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이사야 11장 1-10

H.A. 아이언사이드 목사님은 밤마다 대도시 대형 홀에서 복음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종종 집회 장소 뒤편에 앉아 있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집회가 끝나기 전 그와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이 청년이 늦게 도착하여 할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았을 때 이야기 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자신을 무신론자로 부르지는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어떻게 해서 무신론에서 벗어나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가까운 곳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바로 저쪽에 있는 사람 덕에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전에 술집 주인이면서 알코올 중독자였으나, 복음을 깨닫고 삶이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은 여러해 동안 술집 주인인 그를 알았고,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술을 끊으려고 했던 많은 시도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술에서 놓여난 그를 보고 청년은 기독교가 진리일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신론에서 생각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 뒤 청년은 구약을 읽기 시작했고 신약은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고 하고 있던 차에 최근 들어 구약의 이사야서를 읽었으며 아름다운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이사야를 믿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사야 53장을 읽은 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습니다. 청년은 스스로 성경을 읽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두 읽은 청년은 갑자기 성경을 목사님의 손에 떨어트리더니 말 한 마디 없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청년은 3일이 지난 뒤에야 집회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 얼굴에서 달라진 표정을 보았고 사람들의 개인 간증을 하는 시간이 돌아왔을 때 청년은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신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시각에 노출되었고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어느날 이스라엘의 골고다를 여행할 때 그곳이 기독교가 시작된 사기극의 발원지라고 생각되어 분노와 저주를 터트린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여행 당시를 생각하며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지난 며칠 밤 동안 그때 골고다에서 저주한 이가 바로 내 허물로 생긴 상처를 치료하시려고 당하신 아픔을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림보, 법정에서 만난예수, 60-61).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품성을 변하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내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 기초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에 있습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10. 8 – 12

선다 싱은 인도의 시크교 집안에 태어나 열다섯 살 때 환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했고, 그 사실을 즉시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후에 “가족 중 일부는 내가 미쳤다고 했고 일부는 내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내가 겪었던 비참한 불안에 비하면 박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환난과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 후 선다 싱은 집을 떠나 순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없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펴냈는데, 취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과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삶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그리스도 없는 불신자들” 2장은 “그리스도 있는 불신자들”은 침례는 받지 않았으나 ‘비밀리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말하고, 3장은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체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그들은 속 빈 강정이요 영혼없는 몸과 같다”고 쓰고 있습니다. 4장은 “그리스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적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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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창세기 26:1-6

논어 선진편을 보면 공자께서 제자 안연과 자공에 대하여 평가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는 도에 가까웠으나 자주 끼니를 굶었다. 사는 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렸으나 예측하면 자주 맞았다” 이에 대하여 논평을 하는 논어 주석책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없다면 흔들리기 쉽다. 하지만 안연은 단사표음의 가난에도 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공은 달랐다. 가난한 장사꾼 출신인 그는 재주가 있고 명민했으며 재화에 밝고 헤아림이 뛰어났다. 그 때문에 명을 평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화 증식에 마음을 두었다. 앞을 내다 보고 정확하게 투자했기에 예측이 자주 맞아 부유해질 수 있었다. 자공이 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범조우는 “부귀재천인데 자공은 재화 늘리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기에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 보았다. 자공의 능력은 드문 것이지만 안연이 천명을 편안하게 여긴 것과 달리 자공은 천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안연과 자공의 차이다” 논어 전체는 어떻게 학문을 하고, 어떻게 의를 행하고,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이며, 어떻게 사람들을 분별하는가, 군자는 어떤 사람이고 소인은 어떤 사람인가 등의 문제를 다루지 여러분 논어의 어디를 읽어도 축복을 받는 비결 등은 써있지 않습니다. 다만 신실하게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는 방법만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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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10. 1-5

‘그리스도와 함께’ 이 말은 즉시 장례식과 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는 말씀이 비문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때로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로 줄여서 쓰기 때문입니다. 2세기전 사셨다가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의 시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 주님, 제가 죽은지 사는지는 제가 걱정할 바 아니옵니다.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만 은혜로 저에게 허락하소서./ 제가 지날 죽음의 어두운 방 주님도 친히 지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나아오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제가 그 생을 잘 모르고 제 믿음의 눈이 침침하여도, 주께서 다 아시니 족하오며 주와 함께 있으리니 족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류를 가리킵니다. 사실 그때 누릴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비하면 지금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는 차라리 부재에 가깝습니다. 그 임재 안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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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을 입자

에베소서 4:21-24

평양 남산현 교회의 전설적인 전도왕 김세지(1865-월남?) 전도부인은 1865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한 뒤 우여곡절 끝에 1888년 재산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이자 관청에도 출입한 김종겸(金宗謙)과 재혼하였다. 한편 홀은 1893년 한국인 조사 김창식과 함께 평양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열매가 오석형이었다. 오석형은 평양에 들어와 노름꾼으로 지내다가 전도를 받고 새사람이 된 사람으로 김종겸의 팔촌 아우뻘이었다. 그 오석형으로부터 ‘예수 믿으면 남편의 외도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가 말씀을 듣는 동안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영생’을 사모하는 동시에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믿지 않던 남편도 신비체험을 한 뒤 1895년경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갔다. 이후 김세지는 1896년 미감리회 선교사 노블(W. A. Noble)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지(世智, Sadie)라는 이름을 얻었다. 1899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소속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를 조직하였고, 1916년에는 과부회(寡婦會, Widows Relief Association)를 창설하였다. 1919년 11월 장로교와 감리교 여성들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재무부 부부장 직책을 맡았다. 1920년 일제 경찰에 의해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21년 석방 후 보호여회를 재건하여 70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보호여회 기금으로 1923년 평양 칠성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 1925년 전도부인직에서 은퇴하였으며 광복 후 월남하였다. 말년에는 사위 변홍규 목사의 집에 기거하다 별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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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읽기

2018. 9. 27-28

진정한 자유와 만족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그분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내 신념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통제가 가해지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믿을 바를 일러주신다면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행동방식을 지시하신다면 우리의 의지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와 자신의 자유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란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진리의 권위입니다. 생각이 거짓을 믿는다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망상과 오류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사고란 진리를 믿을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문제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이든 성경 진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깨닫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서 우주 여행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둘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만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생각이 진리의 권위 하에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것처럼 비슷하게 의지(뜻)도 오직 하나의 권위 아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우니 그것은 바로 의의 권위입니다. 의지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면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아집과 정욕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기준에 순종할 때에만 자유롭습니다. 누군가 왜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재의 순리라고 답할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진리와 선이시며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분의 진리를 탐색하고 믿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또 우리를 도덕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덕법은 이질적인 기준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꼭 맞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과 성경에 ‘기록하신’ 도덕법은 그분 자신의 속성인 영원한 의와 근본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는 그분의 진리를 믿어 자유를 얻고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법에 순종하여 자유를 얻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꼭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는 데 있지 않고 달게 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아래’ 우리는 가장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1-32 사역)

수요일터예배

히브리서 11:1-6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선교사 캠벨 부인에 대한 기념비에는 “배화여학교, 종교교회, 자교교회의 설립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캠벨 부인은 44세인 1897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후 1898년 고간동으로 선교부를 이전하자 여기서 여학생 6명으로 기숙학교를 시작했으며 점점 성장하여 1903년 학부의 인가를 받아 윤치호를 통해 “배화”란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이 배화여학교이다. 이와 동시에 1900년 4월 15일 부활 주일을 기해 잣골교회를 시작했고 이어 1901년 가을 벽돌로 ‘루이스워커예배당’이 건축되었으며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그러다가 1908년 4월 종침교 건너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나가면서 종교교회라고 불렀으나, 고간동에 그대로 남아 있던 교인도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종침교 다리 아래로 나온 교인들은 ‘종교교회’를 만들었고, 남은 교인들은 여전히 고간동에서 ‘잣골교회’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일부 교인들이 옮겨가지 않고 ‘잣골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계층간 문제’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교회로 나간 교인들 중에는 양반과 지식인이 많았고, 잣골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은 대부분 하류층 사람들이었다. 선교부에서도 1908년 연회부터 이 두 교회를 별개 교회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던 잣골교회는 1910년 어간에 통인과 내시들이 주로 살던 일종의 소외 계층 지역이었던 창성동의 작은 한옥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12년 커다런 ‘내시 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자교교회’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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