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8-24절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안식일 계명의 준수 여부였습니다. 주님은 여러 경우에 안식일이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불치의 질병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위해 200페이지나 되는 책이 만들어져 있으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숨만 쉬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선을 포함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문자적으로 계명을 지켰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의 더 중한 바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저버림으로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는데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는 모세율법 자체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을 해설하여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한 미쉬나에는 저촉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바로 미쉬나에 따른 규정을 예수님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여 왔는바,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미쉬나에서 금지하는 여러 규정들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례가 안식일 규정 위에 있다고 해석하여 유대인들은 할례를 안식일에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한편,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동안이나 불치의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은 아무리 경건하여도 그런 안식을 못 누린다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 돌보아 주셔야 한다는 언약의 취지는 무색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이 사람의 병을 치유하여 안식을 누리게 함으로, 할례의 언약은 물론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를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영생에 대한 좋은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성취와 그리스도(1)
요한복음 19-24절
지금 초막절 성전에 모여 있는 유대 지도층과 수 많은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된 이유가 그들이 모세율법에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없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모세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들이 모세율법에 불순종한다고 예수께서 질타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논지는 첫째, 그들은 서로 간에 모세율법을 잘 수행하였다는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꽉 들어찼지, 유일하신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하는 참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 둘째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을 죽이려는 증오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마귀의 증오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마귀의 자식들임이 뒤에 밝혀질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병자의 육신을 건전하게 하심으로 일하지 말하는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불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5:17). 그런 발단이 된 것이 바로 요한복음 5장에서 성전 북쪽성 바깥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이나 누워 있던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자, 자신을 둘러싼 같은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벌써 일년도 더 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이나 안식일 규정이 적용되지, 산짐승, 들소 등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참새가 안식일에 먹을 것을 찾아 다닌들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 역시 안식일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우주는 존재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 안식일 규정은 적용되기도 하고 적용되지 않기도 하는 것은 그분이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는 안식일이 와도 안식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인간의 생명을 보전하시는 일을 하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십계명의 구성이 이렇게 깊습니다.
매일묵상(2021/07/19 – 23)
2021/07/19
시편36편 – “한 분 하나님 그리고 두 가지 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10절, 새번역)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A (1절) 악인과 그의 철학
B(2-4절) 악인의 특성
C(5-8절) 주님의 성품
B’(9-11절)주님을 아는 자들
A’(12절) 악인의 운명
이 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이 두 종류의 사람과 두 종류의 운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쪽은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다른 쪽은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갈래길에서 각자의 선택을 함으로 자신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갈래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계시한 뜻을 거부하면 우리는 마음의 욕망을 따라 살게 되고, 결국 무가치한 인생으로 귀착됩니다. 이 반면, 계시를 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 광명, 공급하심 그리고 보호하심을 누릴 것입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리스도인이자 리투아니아 총영사인 스기하라 치우네(40살)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이미 게슈타포에게서 탈출한 유대인들에게 비자발급을 중단할 것을 명령받았지만, 고민 끝에 불복종합니다. 그리고 28일 동안 쉬지않고 비자를 발급하여 6천명의 생명을 구하고, 토교로 소환된 직후 사직 당합니다. 그는 일생 전구를 팔면서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2021/07/20
시편 37편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11절)
이 시는 다윗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시로서, 신자의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하며, 어조나 문체는 잠언에 유사하고,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주님의 보호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고뇌에 찬 긴장과 함께 시작하는데, 그 긴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의인’과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는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며 신앙의 삶에서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한편, 이 시의 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히브리어 알파벹 순서를 따라 작성되었고, 네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절 악인의 번영 – 온유해라
12-20절 악인의 적대감 – 주님의 돌보심을 믿어라
21-31절 악인의 거짓된 행동 – 주님의 심판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라
32-40절 악인의 운명 –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다.
이 시에 맞는 악인과 의인은 단연 왕 사울과 신하 다윗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종의 갈래길에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하고(사무엘상 15장의 아말렉과의 전투 사건), 골리앗을 죽인 능력있는 신하 다윗을 까닭없이 질투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이 반면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받는 절박한 순간에도 순종의 갈래길에서 의를 행합니다. 결국 사울과 그 가문은 멸망 당하고, 주님은 의로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사 왕으로 삼습니다. 온유하게 주님의 뜻을 따른 다윗이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팔복 중 3번 째 말씀(마5:5)을 체험하고, 본 시로 아주 훌륭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5:5, 새번역).
2021/07/21
잠언14:8-15절 : 구조와 메시지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8절, 새번역)
잠언14장 8-15절은 ‘속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핵심된 교훈은 “보이는대로 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솔로몬은 이 경고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11절을 중심에 두고 교차대구의 구조를 사용합니다. 즉, 8절과 15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9절과 14절은 “죄에 대한 보상”, 10절과 13절은 “마음의 비밀”, 그리고 중심에 놓인 11절,12절은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번영”을 말하며 “죽음에 이르는 속이는 길”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쌍을 이루는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절은 ‘미련한 사람이 자기를 속인다’라고 하나,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15절이 ‘미련한 자는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순진성을 지적함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3절은 어떤 사람도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행복의 외양은 기만적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9절은 악인은 속건제가 요구하는 보상을 피해갈 수 있다고 믿지만, 14절에서는 주님의 응보가 확실함을 선언합니다.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즉각적으로 벌이 내리지 않기에 악인은 속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회초리는 확실하기에, 악인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심을 이루는 11절, 12절은 악인의 눈에 확 뜨이는 성공은 짧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번영은 항구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망의 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주는 교훈’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잠언14: 15절, 새번역)
2021/07/22
잠언14: 9절 :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9절, 새번역)
이 구절은 ‘어리석음/바보”라는 주제어를 통해 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보들은 속고 속이면서 이득을 취하기에(8절), 관계회복을 의미하는 속죄제사를 경멸합니다(9절). “속죄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샴’으로 ‘속건제사’를 의미합니다. “속죄제사”와 달리 “속건제사”는 거짓맹세, 도둑질, 그리고 속여 재산상 이득을 보는 경우를 포함하며, 이 경우 원물에 20%를 더하여 배상하고, 제물을 드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함 받습니다. 본 잠언은 손해를 가하고도 배상하기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물론 이 표현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받아들이고 호의를 베푼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실로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들 사이에서 샬롬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은 죄의식을 불러 일으킬 상황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만약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에 합당한 배상을 행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을 행하고도 배상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우습게 여김으로, 하나님과 이웃들 사이에서 화평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사랑 가운데 화합을 이루려고 하기에 그 태도는 어리석은 자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 회복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이 지향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2021/07/23
잠언14: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만 알고, 마음의 기쁨도 남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새번역) 마음의 ‘고통과 기쁨’이란 인간의 감정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이며, 타인은 모르고 오직 당해 사건의 당사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외적 환경이 있지만, 만약 그런 외양만 감안한다면,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서적, 지성적, 종교적 그리고 도적적 움직임은 너무나 복합적이고도 내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경험할 수도, 타인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인간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풍족하였고, 두 명의 부인을 둔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잉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매우 괴로웠으며, 또 한 명의 부인은 이런 한나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남편은 한나의 마음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주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잠언은 각 개인이 가지는 존엄성과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타인의 심정도 헤아릴 것입니다. 이 반면 만약 우리가 타인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한나와 같이 하늘에 계신 자비하신 대제사장인 우리 주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히4:15-16). 이와 동시에 우리는 타인 특히 배우자를 배려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지도를 만들어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하나님 중심의 마음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 7장16-18절
AD29년 10월 초 장막절 중간이 되어 돌연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시는 30 초반의 갈릴리의 청년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율법사 등을 포함한 유대 전 지식층 사이에 관전자인 대중을 앞에 두고 흥미진진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싸움은개인이죽느냐사느냐정도가아니라, 민족의운명이달려있는토론이고, 더나아가각개인의영원한운명이달려있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들이 매일 암송하는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치면서, 엄청난 구원의 표적들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에 대한 불순종 때문에 멸망받았는데, 하물며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어도, 창조주에 대한 순종을 거부한다면 그 벌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예수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표적이외에도, 하나님 중심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가르친 교훈을 행하면 알 수 있다고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분의 교훈을 순종하면 분별력이 얻어집니다. 그것은 좋은 요리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믿고 사랑하는 자만이 그분의 교훈을 실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자아중심적인 인간본성과는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어서, 주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 모든 자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매일묵상(2021/07/12 – 16)
2021/07/12
시편34편 – 다윗의 교훈(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22절, 새번역).
이 시의 두 번째 단락(11-22절)은 3가지 비결을 말합니다: (1) 선한 삶의 비결(11-14절)은 주님을 경외하는데 있으며, 그 방법은 우리의 혀를 지키고(13), ‘악을 버리겠다’는 자기 부정의 도덕적 목표와 ‘선을 행하겠다’는 긍정적인 도덕적 목표를 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14). (2) 문제에 직면하는 비결(15-18절)은, 문제의 시작과 함께 기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의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당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얻기 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는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15). (3)구원의 비결(19-22절)은 신자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인)은 하나님과 친족 구속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산다고 고통 없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19), 보호하시고(20), 우리 편에 서시고(21), 우리에게 대가가 요구되는 것은 전부 지불하시고(22), 자신을 안전한 피난처로 제공하십니다(22). 이런 관계와 경험은 다윗의 주님되신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신약에 와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신자의 친족구속자(고엘)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2021/07/13
시편35편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분발하여 일어나셔서, 재판을 여시고 시비를 가려 주십시오.”(23절, 새번역)
본 시는 체계적인 시라기 보다, 적의와 고난이 끝이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감정이 끓어 올라 지은 시입니다. 배경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편집광적으로 증오하던 그 오랜 기간이 적당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사울에게 알랑거리며, 부당하게 다윗의 고난을 악화시켰습니다. 34편처럼, 이런 상황의 유일한 해법은 기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응답을 주신 34편에서의 고백과 달리(34:6), 현재 당하는 고난은 끈질긴 기도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필요를 주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 시는 3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뜻 밖의 위험에 처하여 드리는 기도(1-10절) (2) 부당하게 당하는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1-18절) (3) 악의가 가득한 위험 속에서 드리는 기도(19-28절). 각 단락은 반복하여 시편기자 자신을 위해 행동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당한 상황을 당할 경우, 본 시편은 좋은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 주님 역시 “까닭 없이 나를 미워 하는 자들”에 관한 내용을(19절)을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밤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요15:25) 명백한 이유 없이 고난 당하는 자들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당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경건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에 힘쓰면 우리 신앙에 큰 유익으로 돌아오며, 우리는 사람들을 얻을 것입니다. 마치 여자가 해산하여 자녀를 얻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 새번역).
2021/0714
잠언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지혜는 거만한 자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만한 자도 지혜를 추구하지만, 발견하여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들이 찾지 못하는 지혜는 경건과 도덕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말합니다. 한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죽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섬기려는 도덕적 미덕이 결여 됨으로써, 정작 자신이 지혜롭다고 소리를 쳐도 그에게서 배울 것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명철(明哲-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 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습니다. 심지어 한 마디의 말을 들어도 깨닫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명철”로 번역된 원어는 ‘빈(discerning)’ 으로 단지 두뇌가 명석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신중하게 모든 것을 결정하고 민첩하게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명철한 자의 대명사는 솔로몬입니다. 약관의 나이가 안되어 왕 위에 오른 솔로몬은 왕국을 견고히 세웠으나, 통치자로서 부족함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마음에 소원이 있음을 아신 주님은 나타나셔서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왕이 되었으나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고백한 솔로몬은 백성의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듣는 마음”을 구하였고,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17:6).
2021/07/15
잠언14:7
“미련한 사람의 앞을 떠나라. 네가 그의 말에서 지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젊은이들에게 바보들의 교훈을 멀리하라고 강력히 충고합니다. 이런 충고는 이미 언급한 13:27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는 교훈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바보가 아닙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는 매우 지혜롭다는 의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그 말과 행위 속에서 자신의 미련함을 스스로 표현합니다. 만약 우리가 미련한 자임을 보고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리석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미련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14장은 바보의 특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적절한 행동과 말로 가정이나 관계를 파괴하며(1절), 상황파악을 못해 파멸을 자초하고(3절), 스스로 어리석음 속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고(6, 18, 24절), 스스로 어리석음을 표현하고(7절), 스스로를 속이고(8절), 거만하여 경건함을 조롱하고(9절), 모든 말을 쉽사리 믿고(15절), 경솔하며(16절), 음모를 꾸미거나 툭 하면 화를 내어 일을 그릇치고(17, 29절), 결국에는 자승자박하게 됩니다(33절). 특히 바보 중의 바보는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거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거나(시14:1), 혹은 자신은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바보들을 만나게 된다면 신속히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얻을 도덕적 영적지식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2021/07/16
잠언14:8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새번역)
이 구절은 자기 행위의 결과를 주목하는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대조함으로써, ‘속임’에 관한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행위와 운명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의 문제들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지금 잠언은 잘 배우고(6절) 좋은 교사를 선택하라는(7절) 훈계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통제하라는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한편, 본 잠언의 주어는 댓구를 이루는데 반해 –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와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 술어들 – ‘자기의 길을 주의한다’와 ‘속인다’ – 사이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숨어 있는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한 댓구가 이루어지도록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의 길에 주의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과 남을 해치는 속임수를 피한다.” 즉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도덕적 지혜를 따라 발걸음을 선택함으로 자신과 타인의 확실한 삶을 보장하지만, 바보들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하여 타인의 희생을 꾀하다가, 뜻하지 않게 자신도 희생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외양적인 필요와 결과만 생각하지 않고, 그 이면을 통찰하고는 그 길이 과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심사숙고합니다. 경건과 도덕의 비법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진심으로 구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요7:18, 새번역)
매일묵상(2021/07/5 – 9)
2021/07/5
잠언14: 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본 절은 1절과 2절이 추상적으로 표현한 지혜를 대조법을 사용하여 언어 사용에 적용합니다. 앞 부분은 거만한 바보가 자신의 말 때문에 매를 맞는 모습을, 뒷 부분은 지혜자가 자신의 말로 인해 생명이나 재물을 보호하게 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은 바보의 경우 ‘입’이라는 단어를, 지혜자의 말은 ‘입술’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입 – mouth’ 안에는 혀가 있습니다. 그 혀는 말할 때 입 안을 이리저리 치는데 마치 막대기가 자신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바보가 교만한 말을 하는 것은 자만심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쓸데 없는 고통을 자초합니다. 실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신임을 보여줍니다. 한편, 솔로몬은 입술이 다물어진 모습을 보고 슬기로운 자들이 보여준 절제있고 통제된 언어사용의 경험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주의깊게 할 말을 선택하여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실수일지라도 분별없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분노하며, 잘못하면 큰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신자들로 구성된 축구대회에서 바람같이 공을 몰고 가자 의도적 태클이 들어왔고, 심하게 넘어져 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후에 그 신자는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의도성이 없다는 등 변명하는 말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물며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할 목적으로 말하는 경우 – 진실로 어리석은 자임 – 해를 당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12:18, 새번역).
2021/07/6
잠언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1절에 집을 세우고 허는 것으로 표현된 지혜와 어리석음의 추상적인 의미는 본 절에서는 사려깊게 산업을 선택하고 투자하는 경제적 활동으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본 절은 “비록 농부는 황소를 쓰지 않고 스스로 일함으로써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리석은 결정이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잠언은 매우 짧지만, 히브리 원문은 번뜩이는 문학적 기교를 담고 있습니다(키에스틱 구조). 즉 문장의 처음과 나중은 ‘소’라는 단어, 가운데는 ‘소’가 미치는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바르-깨끗함”과 “로브-많다”(철자의 순서가 반대임)를 연 이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수입의 원천이 되는 산업에 사려깊게 투자할 때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농업사회에서 소로 대표되는 가축들은 쟁기나 마차를 끌고 타작도 하여 노동을 크게 절감시키기 때문입니다. 소 한마리도 그런데 하물며 12겨리 즉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종들과 함께 열 두 고랑을 동시에 간 선지자 엘리사의 집은 매우 부유하였을 것입니다(왕상19:19). 혼자 노력하여 성공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이 들고 어렵더라도 서로 힘을 합쳐야 큰 성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 역시 공동 연구를 하며, 사업을 할 때도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결합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계에 지능을 달아주는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는 거미형 인간 즉 여러 분야를 연결하여 네트웤을 만들 수 있는 융복합형 인재를 요구하며, 융복합형 인재의 필수 자질은 서로 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필요성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14:24).
2021/07/7
잠언 14:5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5절은 3절과 같이 ‘말하기’를 다루나, 증인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를 다룹니다. 히브리 원문은 4절과 같은 문학적 기교(키에스틱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실한 증인 – no거짓말 – 거짓말 – 거짓 증인. 지금 본 잠언이 전제하는 상황은 법정입니다. 한 측은 피해를 입었다고 고소하며, 또 다른 측은 그런 일이 없다고 방어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따라서 증거 없이 재판관은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지문, DNA 검사, CCTV 영상 등 많은 증거자료가 있으나, 3천년 전 솔로몬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증인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이 십계명 안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인의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은 증인의 인격내지 성품을 보고 진실 여부를 판단하게 됩니다. 실로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마7:17-18). 증인석에 앉을 때, 신실한 증인은 간청, 뇌물, 혹은 약속의 제시나 심지어 위협을 받더라도 진실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후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하셨다는 성서의 기록이 참됨을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증언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항상 만나고 있으며, 그분의 통치를 섭리 가운데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요15:26, 새번역).
2021/07/8
시편34편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4절, 새번역)
이 시는 깨진 아크로스틱(알파벹) 패턴입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시작은 히브리어의 자음 22개의 순서대로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등이 등장하지만, 한 문자는 사용되지 않았고, 다른 문자는 두 번씩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예측불허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때때로 찾아 오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을 회상하고 답을 줍니다. 본 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상 21:10-14 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군대장관과 사위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도망쳐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왕을 아비멜렉으로 부름)에게 망명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의 가치를 알아보고 구류합니다. 또 다시 위기에 처한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체하여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주의할 점은 다윗이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서의 기사만 보았더라면 그런 생각도 가능하나, 본 시편에서 옛일을 회고해 보는 다윗의 심정을 읽으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도망칠 수 있었던 비결은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4절)…..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6절)…”에 있습니다. 즉 다윗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건져내셨고(4절), 구원해 주셨기(6절)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시편34:8, 새번역).
2021/07/9
시편34편 –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한 지혜로운 교훈(1)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9절, 새번역)
이 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10절은 경험이 주는 교훈으로서, 주로 다윗 자신의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11-22절은 삶을 어떻게 다루고 위기를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를 교훈합니다. 오늘은 첫 부분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자랑할 것이니…”(1-2절)라는 대목은 심지어 ‘아비멜렉의 손아귀에 떨어져서도’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상황을 겪는 인생의 과정에서 신자의 참된 반응은 명민함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무한한 능력의 주님을 ‘찬양’하고 ‘자랑’ 하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아기스에게 망명하였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심히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마음이 가난하게 되었고, 간절히 기도드려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진리를 체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그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를 둘러 진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그 천사’는 나중에 도성인신하실 우리 주님의 구약적 표현이며, ‘둘러 진치다’는 말은 그분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지상을 순례하시고자 이동식 집에 거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신자들이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분에게 피할 것(8절)을 교훈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 두려움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과 같은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 중심의 마음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16-18절
AD29년 10월 초 초막절을 맞이하여 비밀리에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신 주님은 명절 중간이 되자, 돌연 성전에 올라가셔서 모여 있는 수 많은 유대지도층과 군중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교훈의 핵심은 당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왔다. 이제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면 그는 죄사함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당연히 이 교훈과 선언은 예수님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라는 메시지가 참임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표적이라는 신임장을 여러 번 거듭하여 보여주셨고, 그 표적의 최종판이 부활입니다. 또한 모세율법을 온전히 해석하여 참다운 가르침을 주셨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교훈에 관한 진리는 순종하여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석양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맹인에게 알려준들 볼 수 없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로 보건데 순종은 영적 지식을 얻게 하는 기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중보자 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부르짖게 됩니다.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 부르짖는 기도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풍성하게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하늘에 그냥 계셔도 하나님으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분인데, 육신을 입고 내려 오심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된 주와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9 – 18절
AD 29년 10월 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든 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관련하여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반대하는 유대 당국자들을 두려워 하여 드러나게 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그후 60년 간 계속되다가 AD90 년 유대인들은 얌니아에서 모여 회당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인들 축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을 반영되어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한편, 비밀리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은 명절 중간이 되자 갑자기 성전에 올라가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가르친다고 선언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물론 그 가르침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만, 해석의 권위는 하나님의 사도요 아들로서의 자격입니다. 그리고 그 자격을 입증하는 신분증은 주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표적들입니다. 성전에 모여 있던 모든 유대학자들과 지도층들은 그 해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말라기 3장 1절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려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매일묵상(2021/06/28 – 07/02)
2021/06/28
시편32편
“너희는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아라.” (9절,새번역)
시편32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시는 7개의 참회의 시편들(6; 32; 38; 51; 102; 130; 143) 중 하나이며, 이 시편을 통해 사죄의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참회 뿐만 아니라 감사와 지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훈적 요소를 지혜의 문맥에 삽입하여 죄의 고백을 다룹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참회란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으로 고백,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교훈)에 문을 열고 순종하는 모습을 수반하여야 합니다. 이 시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축복(1-2절)은 슬픔, 고백, 그리고 용서의 경험을 전제합니다(3-5절). 용서를 경험한 경건한 자들은 주님께 피난처를 구할 용기를 갖습니다(6-7절).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그 교훈을 마음에 새깁니다(8-10절). 마지막 절은 결론에 합당한데, 다윗은 의로운 모든 자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기를 요청합니다(11절). 성서에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체득된 도덕적 지혜가 삶에 배어 있어 하나님의 뜻이 열매맺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이 얻는 도덕적 지혜는 주님의 징계를 통해 옵니다(잠언3:11-12). 그들은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기에 분별력 없는 노새나 말로 상징되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워지시기를 부끄러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9-10a)
2021/06/29
잠언13:25
“의인은 배불리 먹지만, 악인은 배를 주린다”(새번역)
본 잠언은 13장 2-4절에서 이미 언급한 주제, 즉 의로운 자의 욕망은 풍성하게 채워지지만, 악인의 욕망은 계속 부족함을 경험한다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의인은 선한 행동이 보답받아 배불리 먹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의인 역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 행복, 그리고 기쁨을 얻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그러나 충족시켜야 할 욕구가 육체적 혹은 정서적 혹은 영적이건 간에 그 배후에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늘의 왕의 선한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는 사람은 모자라지 않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궁핍할 것임을 가르칩니다(잠28:27;10:3). 또 하나 생각할 점은, 궁핍을 의미하는 ‘배를 주린다’는 말은 하찮은 존재처럼 되거나 치료받지 못하면 죽게 될 운명임을 나타냅니다. 모세율법은 음식의 부여자(하나님)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오직 그분의 백성들이 언약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구약을 읽으면 풍성한 음식이 존재할 때는 올바른 관계,가 흉년이나 음식이 핍절한 때는 주님과 잘못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오직 최후의 심판 때만 100% 옳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뒤엉켜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라’(합2:4) 는 대원칙을 명심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욥의 경우와 같이 당신에게 신실한 백성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늘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언28:9, 새번역).
2021/06/30
잠언 14: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31장10-31절은 지혜로운 여인이 어떻게 자기 집을 세우는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기를 즐거워 하고, 상인을 통하여 무역을 하며, 매일 식구의 음식을 준비하고, 여종들에게는 할 일들을 정하여 맡깁니다. 또한 밭을 살 때에는 잘 살펴서 지혜롭게 사며, 직접 벌어들인 돈으로 포도원도 사서 가꾸며, 가난한 사람을 열심히 돕고, 가솔들을 위해 의복을 지어 입히며, 장래를 대비하고, 남편이 마을 원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게하며 존경을 받고, 게으르게 얻은 양식을 먹지 않으며, 집안 일을 두루 살펴보며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녀는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그 혀로는 덕을 끼치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자녀들의 칭송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혜로운 삶의 원천은 주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31:30). 그러므로 잠언은 이런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뛰어나니, 아들에게 이런 좋은 아내를 얻을 것을 권고합니다. 이 반면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 손으로 가정을 허무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남편과 다투고, 거만하며 고집불통이고, 입만 열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쉽게 분노하고, 절제력이 부족합니다. 이 여인은 결국 혼자 살게 되며, 그 가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아내가 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녀의 행동에 따라 가정이 세워지기도 하고 무너지게될 수도 있기에 늘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 새번역).
2021/07/01
잠언 14:2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자신의 생활양식이 주님이 미리 규정하신 도덕적 질서에 일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욕망 때문에 그 질서를 벗어나는 사람이냐를 기준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냐 아니면 그분을 경멸하는 자냐를 판단합니다. 사실 경건과 불경건, 건설적인 윤리와 파괴적인 행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는 바른 길(‘주님의 길’에 대한 환유법)을 걷는 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그의 인격과 행동이 주님께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에게는 양도불가능한 보물입니다. 이 반면 주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그릇된 길을 걷는 자로 분류됩니다. 여기서 ‘그릇된’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여 하나님이 굳게 붇잡으시는 도덕적 질서가 정해놓은 경계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릇된 길’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길들(ways)에서 왜곡된’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경멸하는 사람은 정해놓은 진로가 전혀 없고, 오직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리 저리로 방황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실상 그런 사람은 주님의 미움의 대상이어서 그분과는 아무런 교제도 가질 수 없습니다(3:32).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애착)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에 의해 드러납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범죄하지 않으려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제사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런 거절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출19:5a, 새번역).
2021/07/02
시편33편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
본 시편은 우주와 인간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지혜와 섭리를 깨닫고 찬양하는 시로,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찬양의 요청 – 찬양이 마땅함(1-3절) (2) 찬양의 이유 : 주님의 완전하심(4-5절)과 주님의 능력, 목적, 지혜, 그리고 사랑(6-19절) 위대함. (3) 신뢰의 기대 – 인자하신 주님께서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함(20-22절). 한편, 다윗은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경건한 자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온갖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20-22절). 그러나 경건한 자들이 함께 모일 때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베푸신 그분의 인자하심을 새로운 상황에서 늘 새롭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섭리의 체험으로서 이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필요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과거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의 역사를 기술하며 주권자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에 섭리의 통치자로 기술된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착되어진 은사, 재물, 명예 등에 만족하시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섭리 가운데 최선의 것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1/6/14 – 18)
2021/6/14
시편 28편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이시다. 내 마음이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에,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셨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기뻐하며 나의 노래로 주님께 감사하련다”(7절, 새번역)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상황에서 간절히 구원을 호소합니다. 만약 주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1절),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당한 치욕으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4절). 의로운 자신은 죄인 처럼 억울하게 죽고,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악인들은 벌을 피해 간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셨고 다윗은 찬양과 동시에, 이런 구원이 주의 백성 전체에 미치도록 기도합니다(6-9절). 얼마전 정봉주 전 의원이 출연한 한 시사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BBQ 사건을 말하다가 기소되어 2011년 대법원에서 1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옥살이 중 250일은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하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지른 잘못이 떠올랐고, 그후부터 눈물을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당한 심문, 고문은 물론 더 나아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 거룩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사 죄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노래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고 구원이심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46:1).
2021/6/15
시편 29편 – 폭풍을 지배하는 왕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11절, 새번역)
이 시는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찬양의 시작은 천상의 존재들이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곳인 하늘에서부터 입니다(1-2절). 이어 그 찬양은 바다에서,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가데스 광야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천둥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3-9절).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은 그 영광의 주님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며 찬양합니다(10-11절). 이 시에서 우리는 다윗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 보다 훨씬 강한 천상의 존재들도 주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예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주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천사 한 명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7만명을 죽이고 이어 예루살렘을 멸하려고 칼을 들고 천지 사이에 선 것을 보고 다윗이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 왕으로 하여금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삼하24장/ 역상21장). 한편, 다윗은 바다와 레바논 그리고 광야를 휩쓰는 폭풍 및 천둥 소리 가운데서도 그런 피조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의 주님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면 힘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처럼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잠3:11).
2021/6/16
잠언 13:19절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겁지만, 미련한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새번역)
12절에 시작된 단락을 마무리 하는 ‘19절의 주된 가르침은 의인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열망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됨으로 즐거움을 경험하지만, 바보들은 악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19절 전단은 심리적인 사실을, 19절 후단은 도덕적 사실을 묘사하여, 진정한 심리적인 기쁨을 누리려면 반드시 도덕적 요소를 구비할 것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되었을 때 영혼에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욕망은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불경건함과 비도덕적인 삶에서 돌이키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만족감을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로 어리석은 자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싦어합니다. 그 결과 바보들은 생명보다 사망을(14절), 은혜보다는 멸망을(15절), 보호보다는 드러내는 것을(16절), 치료보다는 재앙을(17절), 사회적 존경보다는 미덕 없는 수치스러운 가난을(18절)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예가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는 의인과 같이 죽기를 바랐지만, 모압 왕 발락이 주는 재물과 부귀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모세에 의해 죽고 맙니다(민23:10, 31:8). 이들은 지혜자의 영감된 가르침을 멸시하기 때문에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만이 참된 만족과 샬롬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교정한다면,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행동 역시 변화될 것입니다(3:7; 16:6). “지혜란 야훼께서 주시는 것,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로 지식과 슬기를 깨치게 된다.”(잠언2:6, 공동번역)
2021/6/17
잠언 13:20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새번역)
20-25절까지 6 구절은 13장 마지막 단락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가지는 축복된 미래와 바보들이 당할 해로운 결말’을 대조하면서 선과 악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 출발인 20절은 자녀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다닐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다니다 Walk’는 ‘행위나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라는 권고는 현명한 자의 가르침, 격려 그리고 본보기를 가지고 살아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95%가 도덕의 문제이며, 똑 같은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해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 – 교만하거나 탐욕적인 사람, 정욕적인 남녀, 우상숭배자, 쉽게 분노하거나 왜곡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과 사귀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들의 영향에 노출되어,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정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큰 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완전한 모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생명과 축복과 화평의 열매로 가득찹니다. 좋은 예로 에녹(창5:22)이나 노아(창6:9)는 각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전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고, 후자는 방주 예비함을 지시받아 홍수로부터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2021/6/18
잠언13:21절
“죄인에게는 재앙이 따르지만, 의인에게는 좋은 보상이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행위와 운명의 관계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본 잠언은 의인화의 기법을 사용합니다. 즉 ‘재앙’과 ‘좋은 보상’이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타인에게 주는 그 재앙이 돌아와서 그들을 멸망시키며, 의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그 선은 정당하게 그들에게 보상을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재앙’은 마치 사냥꾼과 같이 인격화 되어 있습니다. 그 뉘앙스는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격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한 그 해악들이 죄인들을 맹렬히 추격하고 결국 사냥하여 멸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물론 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악인들이 자신의 부패하고 부풀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저지른 악한 행위의 결과가 돌아와 그들을 물어 죽인 실례들로 차고 넘칩니다. 비히 850년 경 악한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참혹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왕비 이세벨은 자기 시녀들에 의하여 이층에서 던져저 죽었고, 이어 개들이 먹어버림으로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성경과 세상 역사의 차이는 정의의 집행자가 누군인지를 성경은 밝히 드러내고 세상은 모를 뿐입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 반면 의인이 타인에게 베푼 생명을 주는 혜택들은 돌이켜 같은 은택으로 보상합니다. 이 역시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늘 경외하여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