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4/5 – 4/9)

2021/4/5
시편14편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바보)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6)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절(7절)에 가면 시편 기자의 관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1:18절 이하에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피조물 중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 뱀, 물고기, 곤충 등-의 본을 따 만든 우상을 섬기고, 창조주가 제정한 남과 여의 법칙을 무시하여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운 짓을 행하도록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은 온갖 죄를 범하도록 유도해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며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은 한 마디로 지적, 도덕적 자살자들입니다. 또한 교양있는 무신론자들은 그런 무모한 도덕적 타락까지 내려가지는 않으나 남의 행동이 그르다고 판단하면서도 자신도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2021/4/6
어떤 무신론자의 아들(소년)이 그 부모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게 더 안전하겠어요. 그러면 우리를 일단 천국으로 데려갈지 모르잖아요?”
­이 세상은 절대로 인간이 창조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론, 빛, 시간, 공간, 물, 공중의 새, 꽃, 나무와 돌 등을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살다가 예외 없이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런 낯설고 무서운 장소에 살게 된 인간은 고민합니다. 여기서 수 많은 철학과 종교가 태어났습니다. 무신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무신론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 주장의 성격이 있습니다. 신을 전제 하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 한계는 최선을 다하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이체와 그의 초인사상입니다. 불행히도 니이체는 10년 동안 정신병자가 되었고, 결국 그의 의지에 반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네가 틀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메시지를 전개하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여러 사건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이 증거를 가진 사도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였으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근거 없이 떠들지 말고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행17:31, 새번역).


2021/4/7
범브란트 목사님 가족이 함께 지낸적 있는 인디언 가족은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생전 처음 아주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아 신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리가 아파 구두를 벗고 있었는데, 이를 본 그 아이는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서 목사님에게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받지 않았더니 묻기를 “목사님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구두 한 짝을 벗어 주게 된 과정은, 식사 도중 “누구든지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주라” 침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자신의 삶에 적용하였으나 상식에 어긋나서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19세기말 조선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신자 몇명이 등 뒤에 X 자로 나무를 만들어 지고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결국 주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27:14, 새번역) 혹은 “미련한 사람이 입에 담는 잠언은, 술 취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다.”(26:9)고 경계하여 분별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분별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마땅히 이 분별력을 기초로, 그리고 그 분별력을 따라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잠3:15, 새번역).


2021/4/8
어느 여성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청바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청바지는 유명 패션 모델 지지하디드가 입은 청바지로서 댓글이 수천개가 달려있었습니다. : “너무 예쁘다! 이거 어느 회사의 것이야? 어디서 살 수 있지? 얼마야? …..” 그러나 너무 비쌌습니다. 이때 이 여성은 유사한 청바지를 저렴하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2년여 시장 조사 끝에 확신을 얻어 시티은행원 자리를 나와 3명이 패션 스타트업 추시(Choosy)를 만들었습니다(2018년). 그리고 60억원의 투자자금을 모집하자, 알고리즘부터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제작할 옷을 선정하였습니다. 그 옷은 고객의 실시간 피드백이 반영된 제품으로서 100달러 이하의 값으로 소량만을 주문받아 제작됩니다. 2018년 7월 서비스가 시작되자 옷마다 금방 완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전정신, 창의성, 치밀한 계산을 거쳐 사업에 뛰어든 추시 CEO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앉아서 영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치밀하게 계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면 세상적으로 잃어버릴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섰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막10:29-31, 새번역).


2021/4/9
잠언12:24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은 다스리게 되나, 게으른 사람은 힘에 겨운 일을 하게 되는 운명을 대조함으로서 부지런함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들로서 독립성과 힘을 갖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자들로서 결국 강제로 노동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을 피하는 손은 결국 가장 힘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독립성을 잃고 고된 일을 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맡아 부지런히 완수하여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 잠언은 솔로몬의 것입니다. 솔로몬은 통치 말기에 여로보암을 주목하여 감독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능력 있고, 부지런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솔로몬의 범죄 때문에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떼어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한 여로보암은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10지파를 대표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대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르호보암이 강제노동을 경감해 줄 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동조하는 10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반면 통치에 어리석고 게을렀던 르호보암은 두 지파만 거느린 약소국 유대 왕국의 왕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쓴 잠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 둔다.”(잠6:6-8, 새번역). 

부활하신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4-10
“기독교의 역사”를 지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시기부터 약 400년까지를 초기 교회로 규정짓고, 초기 교회가 전 세계에 퍼지며 부흥발전한 이유를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발전의 중심 축에는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그들 모두의 죄를 위해 죽고 영원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사건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런 복음은 듣는 사람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여자와 노예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어 갖는 부활신앙 때문에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순교에 직면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가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소식이며, 신자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1500년 전 레위기(23:9-14)에 규정한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이라는 절기를 통해 예표하고 있습니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첫 번째 도래하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그해에 처음으로 추수한 보리 이삭 한 단을 제단에 드리는 제도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제 추수를 할 것임을 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초실절 보리 이삭 한 단을 드리는 바로 그 시간에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지만,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3/29 – 4/2)

2021/3/29
2021년 고난주간은 3월28일 시작되어 4월 3일 토요일에 끝납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날입니다. 시편118편을 묵상하겠습니다.

시편118편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22-23절)


출애굽의 목적은 노예 해방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구속에 있습니다. 본 시편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행진하여 성전 문들에 이르고(19), 그 문들을 통과하여 제단으로 가고 있습니다(27). 이 과정에서 순례자들과 지도자 사이에서는 구원의 체험을 노래하는 찬송과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1-18). 그러나 19절을 넘어가면 어조가 바뀝니다. 순례자들은 주님께 가서 경배하고자 의의 문들을 열라고 외치는데, 문지기는 이 문은 주님께 속한 것이니 의인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20). 시편기자는 이미 주님의 능력으로 원수들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며 감사 드립니다(21). 옛 이스라엘에서 집을 지을 때 필요 없다고 버린 돌이 다른 경우에는 오히려 집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요긴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습니다. 바로의 노예가 된 민족이 선택되어 구속받음으로 인간 구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분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모두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이를 듣고 보는 자마다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누가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주님으로 인하여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드려야만 합니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시편118:10, 새번역).


2021/3/30
오늘은 고난 주간 중 세 번째 날(화요일)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어떤 불가능한 난제도 다 이루어지고 해결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신구약 성경의 공통된 주제이며, 많은 실례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적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사르고, 죽었던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경우이며, 신약에는 소경이 눈을 뜨고, 베드로가 죽어 있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린 경우입니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른바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조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오늘 기도의 교훈을 주신 주님 역시 3흘 뒤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중핵에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번이나 기도를 드렸으나 응답받지 못한 후 이를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는 늘 시편 기자의 외침이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시편118:9, 새번역).


2021/3/31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자, 주님은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날은 하나님 아버지이외는 어떤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신자들은 주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전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2021/4/1
목요일: 예루살렘 성 내에서 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지내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축약적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그리고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제자들과 후에 믿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자마자, 로마 군인과 성전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안나스의 사위이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또 받은 후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마26:62-66).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후 또 다시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마26:68-69).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 베드로가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8).


2021/4/2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요18:36-37).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정치적 목적을 따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요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53:11-12).

승리의 입성과 그리스도


요한복음12장 12-19절
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마르다 남매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마친 다음날 오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동쪽의 가파른 길을 올라 산 정상에 이르러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남은 1킬로의 길을 백마는 물론 건장한 나귀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셨습니다. 로마군이 감시하는 상황에서 이는 대단히 지혜로운 모습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분의 능하신 일 때문에 수 많은 백성들이 나와 ‘호산나(지금 구원 하소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왕이시여’ 하면서 외쳤으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다가오시자 우셨습니다. 이는 순종하지 않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7일 후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만 보는 가운데 조용히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즉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실로 인간은 겸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를 부패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이 보여주신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한 왕의 모습은 우리가 늘 마음에 간직할 그림이 되어야만 합니다.  

매일묵상(2021/3/22-26)

2021/03/22
시편13편 – 쓸쓸함이 환희로 변화함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5절, 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3파트로 나누어집니다. 마음이 비탄에 젖었으나(1,2절), 이 비탄은 절박한 도움의 기도로 융합되어(3,4절), 마지막으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믿고 평온한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5,6절). 시인이 비탄에 젖은 까닭은 절박한 상황이나 하나님은 신속히 응답하지 않고(영적인 차원), 자기 영혼은 근심 속에 빠져 있는데(개인적 차원), 원수는 의기양양하게 나다니는 상황(상황적 차원)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세 부분을 모두 언급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의 결과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믿게 되고, 시인의 슬픔은 기쁨이 됩니다. 그것은 근심스러운 상황을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의 비탄은 기도를 통하여 환희로 변화되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길 때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였습니다(삼하15-17장).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자 그의 모략이 어리석게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새에게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항복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라고 밀령을 내렸습니다. 다윗은 울며 맨발로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은 기습작전을, 후새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제안하였고 후새의 전략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멸망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묘책을 좌절시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신뢰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16:33).


2021/03/23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십자가형과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한 어린이가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일 리가 없어요”
“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목사님이 그 이야기를 할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났을 거예요”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종려주일로서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이 연도에 나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요한복음은 백성들이 얼마 전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환호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 본인은 성에 다가오시자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환호하는 유대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멸망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주님의 말씀대로 40년 이내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나귀 타고 입성하신 지 5일 후 유대지도층의 고발로 십자가 형에 처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본 사실이고, 실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원하여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사실은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왕으로 임명되셨다는 사실은 우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 보다 더 강력한 증언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왕의 등극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소식과 선포이지 논리가 아닙니다. 보도를 들은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5:8).


2021/03/24
어떤 소년의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즈음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교회에 가서 요람에 누인 아기 예수의 상을 꺼내 집으로 가져오면서 그 상에게 말하였습니다.
“자, 이제 엄마가 없는 게 어떤 건지 알겠지?”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회복되었고, 소년은 아기 예수의 상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마음은 달리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히 소년의 행동과 소년의 어머니의 회복은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정신 심리학의 목표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어린 아이적 요소 – 상처 입은 자아 등 -로 인한 정신 질환을 치료하여 정상적인 어른의 수준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의사와 함께 굿굿하게 이겨나가면 마음은 치료받게 됩니다. 물론 여러 약물이 투여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치료와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장사된 후 사흘만에 부활하사 어두움의 세력들을 포함한 만유를 통치하시는 우주의 진정한 주인으로 임명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사화복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그분의 결정을 거치지 않으면 발생 불가능하며,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짐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같은 고난을 당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징크스에 휘들리거나, 어린아이처럼 움추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맡기고 굿굿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니, 자연히 정신 심리학이 달성하려는 목표가 성취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과 같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시편125:1, 새번역).


2021/03/25
다섯 살 된 미하이가 말썽을 부리다 전기 충격을 받자 보모는 “넌 이제 죽을 거야!”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믿은 미하이가 그런 슬픈 사연을 말하자, 아빠는 안심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혹 네가 죽더라도 넌 천당에 갈 테니까” 그러자 미하이는
“그러겠지요. 그러나 난 여기 살면서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하였습니다.

R.풀검은 책(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서 말합니다.
 “지혜는…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균형 잡힌 생활을 하라. 매일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경이로움을 느끼자./ 금붕어와 햄스터와 흰쥐와 스티로폼컵 속의 작은 씨앗마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속에 들어 있다. 황금률과 사랑과 기본적인 위생, 그리고 환경과 정치와 평등과 건강한 삶까지”
만약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상기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은 천당(1,000당)은 아니어도 팔백당(800당)은 될 것입니다. 그밖에 병들고 죽고, 낡아지는 문제 등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나라를 도래시킬 때까지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치원생 미하이의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


2021/03/226
잠언12:23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12:16-23절을 전체적으로 볼 때, 바보는 자신의 위험한 감정이나 도덕적인 오만함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모욕과 지식 모두를 감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자는 올바른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자신의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통찰을 숨겨두는 반면, 바보들은 때와 상황에 관계없이 오만한 행동과 말을 쏟아냄으로 끊임없이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혜자는 바른 상황을 기다릴 수 있는 자기통제력과 어느 시기에 입을 열어야 하는지를 분간할 신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절제하는 동안 자신의 상황을 통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그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요청하는 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숨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들을 귀가 없는 어리석은 자에게나, 밝힐 경우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감추어 두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이 잠언을 배웠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모든 진리가 예외 없이 각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며, 또 모든 때와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도외시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로운 욥을 책망하고 끊임없이 회개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쏟아낸 오만한 도덕적 판단으로 재앙을 당한 욥은 더욱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욥을 변호하셨고, 세 친구의 어리석음에 노하셨습니다. 욥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슬기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6장 25-36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하시면서, 이 양식은 주님 자신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식을 위해서는 일을 한 대가로 얻는 것에 익숙한 무리들은 무슨 일을 하여야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심으로 썩지 아니하는 양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이들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모세를 통해 불같은 율법 즉 토라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림자요 참된 생명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양식, 참된 토라는 예수 자신입니다. 이를 알지 못한 군중들은 그런 양식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것들에만 초점을 두는 신자들과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가 이들을 위한 참된 양식임을 설교하시나 오히려 무리는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분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와 찢기신 그분의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만유의 주님으로 영원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승진도, 부를 획득하는 것도, 명예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주님의 통제 하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지혜입니다.

매일묵상(2021/03/15 – 19)

2021/03/15
시편12편 – 다윗의 시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이다.”(6절, 새번역)

시의 형태는 기도(1-2) – 약속(3-6) – 기도(7-8)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악인들의 거짓말로 신실한 사람들이 없어지는 등 위협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약속을 듣고 안심합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의 말과 달리 주님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이 여전히 주위에 우글거리는 현실 역시 도외시 하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중상모략하는 일은 3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은 ‘말(word)’이 갖는 위력을 보여줍니다. 첫 조상의 타락 역시 ‘말’ 때문입니다. 순진한 하와와 아담은 그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결과 인류는 마귀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 말씀은 ‘복음’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진실하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공자는 60이 되면 “이순- 耳順” 즉 귀가 순하여져 말을 분별한다는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분은 성경을 모르는 분이나 열심히 노력하여 그런 분별력을 가졌음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분별력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게 되면 저 세상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큰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시19:11, 새번역).



2021/03/16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훌륭하다고 여기는 일’을 언급합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하여 평생을 들여다 보다가 물에 익사하여 수선화(narcissus)가 됐다고 합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자 한 소년이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일학교 선생님도 나르시시스트예요. 그분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해요. 그런데 머린랜드에 구경갔을 때 보니까 고래와 물개들이 기가막힌 재주를 다 피우던데요. 몸무게가 사십 톤이나 나가는 사람이 뒤로 돌 수 있겠어요? 성경은 왜 예수님을 사자나 양이라고 불러요? 사자는 사람보다 강하고 양은 사람보다 겸손하기 때문이지요.”

확실히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동물계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에, 인간속에는 창조자의 형상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여 주인되신 하나님을 머리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 대신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채워버렸습니다. 이것이 죄의 근본이요, 원죄입니다. 모두 나르시시스트(자기애에 빠진 사람)가 된 것입니다. 물론 건전한 ‘자기애(自己愛)’는 인간 창조의 구성부분이지만, 인간은 모두 균형을 못잡고 넘어졌습니다. 회개는 여기서 돌이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겸손의 의사표시입니다. 그러나 범한 죄들이 너무 많아 하나님께 돌아갈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그 길을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여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2021/03/17
미국 콜로라도 주의 오로라시에 살고 있는 찰리라는 8살 소년은 아주 장난이 심하였습니다. 한번은 일부러 다른 학생들의 학용품을 부수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찰리의 어머니는 그에게 줄 용돈으로 학용품값을 대신 물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화가 났습니다.

“내가 말썽을 부리면 용돈을 빼앗기는데, 우리 부모가 크게 싸우고 말썽을 부려도, 하나님은 그분들의 용돈을 빼앗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찰리의 동생은 할머니에게 “형은 하나님을 방문하기 위해 천국에 갔으니까 두어 주일 지나면 돌아올 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판단력과 경험이 미숙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부모에게는 미성숙한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양육할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해야만 한다는 방향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적용에서는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인간의 지혜에 맡겨져 있습니다. 현대의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어린아이의 발육과정, 가정환경, 그리고 정신심리적인 관계를 다룬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는 젖이나 우유를 먹고 자라는 데도 아무런 탈이 없는 이유는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나오지만, 4-5살이 되면 이 효소가 사라지기에 (특히 동양인들) 반드시 젖을 떼고 밥을 먹여야만 합니다. 이를 배운 사람들은 아이들의 신체변화를 이해하고 양육 시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농부처럼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는 주님을 경외하는 성숙한 어른이 될 것입니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워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1:7, 공동번역).


2021/03/18
레닌이 어렸을 때 교회에 결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레닌의 부친이 신부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였을 때, “때려요, 힘껏 때려야 합니다.”라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어린 레닌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레닌의 전기 작가들은 어린 레닌이 이때 맞은 한 번 매가 그로 하여금 평생토록 하나님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유고슬라비아 독재자 티토는 어렸을 때 미사 때 신부를 돕다가 포도주를 엎질렀고, 신부에게 뺨을 맞으면서 꺼지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티토는 그 사건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고 혁명을 위해 대량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에게 책을 읽어 주어도 소는 알아듣지 못합니다만, 소도 자신의 새끼를 돌볼 줄 압니다. 또한 닭은 부화된 병아리들을 이끌며 먹이를 주지만, 타조는 사막에 알을 낳고는 개의치 않고 그냥 떠납니다. 그러나 달릴 때는 말 탄 자 보다 빠릅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작품이요 의지의 반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이끌려 결정하는 예가 훨씬 많습니다. 즉 감정의 동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교회는 편애나, 거치른 말, 이유 없는 벌 등으로 자녀들이 분노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대신 “나는 부모에게 귀한 존재다”라는 사랑의 감정을 갖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을 포함한 세상은 사랑의 훈련장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희생이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들만이 참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14:14, 공동번역).


2021/03/19
잠언12:22
“주님은 거짓말을 하는 입술은 미워하시지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기뻐하신다.”(새번역)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감찰하시어, 거짓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시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미워하신다” 라는 단어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그분을 구역질나게 하여서 그들을 제쳐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는 입술(들)”이란 어리석은 자들(바보들)을 지칭하고,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그들이 가진 자기 중심적 성향은 의도적으로(19절) 혹은 의도치 않았던(17절) 간에 상황을 왜곡시키게 만듭니다. 그 반면 “진실하게”란 말은 신뢰할 수 있는 성품에서 솟구쳐 나오는 선한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기뻐하신다”라는 단어는 주님께 인정을 받아서, 그분이 주시는 보호와 축복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잠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온 세상의 주인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무신론 자들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심판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시고 집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참으로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이신 후에 능히 심판하여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았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혀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입니다. 우리들은 마지막 날 주님을 대면할 것이기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온 세상을 다 얻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골1:10,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1)


요한복음 6장 22 – 27절
요한 복음의 구조는 표적 – 오해 – 강화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런 구조의 일환입니다. 군중의 오해를 지적하신 뒤,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는 26절부터 시작하는 주님의 설교는 요한복음 중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강화입니다. 우리는 이 강화를 통하여 오병이어 표적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가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전 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은 다음 날 보니 제자들도 예수님도 그 현장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디베랴에서 온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로 가버나움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에 도착하니 이미 거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서 “랍비여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자신은 새벽에 물 위를 걸어 도착하였다고 하셨으면, 군중들은 더 깊은 인상을 받았겠지만, 이들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군중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육신의 필요를 채우러 온 것이지, 그 표적이 뜻하는 바 세상을 살리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저급한 동기로 주님을 찾아와 왕으로 영접한 들,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매일묵상(2021/03/08 – 12)

2021/03/08
시편11편 – 믿음과 진리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공동번역)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왕 사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다윗이 산 속에서 숨어지내는 상황이 연상됩니다. 그 상황은 매복한 적에게 화살을 맞을 것과 같이 위급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블레셋과 같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보호를 믿는 다윗조차 죽을 가능성에 심히 불안하게 됩니다(1-3). 이때 늘 신실하게 살아온 다윗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이 모든 상황을 감찰하시고 공정한 심판을 행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주님의 정의와 심판을 믿고 큰 안위를 가지게 됩니다(4-7). 이렇게 고백한 다윗은 계속된 사울의 추적에 엔게디의 한 굴로 피신합니다. 그때 사울은 3천명의 정예군사를 이끌고 곳곳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울은 용변을 보러 다윗이 6백명의 군사들과 함께 숨어 있는 굴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것은 쉬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를 네 손에 붙일 것이라는 신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안전하게 굴을 나가도록 부하들을 단속까지 합니다. 이후 한 번 더 다윗은 자신을 수색하는 사울을 살려주면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고난의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손에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는 고난의 과정에서 다윗이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의로우신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되 사사로운 지혜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의로우셔서, 정의로운 일을 사랑하는 분이시니, 정직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시11:7, 새번역).


2021/03/09
성탄절이 가까워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 아직도 집을 못 구했어요?”

정말 어린 학생다운 순진한 질문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집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사렛에 정착하였다고 하니 집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가족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땅 위에 있는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공수래 공수거! 오래 전 미술개론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참 재능 있어 일본에서 상당한 이름을 떨친 어떤 한국 미술가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예술에만 정진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었고, 혈육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인생은 공이다”라는 편지가 자신에게 와 급히 찾아 갔더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습니다. 이분은 살아 있을 때는 거주할 집이 있었지만,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갈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바라보고 현재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 중, 아니 온 인류 중에 오직 한 분만이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님의 가족들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소망을 가지고 땅에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2021/03/10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가 여덟 살 때 이스라엘을 며칠 방문하고는,
“이곳은 고양이들이 할퀴지 않고, 개들이 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나라예요.” 그러나 후에 고양이를 만나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난 후 아멜리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어떤 고양이는 할퀴지만, 아마 그들은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고양이들일 거예요.”

우리는 역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 방문하고 나쁜 일을 경험한 뒤, “이 나라 국민성은 아주 나빠.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어디있어?”라고 말하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의 국민성은 나쁘지만, 더러는 좋은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하나, 어느 정도의 한계 내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개개인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악인과 선인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 깊은 밀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입니다. 누가 선하고 악하냐는 동기에까지 파고들어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시면서 마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역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실 때까지 가룟 유다에게 선을 베푸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는 흑백논리를 넘어 지혜를 가지고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행하신 하나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13:49).


2021/03/11
범브란트 목사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복음을 전혀 모르는 러시아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에게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침례, 산상수훈, 비유, 기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그 장교는 매우 기뻐하여,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외쳤습니다.
“요정같이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나는 이때까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러자 목사님은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채찍질 당한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실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증거를 예수님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말에 그 장교는 찬성하였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제 구주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죽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여주었을 때 비로서 그의 얼굴은 다시 환하게 빛났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웃고 울리게 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모든 민족에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단군신화, 을지문덕 장군, 이순신 장군, 세종 대왕과 같은 이야기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야기 없이 제대로 형성된 민족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그들이 자라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집필된 동기였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


2021/03/12
잠언12:21절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지만,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새번역)

이 잠언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절과 함께 볼 때 속임을 베푸는 자(악인)와 화평케 하려는 자(의인) 사이에 서로 다른 운명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의할 부분은 “의인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악인이 의인에게 해악을 의도하여도 의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여 받는 마지막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약속은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날에 흠 없는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결국 현재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시대를 통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최선의 것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과 협력하여 모든 것들이 선에 이르도록 일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롬8:28). 그 뿐이 아닙니다.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은 우리가 시험받을 때 붙들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구해주시고, 더 나아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한편 잠언은 “악인은 재난에 파묻혀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현실에서의 괴리를 목격하지만, 확실한 것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전제할 때 악인에게 발생하는 가장 무서운 일은 형통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홀연히 찾아와 악인을 데리고 갈 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영원한 심판뿐입니다. “죄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부러워하지 말고, 늘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러면, 너의 미래가 밝아지고, 너의 소망도 끊어지지 않는다.”(잠23:17,18, 새번역)

매일묵상(2021/03/02 – 05)

2021/03/02
시편 10편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해주십시오.”(시10:2, 새번역)

시편 9편에 이은 10편 중심에는 악인에 대한 다가올 심판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세상에 편만한 악인들의 행위를 보고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서 왜 멀리서서 심판을 신속하게 집행하시지 않는지 질문합니다. 이렇게 심판이 지체되니 악인들은 탐욕과 포악을 행한 뒤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4), “하나님은 보고 있지 않는다”(11), 그리고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13) 등, 주님을 모독하고 안심한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정의를 집행할 것을 요청하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행동하셔서 세상이 정화될 것이나(16-18) 의인들은 그분을 기다려야만(15) 한다는 신뢰와 믿음의 가르침을 줍니다. 시편기자의 탄식과 같이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으나, 응답이 더딘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때가 진정한 믿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전파에 심히 방해가 되는 장애가 몸에 있자 간절히 3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 9)는 십자가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 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 방법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분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한 손 아래 여러분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골1:11, 새번역).


2021/03/03
러시아의 그리스도인 겐하디 말라쵸프가 선고받은 감옥 생활을 다 끝내고 석방되자 그의 가족이 찾아 왔습니다. 감옥 문에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디로 가실거예요?”
“너희들과 같이 집에 가야지”
“아녜요, 아버지가 계실 곳은 바로 여기예요.”
“왜 그러니?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게 기쁘지 않니?”
“기쁘지 않아요. 전 언제나 아버지가 계실 곳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감옥이란 말을 들어왔어요”

이 딸은 아버지가 감옥에 간 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산 경험이 없습니다. 비록 부녀 관계라 하더라도, 삶을 함께 나누지 못하였다면 서먹서먹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같습니다. 만약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 그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창조와 심판의 하나님은 되실 수 있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구속의 하나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삶에 대한 공통의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겪으셨으며, 속죄의 대업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당신의 임재이신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황이 생각과 달리 여의치 않아도 주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16:1, 새번역).


2021/03/04
신앙으로 감옥에 갇힌 미쉘 사크하로브에게 아내와 딸이 면회하러 갔습니다. 미쉘은 자기 딸을 향해 팔을 뻗으며 “애야 이리 와라” 하자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매달리며
“나는 저 사람에게 가기 싫어요. 난 아빠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아주 미남이었어요. 빼빼 마르고 주름살 투성이의 이 사람은 아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늘 보고 싶어하는 분을 몰라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자녀들만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사랑했으나, 종의 형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힘 없는 아기로 나셨고, 양부 요셉 역시 목수로 보잘 것 없는 계층이었습니다. 더구나 나사렛이란 산 동네에서 선생 없이 자라시자 예루살렘의 지식인들은 무시하였습니다. 한편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신 후 전도하시다가 고향 나사렛에 들려 회당에서 설교하자,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저 사람의 누이동생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않느냐?”(막6:3) 하면서 고향 사람들 역시 주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승천하여 섭리 가운데, 여러 모양으로 – 가난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연약하며, 의 때문에 핍박당하는 모습 등 – 지금도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만약 해외 선교사 부부가 왔을 때 손님 대접을 잘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집에서 극진히 섬기는 것은 코로나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용이 들더라도 호텔에 숙박시켜야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10-11a).


2021/03/05
잠언12: 20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이 잠언은 악을 도모하여 고통을 가하려는 자들과 화평을 위해 권고하는 자들을 대조하면서, 전자에게는 ‘속임’이, 후자에게는 ‘기쁨’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그 특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속임을 꾀하는 자들은 진실한 기쁨을 가질 수 없지만, 화평을 도모하는 자들은 자신의 권고가 상대방은 물론 공동체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기에 희락이 있습니다. 여기서 ‘속임 Deceit’이란 악을 꾀하는 자들의 마음에 뿌리박혀 인격의 한 구성부분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속이는 자들은 냉정하게 계산하여 상대방을 능숙하게 해치지만, 어리석은 자들(18절, 바보) 충동적이고 생각없이 말하는 자들로서 전자가 훨씬 악한 인격체입니다. 당연히 그런 인격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은 비난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락’이라는 단어가 나타내듯이, 악을 행하는 자의 삶에는 희락과 화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여서 타인을 해치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익의 판단기준은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주인이 계시고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당하게 받는 재물과 명성 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경외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십시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풍성히 우리의 삶을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2:26,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