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8.20 -2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참고 갈 3: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인 치심’이란 가축이나 노예들에 대하여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불 인두로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도장을 찍어 구별하시는 표입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 잎이 흔들림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성령님 역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Cor. 12:3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가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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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1:15-23

권순영박사는 전공이 식품영양학입니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5년 네슬레에 입사하였습니다. 거기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던 중 2003년 이른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봉사하러 간 지인이 전화로 이렇게 알려왔어요. ‘영양실조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달란트가 필요한 때입니다’라고요. 친한 이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두려웠습니다. 외국인들도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가는 곳이니 말이지요.” 2003년 5월, 결국 휴가를 내고 아프간으로 갔다. 그리고 보았다. 암담, 처참, 속수무책…. 실상을 읊기엔 어떤 형용어도 빈곤했습니다.” 진단을 해 보았더니 그 원인은 단백질 부족이었습니다. 더구나 아프카니스탄 백성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여 외국의 도움과 원조를 받는 것을 내심 반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립할 수 있다는 끈질긴 권박사의 설득에 아프카니스탄 정부는 순응하여 콩을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콩이 재배될 수록, 아프카니스탄의 백성들에게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일년에 5주정도 휴가를 내어 봉사하였으나, 도저히 수요를 당하지 못하여 2008년 사표를 낸 뒤 전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고, NEI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하여 여러군데서 기부를 받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콩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 콩만 보급하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였습니다. “왜 콩을 심어야 하는지, 콩의 영양학적 가치는 무엇인지를 일일이 교육시킵니다.”라고 권순영 박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순영박사의 성공비결은 아프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데 있습니다. 콩 프로젝트가 아프간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 이유에 대하여 이곳의 수석 경제 고문인 자킬리월 씨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많은 선진 국가들이 우리를 도우러 와서는 ‘아프리카에서 성공한 모델’이라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대개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권 박사는 맨몸으로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기르지도, 먹어보지도 않은 콩을 경작하다니요. 그런데 그는 우리와 똑같은 심정으로 고심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창조했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때 권순영 박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우리도 한국전쟁을 경험해서 헐벗고 굶주리다가 죽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그 경험을 안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경계심을 풀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봉사의 정신은 어떻해야 함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아프가니스탄 백성들의 건강을 증진하고 영양을 보급하였다고 그들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들은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습니다. 아니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본래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셨지만 도성인신하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신 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주가 끝날 때까지 다스리셔서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복종케 하는 중에 있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엄청난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말씀나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신령한(영적인, spiritual)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친밀한 인격적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주실 복을 모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들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 주된 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새로운 신분의 복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사회에서 ‘신분’이라는 단어는 중요합니다. 대부분 우리 자아상은 사회적 신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직함과 감투와 큰 집과 좋은 차와 배지 그리고 정복을 좋아합니다. 또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을 좋아하여 대화 중에 은근히 그들의 이름을 ‘흘리곤’ 합니다. 그것들이 다 신분의 상징물이며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신분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이 아닌 영적인 신분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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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한 지문을 남겨라 – 태극문양을 남긴 일제시 건축가!

골로새서 3:17

1930년대 들어 태화여자관 사업은 더욱 확대되어 매일 500명이 넘는 이용회원을 수용하기엔 공간이 좁았고 조선식 기와집들이 서구적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하기에는 불편하였다. 결국 선교부와 태화 직원들 사이에 오랜 논란 끝에 ‘사업을 위해 유적을 허물기로’ 하였으며 2년 공사 끝에 1939년 11월 연건편 718평 규모의 3층짜리 석조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을 지으면서 백년 넘은 옛 건물과 정원이 헐렸고 유치원으로 사용되던 ‘별유천지 6호실도’ 헐렸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강윤(1899-1974)으로 그는 동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한 건물을 설계했으며 숨겨진 아름다움은 3층 예배실에 있었다. 여기에 강윤은 태극문양을 새겨 넣었다. 숨은 그림 찾기 처럼 눈여겨보야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일제 말기 상황에서 꺾이지 않는 민족의지를 보여주려는 건축자의 숨은 의도를 담고 있다. 강윤은 한국 근대 건축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3.1운동 당시 공주 영명학교 졸업반 때 공주지방 만세시위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뒤 윌리엄즈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부리스라는 미국인 건축가를 만나 건축을 배웠다. 평신도 선교사로 일본에서 ‘오미형제사’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부리스는 강윤을 한국 대리인으로 내세워 한국에도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1933년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강윤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신촌 이화여대 본관과 강당, 음악관, 공주 공제의원, 신세계백화점, 수유리 한신대학교 본관, 흑석동 중앙대학교 본관 건물, 세브란스 병원, 연희전문학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생 중학교, 철원제일교회등을 지었다. (이덕주, 종로 선교 이야기, 42-54). 건축가 강윤과 같이 우리는 말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각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매일말씀예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참된 의미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이 연합의 의미에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연합을 지각하고 체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연합 자체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의 파장과 책임을 두고 논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놓고 갑론을박한다는 것은 기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천주교와 그리스정교회의 전통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적을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개신교는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교파는 성령의 권능을 중시하며, 자유주의 전통은 예수님을 본질상 “남을 위한 인간”으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구제 사역과 사회 정의의 추구를 참 제자의 특징으로 여깁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대한 신약성경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이며, 세례와 신조와 행동은 그 결과로 자연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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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한 말로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합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 즉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는 모성형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모성형 리더십은 서비스 정신이 근간으로서, 그 바탕에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고객과 조직 구성원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최고경영자는 마치 엄마가 되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원의 신체건강은 물론 정신건강도 챙겨 주고, 또한 윽박지르며 목표 달성을 독촉하기보다 임직원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문 경영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명가의 초석을 쌓은 전통 사회의 아버지들은 통상 완고하고 권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오히려 배려하고 섬세하게 돌보는 모성형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자로 퇴계 이황과 청계 김진을 들고 있습니다.

퇴계는 대학자이지만 그 바쁜 와중에서도 자녀뿐만 아니라 먼 친인척의 자제들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과 함께 지내며 학문을 닦는 것을 중시했기에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습니다. 그가 돌본 후손은 모두 90여 명에 달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후손이 있으면 고기를 선물하면서까지 학문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퇴계가 맏형의 외손자 민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시원한 밤 책 읽기 좋을 때다. 시간을 아껴라. 좋은 계절에 고요한 절에서 힘써 공부해 주기 바란다. 술 한 병, 닭 한마리, 생선 한 마리, 고기 한 덩어리를 보낸다.” 과연 큰형의 외손자까지 챙기는 자상한 할아버지입니다. 한편, 의성 김씨를 일으킨 청계 김진은 청운의 꿈을 접고 백년대계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한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1882yh&logNo=30124803945&parentCategoryNo=&categoryNo=99).

청계는 퇴계에게 자신의 다섯 아들을 제자로 보내 그의 학문뿐만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흡수하도록 했습니다. 퇴계의 리더십으로 회자되는 게 ‘너그러움’입니다. 그래서 퇴계 문하에는 늘 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청계는 8남매를 남겨 두고 그의 아내가 죽자 새장가도 가지 않고 자녀 양육과 함께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청계의 노력으로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가문의 기초를 내리기 시작해 500년이 흐른 지금도 영남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과 그 후손들이 남긴 종택은 무려 여섯 곳에 이릅니다. 종택은 동학혁명이나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로 인해 불에 타 없어진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종택은 단 한 곳도 불에 타지 않고 6곳 모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청계가문이 그만큼 지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가문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최효찬,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172-75).

여러분 어떻게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청계 가문이 그런 명예를 남겼더라도 거기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야말로 참다운 진리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 주겠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는 말씀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게이트웨이 침례신학대학원 총장인 제프 욜즈 박사는 이런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암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교회를 다니는 노인부부 세쌍이 새벽에 병원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거죠?” 라고 욜즈 박사는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그들의 대답은 욜즈 박사의 영혼을 불태웠고 그분의 눈에 눈물을 쏟게 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의미 있는 관계가 붕괴될 때, 비록 여러분이 그 사람의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이때가 우리의 사랑의 섬김이 필요할 때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그들은 당신의 인도를 필요하고 있는 것입니다.(뱁티스티 151권, 9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