내하는 사람은 냉철하게 감정을 통제함으로 자신과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자여서, 실수를 막는 동시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용사는 물론, 빼앗기 어려운 성을 점령하는 장수보다도 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제는 인간 최고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아보드’라는 유대 문헌의 주석입니다: “누가 강하냐?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는 자이다. 혈육과 벌이는 내적인 싸움에 비교한다면, 성을 점령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을 빼앗기 위한 전투는 하루면 끝나지만, 자기와의 싸움은 피곤하고도 일평생 쉬지 않는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최고의 미덕은 어떻게 얻어질까요?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절제’의 미덕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의 하나이며, 사랑의 나무에서만 열립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천 가지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때서야 ‘절제’라는 미덕이 나오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새번역)

본 잠언은 인내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자가 최고다(32절)는 말씀에 필요한 경고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절제력과 지혜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한 결과,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게 되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결정권자는 주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제비’라는 단어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지혜로운 촉의 제갈공명이 위의 책사 사마중달과 대치하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작은 전투에서만 약간의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의 화공 전술에 걸려 전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꺼버렸습니다. 사마중달은 도망쳤습니다. 제갈공명은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한탄하였습니다. 냉철하게 자신을 파악한 사마중달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제갈공명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측한 대로 제갈공명은 과로로 죽었습니다. 사마중달은 낙양(위의 수도)으로 돌아갔고,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AD249년). 손자 사마염은 제위(서진, AD265년)에 올라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제비를 뽑아 범인도 색출하고(아간), 왕도 선출(사울 왕)하는 등 국가나 개인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 이용되었느나(행1:26),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제비를 통한 섭리의 인도는 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고 지혜를 다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뜻입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17:1,새번역).  

잠언17:1절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보다 낫다’는 잠언의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군사적 용맹이나 장수가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교훈한 것처럼(16:32), 가정으로 상징되는 삶의 영적 평화는 잔치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 권력, 명예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다툼 있는 번영보다, 검소할 수 있지만 사랑이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의 정립과 축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부활의 주님이 가정과 일터의 중심이 되실 때 옵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 이웃, 그리고 물질의 모든 관계는 바르게 정립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떠난다면, 가치관은 뒤죽박죽이 되고, 우상숭배, 지적 교만, 그리고 쾌락 중심주의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절대로 영적평화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만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불안초조가 여기에서 나오며, 세상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평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한 곳도, 우리가 주인도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래서 본 잠언의 저자요 지혜자로 명성을 떨친 솔로몬도 주님 중심으로 살아갔을 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였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주님을 떠나자 가치관의 혼란이 와서 혼합종교에 빠졌으며,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국가 간의 평화도 깨졌습니다. 그의 사후 나라는 두 동강났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지혜, 명철, 계략도,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잠21:30).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교훈을 지키는 가장 중요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

매일묵상(2022/03/14 – 18)

시편80: 12절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시의 배경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보다 150년 전에 일어난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비시722년)입니다. 3연(1-3절, 4-7절, 8-19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시의 처음과 마지막은 목가적이고 평온합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 깊은 고뇌의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특히 세 번째 연은 북이스라엘의 황폐와 약탈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과 구원을 반복해서 간구합니다. 시인에게서 있어, 이스라엘 민족의 곤경은 언제나 신앙의 문제로 귀착이 됩니다. 그 곤경이 자연재해든 외적의 침입이든 아니면 내적 분열이든 관계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도 불신앙이지만, 지금 내가 겪는 고난을 전부 자신의 능력이나 운 탓으로만 돌려서도 불신앙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악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처럼 고뇌에 찬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7). 중요한 것은 기도 자체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지식도 더하지 못합니다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올 경우, 그 불편한 심기를 주님께 토하십시요. 그러나 계명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구원의 소망 가운데 인내하십시요. 그 믿음의 시련들은 우리의 인격에 절대 필요한 인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약1:3-4).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80:3).

시편81: 11,12절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 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새번역)

이 시는 명절 특히 장막절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막절은 애굽에서 인도를 받은 뒤, 장막을 짓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역사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시는 백성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례에서 시작하여(1-5), 행위(6-7)와 말씀(8-10)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적으로 이동합니다. 이어 백성의 불순종에 따른 비참한 결과(11,12와 순종(13)할 경우 주어지는 승리와 풍요로움(14-16)을 강조하면서 순종을 택하라는 하나님의 요구(11-16)로 끝맺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과 그에 대한 응답이 주제입니다. 노예살이를 하던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6)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인 백성이 됩니다(8-10). 왕이 바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8, 13). 그 핵심되는 계명은 9절입니다 :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뒤, “내가 마음껏 먹여 주겠다”(10)고 약속하셨으나,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집대로 가도록 버려두셨습니다. 그들은 고통의 길로 들어갔고, 승리와 축복에서 멀어졌습니다(10-12). 이 시는 이스라엘 역사의 반추이며, 우리 삶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지금 확인할 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잠언16:29절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폭력은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꾀어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친구나 연인 관계 등을 맺고 악인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범죄하려고 친구를 꾀는 모습을 잠언 1:8-19절은 잘 보여줍니다. ‘10아이들아, 악인들이 너를 꾀더라도, 따라가지 말아라….”함께 가서 숨어 기다렸다가, 이유를 묻지 말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자….우리는 온갖 값진 것을 얻게 될 것이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의 집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14너도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 사이에 돈주머니는 하나만 두자.”’ 잠언은 그런 악인들과 교제하지 말것을 잘라말합니다(잠언20:19). 비시 860년 경 북 이스라엘 왕국을 지배한 아합 왕은 남 유다 왕국의 왕 여호사밧과 결혼동맹을 맺었습니다. 북왕국은 남왕국보다 강대하였고, 그 왕 아합은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바알 숭배자 왕비 이세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세벨은 강포한 여인으로 의로운 나봇을 서슴없이 죽여 포도원을 빼앗을 정도였습니다. 그 반면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의로웠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나쁜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남 유대 왕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자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 결과 아합은 죽었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유다로 돌아온 여호사밧 왕은 주님이 미워하는 자를 도왔다고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탐욕을 버리고 주님의 약속에 주의해야만 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잠언16:30절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이미 우리가 살펴 본 27-29절은 불량한 자, 못돼먹은 자와 강포한 자들이 사회질서와 이웃을 해롭게 하는 사악한 술책에 초점이 있습니다. 30절은 이 세 가지 묘사에 대한 결론 혹은 주석입니다. 특히, 30절은 29절과 쌍을 이룹니다. 30절은 29절의 ‘강포한 사람’의 임무수행 모습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서로 눈짓을 하여 희생자를 고르고, 피해자 배후에서 굳게 입을 다물어 음흉한 결의를 다집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얼굴과 목소리 등을 통해 표출된 그들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워야 미리 대처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과 삶의 경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얼마 전 부산사상경찰서 이 경장은 택시 운전사로부터 2000만원이 든 손가방을 수탁받았습니다. 분실물을 찾아 주려고 콜 택시 이용내역을 분석한 뒤, A씨에게 연락하였습니다. A씨는 그 돈이 할머니 수술비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반환절차상 통장내역 등을 확인해야 한다”는 설명에 A씨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이 경사는 즉시 현금 묶음에 날인된 인출은행이 소재한 울산 북부경찰서에 연락하였습니다. 이미 보이스피싱 피해신고가 접수되었으며, 고성경찰서에서는A씨를 보이스피싱 전달책으로 수배 중이었습니다. 이 경사는 A씨에게 경찰서 방문을 안내하고, 돈을 찾으러 오자 바로 검거하였습니다. 현금 2,000만원의 원래 주인은 울산에 거주하는 B(50)씨로, 저금리 안내에 속아 A씨를 직접 만나 현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순진한 마음만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16:31절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16:31-17:6은 한 단락을 이룹니다. 시작은 공의로운 길을 인내하면서 간 결과 얻어지는 영화의 면류관이 백발이라는 선언입니다(16:31). 이를 위해 걸어가야만 하는 공의로운 길 7가지를 나열합니다(16:32-17:5). 마지막은 그렇게 걸어간 결과 그들이 늙었을 때 얻게 될 손자 손녀들이 영광의 면류관임을 밝힙니다(17:6). 잠언은 제자들로 하여금 노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아름다움, 품위, 그리고 권위를 획득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미덕이 없이 머리만 백발인 사람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 구절에서 언급된 ‘영화의 면류관’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1절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진리를 가르치나, 모든 진리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의인이 일찍 죽습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유대인들의 불신의 죄악을 지적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과 같습니다(행7장). 또 노인이 되면 육체와 마음이 약해집니다(전12:1-8). 더구나 현대 사회에서는 심지어는 비도덕적인 기술을 통해 건강한 노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백발이 미덕과는 관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고 공의로운 길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하게 90세에 이른 사람은 모두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다”는 말은 곰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건강하게 90세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32절에서 답을 줍니다: ‘인내’입니다. 즉 백발과 인내는 암묵적 관계가 있으며, 전자는 후자를 통해 얻어집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16:32,새번역).

매일묵상(2022/3/07 – 11)

시편78: 42절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시편은 과거의 경험 속에 있는 교훈을 분명히 밝혀내어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등불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적들의 위협(9-11)이나 자연의 위험(40-42)을 포함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셨고, 향후에도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을 믿었어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 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사랑을 자각할 줄 알아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그런 자각 능력은 우리를 구속하셨고, 공급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에 대하여 늘 기억을 새롭게 할 때 비로서 나옵니다. 여기서 ‘구속’(12-14,43-53)은 주님이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구출하셔서 자유를 주신 것을 말합니다. ‘공급’(15-16,54-55)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이 공급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급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17-33, 56-64)은 그분을 아버지로서 알고 있는 자들이 경건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랑’(34-39, 65-72)은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갈 때,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내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언제나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의 비밀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 있는데, 그것들은 기억에 의하여 촉진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1:1,2)

시편79:5절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여워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까?”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고, 모든 유대 지도층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간 비시 586년 이후로 추정됩니다. 패전국 유다의 현실은 참혹하였습니다(1-4). 여기에 더하여 신앙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백성들을 향해야 마땅하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심판의 대상이어야 할 이방인들이 ‘야곱’을 삼켰습니다(7). 그들은 ‘도대체 이스라엘이 믿는 야훼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라고 비웃고 있었습니다(10). 시인은 그 때문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자리에 주저 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언약,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13). 이것은 현재가 유복해서도 아니요, 미래가 예측되서도 아닙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될 수 없는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께 먼저 조상들의 죄(8)와 당대의 죄(9)를 회개합니다. 또한 시인은 주님의 성품과 영광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현실을 바로 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나의 죄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영광과 성품을 내세우고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는 간구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 이렇게 드린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응답되어 하루 밤에 185,000명의 앗시리아 군사가 죽었습니다.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79:13).

잠언 16:26절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특히 생존의 욕구-을 충족시키기고자 열심히 일합니다. 잠언26절이 관찰하는 바 입니다. 후단의 ‘입’은 전단의 ‘식욕’과 함께 생각할 때 입의 기능 중 말이 아니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는다’는 어구는 생존 욕구 충족이라는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조직체, 특히 회사의 경우, 이윤 극대화는 노동자의 복지보다 중요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자산이 없습니다. 따라서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본가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적은 급여를 제공하여 일을 시키고자 합니다. 이 잠언이 악한 목적을 위해 쉽게 뒤틀어질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칼 막스는 ‘자본론’에서 이것을 대전제로 삼아 노동자의 정당한 대가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고 공정한 경쟁과 노동자 복지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경주하여, 파국을 막고 오히려 번영하고 있습니다. ‘중대 재해 처벌법’ 제정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이런 ‘식욕’도 이겨내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막스가 주장한 공산주의가 빠진 함정으로,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100년도 안되어 멸망한 이유입니다. 중국은 정치체제만 공산주의고 경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운영철학이 틀린 하이브리드 국가입니다. 많은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잠언을 전도서와 함께 읽으면 생존을 위한 노동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허무함을 깨닫게 됩니다(전1:3). 이것은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사람이 먹으려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만, 그 식욕을 채울 길은 없다.” (전6:7,새번역).

잠언16:27절
“불량한 사람은 악을 꾀한다. 그들의 말은 맹렬한 불과 같다.”(새번역)

사람은 됨됨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27-29절은 ‘이쉬-사람’로 시작하여 ‘사람’을 강조합니다. 그 중 27절은 불량한 사람에 초점을 맞춥니다. ‘불량한’의 원어는 ‘벨리얄’로서 ‘가치 없다(worthless)’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불만이 많아 사회 질서를 뒤집어 엎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악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악은 선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선동가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작은 불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증폭시킵니다. 듣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불 같은 분노가 솟아올라옵니다. 그 결과 무질서한 행동이 나오게 되고, 약탈 방화와 같은 집단적 파괴행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롬12:19).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폭력을 써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참거나 사랑으로 감싸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선동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선동가들이 있지만 최악의 선동가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원어는 ‘디아볼로’입니다. ‘디아’는 ‘사이에’를, ‘볼로’는 ‘던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란 ‘사이에 던져 서로를 이간질 시키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천사 1/3을 선동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와서 작은 불만을 발판으로 하여 분노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을 지배하여 자기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들은 마귀의 전략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잠언16:28절
“못돼먹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수다쟁이는 친한 친구를 갈라 놓는다.”(현대인의성경)

‘못돼먹은’ 혹은 ‘패역한(perverse)’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와 사회적 질서를 뒤집으려는 자를 말합니다. 그의 못돼먹은 행동은 마음에 근원이 있고 말과 눈짓은 그 표현입니다. 그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 진리는 잠언6:14절, “그 비뚤어진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며, 싸움만 부추긴다”에서 거듭 언급됩니다. ‘악한 자는 정의를 위협한다’는 의역이 가능합니다(시리아역). 후단의 ‘수다쟁이’의 동사형은 ‘흠을 찾는다’ 혹은 ‘불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였습니다(사29:24). ‘수다쟁이’가 하는 말들은 악의적인 험담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은 왜곡된 상황 인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결과는 대단히 파괴적이어서, 가장 친밀한 관계조차 갈라지게 만듭니다. 모세가 10계명의 두 돌판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자,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예배하였습니다. 이 백성들은 며칠 전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맹약한 자들입니다. 홍해의 기적,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의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악한 자들을 이용하여 마귀는 백성들에게 못돼먹은 생각을 집어 넣었습니다(출32:1).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모세는 내려와서 우상숭배에 가담한 3천명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세계에 흩어질 전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은 마음이 할례 받은 증거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4:25).

매일묵상(2022/2/28 – 3/4)

시편78:1절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편 78편은 총 72절에 이르는 긴 시입니다. 수 일에 걸쳐 메시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12절(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과 68절(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을 볼 때 이 시의 제목으로 ‘소안에서 시온까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부터 다윗 왕의 통치까지 이스라엘의 격동기를 되새겨 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신32장)처럼, 이 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만 하는 그 ‘신앙 양심’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기적들의 이야기이며, 또한 심판 가운데서도 은혜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선택된 도시와 왕을 통해 그 은혜의 징표들을 보여주셨습니다(68-72). 이 시를 읽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것과 마침내 주님이 선택하신 지파-유대지파(68)-가 선택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약속을 지키신 것은 물론, 그 이상을 행하심으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갈4:26)인 시온 산(영원한 부활의 나라)을 세우셨음을 압니다. 이 시는 다윗 왕을 언급한 뒤 돌연 끝나지만, 그 목적은 다음 세대가 그것을 완성하고 그로부터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의 이야기 역시 같습니다. 복음서에서 시작된 우리 주님의 이야기는 사도들의 전파로 이어지고 로마의 한 셋집(행28:30,31)에서 돌연 끝나버림으로, 다음 세대인 우리가 신실하게 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우리는 그들처럼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는 경고가 됩니다.”(고전10:6,쉬운성경).

시편78:6절
“미래에 태어날 자손에게도 대대로 일러주어, 그들도 그들의 자손에게 대대손손 전하게 하셨다.” (새번역)

72절이나 되는 이 시편은 도입부분(1-8)에서 목적을 밝힙니다 : 각 세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5-6) 다음 세대로 신앙 유산을 흘려보내라. 그것은 각 세대의 거룩한 의무이다. 시편 기자 역시 전 세대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3-4). 전할 내용은 주님의 행적(4)과 말씀(5) 두 가지입니다. 출애굽 시 행하신 10가지 기적과 홍해를 가르신 구원의 행적들은 구속자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직접 선포하시고, 두 돌판에 기록하신 것은 좋은 예입니다. 전달해야 할 목표는 오는 세대들이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7),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서 과거의 잘못들 – 신실하지 못한 삶- 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거에 대한 참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참된 이해를 위해서는 ‘가르침(율법)’과 ‘지난 날의 역사’가 요구됩니다. 가르침(교훈)은 당연히 문학적 기교를 통해 전달됩니다. 잠언, 시편, 욥기 등이 그렇습니다. 에스더는 뛰어난 문학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반을 둔 우리 믿음은 ‘문학, 역사, 철학’에 기반을 둔 인문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신앙이 과학까지 그 대화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모든 실체보다 더 확실한 보이지 않는 실체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인문학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히11:1,2).


잠언16:23절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이 잠언은 사려깊은 자에게 생명샘이 되는 가르침(22)은 지혜자의 마음에서 발원됨을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가 잠언의 교훈을 받아들여 ‘지혜자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도전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리 입술에 올바른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둘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설득력 있게 말하는 지혜자의 입술을 통해,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가게할 것입다. 그런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나 사회는 복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OECD에서 4번째로 심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탑의 위치에 있습니다. 국민소득은 높으나 행복 지수는 밑바닥입니다. 정부는 고성장의 시대에서 저성장의 시대로 진입한 것을 인지하여, 성장과 분배라는 문제를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 논의하여야 합니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적 과정은 푸틴이나 시진핑과 같은 권위적인 정치가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타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데, 인간의 본성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지혜의 샘인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를 섬기신 그리스도로부터 자기부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루게 하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 때 우리 사회에 화평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잠언16: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고, 쑤시는 뼈를 낫게 하여 준다.”(새번역)
선하면서도 지혜롭게 말하는 사람이 되라는 주제의 결론으로 24절이 기록되었습니다. 선하고 지혜로운 말은 즐거움을 주며, 엄청난 치료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본 잠언은 이를 꿀송이에 비유합니다. ‘선한 말’은 ‘친절한, 은혜로운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고, 이 ‘은혜로운 말’은 ‘악한 생각들’과 대조될 경우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악한 사람의 꾀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친절한 사람의 말은 정결한 제물처럼 받으신다. (15:26,새번역). 여기서 ‘선한 말’에는 순결하며, 아름다움의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꿀송이’의 히브리 원어는 ‘넘쳐흐르는 꿀덩어리’를 말합니다. 그렇게 비유한 것은 꿀만이 유일하게 달콤하기도 하며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24절후단). ‘마음에 달콤하다’는 뜻은 그 말을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고 또 매력적임을 표시합니다. 또한, ‘낫게 하여 준다’는 표현은, ‘선한 말’의 치유능력을 알려줍니다. 선한 말은 어리석은 자가 쏟아내는 말로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약은 입에 쓰며, 달콤한 것은 약이 아니나 ‘뼈’로 표현된 전 인격을 회복 시키기 위해서는, ‘선한 말’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만 합니다. 이는 조언자의 말이 듣는 자를 거북하게 만든다면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꿀을 너무 많이 먹으면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25:16), 선한 말은 아무리 들어도 문제가 없기 때문에, 본 잠언이 ‘선한 말’을 꿀송이에 비유한 한계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잠언16:25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6:16-30절의 주제는 ‘선한 말과 나쁜 말’의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선한 말(20-24)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25절부터는 ‘나쁜 말’(25-30)에 대한 교훈이 시작됩니다. 25절은 야누스적 구절로, ‘선한 말’의 주제를 이어가면서, 파괴적인 언어 사용의 주제로 넘어가도록 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 내용은 네 자신만의 의견을 고집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행할 것을 권면합니다. 같은 교훈이 이미 14:12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거기서는 여행길에 나서는 사람이 여정을 살펴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활방식이 초래할 결과를 생각해 볼 것을 교훈합니다. 요사이 모든 운전자는 네비게이션의 인도를 받아 목적지로 갑니다. 네비게이션이 보여주는 경로로 가다가는 골목길로 다녀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늦게, 불편하게 가게됩니다. 그래서 미리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 철학, 그리고 신념으로 만든 네비게이션은 자신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잘못된 경로와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사망으로 귀결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특히 교만한 사람에게 적절한 교훈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바르다고 여기나 거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숨겨있을 여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교만에 속게 되는 것입니다. 본 잠언은 이 교훈을 언어 사용에 적용합니다. 다른 이를 대할 때는 늘 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경우에 맞는 ‘선한 말’을 하여야지 ‘나쁜 말’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16:18).

매일묵상(2022/2/21 – 25)

시편77: 13절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새번역)

본 시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맞아 불안과 근심에 싸인 시인의 고백입니다. 고난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기도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인은 지치고 힘들어 합니다(1-3). 밤에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4). 이렇게 잠못 이루는 밤들을 지새우며, 시인은 과거에 좋았던 세월을 생각하게 되나(5-6), 그 때문에 현실은 더욱 괴롭습니다. 상황은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여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7-9).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인에게 새로운 빛이 떠올랐습니다(10). 그것은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기적들과 그분의 거룩하신 행적들, 위대한 역사, 인자하심에 대한 기억들입니다(11-13). 주님은 지난 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인도하여 내실 때 홍해를 가르심으로 큰 능력과 위엄을 민족들 가운데 알리신 분입니다(14). 더구나 주님은 자신을 주의 백성들과 동일시 하시면서 ‘속량’(고엘-친족 구속자)하여 내셨습니다(15).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지만 자신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고난 속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16-19). 그 주님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지도자를 세워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실 것입니다(20). 시인이 이렇게 회상한 위대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려고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뒤 권능의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인보다 훨씬 나은 믿음과 고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시편77: 2절
“내가 고난당할 때에,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두 손 치켜 들고 기도를 올리면서, 내 마음은 위로를 받기조차 마다하였습니다.(새번역)

본 시편의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의 서두(1-4절)을 읽으면 시인은 고난으로 잠도 못자고 기도합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경이 멈추고, 상황이 호전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은 확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3). 즉,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내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불리한 상황에 반응할 때, 신자는 하나님께 그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구하는 것보다,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아야만 합니다(10-20). 시편 기자는 부르짖고, 끈질기게 추구하며, 잠도 자지 않고 고민하고 기도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이 주신 상황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짜증스런 거절과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 의문만 생겼습니다(7-9). 그런 의문들은 흔들리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6)은 현재를 위한 해결책도, 미래를 위한 처방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보지 않고(3), 이전의 영적 경험들에 집착하지도 않고(6), 오히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행적과 거룩하신 인격, 권능과 섭리적 돌보심(19-20)을 신뢰하고 잠잠히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77:20).

잠언16:20절
“말씀에 따라 조심하며 사는 사람은 일이 잘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새번역)

본문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새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전단은 인생 성공 비법으로 ‘말씀’ 즉, 지혜자의 가르침( 본 잠언의 교훈)에 주의하여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런 교훈은 앞의 구절들(16-19)뿐만 아니라, 이어질 구절들( 21-24: 선한 말의 열매)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후단은 전단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된다’혹은 ‘행복하다’는 말씀 속에는 물질적 번영을 넘어 이웃 사이에서의 화평을 포함합니다. 지혜의 출발점은 주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잠언의 제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세상적인 번영과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실로 십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요 지혜자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무시하면 세상적 번영은 얻을 수도 있으나, 이웃 간에 화평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어리석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주님을 경외하여 잠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공동체로부터 명철하다고 칭찬을 받습니다(21). 북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 여로보암은 종교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금송아지 예배를 창안합니다. 주님은 선지자를 보내사 기적까지 보여주면서 준열히 책망하였습니다만, 여로보암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가문은 몰락하였고, 그를 추종한 북이스라엘 열 지파 역시 심판받아 역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롬14:18,사역).

잠언16: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을 명철하다 한다. 말이 부드러우면, 더욱 많은 지혜를 가르친다.”(새번역)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가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본 잠언 교훈합니다. 지혜자를 가진 공동체는 그를 ‘명철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칭찬합니다. ‘명철’이란 히브리 원어는 ‘빈’으로 ‘분별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분별의 지혜가 있는 것은 물론, 인격이 갖추어져서 부드러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공동체 내에서 그의 말은 더 잘 수용되고, 그의 지혜는 공동체에 선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가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존경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춘 사람은 매우 보기 힘듭니다. 흔히 공자나 소크라테스 등을 지혜자로 예를 들으나, 이들 역시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자는 심지어 70세 즈음에 자신을 찾아 온 친구를 별 볼일 없다고 정갱이를 걷어 차서 쫓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잠언은 오직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아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눅4:22) 하면서,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취하신 속죄의 대업과 그분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주님께 돌아선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부드러운 말을 사용함으로 더욱 많은 지혜(복음)를 가르쳐야 하겠습니다.“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잠언25:11).

잠언16:22절

“명철한 사람에게는 그 명철함이 생명의 샘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 된다.”(새번역)

21절에서 묘사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은 22절에서는 생명의 샘으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명철한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명철’은 ‘지각있다, 사려깊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세켈’의 번역입니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생명의 샘이 되고, 솟아오르는 물은 너무나도 시원하여, 공동체는 어리석은 행동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생명의 샘이 되어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있습니다(요4:14). 한편, 후단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의 교훈은 어리석음이다’로서, ‘교훈’은 풍자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막대기로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의 핵심은 도덕적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벌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요약하면 22절은 두 종류의 교훈을 보여줍니다.(1) 지혜로운 자가 주는 생명의 가르침. (2) 어리석은 자가 받는 벌. 명철한 자는 앞의 가르침에서 생명의 샘을 발견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 고통스럽고, 쓰디쓴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자 르호보암이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10지파에게 포악한 말로 자신의 도덕적 오만함을 여지 없이 드러냈습니다. 왕국은 갈라지고 오직 유다 지파만 그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는데, 그 원인은 아버지 솔로몬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하고, 하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잠언16:23, 새번역).

매일묵상(2022/02/14 – 18)

시편76: 1절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이 시는 두 부분(1-6, 7-12)으로 된 단순한 구조입니다. 전반부(1-6)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후반부(7-12)는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합니다. 배경은 유대 왕국이 경험한 큰 승리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제국의 침공에서 유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은(열왕기하18,19장) 좋은 예입니다. 이 전쟁에서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다가 하룻밤에 185,000명이 죽었습니다. 사자(Lion)를 경시하다  사고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장막’(2절) 의 히브리 원어는 사자굴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땅에 두신 근거지와 거주지는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이방 국가는 이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자와 같이 무적의 능력을 가지셨지만, 유대 백성들 가운데서 말할 수 없이 겸손한 모습으로 거하시는 주님은 원수의 모든 힘을 압도하는 무서운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할 때 베푸신 주님의 크신 권능은 이스라엘은 물론 애굽 사람들도 너무나 확실히 체험하였습니다. 또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과 능력은 민수기와 신명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약소국 유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보다 힘센 이방 민족들과 싸워 매번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변 이방 국가들은 사자를 두려워 하는 것과 같이 유대에 계시는 주님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한편, 예루살렘 성전은 신자의 모형입니다. 신자들 안에는 능력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담대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3:16,새번역)

시편76: 10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장 전반부(1-6)는 하나님의 구원을, 후반부(7-12)는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합니다. 후반부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행동은 유대지역에 국한되지도 않고, 과거에만 있었던 사건도 아니며, 방어적 성격만 있는 것도 아님을 밝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으로서, 도처에 있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7-9). 땅의 모든 민족들은 우주의 왕으로서 야곱의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합니다(7). 그러나 심판의 목적은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시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악인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9). 여기에 신자의 믿음이 요구됩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을 기다리면서 사사로운 분노를 억제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며, 공정한 판결을 내리십니다. 만약 섭리적 심판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당신의 뜻을 따라 최후심판의 날까지 미루어 두신 것입니다(10). 또한 시인은 ‘주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고 권면하혐서,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예물을 드려 경외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땅의 모든 왕들을 당신의 주권에 따라 세우거나 폐하시기 때문입니다(1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심판의 사건이자,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심판은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부르는 구원의 노래요, 감사의 노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잠언16:17절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
(새번역)

지혜라는 단어 자체는 도덕적 색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반드시 도덕이 그 요소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첫 걸음이 주님을 경외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지혜를 정의합니다. ‘길’ 혹은 ‘대로, 큰길’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여, 잠언은 제자들이 ‘윤리적 완전함’을 선택하도록 동기부여 합니다.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보면, 철기 시대 이스라엘(비시1100-600)의 경우 ‘대로,큰길’은 통상 도시 옆을 지나가는 주요 간선 도로였지, 도시 가운데를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도시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대로에서 돌이켜 도시로 이어지는 길로 나갔습니다. 이 잠언에서 ‘큰길’은 정직한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을 묘사합니다. 큰길을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암묵적으로 타락과 죄악을 상징합니다. 정직한 자는 정죄받은 도시로 가지 않고 안전하고 장애물 없는 그 큰길로만 걷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생명을 지킨다’는 의미는 정직한 나그네들마다 잠언의 교훈에 깊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유혹을 뿌리치고 큰길로만 행하여 그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전형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 되사서 하나님께 드려진 주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그들의 마음에는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가 늘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35:8).

잠언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6-17절은 윤리적 행동을 다루고, 18-19절은 내적 태도를 다룹니다. 17절과 18절은 ‘길’이라는 은유로 연결되어 있지만, 18절은 목적지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초점을 두고 교훈합니다. 지혜의 첫 번째 원칙은 주님을 두려워 하여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잠15:33). 교만한 사람은 이 원칙에 반하여 하나님과 사람 위로 눈을 치켜뜨고 살다가 넘어져 멸망합니다. 잠언은 정직한 사람(17)과 교만한 사람(18)을 함께 기술하여, 정직한 자는 겸손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선생들에게 순종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교만한 자는 도덕 질서에서 일탈하여 어둠 속에 다니다가 넘어져 파멸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니는 길이 어둡고, 패역하며, 장애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잠언은 같은 교훈을 거듭 가르쳐 제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18절 후단에서는 ‘거만한 마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이란 마음과 정신이 거만한 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국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그들의 몸은 산산히 부수어질 것입니다. 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사지가 깨뜨려질 운명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이 되려는 마음에 먼저 패역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치려고 나귀를 타고 군사들을 이끌었습니다. 전쟁터는 숲이 많았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자랑하는 머리털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매달렸고, 결국 요압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잠언16:19,새번역).

잠언16:19절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이 구절은 ‘—보다 더 낫다 : better than’는 잠언 형태로써, 비교 대상 간에 절대적 측면이 아니라 상대적인 측면에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 구조는 16:8절,‘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에서 언급되었습니다. 19절에서 ‘겸손’과 ‘재물-전리품’이 비교되었습니다. 겸손’도 중요하고, ‘재물’도 중요합니다. 이 둘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이라는 덕목을 희생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겸손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겸손하게 되면 교만으로 가는 길은 저절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얻게 되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8절과 19절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전리품을 나눈다’는 말은 전쟁용어입니다. 그것은 승리한 자를 지칭하나, 본문은 승리자를 거만한 사람과 동일시 합니다. 무릇 인간이란 승리를 하게되면 자신의 지혜나, 탁월한 군사력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궁핍한 자”는 “전리품을 나누는 자”와 대조되면서 겸손한 자를 지칭합니다. 만약 재물이 지혜자에게 온다면, 대대손손 물려주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배분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재물은 지혜자에게도 재앙의 서곡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1000 명 중 999명은 거만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명의 예외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드물게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 새번역).

매일묵상(2022/02/07 – 11)

시편74:10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예언자도 더 이상 없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아무도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새번역)

고려가 멸망한 뒤 야은 길재 선생은 망국의 한을 시조로 읊었습니다. 이 시 역시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와 유대 왕국 멸망 사건(BC 586)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낸 그 위대한 솔로몬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 때처럼, 천사들을 보내셔서 바벨론 군대들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고 승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황무한 예루살렘 성전을 또 다시 보면서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곳에서 벌어진 처참한 파괴들과 고함 소리에 잠겨 있습니다(3-8).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선지자들도 보내시지 않았습니다.(9). 그 멸망의 상황은 ‘영원한’ 것 같았습니다(1,10). 시편 기자는 ‘고난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세차게 몰아치나, 주님은 침묵하시는 순간’을 아주 잘 포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의 가슴에는 절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이런 어둠의 날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겪는 경험의 일부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줍니다. 이 시는 고난의 물결이 우리 삶의 배를 휩쓸어 가려고 할 때 그것을 묶을 수 있는 말뚝을 줍니다. 우리는 만유의 창조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하신 행적을 돌이켜보면서(12-17), 고난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견디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약1:2-4,현대인의성경)

시편75: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이, 이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신다.”(새번역)

1,000미터 쇼트트랙 경기에서 편파 판정으로 실격 당한 황대헌 선수는 낙담하지 않고,1,500미터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중국 선수는 한 명도 진출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언론은 한국을 맹비난합니다. 원래 심판은 공정하였는데, 한국이 심판을 압박하여 중국선수만 편파판정으로 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공정한 심판의 필요성!’ 이는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시편75편은 천지의 조성자이신 하나님께서(3), 공정한 재판장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7). 그분은 현실의 역사속에서도 정의를 집행하고 계시지만, 궁극적인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정한 기약’이 이르러야 합니다(2). 그날은 이미 정해져 있고, 재판장으로 우리 주님이 임명되셨습니다(행17:31).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요5:27). 악을 행하면서 재물,권력,건강과 세상의 행복(?)을 누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여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73:18,19).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주 만물, 시간과 공간 그리고 태양 등은 전 인류에게 창조주의 존재를 말없이 그러나 명백히 선포합니다(시19:1-3). 오직 성경만이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엡1:3; 벧전1:3).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만나고 사귀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서로 사귐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은 악인의 오만한 뿔은 모두 꺾어 부수시고, 의인의 자랑스러운 뿔은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시75:10새번역)


잠언16:14절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정당한 진노는 형벌의 집행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사자들’이라는 은유는 우가리트 신화를 암시합니다. 바알은 생명의 신이고 모트는 죽음의 신으로 사신들을 보냅니다. 모트의 사신들이 죽음을 선고하듯이, 왕의 진노는 죽음의 전조입니다. 주님은 악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시는 궁극적 행위자이십니다. 인간은 집행 시기를 모르지만, 집행자를 알고 있습니다. 집행자는 공의로운 왕입니다. 솔로몬은 등극 후 통치의 암적 요소인 군대장관 요압, 이복 형 아도니야, 왕 다윗을 저주하였던 베냐민 지파 시므이를 처형하였습니다. 그 뒤, 그의 왕국이 굳건하게 되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평가하였습니다 (왕상2:22-46).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향한 왕의 진노를 쉬게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겸손(15:33), 참회와 고백(28:13), 왕국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16:6), 그리고 인내하며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15:1). 좋은 예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 사건입니다. 왕은 꿈을 꾸고 그 꿈을 기억해 내지 못하여 고민하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바벨론 지혜자들-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 -은 사형집행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워 하지 않고 왕에게 온유하게 요청하여 시간을 허락받자,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여 꿈의 내용을 응답받았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주님의 지혜의 시작이며, 끝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새번역).

잠언16:15절
“임금의 기쁨은 봄비를 실어오는 구름과 같아 그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 모두가 살게 된다”(공동번역)

15절은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통치 대리자인 왕의 호의를 얻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 화기가 돌아야’는 직역하면 ‘왕의 얼굴의 빛 속에’입니다. 이 표현은 바벨론의 비유법으로, 누군가를 향한 통치자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태양으로 불리워졌고, 그의 얼굴의 화색은 태양 빛에 비유되었습니다. 시편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관련하여 이 비유를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따라서 그분이 임명한 왕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통치를 받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듯이, 그분의 왕 역시 신하들에게 충만한 삶을 부여하는 매개적 역할을 합니다. 구름은 지면에 생명을 붘돋게 하는 봄비를 예고하기 때문에, ‘임금의 기쁨’은 구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이른 비(가을비)는 10월 중순 경 내려서 땅을 기경할 수 있게 만들고, 늦은 비는 봄에 내려 마지막 추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생명의 저자이신 주님은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의로운 왕(지도자)를 임명하십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을, 호의는 풍성한 삶을 예고하기에 마땅히 왕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좋은 예가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틴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통치를 하였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주님이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잠언16: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16:16-30절까지는 ‘선한 말과 나쁜 말’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이 주제는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논해집니다: (1)도입부분(16-19) (2)선한 말(20-24) (3) 나쁜 말(25-30). 16절의 주제는 ‘지혜를 얻는 것’에 관한 교훈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이나 은을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지혜는 귀금속과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값집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물질적인 혜택과 영적인 미덕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잠3:13-18). 이 반면, 지혜가 수반되지 않는 재물은 탐욕이나 무자비한 개인주의에서 나오기에 저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의 삶은 주를 경외하여 악을 떠난 삶을 말합니다(욥28:28). 그런 사람의 삶은 당연히 영적인 미덕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철학자들은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꺼냅니다. ‘소외’는 개인이 사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여 거리가 있는 상태를 말하나, 철학의 경우는 ‘인간이 자기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로 정의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부조리로서, 물질(돈)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설정하여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은 물질보다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기독정신의 핵심 요소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하나님 – 자신 – 타인 – 물질’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그 안에서 재물을 벌어들이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그런 재물은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가는 큰길이니, 그 길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킨다.”(잠언 16:17,새번역).

매일묵상(2022/01/24 – 28)

잠언16: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어떤 판사는 큰 범죄를 저지른 청년에게 사형이 아니라, 10년 형을 선고하여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출소 후에 더 큰 범죄를 저질렀고, 그 판사는 몹씨 고뇌하였다고 합니다. 재판은 실상 매우 어렵습니다. 잠언은 재판할 때에 실수 없는 왕으로서 현명한 왕을 제시합니다. 본 구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정의를 행사하시되 현명한 왕에게 영감을 주심으로 오류가 없는 판결을 내리도록 하십니다. 그런 판결은 절대로 정의를 빗나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방의 왕들이 정의를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하물며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 왕의 경우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퀘셈’으로 ‘신탁(神託) oracle’ 입니다. 구약의 도처에서 ‘금지된 이방인들의 신탁’을 뜻하기도 하고, 지금 같은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신탁’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영감된 재판은, 왕이 가져야만 하는 불가양도의 권리입니다(잠8:15).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은사를 부여받은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러나 왕이 그분의 신뢰에 반하는 재판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셨거나(사울) 아니면 최소한 징벌하셨습니다(솔로몬). 이스라엘 열왕기를 보면 그릇 행하지 않은 왕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상적인 왕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요5:19-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잠언16:11절
“정확한 저울과 천평은 주님의 것이며,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당신이 세우신 왕이 재판정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정의를 확립하도록 하셨습니다. 전자에서는 영감되었으며 그릇되지 않는 판결을 통해(10), 후자에서는 당신이 정하신 정확한 저울과 천평을 통해서입니다(11). ‘저울과 천평’은 왕 마다 자의적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하여졌고 다만, 공평하게 집행되도록 왕의 손에 넘겨주셨을 뿐입니다. 왕은 저울과 천평을 표준화시켜 공정한 거래를 확립시켜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거래의 배후에 서 계시며, 거래의 수단과 대상들조차 궁극적 소유자이십니다(11b). 지난 40년 간 전세계는 자유로운 무역을 강조하는 사조,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나, 국가나 개인 혹은 계층 사이의 부의 격차는 매우 심하게 벌어졌습니다. 더구나 소득의 증가 속도가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 가치의 증가 속도를 따르지 못하였기에, 가진 계층은 더욱 부유하게 되었고, 못 가진 계층은 더욱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정의는 이런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런 정의의 확립은 정부의 존립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국가나 정부와 같은 권력구조 역시 주 예수님의 창조물 중 하나입니다(골1:16). 주님은 직접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시기 보다, 국민이 뽑은 정부를 통해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친구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이요 행동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는 균형잡혀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훨씬 낫게 되어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후단)

잠언16:12절
“왕은 악행을 하는 것을 역겨워하여야 한다. 공의로만 왕위가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새번역)

12-13절은 10-11절(정의의 판결)과 14-15절(정의로운 판결의 집행)의 중간에 놓여 있어, 왕은 도덕에 민감하게 통치할 것을 교훈합니다. 12절은 왕은 의를 통하여 통치기반이 확립된다고 선언합니다. 악을 역겨워하는 도덕적 자질이야말로 왕의 중요한 자격입니다. 통상 ‘역겨워 한다, 미워한다’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토에바흐’는 악인과 교만한 자에 대한 주님의 감정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왕에게 적용합니다. 왕이나 그의 관리들은 반사회적인 악한 행동들을 극히 미워하며, 정의를 수호하여야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왕의 도덕적 성향은, 지혜(8:7)와 주님(6:16;15:9)의 도덕적 성향과 동일합니다. 이집트 학자 브루너는 파라오의 보좌를 연구하여 12절 후단의 의미를 밝혀주었습니다. 파라오의 보좌를 떠 받치는 기반은 ‘정의와 적절한 신의 질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마아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기호는 히브리어로 ‘의’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마아트’의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이집트의 19, 20왕조에 이르러 왕좌의 기초는 정의, 올바른 질서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한편, 솔로몬 (왕상10:18-20)과 파라오 보좌 사이의 유사한 기록들(특히 6개의 층계)은 솔로몬이 파라오의 보좌 받침대를 본 따서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늙기 전까지 의에 기반을 두어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굳건하게 섰지만, 그가 늙자 여인들의 유혹을 받았고, 주님이 역겨워하는 우상숭배를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혜의 왕이 가장 우둔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공의로운 말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고, 올바른 말하기를 좋아하여야 한다.” (잠언16:13,새번역)

잠언16:13절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잠언은 행위(12)와 언어(13)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왕은 자신의 통치 영역 전반에 걸쳐 도덕적 민감성을 가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의 행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7절을 염두에 두면, 13절은 주님은 당신의 정당한 대표자인 왕을 통해 기쁨과 사랑을 주심을 밝혀줍니다. 잠언(22:11)은 더 나아가 왕의 친구(예, 고문, 관리, 사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서 ‘정결한 마음과 은혜로운 언어’를 언급하여, 훨씬 명확하게 이 부분을 다룹니다. 왕의 친구들은 말하기 전에 정결한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방백들에게 계속적인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그의 고문들은 올바른 것을 말하는 지혜로운 여인과 같습니다(8:8). 여기에 나오는 왕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왕도 이 잠언을 한결 같이 성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죽으시고, 속죄권과 함께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이 만유의 통치자이십니다. 이 잠언은 그 주님의 통치 방식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이 잠언을 유일하게 성취하신 하늘의 왕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교회와 관련 하여서는 성령님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죽음입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경건한 신자로 명예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헌금하기 위해 판 밭의 대금의 일부를 감추고는 마치 전부 드린 양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사형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잠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