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6 – 10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들처럼 하게 도우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들처럼 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닥칠 것입니다. 큰 일이 닥칠 때에도 두려워 하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 담담하게 처리하며, 작은 일을 하게 될 경우에도 경시하지 않고 주님의 자녀답게 최선을 다해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올 한 해에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자녀들이 자라서 말을 할 수 있을 때, 부모가 제일 자주 하는 질문은 “얼마나 컸지?”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똑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만큼 커요!” 보통 아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키를 부풀려서 “나는 커요.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클지 아무도 몰라요” 하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물론 과학적인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을 작고, 약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크십니까? 데일 브루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움의 폭풍 속에서 괴로워할 때, 그 폭풍을 잠재울 능력을 가진 말씀이 바로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내라! 나니(I AM) 두려워 말라!”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로서 한글은 “나니” 즉 “나다”로 번역하나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영어로는 “ I AM”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고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야훼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위대한 말씀 속에 바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쉽게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당신 손안에 바로 이 우주가 들어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6-27)

존 오토버그 목사는 “나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의 문제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면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지배될 것입니다. 그 결과 만약 전도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거절당하거나 알맞은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지?”하고 움츠러들게 되고말게 됩니다. 전도가 궁극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 안정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직면하거나 강한 권면의 말을 해야 할 때도 슬쩍 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므로 그분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면 십중팔구 그 유혹에 넘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의 삶을 은밀하게 보시고 어느 날 상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축소시키면 믿음 없는 기도를 드리고, 열정 없이 일하고, 기쁨 없이 봉사하고, 소망 없이 고통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신 지혜로우며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뉴포트 해변을 걸으면서 술집 안에서 일어난 싸움이 바깥까지 번져 나온 곳을 지나갔습니다. 마치 옛날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남자 세 명이 외로운 한 사람을 구타하고 있었는데 피해자는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별로 경험이 없었지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에 목사님 일행은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갑자기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놀라서 그들을 불러 세우고 왜 도망가느냐고 물어볼 뻔하였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곳에는 엄청난 거인이 서 있었습니다. 술집 경비원이 분명하였고, 대략 2미터의 키에 몸무게 110킬로그램 정도였으며, 마치 헤라클레스의 아들 같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몽고(3미터 크기의 전사 상)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의 면전에서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몽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청난 근육을 과시하며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로 싸움을 해결하는 것은 그의 ‘영적 은사’였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의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용기와 자신감이 가득하였으며,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일행에게는 강하고 큰 몽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몽고보다 크신 분과 항상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폭풍 속에 있는 우리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조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의 삶에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며, 그런 믿음으로 직면해야 할 때 우리는 움추러들고, 기도할 수 있을 때 걱정하고, 후히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움켜잡고, 물 위로 걸을 수 있을 때 배 안에서 머물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반드시 두려움이 닥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의 시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2020.1.13 – 17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우리 주님을 통하여 지으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신뢰하고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인간이 하나님의 광대함, 존귀함, 힘을 인식하고 선언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장려하지 않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로 평가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배는 생산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예배로 무엇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배를 드립니까?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여질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땅은 이미 그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세상에는 두려운 일이 가득하며 결국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사망으로 귀결되도록 운명지워졌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벌판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처럼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경험이 없다면, 세상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들(경력, 실력, 돈, 명예, 인맥, 권력, 체력 등)을 경배하고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4개월만 교회에 나오지 않고 기도와 찬양이 없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사람과 다를 것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인 예배의 감동과 기억이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4-5).    

우리는 때로 베드로처럼 배 밖으로 나갈 때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가 아직 공산주의 치하에 있을 때,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친구와 함께 2주간 설교하러 그곳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초청한 지하 교회들은 50권의 주석 성경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 밀수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염려가 되었지만 목사님은 시도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러 미국 교회들이 필요한 성경을 기증하였고, 떠나기 직전에 한 여성이 다가오더니 목사님의 손에 한 권을 더 쥐어줘서 목사님의 선교 일행은 총 51권을 가져갔습니다. 당연히 세관 직원이 이 선교팀의 옷 가방 중 하나를 열더니 성경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오토버그 목사님은 세관의 수장인 관리가 교회 리더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최악의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습니다. 에디오피아의 교회 리더들은 감옥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감옥을 ‘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은 하나님이 그의 리더들이 성장하기를 원하실 때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처럼 그들 중 일부는 간수들이 쉬러 갈 때 감옥을 책임지기도 하였습니다. 간수들은 라이플 총에서 총알을 빼어 그리스도인 죄수들에게 건네주고 돌아올 때까지 경비를 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여러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관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도 한 권 갖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1권을 기증받은 것 역시 이 관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깨달은 목사님은 회고합니다. “그날 내 하나님은 좀 더 커지셨습니다. 주님이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크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 능력의 배 밖으로 나갈 때마다 그의 하나님은 좀 더 커진다는 진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3-4).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려 할 때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방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주목합니다. 방심상태에서 나의 몸은 현장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어느 곳을 자동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때때로 이런 방심상태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몇몇은 아예 생활의 한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방심은 우리를 예배하지 못하게 막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되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에 주목하지 못하고 방심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미스터리를 제거해 버리는 시대에 살면서 미스터리가 없어서 아쉬워합니다. 발신자 추적을 하고,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에 성별을 알고, 출구 조사를 하여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누가 선출되었는지 알고, 텔레비전 마술사들이 항상 숨겨 왔던 비밀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경이를 파괴해 놓고서 그것을 몹시 갈망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너무 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접할 때 우리는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명령하지 않아도 폐는 계속 공기를 흡수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 매일 잠이라는 작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부활시키는 기적을 잠시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들려올 때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율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귀를 울리는 공기 분자의 진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기 분자의 진동의 의미를 알아듣고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외치는 작은 신현(神顯)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예배가 때로는 지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예배의 방식이나, 찬양의 종류 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배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산과 폭풍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미지는 더 작아지고 더 편해지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천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존재에서 편한한 개인의 수호 천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성경에서 천사의 등장은 항상 두렵고 무서운 사건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천사를 만나는 모든 경우 “두려워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1965년 감옥에 들어가 12년간 옥고를 치루고 1976년  풀려 나온 고 이인수 장로님이 1985년 장교들이 모인 앞에서 한 간증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감옥에서 낙망과 절망에 잡혀서 나날을 보내던 중 병까지 들었습니다. 몸무게가 38킬로 그램 정도로 내려갔고 의사도 이제는 끝났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병상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잡고 펴니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한다는 내용이 적힌 로마서 5장 3-4이 나왔습니다. 마음에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어”하고 부정하자마자, 옆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 까짓 정도 가지고 낙망하냐!” 고 책망하셨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아쉽게도 1985년 출간한 그분의 간증집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에는 누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 체험 등으로 감옥에서 12년 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석방되어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항상 하나님과 천상의 존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0-11)

C.S. 루이스의 책 『캐스피언 왕자』에서 한 아이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과 우연히 만납니다. “아슬란, 당신은 더 커졌어요.” “그건 네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지, 애야” 아슬란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요?” “나는 나이가 들지 않아. 그러나 매년 네가 자랄 때마다 내가 더 커진 것을 보게 될 거야.” 우리와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이야기가 예배로 끝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예배는 전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순환시킵니다. 예배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배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제자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크시지?” 베드로는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어올리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큼 크셔!” 예수님이 배 안으로 들어가시자 바람이 잠잠해졌고 폭풍도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배 안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한결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누군가 배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그렇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결코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결과가 무엇이든, 그들이 빠지든 헤엄치든 무언가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명을 분별하여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하나님은 더 커지실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예배와 믿음은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강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 그분을 신뢰하고 나설 사람들을 아직도 찾고 계십니다.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에 대하여 우리들도 믿음으로 응답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히11:1-2,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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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어느덧 마지막 날들이 다가왔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할 때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미해결 과제, 응답받아야 할 기도제목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한 후에 남은 미해결 과제들은 하나님의 손에 남겨두어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0:38을 보면 주님께서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착한 일들을” 하셨지 모든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조자 인간의 몸으로 모든 마을을 다닐 수는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을 치료할 수도 없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바로 그 일을 완성시키셨을 뿐이고 미해결의 과제들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한편, 존 맥스웰은 우리가 사는 동안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안되며, 성공의 지름길은 이런 중요한 결정들이 잘 내려질 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의사결정이라도 우리가 작성한 매일의 계획표 상에서 처리되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이어 맥스웰은 “우리가 만약 우리 인생 가운데 무엇인가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오늘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오늘에서 승자가 될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갖는 매일 매일의 의제에 달려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 주님께서 우리가 할 일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때 성공은 결과나 업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님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일을 성심껏 한다는 사실 자체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맞이할 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출발점입니다. 경자년 2020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이미 작정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1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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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3 – 27

이번 주는 성탄절 주간입니다. 23일과 24일 이틀간은 주님의 탄생과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 따르면 가이사 아구스도 즉 아우구스트 황제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칙령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재임한 중에 첫 번째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었기에 호적하러 유다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다윗이 태어나서 자란 동네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함께 갔으며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이미 700년 전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를 예언한 미가서 5장 2절의 성취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마태복음 2:6; 미가5:2). 그리고 선지자 미가는 태어날 메시야를 통하여 전 인류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5:3-4)..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호적하라고 명령할 때에 만삭이 된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서 아이를 낳아서 성경을 성취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것을 작정하고 계셨지만 그것을 그 어떤 누구도 알 수 없는 섭리가운데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실한 믿음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3-4).

예수님이 약 1,350년 전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가족은 기근을 피하여 베들레헴에서 사해 동편에 위치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자부 룻과 함께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들레헴 성문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나오미를 보고 “이가 나오미냐?” 하니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 말라 마라라 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혔고 여호와께서 나를 징책하셨거늘 어찌 나를 나오미라 하느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전능자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라고 대답할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자부와 함께 며칠 집에 있었는데 이때는 보리추수를 할 즈음이었습니다. 자부 룻이 이삭줍기를 허락받고 들에 나아가 이삭을 주울 때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기 시작하였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으로부터 와서 추수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룻을 보게되고 그녀를 선대하였습니다. 룻은 저녁에 보리 한 에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를 본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알게 되고 드디어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켰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이며 오늘 본문의 베들레헴이 다윗의 동네로 일컫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각기 아들과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겼으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런 나오미와 룻을 통하여 약 1300년 후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들어오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 가운데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짐승의 구유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유의 주님이시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서슴없이 비우시고 낮추신 그 겸손을 성탄절을 맞이한 우리는 꼭 본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우리는 “기다림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다”라는 교훈을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기다림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를 문제에서 건져줄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하염없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것,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것,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로 “나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기다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동적 소비, 저축 거부 등의 심각한 재정 관리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재정 혼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공급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된 기다림의 예입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을 위배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선한 청지기의 자세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산안 세우기, 십일조, 충분한  돈이 있을 때까지 구매를 미루는 것 등의 새로운 재정 습관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적 기다림은 수동적이 아닌 동시에 불유쾌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 또한 아닌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확신과 자제력과 기대를 가지고 행동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저는 당신을 신뢰할 것이고, 당신께 순종할 것입니다. 제 삶의 환경들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제가 선택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대안입니다.”라고 매일 다짐하겠다는 결정입니다. 따라서 성서적 기다림은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신뢰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편4:5).

주님을 기다리려면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성경에 말씀하신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사물을 보아도 어린 아이가 사과를 보는 것과 물리학자가 사과를 보는 것은 관점이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만을 보는 인간과 영원한 관점에서 보시는 주님과는 같은 사물과 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른 관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후서는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우리의 백만 달러가 당신께는 한 푼에 불과하겠군요” “그래” “주님, 제게 한 푼만 주시겠어요?” “좋아, 여기서 일 분만 기다려라.” 사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은 원하면서도 하나님의 시간은 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푼은 원하지만 하나님의 일 분은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하나님이 우리 안과 밖에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릴 때 하나님이 제대로 일하신다는 점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2:3-4).

매일말씀나눔

2019.12.16 – 20

기다리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신속한 행동가이기를 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벳세다에서 베푸신 예수님은 저녁이 이르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서움에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며 구원을 요청할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들은 신속하고 분별력 있고 단호하였습니다. 그분은 경적을 울릴 찰나도 낭비하지 않스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기다림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 3시가 지나서야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 안에 있었던 것은 전날 해지기 전부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리 오래 지체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폭풍과 동시에 나타나시거나 그보다 조금 전에 나타나시는 것을 원하였을 것입니다. 롤린슨은 핍박의 폭풍을 겪고 있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연약한 마음들은 주님이 그들을 버렸는지 의심하거나, 그리스도의 실제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그들을 보고 계시며….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밤 사경’에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했다.” 우리도 같습니다. 삶에서 여러가지 소원과 간구의 제목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신속하게 해결해주시는 경우도 많지만 때로는 기다림을 배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인내를 온전하게 이루시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믿음의 핵심은 인내이고 인내의 중요한 요소는 기다림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대표적인 예언이 이사야 11장 1-4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고 그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다는 예언으로 예수님께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그리고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또 다음 세기로 계속해서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성경에 집중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시므온 같은 사람들만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라고 묘사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다림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30년간 나사렛에 은둔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고 나서 3년 반이 지난 후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하심을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기다려야 하였고, 오신 뒤에도 주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왜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4)

잘 기다리는 능력은 성숙의 척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만족의 연기(延期)를 감내하는 능력” 이라고 부릅니다. 스코트 펙은 “만족의 연기란, 고통을 먼저 만나서 경험하고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대니얼 골먼이라는 학자는 삶의 성과는 인지 지능보다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서 지능의 핵심에는 만족을 연기할 수 있고 충동에 휘둘려 살지 않는 능력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의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바로 ‘마시멜론 테스트’입니다. 마시멜론이라는 과자를 둔 방 안에 네 살짜리 아이가 있고 실험자는 그 아이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실험자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과자 두 개를 먹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지금 당장 먹기 원한다면 하나만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충동과 억제, 이드와 에고, 욕망과 통제, 만족과 연기 사이의 영원한 전투가 벌어지는 소우주”인 그 어린 아이의 영혼에는 큰 시험이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실험자가 나가자마자 금방 먹었고, 어떤 아이는 한 개를 더 먹으려고 노래 부르기, 혼자 애기하기, 손가락 가지고 놀기 등 온갖 전략을 개발해 내면서 참고 실험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불과 네 살이 표현한 이 성격들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영향은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팀이 이 아이들을 오랫동안 추적 조사함으로 밝혀냈습니다. 그 성격들은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팀은 마시멜론을 가지고 네 살짜리 어린아이들을 테스트한 후 그들을 오랜 기간 추적 조사를 하였습니다. 네 살일 때 기다릴 수 있었던 아이들은 기다릴 수 없었던 아이들보다 더 사교적이고,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고, 압력을 받을 때 덜 포기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참지 못하고 즉시 과자를 집은 아이들은 더 고집이 세고 우유부단하며, 좌절에 더 쉽게 격분하고,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SAT 라는 미국대학학력고사의 성적에서도 과자를 기다린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210점이 높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과자를 먼저 집은 아이들은 여전히 욕구 충족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충동 통제 능력의 부족이 비행, 과소비, 이혼과 연관성이 높다는 것 또한 연구 결과 드러났습니다. 골먼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 잘 기다리는 능력을 ‘가장 중요한 적성’이라고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과자에 대한 테스트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하물며 어릴 때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가르침을 받아 성장한 아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충동에 대한 통제 불능과 인내하며 신뢰하기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속성의 핵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한 입 베어 먹은 이후로 삶은 늘 그래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와 반대되는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그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서 그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만드시고, 그 결과 성령님의 열매가 우리의 삶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1-5절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담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고 가르친 뒤, 우리의 남은 삶은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큰 기쁨에 차서 살아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의 기대가 결코 현재 겪는 환난 때문에 감소되지 않는다고 그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을 의미)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병이나,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나,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나,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되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즉 죄인이며 원수였을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아들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어찌 사랑하시며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의 길을 걷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숙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 그것이 바로 ‘경건’이며, 애초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매일말씀나눔

2019.12. 9 – 13

두 번째는 노출의 법칙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은 가장 많이 노출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가는 것이 곧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결국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사람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노출의 법칙은 중력의 법칙과 같습니다. “아니, 이 값비싼 골동품 크리스털 꽃병을 시멘트 바닥 위에 떨어뜨렸더니 깨져 버렸어. 이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사람들은 노출의 법칙에 대해서는 크게 놀랍니다. 어린이들은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수백 번 나오는 폭력과 살인에 노출됩니다. 비디오 게임에서도, 대중 문화 속에서 조직 폭력의 상징들과 이미지들이 미화되는 것을 계속 보면서 성장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사람들은 축구 경기 도중 관중석에서 일어나는 패싸움이나, 심각한 학교 폭력을 보고 경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자료를 읽고, 이 장면을 보고, 이런 왜곡된 말들을 들을 수 있어요. 그래도 나는 정말로 영향을 받지 않아요. 나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든요.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 버려요.” 그러나 현대 사회 과학자들은 이제 성경이 말하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참석하는 행사, 읽는 자료, 듣는 음악, 보는 이미지, 남과 하는 대화, 즐기는 공상들이 모두 우리 마음을 형성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소망, 인격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노출의 법칙을 숙지하고 각별히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그런 인격을 어떻게 하면 형성할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직접 말하는 성경, 자료, 책, 사람, 예배, 기도 등에 여러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 성장의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5-6).

시편 기자는 경건한 자들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묵상은 음식을 씹듯이 마음 속에서 성경말씀을 찬찬히 소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암송은 마음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맞추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성경 암송의 핵심은 우리가 많은 구절을 암기할 수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경 구절을 반복하여 마음에서 되새길 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과의 관계 세상의 문제 등에 대하여 성서의 생각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어떤 분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고 적힌 카드를 받았습니다. 이 구절을 계속해서 생각하자 그분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소망의 원천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내 몸을 단순한 기쁨과 평강이 아닌,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케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가 단순히 소망을 갖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망이 넘치기를 바라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 과정은 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원천입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에, 혹은 스포츠 신문을 읽고 났을 때 가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입니다. 영적인 존재들은 생각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무장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무슨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암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깊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 자라나도록 힘을 기우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우리의 마음의 초점을 잡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침례식이나 성찬식 혹은 결혼식과 같은 ‘의식rituals’입니다. 의식은 건강한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의식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가정이나 결혼 생활에서 의식이 적다는 것은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결혼 기념일을 중히 여기며,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은 역시 부모님의 생신을 항상 마음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이런 일들을 가족과 함께 기념하는 것이 소중함을 모두가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 집중하게 돕는 의식과 상징을 만들어 놓는 것 역시 중요한 영적 성장의 방법입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교회에 가서 주님을 예배하는 날로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일주일을 살아가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이 안정되며, 문제가 있더라도 7일 내에 해소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설교와 찬양 그리고 기도를 통해 주님께 예배드림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동시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사무실에 십자가에 사용되었을 것 같은 크기의 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면서 때로 그것을 붙잡고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당하신 고통을 기억하고 마음을 다진다고 합니다. 또 절친한 친구가 어떤 단어가 씌어진 돌을 주면서 그 단어와 같은 특징을 목사님의 삶 속에서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이 보기에는 그런 특징이 자신 안에 별로 없기에 그런 특징이 나타나기를 매우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준 돌에 쓰인 그 단어가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지고, 때때로 목사님은 그 단어를 가지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가톨릭에 특히 이런 유의 상징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 개신교 특히 침례교는 상징들을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에게 주님과 동행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들 – 성경책, 기도문 등 – 을 주변에 두고 주님을 묵상하는 것도 믿음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11:24-25).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5세기 초엽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하였던 성 패트릭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기도문을 받아 액자에 걸었는데, 이것은 로마의 갑옷을 의미하는 ‘로리카’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로리카는 착용하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나는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통해 일어납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나를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내 앞을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통해/ 내 말을 들이시는 하나님의 귀를 통해/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통해 일어납니다.

나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내 앞에 계신 그리스도, 내 뒤에 계신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내 밑에 계신 그리스도, 내 위에 계신 그리스도, 나의 오른쪽에 계신 그리스도, 나의 왼쪽에 계신 그리스도, 내가 누울 때 계신 그리스도, 내가 앉을 때 계신 그리스도, 내가 일어날 때 계신 그리스도,

나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의 입 속에 계신 그리스도, 나를 보는 모든 사람의 눈 속에 계신 그리스도,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의 귀 속에 계신 그리스도,

오늘 나는 능하신 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기도문을 읽으며 자신도 그 안에 보호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기도문이나, 성경 구절 등을 걸어놓고 혹은 비치하여 두면서 그 기도문 등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도 영성생활에 여러모로 유익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소망에 초점을 둔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암 진단을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미국의 한 여성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례 예배가 어떻게 드려지길 원하는지 상의하였습니다. 자리를 뜨기 전에 그녀는 “하나 더 있어요”라는 말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오른손에 포크를 든 채로 묻히고 싶어요.”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식사가 포함된 교회 행사에 갈 때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주 요리의 그릇을 치우는 사람이 ‘포크를 들고 계세요’ 라고 속삭여 줄 때였어요. 그 말은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에요. 젤리 같은 게 아니라 케이크나 파이처럼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제가 손에 포크를 들고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이 포크는 뭐예요?’ 라고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목사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포크를 들고 계세요’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 의도는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생전에 그녀가 입은 옷, 읽은 성경 등을 둘러 보고는 모두 똑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포크는 뭐예요?’ 목사님은 이 여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누구에게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날은 축하의 날입니다. 진짜 파티가 이제 막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낙심했거나 시험에 빠진 모든 이에게, 꿈을 상실하고 마음이 하찮은 일들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밑을 내려다보지 말아라. 포크를 들고 있거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