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고난주간

2020년의 부활절은 4월12일입니다. 부활절을 이렇게 결정하게 된 계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서 결정된 것이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2020년 3월 21일이 지나고 첫 만월은 4월 7일경(음력3월15일)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월12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0년의 경우 4월 5일(일요일)부터 4월 11일(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으로 부릅니다. 금년의 고난주간도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요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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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로마서 제7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권은 율법(모세율법을 의미- 다수학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의로 구원의 방법으로서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말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규범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이를 지키도록 허용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도 제사법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적 규정의 모세 율법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법에 충돌된다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십계명(안식일 규정 제외)으로 대변되는 도덕법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나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소위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함하여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만이 받은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롬9: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모세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되어 심히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14, 15절). 바울이 이러한 주장이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율법(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7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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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6:15). 이 구절은 정확히 1절의 질문(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가 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반박하기 위해 도입한 수사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6장은 전반부(1-14)와 후반부(15-23)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믿음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우리 자신을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우리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23). 이를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종이 대조되는데, 사도는 계속하여 그 두 종의 발단(17-18절), 전개(19절) 그리고 결말(20-22절)을 보여줌으로써,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며 그 마지막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띠위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하에 들어가게 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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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모든 욕심과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앞의 죽음은 법적인 죽음 즉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이 반면 후자의 죽음은 죄의 권세에 대한 죽음으로 비윤리적인 삶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과거에 속한 것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한 사건으로 결코 반복될 수 없으며, 후자는 현재에 속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회심할 때).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는 날마다 죽어야만 합니다. 로마서 6장은 이 두 죽음 가운데 첫 번째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의 이전의 자아(옛 사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어떻게 죄 된 자아를 무력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7절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NIV).” 개역개정이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번역들은 헬라어 단어 “데디카이오타이 δεδικαίωται”에 없는 “자유롭게 되었다” 의미를 삽입하여 번역하고 있으나, 그 단어 는 ‘의롭다 하심을 얻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진 사람이 사회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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