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2/01/17 – 21)

잠언16: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5절은 4절 후단의 ‘악인’을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으로 더욱 정확히 정의한 뒤, ‘악한 날’이란 ‘벌을 받는 날’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5절은 악인이 심판받을 것을 법칙화 하고, 그런 이유는 바로 주님이 역겨워 하시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거만(교만)’이란 자신을 높이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비판은 지혜로 가는 길에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또한, 거만한 자는 자신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무시하기에 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을 두려워하여 늘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낮추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데 참여하지만, 하나님은 정의를 확립시키고 찌기를 제거하십니다. 거만한 자들이 찌기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그 날에 모든 거만한 사람 위에 자신을 높이실 것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고도 마음을 완악하게 한 파라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결국 이집트는 황폐하게 되었고, 그의 군대는 전멸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른 메시야를 찾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거만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졌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야와 신념을 가지고 로마제국과 두 번에 걸친 독립 전쟁을 벌렸으나 멸망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잠언16:6,새번역).  

잠언 16:6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새번역).

‘어질고 진실하게’는 ‘인자와 진리’를 풀어쓴 것입니다. ‘인자’의 원어는 ‘헷세드’로서 ‘언약적 사랑’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실함, 신실함’을 뜻하는 ‘에메드’의 번역입니다. 결국 ‘인자와 진리’는 합쳐서 ‘주님과의 언약에 기반을 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잠언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에게 베푸는 인간적 친절을 뜻합니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물론 회개하는 마음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용서받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잠언은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사를 보충하는 인간의 미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레16:21).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희생제사를 드려도 소용없습니다(삼상15:22). 그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된 것입니다. 6절 후단은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당연히 공동체 속에서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를 그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고는 발생할 수 있어도, 재앙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특질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이를 열어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은 사람의 삶은 주님을 경외하는 열매로 가득차게 됩니다. 결코, 논어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얻어질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면, …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잠언2:1-5)

잠언 16:7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새번역).


5,6절은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벌과(5-6a), 앞으로 저지를 죄(6b)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을 다루었습니다. 본 구절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원수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잠언이 말하는 원수는 의인에 대하여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과거의 죄악을 회개한 야곱이 다음날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이 범주에 포함되기는 어렵습니다. 야곱은 의인이 결코 아니고, 다만 회개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본 구절이 적용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 찾아 온 흉년이,100년 만에 이삭의 때에 일어났습니다. 물과 목초지를 찾아 그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이삭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터이니 그냥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랄에 거주하던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 판 모든 우물을 막고, 떠날 것을 통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우물들을 파자, 그때마다 그랄 목자들이 우물의 소유권을 다투었습니다. 이삭은 양보하고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 우물을 팠습니다. 주님은 브엘세바에서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비멜렉은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블레셋 족속은 이삭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은총의 방식입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잠언 16:8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언16:8 새번역)

8절은 이른바 ‘..보다 낫다, better than’ 의 구문으로서, 5-7절에서 선포한 일반적 명제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5-7절은 거만한 자에게는 벌이 내리고, 미덕을 행한 자에게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명제를 가르치지만, 이 세상에서는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때 본문은 판단에 도움을 줍니다. ‘의를 겸한 적은 소득이 낫다’는 의미는, 사람이 공동체를 경건하게 섬기더라도 주님은 즉시로 물질적 보상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당신의 심판의 시기가 올 때까지, 악인들이 ‘정의롭지 못하게 벌어들인 많은 소득’을 누리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본 구절을 15장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와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8절에는 ‘주님(여호와)을 경외하는’이란 어구가 생략되고, ‘의롭게 살며’로 대체되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어 도덕적으로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기 전에는 무심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때가 믿음으로 의를 행할 시기입니다. 인천에 공장을 두고 한국의 유리 산업을 개척하여 큰 공헌을 한 고 최태섭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분은 1951년 1.4 후퇴시 모두 피난갈 때에, 오히려 은행을 찾아가 채무를 갚고 영수증을 받은 뒤 피난을 갔습니다.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받은 영수증은 그분의 신용을 증명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무담보로 2억원을 차용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돈 문제에 직면할 경우 늘 본 잠언을 마음에 두어야만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16:9, 새번역)

잠언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새번역)

16:1-9절은 주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보여줍니다. 1절은 시작하고, 9절은 같은 표현을 써서 결론을 맺습니다. 양 구절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부분과 그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행동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균형 있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결정권자이시면서도, 그분의 결정은 가장 온전하십니다. ‘그 발걸음’이란 ‘그의 길’과 동의어로서 인생의 행로를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발걸음들’대신에, ‘발걸음’으로 표현하여, 단 한 걸음도 주님의 감독을 떠나 취해질 수 없음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상세하게 자신의 길을 계획할 수 있지만,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계획을 수행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거칠게 깍고 만들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루신다.” 우리는 늘 겸허히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도적으로 삶을 해석하고, 이끌고 나가야만 합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목적을 달성하는 우리의 결정과 방법이 틀리면 주님이 바른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주시고 하란을 떠나라고 하였지 갈 지역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화롭게 할 땅을 고민한 뒤, 가나안 지역을 선택하였고 전 재산을 이끌고 갔습니다. 세겜 모레 상수리 나무를 지날 때 주님은 나타나셔서 그의 선택이 옳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1,새번역)

매일묵상(2022/01/10 – 14)

시편73: 1-14 : 진리와 배치되는 현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1절, 새번역)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진리는 아삽의 경험과 충돌하였습니다(2-14). 늙은 아삽은 자신이 매일 겪는 명백한 고통- 질병(?) -과 악인의 번영(3-5)을 비교하며 고뇌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의 일반은총 (145:9)이 아닙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경외하며(34:8,9)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된 선하심을 말합니다. 아삽은 안팎으로 정결한 삶(13)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도덕적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재앙과 벌만을 경험하자, 믿음이 흔들렸습니다(14). 욥과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반대로 악인은 번영하였으니 저절로 질투가 올라왔습니다. 아삽은 그들이 불치병도 없이 죽는 것까지도 목격하였습니다. 교만이 그들의 성품이었고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6). 그들의 교만한 혀는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가졌습니다(10).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내용이었습니다(11). 그러나 그들은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였습니다(12). 여러분은 어떻게 이겨나가겠습니까?  ‘호신론 護神論’이란 신학 분야가 있습니다. ‘신이 전능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선하지 않다’, 그리고 ‘신이 선한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전능하지 않다’라는 명제가 대립합니다. 좋은 설명은 신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서 악이 있는 세상을 허락하셨다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잠언16:4,새번역).

시편73:15-20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

주님의 통치에 대하여 번민하던 시편기자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자 깨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교만히 행동하고, 말하는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축복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멸망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속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심판으로 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워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처한 환경이 당황스럽더라도, 다음 세대의 주의 백성들을 낙망시키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만 합니다(15). 만약 삼가지 않으면, 주님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악한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를 통해 주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공자는 혼자서 하루 종일 혼자 생각해도 생산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는 것을 버렸다고 논어에서 말합니다. 혼자 너무 기를 쓰고 기도하거나, 생각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16).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병들었을 때 의사가 주는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어 낫듯이, 그분이 준비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시요!(17) 셋째, 영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개하여 대단원을 미리 내려보십시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먼저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주어지는 영원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자명해 집니다. 악인들의 영원은 너무나도 불안합니다(17-19). 그들은 ‘완전한 속임과 멸망’(18)의 희생물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시편73:21-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28,새번역)

이 마지막 부분은 승리의 찬가입니다. 시편기자 아삽은 괴로운 생각이 가득 차고 정서적으로 땅 바닥까지 떨어지자,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삽은 고백합니다: “아, 나는 주님 앞에서 한 마리 짐승과 다름 없었구나!” 그리고 주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27,28). 궁핍한 아삽은 여전히 부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23). 주님은 늘 자신을 붙잡아 주시기에 안전한 현재의 삶을 누리고(23), 하늘에 가기까지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날 때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려고 애를 쓴 자신을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24-26).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하는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는 피난처요, 알 수 없는 그 선하심입니다(27-28). 여기에 신실한 신자를 위한 사중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동행(23) (2)하나님의 붙드심(23) (3)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는 미래(24- 인도해 주시고) (4)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24-내세의 확신). 악인들은 이것들을 알 수도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아삽은 지혜를 가졌고 하늘의 분깃을 강조합니다(26). 레위지파는 가나안 정복시 땅을 분배받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었습니다(수13:14,33). 주님은 공평하십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전3:13,새번역)   

잠언16:4절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새번역)

많은 성경학자들은 “악한 자들은 자신의 심판의 날(악한 날, 재앙의 날)을 위해 지음받았다(결정론은 아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들과 보디발 아내의 악한 행동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시어, 요셉을 이집트의 권력구조의 최정상에 있는 파라오 다음 가는 위치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순히 요셉에게 영광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서운 기근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처와 생명을 공급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자를 요셉의 자리에 앉히셨다면, 이집트 인들은 구원받았겠지만, 야곱의 족속은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자세히 또 끝까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멸망 당할 때(비시605-586년), 유다의 관점에서 이는 ‘재앙의 날’이었습니다. 성전이 불태워지고, 그 사회의 지배자들과 귀족의 자제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이 승리는 그들의 신들이 하사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전합니다. “주님은 유다 왕 여호야김을 느브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단1: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선하신 목적들을 이루십니다. 악한 자나 그들의 악한 행동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지혜와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2/01/03 – 07)

시편72:1절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 내용은 솔로몬의 시대에 잘 들어 맞습니다. 그는 시바 여왕을 포함하여 왕들의 존경을 받았으며(10절: 왕상10:1-13), 그의 제국은 평화와 번영이 그 질서를 이루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왕상10:14-29). 솔로몬의 제국은 메시야의 나라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는 본 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적용한 예는 없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왕과 그의 통치에 대한 묘사는 이사야11:1-5과 이사야 60-62장의 예언들과 너무나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그 예언들이 메시아적이라면, 당연히 이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정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의 언급은 솔로몬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솔로몬의 능력이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소명은 오직 메시야 안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아람어로 번역한 탈쿰역을 보면, 1절에 등장하는 ‘왕’ 앞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린 그 밤, 주님은 솔로몬에게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그는 ‘듣는 마음’ 즉 판단력을 구하였습니다. 주님은 기뻐하셔서 지혜는 물론 부와 명예도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솔로몬이 다윗과 같이 주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킨다면 장수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땅의 지혜를 얻어 성전도 세우고, 부도 얻고 명성과 권력도 얻었지만, 하늘의 지혜인 주님 경외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여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는 60세로 단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시편73:13절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새번역)

이 시는 다윗 왕 시절 성가대장이었던 아삽의 저작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전능하심에 회의가 드는 사건들을 종종 만나거나, 그분의 아버지되심이 무색할 정도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 자체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런 현실에서 숨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직면합니다. 시편 1권(1-41편)은 경건한 자의 번영을 노래하면서 시작합니다(1:3). 그러나 시편2권(42-72퍈)은 인생은 미덕과 보상 간에 비례적 관계가 없다는 눈물어린 고백(42:3,5,9-10)으로 시작합니다. 시편3권은 다음과 같은 퉁명스러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73장) : 경건이란 시간 낭비아닌가(13)? 악인들은 즐겁게 살 때 우리는 온 종일 재앙을 당하고 벌받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14)? 그렇다면 이런 삶을 포기하고 그 행복한 넓은 길에 합류하는 것이 어떨까(10)? 아삽에게 주어진 유혹을 우리 역시 느끼곤 합니다. 아삽은 몹씨 고통스러워 하였지만 마침내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17). 그들은 회개할 사이도 없이 창졸 간에 멸망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아삽의 가슴은 찔린 듯이 아팠습니다. 마치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22). 그러나 자비롭게도 주님이 자신을 붙뜰어 주심을 체험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기에 며칠에 걸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잠언16: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2절은 인간의 경영에 대하여 통치하시는 주님이라는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음의 계획들(1절)을 평가하십니다(2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지만 주님은 진리를 따라 평가하시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이십니다. 주님은 속마음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정당하게 평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였을 때는 그것을 고백하고 자비를 호소해야만 합니다. ‘꿰뚫어 보신다”혹은 “감찰하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측정하다, 양이나 무게 등을 재다’의 뜻입니다. 이런 비유는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후에 자신의 마음이 진리를 잣대로 측정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마음 또는 동기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채, 계획하고 집행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된 기준이 있기 때문에, 동기와 행동을 달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물론, 동기의 정결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주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잣대로 재고는 스스로 만족해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행동과 결과를 주님께 맡긴 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경영하여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동기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타인을 어떻게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곰곰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주님은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주권을 갖고 계시며(1절), 오직 그분만이 동기의 순수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2절). 그러므로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일의 성패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형통할 것입니다(3절). 때로는 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승리 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기 마련입니다. 그 반면 2절과 3절은 경고도 줍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정결함을 보지 못하신다면, 우리의 계획은 좌초될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1절과 2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맡기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골렐’이며, 본 뜻은 ‘(돌을) 굴리다’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양들을 먹일 우물을 큰 돌로 덮었다가, 양떼들이 모이면 그 우물에서 돌을 굴려(골렐) 물을 먹입니다. ‘돌을 굴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일을 주님께 굴려서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골렐’은 의성어로서 이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은 마치 돌이 굴러가는 소리와 거의 흡사합니다. 굴러가는 상대방은 다름아닌 주님입니다. ‘일, works’은 계획된 행동이나 수행된 행위를 말합니다. 신실한 신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성취할 것인지 여부나 그들의 동기에 대하여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가나 성공여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지,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을 믿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일의 결과를,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기도와 평화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5:7).

잠언16:3절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어제는 계획하고 주님께 그 결과를 맡기면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절하실 권한도 있습니다. 사무엘하7장은 이 측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계획을 밝히자, 나단은 즉시 승인합니다. 그 밤에 주님은 다윗이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주님은 다윗의 가문을 위해 영원한 집을 세울 것이며, 그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윗은 계획을 바꾸어, 남은 생애를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모든 계획은 하나님이 완전히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수립되여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계획을 승인하시고 이루어주셔야 한다는 기도를 그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일의 결정권자이십니다 (1절). 오히려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김으로써, 인간적인 계획은 좌절될지라도, 우리 삶에서 이루어가시는 좀 더 깊은 주님의 계획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15:31절, 32절을 본 구절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뚜렷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왜 솔로몬이,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3:11, 새번역) 교훈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책망을 들어야 비로소 우리 삶과 인격이 교정되어갑니다. 지혜는 여기서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가는 방법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심지어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어놓으셨습니다(4절).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3:6).

매일묵상(2021/12/27 – 31)

시편69:22-23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지금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로마서(11:8-9)에서 사도는 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돌립니다. 율법(신29:4), 선지자(사29:10), 그리고 성문서(시편69:22-23)의 말씀이 그 근거로 인용되었습니다. 세 번째 인용된 시편69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삶, 특히 그분의 고난을 뒷받침하는 성경이었습니다(막3:21 등). 사도가 본 구절에 나오는 다윗의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적용한 것은 타당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용된 시편의 상세한 부분 보다 일반적 의미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밥상 table’의 히브리 원어는 ‘식사를 위해 땅 위에 펼쳐놓은 동물의 가죽-보자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가까우며 친숙한 그 가죽 보자기는 때에 따라 덫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모세 율법의 규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매하게 된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사29:10). 성경의 신비입니다. 가장 가깝고 잘 아는 율법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자, 율법은 덫으로 화하여 그들을 실족시켰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이중적 성격(영생과 영벌의 소식)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시편69:25절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가룟 유다의 직을 대신할 사람을 뽑자는 사도 베드로의 제안의 근거입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1:20). 여기의 시편은 69:25절(앞부분)과109:8절(뒷부분)입니다. 또 한 명의 사도였던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시는(행12장) 이런 제안이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시편 69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깊은 곤경을 토로하면서 구원과 원수들의 심판을 호소합니다. 초대교회는 본 시편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을 배반하고 거절한 자들을 묘사한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69:25절은 자연히 가룟 유다에게 적용됩니다. 가룟 유다가 산 밭은 나그네를 위한 매장지로 사용되었고(마27:7), 그의 거처는 황폐하였습니다. 다만 히브리 원문은 ‘그들의 거처’(복수)이지만, 베드로는 ‘그의 거처’(단수)로 변형시켜서, 다윗의 저주가 가룟 유다 한 사람에게 적용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해석과 적용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사도들에게 주어진 지혜와 권한입니다. 이런 사도들도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알 권한은 없었습니다(행1:7). 성경은 세속 역사를 알려주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천지와 같이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어 특정인과 특정 시기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파멸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언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이미 확립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바울의 편지들’임)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벧후3:16, 새번역).

잠언16: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한 단락을 이루는 잠언 15:31-16:15절은 15:31-33절에서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히 살면 명예롭게 될 것이다’는 지혜를 다루고(서론부분),  본론인 16:1-15절에서 그 근거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1절은 계획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결정(말의 응답)은 주님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주시는 것이 아님 – 그 계획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계획은 주님의 통치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서로 상의하여 의논하고 잘 정리하여 주의깊게 계획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수립된 계획은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따라 수행되어야 열매(성공)가 맺힙니다. ‘경영(계획들)’의 원어는 ‘배치 or 정돈’‘을 뜻하는 ‘마르케’로서, 전투진형을 배열하듯이 주의깊게 요소요소에 배치하거나, 혹은 제사를 위해 나무를 차곡차곡 쌓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영’은 생각나는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들을 지칭합니다. 물론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 가야만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음을 듣고 울며 자신이 가서 성벽을 중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금식하였습니다. 어느 날 왕을 섬길 때 그런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곧 주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왕은 선선히 승락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주관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느1, 2장).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잠언21:1새번역)

매일묵상(2021/12/20 – 24)

시편69: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신약의 두 곳, 요한복음(2:17)과 로마서(15:3)에서 본 구절 전단과 후단을 각각 그리스도께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와 말기, 두 번에 걸쳐 성전 정화 작업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초기의 것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7). 원수들은 성전에 대한 다윗의 심오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방하였습니다. 그 만큼 다윗이 주님의 집(성전)에 대한 열심은 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한은 다윗의 경험에서 그리스도에게 발생될 예언적인 패러다임(틀)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현재 당하는 비방은  그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날 비방을 미리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소, 양, 비둘기 등 제사용 제물과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이유는 순결한 예배를 보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열성이 결국 그리스도를 삼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나를 삼키고”라는 부분은 다윗에게는 열정의 강도를 말하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포함시킵니다. 한편,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웃에게 덕을 세우도록 권고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을 행하시다가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바울 역시 다윗의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비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주님의 돌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벧전4:19,새번역).

시편69:21절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마태복음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27:34,48). 같은 사건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28-30). 마태복음은 생략하였습니다만, 요한복음은 본 사건이 구약의 성취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둔 것은 본 시편 구절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의 계획의 일환이며 구약성경에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성취하시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 이를 깨닫고 요한복음을 통해 증언한 것입니다. “응한다”의 원어는 ‘텔레이오세’로서, ‘텔레이오오 –(아무 흠도 없이) 완전하게 만들다’ 의 수동형입니다. 우리 주닝의 모든 생애는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여 완전하게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은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의 주님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시에 수고와 고난이 신자의 삶에 늘 존재하는 이유는 이때문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잠언15: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본 잠언은 ‘밝은 눈’에서 ‘듣는 귀’로 초점을 바꾸지만,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듣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이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 잠언 후단은 그를 ‘지혜자’라 호칭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듣는 귀를 위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마치 음식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구미를 돋구는 것과 같습니다. 현자의 책망을 듣는 자는 누구나 지혜자의 공동체에 속하여, 즉시로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이와 반대로 거만한 자는 혼자 지혜로운체 하며, 지혜자와 어울리지 않습니다(잠15:12). ‘듣는 귀’를 가진 자는 거만한 자와 달리 생명의 원천에 가까이 살면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지혜의 책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2:12).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은 그분으로부터 “듣는 귀와 보는 눈을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신29:4).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중시하여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생명의 경계’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롬3:23)고 선포합니다.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자는 회개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분의 피로 죄를 씻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는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특징지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는 지혜자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교훈을 저버리는 사람은 제 목숨을 잃고 책망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지각을 얻는다.”(잠언15:32,공동번역)

잠언15:32절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책망을 받아들이지, 반발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후단의 표현 중 ‘지식’이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 원문은 ‘레브’로서 ‘속사람, 지성,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나 이 문맥에서는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레브’의 결여는 정신적, 도덕적 능력의 부족을, 그 반대로 ‘레브’를 얻었다는 것은 살아가기에 충분한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잠언19:8절은 “지혜(레브)를 얻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얻는다.”고 하여, ‘레브’를 얻는 것은 ‘자신(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행위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훈계를 싫어 하여 ‘레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책망을 자주 받으면서도 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갑자기 무너져 회복하지 못합니다(29:1).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라고 가르쳤으나 목을 곧게세우고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최초의 징벌이 40년 간 광야의 길을 돌게 하신 것이고, 그 절정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입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깨졌습니다. 지금 팔레스틴 지역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세속국가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분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책망으로부터 참된 지혜(호크마)를 얻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잠3:14,새번역).

잠언15:33절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새번역)

잠언15:30-16:15절의 서론은 15:30-33절이며, 끝 구절인 33절은 16:1-15절에 묘사된 주님의 통치와 섭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열쇠는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이며, 이것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면 겸손하게 되고, 사회적 명예는 덤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가는 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사회적 존중을 받는 길은 겸손입니다. 지혜는 마음(heart)의 문제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혜자 중의 한 명이지만(31),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국어사전은 ‘겸손’을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정의합니다. ‘겸손’의 히브리 원어는 ‘아나바’로서, ‘압제를 당하여 굽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을 충분히 통과하면 겸손해지게 되어있습니다. 거만하고 냉소적인 바보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하지만, 잠언의 제자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도덕질서와 삶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그 질서에 반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주님께 백기를 휘두르고 투항해야 비로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벧전5:6).  유다의 웃시야 왕은 강대해지자 교만하여 왕에게 금지된 제사장직까지 행하려고 하다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아람 장군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겸손히 순종하여 고침을 받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습니다. 우리는 다 모난 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징계를 겸허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회적 성공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새번역)

매일묵상(2021/12/13 – 17)

시편69편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9절)

다윗은 이 시편에서 연약한 사람나와 고백합니다. 구약을 보면 이 시의 배경이 될만한 다윗의 삶은 없습니다. 다윗은 기록되지 않은 부당한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 자신은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헌신하였지만(9), 재정적(?) 부정 행위에 연루되었다거나, 이 때문에 마땅히 행할 국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입니다(4). 다윗이 가진 정의감은 무디지 않았습니다. 비방과 배반이 일어나자 다윗은  자기정죄(5)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성품과 도덕적 민감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생명은 위협당하였고 증오는 계속되었습니다(1-4). 그를 지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모욕당하였고(6), 가족들과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8). 그의 신앙 고백과 삶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10-12). 곤란이 중첩하나 신속한 응답이 없자 의심이 들며 두려워하였습니다(17). 이 모든 것이 주님과 그분의 집에 헌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진정한 공격의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이 시편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저주들(22-28)의 이유입니다. 두 가지가 주목됩니다. 첫째, 이 시가 해결되지 않은 위기의 상황(29) 하에서 기록되었지만, 결국 다윗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 다윗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하고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둘째, 이 시는 시편 중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여러 번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들의 자손이 그 땅을 물려받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다.”(시편69:36 새번역).

시편69편 4절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본 시편은 메시야 시로서 4, 9, 21, 22, 25절은 신약에서 빈번히 인용됩니다. 4절의 전반부는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5:25). ‘율법’이란 시편을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증거하셨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좋은 예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신 기사입니다(요5장). 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리신 사건입니다 (요11장). 유대인들은 표적과 가르침 속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보았으나 오히려 미워하여 원수가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경험을 노래한 구절들을 예수께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형론 Typology’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만약 다윗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얼마나 더 미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율법에 의하여 오히려 정죄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복음의 신비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잠언15: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낸다.”(새번역)

마음은 악한 생각들 혹은 정결한 언어를 구축하며, 탐욕 혹은 관대함의 원천이고(27), 선한 동시에 적절한 대답(23)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 열쇠임을 이 구절이 보여줍니다. 의인의 마음은 상대방의 삶이 선한 열매를 맺도록 적절한 말을 찾아 깊이 생각합니다. 현자는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만(23), 좀 더 적합한 대답을 찾아 여전히 연구합니다(2). 악인의 입은 악한 말, 즉 도덕적으로 불쾌하며 더 나아가서 해로운 말을 불쑥 내뱉고 맙니다. 마음과 입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악한 말을 쏟아낸다’는 문장은 성급함을 말하고,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는 문장은 ‘좋은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70인역이나 탈쿰역은 ‘좋은 것들’을 ‘신실한 것들’로 번역하여 사회적 배려를 강조합니다. 의인은 신중하며 자제력이 있습니다. 의인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본 잠언은 이런 면들이 악인과 다름을 가르쳐 줍니다 . 악인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 꾀, 계획, 거만함으로 꽉 들어차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늘 분주합니다(24:2).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악인은 의인과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대주교였던 페넬롱은 사려깊은 분이었습니다. 조언을 구하는 편지가 오면, 그는 깊이 생각하고 답변을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무려 2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분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엡4:29,새번역)

잠언15:29절
“주님은 악인을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새번역)

이 잠언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의인을 판단하는 신학적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이란 주님이 가까이 하여 기도를 들어 주시는 사람입니다(시145:18).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 만유의 주님의 돌보심은 가장 든든한 보장책입니다. 의인의 자랑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악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주님은 멀리하십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멀리하신다’는 의미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은혜 받지 못함을 뜻합니다. 주님과 악인 사이에는 교제가 없습니다. 양측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극한 상황이 지옥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자비와 영광이 떠나 있습니다. 악인은 종종 경건한 사람으로 위장합니다. 누가 악인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분별합니다. 지혜자는 사람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지 길어올립니다. 지혜자 또한 악인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잠언은 악인이 회개하는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악인이 진정 회개한다면,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회개는 악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악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렇듯이 예외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과의 교제가 생명 보다 나음을 깨닫자 회개합니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구원의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겠습니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9-10, 새번역).

잠언15:30절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잠언15:30-16:15절은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도입부분(15:30-33), 주님의 주권(16:1-9), 그리고 왕을 통한 주님의 통치(16:10-15). 도입부분은 ‘듣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15절은 이를 상세히 교훈합니다. 본 구절에서 ‘눈이 밝다’는,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마음을 지칭합니다. ‘좋은 소식(기별)’이란 문맥상 ‘주님의 통치’(16:1-15)를 언급합니다. ‘윤택하게 한다’는 ‘살찌게 한다’의 의역으로, 풍성함, 충만한 만족 그리고 건강을 말합니다. ‘뼈’는 사람을 뜻하는 제유법으로서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함합니다. 본 잠언의 실례는 빌립보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로마 셋집에 갇혔습니다(AD60년). 빌립보 교회는 또 다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이 예물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 곤궁도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매여 있었지만, 바울의 사정이 로마군대 내에 알려져 복음은 오히려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빌1:12-14). 사도 바울 자신의 눈이 밝아지는 계기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소식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는 매여져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놀라운 소식에 기뻤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은 성도들 사이의 아름다운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도 이같은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교우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빌4:21, 새번역)

매일묵상(2021/12/6 – 10)

시편68편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1절)

시편에서 가장 떠들석하고 신나는 시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벳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행진할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삼하6:12).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언약궤의 행진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 왕의 행진이었습니다. 아벡의 전투 후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들어갔고, 지금 100년이 흘렀습니다. 시에서 잘 나타나 있지만, 다윗 왕이 앞서고, 레위인들이 메었으며, 수 많은 백성들이 뒤 따르면서 소고 치며, 여러 악기로 기쁘게 찬송한(25)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적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를 행진할 때마다 모세는 기도 드렸습니다. 1절은 그것을 반복합니다(민10:35). 그러나 이 언약궤의 행렬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로 400년 동안 없었습니다. 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금에야 하나님이 당신이 거할 처소로 선택하신 ‘높은 산’(예루살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6) 찬양의 팡파르/ (7-18) 왕의 행진/ (19-31) 왕의 위엄/ (32-35) 마지막 팡파르.  한편, 이토록 중요시한 ‘언약궤’는 400년 뒤 지상에서 사라졌으며, 그것을 보관하던 성전 역시 붚태워졌습니다. 어떻게 된 이유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언약궤 자체가 그리스도의 언약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관련하여 18절을 인용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시편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새번역)

본 시편은 다윗과 그의 백성이 아비나답(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메어100년 만에 예루살렘의 성소에 안치하는 행진을 노래한 시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 행진은 출애굽을 완성하는 승리의 행진을 의미하나, 그러면 여기서 ‘사로잡은 자들’은 누구이며, 선물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먼저 이 구절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승리하여 부른 여사사 드보라의 승리의 찬가(삿5:12)에서 뽑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 후 자신의 도성(높은 곳)에 들어가셨습니다. 반역자들에게는 공물을 부과시키고, 당신의 백성들과는 전리품을 나누십니다(19).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왕으로 등극하시기 위해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모습을 이 구절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포로)들을 다시 사로잡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로잡은 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각 성도들에게 선물(은사)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힘을 공급하십니다. 교회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서로 결합하고, 각자가 그리스도께 받은 은사를 발휘함으로 몸이 자라되, 사랑 가운데 스스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엡4:16).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잠언 15:25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공동번역)

본 잠언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오기 전, 약자가 생명의 길을 걷고 있더라도 힘을 가진 악인에게 착취를 당한다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4절(생명의 길을 걷는 슬기로운 자)은 25절과 함께 읽어야만 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이런 악인의 행위를 심히 규탄하고 있습니다(사1:10-17 암2:6-8). 본 구절은 짧지만 ‘교차대구’,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提喩)법, 환유법 등의 문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힘있게 전달합니다. ‘집’이란 삶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을 상징하기에, 집을 헌다는 것은 그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내용이며, 그것도 영원한 파멸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악인에게는 아주 두려운 존재입니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을 높이고,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짓밟는 폭군을 뜻합니다(환유법). 또한, 남편 없는 과부는 고아와 함께 약자의 대명사로서 착취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합니다. 악인은 지계석(경계선의 돌)을 한 번에 조금씩 이동시켜 마침내 과부의 밭을 상당부분 잠식합니다. 이를 잘 알지만 힘이 약한 과부는 원한이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원한을 풀어줄 책임은 왕에게 있습니다만, 구약성경은 독특하게 하나님을 궁극적인 회복자로 선포합니다. 주 예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해 불의한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불의한 일을 당하나 수단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인내할 것을 요청하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잠언15:26절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6절은 ‘여호와(야훼, 주님)’라는 주제어로 25절과 연결되고,  25절에게 신학적 근거를 줍니다. 따라서, 25절의 ‘거만한 자’는 악하여 주님이 미워하시는 자로 암암리에 규정되며, 약자와 압제 당하는 모든 자를 대표하는 ‘과부’는 ‘정결’하여서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자임을 알게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자애로운 임재를 거두어 가십니다. 그 결과 악인은 확실하게 영원한 죽음 속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너무나도 주님의 마음에 맞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그분의 자애로운 임재는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한편, 솔로몬은 ‘악한 꾀’와 ‘선한 말’을 대조함으로, 악인은 불쾌한 말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지만, ‘선한 말’은 좋은 사람의 외부적 표식임을 가르쳐 줍니다. ‘정결’이라는 단어는 제사 의식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거룩한 주님은 당신의 면전에서 부정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는 ‘깨끗함’으로 종종 설명됩니다. 물론 반의어는 ‘부정/깨끗치 못함’입니다. 오직 깨끗하고 정결한 자만 제사를 드릴 수 있고, 희생제물은 온전하고 정결한 짐승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개념은 ‘도덕적 정결’이라는 의미로 전용되어 왔습니다. 가난하나 참된 사람의 계획이나 말을 들어보면 부정한 비윤리적 요소들 – 거짓됨, 왜곡, 거칠고 불쾌하게 함 – 이 없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주님 앞에서 성소의 순금과 같이 빛날 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 달콤함을 주고, 그들의 뼈를 치료합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16:24).

잠언15:27절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은 자기 집에 해를 끼치지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 (새번역)

이 구절은 ‘집’이라는 주제어로 25절과 연결되고, 거만한 자(25)와 악인(26)이 자신의 집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예로서 ‘불의한 이익(뇌물)’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주어인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과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을 중심에, 술어인 ‘자기 집에 해를 끼친다’와 ‘오래 산다’는 처음과 끝에 배열시키는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기억하기 쉽도록 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는 타락한 사기꾼, 특히 관료를 지칭합니다. 그의 집을 파괴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25).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의 반대에 서 있는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이란 선인(의인)의 특정한 행동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선인은 말도 정결하고, 뇌물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이익’을 탐낸 대표적인 사람은 구약에서는 게하시,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나병에서 회복된 나아만 장군은 사례하고자 하나 엘리사는 완강히 거절합니다. 이를 나중에 안 게하시는 분노하여 쫓아 가서 거짓말하여 은덩이와 두 벌의 옷을 받아 집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게하시와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나병환자가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게 게하시의 집(가문)은 파괴당하였습니다 (왕하5:27). 가룟 유다는 겨우 은 30량을 탐내어 주님을 팔아 넘기나 목매어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는 어구는 그의 집의 계속적 보전이, ‘집에 해를 끼친다’는 그의 생명의 상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잠언15:31,새번역)

매일묵상(2021/11/29 – 12/3)

시편66편
“내가 마음 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18,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불확실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은 ‘와서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초청의 근간을 이룹니다(1-7). 시편 기자는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주님을 지켜보라고 요청하면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양하고, 반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5-7). 시편 기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고”고 할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10-12). 그러나 현재 주님이 그분의 백성을 대하시는 행동은, 과거에 그분이 행하셨던 일에 비추어 이해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홍해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관점에서 봅니다. 그들이 홍해의 물 속으로 지나간 이유는 바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12). 홍해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죄로부터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깨닫고, 현실에서 체험하여야만 합니다. 또한, 문제가 클수록 환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은총을 증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17)와 거룩함(18)이 없이는 구원의 축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좋은 예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서, 순교를 위해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원하시려고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시편67편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6,새번역)

이 시를 추수 감사의 한 장면으로 본다면 흥미롭습니다. 1-3절에서 예배 인도자가 말하고(1행) 회중은 화답합니다(2행). 4절에 이르면 인도자와 회중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함으로 절정을 이룬 뒤, 다시 5-7절에서 주고 받고 있습니다. 주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추수기에 땅의 소산(오곡백과)을 주심으로 축복하신 것과 같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와 복을 받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무이하게 축복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자체가 목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론의 축복(1절, 민6:24-26)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축복(창12:2-3)도 누리고자 합니다. 즉 그들이 축복을 받는 이유는 천하 만민에게 그 복이 미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사역을 말합니다. 그분을 깃발로 믿고 구원받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듭니다. 한편, 6-7절을 보면 추수가 또 한 번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홍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시편65,66) 뿐만 아니라, 평범하고 해마다 계속되는 자비와 섭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은 장차 올 더 큰 축복의 담보인 동시에(6),  온 세상을  포괄하는 보증이기도 합니다(7). 왜냐하면 추수는 전 인류 중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사27:1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67:7).


잠언 15:22
“의논이 없으면 계획이 실패하고, 조언자들이 많으면 성공한다.” (쉬운성경)

어릴 때는 부모가 필요하나, 어른이 되면 그 방면에 권위있는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본 잠언은 이 부분을 교훈합니다. ‘계획이 실패한다’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라는 의미로써, 좋은 친구가 주는 신뢰할만한 조언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현명한 결정에 이를 때까지 사랑으로 서로 고쳐주고 격려해주는 조언자들입니다. 거만하며, 고집이 세고 완고한 사람의 계획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 계획을 세우기에, 그 결정은 이기적이고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을 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교만한 그는 교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그 방면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조언자들이 함께 하면, 의논하는 계획마다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과 신뢰를 기반으로 권위 있는 조언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거치기 때문에 늘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실로, 많은 조언자들이 마음을 열고 정직한 조언을 줄 때, 계획 중에 숨어있는 잘못들이 바로 잡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약점, 무지, 그리고 한계를 상쇄시켜줄 조언자들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온 세상의 주인을 알고 그분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치시고, 깨우쳐주시는 분은 보혜사(保惠師-보호, 은혜, 스승)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 ‘파라클레이토스’의 번역으로 ‘돕기 위해 부르심 받아 옆에 와 계신 분’을 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카운셀러이시기에, 그분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여만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잠언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이 잠언은 ‘사메아-기쁨’을 다루는 단락(20-23절)의 최종입니다. ‘조언’은 서로 대화하면서 주고 받습니다. 만약 적절한 대답을 듣게 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좋은 조언(훈계)을 자녀들이 받아들일 때 기쁨을 갖습니다(20). 현자는 윤리적 조언(22-23)을 받고 주는데서(23) 기쁨을 느낍니다. 더나아가, 성인이 찾아갔을 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답을 주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여기서 ‘대답’ 이란 ‘마네’의 번역으로 ‘상황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반응’을 말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이유는 욥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뒤, 회개하라는 대답(조언)을 계속 주었습니다. 물론 욥은 그런 대답은 잘못되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자 함께 듣고 있던 엘리후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 세 친구의 말에는 욥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전혀 없고 다만 정죄하는 말만 나열하였기 때문입니다 (욥32:3,5). 한편, ‘아름답다’는 말은 ‘토브 – 좋다’는 뜻인데, 이는 그 대답(조언)이 너무나도 상황에 잘 들어 맞아서 대화를 나누는 모두에게 생명과 번영을 주게 됨을 의미합니다. ‘때에 맞다’는 기회가 생기는 적절한 때를 말합니다. 그것은 성급한 말(29:20)이 아니라, 준비되고 사려깊은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조언을 주는 사람이 그 상황에 꼭 알맞은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 겹쳐 꾸고 근심하는 바로에게 요셉이 적절한 대답을 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 새번역).

잠언 15:24
“슬기로운 사람이 걷는 생명의 길은 위쪽으로 나 있어서,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난다.”(새번역)

24절은 교육의 기쁨을 다룬 단락(20-23)과 의인을 보호하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언급한 단락(25-29)을 연결합니다. 또한 현재 의인에게 주는 보상인 기쁨을, 주님과 연관된 영원한 생명으로 승격시킵니다. ‘생명의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갖는 상태를 언급합니다. ‘위쪽으로 나 있다’는 말은 ‘아래로 난 스올(무덤)의 길’과 대조를 이루면서 무덤(죽음)을 넘어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함축합니다. 실로 준비된 생명의 길의 수혜자는 ‘슬기로운 사람’이고, 그들의 정체는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쪽으로 나 있는 생명의 길을 걷는 결과, 자연히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납니다. 그들은 인생의 참된 성공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올(무덤, 죽음)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예기치 않게 죽지 않는다는 말 그 이상입니다. 생명의 길을 사망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생명(이김)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고전15:54).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 명령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걷기에 ‘슬기로운’ 사람이며,  스올로 상징되는 영원한 죽음(심판)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한편, 세상에 살 때 닥쳐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 문제 거리 등은 감사와 함께 기도로 아뢰면 됩니다. 놀라운 응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더구나 영생의 소망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늘 넉넉합니다. 본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적합니다.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잠언15:25, 공동번역)

매일묵상(2021/11/22–26)

시편64편
“의인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주님께로 피할 것이니,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모두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10, 새번역)

인간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계시는가, 혹 계신다 하더라도 정의를 이루어내는 그분의 섭리가 과연 적극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종종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선인과 악인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들 사이에 그토록 심한 운명의 불균형이 있을 수 있는가? 악을 행하는 자들이 상처하나 입지 않고 어떻게 그토록 자주 성공을 할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런 물음에 답하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게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혀라는 칼을 날카롭게 갈고, 독을 먹인 화살과 같이 말(words)을 준비 합니다(3). 그리고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쏘고서도, 거리낌조차 없었습니다. 다윗은 기가막혔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코웃음치며 묻습니다: “누가 보리요?”(5). 그리고는 성공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바로 그 무기(화살과 혀)가 자신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그래서 그들은 순식간에 쓰러질 것입니다(7).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교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디에 겨누어야 하실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웃음 받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고, 결국 그들은 사람의 속담거리가 될 것입니다(8,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한 의인이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드리는 기도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찬양의 목소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10).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시편2:10후단,새번역)

시편65편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

이스라엘은 매년 대속죄일(레16장)과 그에 뒤 이은 장막절(레23:39)로 절정을 맞습니다 -죄의 제거와 추수감사 행사. 그러나 이 시는 특별했던 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 해에는 놀라운 기도 응답을 받았으며(2,5); 죄는 엄연한 현실이었고(3); 하나님은 위엄있는 행동을 하심으로(5),  열국을 진정시키고(7) 열방에 확고한 명성을 확립하셨고(2,5,8); 그 해의 추수는 특별히 풍성하였습니다(9-13). 이 시에서 하나님은 구속자, 창조자, 공급자로서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하21:1-14에 기록된 3년 기근이 끝나던 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윗 시대에 3년 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주님은 모세율법 속에 이스라엘에게 적당한 때 비가 내릴 것을 약속 (신11:14)하셨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이례적입니다. 당연히 다윗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에게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원래 400년 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약조하여 살려 주는 대신 주님의 장막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350년 뒤 사울이 이를 어긴 것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부르니, 그들은 사울에 속한 7사람을 목매달아 죽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들을 내어주자 기도는 응답되어 3년만에 비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본 시는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의 축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후1:20,새번역)

잠언 15: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두 번째 승자는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는 확 트인 큰 길을 활보할 수 있는 보상을 받습니다. 대조적으로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덤불된 울타리로 막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5:5은 사람이 접근 못하도록 가시로 된 강력한 울타리로 둘러싼 포도원을 언급합니다. 이렇게 가시 울타리의 비유는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가시로 찌르고 고통을 주어 못지나가도록 막는 장애물입니다. 게으른 자 역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장애물을 넘어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의 게으른 성품 때문에 시도도 안합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위험해서 도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정직한 사람들은 대로를 걷습니다. 실로 그는 현인의 가르침에 맞추어 살아가려는 성품을 지녔습니다. 한편, ‘대로(highway)’는 여행을 쉽게 하도록 장애물을 제거하고, 잘 닦여져서 손쉽게 왕래할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반면 준비되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돌이나 기타 장애물에 채여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게으른 자’와 ‘정직한 자’를 대조함으로, 잠언은 ‘게으른 자’는 ‘정직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게으른 종을 ‘악한 종’(마25:26)과 ‘무익한 종’(마25:30)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실천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25:30.새번역)

잠언 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15:20-29절은 ‘의로움’과 ‘악함’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언듯 보기에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10:1)를 반복하는 양 보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아들’을 ‘미련한 자(아담)’로 대체하여, 유산을 이어받는 아들의 지위에서 그 유산으로부터 쫓겨난 사람(아담)의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범죄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것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경멸하는 대상은 ‘지혜와 훈계’(1:7)이나,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1:7에서 미련한 자가 멸시하는 대상은 ‘지혜와 훈계’이나, 본 절은 이를 ‘어머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부모를 뜻합니다(1:8). 또한 ‘즐겁게 한다’와 ‘업신여긴다’는 어구는 정확히 대조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는 아들은 그분들을 멸시하지 않는 반면, 부모를 멸시하는 사람(아담)은 그분들에게 슬픔을 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미련한 자는 고치기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중요하다는 자만에 빠져, 자신의 경건한 부모보다 똑똑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비극적인 모습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미련한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표식이며, 절대로 잘못 판단될 수 없습니다. 한편, 지혜로운 아들이 아비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모를 명예롭게 여기기 때문이요, 미련한 자가 어미를 업신여기게 되는 것은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을 명하는 제5계명의 존재 의의는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20:12,새번역)

잠언 15:21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미련함을 즐기지만, 명철한 사람은 길을 바로 걷는다.” (새번역)

21절의 “즐기다”는 말은 부모의 기쁨에서 자신의 기쁨으로 중심이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만함은 도덕적 감각이 전혀 없는 자, 즉 거만한 바보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길을 바로 만들어 걷습니다. 이렇게 바른 길을 계속 가면 결국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24). ‘미련함을 즐긴다’와 ‘길을 바로 걷는다’라는 표현을 비교해 볼만 합니다.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도덕 질서를 위반하기 좋아하여, 무모하게도 마땅히 이행하여야 할 의무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앞에 놓여져 있는 기쁨(영생)을 위해 자비와 진리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잠언은 제자들이 통찰력을 가지고 살도록 소리 높여 외침으로써, 제자의 애정(21a)과 행동(21b)이 늘 바른데 머물러 있도록 훈계합니다. 지혜자란 현재는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리고(20) 미래에는 자신에게 기쁨이 찾아오도록 합니다(21). 그러나 지혜가 결여된 어리석은 자는 부모의 훈계를 무시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사람의 운명은 그의 생각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특히 복음을 들을 때 분명히 갈라집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죄를 심상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의 가르침을 멸시하고 자신의 미련한 삶을 그대로 즐깁니다. 이 반면 명철한 자는 장래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두려워 하여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변화를 받고 주님이 걸어가신 의와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2:15,새번역)

매일묵상(2021/11/15 – 19)

시편62편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2, 새번역)

우리는 두려워할 것은 많으나 사람은 믿을 바가 못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위협이 밀려 올 때, 도대체 우리가 호소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로써 충분합니다. 본 시편에서는 처음부터 이 진리가 진술되고 있으며(1,2), 다시 반복되어 격려합니다(5,6). 더 나아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되고(7,8),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밝힙니다(11,12). 이 진리는 절대로 상아탑에서 만든 교리가 아니라, 힘든 세상에서 경험되고 입증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돌변하여 위협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3, 4), 이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나 관행은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 소망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크’(‘그러나’ -개정개역은 생략됨)가 각 구절의 머리에 총 6번(1, 2, 4, 5, 6, 9절) 등장하여 반전을 노래합니다: 많은 압력이 있지만, ‘그러나’(1) ‘하나님을 의지한다.’ 다른 많은 힘이 있지만,  ‘그러나’(2) ‘오직 그분만 나의 반석이시다.’ 원수가 성공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러나’(4) 그들은 꾀를 내는데 열중한다. 그런 모든 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러나’(5) ‘쉼’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다른 힘도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6) ‘오직 그분뿐이다.’ 사람의 도움이 얼마나 큰지 지적하더라도, ‘그러나’(9) ‘인간은 단지 입김에 지나지 않아’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권능과 변치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분만 신뢰하고 의를 행하여야 합니다. “주는 사랑을 베푸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행한 대로 주는 반드시 갚으실 것입니다.”(시62:12,쉬운성경).

시편63편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3, 새번역)

시의 머리말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에 쫓길 때 유다 광야에서 지냈고, 30년 뒤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다시 유다 광야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11절에 ‘그 왕’이라는 문구로 볼 때 후자의 경우라고 판단됩니다. 다시 한 번 최악의 환경이 가장 훌륭한 시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때 다윗은 뒤따라 오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자신을 다시 성소로 불러주실 것을 믿고 자신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삼하15:25). 이 시는 시인의 강한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4) 내가 갈망하는 하나님
(5-8)내가 기뻐하는 하나님
(9-11)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황폐한 땅에서 물을 찾는 그 심정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증을 중첩시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갈 수 없는 예루살렘의 성소에서 늘 가졌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떠올리며 그런 주님과의 교제가 어떤 삶보다 더 소중하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보다 마음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던 비밀입니다. 그는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능력 그리고 보호하심을 신뢰하고 원수들이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9). 그 확신의 근거는 왕으로서의 은사와 소명에서 나옵니다(11). 만약 다윗이 자신의 왕직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였다면, 그리스도인의 왕직과 소명은 더욱 확고함을 알아야합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잠언 15:16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16절의 주제어 ‘더 낫다 – 토브’로서, 고난 가운데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을 경외하면서(16) 서로 사랑하는데 있음(17절)을 알려 줍니다. 16절의 교훈은 재산이 아니라 믿음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경외한다’와 ‘다투며 산다’는 말은 대조되는 표현으로 누가 주인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다투며 산다’는 말은 ‘맘몬의 노예’가 됐다는 말로써, 이는 다툼의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15절과 함께 읽으면 다음과 같은 통찰력을 줍니다. “영적인 이득을 가졌으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이, 경제적 이득을 가졌으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보다 낫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재산, 능력, 권력 등을 우상으로 삼는 세상입니다. 당연히 악인이 득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물질적 부요나 출세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든지, 가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눈 밖에 난 결과라는 공식을 만들지 말고, 그렇게 된 원인을 따져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 도래할 미래의 세상은 주님의 공정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고,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한편, 이 세상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가지는 특권이 있습니다: 주님의 돌보심(교제)과 사랑입니다(잠3:32). 그러므로 경건한 가정은 재산이 적어도, 부유한 악인의 집에는 없는 화목과 사랑 그리고 만족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인이지, 맘몬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충만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지혜로운 계산법입니다. “악한 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넘친다.” (시32:10,새번역).

잠언 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잠언은 서로 대조적인 두 종류의 식사의 예를 가지고, 즐거운 향연은 사랑에 있지 음식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채소를 먹는다”의 원어는 ‘여행자가 먹는 채소로 된 식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질과 양에 있어서 가장 소박한 음식을 표현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그런 식사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그들과 일행이 되고자하는 따뜻한 마음이 수반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하여 ‘살진 소’는 최상의 음식을 상징합니다. ‘미움’이란 풍성한 잔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싫어하여 배제하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16절과 17절을 비교한다면 “재산이 적어도”(16)는 “채소를 먹으며”(17절)로 표현되고, “주님을 경외하며 산다”(16)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17)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투며 사는 것”(16)은 “서로 미워하는 것”(17)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5절 -17절은 경건한 자의 삶과 그렇지 않은 자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이겠습니까? 본 잠언은 검소하게 살게 될지언정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가장 부패한 환경에서조차 우정을 강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삶은  최상의 환경이지만 미움이 동반되는 삶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실로 미움은 분개심을 낳고 이런 분개한 마음은 적대적 행동에 불을 당겨 결국 우정은 파탄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은 소유를 가져서 소박한 음식을 먹게되어도, 서로 사랑하는 삶을 택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15:16,새번역)잠언15:18절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싸움을 그치게 한다.”
(새번역)

마음과 환경의 관계를 다루는 단락(13-19)에서 첫 번째 부분(13-17)은 마음이 환경보다 중요하다는 주제를 다루나, 두 번째 부분(18-19)은 마음과 환경 중 어느 것이 이기는가에 초점을 둡니다. 환경을 이긴 첫 승자는 ‘사랑을 하는 자’이며(18), 그 보답은 평화입니다. 이것은 ‘미워하는 자’가 갖는 분노와 그 결과인 다툼과 대비됩니다. 18절의 ‘다툼’은 17절의 ‘미움’이 발전된 것입니다.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은 끓는 분개심을 통제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함으로써 논쟁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때문에 분쟁을 잠재웁니다.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지혜자와 동일한 말로 가능한 빠르게 논쟁이나 다툼을 잠재워 ‘조용함’을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 상식이 승리하고 악행은 그칩니다. 그래서 교부 제롬은 “참는 자는 이미 휘저어 일어난 분쟁들을 잠재운다”라고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인내하는 자는 분노하는 자보다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후자가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여 일으킨 혼란스런 상황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승리자로서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드다나 갈릴리인 유다의 반란 사건을 들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어떤 것도 실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권고로 산헤드린 공회는 분노를 그치고 사도들을 풀어주었습니다(행5:17-42).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고전13:4,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