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이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사회적 태도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피, 또 하나는 참여입니다. 전자는 거부하는 마음으로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며, 후자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세상 쪽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인데, 결국에 가서는 그 책임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는다고 해서 벗겨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 우리의 손을 더럽히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 이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요동침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 그리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책임한 도피주의자들이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지도 모르므로 사회 참여는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엉터리 신학으로 우리의 양심을 달래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살고 사랑하며 증거하고 고난받고 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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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장
시편 6장은 오래 병들어 고통을 당하면서 대적들에게 여러 비방을 받는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비탄시의 일종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시편기자는 다윗입니다. 그의 병의 위중함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는 5절을 읽어 볼 때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통이 심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시편기자의 대적들이 와서 욥을 괴롭힘과 같이 시편기자를 괴롭혔다고 생각됩니다. 즉 시편기자가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든지, 죄악을 물마시듯이 마셨다든지 하여서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느니 아니면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든지 하는 정죄감을 계속 심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자신의 신실함을 굳게 믿었고 하나님의 응답을 외치면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면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김병년 목사님은 IVF 간사를 마치고 1990년대 말에 개척을 하셨습니다. 물론 1995년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지만, 셋째를 낳는 중에 그만 사모님이 뇌경색을 일으켜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2004년). 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수술하면 잘 해야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망설이던 끝에 식물인간이라도 함께 있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해 장모님도 목사님도 온 가정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지만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손가락을 약간 움직일 수 있고 눈썹을 약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록 회복되어 일반병실로 옮긴 뒤 다시 집으로 이동하여 그때부터 2019년인 지금까지 대소변을 다 받아내면서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회복을 재촉시키기 위해 발맛사지 열기구를 사용하다가 그만 화상을 입어 아내의 발은 한 쪽을 절단하게 되는 불행이 잇따랐습니다. 장모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한 번 밝혀보자는 말씀까지 하셔서 죄책감에 마음이 몹씨 서글퍼졌습니다. 이런 엎친데 덮치는 고난 가운데 기도원에 가서 위로를 받아 보려고 하였으나, 기도원 강사는 오히려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였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집은 뇌경색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설교 중에 한 것이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않고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15년간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식물인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천만원 하는 수술비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었으며, 자녀들 3은 전부 잘자라 주었고, 많은 재정적인 필요들을 하나님은 그때그때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당하는 불행과 고난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끝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얼굴을 보게할 줄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주시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면,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신뢰 속에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매일말씀나눔
창세기 2:15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전부를 인간의 지배 아래 놓으셨듯이, 이제 그분은 특별히 에덴 동산을 사람의 보호와 책임 아래 두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몇가지 일과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일은 일하는 자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창조성 안에서 즐거움과 성취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인간에게 통치권을 주셨다는 두 가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통치권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할 수 없는 자연지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창조적 일에 대한 우리의 잠재력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형상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우리 인간성의 불가결한 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실업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실업은 하나님이 주신 일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지런히 일하는 대신에 게으르다면, 또는 창조적으로 일하는 대신에 파괴적이라면, 우리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인간적 성취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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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시편 4편에서 다윗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에게 신뢰를 두는 자신이야말로 참된 안전과 기쁨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기쁨은 사람들이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수확할 때 가지는 기쁨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이미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미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요 주님으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 신뢰는 영영히 요동하지 않는 바위며 요새이고, 하나님은 필요를 따라 우리에게 양식을 내려주시는 분임을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삶에서 많이 체험하신 분 중에 대구 삼덕교회 고 홍대위 목사/선교사 가 계십니다(1973년 작고). 그분이 간증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930-40년대에 홍선교사가 중국 산동성 교주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홍선교사의 모친은 강원도 평창에 계셨습니다. 하루는 모친으로부터 편지가 오기를 손녀딸을 귀국시키라는 권고였습니다. 그 당시 홍선교사의 딸은 15세라 중국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중국교육을 받아 가지고는 한국인에게 출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친의 슬하가 적적하니 모친이 데리고 공부시키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타당하신 말씀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의 친모가 일찍 별세하였고 지금 계모 슬하에 있기 때문에 조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귀국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청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뒤 다시 버스로 평창을 가려면 당시의 돈 50원이 필요하였으나 아무런 여비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홍선교사는 이 사정을 주님께 기도드리고 돈 50원을 구했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스트럭이라는 여선교사가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는 독신 선교사로 홍선교사와 동역하는 사람이었으며, 가끔 홍선교사의 서재에 와서 함께 기도하곤 했는데 그날은 특별히 일찍 왔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편지를 한 통 주면서 “내가 돌아간 후에 뜯어 보십시오”하고 나갔습니다. 홍선교사는 곧 그 편지를 뜯어 보자,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 10원 짜리 지폐 다섯 장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돈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돈입니까?” 하니, 그녀는 말하기를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에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을 하니 나의 수중에 돈 백 원이나 여유가 있어서 이것으로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하였더니 목사님께 드릴 생각이 났어요. 목사님은 아이들도 많고 생활에 곤란이 많을 듯 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돈을 다 드릴 필요가 무엇인가 하여 드릴까 말까 하다가 밤이 새도록 잠을 잘 못잤지요. 오늘 새벽에야 결정하기를 절반은 목사님께 드리고 절반은 다른 일에 쓰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 절반 50원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나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그 말을 듣자 홍목사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제 저녁에 돈 50원을 주님께 구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급한 용도가 있었던가요?” “네 어제 모친의 편지에서 손녀를 보내라고 하시기에 그 여비를 계산하니 꼭 50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간구하였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면 그렇지” 란 소리를 연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무쪼록 안심하고 잘 쓰라고 부탁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여비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며칠 후에 청도항에서 배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태워주기 위해 딸을 데리고 기차에 올라앉아 교주에서 청도까지 가야만 하였습니다. 약 백리의 길이라 차 안에서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하던 중에 여비를 잘못 계산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50원의 여비는 청도로부터 평창까지 가는 여비요, 교주에서 청도까지의 여비를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차비는 1인당 1원이니 두 사람에게 2원이요, 또 청도에 도착하는 즉시로 승선하는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1박하고 내일 승선하게 되었으니 여관 숙박료가 또 1인당 1원씩이요, 본인이 돌아갈 차비가 1원이니 도합 5원이 부족하였습니다. 너무도 답답하여 딸에게“애! 너의 여비가 5원이 부족하구나” 하니 딸은 얼른 대답하기를 “청도에 가서 꾸세요” 하였다. 그러자 홍선교사는 딸에게 “애야! 나는 평생에 돈 꾸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하는 애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글썽하며 “그럼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애야, 우리 기도하자. 응? 하나님께 달라 하자!” 하니 픽 웃었습니다. 홍선교사는 웃거나 말거나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고 나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기차는 계속 달려만 가고 있었으며 얼마 후에 성양이란 역에 와서 정차하였습니다. 이 때 마침 청도 편에서 마주 오는 열차가 들어오더니 홍선교사가 탄 기차와 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게 되었습니다. 홍선교사는 우연히 차창을 열고 내어다 보는데 저 편에서도 창을 열고 이 쪽으로 내어다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홍선교사가 시무하던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홍선교사를 보더니 “목사님, 어디 가십니까?” 하길래 “네 이번에 내 여식을 귀국시키려고 청도로 데리고 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더니 자기가 탄 차에서 내려서 홍선교사가 있는 차창 앞으로 와서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5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너무 섭섭하니 과자나 좀 사 주세요”하였습니다. 홍선교사는 그 돈을 받을 때 두 눈에서 또 한 번 눈물이 흘렀고 딸도 울었습니다. 어린 소견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기묘하다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청도 항구에서 딸을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1전도 부족함이 없고 또 남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매일말씀나눔
일요일(4.14)부터 금요일(4.19)까지는 이른바 고난주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간은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 도중에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당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행위였음을 알려주셨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산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감람산 벳바게까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고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셔서 이를 타고 약 1킬로를 내려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 중에서 나사로를 살린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세계각지에서 모여들기에 주님을 환영하는 인파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를 데리고 성을 나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시자 그만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쫒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막11:12-19).
Continue reading “매일말씀나눔”두 범죄자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눅23:32-43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골고다에서 십자가 처형이 있던 그 날 예수님 혼자만 집행 당하신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의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범죄자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날 로마의 법정에서는 3명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한 명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고, 다른 두 명은 강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32-33).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미움과 조롱의 말이 터지고 그리고 절망의 모습이 드려지는 중에, 범죄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의 말과 정체성을 옹호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23:42). 사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의 모든 절차를 보면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그의 신뢰성을 추락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옷을 벗기고,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여놓았습니다. 범죄자 중 한 명은 함께 달린 예수님을 보고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등의 비난 섞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편에 달려 있던 범죄자가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겉모습은 범죄자와 같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800년 전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잘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53:9).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달려 있는 두 범죄자의 존재는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거부와 수용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수 많은 예와 비유들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대표적인 예들은 오른 편에 구분된 양들과 왼편에 구분된 염소들의 비유(마25:31-46),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를 가르는 비유입니다. (마13:47-50). 그러므로 이런 매우 극적인 순간에 일어난 결과를 보고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고난 주간을 보내야만 할 것입니다 (마틴, a visual guide to Gospel events 178-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