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요셉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읽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얼굴에 드러냅니다. 친구, 가족, 이웃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지 주목하고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야만 합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자기 몰두는 자기 파괴와 외로움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동료 죄수들에 대한 배려를 질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은 심란한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도움을 줄 순간을 포착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데 내게 고하소서.” 술 맡은 관원이 포도 나무와 포도 송이에 관한 꿈을 이야기 하자 요셉은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할 것을 알려 줍니다. 이에 반해 떡 굽는 관원의 꿈 이야기를 듣자 요셉은 사흘 안에 사형 집행 당해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자신의 석방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 석방이 됬지만 이내 요셉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셉은 실망을 씹으면서 2년을 더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도대체 요셉의 고난은 언제 끝날 것으로 생각됩니까?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 하염없는 인내는 우리의 완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보다 훨씬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나간 뒤 기억함을 받지 못하고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종종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요셉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중요한 대목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은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최고의 날들, 즉 이집트의 국무 총리, 리더로서의 영향력, 아버지와의 재회, 형들과의 화해는 고난의 폭풍 후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그런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통상 신자들이 괴로워 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체 안’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타인이 나의 인격을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기하는 형들도, 어리석은 아버지도,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도, 잘 잊어버리는 술 관원이나 거만한 파라오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누림을 가질 것이고, 현 생애에서는 어느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든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항상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나쁜 소식이 결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과 전혀 다름은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 손에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 하나 풀어가시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일까요? “더 많이 사랑하라”는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핵심일 수 있지만, 가장 자주 하신 명령은 아닙니다. “교만하지 말라”나 “겸손하라”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명령보다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명령, 하나님이 가장 빈번히 반복하시는 지시는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나를 신뢰하라,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사실 두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의 징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른 어떤 말씀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적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이유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항상 필요합니다. 로이드 오길비는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총 366번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1년에 365일에서 윤년까지 위한 개수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범브린트 목사님 역시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꼭 366번 성경에 나오는 것을 투옥 초기에 발견하고 그 힘으로 15년 간의 루마니아 감옥 생활을 견디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만,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시고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을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세 살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합니다. “애야, 펄쩍 뛰어. 겁내지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합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수영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밀려들어 옵니다. 그러나 아빠가 물속에 계십니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하였습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입니다. 신뢰는 말합니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합니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 가에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해야만 합니다. 결정하려면 두려움이나 자신감 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내면에는 작은 의지의 조각이 있고, 그것으로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만일 아이가 뛰어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물이 덜 무서워질 것입니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다음번에도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신뢰가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적혀 있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이야기에서 두려움(무서움)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각 한 번씩 등장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역시 주어집니다. 각 경우를 생각해 보면서 두려움의 본질을 파헤쳐 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두려움은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이 폭풍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오해한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에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데일 브루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기를 내거라! 내가 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을 알리시는 것(It’s me)이 아니다. ‘스스로 계신(I AM)’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계시인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너를 사랑하였은즉,” 또 다른 두려움은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든 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들어 걷기 시작하였을 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인식하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상황의 주관자시라는 확신을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물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걱정과 염려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가장 빨리 침몰시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훼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2-34).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스도(2)
매일말씀나눔
2019. 10. 21 – 25
죄는 매우 끈질긴 추격자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요셉처럼 죄에서부터 도망가서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굳게 섰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고용주에게 충실했고 유혹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이겨 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보상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때때로 보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손에 들고 서 있으며, 그것은 요셉을 불리하게 만든 증거로 전환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고소를 듣고 분노했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쁜 소식들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 가운데 익숙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서 감옥행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쪽을 선택하였지, 모든 것을 갖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거기에 없다면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을 400년 뒤 모세가 본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성경을 보면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들은 호렙 산 꼭대기에서 혼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도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나 사도 바울의 경우 같이 어쩌다 바다 한가운데서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험한 폭풍과 사악한 세력의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고양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하고 두려워서 낮아졌을 때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폭풍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워 할 때 오시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우면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폭풍치던 날 밤 갈릴리 호수에서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찾아오신 것과 같이, 감옥이라는 두려움의 장소에 떨어진 요셉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되었고 죄수들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되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요셉이 성실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이 요셉에게 맡긴 모든 일이 제대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감옥에는 많은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간수장은 책임을 져야만 하나, 유독 요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아무런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고 평화롭게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사 우리 모든 일에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그러던 중 요셉이 관리하던 감옥에 떡 굽는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이 죄수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시중들던 요셉이 어느 날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들에게 어떤 이유인지를 물었습니다. 사실 요셉과 이들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왕의 죄수를 다루는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망스러운 사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실망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계가 좁아지고 오직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이 무감각하게 굳어지고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만 이렇게 어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목하고, 안부를 묻고,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가능합니다. 이어령 선생의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7-18)
박효진 장로가 쓴 ‘하나님이 고치질 못할 사람은 없다’에는 사형수들에 관해서도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개화된 오늘날도 교도관들이 교도소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 천년 전 이집트의 감옥에서 간수장의 업무를 위임받은 죄수 요셉은 일이 막중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힌 일이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해서 속을 삭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타인의 안녕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만큼 요셉의 신앙이 성숙해 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넘어지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산꼭대기입니다. 혜택받고 부러움을 사는 위치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 지고, 자신의 그 자리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는 경향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풍을 겪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노예로, 죄수로 산 것은 우연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은 다른 것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거나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공감능력 없이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들고 일어난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의 말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요?”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아요?” 결국 마리 앙트와네뜨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다 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
스코트 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며 문제의 고통도 환영하는 법을 배운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결코 형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역경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채색 옷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엄청난 꿈들과 높은 위상이 형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감옥 안에서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요셉에게 긍휼의 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범죄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의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사정을 배려 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각박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정의와 사랑이 균형잡혀야 하며, 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경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은총 중의 하나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요셉은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와 죄인의 처지에 놓이면서,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총리에 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능력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수요묵상
누가복음 12: 22-34
공자는 전 중국을 주유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 통치에 도움을 줄 나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초기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던 공자 일행이 광 땅을 지날 때였습니다. 당시 광 땅 사람들은 양호에게 피해를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양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공자를 보자 양호로 착각해 공자와 그 제자들을 포위하였습니다. 5일간 발이 묶인 일행은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하늘의 명이 주어졌음을 자부하고 의연하였습니다. 즉 요.순.우.탕에게 드러났던 도가 문왕에게 이어졌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이 도를 없애려 하였다면 어찌 후사자인 나를 두었겠는냐? 내게 하늘의 사명이 있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권경자 교수는 해설하기를 “이러한 확신과 자부심이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놓고 인류의 길을 만든 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권경자, 논어, 266-7).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은 지진의 영향으로 건물이 흔들리자 두려움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몹씨 부끄러워 하였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지 수십년 어찌 이런 지진에 동요할 수 있겠는가 라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받아들이기 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물을 조성하시며,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도록 명령하셨으며,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권능을 주셔서 이집트로 보내셨고, 거기서 9가지 이적을 행하하도록 하셨으며, 마침내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홍해를 가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이 백만 명에게 말씀하시며, 율법을 주신 바로 그분이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유대와 갈릴리 땅을 두루돌아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시다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주님이시자 머리이시며, 교회를 위하여 만물의 주님으로 등극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섬김과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주고 배려해 주며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에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유교와 모든 종교의 이상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회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 나라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근거이며, 이런 삶의 자세 위에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위안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많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필요한 양식과 집 그리고 돌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특권을 마음에 새기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주님의 권고를 삶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을 위해 은행에 돈만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 역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스도(1)
매일말씀나눔
채색 옷을 입음으로써 형들의 질투를 사고 있던 요셉은 드디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의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꿈들은 놀라운 요셉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고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불러서 두 번이나 자신의 꿈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처음 꿈은 열 두명의 형제들이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이 묶은 곡식 단은 일어서고 다른 모든 곡식 단들은 요셉이 묶은 곡식 단 앞에 절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꿈은 더욱 가관으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형들에게 잡혀 은 20량에 노예로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요셉은 폭풍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돈 한 푼 없으며, 아무 힘도 없으며, 친구도 집도 없고,. 삶은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고 우리의 인격은 단련됩니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할 때에도 배 밖으로 나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평온할 때는 많지 않습니다. 조만간 결혼, 일, 사역, 재정, 건강에 폭풍이 엄습합니다. 폭풍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폭풍을 잘 이겨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질들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5:7-9).”
폭풍을 이기는 사람의 주된 특징은 스트레스가 가득한 환경을 잘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이겨 낸 전쟁 포로나 인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식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행동은 엄청난 제한을 받은 대신, 무엇이든 아직 남아 있는 통제력의 가능성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이제 요셉도 죄수입니다. 집을 멀리 떠나 아버지와 이별하고,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의 채색 옷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의 채색 옷과 그것이 상징하던 삶은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는 그 한가운데서,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자유를 잃었지만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놀랄 만한 주도력과 자율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동적인 자세를 거부한 포로와 인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은 먼저 식단을 통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또한 산헤드린 앞에 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대한 함구령을 석방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되물었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어떻하였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무력한 포로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4-26).
노예의 삶으로 떨어진 요셉의 상황은 결코 그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맡은 일에 부지런히 전념하였습니다.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발전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은, 단지 일꾼으로서 밭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집 안에서 일하도록 승진되었습니다. 실무를 경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요셉은 보디발의 보좌관으로 승진합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리고 나서 보디발은 곧 그를 가정 총무로 명합니다. 요셉은 전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완전히 신임하여 장부 검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고작해야 “오늘 저녁은 된장찌게인가 아니면 김치찌게인가?” 하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써 요셉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일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삶의 자세 때문에 훗날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어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역할, 즉 가족과 세상을 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6-7).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두는 것은 인내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달리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쉽습니다. 그 자리에 머무르며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것보다 쿵쾅거리며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것이 쉽습니다.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차라리 그만두는 방법이 항상 달콤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어. 벗어나고 싶어. 이혼하기도 힘드니 그냥 이렇게 남남처럼 살지 뭐. 더는 노력하지 않을 거야.” 이때 나오는 대표적인 행동이 졸혼 혹은 별거입니다. “이 일은 내가 꿈꿔 왔던 것이 아니야. 더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하려 했다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 떠나겠어.” 한 사람이 앤서니라는 사막의 교부에게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부는 대답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고 당신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말라.” 어려움을 만나 포기하지 않고 통제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도 충성하겠다고 결정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몰아치는 바람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걸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듯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요셉은 이방인이자 노예였지만, 인내하여 드디어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른 종류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제 또 다른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유혹이라는 무서운 힘이었습니다. 요셉은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 보디발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끈질겼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결국 기회를 엿보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 죄악으로 이끌었을 때 요셉은 그 옷을 벗어버린 뒤 도망하여 그 집을 나갔습니다. 죄는 자신이 대상자를 이길 때까지 끈떡지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도망가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친구 중 한 분이 회사의 중역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출장을 갔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력했던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호텔 로비에 앉아 실패를 자책하며 외롭게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보디발의 아내’가 접근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유혹이 갑자기 저항할 수 없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갔어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실패를 겪은 사람은 요셉이 당한 유혹, 삶이 계획한 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 다가오는 유혹을 압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평상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습작전과 같은 죄의 창날은 평소에 기도와 경건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여지없이 가슴이 뚫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13).
유대인의 유월절과 그리스도
매일말씀나눔
케냐의 고아원에 많은 약품을 기부하도록 만든 밥은 다시 방문 요청을 받고 케냐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고아원은 케냐에서 가장 큰 고아원이었기 때문에 대통령도 축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대통령은 밥에게 수도 나이로비를 관광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관광 도중에 그들은 한 감옥을 보았습니다. 밥은 그곳에 있는 죄수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정치범입니다.” “이런 처사는 옳지 않습니다. 그들을 풀어 주셔야 합니다.” 밥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밥은 관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국무성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밥입니까?” “예” “최근 케냐에 가셨습니까?” “예” “대통령에게 정치범들에 대해 언급하셨습니까?”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을 풀어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성 관리는 자신들이 그 죄수들을 석방시키려 수년 간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정규 외교 채널과 정치적 수단은 막다른 골목에 닿았는데 이제 죄수들이 석방되었고, 국무성은 그것이 밥 덕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표하려고 전화했던 것입니다. 몇 달 후, 케냐 대통령이 밥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정부를 개편하고 새로운 각료들을 선출하려는데, 그 중요한 업무를 하는 사흘 동안 밥이 와서 기도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밥은 다시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케냐로 날아가, 그 나라의 리더가 정부 각료를 선택할 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밥이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기도하고 그 나라가 도래하도록 일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부분을 주님이 채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4).
그렉 르보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만 약속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행복할 것, 두려움이 전혀 없을 것, 항상 문제에 처하리라는 것.” 폭풍우 치는 날 배 밖으로 나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야흐로 베드로는 영웅이 되려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배 밖으로 나가는 어려움은 이미 겪었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걷는 일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습니다. 폭풍이라는 현실을 바라본 것입니다. 처음의 열정이 가라앉자 폭풍이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람을 본 것입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한동안 믿음 안에서 걷던 사람이라도 폭풍 때문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고 무서워하여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전력투구해야 할 임무를 맡거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큰 모험을 시작할 때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희망과 소망이 가득합니다. 배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곧 영웅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 낼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현실이 다가옵니다. 바람을 보게 되며, 장애물에 직면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갈등이 우리의 사기를 꺾고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굴복하여 패배하나, 어떤 사람들은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고, 결국 생존뿐만 아니라 성장하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낼까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폭풍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견딜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몇 가지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먼저, 이겨 내는 사람은 자신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보기보다, 자신이 운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자각한다. 두 번째로 이겨 내는 사람은 자기 가치를 배반하지 않는 용기가 크다. 세 번째로 이겨 내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목적과 의미를 발견한다 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물 위로 걷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저 강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특성 하나 하나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여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형적인 분이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제들에게 잡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량에 넘겨졌습니다. 그 후 420킬로 남쪽으로 떨어진 애굽으로 끌려가 결국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거기서도 굴하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갔으며, 하나님께서 범사에 그와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가정총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자 모함을 받았고 노예보다 더 못한 죄수의 신세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도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섭리가 또 작동하여 감옥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만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런 요셉의 이야기를 가지고 인생의 폭풍을 이겨내는 요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누구든 먼저 죽은 사람이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천국에 야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 두 친구 중 한 사람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친구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천국에 야구가 있다는 거야. 나쁜 소식은 네가 이번 금요일에 투구할 거라는 거야.” 이렇게 우리 인생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며, 요셉의 인생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이 사랑받는 것을 싫어했다”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요셉의 아버지가 그에게 아름다운 겉옷을 주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형들이 그 옷을 찢고, 피를 묻혀 그가 죽은 것처럼 가장하고, 먼 나라에 노예로 팔았다” 이것은 매우 나쁜 소식입니다.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린 요셉의 인생 또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계속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면서 감옥에 2년 이상 갇혀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궁금합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복되는 모든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반전입니다. 어떻게 끝나는가? 나쁜 소식으로 끝나면, 그 전의 모든 좋은 소식은 헛된 희망만 불러일으킨 잔인한 익살일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으로 끝나면 이야기 전체가 만회되고, 모든 나쁜 소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기에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요셉이 노예로 팔리기 전 청소년 시절에 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채색 옷은 그가 가장 총애받는, 선택된 아들임을 말해 줍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삶을 약속하는 징표였습니다. 형들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양 떼가 어떤지, 일은 잘했는지 물었지만, 요셉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의 얼굴은 환해지고 눈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아버지가 자랑하고 다니는 아들이었습니다. 백 가지도 넘는 방법(대부분의 부모는 인식하지도 못하지만 어린이들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음)으로,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채색 옷은 그것이 가장 확실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겉옷이 가족의 문제로 불거진 것은 단지 비싸고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의복은 신분을 표현했습니다. 채색 옷은 요셉이 아버지의 귀염둥이라는 징표였습니다. 노골적인 편애를 공개적으로, 눈에 보이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그 옷을 입을 때마다 형들은 어뗳게 느껴졌겠습니까? 자신들은 결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채색 옷은 가족의 수의(壽衣)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형들은 폭발하였습니다. 요셉의 채색 옷을 벗겨 찢은 후 그를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인생의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가난한 어느 집에서 아들 중 한 명에게만 그것도 오직 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을 대어주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그런 불공평을 평생 기억하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 각자를 편애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여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하나님의 능력
에베소서 1:15 – 19
논어 옹야편에 보면 병에 걸린 백우에 관하여 적고 있습니다. 백우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백우가 병을 앓았다. 공자가 문병 가서 남쪽 창문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 아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백우는 덕행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병은 나병이었습니다. 온 몸이 썩어들고, 끊어지는 나병은 천형의 병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자의 마음은 찢어지는듯 했을 것입니다. 그의 투병 소식에 공자가 병문안을 가자 백우는 임금의 방문을 맞이하듯 남쪽 창문 아래 누웠습니다. 공자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우는 자신을 찾았지만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선생님을 위해 창문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죽음을 앞둔 제자의 손을 잡은 공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덕이 있는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를 거듭 읇조리는 공자의 탄식은 알 수 없는 하늘의 뜻에 대한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백우의 병을 운명으로 돌리는 공자의 착잡한 심경이 느껴진다고 권경자 교수는 논어 주석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권경자, 논어, 168-69).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내려올 때 문둥병 걸린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나병 환자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 앞에 나타나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탄원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내장이 끊어질 듯한 긍휼함으로 가득차셔서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자 그 나병이 즉시 떠나고 그는 완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불러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고”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물론 나병 환자는 주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알림으로 주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시지를 못하고 밖에 계시나 사람들이 주님을 보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공자와의 분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니 그것은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공자는 나병을 대하여 어쩔줄 모르며 탄식할 뿐이었으나, 주님은 직접 손을 대시면서 고쳐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구약성경에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례는 오직 하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 엘리사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건입니다. 그 능력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낮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사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이를 위해 잠시 9월 16일 광주에서 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연설에 대한 중앙일보의 보도를 들어보겠습니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에 대한 후속 조치와 관련해 “법원에 드러난 문제를 치유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결국 재판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관료제를 타파하기 위한 고법원장 승진제 폐지, 법원장 추천제 등 제도적 개혁안이 있지만, 그것은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투명한 절차를 통해 흔들리지 않고 정의로운 결론을 내는 바람직한 재판을 하는 것 말고는 (국민 신뢰를 얻을) 방법이 없다”며 “좋은 재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고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특강에 참여한 학생이 소신을 지킨 판결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묻자 김 대법원장은 법관으로 처음 임관했을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법관이 될 때 하루만 판사를 하게 해주면 다음 날 사표를 내겠다는 생각이었고, 출근 첫날 한 일이 사표를 쓰는 일이었다”며 “지금도 대법원장실 책상 서랍 왼쪽에는 사표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법관이 된 이유는 저의 소신에 따라 재판을 하라는 것인데 그 외 다른 이유로 좌고우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재판은 그럴 수 없다.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회개하게 하시고 당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 살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고, 이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