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현대 사회는 이제 소명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직업이라는 측면을 더 많이 부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직업에 인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어떤 대학 교수는 직업이야말로 사람들이 경배하고 시간을 바치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족, 공동체, 신앙에 헌신하기보다는 직업을 통해 의미, 인간관계, 자존감을 얻길 기대합니다. 직업과 소명을 분명히 나누기는 어렵지만 이를 구분해 본다면, 직업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소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직업은 지위, 돈, 힘을 약속하지만 소명은 일반적으로 역경과 심지어 고난, 하나님께 사용될 기회를 약속합니다. 직업은 상향 이동성을 갖지만 소명은 일반적으로 하향 이동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는 일도 발전과 성취를 지향한다면 직업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면 사업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긱기 위해 한다면 그 사업이 소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직업은 은퇴와 많은 ‘물건’을 남기고 끝날 수 있지만 소명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게 됩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를 담임하였던 목사님의 결정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귀감을 줍니다. 그분은 부임시 수백명에 불과하였던 교회를 이 천명의 교회로 성장시켰으나 목회 노선에서 당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입 다물고 조금 더 목회를 하고 은퇴하면 많은 물질적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으나, 주님께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니, 만약 물질적 보상을 받으면 자신이 그 동안 주님을 섬긴 일이 돈을 위해 한 것처럼 오인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목사님은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성장하고 있는 그 교회를 그냥 떠났습니다. 이렇게 소명을 따르는 길은 주님의 칭찬만을 바라고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성경에는 노예, 포로, 유배되고 투옥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들의 경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모두 비범한 방법으로 소명을 성취하였습니다. 파라오는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모세는 소명을 가졌습니다. 보디발은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요셉은 소명을 가졌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다니엘은 소명을 가졌습니다. 아합은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엘리야는 소명을 가졌습니다. 빌라도는 훌륭한 경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소명을 가지셨습니다. 경력과 직업에 대한 보상은 매우 가시적이면서 한시적이지만 소명의 중요성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경력의 끝이 소명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사용되지 못하는 스페어 부품이 아니며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조립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조립은 주님께서 소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이끄시어 일생을 통해 만들어가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크신지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묘사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반석, 요새, 강한 성, 용사이시며, 구름을 병거로 삼고 바람의 날개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언젠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넘어가실 때 큰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며칠 전 태풍 링링이 우리 나라를 강타하였을 때 그 위력을 실감하셨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몰아 닥치는 광풍 역시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엄청난 물결을 수반하여 조그만 배에 탄 예수님의 일행들은 공포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두려워 하던 제자들이 와서 깨우자 비로서 일어나신 주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고 그저 뱃전으로 가셔서 바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멈춘 것은 물론 뛰놀던 물결조차 즉시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기사만 가지고는 용감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에 부족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확신시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인간의 마음과 인격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려면 특정한 행동과 경험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특정한 행동과 경험은 우리쪽에서는 위험이 따르며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꾸짖으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이러 저러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능히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1:9)

금요일터예배

성경에서 순종하기 가장 어려운 명령 중 하나는 자신을 “정직하게 판단(sober judgment)하라”는 말입니다. 나의 열정, 은사, 한계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인생의 큰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려면 엄청난 자기 인식과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의 이해를 도와줄 다른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명료화 위원회’를 구성한다면 어떤 친구가 좋을까 생각하니 밥 버포드가 떠올랐습니다. 밥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방송계의 재벌이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그의 훌륭한 배에서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책 《하프타임》의 표현을 빌리면, “성공에서 의미로” 움직이길 원하게 된 것입니다. 밥과 아내 린다는 한 조언자와 오랫동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조언자는 밥의 목적 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 후, 약간 미심쩍은 다음 단계를 제시했습니다. “당신의 회사를 팔아 지금까지 우리가 의논한 사역 프로젝트에 투자하십시오.” 밥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그 결정의 의미에 깜짝 놀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린다도 나만큼 놀란 것 같았다. 전형적인 목사, 선교사, 수도사의 모습을 생각하는 아내의 머리 속이 내게도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머니가 텅 빌 때까지 돈을 나누어 주는 박애주의 부부가 될 수 있을까? 목사와 사모의 옷차림을 해야만 하는 걸까?” 밥은 어떻게 그의 ‘명료화 위원회’(물론 그의 책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를 소집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과 논의 끝에 밥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전략적 사고와 조직 리더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회사를 파는 대신 이 분야에서 섬기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퀘이커 교도의 전통인 ‘명료화 위원회’가 모이는 목적은 조언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그룹은 그저 질문하고, 사려 깊게 듣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소명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밥 버포드는 그의 책 《하프타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소집한 ‘명료화 위원회’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전에 오랫동안 조언을 받은 사람의 생각대로 회사를 팔았다면 엄청난 유익을 낳을 발판을 잃게된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밥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리더쉽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1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까지 주요 교회들의 리더십 개발을 돕는 사역을 매우 즐겁게 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성급하게 행동해서 첫 번째 조언자의 말을 따라 사업을 매각하고 돈을 나누어 주기만 했다면, 그가 수행하였던 성과와 성취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가 밥에게 한 조언 역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에서 의미를 찾는 제 2의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45세까지는 두 번째 혹은 이에 상응하는 섬길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55세까지는 그 일에 왕성하게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퇴 후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발휘할 큰 장점은 이미 상실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은퇴 후로 미루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찾고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좋은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2-13).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아서 밀러라는 분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그 일을 받아들이거나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죄악이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디자인이나 목적에 맞지 않는 노동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것은 – 아무리 월급이 많더라도 –  당신이 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아니다.” 소명을 분별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뚝딱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결단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밥 버포드는 “저비용 조사”를 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소명을 테스트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것 같은 분야에서 당신의 성과가 어떠한지 연구해 보십시요. 밥의 경우 저비용 조사의 시작은 CEO위치를 유지하면서 대형 교회 목회자들을 모아 조직에 관한 자신의 전문 지식이 도움이 될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의 인생 후반부의 우선적 소명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게다가 조사 비용도 매우 낮았기 때문에, 조사 결과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쉽게 다른 분야로 조사 방향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충동적으로 일을 그만두고 어느 교회나 비영리 기구의 임직원으로 일했다면, 소명도 찾지 못하고 계속 탐구할 기회마저 잃었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예언 사역을 하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목자의 위치를 유지하였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교회 개척을 하면서도 장막 만드는 생업을 유지하였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때로 사람들은 천직의 개념을 매우 로맨틱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꿈에 그리던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지상의 최강자인 파라오에게 가거라. 그런 후에 노예된 나의 백성을 아무댓가도 받지 말고 놓아주라고 말하라.소심하고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험한 광야로 가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고 말하고 이끌고 나와라. 그것이 너의 소명이다.” 모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론을 보내소서.”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폭력적인 도시 니느웨로 가거라. 네가 누군지 모르고 나를 인정하지 않을 그 거만한 자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거라.” 요나는 말했습니다. “반대편으로 가는 다음 고래가 언제 떠나죠?”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불러 귀를 기울이지 않을 백성에게 설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힘들어서 예레미야는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에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그런 별명을 원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름받은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그 일에 매우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를 이끌라고 기드온을 부루셨을 때, 왕을 거역하라고 에스더를 부르셨을 때,메시아를 낳으라고 마리아를 부르셨을 때, 그들의 첫 반응은 “예, 하겠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다”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헨리 블랙커비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임무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임무를 수행하게 하심으로 당신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원재료”를 상관하지 않고 우리를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실 때 은사도 같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연적 재능만으로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려면, 나 자신의 자원을 능가하는 아이디어, 힘,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한 성경 속 인물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아도 많은 시간을 기울이고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겠습니까? 또한 그 소명은 여러분이 항상 바랐던 부와 명예, 안정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때로는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일에 헌신해도 결과는 좋지 않으며, 사람들이 여러분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소리치고, 여러분이 하려는 일을 막을 것입니다. 그래도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소명을 분별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시행 착오와 잘못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사무엘과 같은 특별한 소명이 오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평범한 일상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영위해 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명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할 것입니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계명이다.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인데 이것도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22:37-40 쉬운성경)

수요일터예배

잠언 22:4

62년 전 한 살 터울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오빠는 다섯 살이고 여동생은 네 살이었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장에 간 사이에 여동생이 고구마를 먹던 중 고구마가 목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새파랗게 질식되는 아이를 보고 놀란 가정부가 어쩔 줄을 몰라 무작정 시장으로 뛰어갔습니다. 장을 보다가 가정부로부터 청천벽결 같은 소리를 들은 엄마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품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의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이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부는 예정에도 없던 아이를 한 명 더 갖기로 하였고, 이듬해 다시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 25살이 되던 해 이재철 사장의 아내가 되었고, 1년 후 이재철 사장은 아내를 통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결국 신학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합니다(매듭짓기, 194). 이재철 목사님을 통해 주님의 교회와 100주년 기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흐름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때 최고의 자산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잠언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냐?” 하는 문제는 그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경영하여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전형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죄없이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십자가 형을 받고 죽으실 때도 주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옹호하실 것을 믿으시고, 천사들을 불러 그 검으로 로마군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억울한 희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굿굿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만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담당하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당신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음에서 다시 부활시키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당신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마치셨을 때 하나님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을 일으키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삶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루 하루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소명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천직(vocation)’ 이라는 단어는 ‘음성(voice)’이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려면 매우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소명을 선택’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순입니다. 소명이란 개념은 성경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거듭 사람들을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소명에는 부르는 사람과 부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는 쪽이고 하나님은 부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꾼들을 무장시키고 일을 위임하십니다. 마이클 노박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격, 재능, 갈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만물의 창조주는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철저히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것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 설령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운이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가장 높은 소명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직업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이런 가운데서 소명은 어떻게 발견되어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18:22).

예술을 하려면 재료의 속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정을 대기 전에 대리석의 성질을 연구합니다. 그들은 대리석을 쪼아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잠재성과 한계를 가진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이란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이 세상의 깊은 필요와 만나는 곳”입니다. 세상의 깊은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것은 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갈망과 열정을 품고 있습니까? 그것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육상 선수들은 3,000미터 5,000미터를 뛰는 것은 물론 42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뛰는 경주를 좋아하고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상으로 받는 트로피와 메달도 중요하지만 이들은 경기 자체를 좋아하여 경쟁하는 것입니다. 회의적인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 들어가, 그들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 주려는 선생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조직을 바라보며,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 내고 싶어 안달하는 리더가 그런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좋아하는 정원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소명을 따르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힘든 일을 당할 때에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술과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자체가 그것을 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Let your life speak).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19:5-6).

파커 팔머의 얇은 책 《네 삶이 말하도록 하라 Let your life speaks》에는 천직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파커는 교육계에서 이름이 높아져 한 교육 기관의 총장 제의를 받았습니다. 수락하기만 하면 월급, 지위, 영향력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소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 사람의 친구 여섯 명으로 구성된 ‘명료화 위원회’를 소집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위원회는 하나님의 소명을 더 분명히 분별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동안 위원회는 그 학교에 품고 있는 파커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 학교가 사회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등의 쉬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매우 간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총장이 되는 것이 왜 좋은가?” 파커는 한참 동안 대답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나는 경영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기금을 모금하는 것도 싫고….”파커, 내 질문은 자네가 무엇을 좋아하냐는 거야” 질문자는 문제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생각하고 있다구.” 파커는 약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싫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러자 세번 째 같은 질문이 날라왔습니다. 파커는 자신의 중심에서 나오는 정직한 단 하나의 답변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총장이라고 쓰인 명패가 밑에 달린 내 사진이 벽에 걸린다는 거야”라는 파커의 답변에 함께 앉아 있는 친구들은 그 말은 우습지만 매우 위험한 문제라는 것을 알자 심각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그 질문자가 침묵을 깨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자네 사진을 벽에 거는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지 않겠나?” 파커의 정신이 깨어났고 그를 각성시켰습니다. 그것은 “나는 내 자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나의 삶이 말하고 있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파커 팔머는 “당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의 삶이 말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소명은 선택이 아니라 경청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초창기부터 우리는 어떤 활동이나 존재, 행동 방식에 이끌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내가 되려면 신중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학습하고 그것으로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는지 모릅니다. 독서와 묵상과 저술과 가르침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목표는 사업에서 크게 성공하는 거야!”라고 스스로 강변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인생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팀을 이끌며 고지를 점령하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뒤에 머물러 있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신이 받은 은사를 묻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자신의 원재료를 존중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소명도 아닌, 내 은사도 아닌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대항해 귀를 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으면 막대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으면 그 한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가장 큰 한계는 주님이며 그분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5-7).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저명한 작가이기도 한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는 직선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거나, 공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내 한계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견디기 힘든 한계들도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죽을 것만큼 힘든 것이 있다. 그런 한계들에 직면하면, 가끔은 내 소명이 정말 참된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심오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진리와 지식을 탐구하는 그들은 깊은 학습 경험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일정 수준의 학습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런 정신은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그런 대화 자리에 끼지도 못할 것이다. 또 나는 엄청난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을 개발시키고 일을 성취해 내는 리더들을 본다. 나도 정말 그런 은사를 원했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면 고통스럽기만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교회에 대해 품었던 꿈을 생각해 보면, 나는 교회 개척을 열심히 도왔지만 그 교회는 내가 바라고 기도했던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나의 한계에 책임이 있었다.” 파커 팔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내가 한계에 부딪히자 특히 실패라는 한계에 맞닥뜨리기 시작하자 문제는 시작되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들을 여러 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우리 자신을 현실에 직시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매일말씀나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면서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위해 예수님의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예수님의 주권하에 있었기에, 베드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배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해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충동적인 행동 그 이상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 재정, 언행에서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서는, 그것을 영적인 언어로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랭크 파알리는 30년 간 T타입, 즉 ‘스릴 추구 성격(Thrill-seeking personality)’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위험도가 높은 상황과 행동에 매력을 느끼며,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 새로움, 다양성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쉽게 지루해 하며 끊임없는 자극을 열망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소위 ‘위험 감수 유전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유전자는 D4DR이라고 불리웁니다. 흥분을 잘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내성적이고 느긋한 사람들보다 이 유전자가 더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극한 스포츠인 암벽 등반, 페러글라이딩, 행글라이더 등을 즐깁니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큰일을 할 수도 있지만, 물질 남용, 잘못된 성적 행동, 도박 등의 파괴적 행동을 할 잠재성 역시 큽니다. 이 경우 우리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무모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타입에 속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가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숙고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와 “어리석지 말지니라”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어렵습니다. 언제 배 밖으로 나가서 모험을 해야 하는지 알려면 용기뿐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지혜, 주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분별력, 명령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충동에 휘둘리는 T타입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W 타입 즉 물(Water) 위를 걷는 성격을 찾으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과의 모험을 갈망하는 ‘하나님 유전자’가 필요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 제기됩니다. 배 밖으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과 나 자신의 무모한 충동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W 타입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명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서 분별되었고 실현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하나님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실까? 성경은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리랜드 라이켄은 이런 면에서 기독교가 매우 독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신은 일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번개를 던지는 일 외에, 제우스와 그 일동은 언제나 놀고 쉬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에게서 나누시고, 하늘과 천체를 만드시고, 물을 모으시고, 흙에서 인간을 만드시는 등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러고도 여섯 날 후, 하나님은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주가 기계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하나님이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편104편).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과 활발히 동역하십니다. 예수님 역시 일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목수로 일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조하고, 인도하고, 공부하고, 조직하고, 고치고, 개발하고, 가르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아서 밀러는 이것이 주7일 신앙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받은 재능을 사용하여 세상을 탁월하게 섬기고,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을 온전히 활용하는 소명은 거룩한 과업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소명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으나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부른 줄 알고 일어나 두 번이나 엘리에게 간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렉 르보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종종 이름을 두 번씩 부르신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야곱아 야곱아, 모세야 모세야”처럼 말입니다. 한 번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언급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조립이 필요함”이라고 쓰여진 물건을 사 주는 것을 두려워 했다. 나는 조립에 소질이 없다. 수많은 부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땅바닥에 널려 있기 일쑤다. 그 부품들은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확실한 목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특정한 은사, 갈망, 재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선물들을 잘 파악하고, 기술적으로 개발하고, 기쁨으로 겸손함으로 사용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근원적이고 높은 소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표현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도 있고,우리 후에 올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바로 지금 나타나려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자리를 맡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대 신비주의의 일파인 하싯즘의 옛 이야기를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두 개의 주머니가 있는 코트를 입어야 하였습니다. 한 호주머니에는 “너는 우주의 수억, 수백만 모래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쓰여 있고, 다른 호주머니에는 “내가 이 우주를 너를 위해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경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염려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나의 구원과 가치는 나의 직책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일은 우리가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 부을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보리 떡 일곱 개의 기적

마태복음 15장 29-39

절은풍은이라는 홍콩영화를 보면 이런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형사 두명이 주가 조작을 통해 일확천금을 하려는 범죄 조직의 활동을 도청하던 중 기가막힌 주가 정보를 입수합니다. 지금 형사 한 명은 얼마전에 병원에서 진찰을 한 결과 간암 판정을 받아 죽기전에 가족들에게 재산을 남겨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다는 결론을 가졌으며 또 한 명은 형사월급이 뻔하니 한 탕하여 많은 돈을 벌고 인생을 편하게 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투자하였습니다. 그 정보는 진짜여서 이들은 많은 돈을 벌고 이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실을 감찰관실에서 알게 되고 해당 범죄조직도 알게 되어 이 두명은 먼저 경찰이 손을 대기전에 범죄조직에 의하여 타살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 때문에 여기에 말려든 형사반장은 자기 동료 두명을 해치운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 뒤 자신은 경찰에 자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인생에 돈이면 충분할까요? 이 영화에서조차 돈만 가지고는 안되는 병과 죽음의 문제가 나와있고, 빵의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요?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하여 자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충분히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