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한 말로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합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 즉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는 모성형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모성형 리더십은 서비스 정신이 근간으로서, 그 바탕에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고객과 조직 구성원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최고경영자는 마치 엄마가 되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원의 신체건강은 물론 정신건강도 챙겨 주고, 또한 윽박지르며 목표 달성을 독촉하기보다 임직원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문 경영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명가의 초석을 쌓은 전통 사회의 아버지들은 통상 완고하고 권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오히려 배려하고 섬세하게 돌보는 모성형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자로 퇴계 이황과 청계 김진을 들고 있습니다.

퇴계는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서도 자녀뿐만 아니라 먼 친인척의 자제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과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기에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습니다. 그가 돌본 후손은 모두 9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후손이 있으면 고기를 선물하면서까지 학문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퇴계가 맏형의 외손자 민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시원한 밤 책 읽기 좋을 때다. 시간을 아껴라. 좋은 계절에 고요한 절에서 힘써 공부해 주기 바란다. 술 한 병, 닭 한마리, 생선 한 마리, 고기 한 덩어리를 보낸다.” 과연 큰형의 외손자까지 챙기는 자상한 할아버지입니다. 한편, 의성 김씨를 일으킨 청계 김진은 청운의 꿈을 접고 백년대계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한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1882yh&logNo=30124803945&parentCategoryNo=&categoryNo=99).

청계는 퇴계에게 자신의 다섯 아들을 제자로 보내 그의 학문뿐만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흡수하도록 했습니다. 퇴계의 리더십으로 회자되는 게 ‘너그러움’입니다. 그래서 퇴계 문하에는 늘 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청계는 8남매를 남겨 두고 그의 아내가 죽자 새장가도 가지 않고 자녀 양육과 함께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청계의 노력으로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가문의 기초를 내리기 시작해 500년이 흐른 지금도 영남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과 그 후손들이 남긴 종택은 무려 여섯 곳에 이릅니다. 종택은 동학혁명이나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로 인해 불에 타 없어진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종택은 단 한 곳도 불에 타지 않고 6곳 모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청계가문이 그만큼 지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가문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172-75).

여러분 어떻게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청계 가문이 그런 명예를 남겼더라도 거기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야말로 참다운 진리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는 말씀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게이트웨이 침례신학대학원 총장인 제프 욜즈 박사는 이런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암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교회를 다니는 노인부부 세쌍이 새벽에 병원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거죠?” 라고 욜즈 박사는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그들의 대답은 욜즈 박사의 영혼을 불태웠고 그분의 눈에 눈물을 쏟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의미 있는 관계가 붕괴될 때, 비록 여러분이 그 사람의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이때가 우리의 사랑의 섬김이 필요할 때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그들은 당신의 인도를 필요하고 있는 것입니다.(뱁티스티 151권, 90-91)

매일말씀나눔

2018.7.30 – 8. 3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집을 짓는 자로되 다만 각자 현장에 이를 때 건축의 단계가 다를 뿐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기초)를 닦아 두는”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닦아 둔 기초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 이후에 아볼로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가 닦은 기초 위에 집을 세웠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재료를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 즉 온갖 거짓된 가르침은 타버릴 것이요, 오직 “금이나 은이나 보석” 즉 그리스도의 바른 가르침만이 심판 날에 마지막 불의 연단을 견딜 것입니다.(참고 고전3:10-15). 바울은 “다른 터는 없다”고 했고, 베드로는 “다른 이름은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우리는 그 이름 위에서 쉬고 그 기초 위에 짓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도 유다의 말씀을 가지고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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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5:1-10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62살의 나이로 1999년 5월 6일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2003년까지 4년 동안 걸어서 중국의 시안에 도착했습니다. 도합 12,000킬로미터의 실크로드 전 구간을 도보여행했습니다. 한 번의 도보여행으로 전 구간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 하였습니다. 이런 도보여행은 용기와 의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저자 역시 장염에 걸쳐 죽다 살아난 경험, 여러 번이나 도적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우, 탈수 증세로 여행을 일시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들을 포함해서 결코 쉽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걷는 즐거움 못지않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열망이 자신에게 길을 떠나라고 부추긴다”라면서 도보여행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 등에서 30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60살에 정년퇴직했지만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들이 독립해 떠나가면서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자살에 실패한 뒤 파리를 떠나고 싶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300킬로미터를 걸었고, 이어서 이 거리의 십 배에 해당하는 실크로드를 걸어 종단하기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간을 정해 단 1킬로미터도 빼먹지 않고 걸어서 실크로드를 여행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의 삶을 도보여행을 통해 재활한 것입니다. 올리비에는 10대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달리기와 걷기를 시작해 결국 건강을 되찾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할 때도 틈나면 걷기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뉴욕 마라톤 대회를 포함하여 마라톤 대회에 20번 넘게 참가했고, 100킬로 행군도 수차례 참가했다고 합니다. 도보여행을 통해 “그 길에는 지식과 문화와 토양이 된 육체와 정신, 근육과 머리를 위한 양식이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는 실크로드 도보여행을 하면서 원칙을 하나 세웠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걷기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도보여행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포기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요,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도보여행은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고, 그렇게함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고, 자신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함께 감동을 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원천이 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힘에 착안한 올리비에는 ‘쇠이유’라는 비행 청소년의 사회복귀를 돕는 협회를 창설했습니다. 걷기를 통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년 소녀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협회의 목적입니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희망 없는 젊은이들은 범죄에 빠져 들기 쉽습니다. 쇠이유는 교도소나 수용 시설에서 생활한 청소년들이 낯선 나라를 도보여행하면서 재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도보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짝을 이뤄 한 명의 인솔자와 함께 떠나 2,000-2,500킬로미터를 4개월 동안 걷는 과정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 사항은 단 한 가지로써 MP3와 같이 녹음된 형태의 음악을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텐트를 치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합니다. 그리고 걷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목적없이 범죄로 빠져든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도보여행을 통한 치유의 힘입니다. 올리비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기에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그것은 아름다운 노년의 도전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285-91).

여러분은 삶의 목적으로 무엇을 정하거나 정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사실 것입니까?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정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목표로 정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은 어려움과 변수가 작용하고 있어 믿음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 가운데서 일하여야만 합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적이 아니고 아가페적입니다. 에로스적은 사랑하는 대상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는 짓이 귀엽기 때문에 사랑하고, 남자가 보기에 상대방 여성의 외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끌리며,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하여 주기 때문에 나도 친절히 대해 주는 것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적 사랑은 사랑할 가치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대해주고, 도와 주며, 선한 말로 위로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적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창조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가페적 사랑의 목적은 단순히 선한 대우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바꾸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행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분을 따라가면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돌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를 행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7. 23-27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48년 믿음 때문에 루마니아의 어느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심한 고문과 심문, 어쩌면 수년 동안의 감옥생활과 죽음까지도 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견딜 만큼 자신의 믿음이 강한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성경에 하루 하루를 위해서 366번이나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적혀 있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365번이 아니고 윤년까지 생각해서 366번이나!’ 그리고 바로 그 날이 2월29일이었는데, 이 사실이 더 위안을 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목사님은 14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고 출감하였고 2001년 92세의 일기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언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신 이 언약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보장됩니다. 이런 믿음의 기초가 있기에 우리에게는 믿지 않을 핑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488장)라는 찬양은 19세기 중엽에 26년간 영국 서섹스 호셤에서 사역한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모트가 지은 찬송시로 이런 진리를 명확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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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기대 설립과 김진경 총장의 “사랑주의”

마태복음 5:38-48

조선족 허련순 작가가 쓴 김진경 총장의 『Loveism 사랑주의』 345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김 총장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서 국제대학을 성공시킨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것이 실현된다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루어 내고야 말았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결코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이는 오로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섬기는 ‘사랑주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결실일 뿐이다.”

김진경 총장은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북한을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왔다. 쌀 천 톤을 북한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을 위시로 20여년 동안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 주는 일을 계속 이어 왔다. 그러나 북한의 문을 열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김진경 총장은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는데 이른바 ‘연금 사건’이 그것이다. 북한 주민과 어린들을 도와주는 일을 조심스럽게 이어 가던 1998년 9월 12일 김진경 총장은 북한 당국에 구속되었다. 그 발단은 김 총장과 함께 북한을 돕던 조선족 학자 이명숙 사장이 북한에 연금된 사건이다. 북한 당국은 이명숙 사장을 잡아들여 이 행위의 배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자, 김 총장은 죽음을 불사하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결단을 내렸다. “나를 잡기 위해 모두들 잡아들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가야겠네”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김 총장은 북한에 들어가서 체포되었다. 북한 당국은 북한 체제 전복 음모죄’를 적용하여 김 총장을 구속했다. 즉, 김 총장이 그동안 제공한 식량을 비롯한 많은 지원 물자가 한국과 미국 정보부의 자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김 총장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하려던 죄, 중국식 개혁개방을 유도한 죄, 북한 인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죄’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가 당한 일인 만큼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김 총장은 유서 4통을 썼다. 하나는 학교에 보내는 편지로서 “총장이 죽었다고 절대 곡이나 장례식을 하지 말고 천국으로 가는 송별식을 하고 풍악을 울리라”는 당부, 두 번째로 아내에게 쓴 편지로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과 정리할 부분들에 대하여 썼다. 세 번째로 미국 정부에 나는 오해로 죽지만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천국으로 갔으니 보복하지 말라는 편지를 썼고, 마지막으로 북한 당국에 자신의 육신을 평양의과대학에 기증하여 사용하고, 장기는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이식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서는 김진경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던 같았다. 결국 김 종장은 연금된지 42일 되는 날에 석방되고 중국 베이징 공항에 내릴 때 어떤 기자회견도 하지 않은 채 비밀 출구로 가만히 빠져 나왔다. “내 조국, 내 민족의 일”을 언론에 나서서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학의 한 집회에서 김 총장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했다 “나를 억류하고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마저도 용서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이런 김 총장의 한결 같은 사랑의 행보가 드디어 결실을 맺게되는데 2001년 1월 북한이 먼저 김 총장에게 연변과학기술대학과 똑 같은 대학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고 8년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2009년 9월 16일, 마침내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준공식 및 총장 임명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25일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이 강의를 시작했다. 김 총장은 자신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며 사랑주의자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복음에 그 기초를 둔 이 사랑주의가 두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 각각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여 많은 혜택을 줄 수 있었다.

매일말씀읽기

2018. 7.16-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28:16). 이사야가 믿음을 촉구한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을 언급한 이사야의 다른 구절들과 연결하여 믿음의 도를 설명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8:14-15). 그래서 이사야 28장과 8장의 말씀을 함께 놓고 보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기촛돌이거나 아니면 걸림돌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반석이시며, 우리는 그분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거나 아니면 그분한테 부딪쳐 정강이가 깨지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시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는 구원 사이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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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고린도전서 13:13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가?” – 사랑을 실천할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1990년은 반도환경㈜의 이승율 회장은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이해에 교회를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0월 초에 베이징 아시안 게임 기간에는 존경할만한 크리스천 지도자를 한 분 만났다. 이 당시 그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골프장 사업을 하기 위해 오가던 때였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고 해봐야 베이징과 상하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두 곳뿐이었다. 칭다오시와의 협상이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수소문 끝에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에 갔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돼 있었기에, 이 회장은 먼저 면담하시라고 양보하고는 옆자리에서 경청했다. 이때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이 회장을 세차게 흔들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 옌지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교육을 통해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으니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유럽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생활한 시민권자였다. 대학교수를 지내고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했다. 그는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초빙교수로 베이징에 와 있는 동안 조선족들이 사는 옌지·지린·창춘·하얼빈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언어와 민족 문화를 보존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농업학교를 설립·운영했던 선친의 유업을 쫓아 이 지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 계획을 갖게 됐다.

이미 그는 1989년 5월 지린성과 옌지시 정부의 협력하에 중외 합작 형태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 (1년 후 옌볜과학기술대로 승격) 설립을 허가받고 학교 부지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는 한·중 수교전이라 중국에 외국인이 대학을 세우기 어려운 여건에도 기차로 30여시간 되는 거리인 북경과 연길을 수십차례 오가며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김총장의 열정이 이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 회장에게 비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지만 이 회장에겐 그와 같은 멋진 꿈이 없었다. 그 점이 이 회장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비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때 이회장의 나이 대략 45세정도였다. 서울에 돌아온 뒤 이 회장은 잠시 자신의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 그러다 2주 후 서울에 출장 온 김진경 총장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대학 설립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생애 처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도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김 총장은 서울에서 옌볜과기대 건립후원회를 결성하고 모금 활동에 들어갔으며, 이때 이 회장은 김 총장의 요청으로 남서울교회 당회장실에서 열린 후원기도회에 참석했다. 홍정길 목사를 그때 처음 만났다. 이어 고 옥한흠 목사, 곽선희 목사가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열심히 추진한 결과 1993년 9월 드디어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1995년 7월 전문과 2년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국민일보, 이승율의 간증- 연변과기대김진경총장과의 만남).

지금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부하게 하여 줄려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