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3/2/20-24)

잠언21:19절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9절과 19절은 동일한 내용이나, 표현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두 구절은 모두 ‘보다 낫다’란 구문, 남편과 다투는 아내의 행동, 그리고 단락 분할의 기능은 같습니다. 그러나 19절의 여인은 성까지 내며, 남편을 위해 ‘움막’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가 등장합니다. 이는 본 구절의 남편의 처지가 9절에 묘사된 남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합니다. 광야는 황량하며 고독하며 위험하고, 삶의 수단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욥은 학대받는 가난한 자를 거친 광야의 들나귀에 비유합니다(욥24:5). 그 가난한 자는 ‘소나기에 젖고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입니다(욥24:8). 따라서, 솔로몬은 잔소리하는 아내를 둔 남편의 처지를 그 학대받는 가난한 자와 유사하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은 남편을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 여인은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지혜를 모색해야 합니다.  ‘우르사’의 광고 모델로 잘 알려진 백일섭(1944년생) 씨는 아내와 오랫동안 대화가 단절되었고, 아들에 따르면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는 배우 아버지로서 집안에서 대우를 받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던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017년에 졸혼을 선언하고 오피스텔을 얻어 별거하였습니다. 그는 혼자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생활이 자유롭고 마음이 편하다고 토로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을 주님과 교회 간의 비유임을 밝히며, 좋은 부부관계를 위한 지침을 제시하기에 유념해서 간직해야 합니다(엡5:22-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33).

잠언21:20절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21:20-29절의 주제는 ‘의인의 보존과 악인의 멸망’이며, 20-23절과 24-29절의 둘로 나누어집니다. 20-23절은 지혜자(의인)의 성공, 승리, 그리고 안전을 다루며, 그 중 오늘 본문(20)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비교합니다. 전단에서 ‘귀한’의 원어는 ‘네흐마드’로서 ‘기뻐하다, 열망하다’의 뜻입니다. 따라서, ‘귀한 보배’는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보물을 뜻합니다. ‘기름’이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슬기로운 경제 활동을 하여야 이런 ‘귀한 보배와 기름’을 가질수 있습니다. 그 반면, 미련한 자는 규모 없이 살고 당장의 쾌락과 허영에 몰두하기에, 본래 소유한 재산마저도 탕진합니다. 본문의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잘 표현해 주듯이, 미련한 자는 마치 음식을 한 입에 털어넣듯이, 순식간에 재산을 없애버립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올리며, 통상 5만달러를 친척들로부터 받습니다. 따라서 13살부터 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기에, 유대인들 가운데 부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부자는 부라는 수단을 통해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운동,여행, 일과 같이 경제활동 역시 일찍 시키면서, 주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이다.”(잠언3:9,10, 새번역)

잠언21:21절
“정의와 신의를 좇아서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새번역)

21절은 20절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자’의 경제적 축복의 원인을 밝힙니다. 전단은 지혜자의 집이 보배와 기름으로 끝없이 채워지는 이유는 그가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살기 때문이며, 후단은 그런 자는 단순한 경제적 보상을 넘어 생명, 번영 및 사회적 명예까지 얻게 됨을 가르칩니다. 이는 지혜자(의인)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재물은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주어진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22:4절은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새번역)라고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물론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정의’의 원어는 ‘체다카’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바른 삶을 말하며, ‘신의’는 ‘헷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듯이, 인내와 관용으로 이웃을 선대하는 삶을 말합니다. 또한 ‘쫓아서’의 원어는 ‘라다프’로서 ‘뒤따르다, 추적하다’를 뜻합니다. 이 동사는 흔히 전쟁이나 침략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뒤쫓을 때 사용되어, 아주 강력한 결의와 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신의를 쫓아서 산다’는 말의 함의는 돈을 벌듯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듯이, 그런 덕목을 실천하려고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써, 그리스도 제자들의 삶의 기본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앞에 두고, 우리의 이익과  세상 필요는 그 다음으로 두면,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6:33). 본 잠언에 대한 훌륭한 주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시편130:1,4절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1)…..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4).”(새번역)

시편 중 참회시는 7개이며, 본시는 6번째입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시인은 구원을 부르짖고, 용서와 구원(속량)의 확신을 향해 착실히 나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참당한 상황에 처했습니다(1). 이제 남은 소망은 오직 하나,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부르짖습니다.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도달할 때까지 이 시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시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누구든지 깊은 고난에 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 대신 눈에 보이는 다른 피조물(권력자, 부자, 재물 등)을 의지하기 쉬우나, 구원은커녕 그들에게 이용당할 뿐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시인은 이를 고백하며 주님의 용서를 구합니다(3,4). 죄악을 지켜보시는 주님 앞에서 누가 감히 결백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천 마디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4). 시인은 구원하실 주님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리면서(6), 이스라엘 전체로 시선을 돌려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시는’ 주님을 소망합니다(8). 시인이 고대하는 주님은 어느 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의 바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시편131:1절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새번역)

본시는 다윗의 시로, 모두 3절이며, 오늘은 1절만 묵상하겠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다윗 왕은 흔히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죄를 버렸습니다. 하나는 교만이요, 또 하나는 주제넘는 오만입니다. 교만은 타인을 과소평가하지만, 오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합니다. 둘 다 패망의 길입니다. ‘교만’에 대한 해답은 빌립보서2:5-8절의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사 종의 형체(사람)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이렇게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합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타인을 내려다보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기실 부자만은 아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능합니다(마19:26). 한편, ‘오만’에 대한 대답은 빌립보서 3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적 의, 즉 모세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자신의 의를 버렸습니다. 그 의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의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할례, 안식일, 음식규정이 대표적입니다. 이때문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였습니다(갈3:2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 달려갔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매일묵상(2023/02/13-17)

잠언21:16절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명철(明哲)’이란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원어는 ‘분별력 또는 뛰어난 식견’’을 지칭하는 ‘세켈’로서, 지혜(호크마)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남편 나발을 죽이려고 올라올 때 급히 떡과 포도주를 마련하여 영접을 나간 아비가일의 모습에서 ‘세켈’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명철)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9:10)이라고 교훈합니다. 그렇다면, ‘명철의 길을 떠난다’는 것은 만유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며 모든 도덕과 윤리의 원천이신 주님과 상관없이 살겠다는 의도이고, 타락한 아담의 원죄의 발현입니다. 당연히 악(자기존중)으로 치닫게 되고, 그 귀결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생명이시기에, 빛을 떠나는 순간 어둠 속을 다니게 되고, 생명을 버리는 순간 사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망의 회중에’ 살게 됩니다. 본 잠언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고 교훈한 이유입니다. 여기 역설이 있습니다. 이탈자는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 떠났지만, 그의 마지막 도착지는 죽음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죽지만, 여기서의 죽음은 때 이른 죽음이나, 죽은 뒤 찾아 오는 영원한 죽음(심판)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이것을 밝히 선포합니다. 사망의 핵심은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삶이고, 생명의 핵심은 주님을 알아가는 명철(지혜)의 삶입니다(요17:3). 그러므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것은, 명철의 길을 떠난 신약의 예입니다(딤후4:10).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28:28).

잠언21:17절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사람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
(새번역)

잠언은 가난하게 되는 여러 원인을 알려 줍니다.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게으름’이지만, 17절은 과도한 지출을 또 다른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전단은, 쾌락에 사로잡혀 사치와 향락을 쫓으면, 결국 빈곤하게 된다는 일반적인 진술이며, 후단은, 그 일례로서 오늘날 우리가 ‘파티’라 부르는 여러 축하 행사를 적어 놓았습니다. ‘술과 기름’은 이 당시 사치스러운 향연을 위해 이용되는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술이야 지금도 파티에 늘 등장하는 요소이지만, ‘기름’은 손님의 머리나 의복에 부어 환대를 표시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며, 흔히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은 술을 반대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적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의인 노아도 술에 취해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왕 르무엘의 어머니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 것을 아들에게 훈계합니다. 왕의 지위에 앉아 술 때문에 법을 잊어버리고 송사를 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31:4,5). 한편, 잠언은 정당하게 모은 재산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임을 밝혀줍니다(10:22). 다만, 그 부로 인해 교만해져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그 자세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향락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은 한 번 떠나면 다시 모으기 어렵습니다. 본 잠언은 전도서9:7-9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솔로몬은 향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시고,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며 열심히 일하도록 권고합니다. 성경적 삶은 고행도 방탕도 아닌 감사와 경건의 삶입니다“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5:6).

잠언21:18절
“악인은 의인의 속전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본 잠언은 악인의 계획과 행동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단의 ‘악인’은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며, 공동체에 적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자를 지칭하고, 후단의 ‘사악한 자’라 함은 악인의 한 유형으로 인간관계에서 신실치 못한 사람(배신, 속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거짓의 함정에 빠뜨려 멸망시키려는 악인의 계획을 돌려서, 의인은 구하시고 그 대신 그 악인이 자신의 덫에 걸려 멸망케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그 섭리의 집행자는 왕 같은 지도자들로서,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샤 왕 아하수에로가 그 좋은 예입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의 고관으로서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몹씨 미워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한 바 있지만, 자신의 질녀가 황후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건 진행 중에 하나님의 섭리로 모르드개의 선행이 밝혀지고, 뒤 이은 황후 에스더의 고발로 하만은 결정타를 맞습니다. 격분한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장대에 하만 자신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 기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첫째, 모르드개의 선행입니다. 그는 왕의 암살을 막았으나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에스더가 가진 왕비라는 합법적 신분입니다. 이 두 요소는 하나님의 섭리의 테이블이 돌아가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하시면서 의인을 보호하고 계심을 믿고, 우리 사회에 인정되는 합법적인 신분을 갖도록 성실히 일하면서, 묵묵히 선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4:43)    

시편128:1절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새번역)

경건한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 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확립합니다. 그의 삶에 보이는 참된 행복의 요소를 시인은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경외(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계,1a)와 순종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습관들,1b), 그리고 수고한 만큼 받는 번영입니다(2). 뱀은 “너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창3:5)라며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키자, 인간은 “각기 제 길로 갔고”(사53:6),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경건한 자의 삶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어 시인은 그의 가정으로 가 보았습니다. 가정의 중심에는 신실한 아내와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장래이며(3), 경건한 가정은 공동체의 견고한 구성원입니다(127:4-5). 진실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4). 만약, 경건을 한 사람이나, 한 가정에만 맞추면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시인은 신실한 자들의 모임인 시온, 즉 이스라엘로 그 눈을 돌립니다. 그곳의 평안, 번영, 축복은 경건한 자와 그 가족의 행복 조건이기에(5), 시인은 이스라엘의 평강을 구하며 시를 맺습니다(6). 신약에 이르면, 주님을 믿는 신실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고, 영적 이스라엘로 불리웁니다 (갈6:16).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간에 장벽을 쌓지않고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 영적 예루살렘의 참된 시민임을 보여줍니다 (히12:22이하). 그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한 소망과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엡4:2-6).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시편128:3).  

시편129:1절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129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4)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 (5-8)하나님의 심판을 기도. 1-4절에서 시인은 고난과 구원을 회상하고, 5-8절에서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침략을 많이 겪었으며, 매우 위협인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의로운신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원수들을 몰아내신 구원을 여러 번 체험하였습니다 (4). 주님은 결코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은 이집트 왕국, 늘 괴롭혀온 블레셋, 무섭게 압박한 앗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시킨 바벨론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은 보존되었습니다. 지금 시인은 원수들의 심판을 위해 기도합니다(5-8).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일시적이며(6), 성공하지 못하며(7), 이웃의 호의조차 받지 못하고, 축복의 공동체로부터 배제될 것입니다(8). 물론, 여기서 시온이란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지만, 그 옛 언약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이 함께 모이는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이미 끊어진 옛 언약에 충실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시인이 드린 심판의 기도는 그들 위에도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 해석을 통해 영생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매일묵상(2023/2/6-10)

잠언21:13절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13절은 10절에 언급한 악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귀를 막고”라는 표현은 무자비한 자의 악한 성품을 은유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런 행동을 통해 악한 자란 의로움이 결여되어 있고, 정의와 자비에 무감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생생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악한 사람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해보복법이 작동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후단은 이 교훈을 위해 ‘부르짖다’와 ‘듣다’의 동사 둘을 사용하면서, 악인이 곤경에 빠졌을 때 이웃과 하나님에게서 모두 무시당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본 잠언의 배경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이 제일 타당합니다. 성경의 예는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마태복음18:23-35에 나오는 용서에 관한 가르침의 비유입니다. 한 임금이 종들과 결산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갚을 재산이 없어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절망한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간청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의 간청에 귀를 막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자, 그를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야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교훈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잠언21:14절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품 속에 넣어 주는 뇌물은 격한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절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외부에 과시하지 않고 조용히 건네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은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데, 심지어 뇌물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효과가 있기에, 잠언은 지혜로운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견해입니다. 성경의 예로, 야곱이 20년만에 돌아올 때  격분한 형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예물을 보냈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격분하자, 신하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화목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성공하여 헤롯과 화해하였으나, 헤롯은 백성 앞에 연설 후 재앙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이 ‘신의 소리’라고 크게 부르짖었을 때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유였습니다(행12장;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다음으로, 부정적인 해석입니다. 잠언은 정의를 굽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뇌물공여를, ‘품 속에 넣어 준다’는 표현을 써서, 뇌물(선물)을 건네는  은밀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통상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선물은 분명, 뇌물로서 정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13절과 함께 생각한다면, 평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악인이, 위기의 상황을 맞아 뇌물을 써서 권력자의 분노를 잠재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두 견해 모두 타당하여, 주고 받는 사람들의 의도, 때와 장소 등을 고려하여 선악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잠언의 제자는 가장 좋은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잠언16:7, 새번역)

잠언21:15절
“정의가 실현될 때에, 의인은 기뻐하고, 악인은 절망한다
.(새번역)

본 잠언은 정의의 실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교훈합니다: 의인에게는 기쁨이요, 악인에게는 절망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악인에 대한 의인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분으로, 재판장과 같이, 정의가 집행되도록 모든 과정을 거치게 하신 뒤 마침내 승자의 기쁨을 의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섭리의 과정에는 주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인식 여하에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주님이 사용하시는 종(도구)들이며, 이를 위해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십니다(21:1).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9:26,새번역)는 잠언도 같은 취지입니다. 이 반면, 정의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집행될 때,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속여서 재물을 취득한 악인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른 판결을 받으려면, 주님께 그 사건을 의뢰하고 주님이 정하신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길’은 우리가 머물러야만 하는 강력한 산성이며, 정의를 베푸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늘 와서 호소하자, 이에 괴로워하는 불의한 재판장조차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하셨습니다 (눅18:1-8). 그러므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훼의 길을 따라 곧게 살면 친히 힘이 되어주시지만 나쁜 짓을 하면 망하게 하신다.” (잠언10:29,공동번역)

시편 126: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역사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것을 생각하며 감개무량해 합니다(1-3). 그러나 영토는 이전과 같지만 지배자는 페르샤 제국이고, 여러 이민족들의 비방과 공격, 그리고 자연재해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였습니다(스1-6장).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1,000년 전 출애굽 당시도 그러하였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넜고, 큰 기쁨에 차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광야의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이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하니,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절실합니다. 기쁨은 과거의 사건이고, 눈물이 현재를 점령하면서, 미래가 걱정이 됩니다. 주님께서 과거와 같이 지금 행동하신다면! 그런 열망에 사로잡혀, 시인은 네게브의 와디(건천)에 물이 흐르도록 기도합니다(4). 만약 주님이 비를 내리시면 메마른 시내는 갑자기 많은 물이 흐를 것이고, 그을린 땅은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자,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추수의 비유로 그것을 풀어내립니다. 일전에 큰 능력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씨 뿌리는 힘든 노동과 이 노동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서 곡식을 수확할 수 있으며, 그 때에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5-6).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 때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126:6,새번역)

시편 127: 1절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새번역)

127편은 일의 3 분야, 즉 집, 도시(1), 그리고 가정(3-5)을 들어,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단언합니다. 전문가들은 여러 문제를 토론하며 해법을 제시하나,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빼놓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집, 도시, 그리고 가정에 대한 바른 이해도, 바른 세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1-2절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하고 너는 가서 휴식 있는 삶을 즐기라”고 제안합니다. 성경에서 휴식의 반대는 일(work)이 아니라, 근심 걱정 등으로 제대로 쉬지 못함을 말합니다. 3-5절이 이런 잘못된 태도를 교정합니다. 주님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간의 활동을 정하셨기에, ‘태를 여는 것과 닫는 것’ 역시 주님이시며 (창29:31;30:2), 인간은 그분의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우리의 성취물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입니다(3). 집(가정)을 세우는 것과 성을 지키는 것도 같습니다(1-2). 모든 삶은 충만히 살아야 합니다. 즉, 삶이 주는 모든 기쁨을 누리며, 성공여부에 대한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책임과 의무를 다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각 사람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인(파수하는 일), 건축가(집짓는 일), 주부(살림).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즐거움, 고된 일, 그리고 근심없는 휴식으로 특징짓습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2).

매일묵상(2023/1/30-2/3)

잠언21:10절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새번역)

본 잠언의 악인은 습관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의 원어는 “네페쉬’이며, 생물이나 사람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잠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악인은 오직 악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생물과 같다는 색조를 전달합니다. 만약 이를 ‘욕망’이나 ‘의도’라고 표현하더라도, 악행에 몰두하는 악인의 모습을 그려주는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개정개역은 ‘영혼’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가까운 이웃’은 그들의 악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웃 사랑의 결여는 악인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악인은 가족이나 친척,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악한 목적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무자비하게 대합니다. 사랑이 결여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비(햇빛, 공기, 비 등)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를 배우지 못하니, 타인은 다만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타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경우, 큰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 전형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반성하여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대신,  아벨만 없으면 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 반대가 의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의 유익을 도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그 유익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상’은 오직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는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편1:6, 새번역).       

잠언21:11절
“오만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어수룩한 사람이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지식을 더 얻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오만한 자의 벌과 지혜자의 번영을 전제하면서, 이런 결과는 쉽게 흔들리는 어수룩한 사람의 교훈에 효과적임을 밝힙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먼저, 11절의 취지는 어수룩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특성을 대조한다는 관점입니다. 이에 따르면, 어리숙한 사람은 교훈만으로는 깨닫지 못하고, 체험(예- 벌을 받는 오만한 자를 목격함)을 해야 비로서 배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 바로 지식을 얻는 자라고 생각합니다(잠언19:25). 다른 견해는, “어수룩한 사람은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깨달아 지혜자가 되고, 그 후에는 책망만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고 읽습니다. 이에 따르면, 어수룩한 사람은 이중의 교육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오만한 자가 받는 벌을 보고, 범죄와 형벌 사이의 인과관계를 배웁니다. 둘째, 그 배움은 분별력으로 이어지고, 미덕과 보상의 관계를 배우는 데까지 갑니다. 그땐 지혜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편, 잠언의 목표는 “주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를 만드는 것이며(1:8), 이는 복음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고전1:24). 복음을 깨달으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죄인은 의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은혜에 감격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이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탄생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는 것은, “이 복음은….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언3:15).

잠언 21:12절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2절은 오만한 자는 물론, 모든 악인을 다루시는 주님께 눈을 돌립니다.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이는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압제하는 악인을 뽑아 내시려고 최선을 다 하실 것입니다. 세속 역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활동을 포착하지 못합니다만, 성경기자들은 그것을 보고 기록하여 우리로 교훈을 얻게 합니다(고전10:1-12). 창세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폭력이 충만하고 어릴 때부터 악한 자들로 가득차자,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어 모두 죽이셨습니다. 오직 의를 행하는 노아와 그 여덟식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어 아브라함 시대의 죄인들 소돔과 고모라 성읍 위에 불과 유황을 비오듯이 퍼부어 멸망시켰습니다. 오직 의로운 롯과 그 가족만 구원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빌립보 간수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전도와 연결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한편,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재앙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사사기부터는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어 살게 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감찰하시고, 그들이 반역의 길을 걸어 갈 때마다 이방민족을 통해 징계하시지만, 회개하면 구원자를 보내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도 다 그런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 지혜의 길입니다. “악한 사람은 얼굴이 뻔뻔스러우나,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잘 살핀다.”(잠언21:29,새번역)

시편 124: 1절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새번역)

다윗의 구원의 위대함을 4가지 큰 위험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먼저, 지진입니다. 지진은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3). 둘째는, 홍수입니다. 홍수는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습니다(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게 강한 원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사나운 맹수를 만나면 산 채로 잡혀 죽습니다(6). 넷째, ‘새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새도 같은 운명입니다(7).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다치지 않고 원수의 그물에서 벗어났으며, 위협 그 자체도 파괴되었습니다(7). “주님은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 이는 다윗의 고백이자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무엘하5장은 좋은 예를 제공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분노한 모든 블레셋인들이 베들레헴 근처 르바임 골짜기에 모여 두 번 공격하였습니다. 그 위협을 본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처음에는 승리의 확신만을, 다음에는 구체적인 전략을 주심으로 모두 승리합니다(삼하5:17-25). 그 다윗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이르면 다윗이 드린 이 땅에서의 구원의 노래는 영원한 구원의 주제로 발전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이 우리 주님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 하늘에 간직한 영원한 유업, 그리고 보호하심을 찬양합니다(벧전1:3-9). 구약과 신약의 구원이란 메시지는 동일하나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124:8,새번역).  

시편 125: 1절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새번역)

본 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전을 찾는 신앙 공동체 이스라엘의 고백입니다(1,2). 시인이 속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선과 악이 섞여 분열되었고, 악인들의 득세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3). 시인은 주님이 악한 통치를 종식시키실 때를 소망하면서(4), 평화를 기원합니다(5).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페르샤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잘 이해됩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A    안전의 근거 (1)
B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2)
C    악에 대한 승리의 신뢰(3)
B′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4–5a)
A′   평화의 기원 ( 5b)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은 움직일 수 없는 주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어떤 인생의 폭풍에도 안전하게 됩니다. 둘째, 신뢰는 섭리로 통치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악한 자가 득세할 때 신자는 주님의 심판을 믿고 악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인내합니다. 셋째, 신뢰가 환경에 의해 도전받을 때는 기도의 때입니다. 다만, 그 기도는 악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을 향합니다. 즉 악인은 주님 손(섭리)에 맡기고 주님의 백성들이 악한 통치에 대항하다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환경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합니다. 요약하면, 시인은 “두려움에 솔직하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편125:4,새번역).

매일큐티(2023/1/25-27)

잠언21: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기심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의 사이도 파괴시킵니다. 집안의 경제적 주도권을 갖고 다투는 모습이 그 예입니다. ‘움막’으로 번역된 원어 ‘까그’는, ‘지붕’ 혹은 ‘집 꼭대기’란 의미로써, ‘움막에서 산다’는 ‘지붕 모퉁이 위에 산다’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옥의 지붕은 평평하였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일시 지낼 수는 있으나, 비와 이슬을 가릴 수도,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피할 수도 없어 거처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대비된 ‘큰 집에서 산다’는 문구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저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자는 비도 이슬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후자는 윤택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보다 풍성한 삶을 상징합니다. 상식적으로 전자보다 후자가 낫지만, 솔로몬은 ‘다투는 여인’ 때문에 전자가 낫다고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돕고 살면, 초가삼간도 천국같으나, 늘 분쟁하고 다투면 아무리 유복한 환경이더라도 남편은 오히려 떨어져 혼자 지내고자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본 잠언은 먼저 아내를 향해 교훈하고자 합니다. 즉, 가정 화목의 비결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남편의 권위를 존중해 주면서 가정을 세우는 것이지,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면 다툼만 일어나니 삼가야 한다!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아내를 얻은 자야 말로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18:22; 19:14). 그러나 그런 가정에는 언제나 남편은 사랑의 섬김을, 아내는 존경을 담은 순종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덕이 있는 아내는 그 남편에게 영광스런 면류관과 같으나, 부덕한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하는 것과 같다.” (잠언12:4,쉬운성경).  

시편 122: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본 시편은 긴 순례의 여정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 내에 들어온 감회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2). 시인은 메섹과 게달과 같은 ‘먼 나라’(120:5)의 ‘이방민족’들 틈에서 긴장하며 살다가, ‘형제와 친구’들(8)이 사는 ‘집’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는 감격에 찼습니다. 그는 잘 계획되고 건설된 예루살렘 성의 구조와 각 지파가 몰려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리고 다윗 가문을 통한 통치의 모습을(3-5) 보자 저절로 ‘평안과 복’을 위해 기도합니다(6-9). 예루살렘 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통일성’입니다. 성의 구조 자체도 그렇고(3), 각기 다른 지파들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한 분이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아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4).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임명한 왕을 통해 사건 사건이 바로 잡혀지는 장소에 와 있습니다((5).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세상에 속하여 있기에, 시인은 ‘화평과 번영 그리고 복’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온 세상에서 아주 다양한 주의 백성이 교회로 몰려들어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갖고, 한 성령님 안에서 한 주님과 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엡4:1-16). 따라서, ‘기쁨과 일치를 위한 기도’의 부르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시편 123: 1절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본 시편은 고난에 처한 시인의 심정과 믿음의 고백을 노래합니다. 121편의 순례자는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산보다 더 높은 분을 생각하고 이기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 조롱과 멸시에 둘러싸인 시인 역시 눈을 위로 돌려 같은 승리를 얻습니다. 실로, 시인의 언어와 기도는 암울한 환경을 뚫고 치솟아 올라, 오히려 그런 고난들을 충분히 포함하는 믿음의 넓이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15:3). 동일한 믿음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이어지기에,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2절에서 시인은 3중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종과 여종이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으로부터 필요한 양식, 휴식, 그리고 도움을 기대하는 간절한 눈길입니다. 신자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괴로움을 완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한 자에게 붙어 ‘조롱과 멸시’(4)를 피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신자의 길은 하나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끝으로,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43:3). 욕은 물론 조롱과 멸시의 말은 살인과 다름없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5:22).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말에는 은혜의 소금을 쳐서 맛을 내야 할 것입니다.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멸시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 (시편123:4, 새번역).

매일묵상(2023/1/16-20)

잠언21:6절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새번역)

악함이란 교만을 등불로 삼고(4), 폭력과 구부러진 말로 표현하며(7-8), 은혜가 없고 타인의 파멸을 갈망합니다(10). 그들은 거만하며(24), 종교적이나 위선되고(27), 뻔뻔하나 반성하지 않습니다(29). 5절의 ‘성급한 사람’은 6절에서 ‘속여서 재산을 모든 사람’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가난, 결핍’은 ‘죽음과 안개’로 귀결됩니다. 본 절은, ‘속여서 모은 재산’ 자체가 ‘속여 취한 자’를 속인다는 역설을 교훈합니다. 불의한 재물은 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기에, “계획하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5절로 돌아가야 하며, 그 길은 교만을 버리고, 정의과 공평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경외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기에, 악인의 형통을 미워하시고(4), 악인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구약은, 제비를 뽑아 결정하는 것 같은 섭리(6), 혹은 대리자인 왕(지도자)을 통해 집행하시거나(1), 직접 하늘에서 집행하시는 경우 등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범죄자 아간을 찾아낼 때 여호수아가 사용한 방법이고, 둘째는 페르샤 왕으로 하만을 처단하게 하신 경우이며,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멸망시킨 경우입니다. 물론, 악인이 회개하면 주님은 긍휼히 여기사 용서하시지만,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그 반면 주님이 미워하는 자는 잠시 그 형통을 더 누리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끝장입니다 (시편73:18,19). 근심은 탐욕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근심을 주님 손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공급을 신뢰한 뒤, 삶을 계획하고 부지런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눅12:29).  

잠언21:7 절
“악인의 폭력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가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은 ‘속이는 자’(6)와 ‘폭력을 행하는 자’(7)로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멸망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그들이 알지만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여, 정의와 공의의 주님과 원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니’는, 히브리어 동사 ‘가라르’의 번역으로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동작을 묘사합니다. 역사를 보면, 주님은 악인이 재물과 권력을 위해 펼쳐놓은 그물에 악인 자신이 걸려들어 멸망당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세운 그 장대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처형된 사례나, 또, 페르샤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도록 정한 그 날에 칙령이 바뀌어, 오히려 유대인의 대적들이 집단 처형된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악인도 회개하여 바르게 살면 생명을 얻습니다. 잠언은 이점을 긍정하지만, 어떻게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야합니다.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가 오자, 베드로는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칼을 가진 모든 자들은 칼로 망한다” 하신 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마26:52). 기적적 치유와 선함을 경험한 말고는 회개할 기회가 왔습니다. 다만, 선택은 말고의 몫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격한 갈등의 세상에 남겨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4,45)

잠언21:8 절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새번역)

8절은 3-7절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거만한 자(4), 성급한 자(5), 속이는 자(6), 폭력을 행하는 자(7)에 대하여 ‘죄인’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길은 이중성 때문에 ‘구부러졌습니다.’ 실로,’올바른 길’ ‘곧은 길’은 그들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누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냐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걷는 길(삶의 방식)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행실은 올바르고, 곧은 길을 걸어갑니다. 솔로몬은, ‘길’이란 은유 대신 ‘행실’이라고 적어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는 동시에, 그런 행실은 올바른 길을 걸어간 뒤에야 얻어지는 인격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죄인의 길’로 행한 전형이 아담이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길이었고, 그것은 다시 전 인류가 걸어간 길로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길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삶이기에 당연히 구부러질 수밖에 없고, 죄인이란 심판과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아담은 사망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로잡혀 전 세계로 흩어졌고, 모든 인류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에 반하여, ‘깨끗한 사람’이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신실한 양심의 소유자로서 바른 길,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길, 도덕의 길로 곧장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가운데 주의깊게 보시는 하나님의 칭찬은 그들의 참된 보물이며, 주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은 그들의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시편120: 1절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34편의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시의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시의 의미입니다. 15편의 시들은, 세 편씩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각 그룹마다 다음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고통의 상황(첫째), 주님의 권능(둘째), 주님 안에서 안전(셋째). 첫 번째 그룹의 시작인 120편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서 시인을 향한 중상모략을 언급합니다.  그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부르짖었고, 응답받았습니다(1,2). 시인은 이 경험을 통해 “환난을 당하면 기도하고 주님의 돌보심 속에 머물러라!”고 교훈합니다. 한편, 4절(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은 악인의 본질이나, 혹은 악인에 대한 확실한 보응을 의미할 수 있지만, ‘보복하지 말고 주님 손에 넘겨라’( 잠언20:22; 롬12:19)는 말씀에 귀착하는 면은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잘못, 거짓말, 속임 등으로 피해를 당하였을 경우, 사적인 복수 대신, 그 사안을 주님 손에 맡기고 거기서 떠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화를 가질 수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고 있는(5-7) 시인에게서 인내의 모습을 보게됩니다(5). ‘메섹’은 이스라엘 북방 한계 밖에, 게셀은 아라비아 광야 남동부에 있기 때문에, 거치른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지금 시인은 평화를 원하나, 세상은 독을 머금고 싸우려 합니다(7).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심판자이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시편121: 1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순례자의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요단 동쪽이나 팔레스틴 평야쪽에서 오르고 있다면, 가파른 산 길이 보이면서 큰 산들이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질문이 떠오릅니다. 저 산들 속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무사히 성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혹은 인생의 큰 산들이 가로막을 때 나를 지켜주실 분은 누구인가?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1). 이때 시인은 믿음의 눈을 들어 천지를 지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시인이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어떤 것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위협이 일어나도, 삶의 여정이 어려워도 그분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2). 심지어 하늘에 늘 떠 있는 해와 달 역시 그분의 섭리 하에 있기에 안전하게 순례의 여정, 인생의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6). 시인의 마음에는 큰 용기가 생겼고, “주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의 고백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합니다(3-8).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안전만은 확실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창조주에서 시인을 돌보시고 구출하시는 구속주로 역할이 바뀌어서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영혼을 지키시는 것 뿐만 아니라, 시인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실 ‘동반자’이십니다(8). 시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성부), 구속주이시고(성자), 우리와 영원토록 동행하시는 분(성령)임을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길이란 이렇게 안전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시인은 기쁨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매일묵상(2023/1/9-13)

잠언 21:3절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
(새번역)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이며, 21:3절은 본론의 시작입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한 능력의 주님(2)은, 사람의 외형적 행위 보다 그 이면을 중시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온전한 제사(예배)와 마음을 쏟는 찬송과 기도를 기뻐하시지만, 이런 외형적 예배보다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정의와 공평’이라는 윤리적 행동을 더 좋아하십니다. 문제는, 인간은 이를 분별하기 어려우나, 주님은 모두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주제를 분명히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제사와 의식 규정 보다 십계명을 먼저 명령하셨습니다. 호세아서는 아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인용 마12:7)고 못 박고,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6:7)며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구약의 제사 및 의식 규정은 폐지되었으나, 도덕규정은 단 하나도 폐지되지 않고 더욱 강화되었습니다(마517-20). 주님은 전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셨습니다(22:37-39). 왜냐하면 아무리 “공평과 정의”를 행한다고 생각하여도, 그 결과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충족하지 못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분별할 지혜를 갖고 삶의 목적과 사명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5:14, 새번역)

잠언21:4절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본 절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과대망상자들의 삶을 말합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다’는 어구는 그들의 심인성 요소를 보여줍니다. ‘눈이 높다’는 말은 ‘눈을 치켜 뜨다’는 의미로 타인을 경멸하는 외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잠언의 지혜는 이런 눈을 미워합니다. 또한, ‘마음이 교만하다’의 원어는 ‘마음을 넓히다’로서, ‘통제되지 않는, 염치없는 마음’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생각은 도덕적 경계가 없어 마치 하나님인양 행동합니다. 한편,  ‘형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니르’는 ‘경작’과 ‘등불’이라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만약 ‘경작’의 의미라면, 악인이 수행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죄’됨을 뜻하며,  만약, ‘등불’이라면, 악인은 교만을 자신을 인도하는 빛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반면 의인을 인도하는 등불은 주님의 말씀입니다(시편119:105). 무엇을 등불로 삼는지는 갈랫길에 접어들면 드러납니다. “모의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다”라는 모의봉격(毛義奉檄)의 고사가 있습니다. 전한 시대의 모의는 가난하였지만 학식과 효성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장봉이 흠모하여 찾아와 대화하는 중, 관청에서 갑자기 모의에게 벼슬을 내린다는 격문이 내려오자 모의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물러갔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의는 사직하였습니다. 장봉 역시 오해를 풀고 널리알려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효자를 인도하는 등불은 부귀나 효자라는 세간의 명성이 아니라 부모공경의 계명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야하겠습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언22:4)

잠언21:5절
“부지런한 사람의 계획은 반드시 이득을 얻지만, 성급한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5절의 ‘성급한 사람’이란 정직한 노동과 검소함이라는 희생이란 희생 없이 부를 얻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교만을 등불로 삼는 악인’(4)의 한 종류로서, 솔로몬은 부지런히 살려고 계획하는 사람과 대비시켜 그것이 어리석은 길임을 교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혜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삶의 틀로 삼고 창조적으로 계획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행동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이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부하게 되려는 자는 주님이 세우신 세상질서에 대한 생각없이 행동하기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득과 가난이란 단어는 샬롬의 측면이 반영된 것입니다. 반 루벤은 말합니다: “돈의 문제에서 성급함이란 탐욕을 내포하고(28:20), 언어에서 성급함은 생각이 모자람을 보여준다(29:20).” 이는 게으른 사람은 행동이 결여되어 있고, 성급한 사람은 생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진실된 길로 걸어가고, 판단은 명쾌합니다. 한편, ‘반드시’와 ‘뿐이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원어는 동 일하게 ‘아크’로서, 예외 없이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함을 내포합니다. 자신들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하는 자들은 그 기대에 반하여 투자한 이상의 이득(화평 등)을 얻고, 탐욕을 갖고 성급하게 행동에 옮기는 자들은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세상의 질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길은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은 흠 없이 살며,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잠언20:7,새번역)

시편119:161-168절 “신(שַׂ)”연
“권력자는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지만, 내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새번역)

‘신’ 연의 주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신실하게 행동하실 것을 호소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신실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기자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음을 선언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만을 두려워 하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161,168). 더 나아가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탈취물을 얻는 것’같이 즐거워하였고(162), 거짓을 미워하며 의로운 주의 율법을 사랑하였습니다(163). 이런 고백들이 나오는 이유는, 시인이 지금 이유 없이 권력자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어,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이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시인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지만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시인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면서(166), 그분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평화, 안전(민6:24-26), 그리고 구원을 간구합니다(165,166). 좋은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왕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보내고 정처 없는 피신생활을 택하였습니다. 한편, 161-62절에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과 ‘즐거움’의 역설적인 반응이 보이는데, 신자의 올바른 정서입니다 (86: 4,11 참조).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8:31b)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인 여부, 즉 주님의 말씀에 머무르는 여부를 알고자 한다면 시인이 고백한 정서가 우리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모두 아시니, 내가 주님의 증거와 법도를 지킵니다.”(시편119:168,새번역)

시편119:169-176절 ‘타우(תּ)’연
“주님,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새번역)

마지막 연인 ‘타우’ 연의 주제는 ‘방황하나 순종합니다!’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나 몰아닥친 환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신자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신실하셔서 언약대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시는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69-72절로서, 주님의  행동에 대한 요청입니다. 그것은 ‘깨우침’과 ‘구원’으로서, 시인은 ‘명철’을 받아(단9: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역경에서 구원의 길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께 드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자비를 위한 ‘부르짖음’과 ‘간구’만이 남아 있지만,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172). 왜냐하면, 말씀을 믿고 인내하는 시인에게 약속된 구원이 성취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은 진리이고, 이를 선택한 자신의 정당함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173-176절로서, 첫 부분의 주제를 반복합니다. 시인은 기도, 하나님의 말씀(율례, 계명, 법도,율법,규례 등)에 대한 헌신, 그리고 구원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난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에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한다는 고백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주님을 사랑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은 결과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119:176).

매일묵상(2023/01/4 – 6)

잠언21:2절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새번역)
본 잠언은 사람의 판단이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반면, 주님의 판단은 완전하고 공의로우심을 대조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근거로 판단하기에 불완전하나, 주님은 ‘마음’의 동기까지 꿰뚫어 보시므로 공의로우십니다. 동일한 교훈이 잠언16: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다만 각 절이 위치한 문맥이 다릅니다. 16:2절은 사람이 계획하나, 축복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3). 주님을 경외하고(동기), 주님의 뜻 안에서 그 계획을 펼쳐나가야(행동) 성공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1:2절은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다는 측면은 같으나, 주님은 당신의 대리자인 왕을 통해 축복한다는 교훈입니다. 왕(=지도자, 권한 있는 자)의 마음은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 주님은 왕과 그 신하들이 옳게 여기는 가치에 맞추어 행동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요약하면, ‘자기 기만’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주님을 감안하여 판단하라는 격려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삼상16:7). 장자 엘리압의 큰 키와 훌륭한 용모 때문에 사무엘은 “이 사람이 바로 사울 대신 왕이 될 자가 아닌가?” 생각하였으나, 주님은 “겉모습과 큰 키만 보지 말라. 나는 중심(마음)을 본다”고 하신 뒤, 막내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붓게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과 현자의 조언에 귀 기울이면, 분별력을 갖게될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갈6:7,새번역).

시편119:145-152절‘코프(ק)’ 연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145절)

‘코프’ 연의 주제는 “위기와 신자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기도, 고백, 결단, 헌신, 감사 등을 포함합니다. 이 연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님께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와 상응됩니다. 첫 부분(145-148)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모습입니다. 위기를 맞이한 시인은 전심으로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의 교훈을 지킬 것을 약속하며(145,146),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약속 성취를 고대합니다(147,148). 기도는 순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순종 없는 기도는 혼자 중얼거리고 외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심히 근심하며 하루 종일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들의 패배는 불순종(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순종을 위해서는 계명이 전제되며, 그렇지 않은 기도는 헛될 뿐입니다. 둘째 부분(149-152)은 가까이 오신 하나님입니다. 위기가 짙어질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계십니다. 원수는 해를 가하려고 주님은 구원을 위해 가까이 오십니다. 시인이 의지하는 주님은 약속대로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주신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기반을 두는 증거는 영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지금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 증거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2절,새번역).   

시편119:153-160절‘레쉬(ר)’ 연
“내가 주님의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내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153절,새번역)

‘레쉬’ 연의 주제는 ‘신실함과 구원’입니다. 세 가지 신실한 대상이 보입니다: 주님의 법(말씀)을 잊지 않은 신실한 시인(153), 언약, 인자, 그리고 구원에 신실하신 주님(154,156,159) 그리고 결코 변치 않는 신실한 그 말씀(160). 그러나 인간의 신실함은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시인이 신실하게 살려고 하여도, 인생에는 고난이 존재하며, 악하고 신실치 못한 사람들로 인한 위협 때문에 불안정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야망을 가진 푸틴에 의해 침공당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부르짖는 것 같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약속 그리고 결정에 근거한 갱신과 구원이 계속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건지소서’ ‘살리소서’와 같이, 구원을 위한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리는데, 이는 ‘레쉬’ 연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것은 또 우리가 고난을 통과할 때 드려져야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다리고 그분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근거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적 관계이고, 이 언약적 관계는 주님의 피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이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Yes’가 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후1:20). 끝으로, 본 연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언하면서 마칩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은 모두 영원합니다” (160절,새번역)


매일묵상(2022/12/26-30)

잠언20:29절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20:29-21:31의 주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구조는 도입부(20:29-21:2), 본문(21:3-29), 그리고 결론(21:30-31)입니다. ‘가르침’을 강조하는 도입부 중 첫째 구절(29)은, 젊은 자와 노인에게 각각 영광된 것을 관찰, 비교하면서 젊은 자들에게 지혜를 겸비하라고 장려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젊음과 힘을 믿고 뛰어들다가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 이윽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지혜로서, ‘백발’로 표현되었습니다. 백발은 지혜로운 노인을 말하며, 고대 근동에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들의 일생의 경험은 지식으로 쌓였고, 그들의 인생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백발에 이를 때까지, 역경 가운데서도 자녀들을 양육하며, 생활터전을 확립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에 덕을 끼치고 아름다운 열매를 남깁니다. 이는 힘과 지혜가 어우러진 열매이자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입니다. 젊은 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힘만 의지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르호보암 왕 같이 실패할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 왕이 된 르호보암이 왕국의 문제를 잘 아는 원로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교만하게 말하자, 북부의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으며, 남북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도, 미덕 없는 백발,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지지 못한 백발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 잠언은, “인생이란, 좋은 것(=힘)이 더 나은 것(백발=지혜)으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이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16:31)

잠언20: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가르침의 중요성’의 관점에서 29절과 30절은 보완적 관계가 있습니다. 29절은 젊은 자들이 ‘백발의 지혜’를 얻을 것을 권고하나, 본 절은 권고만으로 안될 때, 신체적 징계를 통해 교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잘못에 대하여 고통을 받으면 행동을 고칠 뿐만 아니라, 성숙하게 됩니다(3:11-12). 어린 아이들이야 부모가 매를 들어 교정한다고 하나, 다 큰 청년이나 어른들의 경우 누가 회초리를 들겠습니까? 하나님 혹은 그분의 대리자로서 왕과 같은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를 사용하여 섭리 가운데 교훈하고, 왕은 직접적인 형벌이나 배상 명령을 통해 바로잡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악을 없애는 절대적인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징계할 수 없는 왕(혹은 지도자)은 누가 바로잡겠습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은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계속 불순종하자, 블레셋 군대의 칼을 통해 죽이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징계가 아니라 범죄자의 처단이었습니다. 이 반면 다윗 왕은 늘 순종하다가 간음과 살인 죄를 범하자, 낳은 아들 중 첫째, 둘째, 셋째까지 모두 살해당했고, 왕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던 솔로몬 왕이 말년에 우상숭배를 감행하자 주님의 뜻을 따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평화의 사람 솔로몬은 근심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왕기에 기록된 왕으로서, 흠이 없는 왕은 하나도 없으며, 주님은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반역과 심판의 역사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고전10:11)

잠언21:1절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봇물’이란 ‘보에 괸 물 혹은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을 의미합니다. 가뭄 때에는 농부들 사이에 물꼬로 인한 다툼이 많이 발생합니다. 농부 자신의 논에 물을 대게 하려는 것이죠! 물론 홍수 시는 반대입니다. 이와 같이 농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계획하듯이, 주님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역사를 관장하십니다. 즉 왕(=지도자)의 마음은 그분의 손에 좌우되며 역사는  당신의 뜻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뜻을 항거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선지자들이 밝히 기록하여 증언는데, 구약성경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특히 역사서(여호수아, 사무엘, 열왕기, 역대,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선지서들은 역사의 배후에서 당신의 뜻을 집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명확히 묘사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굽 왕 파라오와 페르샤 왕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많은 이적과 재앙을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게 하시고, 홍해까지 따라와 주님을 대항하려는 그들을 전부 멸하셨습니다(출10:1-2). 파라오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였습니다. 또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포로로 잡혀온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에스라1:1-4). 그런데 고레스 왕에 의한 바벨론 정복이나 유대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시겠다는 선포는 이미 170년 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바였습니다 (사44:28-45:1-6, 13). 이를 알고 주님을 경외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지혜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새번역)  

시편119:137-144절‘차데(צַ)’ 연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7절)

‘차데’ 연의 주제는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말씀 안에서 완전하고 영원히 표현하시며, 또 말씀 속에 와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기에, 그분이 하신 말씀(약속)은 의롭습니다(137). 따라서, 주님이 주신 ‘증거들’ 역시 의롭고(138,144), 영원합니다(142). 주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의 인격, 마음, 판단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 높은 곳이나, 바다 깊은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통해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의로운 말씀에 사로잡혔고(139),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실로,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철저하게 검증된 진실한 증거입니다(140).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에 비하면, 지위(미천)와 평판(멸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141). 성취되는 것은 ‘의로우신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이지, 인간의 의견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그분의 말씀에서 즐거움을 얻어, 고난 속에서 살아갈 힘을 갖습니다(143). 고난이 어려운 것은 고통과 장래에 대한 절망 때문인데, 주님을 신뢰하는 시인은 오히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합니다(롬5:3-5). 그러므로, 시인은 주님을 시험하지 않고, 그 대신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갖도록 기도의 과녁을 맞추고, 신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소망, 사랑의 삶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길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119:144).   

매일묵상(2022/12/19-23)

마태복음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월 25일은 성탄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주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 즉 메시야의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들어오셨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이 사명은 33년 후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길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좌우편에 앉게 하여달라고 어머니를 통해 간청을 드릴 때 주님이 직접 선포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고 확증하신 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제자들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조차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정도라면, 성육신은 불필요하고, 미가엘 천사만 보내면 족합니다. 아무리 로마를 몰아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죄와 사망은 물론, 이를 근거로 죄를 짓게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심판과 사망입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마태복음1:24,25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탄절이 오면, 우리는 두 분을 꼭 기억하게 됩니다. 모친 마리아와 양부 요셉입니다. 두 분 모두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한 동네 나사렛의 청년으로,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통상의 약혼 기간은 1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3개월 동안 유대에 갔다온 뒤, 임신한 정황이 나타나자 의로운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고자 하였습니다(1:19). 마리아 역시 설명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꿈을 통해 개입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꿈은 이 당시 계시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요지는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며, 그녀가 낳을 아들은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의 성취이니 아내로 데리고 와라”(1:20-23)는 분부였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였습니다만, 일평생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같이 우리의 믿음의 삶은 이해받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의하여 초자연적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는 점이, 단순한 도덕적 순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께서 12살 될 때까지만 나타납니다. 사람이 알기에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만은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맏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중생).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누가복음 1: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은 모친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정혼한 사이로서 통상의 행복을 꿈꾸었지만, 이보다 더 큰 행복을 계획하신 하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실 메시야를 보내시고자 개입하셨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2,33).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하여도, 잉태한 사실 자체와 그 낳은 아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키울 것인가는 심각한 과제였습니다. 정혼자 요셉의 순종 역시 요구되는 순간입니다(38). 두 분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어려운 세상살이에도 메시야를 키우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 후 마리아는 요셉의 자녀를 여러 명 낳았고, 주님은 형제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나셨습니다. 예수가 계신 마리아의 가정이 부자나 권력자가 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들은 성전의 헌물로 드렸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엄청난 계시와 보물들을 받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어 남편 요셉과 장남 예수의 목수의 일을 통해 평범하게 살아갔습니다(막6:1-6).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섬김. 외형적으로는 똑같아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가 계신 사람과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요한복음 7:5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은 양부 요셉과 마리아의 소생으로 4명의 남동생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과 누이들이 있었습니다(마13:55,56; 막6:3). 물론 세상에서 보기에는 예수님조차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중 야고보(행1:14; 15:13; 21:18; 고전15:7; 갈1:19; 2:9)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수십 년 동안을 가족으로 살았고, 요한의 침례 후 행하신 많은 표적과 뛰어난 가르침을 보고 들었습니다(요7:4).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에 주님을 붙잡으러 친척들이 나섰을 때, 모친과 동생들 역시 염려되어 설교하시는 집의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막3:21, 31-32)). 어떻게 보면 수긍이 갑니다. 표적과 가르침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언된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선언은 육신으로 보면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눅4:16-30). 그러나 주님은 친절하셨습니다(요7:7-9). 그들 역시 당신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목격한 모친 마리아는 물론 모든 동생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고전15:7), 승천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서 당신의 형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 순교하였고, 야고보서도 썼으며, 유다서는 역시 주의 동생 유다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셔야 가질 수 있습니다(고전2:12; 중생).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친절히 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식, 재산, 권력, 명예, 건강, 친구들 등이 있어도, “공연히 구체적인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에 대하여는 형사상, 민사상 책임 모두 다 인정되어 처벌을 받습니다(명예훼손죄-형법307조). 그러나 이 죄는 형법전의 수백 가지 중 오직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이 수백 가지 죄 중 하나만 범해도 평생 두려움의 종이 됩니다. 벗어나는 방법은 죄값을 치루거나, 대통령이 사면·복권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면·복권의 행사가 주님이 베푸시는 속죄와 칭의로 인한 구원과 유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요5:29;롬3:23). 인간이 참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피조물인 우상을 섬기거나 자신을 주인으로 둠으로써, 마귀의 손아귀에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간질시키거나(마귀의 원어인 ‘디아볼로’ 의 의미), 욕망을 부추키거나, 죽음의 논리로 위협하여 인간으로 죄의 길, 탐욕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요일5:19). 하나님은 너무나 인간이 불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진리,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요일5:20). 그리고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요3:16; 롬3:24-26).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와 같이 혈육에 함께 속하신 이유이며,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조차 내려와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