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3:14-21

에드워드 톰슨은 뉴욕치안판사였지만 법보다 믿음이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변화시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만난 메리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당시 메리는 55살의 술주정뱅이 여자였다. 톰슨 판사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몽롱한 눈으로 법정에 선 메리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온갖 범법행위를 하는 통에 무려 53번이나 재판을 받았고 6번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54번째 선고를 받기 위해 톰슨 판사 앞에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리가 전과 달리 선처를 부탁했다. 메리는 한 노신사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절히 호소하는 메리의 모습에 톰슨 판사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보고 관찰을 선고했다. 단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께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메리는 변화되었을까요? 아니면 더 풀어진 모습으로 다시 톰슨 판사 앞에 나타날 것인가? 톰슨 판사는 재판에 임할 때마다 혹시 메리가 다시 잡혀오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졸이며 지켜봤다. 그러는 한편 매주 메리의 보호관찰관과 상담했으며, 메리가 다행히 교회 예배에 계속 출석하고 있으며, 교회 식구들과도 잘 교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톰슨 판사가 외부 업무를 다녀왔을 때, 법원 직원으로부터 그의 부재 중 업무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메리가 왔었다는 말을 듣자 톰슨 판사는 매우 실망했었지만 메리가 잡혀 온 것이 아니라 뉴욕을 떠나가게 되어 톰슨 판사에게 고맙다며 인사하고 싶어 왔다는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는 그 노신사와 결혼했고, 메리의 보호관찰관은 메리의 바뀐 모습에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법원 직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메리는 이제 이전의 메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 보면 대개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지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리처럼 통제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든지 간에 그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 보면, 대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삶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메리는 이전 메리가 아니에요, 결단의 순간 116-118).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거룩한 도덕법을 지킬 수가 없어 모든 사람은 범죄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절망에 빠진 인류를 불쌍히 여겨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신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들으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요3:14-17).

매일말씀나눔

2018. 6. 11 – 15

희열이나 고통,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 선이나 사랑의 순간에 곁으로 지나가시는 그분을 잠깐 보기만 해도 우리는 충만한 초월적 실체에 전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일종의 중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영광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솜씨를 통해, 고결함과 타락성이 공존하는 인간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갖가지 반응을 통해 하나님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보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가리켜 보이는 높이와 깊이는 우리가 오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동시에 좀 더 인간적인 중보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짐작한 실체가 아무리 깊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무한한 타자이신 까닭입니다. 이 타자가 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 한 번 오신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을 때였습니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은 인간의 형체를 입은 참된 ‘영광’, 인격적 존재 본연의 광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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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믿는 신자의 가치관

마가복음 12:28-34

김형석 교수님이 CGNTV에서 간증한 내용입니다. 어느날 중고등학교 교감이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교수님으로부터 기념강의를 듣기로 하여 교장회의에서 결정을 하고 교섭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스케줄을 보니 어느 그룹에 그날 오후에 강연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못가겠다고 하니 제자가 아주 실망한 표정이었습니다. 너무 실망한 표적이었기에 마음이 아파서 조금 기다려보아라 내가 연락한 뒤 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그룹의 인사부장에게 사정이 이러한데 허락해주면 내가 대구에 갔다가 오겠다고 하니 인사부장이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옛날이어서 아침에 일찍 갔다가 서울에 도착해 보니 저녁이 되어 어두컴컴하였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정말 인생을 잘못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돈을 목적으로 일을 했는데 한평생을 다 그렇게 살면 돈 때문에 내 인생을 다 바치고 만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 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무슨 일이 더 소중한가 일의 가치를 찾아서 일을 해야겠다.” 그 다음부터 돈 보다는 일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래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더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짧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길게 보니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일하니 수입도 늘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삶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80세 즈음 되니 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여러가지 경제적인 수입을 주었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냐? 나를 위해서는 적게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많이 베푸는 사림이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부자는 누구냐? 돈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고 많이 주는 사람이다. 많은 재산을 줄줄 아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사는 사람이다. 하늘나라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느 서기관이 어느 계명이 크냐고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첫째는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서기관은 주님의 이런 가르침에 동의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제사보다 더 낫다고 대답하니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랑은 결국 주는 것이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그 재물과 능력을 빼앗아 자신의 가치를 늘리는 쪽으로 살아가는 에로스적인 삶의 방식에서 무엇이든지 주는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방식으로 삶을 전환하여야만 합니다. 그러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통지를 확장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마음에 각인을 시켜야만 하겠습니다.

매일말씀나눔

주님은 유대교의 기성 체제를 주저하지 않고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순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들(장로들의 유전)을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 (막 7:1-13). 또한 주님은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 데도 거침없으셨으며,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던 계층들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허용되지 않던 여인들과의 공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이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였고, 제자들 역시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 어린아이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을 던진 나병환자를 만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관습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마음과 양심을 매어 두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비평하는 데 있어서는 급진적으로 되심으로 보수와 진보를 독특하게 결합시키셨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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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씨를 뿌려라

누가복음 8장 4-15

빌 하이벨즈 목사님은 집에서 쓰레기 처리 담당이어서 매주 화요일 밤마다 쓰레기 수거용기를 끌고 가서 길가에 내놓는다. 그러면 수요일 아침에 쓰레기차가 지나간다. 몇 년 전에 한 남자의 가족이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남자도 화요일 밤마다 쓰레기 수거용기를 끌고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주 내내 그와 목사님이 나오는 시간이 정확히 일치했다. 정각 9시에 나가면 여지 없이 그가 수거용기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어느 화요일 밤, 저 멀리서 그가 오는데 저편으로 건너가라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강하게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사님은 단순히 자신의 소개만 하고 끝나더라도 그에게 다가가기로 결단하고는 “자 가보자”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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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읽기

2018. 5. 21 -25

지성과 사랑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성과 감정 모두 본래적 인간의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도 아니며 메마른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따듯하고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우리에게 열리게 되면 우리는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분노하거나 사랑하거나 경배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부활절 오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를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라지자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그 두 제자는 그날 오후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느낌을 마음이 뜨거워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을 영적으로 뜨겁게 만들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풀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풀어주시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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