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두려움과 아울러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요소는 편안함입니다. 버클리 대학의 연구진은 아메바를 완벽한 환경 속에 집어넣고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상적인 온도, 최적의 습도, 지속적인 식량 공급, 어떤 것에도 굳이 적응할 필요가 없는 최상의 환경이었고, 질병을 초래할 요소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아메바는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심지어 아메바까지도 도전을 필요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함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음식과 공기만큼, 변화와 적응과 도전도 필요합니다. 편안하기만 하고 아무런 도전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의의도 찾을 수 없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편안함은 우리가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편안함은 자주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학생을 성장시키려는 선생님은 답이 아닌 문제를 제시해 줍니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만,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강화되고 인내심이 강해지며 자신감이 견고해집니다.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 주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지는 몰라도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노력하고 도전해야만 강해지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개봉하지 않은 선물의 비극을 무마할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3-25).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세 번째 원칙은 “그분은 상 주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선물을 주고 회계를 결산하기도 하지만 상도 주십니다. 그분의 보물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칭찬을 하나님께 받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주인은 종들을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초청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주인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하여 오히려 더 큰 일을 맡긴 것을 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즉 주인의 의도는 “이제 네가 진짜 일을 맡을 때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엄청난 부를 주었으면서도“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작은 일에 불과하다니! 그렇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록펠러나 빌 게이츠의 재산이나 진시황의 권력이나 마이클 조던의 명성 등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주님 보시기에 ‘작은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실버 타운 같은 곳은 절대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가 지음받은 목적인 모험, 창조성, 풍성한 열매를 드디어 온전하게 경험하며 우리의 잠재성이 실현되는 궁극적인 곳입니다. 그곳에 개봉되지 않은 선물이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여러분은 풍성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정, 인간관계, 능력으로 은사의 주님께 막대한 것을 되돌려 드릴 수도 있는데,혹시 그것들을 그냥 깔고 있지는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나의 가장 깊은 꿈은 무엇인가? (2) 나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열정을 느끼는가? (3)나의 묘비에 무엇이라고 기록되기를 원하는가? (4)요즘 나는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5)나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한 모험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6)어떤 일을 하도록 내가 태어났다면, 그 ‘일’은 무엇이라고 믿는가? (7)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은사의 주님께 받아 그분의 왕국에 투자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시간이나 재능 분야에서 아직 여러분의 잠재력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은퇴하고 죽는 삶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매순간을 소중하게 취하여 “하나님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온전히 연마하고 개발하고 인내하고 부단히 힘써서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게임에 뛰어들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은사와 관련하여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특별한 재주도 없고, 뛰어난 지혜나 기술, 그리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니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여러분은 훌륭한 은사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각각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분여하였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오병이어를 취하여 많은 무리를 먹이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말더듬이 도망자인 모세를 사용하셔서 세계 권력을 쥔 독재자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전부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피 묻은 십자가에서 빈 무덤을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엉성하고 실수가 많은 열한 명의 제자로, 쇠할 줄 모르는 꿈을 가진 공동체를 창조하셔서 전 세계로 퍼뜨리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지략이 풍부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 주인 되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러분이 바치는 보잘 것이 없는 것을 취하여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잠재력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투자하면 은사의 주님이 돌아오실 때 그 진가가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물 위를 걸으려면 모험을 감수할 용기뿐 아니라 소명을 분별할 지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어리석음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문지기 베드로는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가 생각납니다. 폭주족들이 아가씨를 위협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지요. 저는 즉시 아가씨를 놓아주라고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가장 덩치가 크고 문신을 많이 새긴 놈에게 가서 그의 뒤통수를 갈기고 오토바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그의 코걸이를 낚아채어 땅바닥에 던지고는 ‘지금 당장 이 아가씨를 놔 주지 않으려면 나랑 붙자!”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언제 그랬습니까?” “바로 몇 분 전이죠.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이 사람은 즉시 맞자 죽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배밖으로 즉시 뛰어나가지 않고 먼저 주님의 허락을 구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어리석은 충동이 아닙니다. 이런 어리석은 충동을 요구한 장본인은 바로 사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이 나타나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다”라는 되지도 않는 성경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충동하였습니다. 믿음과 어리석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예전에 삼각산 부흥회에 참석하러 가다가 급류를 만난 세 처녀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실을 생각해 내고 기도한 뒤 믿음으로 급류 위에 발을 내딛다가 모두 물에 휩싸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32:9).

수요일터예배

요한일서 3장 1-3

“매듭짓기”라는 책을 보면 이재철 목사님의 젊은 시절 홍성사를 운영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배우 고은아의 동생으로1949년 생입니다. 그분이 쓴 책 매듭짓기에는 자신의 젊은 날의 소신을 적고 있습니다. 외대 불어과를 졸업한 1971년 봄 수 개월 째 신입사원으로 어느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상사가 불러 첫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세무 공무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는 이중 장부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매출을 누락하였다가 세무조사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네 준 봉투에는 10만원권 수표가 15장으로 총 15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변두리 국민주택이 60-70만원 할 때니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서 술 자리를 마련하고 봉투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세무 공무원은 자신을 불러 봉투를 주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어제 주었던 수표 중 3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달자에게 통상 30%를 주는데 이재철 사원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20%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공범을 만들어 입을 막자는 계산이었습니다. 완강하게 거부하자,그러면 받은 돈을 전부 돌려주고 엄청난 세금을 물리겠다고 협박하여 할 수 없이 받고 회사에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회사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면 결코 탈세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하였다고 합니다.  홍성사를 1974년 설립하고는 외국항공회사 총 대리점을 하면서 정직하게 세무신고를 하였으며, 여기서 그분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20대에 벤츠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1977년 출판업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출판업은 그 당시 복마전이었습니다. 모든 서점이나 출판사가 세금문제 때문에 자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결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재철 사장은 철저하게 자료를 발생시키자, 많은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한 거래업체 사장이 오더니 거래 자료를 그렇게 100% 발행하면 홍성사의 책을 사갈 서점들이 줄 터인데 그러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공급한다는 출판사 본래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관행에 맞추어 홍성사도 처신하였으면 한다는 권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재철 사장은 생각하기를 헌법에 기재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더 높은 의무가 아닌가 하고 판단하고 그 거래처 사장의 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분 일어나서 “네가 이 바닥에서 일년 이내에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소리치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이후 홍성사는 무역업에서 번 돈으로 최고의 필진을 동원하여 “홍성신서”를 출간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젊은 층에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일년쯤 지났을 때 그 도매상 사장님이 다시와서 거래 자료를 백 프로 받을 터이니 자신에게도 홍성신서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홍성사는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세무당국의 인정과세로 위기를 맞았고 1980년대에 결국 두 번이나 부도를 맞았으며, 이재철 사장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홍성사의 이런 노력은 출판업계를 자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부정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자기부정의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실로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으며,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님의 증거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겉사람이 후패하며, 썪어질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여러 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 옛날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간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무려 7년을 노력하였지만 그것을 수일이 지난 것처럼 생각한 것은 외삼촌 라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분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과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하며 즐거이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도록 만드는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지급받은 세 번째 종은 그 엄청난 선물을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대학 시절, 한 친구는 자신의 어떤 면이 그와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지 지적해 주었습니다.그러나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 오히려 그와 멀어지려고 뒷걸음질쳤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흥, 그렇게 말한다 이거지…. 난 너와 더 거리를 두고 의례적으로 대할 테니까. 네가 그 애기를 꺼낸 것을 후회하길 바래”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오토버그 목사님은 좋은 친구가 될 뻔한 사람도, 성장할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진실을 직면하길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자신은 진실을 묻어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종은 마음 속에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수탁받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였고 그래서 그 당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땅 속에 묻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두 가지의 동기로 자신의 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합니다.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전자는 우상숭배와 같으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그분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스’라는 말씀을 붙잡고 현실을 직면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6-7).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두 번째 원칙은 “그분은 회계 결산을 하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바로 이 원칙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선물을 준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라는 말로 주님은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묘하게 발뺌하여 자기 잘못의 결과를 벗어나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통 벌칙금을 내지 않으려고 경찰에게 변명한 적은 없습니까? 선생님을, 상사를, 혹은 배우자를 서툰 변명으로 속이려 한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만 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거짓말도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지만, 결산 보고에 대해서는 칼 같으십니다. 우리는 그 보좌 앞에서 잔꾀를 부릴 수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사실을 잊는지 모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괜히 외부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회계하실 것입니다. “내가 준 것으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분은 각 개인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종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은사를 묻어 버린 것을 합리화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9-10)

달란트 비유에서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을 등장시켜 이야기 하신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응과 기쁘시게 못하는 반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두 명만 등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즉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의 양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적인 삶에서 은사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은사라고 하여도 그 양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돋보이고 칭찬받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십니다. 그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보다 훨씬 큰 은사를 받았지만, 주인이 둘을 똑같이 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달란트가 다섯이냐, 둘이냐, 아니면 한 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마음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설 때는 교만과 거짓된 우월감에 빠지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뒤질 때는 비참함에 빠지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내게 주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가치 절하하여 땅에 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십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사를 주셔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파악하고, 개발하고, 투자하고, 귀하게 여기고, 누려야 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보물을 땅에 묻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주인의 부름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한 친구가 자신의 생활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그에게 다시 가서 거짓말을 밝혔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그 일을 돌이켜 보면서 목사님은 자문을 했습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지?” 그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일으키는 것은 거짓말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할 때 우리는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담합니다. 왜냐하면 나만 소외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렇게 난리법썩을 떨었던 것 아닙니까?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중에 조용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리빙스턴은 마음에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가장 엄숙하신 신사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하면서 안전하게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세 번째 종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가장 일깨우는 측면입니다. 그는 훔치거나 횡령하거나 착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은사를 땅에 묻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악하고 게으르다”고 심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나태’를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악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솔로몬 슈멜은 나태가 영적인 죄이며, 일곱 죄악 중 그리스나 로마의 악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영적 죄악으로서의 나태는 신체적 게으름과 다릅니다. 그것은 분주함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나태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 목적, 희망의 상실이 타인의 복리에 대한 무관심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길 때의 열심과 기쁨의 반대말입니다. 세 번째 종의 두려움은 결국 나태로 이끌어 그의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게 만들고,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최소한 은행에라도 맡겨 원금과 이자가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관리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나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종은 그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데 던져졌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 대한 비유입니다.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매우 중요한 심판 대상이 됨을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29:25

본문말씀: 누가복음 12:4-12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7월 초에 우리나라 주력 상품인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 중 3가지 품목을 규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8월 2일에는 화이트 리스트 즉,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 편의를 보아주는 국가들 중 한국을 제외시켰습니다. 많은 걱정과 논의가 한국에서 진행 중입니다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분간은 우리 국가의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시 똘똘 뭉쳐서 나가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며,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은 일본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을 주도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은 뒤쳐저 2류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여 두려워 하며 주저앉냐 아니면 긍정적인 자세로 맞서 나가냐 하는 것은 한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미국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 댄 잰슨(Dan Jansen)은 두려움 때문에 스케이트 경기에서 여러 번 실패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88년 캐나다 캘러리에서 있었던 동계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그 동계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누나의 죽음이 있었고 그는 슬픔을 안고 경기에 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 단거리 스피드 스케이트 챔피언이었던 잰슨은 당연히 500미터 혹은 10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간 그 두 경기에서 경기도중 넘어지는 통에 메달을 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기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경험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그 다음 동계 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력한 메달 후보였지만, 그가 나간 단 거리 경기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기에 관하여 댄 잰슨은 “경기 도중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하자면 나는 컨디션은 좋았다.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가 나를 붙들어 전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라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에서 온 두려움 때문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했는지 그는 드디어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10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존 맥아더, 고난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121-122)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 역시 마치 댄 존슨이 두려움과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좌절을 겪을 때 먼저 두려움이 솟아 오르고 그런 두려움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련을 예상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런 두려움이 마음에 팽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들어올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치를 따지는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12은 이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 하라: 가장 두려운 존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둘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생각하라 :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참새와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 역시 하나님은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릴 때에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한 마리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당 머리카락은 통상 140,000개라고 추정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을 전부 세신다는 그 전지하심을 늘 고려하고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치를 따져보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면 그 신자는 제대로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인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기억하라: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우리의 삶 범사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시인하고 기꺼히 그의 멍에를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의 의지 위에 두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믿어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시고 지혜를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베드로가 위험을 무릎쓰고 배 밖으로 나와 걸으려고 하였을 때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약속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데일 브루너 박사의 관찰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구했습니다. 베드로는 보장이 아닌 기회를 요청한 것입니다. 배 안에 머문 제자들은 선물로 받은 훌륭한 식기 그릇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벽장 속에 넣어둔 오토버그의 할머니처럼 배 안에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여 깨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없었습니다. 성장보다 안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지나가기를” 즉 모험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셨기에 그들을 피해 빙 돌아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인 믿음의 모험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왜냐하면 폭풍이 치는 밤에 갈릴리 바다에서 배 밖으로 나간다는 것의 위험과 고통을 이들은 잘 알았지만, 배 안에 머물었을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현재의 성장과 번영에 만족하여 거기에만 머물고, 새로운 혁신을 등한히 하여 파산한 기업이 한 둘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코닥이라는 회사입니다. 코닥은 전 세계 필름 산업을 장악한 엄청나게 수익성 좋은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아날로그 시대에 맞는 필름 산업에 만족하고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디지털 카메라는 코닥에서 제일 먼저 발명하였으나, 코닥의 임직원들은 그것이 자신의 필름 산업을 대체할 것을 두려워 하여 사장시키고 개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려워 하고, 혁신하기를 거절할 경우 결국은 개인이나 기업을 실패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험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우리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18:22).

배 붙박이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간단히 말한다면 ‘성장 불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도록 지음받았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원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며 성장의 기적을 기뻐합니다. 아기를 키우는 사람은 성장의 기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점점 아기의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에 흐뭇해 하고, 처음 “엄마”라고 말할 때 감격하게 됩니다. 성장의 기적을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체보다 슬픈 것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시작한 결혼 생활이 권태기로 접어들면서 애정은 식고 친밀감은 희미해진 부부를 보십시오. 문제를 짚어 내고, 고통에 직면하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그저 지루한 삶에 안주하여 익숙한 남남으로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정체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과 채워지지 않은 갈망, 이렇게 살면서 “나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야”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국 지루함, 즉 일면 영혼의 냉담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배에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세 명의 종을 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토버그 할머니처럼, 베드로처럼, 우리들처럼, 세 종은 후한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에 대한)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이 원칙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이 원칙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지난 달 연합뉴스를 보면 강도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던 A씨는 20대 중반이었던 2006년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습니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먼저 이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벌금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진 후에 나머지 돈을 1년도 안되어 도박과 유흥에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그후에도 계속 로또를 샀지만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돈이 곤궁한 그는 절도범으로 전락했고 13년 동안 계속 감옥을 들락거리며 다니다가 올해 또 영세 업주를 갈취한 죄명으로 구속 되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로또 당첨은 결코 생의 전환점으로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에 대한 세 가지 원칙 중 첫번 째는 “그분은 은사의 주인이시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은 자기 소유 중 첫째 종에게는 5 달란트, 둘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셋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15년치 월급과 맞먹는 돈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돈은 엄첨난 부를 의미했습니다. 이 주인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갑부였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재력가는 세 명보다 훨씬 많은 수의 종을 부렸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세 사람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종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생일대의 기회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세 종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오토버그 목사님은 기회에 관하여 좋은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학원에 다닐 때 사모님 낸시와 결혼하였습니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당시 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기 때문에 돈이 없었습니다. 신혼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해 떠오른 아이디어는 TV퀴즈 쇼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식은 커다란 빙고 판마다 무작위로 선택된 분야의 질문이 있고, 참가자가 답을 말하면 X나 O로 표시되었습니다. 물론 항목은 매번 바뀌었습니다. 첫 게임은 무승부로 끝났고 이어지는 서너 게임도 무승부였기 때문에 돈이 불어나서 수천 달러가 상금으로 걸렸습니다. 상대는 변호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그 퀴즈에서 아주 많은 승리를 거두어 보너스로 자동차까지 걸려 있는 행운의 사나이였으나, 오토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가난한 교회 목사인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 변호사가 한 가지 질문을 틀렸습니다.이제 목사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이긴다면 만져본 적도 없는 큰돈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에게 주어진 분야는 ‘혼합 주류’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른 칸을 선택하여 다음 질문에서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장 이기고 싶어서 그냥 그 칸을 택했습니다. 그러자 “두 잔의 스카치와 스위트 베르무스 반 잔 등으로 만든 술은 무엇입니까?” 술을 모르는 목사로서 알 수 있는 답이 아닙니다.오토버그 목사님은 진행자에게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오답도 정답도 말하기 곤란하군요.” 라고 대답을 하였고, 결과는 뻔했습니다. 결국 목사님 부부는 근처로 신혼여행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토버그 목사님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났지만 그만 놓쳐 버린 기억을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사 뿐만 아니라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하고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주인이 종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종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들의 운명을 단 한 번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즉, 세 종을 불러 놓고 어마어마한 은사를 준 것입니다. 첫 번째 종은 그의 행운을 깨닫고 ‘즉시’ 기회를 움켜잡았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절대 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움켜잡는 사람이 이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그분의 소유를 당신과 내게 맡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주인이 선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은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선택하십니다. 달란트라는 말 대신 우리의 인생을 넣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능력, 우리의 영적 은사들, 우리의 몸, 우리의 돈, 우리의 의지.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기회는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종은 그렇게 한 데 반하여, 세 번째 종은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다시는 받지 못할 최고의 선물을 받아서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망친 것일까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25:24-25).

환란 가운데 얻는 지혜와 안전

조선일보 5월 15일자 기사입니다.

“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누구의 경험도 배우지 않는다.” 라는 경귀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 민국은 마땅히 벨기에가 20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전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국가가 될 수 있고, 그 국민은 지혜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이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설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모두 패가하는 형제(잠18:8-9)라고 잠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태로울 때, 환난을 당할 때 아주 안전한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는 주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타개하여 나갈 지혜가 부족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때 당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거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주님께 바로 달려가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또 구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장 어려울 때가 주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대적이 능히 당할 수도 없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여러분은 먼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증거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루마니아에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59년 1월 재차 체포되어 두 번째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난1963년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이때 병이 악화되어 병감에 이송되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모든 죄수들은 큰 마당에 모였습니다.거기서 한 시간 동안 서서 몇몇 죄수들의 연극을 구경하였습니다. 그 연극은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으로, 사령관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교들이 손뼉을 치거나 웃을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사령관 알렉산드레스쿠는 거칠고 큰 목소리로 연극에 대해 가부간의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종교를 비판하는 표어들을 외워댔으며, 그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몇 사람은 범브란트 목사님을 껴안고 “이것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분위기는 엄중하였습니다. 사령관은 드디어 목사님의 이름을 불렀고, 목사님은 10여년 전에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 아내가 자신에게 “가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 주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때도 목사님은 연단에 올라가 체포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백의 눈동자들은 모두 목사님에게 집중하여 “저 사람도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인가?”하고 묻는 듯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 중령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교회나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이 연극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의 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습니다. “ 여기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쁘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그분을 나쁘게 말할 무슨 건덕지가 있습니까? 예수님 역시 무산층으로 목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벌써 몇 백 년 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유층들을 비난하셨는데, 예수님도 돈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회초리로 쫓아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같이 나누어 쓰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가난한 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성처녀 마리아가 부른 성모가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부자보다 높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모든 무산층이 단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산층 중에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조롱한다면 우리들은 단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이어 목사님은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재생시키는 데는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을 인용한 다음, 누구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대해 죄를 지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스 중령은 의자에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구두발로 땅을 차기는 했어도,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죄수들 역시 조용했으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아채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도 잊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없는 학교나, 만들어 낸 물건을 자세히 검사 하지 않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뒤 중령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레스쿠 중령님 당신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가에 대해 언급하고는 말을 마치자,죄수들에게서 갑자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죄로 목사님은 병감이라고 하는 성역에서 쫓겨나, 다시 신부들의 감방으로 옮겨졌을 뿐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리챠드 범브란트, 하나님의 지하운동(하), 162-65)

매일말씀나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뒤 갈릴리 바다 위로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여간 곤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폭풍은 예수님이 새벽 3시경 격랑을 치는 물결을 밟고 오셔서 배에 오른 뒤에야 비로서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기 전에 바람을 잔잔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림을 배워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으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폭풍을 사라지게 하실 때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믿음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노출시키며 맡기는 것입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매우 설교와 강의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명이었고 기쁨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던 35년 전 어느 주일 아침에 설교를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설교 도중 기절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후 1년이 지나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했을 때 10분이 지나 또 다시 기절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풀라고 조언을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는 것이 두려워졌기에, 그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이사야40:30-31을 기억하고 그 주일에 다시 설교를 하였고 끝까지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후 목사님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약간 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기절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이따금 섬광처럼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그런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이런 태도는 적어도 목사님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연습이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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